중학생일때 나도 구로공단 삼립빵공장밑에 살 시절 한아이가 학교을 나오지안아 선생님이 찾아 가보라 해서 난곡을 감 버스종점에서 내려보니 거기서부터 물지게를 들고 올라가더만 그물에 흘린것이 얼어 빙판 그언덕들이 그냥빙판이었네요 진짜 관악산 골짜기 산꼭대기 끝에 산 친구임 그애 어머니는 일본인 어머니 병들고 숨을 못실정도 아파하심 그애는 가출한 상태고 난 정말 충격 먹음 정말힘든 시절 있였네요
전 지금도 신림7동에 살고 있습니다. 7동은 단독, 다가구 주택지역과 달동네라고 하는 두지역으로 돼있었어요 지금 화면에 나오는 곳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있지만 국민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던 그곳을 아직도 그리워합니다. 저때까지는 이웃사촌이라는게 뭔지 알던 시절이였는데...
나는 이런 아날로그 삶의 기록이 좋다. 그 시절 어떻게들 살았을 지 알 수 있는 기록이어서 좋고. 어려운 시절, 이웃끼리 서로 관심을 갖고, 챙겨주고, 의지하며 돕고 사는 모습 역시 매우 좋아 보인다. 그 속에서 배려가 묻어 나오고, 인내와 화합, 상호 봉사하는 인성도 배어 나온다. 물론 현재보다는 물질적으로 많이들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인내와 배려,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 자기 마음에 안들면 묻지마 칼부림을 하고 그 죄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가난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2세들에게 가르치고 보존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동생이 이곳에 살았더랬죠...아주 추억이 많은 곳이었네요 눈내리던 추운날 삼복터널에 내려 터벅터벅 내려와 집에 도착하면 입에서 하얀입김이 얼굴을 가릴정도로 났고, 주무시는 할머니 깨실까 다락방으로 허리숙여 기어가 작은 창문밖으로 보는 불빛은 어느비싼집 테라스보다 아름다웠었죠 내리는 눈보며 술잔기울이고..아득히 멀지만..또 어제같기도 한 기억이네요..그립습니다.
난곡동 이라고 부르기전에 낙골 이라고 했음 서울 이곳저곳에서 강제철거 당한사람들에게 산을 밀어내고 그곳에 땅과텐트를보급했음 강제적으로 낙골땅으로 와야했기에 화병 을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매일죽어서나갔다 한동안 즐 초상이었다 학교도 뻐스도 없었지 법원 단지 들어선곳이 산과논바닥이었다 산에서내려오는 물로 여름엔 목욕을하고 산에서뛰어놀았다 외국에 거주하기에 더욱 더 그리운 신림7동 2002년경에 가보니. 철거한 상태여서 서운했음😂 그야말로 먼옛날 이야기가되어버렸다 영상을 보니 반갑고 옛날생각 나서 댓글남겨봅니다.
이런 곳에 교회가 참 정감 가고 좋음요... 저 시골 살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부유한 집이 많지 않았었고, 그래도 좀 약간 살만해졌어도 날마다 과자를 사먹거나 이러진 못하는 형편들이었어요. 교회 가면 과자도 같이 많이 먹고, 겨울에는 연극 준비하고, 여름에는 이거 저거 막 놀이 만들어서 하고 그랬어요. 당시엔 휴대용 게임기가 나왔어도 그냥 머 피하는 형식에 점수 올라가는 정도였어서, 거의 나가서 논 밭에서 뛰놀고, 초 겨울 바람 불면, 연 사와서 연 날리고, 더 추워지면 깡통 뚫어서 열심히 돌리면서 시냇물 언곳에서 썰매 타고, 눈 많이 내리면 비탈길 찾아서 비료포대에 짚 넣어서 어두워질때까지 놀았는데 ㅎㅎ... 아직도 시골집 작은 방에서 비내릴때 그 비가 흙에 부짖혀서 내는 소리를 잊지 못해요...
동대문구 이문1동에서 수십년을 살다 재개발로 쫒겨나 이사한 곳이 현재 마포 임대 아파트.. 이문동은 2019년에 철거를 시작했다. 고향은 아니지만 거의 20년을 살아온 동내이다보니 철거한지는 5년도 되진 않았지만 왜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울고 웃으며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내동네 이문 1동. 그자리엔 수십층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고 철거민인 나는 여전히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고 있다.. 의문의 불난 집처럼 내 마음도 저 불속에 내던져졌다..
저는 2014년 한국외대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이문동에서 첫 서울 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문동에 방문했을 때는 제 고향 포항과 분위기가 비슷해서, 정겹고 따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10년가까이를 이문동 구석구석 다니며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끄적여 봅니다 늘 건강하십시고 하시는 일 잘되시길 바라겠습니다
1977년 여름 심한 호우로 낙골 사람들 신대방동 문창국민학교 교실로 피난살이 하더라구요 때마침 여름방학이라 빈교실에 모여 며칠씩 마을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요 제 기억에 해마다 호우때 마다 일어나는 낙골 사람들에게 연례행사처럼 비만 좀 많이 오면 어김없이 문창국민학교로 와서 며칠간 머물더군요 예전엔 저 동네를 낙골이라 불렀어요 1973년에 문창국민학교에서 저 부근으로 소풍을 갔는데 쌀농사 짓는이도 있었고, 숩굽는 이들도 있었어요
99년에 야간에 윗길을 자동차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밤의 오랜지색 불빛 보고 놀라서 차를 다시 유턴시켜 안쪽에 차를 넣고 주차한 다음 주변 돌아본게 전부입니다. 그때 추억이 있어서 다음날 토요일도 차를 가지고 다시 찾아가봤습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주거지였군요.... 개발될때 신림7동이란걸 알았습니다.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의 그리움이 있던 곳이 일본에서 10년 정도 살다 오고 그 추억이 그리워 무작정 찾아 갔는데 그 전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어서 너무나 아쉬웠습니다......그 당시 봉천 구세군 영문에 다니시던 모든 분들이 너무나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혹시나 그 당시 그곳에 머물렀던 분들이 제 글을 보시면 댓글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제 나이는 56세 입니다.... 김봉화 사관님이 계셨던 시절 이였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대단지 조성하고있다 그리고 신림7동에서 행정동명이 난향동 으로 바뀌었다... 난초향이 그윽하다 해서 난향동 ... 그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지금은 타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고있지만 ... 희ㆍ노ㆍ애ㆍ락 모두 담겨진 나의 태를 묻었던 고향 난향동 ㅠㅠ 어릴적 그옛날 추억이 그리운 내고향 난향동 아니 신림7동 애증과 사랑했던 곳 사람냄새나고 정겨웠던 신림7동 많이 그립습니다 🥺 사랑했다 신림7동 ♥️
술을 먹긴 했지만... 울고 있어요. 골목만 봐도 어딘줄 알겠고... 내가 살던 집... 친구집,,, 떠나보내야 했던 모든이들... 그리워서 눈물이 납니다.
ㅠㅠㅠㅠ
이젠 만기해지 6개월 전에 알려줘도 세입자 안 들어오면 돌려줄 돈 없다하니 피눈물이 나는 동네에요... 전세사기 치냐고 융자없는 집에 돈을 맡겼는데 돈을 어디다 썻냐하니 여기 법이 원래 그렇다네요...
신림동하면눈물이나요..나10살때천막촌으로들어와살면서.좀씩돈업어올라간게 신림밤골이였어요 난곡하면 삐죽위라고했어요 밤골보다 더꼭대기라삐죽우라고했어요.물차가오는날은물받을라고 줄서고난리났어요 저녁이어둑해지면일나간엄마기다리느라 목빠지게 처다보면 다지처가는엄마가힘업이지처서 쌀한대 연탄한장새끼줄에뀌여올라오면 그렇게반가왔는데 그때내나이가15세.나중엔공장다녔어요 동생이넷이긂고있어거든요 지금은67세지만 그시절생각하면 눈물나요...
고생하셨네요.
지금은 평안하시죠?
그러셨음 좋겠네요
고생하셨네요.
앞으로 건강하셨음 좋겠네요.
공감이 가면서 가슴이 아프네요
저도 밤골에 살았었는데 어려서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어렵게 고생하며 사셨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살아본 사람들만 아는 거죠~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눈물이 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봉천동 달동네에서 살았습니다 5식구가 단칸방에서 지냈습니다 그래도 이웃간에 정이 있었던시절 온가족이 따뜻한 밥을 먹던기억과 젊은시던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70년대 단칸방 6명 살았는데 부모님 3형제 누나
중학생일때 나도 구로공단 삼립빵공장밑에 살 시절 한아이가 학교을 나오지안아 선생님이 찾아 가보라 해서 난곡을 감 버스종점에서 내려보니 거기서부터 물지게를 들고 올라가더만 그물에 흘린것이 얼어 빙판 그언덕들이 그냥빙판이었네요 진짜 관악산 골짜기 산꼭대기 끝에 산 친구임 그애 어머니는 일본인 어머니 병들고 숨을 못실정도 아파하심 그애는 가출한 상태고 난 정말 충격 먹음 정말힘든 시절 있였네요
영상을 보고 글을 읽으니 그 당시 모습이 그려져서 가슴이 시립니다..
난곡은 수도물안나와 물을길어먹었어요 고모네가 거기살아 물길어 오던기억있어요
선생님 그게 몇년도 이야기인가요?
70년중반~나도여기서 살아봤음 눈물나고 가슴시린 날들 지금다시보니 먹먹하네
80되신 어머니가 50인 저를 부산 영도 판잣집서 낳으셨는데 아마 여기분위기랑 비슷했던지 아님 더 어려웠을것 같음ㅠㅜ
짠~~~~~~한 영상ㅜㅠ
전 지금도 신림7동에 살고 있습니다. 7동은 단독, 다가구 주택지역과 달동네라고 하는 두지역으로 돼있었어요 지금 화면에 나오는 곳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있지만 국민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던 그곳을 아직도 그리워합니다. 저때까지는 이웃사촌이라는게 뭔지 알던 시절이였는데...
아~아득한옛날 제가소녀 중학교시절 고모집 조그만언덕베기 단독주택에 방학때갔었는데 물길로 올케랑 줄서서 물받아오던 생각 기억선하네요 아직도거기사시는군요
재개발 하지 마. 그냥 세월에 맡겨😅
슬프다
가슴이 울컥한다
모두들 어디에 계신가요?
박효태 할머니는 납골장이요...
우리효숙이 지금은 뭘 하던 행복하게 잘~살고있기를 바란데이~!^^
22년이 지난 지금저분들 다 건강하시길
이런 휴먼 다큐 너무나 좋아합니다. 우리들 삶을 기록으로 꼭 좀 남겨주세요. 남는 것은 기억 저 편으로 흘러간 우리들의 시대입니다. 생각 날 때마다 꼭 꺼내보는 앨범과 같은 추억들은 영원히 기억할겁니다.
나는 이런 아날로그 삶의 기록이 좋다. 그 시절 어떻게들 살았을 지 알 수 있는 기록이어서 좋고. 어려운 시절, 이웃끼리 서로 관심을 갖고, 챙겨주고, 의지하며 돕고 사는 모습 역시 매우 좋아 보인다. 그 속에서 배려가 묻어 나오고, 인내와 화합, 상호 봉사하는 인성도 배어 나온다. 물론 현재보다는 물질적으로 많이들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인내와 배려,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 자기 마음에 안들면 묻지마 칼부림을 하고 그 죄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가난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2세들에게 가르치고 보존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냥..그냥..너무 마음이 아파요..착한 저분들 그렇지만 상처 받았을 저 분들 어딘가에서 따뜻하게 계시길 기도드립니다..
24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금방 지나가네요. 깊이가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예전모습을 보니 감사하네요. 정이 있고 깊이가 있는 자료 잘 보았습니다.
78년생 난곡초등학교 다녔습니다
난곡시장앞에서 매일 학교까지 등교하기도 쉽지 않았죠~~
달동네 진짜 많이 놀려 다녔는데요
어린시절이 생각 나네요~~ 😊
저의 동생들은 난곡국민학교에 다녔었죠.
저도 78년생 난곡 초등 졸업생입니다
79년생이고 난곡초등학교 졸업했습니다..개미문방구의 추억의 떡볶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개미 문방구 옆에 있던 또다른 문방구의 장애우 아저씨, 갈고리 손이 어렸을때 그로테스크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걸 기억하고 계신 분이라면 필히 난곡초등학교를 80년대 겪어보신 분일듯요...
05, 09 난곡졸업생 저희 아이들입니다 😊
임광관악파크아파트살아요
대구 비산동도 지지리못사는 동네였죠 .😢60년도에
판자촌도 많았었고...
저 영상보니 참~~
옛기억이 떠올려집니다.
나 이거 보면서 진짜 울었다...
효숙이는 지금 35살 되었겠네요.
엄마가 되어 잘살고 있겠죠^^
35살 ㅠㅠ
지금은 아련한 옛 추억이 되어버린 시절이지만 가슴이 먹먹할 만큼 그립습니다 ❤
난곡동 ㅡ 신림7동
아련한 기역이지만
1977년 여름 전국이
폭우 장마로 피해가지
뫁한 난곡동ㅡ참 고척동
고척대교가 넘칠뻔했지
할아버님 할머니
두분들이 홀연히
여행간 난곡동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난곡동 ㅡ 가슴에 묻는다
공감합니다 앞쪽 법원단지 보면서 부러워했죠 저는가슴에 묻지않고 훌훌털어버렸죠 너무배고픈 시절이라 ㅠ
기역 → 기억
뫁한 → 못한
15:35 왠지 모르게 가슴 시린 풍경이네요.. 우리 현실은 이렇지만 눈이라도 내리니 아름다우니.... 마치 아름다운 포장지를 씌워주듯 위로같이 그렇게 느껴지는 모습이 먹먹하네요
저랑 같으시네요.저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변해버린 내 자신을 돌아보니 눈물 찔끔ㅜ
70년대를 살아본 세대 거의 못살아서. 고등 학교도 못가고 자아도 형성 안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남들보다 뒤처지니 자격지심에 주눅들어 살았었다. 내인생에 지우고 싶은 페이지. 그 청초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인생은 지나는 것인걸
우와 대단하신 필력이십니다
1979년생 집은 신림3동이었고 난곡초등학교 난우중학교 나왔는데 학창시절에 신림7동 난향초등학교에도 여러번 가서 놀았던 기억이나네요..진짜 어린시절 신림7동 가려면 가파른 고바위 언덕이라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납니다...지금은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생기고 저는 다른지역에 살지만 그래도 그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그립고 신림7동에 살던 내또래 친구분들 다들 어떻게 살고계신지 궁금하네요 ~~
오우 슨배님 ㅋ 그 때는 난화 국민학교도 있었드랬죠
@@admin-ie3mj 난화 1회 졸업생입니다~
효숙이 크나큰 재능 이곳저곳에 나타나네요 지금은 어떻게살고있을까요?
동생이 이곳에 살았더랬죠...아주 추억이 많은 곳이었네요 눈내리던 추운날 삼복터널에 내려 터벅터벅 내려와 집에 도착하면 입에서 하얀입김이 얼굴을 가릴정도로 났고, 주무시는 할머니 깨실까 다락방으로 허리숙여 기어가 작은 창문밖으로 보는 불빛은 어느비싼집 테라스보다 아름다웠었죠 내리는 눈보며 술잔기울이고..아득히 멀지만..또 어제같기도 한 기억이네요..그립습니다.
효숙이 라는 꼬마가 지금은35살 엄마가 되엇겠구나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살고있을까? 부모님은 모두 건강하신지 그리고 잘 살고있는지 궁굼하다....
저도 효숙씨 궁금하네요.
삼성동에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됬다고 뉴스에 나왔어요
@@junpapa8154효숙님 지인인데 거짓루머로 pdf땄고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illililillli 똥이나싸세요~^^
어려서 신림동산꼭대기에서 살았는데 수도가없어 산너머 난곡가는산우물에가서 양동이에 물길어 지게에지고오다 반은 흘리고오던 기억이나네요 ㅠ😢
져도그래는데 산넘어 우물가에서 빨래빨고그래는돼 연탄머리에 오리고나르고 그래두 그때가 좋았는되
ㆍ 아 월급봉투 감성터지네요. 지방사람이지이만 저도 신림동 살아본사람으로서 달동네감성 공감이되요 파랑새는있다.서울의달 시절이 그립습니다. 특히 고두심씨의 내레이션이 정겹고 편안합니다. 세기의 명언을 남기셨죠.. 잘났어~정말
추억하고 당시 젊음이 그립긴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음.
젊음이 좋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음. 정말 힘들었다는 생각에!젊음도 어느정도 환경이좋을때 맘껏 누릴수 있어 행복힌거니까.
효숙어머니
정말 고생많으셨어요!
아픈다리 이끌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했던 지난 날들과 이웃들을 돌보며 살아가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시흥2동 달동네 맴버 입니다... 바로 ㅇ옆 동네라....애정이 가네유 ㅠㅠ
시흥2동 - 칼바위산 밑마을
대학교때 실습으로 북지관에 갔던기억이 나는데 재개발이 되었다하네요 .기억이 아련하네요
지금 그 난곡산동네 재개발한 아파트에 거주중입니다. 저기 출연하신분 우리 성당 교우부부 나오시네요.
여기에 이런 역사가 있는줄 몰랐네요
74년생입니다.
난곡에서 7살 때 딱 1년 살았는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이였네요. 머리속에 잊혀지지 않는 곳...
박씨 할머니 옆집에 연탄불도 확인해주고 손도따주고 잔소리도 해주시는 효숙어머니가 계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박효태 할머니 심보가 못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와서 못보겠다 모두들 건강 하시고 삶이 풍족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서울살았을때기억나네요.
관악구 신림4동이였는데.
거기살다 신림본동으로이사하고.
다시가보고싶군요.😊😊
효숙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효숙이도 지금은 나이 서른이넘어,,,,
누군가의 엄마로 살고있을런지도 모르겠군요…
그땐 고된삶이였어도 지금은 더 행복하기를요….
이 프로그램 당시 방영할 때 보고 상당히 인상 깊었던ᆢ
난곡동 이라고 부르기전에
낙골 이라고 했음
서울 이곳저곳에서
강제철거 당한사람들에게
산을 밀어내고
그곳에 땅과텐트를보급했음
강제적으로
낙골땅으로 와야했기에
화병 을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매일죽어서나갔다
한동안
즐 초상이었다
학교도 뻐스도 없었지
법원 단지 들어선곳이
산과논바닥이었다
산에서내려오는
물로
여름엔 목욕을하고
산에서뛰어놀았다
외국에
거주하기에 더욱 더 그리운
신림7동
2002년경에 가보니. 철거한 상태여서
서운했음😂
그야말로 먼옛날 이야기가되어버렸다
영상을 보니
반갑고
옛날생각 나서
댓글남겨봅니다.
맞아요.
이런 곳에 교회가 참 정감 가고 좋음요...
저 시골 살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부유한 집이 많지 않았었고,
그래도 좀 약간 살만해졌어도 날마다 과자를 사먹거나 이러진 못하는 형편들이었어요.
교회 가면 과자도 같이 많이 먹고,
겨울에는 연극 준비하고,
여름에는 이거 저거 막 놀이 만들어서 하고 그랬어요.
당시엔 휴대용 게임기가 나왔어도 그냥 머 피하는 형식에 점수 올라가는 정도였어서,
거의 나가서 논 밭에서 뛰놀고,
초 겨울 바람 불면,
연 사와서 연 날리고,
더 추워지면 깡통 뚫어서 열심히 돌리면서 시냇물 언곳에서 썰매 타고,
눈 많이 내리면 비탈길 찾아서 비료포대에 짚 넣어서 어두워질때까지 놀았는데 ㅎㅎ...
아직도 시골집 작은 방에서 비내릴때 그 비가 흙에 부짖혀서 내는 소리를 잊지 못해요...
낭만 미뗫다 ㄷㄷ;
영상 정말 잘찍었네요 👍👍👍👍 저땐 다들 아끼며살았죠
어린시절도 생각나고 뭔가 애틋한 느낌이드네요. 다들 무탈하게 살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때 대한민국 구석 구석 이 다르지 않았지요 달 빛을 불빛 삼아 깜깜 한 밤 걷던 기억 무거워 앞 사람 발 걸음 딸라 걷던 시절 그래도 그때는 정이 있고 온 거족 이 모여 살던 그리운 사절 아 아 눈물 나네요 특히 이 머나먼 미국 땅에서 몇 십년 만에 추억 을 만나니
동대문구 이문1동에서 수십년을 살다 재개발로 쫒겨나 이사한 곳이 현재 마포 임대 아파트.. 이문동은 2019년에 철거를 시작했다.
고향은 아니지만 거의 20년을 살아온 동내이다보니 철거한지는 5년도 되진 않았지만 왜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울고 웃으며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내동네 이문 1동. 그자리엔 수십층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고 철거민인 나는 여전히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고 있다.. 의문의 불난 집처럼 내 마음도 저 불속에 내던져졌다..
저도 이문동이 고향이지요 연탄공장옆 전철역 지나서 기와 단독주택동네살았었죠
이문동떠난지 어언30년이
넘었네요 이문동에서의 추억을 공유할수있어
반갑습니다
고향사람만난듯 그때시절이 생각나네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카라-n8t 저도 너무 반갑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2014년 한국외대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이문동에서 첫 서울 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문동에 방문했을 때는 제 고향 포항과 분위기가 비슷해서, 정겹고 따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10년가까이를 이문동 구석구석 다니며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끄적여 봅니다 늘 건강하십시고 하시는 일 잘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vynyl20:10 20:12
어린시절 서울 답십리 100번지에 살았을때가 생각납니다. 철거민의 아픔을 저는 압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모습에
못 살았지만 나름 서민들의 애환이 넘친곳이죠
지금도 떠나지 못하고 살고 있는 분들도
아파트가 들어서며 엄청나게 집값이 치솟아 집 떠난 분들은 살수 없지요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 살고 있을지?
나 태어나기도 몇년 전 영상이네… 2000년대 감성 ㅠㅠ
2000년11월이면 내가 태어나기 한달 전 ㅋㅋㅋㅋ
여보 미안하오 그간 애들 키워 다보네고 당신과 나만 남았구려 내당신 고생시켜 미안하오
1977년 여름
심한 호우로 낙골 사람들
신대방동 문창국민학교 교실로 피난살이 하더라구요
때마침 여름방학이라 빈교실에 모여 며칠씩 마을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요
제 기억에 해마다 호우때 마다 일어나는 낙골 사람들에게 연례행사처럼
비만 좀 많이 오면 어김없이 문창국민학교로 와서 며칠간 머물더군요
예전엔 저 동네를 낙골이라 불렀어요
1973년에 문창국민학교에서 저 부근으로 소풍을 갔는데
쌀농사 짓는이도 있었고, 숩굽는 이들도 있었어요
맞아요. 낙골이라고 했었죠!
평생을 지방에서만 살아본 사람으로 항상 서을살이를 꿈꾸며 살았는데 지금도 중년지난 나이지만 서울살이 하고픈 할머니가
컴퓨터가 2000년을 인식 하느니 못 하느니 난리 부루스 떨던 시절이 벌써 20년이 넘었네
철거용역 깡패들이 몰래 불지르고 거주자들 중에 일당발이 모집해서 철거 시켜서 주민들 서로 싸우게 하거나 말못하게 만들고. . .
돈없고 힘없는 서민들의 삶은 참 고달프고 많이도 서러웠겠네요 하지만 돈없고 힘없다는게 선악중에 항상 선은 또 아니니 ㅠㅠ
서민들은 몬 서민들입니까 빈민들이지
지금 난향동 자리인거 같네요. 휴먼시아랑 들어온 자리.
전 기초생활수급자에 장애인 입니다
사는게 넘 힘이 듭니다
신림동 난곡 판자촌 달동네를 보면서 자랐는데 저 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라에서 정말 어려운 분들에게 편히 살 수 있는 저금리 영구 임대 아파트를 제공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이 아프다 ...
LH 공공분양2천800가구 임대아파트 500가구 현재 난곡동 효숙이 동네. 재개발 됫다고하네요
난곡동.. 재개발되면서 집없는사람들 쫒겨났죠.. 파업? 그런거뉴스많이나왔는데.. 분양받은사람들은 집주인들., 서울재개발현실이죠. 90년대만해도 그냥쫒아내고 아파트짓던시절..
많이 풍족하진
않아서
힘들었던 때였죠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공감입니다. 그땐 따듯한 말 한마디 만 들어도 힘이 나던 시절이였죠 시간 참 빠르게 흐르네요 저기 기득권자들은 마치 천년 만년은 살거처럼 ~나쁜짓만 하며 사는데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오네요 예전보다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Anarchists2024 힘내십시다
오늘하루는 그 누군가가
간절히 살고싶던 하루라는 말이 있더군요
니가 저학력 저소득 인생이라 옛날이 그리운거야
니가 노력해서 뭔갈 이루고 잘 사는 사람이면 옛날 생각도 안나겠지
저는 아직 신림동을 지키고 있지만..밤골 비지구 살던 친구들은 이제 다 떠났고..한달에 한번 신림동에서 만나 옛추억을 나누네요..! 정가고 따뜻했던 추억!!! 이젠 약수암 비지구 해바라기 성림교회도 다 재개발 땅 파고 있네요! 우리집 1구역 신림시장도 곧 사라질듯..
이웃이 있던 시절...
모두들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시리라 믿어요
효숙이란아이 그당시 꽤 당차고 똑똑한아이였네요 훌륭하게컷겠죠 궁금하네요
복지가 꼭 필요한 이유 ,더불어 같이 사는사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가슴아픈 영상이네요.
빈익빈 부익부가 더 극명하게 양극화되는 사회에서는 서민들은 더 고통받죠 ..그래서 더욱 정치인들을 잘 뽑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이런데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아파트 살고 있는건 호강하는거였네요.
왠지가슴이찡하네지금나도많이힘들게살아서그런가,
지금 75세인데
이영상보니 옛날 생각나네요.
난곡은 아니지만, 2001년에 미성중학교 다니고 있었습니다.
효숙이는 꼭 의사가 됐으면 좋겠네요😢
76년생 난곡국민학교 그립다😊
난곡동.. 제일 가난했었지만 비교할 부유함이 없었고 어렸기에 내 인생 가장 행복했었던..
그 뒤로 어중띠 먹고 살만한 동네들.. 거치면서 상처받고 때묻고 같이 동조하고 ㅜㅜ
80년생 난화 친구들 보고싶다
기다리셔요 언젠가 좋은일이 있을겁니다
화질개선 리마스터링 됐으면 좋겠당,ㅜ
22년전 영상
지금도 봉천동 신림동 달 동네 같은데 있는거 같던데
눈물이 난다
저기살면서 힘겹게 사법고시합격한 선배형이 생각나네요~~
99년에 야간에 윗길을 자동차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밤의 오랜지색 불빛 보고 놀라서 차를 다시 유턴시켜 안쪽에 차를 넣고 주차한 다음 주변 돌아본게 전부입니다.
그때 추억이 있어서 다음날 토요일도 차를 가지고 다시 찾아가봤습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주거지였군요.... 개발될때 신림7동이란걸 알았습니다.
효숙이는 어디서 살까요
효숙엄마
잘 계시는지요
한번 만나고 싶네요
난곡지구..............
진짜 신림동 봉천동 이 산악지대라 달동네가 많았지
서울인데 서울아닌 그런곳....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월세가 싸니까 계속 올라가던 그런곳...
너무 슬프다 . 누군들 가나하고싶어가난한가 ?
근데 이것이 이십여년전일이군 . 다들 어디서 살고계실까 !
효숙엄마! 그리고 효숙아 지금 어디있니 ? 눈이내리고 캐롤이 들리고 눈물난다 .....
일을해라.
우리네 인생인것을....
아련하네요
🦋Will spring come to NAN GOK.🦋
😭😰😢ㅡDon't cry for me. NAN GOK.👨👩👧👧
😂 난곡에 사셨었나요?
@@symiso4797 옛날에 서울대 부근에
신림동에서 자취한적 있어요,ㅡ
달동네 사시는 분, 삶의 무게를 들어주어야 할 책무와 의무가 국가에 있기때문에, 양극화로 인한 빈곤층 해소는 국가의 책임입니다,🐸🐸🐸🐸🐸
70년생 신림3동 난곡초 남강중 졸업 그때 그시절에 교회에서 7동3동 크리스마스2부날 돌아다니면서 고요한밤~~ 노래부르던 기억이남 아직도 동창들 많이 살고있음 눈오는 겨울철엔 나무썰매 만들어서 언덕위에서 타고 놀던기억도 그립네요
그래도 전 부엌 화장실 샤워할수있는 욕실 있고 방3칸에 2층 전세집 살았는데 그때 달동네 사는 사람들 많았는데 ㅠ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의 그리움이 있던 곳이 일본에서 10년 정도 살다 오고 그 추억이 그리워 무작정 찾아 갔는데 그 전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어서 너무나 아쉬웠습니다......그 당시 봉천 구세군 영문에 다니시던 모든 분들이 너무나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혹시나 그 당시 그곳에 머물렀던 분들이 제 글을 보시면 댓글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제 나이는 56세 입니다....
김봉화 사관님이 계셨던 시절 이였습니다.
내가 살던 동네보다 부자네요.
B 지구라고 들어들 보셨나 ?
판자집.타마구 지붕. 지금도 볼수 있는데 ,
얼마전부터 철거중~
효숙이 언니 미인이시네
서울 중구 신당동은 건물들과 동네 배경은 지방광역시 서민동네고
시세는 지방광역시 부촌동네던데
그 떄 그 시절에는 동네사람들끼리 가족처럼 잘지냈지요.... 그립네요 그 때 그 시절이...
저자리가 지금 난곡휴먼시아 1 2 3단지 인거죠?
나도 처음 서울 생활 06 년부터 난곡서 살앗는데 정이 제일 많이 드는 동네였죠.
청춘을 돌려다오😢
나래이션 첨에ㅣ 누구시지
자꾸들으니..고두심 님이시네요 .
세이브마트 옆에 사는데 이 영상이 뜨네요 ㅋㅋ
55:30 민진아트 여기 효숙이네 집은 아직도 있네요. 옆 동네라 궁금해서 자전거 타고 가봤는데 빈집이더라고요. 효숙이 언니분 효숙님 송복순 아주머니 근황이 궁금하네요.
2004년 난곡에 바이크를 타고 올라가던 세월이 벌써 20여년전이네요.. 세월이 무상하네요
자막이 있으면 좋겠네요.
원인불명의 화재..
2020년대 구룡마을에도 많이 일어나고있죠..
을지로에서도 일어났어요 어이가 없음
재개발 지역 주민들 빨리 집 비우라고 협박?
어릴적 생각이 나네요 요즘은 좋은 시절이지만 전철을 타고 학교 다니구
솔직히.. 그 시절이 아련하긴 한데. 저 동네로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
저어릴때산동네살던생각이나네요
지금은 아파트 대단지
조성하고있다
그리고 신림7동에서
행정동명이
난향동 으로
바뀌었다...
난초향이 그윽하다
해서 난향동 ...
그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지금은
타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고있지만 ...
희ㆍ노ㆍ애ㆍ락
모두 담겨진
나의 태를 묻었던
고향 난향동 ㅠㅠ
어릴적 그옛날 추억이
그리운 내고향
난향동 아니 신림7동
애증과 사랑했던 곳
사람냄새나고 정겨웠던
신림7동 많이 그립습니다 🥺
사랑했다 신림7동 ♥️
휴먼시아랑 푸르지오가 우뚝 솟았죠
난향동 아파트 사는데 이게뜨네요 ㅋ 노원 강북도 비슷했죠 수유리 미아리 등등 ㅋ
아~70년대 가난한 빈농의 아들딸이 차비만 쥐고 출세할려고 상경해 도시빈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