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북경에서 건국했다는 증거 조선왕조실록 명실록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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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окт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30

  • @등천월
    @등천월 3 часа назад +7

    조선도 북경에서 건국했구나.. 어찌 이런 사실을 감쪽같이 감췄나.

  • @three.empires
    @three.empires 3 часа назад +9

    개경에서 남경을 가는데 10일이 걸렸다! 당시 교통수단으로 10일만에 가려면, 북경이 고려의 수도가 되어야 설명이 가능하네요. 대제국 고려의 대륙영토가 조선초에도 유지됐음을 알 수 있네요. 좋은 동영상 감사합니다.

    • @hanhan4980
      @hanhan4980  3 часа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23 минуты назад

      선생도 생각을 해보세요. 어떻게 북경에서 남경을 가는데 10일밖에 걸리지 않습니까? 조금씩 더 신중하게 많은 숙고 끝에 결론을 내시길 바랍니다. 어설프게 하다간 크게 당합니다. 빈틈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경에서 남경을 가는데 10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어디 있는지 그 출처 좀 정확하게 기재 좀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김성태-i6b6j
    @김성태-i6b6j Час назад +2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 @어쩔꼰대-s2c
    @어쩔꼰대-s2c Час назад +1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waitgold1234
    @waitgold1234 46 минут назад +1

    대박❤❤❤..장두구가 역사를 구하는구나..널리 알려져야 함

  • @SeungHyeopLee
    @SeungHyeopLee 3 часа назад +4

    이제 남은건 언제 지금의 서울로 천도했는지만 찾으면 되겠네요.

  • @윤현월-x9s
    @윤현월-x9s Час назад +2

    제가 요즘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를 연구하다 깜짝 놀란 사실도 하나 알아냈는데, 명나라가 동이족과 한족의 역사 속에 나오는 항우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항우의 근거지나 고향으로 추정되는 역산을 실제로 뽑아버렸다는 증거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자는 다르지만 우리식으로 하면 그 역발산기개세에서 나오는 역산은 실제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유방이 한족들의 영웅이고, 동이족들의 영웅이 항우입니다. 그 항우가 태어났을 가능성이 많은 역산을 명나라는 황하의 수계가 바뀌자 실제로 자그마한 야산이였던 역산을 밀어 황하의 저지대를 메꾸는데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시 황하는 그 역산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래놓고 그 지명도 태산 옆으로 다시 옮겨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개성위에 있어야 할 자그마한 야산이였던 송악이나 북악 같은 산들도 그 때 당시에 역산과 함께 없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요즘은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저들은 악락한 짓을 하면서까지 중원에서 고려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그 이전 동이족들의 영웅이기도 했던 항우의 역사까지 모두 없애버리고자 노력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는 황산에 있어야만 될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압록강 입구까지 옮겨놨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응...니들의 역사는 여기까지니까 선 넘지마. 이럴 생각으로 그러한 역사조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까지 있습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 @user-konglish
    @user-konglish 3 часа назад +2

    으쌰 ~~~~~~~~~~~~~~~~~

  • @happyhan608
    @happyhan608 3 часа назад +3

    😊👍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3 часа назад +3

    북평(大都)의 도착
    (대명여지도 초기본,초중본,중초본)
    上都의 도착 (중초본) 북송 북편이 고려의 북방에 도착 (몽고가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부풀어남.)
    출하점전투~ 현재의 내외몽골에 도착
    (대명여지도 중기본)

  • @윤현월-x9s
    @윤현월-x9s 44 минуты назад

    선생 제가 개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 지금의 전장시 일대가 1순위이고, 두번째로 가능성이 많은 곳이 지금의 강소성 태주시 싱화시 일대입니다. 1순위인 전장시 쥐룽시 일대엔 당시 황성으로 볼만한 수로가 아직도 남아 있고, 과거 그곳이 예전 백제의 근품성일 가능성도 있고... 대명일통지엔 남경 옆에 근성으로 나와 있을 겁니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엔 그 근처가 王導라는 변형된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쉽게 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고려사에 개경의 정확한 위치를 아주 많은 곳에 남겼는데 그러한 거리 기록과 조금씩 다른 곳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고려사에 개경은 개평땅에 세웠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 개평이라는 말이 갯벌위의 평평한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고려사의 수많은 기록과 거리 기록만을 놓고 따져 보면 저 싱화시 일대가 1순위 위치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가. 그당시엔 태주시 싱화시는 옆으로는 황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송악과 백악이라고 볼만한 산이 없기 때문에 제가 쉽사리 개경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화북성에 개경이 있었을 가능성은 1도 없다.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3 часа назад +2

    빈주,등주,래주가
    산동에 도착 (대명여지도 초중본).
    낙수와 낙양이 하남에 도착 명나라 초기 20년이 고려의 중부에 도착 (명나라가 대성 한만큼, 원나라(몽고)의 과거가 비대해짐)
    (대명여지도 중중기본,중중초본)
    황하가 大河에 도착 (중초본)

  • @윤현월-x9s
    @윤현월-x9s 3 часа назад +5

    선생 최소한 고려 개경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려면 1360년 이전의 고려사의 기록만을 인용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설프게 명나라 기록이나 중국사에 기록된 기록을 인용하거나 시점을 달리하면 역사 촛점이 흐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최소한 이성계가 등장하는 시점부터는 고려의 영토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기록한 것이고, 그 시기의 영토에 관한 기록을 고려사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일찌기 고려는 현재 한반도 개성까지 새로운 궁궐을 지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기록이 곡주라는 기록과 연결되어 있으니 곡주를 찾으시면 현재 한반도에 있는 개경을 언제부터 터를 잡고 지었는지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고려사에 나와 있는 곡주가 현재 한반도의 개성일대를 말하는 겁니다.

    • @On_horiz
      @On_horiz 2 часа назад +1

      그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일본학자 주장이지요

    • @On_horiz
      @On_horiz 2 часа назад +1

      고려사 기록부터 고려말 개경 북쪽에 원나라 남쪽에 홍건적이라 되어있으며 송사에 송나라 수도가 압록과 마주보고 있다고 했는데요 ㅋㅋ

  • @천군만마
    @천군만마 3 часа назад +2

    (수창궁)壽昌宮이 베이징 에 수강궁(寿康宫)인지는 의문이네요...
    이름을 고쳤는지......모르겠음

    • @hanhan4980
      @hanhan4980  2 часа назад

      수녕궁(壽寧宮) 한자 복사해서 구글에서 검색하면 자금성이 나와요
      자금성에 꺼꾸로 영수궁이 있어요
      건축시기도 자금성과 22년 정도 차이 명이 남경에서 북경천도 1406년 수창궁 수녕궁 - 건축년도 1384년 = 22년
      왕이 대비와 함께 수녕궁으로 옮기다 고려사 원문이미지
      열전 권제50
      날짜 | 1388년 07월 미상
      창왕이 대비(大妃) 이씨(李氏)를 받들고 수녕궁(壽寧宮)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곧 수창궁(壽昌宮)이니, 〈창왕의〉 이름을 피해 고친 것이다.
      1384년 최영은 일찍이 이성림(李成林)·이자송(李子松)·염흥방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昌宮)을 지었다. 궁궐이 완성되어 최영 등이 하례하자 신우가 환관 이광(李匡)을 시켜 말하기를, “큰 궁궐을 5년이나 걸려 완성하였으니 무엇으로 경들에게 보답하겠는가 에서 한양 조선 궁궐 건축 20년전에 자금성에 궁궐을 5년이나 걸려 건축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영수궁이 동북쪽에 있어요 기이한 돌도 많고
      동북쪽 모퉁이에 전각[閣]을 하나 짓고 충허각(沖虛閣)이라 편액하였는데, 단청[金碧]이 선명하고 화려한 장식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또 내전[內閤] 별실(別室)에 좋은 약을 비치해 두었는데 여러 병을 널리 치료하고자 하는 뜻에서 ‘선구보(善救寶)’라고 편액하였다. 또 그 옆에 정자를 짓고 기이한 돌과 이름난 꽃을 모아두고 ‘양성(養性)’이라고 편액하였다.
      에서 현재 자금성 어화원에 정자도 있고 기이한 돌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 @김재현-z6r2e
    @김재현-z6r2e 3 часа назад +2

    이성계는 주원장메게 쫄았나.?

    • @jangmi486
      @jangmi486 2 часа назад +3

      쫄았죠 그당시 고리말 가장두려워하는 몽골을 쳐부순곳이 명나라인데 절대강자를 눌러버린곳이니 주눅들수밖에 없었겠죠 스스로 하대하는게 이씨와 그무리들은 살아남기위해 택한방법이 이리도 긴 시간 한반도 구석탱으로 보내는 역사상가장 잘못된 착오로 남는 동이역사상 가장치욕적인 거죠

    • @머릿돌-l6i
      @머릿돌-l6i 38 минут назад

      ​@@jangmi486몽골이 쳐망한게 아니고 역병이 돌아 몽골군이 싸울세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 @User-gjursfjo567bj
    @User-gjursfjo567bj 3 часа назад +2

    한반도 평양이나 개성에서 난징으로 배타고 서해건너서 못가나요?

    • @jangmi486
      @jangmi486 2 часа назад

      지금은 걍가고도 남죠 근데 무동력선으로 바다를 건넌다고요?그때당시 배는 물길따라 즉 해안선타고 돌아가거나 눈앞에보이는 섬따라서 이동하죠 생각해보시길 10일안에 절대 못갑니다

    • @User-gjursfjo567bj
      @User-gjursfjo567bj 54 минуты назад

      고려난파선 서해안에 발견되는데요. 서해는 얕아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좀 더 명확한 반증이 필요할 듯요 당나라가 서해건너 신라와 연합해 전쟁했다는 건 규모나 기간을 봐서 말이 안되지만 이건 좀 애매하네요.​@@jangmi486

  • @윤현월-x9s
    @윤현월-x9s 2 часа назад

    선생 고려 황성은 서경이나 개경이나 남경이나 한반도에 지은 개경이나 궁이름은 똑같은게 너무 많습니다. 궁이름으로 저곳이 서경인지 개경인지 남경인지 한반도 개성인지를 착각하시고 인용을 하거나 이해를 하고 넘어가고 대충 보면서 확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가 왜 이전 글에서 명나라나 중국의 다른 사서를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냐면 저 대명일통지부터 시작해서 중국의 모든 역사왜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청나라의 지도나 역사서를 인용해서는 절대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명나라가 왜곡한 역사 위에 또 자신들의 역사를 덮어 써버렸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학자들이 고려의 비밀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 혹은 원사를 인용하다가 깊은 늪에 빠져 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급적 고려사만의 내용 안에서 개경의 위치를 찾는게 좋고 대충의 위치를 찾거나 참고할 것이 있을 때는 대명일통지 같은게 유효할 순 있습니다.

  • @KiKi-zo9fc
    @KiKi-zo9fc 3 часа назад +1

    난징이 중국대륙 동쪽 끝에 있으니 배타고 서해바다 건너면 10일이면 뒤집어 씁니다.

    • @On_horiz
      @On_horiz 2 часа назад

      해류 때문에 난징에서 서해바다 건너는건 빠르지만 반대로 오는건 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