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와 그의 형 헨리 왕자 이 둘은 분명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예전에는 보고 배우는 게 그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이 둘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같습니다. 정말 사람에게는 타고난 천성이 공명의 갈림길을 좌우하는 것같네요. 타고난 능력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진짜 재미있네요. 간신은 살리고 충신은 죽이고, 찰스는 버킹엄을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요. 제임스처럼 게이도 아니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충신이었다기엔 아픈 아버지 나몰라라하는 걸 봤을 텐데, 마리 드 메디시스처럼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했는지 하여간 부자를 나란히 후린 것도 대단합니다. 또 이렇게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내전한 게 나중에 토리당과 휘그당의 기원이 되나요, 아니면 전혀 무관한지 궁금합니다.
유럽 전역에 종교적 갈등이 화약고처럼 산재해 있던 그때, 국내의 종교적 갈등을 격화시키고, 자신에게 중요한 신하를 분별없이 대하고, 의회와 내전을 치르며 결정적 순간에 대한 판단도 모자랐던 자질과 그로 인한 실책은 기본적으로 찰스 1세가 그 “왕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애하는지 국정목표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의미없는 만약에… 이지만 경건하고 소박한 수도사로 살았다면 본인도 행복했을 것 같네요. 다음 강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근 사학 연구에 의하면 제임스 1세가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방만하고 관념 없는 재정 운영이 찰스 1세에게 악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메리 1세 때 행해지던 재정 및 행정 개혁이 중단되면서 전근대적 행정과 재정 관념에 머물게 되었고 .... 쓸데 없는 전비와 궁정 비용 - 엘리자베스 보기보다 사치가 심했던 사람이었다고 하죠 - 이 스튜어트 왕가의 재정 운영에 영향을 주었다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원인은 헨리부터가 그렇게 모아들인 재산을 자기의 향락에 써버린 것에서 보듯 집안 자체게 재정 운영 유전자가 없었을지도 .... 그리고 하사금 내리는 것은 당시 왕이 자신의 수족을 만드는 흔한 방식이었습니다 하사금을 거의 내리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제임스 시대보다 더 했다고 하죠
네 역사에 대한 지식을 이렇게 나눠주셔서 감사하네요. 엘리자베스가 제임스에게 막대한 재정을 물려주진 못했죠. 말씀처럼 재정 개혁이 멈추고, 윌리엄 세실의 사망 이후 관리자가 없어져서 혼란스러운 데다 말년엔 여러 요인이 겹쳐 경제난이 찾아오기도 했으니까요. 큰 전쟁도 있었고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 개입하느라 체계 없이 돈을 쓴 것도 누적돼서 악영향을 미쳤겠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치세에는 해적질 덕에 대외수입이 비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왕실 자산도 대폭 늘었구요. 반면 제임스는 수입이 없다 보니 대외 개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죠. 하지만 그 없는 살림에도 대책 없이 사치했습니다. 엘리자베스도 물론 사치스러웠지만 제임스는 총신 챙기느라 그 몇 배나 되는 돈을 썼죠. 그래서 돈이 떨어지자 자산을 팔아치우고 매관매직, 독점권 판매 등을 남발합니다. 싹싹 긁어서 탕진했던 거죠. 결과적으로는 두 전임자 모두 찰스 1세를 어렵게 한 면이 있겠는데요. 구조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에게, 실질적으로는 제임스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보이네요. 그런데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더라도 엘리자베스가 현군이었고 제임스가 암군이었다는 평가가 달라질까요? 최근 연구는 재정 측면에서 그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려는 걸 수정하는 정도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art.humanities 1. 스튜어트 왕가는 최근 연구에 의하면 휘그 사관에 의해 매도된 역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제임스 1세 암군론 역시 휘그 사관에 의해 매도되었다고 하고요 엘리자베스가 워낙 고평가받아 그렇지 현재의 평가는 무난하가 영국을 잘 이끌었다는 평가입니다. 3. 매관매직은 늘 있던 일이었고 독점권 판매 역시 엘리자베스가 거의 재정을 바닥 내 놓고 간 거라서 도리가 없었습니다 4. 총신 챙기기 역시 휘그 사관에 의해 과장된 것이고 되려 엘리자베스는 이걸 안해서 관리들을 부정부패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5. 님이 언급한 내용으로만 봐도 엘리자베스는 현재의 부에 빠져 장래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영국 역사를 보면 참 신기한 것이 노르만 윌리엄의 정복 이후만 따지더라도, 내전의 역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겁니다. 고려, 조선 1천 년과 비교해봐도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일본 카마쿠라 막부 정권과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고려 무신정권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붓의 역사에 매몰되어, 칼의 일본에 정복당한 아품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옛날의 국방력은 기본적으로 인구수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날처럼 탱크 같은 무기로 국방력을 강화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나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엄청 중요합니다. 몽골, 거란, 만주족은 당시 고려, 조선이 비해서도 인구수가 말도 안 되게 적었습니다. 그 적은 인구로 중국 대륙을 유린한 것은 무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강력한 노비제도도 국방력 약화를 불러온 중요한 요인입니다. 약 40% 달하는 노비는 국방력이 반으로 확 줄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구려, 고려도 노비제도는 있었지만 무를 중시했다는 측면에서 조선과 많이 비교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조선이 무력이 약해진 건 문을 너무 중시한 문화 때문이라는 거죠. 뭐든 힘쓰는 일을 천하게 여긴 문화가 조선을 무기력하게 한 가장 강력한 요인입니다. 예전에 수, 당이나 강력한 거란을 상대한 고구려, 고려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당당하게 물리쳤습니다. 고려가 최강 몽골군에게 30년 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정권의 그 기상이 한 몫 했다고 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동한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이 너무 속절없이 일본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조선이 너무 문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질을 당했습니다. 조선은 무를 좀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가 시책을 잡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찰스 1세는 세번의 기회를 다 살렸어도 조금 힘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일단 엘리자베스의 그림자와 제임스 1세의 어설픔을 동시에 물려 받았기 떄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지금도 해결안되는 종교 갈등을 심각하게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만이 나온 상태 였습니다. 메리 여왕 시대 카톨릭을 복원 하려고 노력 했지만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이 최근 이론 입니다. 즉 메리 여왕 시절에는 종교 갈등이 심각하지 않아서 여왕이 카톨릭 복원의 길로 가도 큰 문제없었고 블러드 메리라는 악평도 엘리자베스 여왕때 만들어진 악평이라는 것이 최근 이론이죠. 메리 여왕이 조금더 살아줬더라면 영국은 카톨릭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론이 많습니다. 그런데 30년 전쟁 이후 종교 갈등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영국에 유입 되면서 왕도 손을 못쓸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물론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조금더 현명해서 주변을 잘 설득했더라면 다행이지만 이건 좀 힘들었다고 봅니다. 지방 분권이 심해서 왕의 권위가 프랑스 같지 않았던 영국에서 종교 갈등까지 더해지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최소한 퇴위하거나 쫒겨났을 지언정 참수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이죠. 종교 문제는 찰스의 가장 큰 실책이였다고 보는데 차라리 부왕 제임스 처럼 아무것도 안하고 갈등 상황을 조장할만한 어떠한 것도 안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보았을 것이고 어차피 프랑스 위그노와 독일의 수많은 신교도들, 네델란드 루터파, 캘빈파 등등이 성공회만 강요안했다면 떼거지로 바다 건너 넘어오고 이 과정에서 왕이 종교 수장으로 갈등을 잘 조정했다면 오히려 왕의 권력이 공고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봅니다. 인구, 특히 상공업 인구도 늘어났을것이고. 암튼 그럴 정도의 정치적 역량이 안되긴 했죠.
Supreme Head 냐 Supreme Governor 냐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이는 여성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의식해 용어를 바꾼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바뀐 건 별로 없구요. 핵심은 주교 임명권이라 할 수 있는데 스튜어트 왕들에게도 주교 임명권이 있었습니다.
무능한 인간이 주제 넘은 버거운 자리에 있게 되면 본인만 망하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건 역사에서도 그대로 보여 주네요.
네 일이 수습되는 게 아니라 재앙으로 확대되죠.
찰스 1세와 그의 형 헨리 왕자 이 둘은 분명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예전에는 보고 배우는 게 그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이 둘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같습니다.
정말 사람에게는 타고난 천성이 공명의 갈림길을 좌우하는 것같네요. 타고난 능력이 중요한 것같습니다.
네 형제라 해도 큰 틀에서 닯은 거 말고 성격 자질 사고방식 다 다르죠.
선댓글 후시청~ 1등이네요 ㅎㅎ 기다렸어요~ 교수님. 자주 좀 올려주세용
네 저도 자주 올리고 싶은데요. 여력이 안 되네요^^; 앞으로 화토에 정기적으로 올리려 합니다~
부모가 어리석으면 자식이 고생하고
지도자가 어리석으면 백성이 고달프고
무엇보다 자식이나 국민이 깨어있어서
어리석은 부모나 지도자인지를
알아차려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한거 같습니다.
제임스1세 찰스1세 이야기 들으면
한숨이ㅜㅜ
우리도 남일 같지 않네요ㅜ
네 그러셨나요?^^;
우와 기다렸어요 선댓후감 갑니당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화토 이렇게 규칙적으로 올리려 합니다~
와 이런 보석같은 채널을 만나다니
영상 하나하나 다 재밌고 영상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끈으시네
어서 오십시오^^ 재미있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들어보면서 또 다시 생각해봅니다. 역사속에서 누가 현명한 사람인지 쉽게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걸 쉽게 볼 수 있었을까요.
과거 역사가 되면 보이고 또 남 일이 되면 보이는데 희한하게 내 일이 되면 안 보이죠^^
저도 감사인사 남기고 들으려구요.
네 감사합니다.
남의 나라 역사이야기도 너무 재밌습니다. 어떤 일이던지 기회가 올 때 상황판단을 잘하고 포착해야 하는데..찰스1세는 왕의 자질이 부족했었네요..
네 어떤 일이든 기회는 반드시 있는데요^^
다음이 너무궁금해요.
짧아서 아쉽습니다.올려주신것도 고마운데 듣다보니
욕심이...ㅎㅎㅎ
길면 눈감고듣기좋고 못들은부분은 담날들어도되니 편하구요.
네... 영상을 길게 올리는 채널도 있더라구요. 전 아쉽지만 여력이 안 돼서 짧고 알차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진짜 재미있네요. 간신은 살리고 충신은 죽이고, 찰스는 버킹엄을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요. 제임스처럼 게이도 아니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충신이었다기엔 아픈 아버지 나몰라라하는 걸 봤을 텐데, 마리 드 메디시스처럼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했는지 하여간 부자를 나란히 후린 것도 대단합니다. 또 이렇게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내전한 게 나중에 토리당과 휘그당의 기원이 되나요, 아니면 전혀 무관한지 궁금합니다.
어려서 찰스가 버킹엄 따라 다니며 처음으로 인생의 재미를 맛봤죠. 둘이 은밀한 사이라는 설도 있는데 너무 좋아하는 형이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휘그당은 제임스 2세 계승에 반대하는 정치결사라서 조금 뒤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네 저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흔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네 저도 감사합니다~
기다렸던 시간
반가워요~~😃
네 감사합니다~
유럽 전역에 종교적 갈등이 화약고처럼 산재해 있던 그때, 국내의 종교적 갈등을 격화시키고, 자신에게 중요한 신하를 분별없이 대하고, 의회와 내전을 치르며 결정적 순간에 대한 판단도 모자랐던 자질과 그로 인한 실책은 기본적으로 찰스 1세가 그 “왕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애하는지 국정목표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의미없는 만약에… 이지만 경건하고 소박한 수도사로 살았다면 본인도 행복했을 것 같네요. 다음 강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정말 그렇네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의 특권만 고집하다 보니 스스로도 파멸시킨 거 같네요.
권좌에 앉은 사람은 착해서도 뱃장이 작아도 안되나 봐요 .
착하면 안 되죠.^^ 배짱도 커야 하구요.
문제인 너무 착한 사람 그려서 당하지
무능 했다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 마나님 타지마할 앙코르와트 스핑크스 특별기띄워여행시켜주고 옷해입힌것 기밀사항 대통령기록물로 30년봉인 불우이웃 모금할때 진주반지 매직 사실은 진주 반지보다 그두개의 팔찌가 엄청 비싼거였는데 팔찌를 사라지게할 능력까지는 안됐나봐요.마술실력이 ㅎ 마누라 욕심채워주는 능력만 마누라 한테만 착한 문제인ㅎㅎ
@@태전호랭이
문이착하면나는부처
@@태전호랭이문재인이다
조선 왕들도 (이성계로부터 물려받은) 내수사라고 지금 여의도의 100배가 넘는 땅이 있었고 일본 정이대장군도 일본 땅의 5분의 1이 자기 땅이었다네요. 돈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는건 어느 시대이든 어느 곳이든 다를게 없는거 같네요
네 그러고 보니 동서양 다 예외 없이 적용되겠네요. ^^
모자라면 출중한 사람을 옆에 두던가... 한심함의 연속이네요
그러게요. 옆에 있는 사람도 죽였으니...
측근한탠 냉혹하게 국민에겐 자비스럽게 조선시대 태종처럼 그반대가 되면 나라가 혼란하다 현 우리나라처럼
그러고보니 태종이 참 냉철했네요.
찰스1세도 참.... BS새끠네요. 저런 것들이 단지 핏줄만으로 왕좌에 앉다니
리더의 덕목이 참 아쉽죠.
배짱이 두둑하고, 지켜야할건 무슨일이 있서도 꼭 지켜낸다면 안되는일 없겟죠.
네 그게 어려운 거 같습니다.
흥미진진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한사람으로 격고있는 극한상황이라 볼수록 너무 화나네요ㅠ
왕들이 문제가 있어 당시 잉글랜드가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찰스 1세의 생애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어떤 분이 떠오르네요. 그분도 선생님 영상 보고 현명한 선택을 해서 그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도 위기를 넘길 기회가 세번은 있었네요. 찰스는 한번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영국역사에 무능한 왕으로 남았네요.
네 그리고 불행한 왕 최고 순위가 되었죠
영웅의 탄생이군요. 어떤 특별한 체험이 그를 남다른 인물로 이끌었는지 궁금하네요.
네 다음 시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찰스는 할아버지때부터
망조DNA가 내려온 듯
안 좋은 유전자가 왔군요^^
헉,,,,, 찰스 3세.
지켜줄 부하를 저래 허망하게 죽게 내팽겨쳤으니 죽는것도 당연하지요
버릴 사람은 지키고 지킬 사람은 죽이고... 뭐가 안 맞았습니다^^
통치자가 절대 해서 안되는건 우유부단한거 같네요 좋든싫든 해야할땐 결정을 내려야하는데 말이죠
루이 16세랑 참 비슷한거 같아요
학식도 있었고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었고 독실한 종교인이었지만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못 내리다 모든 기회를 놓치고 죽음을 맞은것도 비슷하네요
네 두 사람이 그런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네요^^
최소한 참수형을 모면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는데 안타깝긴 합니다.
네 왜 그렇게 스스로를 막다른 길로 몰고 갔는지 안타깝죠.
최근 사학 연구에 의하면 제임스 1세가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방만하고 관념 없는 재정 운영이 찰스 1세에게 악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메리 1세 때 행해지던 재정 및 행정 개혁이 중단되면서 전근대적 행정과 재정 관념에 머물게 되었고 ....
쓸데 없는 전비와 궁정 비용 - 엘리자베스 보기보다 사치가 심했던 사람이었다고 하죠 - 이 스튜어트 왕가의 재정 운영에 영향을 주었다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원인은 헨리부터가 그렇게 모아들인 재산을 자기의 향락에 써버린 것에서 보듯 집안 자체게 재정 운영 유전자가 없었을지도 ....
그리고 하사금 내리는 것은 당시 왕이 자신의 수족을 만드는 흔한 방식이었습니다
하사금을 거의 내리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제임스 시대보다 더 했다고 하죠
네 역사에 대한 지식을 이렇게 나눠주셔서 감사하네요. 엘리자베스가 제임스에게 막대한 재정을 물려주진 못했죠. 말씀처럼 재정 개혁이 멈추고, 윌리엄 세실의 사망 이후 관리자가 없어져서 혼란스러운 데다 말년엔 여러 요인이 겹쳐 경제난이 찾아오기도 했으니까요. 큰 전쟁도 있었고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 개입하느라 체계 없이 돈을 쓴 것도 누적돼서 악영향을 미쳤겠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치세에는 해적질 덕에 대외수입이 비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왕실 자산도 대폭 늘었구요. 반면 제임스는 수입이 없다 보니 대외 개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죠. 하지만 그 없는 살림에도 대책 없이 사치했습니다. 엘리자베스도 물론 사치스러웠지만 제임스는 총신 챙기느라 그 몇 배나 되는 돈을 썼죠. 그래서 돈이 떨어지자 자산을 팔아치우고 매관매직, 독점권 판매 등을 남발합니다. 싹싹 긁어서 탕진했던 거죠. 결과적으로는 두 전임자 모두 찰스 1세를 어렵게 한 면이 있겠는데요. 구조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에게, 실질적으로는 제임스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보이네요. 그런데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더라도 엘리자베스가 현군이었고 제임스가 암군이었다는 평가가 달라질까요? 최근 연구는 재정 측면에서 그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려는 걸 수정하는 정도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art.humanities 1. 스튜어트 왕가는 최근 연구에 의하면 휘그 사관에 의해 매도된 역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제임스 1세 암군론 역시 휘그 사관에 의해 매도되었다고 하고요 엘리자베스가 워낙 고평가받아 그렇지 현재의 평가는 무난하가 영국을 잘 이끌었다는 평가입니다.
3. 매관매직은 늘 있던 일이었고 독점권 판매 역시 엘리자베스가 거의 재정을 바닥 내 놓고 간 거라서 도리가 없었습니다
4. 총신 챙기기 역시 휘그 사관에 의해 과장된 것이고 되려 엘리자베스는 이걸 안해서 관리들을 부정부패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5. 님이 언급한 내용으로만 봐도 엘리자베스는 현재의 부에 빠져 장래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도형-x9x 논쟁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요.^^ 각자 평가는 다를 수 있겠습니다. 최근 연구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전 그련 면도 있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영국 역사를 보면 참 신기한 것이 노르만 윌리엄의 정복 이후만 따지더라도,
내전의 역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겁니다.
고려, 조선 1천 년과 비교해봐도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일본 카마쿠라 막부 정권과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고려 무신정권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붓의 역사에 매몰되어, 칼의 일본에 정복당한 아품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역사죠. 유일한 강대국 옆의 주변국으로서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무력 강화를 중국에서 가만히 뒀을 리도 없겠구요.
옛날의 국방력은 기본적으로 인구수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날처럼 탱크 같은 무기로 국방력을 강화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나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엄청 중요합니다.
몽골, 거란, 만주족은 당시 고려, 조선이 비해서도 인구수가 말도 안 되게 적었습니다.
그 적은 인구로 중국 대륙을 유린한 것은 무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강력한 노비제도도 국방력 약화를 불러온 중요한 요인입니다.
약 40% 달하는 노비는 국방력이 반으로 확 줄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구려, 고려도 노비제도는 있었지만 무를 중시했다는 측면에서 조선과 많이 비교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조선이 무력이 약해진 건 문을 너무 중시한 문화 때문이라는 거죠.
뭐든 힘쓰는 일을 천하게 여긴 문화가 조선을 무기력하게 한 가장 강력한 요인입니다.
예전에 수, 당이나 강력한 거란을 상대한 고구려, 고려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당당하게 물리쳤습니다.
고려가 최강 몽골군에게 30년 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정권의 그 기상이 한 몫 했다고 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동한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이 너무 속절없이 일본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조선이 너무 문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질을 당했습니다.
조선은 무를 좀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가 시책을 잡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버킹엄 공작을 끝까지 고집한 것 하나만으로도 찰스 일세는 자기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사적으로 너무 친하다 보니 ^^;
찰스 1세는 세번의 기회를 다 살렸어도 조금 힘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일단 엘리자베스의 그림자와 제임스 1세의 어설픔을 동시에 물려 받았기 떄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지금도 해결안되는 종교 갈등을 심각하게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만이 나온 상태 였습니다.
메리 여왕 시대 카톨릭을 복원 하려고 노력 했지만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이 최근 이론 입니다. 즉 메리 여왕 시절에는 종교 갈등이 심각하지 않아서 여왕이 카톨릭 복원의 길로 가도 큰 문제없었고 블러드 메리라는 악평도 엘리자베스 여왕때 만들어진 악평이라는 것이 최근 이론이죠. 메리 여왕이 조금더 살아줬더라면 영국은 카톨릭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론이 많습니다.
그런데 30년 전쟁 이후 종교 갈등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영국에 유입 되면서 왕도 손을 못쓸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물론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조금더 현명해서 주변을 잘 설득했더라면 다행이지만 이건 좀 힘들었다고 봅니다.
지방 분권이 심해서 왕의 권위가 프랑스 같지 않았던 영국에서 종교 갈등까지 더해지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죠. 무엇보다 리더십이 없는 찰스는 운이 좋았어도 어려움의 연속이었을 거라 생각되네요.
최소한 퇴위하거나 쫒겨났을 지언정 참수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이죠. 종교 문제는 찰스의 가장 큰 실책이였다고 보는데 차라리 부왕 제임스 처럼 아무것도 안하고 갈등 상황을 조장할만한 어떠한 것도 안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보았을 것이고 어차피 프랑스 위그노와 독일의 수많은 신교도들, 네델란드 루터파, 캘빈파 등등이 성공회만 강요안했다면 떼거지로 바다 건너 넘어오고 이 과정에서 왕이 종교 수장으로 갈등을 잘 조정했다면 오히려 왕의 권력이 공고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봅니다. 인구, 특히 상공업 인구도 늘어났을것이고. 암튼 그럴 정도의 정치적 역량이 안되긴 했죠.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건 동서고금의 진리구나 ㅜㅜ
ㅎㅎ 그렇습니다
찰스도 엘리자베스 처럼 해적들을 고용했어야 되는데(?)
엘리자베스 때처럼 해적을 잘 부렸다면 여러 문제가 해결되었겠네요^^
찰스 1 세 그냥 또라이 였네
그리고 영국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것은 이미 엘리자베스 때 포기한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은 켄터베리와 요크의 대주교였고 국왕은 교회의 보호자였습니다
Supreme Head 냐 Supreme Governor 냐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이는 여성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의식해 용어를 바꾼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바뀐 건 별로 없구요. 핵심은 주교 임명권이라 할 수 있는데 스튜어트 왕들에게도 주교 임명권이 있었습니다.
@@art.humanities 주교 임명권 혹은 주교 후보 추천권은 당시 꽤 영토가 있는 세속 군주라면 누구나 있는 것인지라 ....
헨리7세도 구두쇠
존, 찰스 머저리의 상징.
돈을 뿌리고 사람들이 가져가려고 소동일으키는걸 유흥으로 즐겼다니 대체 어디까지 천박한 인간인건가요;;
네 제임스 왕이 가벼운 성격이라 궁전 문화도 상당히 가벼웠던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