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보는 것은 한국인의 주관이므로 아무래도 좋지만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현대의 해석에서 거북선은 결함선이었다. 속도가 느려 대포를 쏘자 배 안에 검은 연기가 충만해 질식했다. 갑판에 가시가 있기 때문에 돛을 치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일본군이 무장하기 전 첫 2개월뿐이다. 일본군의 배가 대포를 장비해, 곶에 포대를 설치하면, 조선 수군은 무력화되어, 연전 연패였다. 다음은 상황과 그것이 쓰여 있는 문헌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이순신을 세계의 명장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뿐이다. 세계 사람들은 이순신 등 모른다. 한국인이 날조한 스토리에 세계 사람들은 흥미가 없는 것이다.
Hello Chad and Professor Peterson. You said in one of your videos all Koreans know Yi Soon Shin, but they don't really know how great he was. I am beginning to realize I am one of these people. I thought Chad is a great strategist watching his ytube on Dokdo in the Time Square. It was brilliant. And, again today, I agree with him about the movie and having an accurate Korean history known to the broader public with entertainment.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inx2853 말의 포인트를 잘 이해 못하시는것 같으시네요. 주변에 도움주신 분들이 있었겠죠 ... 도움 주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 그런 걸 말씀 드리는것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같은 분이 인정을 받고 더 큰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감옥을 갔습니다. 오히려 기회주의자 관료들의 정치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Hello proffesor!!!! I really really enjoyed this and your reaction of roaring currents. I hope that you will also react in the future this year to NORYANG SEA OF DEATH. It will be 3 hours!!
1:55 Just so everyone knows, Yi Sun Shin never lost a ship. I'm sure Professor Peterson knows this as well but the ships that were lost were under General Won. Yi Sun Shin fought about 2 dozen naval battles and never lost a ship. Before I learned about Yi Sun Shin, I was skeptical of some of these claims but turns out they were true. Yi Sun Shin had a perfect record of never losing a single battle or a single ship. I first learned about Yi Sun Shin from the movie, Heaven's Soldiers (2005), which was a time traveling sci fi action comedy when at the end, they very briefly mentioned the Battle of Myeongryang where he defeated a much larger force with only 13 ships. I thought it was part of the fiction but turns out was true.
In a nutshell, Yi Sun Shin achieved his victories because the Japanese naval tactics at the time were to board and scuttle enemy ships at close range while Yi Sun Shin's strategy were to blast them out of the water with dozens of cannons on each ship at distance so in reality, all these battles were pretty boring with Yi Sun Shin turning enemy ships into toothpicks before they could even get close.
Yi Sun Shin would basically spin his battleships (panokseons) in circles like a gatling gun so one broadside could fire all their cannons then reload while the boat spins to fire all the broadside cannons on the other side and repeat. All while using signal flags to keep his boats in formation.
What's amazing is that Yi Sun Shin, from his time in guarding the Manchurian land border, would employ modern training tactics of drilling his soldiers for certain scenarios, which makes the sci fi action movie, Heaven's Soldiers, all the more believable. Yi Sun Shin constantly drilled his soldiers as if employing modern training tactics in the 1590s.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한산 용의 출현" 을 극장에서 직접 보고 걸작이었습니다. 명량 영화와는 다른 임팩트를 주는 느낌의 최고 걸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웅장한 배경음악 사운드 역시 아주 좋았습니다. 요즘 넷플릭스같은 OTT가 활성해지고 유명해지면서 영화 명량때보다는 극장으로 가는 관객수가 동일 기간으로 따져 봤을때 감소했지만 , "한산 용의 출현"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할 걸작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배우 탁월합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하이 채드! 채드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혹시 이번에 대뷔한 뉴진스 걸그룹 Cookie 성적 논란에 대해서 피드백 해주실 수 있나요? Cookie 라는 슬랭에 대해서 해외에서도 한국에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통번역가와 해외 영어권 네티즌들 그리고 유학생들 등 문제제기를 했는데요. 해당 걸그룹 소속사에서 입장문도 낸 상황인데 문제가 되는 경우는 영어 슬랭이 야해서가 아니라, 이 슬랭을 쓴 걸그룹이 미성년자여서 문제로 논란입니다. 채드님과 하버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통번역가 문제제기 ruclips.net/video/z4X-0QAUCjw/видео.html 입장문에 대한 통번역가 입장(소속사 입장문도 있습니다) ruclips.net/video/DwM0ygXToiY/видео.html 쿠키 가사를 들은 외국인들 반응 ruclips.net/video/FIIF7mlY9SM/видео.html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전작 명량은 그 전투 씬은 굉장했으나, 이를 저해하는 드라마적인 요소, 즉 이순신의 두루뭉슬한 고뇌와 주변 인물들의 소모 등으로 얼룩진 치사량의 국뽕 영화라면. 이번 한산은 명확한 주제와 서사 그리고 막판 전투를 위한 복선과 상황을 설계하여 담백하면서도 폭발적으로 표현한 영화임. 얼른 후기 올려줘잉.
생각보다 비상선언이 별로여서 그건 스킵하셔도 될거같은데 한산은 꼭 보셨으면 합니다!
두분께 항상 감사 드립니다 !!!!
두분이서 역사적인 영화 다룰때가 제일 재밌는것 같아요! 한국인보다 더 풍부한 역사적 지식과 깊은 토크가 인상적이고 저또한 많이 알아갑니다! 언제나 한국에 깊은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교수님과 함께 한산 보시는 리뷰도 기대할게요 명량보다 확실히 더 좋아졌어요 ㅎㅎ
이순신을 영웅으로 보는 것은 한국인의 주관이므로 아무래도 좋지만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현대의 해석에서 거북선은 결함선이었다. 속도가 느려 대포를 쏘자 배 안에 검은 연기가 충만해 질식했다. 갑판에 가시가 있기 때문에 돛을 치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일본군이 무장하기 전 첫 2개월뿐이다. 일본군의 배가 대포를 장비해, 곶에 포대를 설치하면, 조선 수군은 무력화되어, 연전 연패였다.
다음은 상황과 그것이 쓰여 있는 문헌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이순신을 세계의 명장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뿐이다.
세계 사람들은 이순신 등 모른다. 한국인이 날조한 스토리에 세계 사람들은 흥미가 없는 것이다.
미국극장에서 봤는데 재밌었어요
Hello Chad and Professor Peterson. You said in one of your videos all Koreans know Yi Soon Shin, but they don't really know how great he was. I am beginning to realize I am one of these people. I thought Chad is a great strategist watching his ytube on Dokdo in the Time Square. It was brilliant. And, again today, I agree with him about the movie and having an accurate Korean history known to the broader public with entertainment.
오랜만이에요! 채드
피터슨 교수님이랑 함께하는 거 언제나 즐겁습니다.
특히 이런 역사물을 같이 본다는 거!
잘 보고 갑니다. ^________^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지난 1편 명량 보다 이번에 개봉한 2편 한산이 훨씬 재밌습니다.
명량이 훨 재밌지. 한산은 영화자체는 재미 없음
충남 아산시에 이순신장군의 묘가있습니다
@@GonZo9072 전혀 ㅎㅎ
교수님~~ 채드님~~^^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해요ㅎㅎ 영화 리뷰영상도 꼭 볼게요!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리뷰영상 기대돼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두분 항상 감사 드립니다^^
항상 감사 드립니다
꼭 보고싶네요
👍👍👍👍
두분의 리뷰가 엄청 기대됩니다.....감사합니다
저분 넘흐저앙!!!!멋지십니다!!!!
두분 투샷 정말 반가워요~~ 이번 한산도 기대가 됩니다. 영화 보시고 두분 리뷰도 올려주세요 기대할게요~~♥
교수님! 채드!
항상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그래도 역시 영화는 영화이기 때문에 거북선 나오는 장면 등은 영화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지요😃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마지막 노량은 개인적으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열연을 펼친 '김명민'배우가 마무리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김윤석 배우가 촬영을 했어요
@@user-ps3cl5nl6s 이미 노량까지 찍었는데 왜 자꾸 김명민을 찾아요?
저도요
@@user-ps3cl5nl6s 그래요? ㅠ ㅠ 아쉽네용 ㅠ
@@user-ps3cl5nl6s 아.. 그랬군요. 아쉽네요.
왜 우리나라에 의인은 항상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하는 걸까요....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가 않아 이순신장군님이 더 생각납니다
이순신도 주변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고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inx2853 말의 포인트를 잘 이해 못하시는것 같으시네요. 주변에 도움주신 분들이 있었겠죠 ... 도움 주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 그런 걸 말씀 드리는것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같은 분이 인정을 받고 더 큰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감옥을 갔습니다. 오히려 기회주의자 관료들의 정치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모두 데타라메이다.
역시 환상의 조합! 우물안 개구리 교수님과 채드! 다음 본영화 리뷰도 너무 기대되요!
두분 조합이 너무 좋아요
welcome back, Chad!
교수님 자막 번역에.... Japanese를 왜놈... ㅋㅋㅋㅋ 역시 한국학박사님.
님이 여기서 왜나옴?? ㅋㅋ 오토기어, 왜있슈에서 잘보고 있습니다.
이번2편이 cg나 스케일이 확 커졌죠
젊은 사람들에게 사극의 재미를 붙여주기 위해 혹은 소설이나 웹툰이 판타지면 사극 드라마가 판타지로 나오기도 합니다.
빨리 부탁드릴께요 🙏
채드 방갑다 되게 오랜만인야 명량 때도 두분이 함께해서 좋았던 기억이
Hello proffesor!!!! I really really enjoyed this and your reaction of roaring currents. I hope that you will also react in the future this year to NORYANG SEA OF DEATH. It will be 3 hours!!
한산 영화 풀영상 리뷰도 찍으면 좋을것 같아여~~~
ruclips.net/video/OD1ocTY75ts/видео.html
한국사람으로서도 영화가 잘나오길 빌었는데 영화를 보니 잘만들었더군요 리뷰가 기대됩니다ㅎ
1:55 Just so everyone knows, Yi Sun Shin never lost a ship. I'm sure Professor Peterson knows this as well but the ships that were lost were under General Won. Yi Sun Shin fought about 2 dozen naval battles and never lost a ship. Before I learned about Yi Sun Shin, I was skeptical of some of these claims but turns out they were true. Yi Sun Shin had a perfect record of never losing a single battle or a single ship. I first learned about Yi Sun Shin from the movie, Heaven's Soldiers (2005), which was a time traveling sci fi action comedy when at the end, they very briefly mentioned the Battle of Myeongryang where he defeated a much larger force with only 13 ships. I thought it was part of the fiction but turns out was true.
In a nutshell, Yi Sun Shin achieved his victories because the Japanese naval tactics at the time were to board and scuttle enemy ships at close range while Yi Sun Shin's strategy were to blast them out of the water with dozens of cannons on each ship at distance so in reality, all these battles were pretty boring with Yi Sun Shin turning enemy ships into toothpicks before they could even get close.
Yi Sun Shin would basically spin his battleships (panokseons) in circles like a gatling gun so one broadside could fire all their cannons then reload while the boat spins to fire all the broadside cannons on the other side and repeat. All while using signal flags to keep his boats in formation.
What's amazing is that Yi Sun Shin, from his time in guarding the Manchurian land border, would employ modern training tactics of drilling his soldiers for certain scenarios, which makes the sci fi action movie, Heaven's Soldiers, all the more believable. Yi Sun Shin constantly drilled his soldiers as if employing modern training tactics in the 1590s.
We know this because he documented his life in his diary, the 난중일기 and his close confidant in court, 징비록 and the 임진장초.
한산은 해전 한번을 위해 빌드업 하는 과정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수도 있어요. 몇몇 불필요한 장면도 보이고요
그래도 화력덕후 한국인의 전투를 볼수있죠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한산 용의 출현" 을 극장에서 직접 보고 걸작이었습니다. 명량 영화와는 다른 임팩트를 주는 느낌의 최고 걸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웅장한 배경음악 사운드 역시 아주 좋았습니다. 요즘 넷플릭스같은 OTT가 활성해지고 유명해지면서 영화 명량때보다는 극장으로 가는 관객수가 동일 기간으로 따져 봤을때 감소했지만 , "한산 용의 출현"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할 걸작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배우 탁월합니다.
그러고보니,
채드님의 영상 속 교수님과
클로에의 영상 속 교수님이
똑같으신분 같아요 ^_^;;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은 이미 촬영이 완료되었으며 한국에선 2023년 구정 쯤에 개봉할 예정으로 압니다. 제목은 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모두 데타라메이다.
거북선은 여수에서 만들엇다는것도 기억합시다
이순신장군님 짠팬 교수님 견해가 궁금했는데 역시나 해박하신 지식에 감탄하고 갑니다~
우물밖 개구리 마크 피터슨 교수님 아니지.. 지금은 호가 있으시니 유파 교수님이셨나요 여기서도 뵙네요 ^^
이정재가 감독한 헌트..
탑건 매버릭
한산
다 봤는데..
탑건 매버릭 > 헌트 = 한산
헌트가 생각보다 재밌었음..
이것도 한국 83년도를 배경으로 역사를 기반으로 한 각색한 영화인데..
재밌었음..
저는 결말이 너무 별로였고
솔직히 중간에 좀 졸 정도로 진부했던 것 같네요
하버드 교수님을 모시고 "효자동이발사" 같이 한번 봐 보시죠. 현대사 암흑기 블랙코메디 입니다.
한산에선...일본은 화려하고 우린 왜 초라해 보일까요???
한산 vod 나왔네요 리뷰 부탁드려요
DVD말고 극장에서 그 웅장하고 장엄한 해전을 보면 다르죠~
4대 대첩 👍 👍 👍
미국에서 사는데, 이 한국영화는 정말 보고 싶어요...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Reaction alienoid trailer nexttt please
꼭 리규 부탁드립니다^^
정확하시네요 저도 그리고 대다수가 상업적이기만 한 판타지 사극좀 없에고 대중성과 고증 정확한 사극을 기대합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ow can I contact Chad to speak at a BYU class? Joel campbell
r
Hi Joel, send me an email! bchadtanner@gmail.com
4DX로 보시면 진짜 거북선 밑에서 같이 전쟁하는 기분입니다. 진짜 경험해보시면 신세계이실 텐데요 ㅠㅠ
하이 채드! 채드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혹시 이번에 대뷔한 뉴진스 걸그룹 Cookie 성적 논란에 대해서 피드백 해주실 수 있나요? Cookie 라는 슬랭에 대해서 해외에서도 한국에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통번역가와 해외 영어권 네티즌들 그리고 유학생들 등 문제제기를 했는데요.
해당 걸그룹 소속사에서 입장문도 낸 상황인데
문제가 되는 경우는 영어 슬랭이 야해서가 아니라, 이 슬랭을 쓴 걸그룹이 미성년자여서 문제로 논란입니다.
채드님과 하버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통번역가 문제제기
ruclips.net/video/z4X-0QAUCjw/видео.html
입장문에 대한 통번역가 입장(소속사 입장문도 있습니다)
ruclips.net/video/DwM0ygXToiY/видео.html
쿠키 가사를 들은 외국인들 반응
ruclips.net/video/FIIF7mlY9SM/видео.html
항상 영상 잘 보고있습니다.
일본에 20년째 살고있는 한국인 입니다.
저도 항상 그렇진 않겠지만 다른 나라들 보다 정확히, 그것이 혹 한국의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정확한 사실만을 묘사해 주길 바라는 한사람 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앞으로도 영상 기다리겠습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전작 명량은 그 전투 씬은 굉장했으나, 이를 저해하는 드라마적인 요소, 즉 이순신의 두루뭉슬한 고뇌와 주변 인물들의 소모 등으로 얼룩진 치사량의 국뽕 영화라면.
이번 한산은 명확한 주제와 서사 그리고 막판 전투를 위한 복선과 상황을 설계하여 담백하면서도 폭발적으로 표현한 영화임.
얼른 후기 올려줘잉.
한산은 임진왜란 중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고 봅니다 이후 정유재란이 있었지만 전세를 뒤집는 전투라고 봅니다
한산은 거북선 하나만 봐도 볼 만한 영화
예전에 오백 종이돈...이순신..흔적도 없이.. 일본놈의 집요함.우리가 쓰는 흔하게.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숙종때 대광보국. 숭록대부 임에도..
미친 장군을 지키는 이놈들이 참~
육군은 100전인대 바다는 100패 이노ㅓㅁ을 알자 그게
정작 일본인들은 이순신이 허구의 인물이라고 믿지 않는데 서양인인 교수님은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존경합니다
오백원 동전. 학보다 못한...우리가 사용하는 어떤 곳에도 그는 없다...
역사에 관심없는 한국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외국분들.. 감사하네... 한국 역사에 이리도 정통하시니..
ruclips.net/video/0cZU2OmyL-Y/видео.html
3주전에 다른 극장에선
이미 개봉 했다는데요???
그래봤자 318 년 후 1910 년에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됬는데. 지금도 일본은 경제 3위, 한국은 경제 10위.
이순신장군은 성역이죠. 고증없이 함부로 만들었다간 난리나죠. 저는 고구려전투도 다뤘음해요. 중국 눈치 안보고..
같은방법의로만들지안아서요저가드기는요명량 은배를물에드어스면한산은배를드어지안아서요
왜놈이란 번역이 인상 깊네요 왠지..울컥 했습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채드님 한산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왜놈이라고 번역쓴거 왜이리 웃기지 ^^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는 침묵
왜놈이라는 해석 감사요 ^^
더럽게 재미없어 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