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이 그 예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패퇴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초기 태종때 거북선은 크기가 작았습니다. 임진왜란때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조했기 때문에 크기가 판옥선하고 동일 했습니다. 일본 기함배 아타케부네 무게가 180 ton 이상, 중형선 세끼부네 120 ton 이하 소형선 50 ton, 조선의 판옥선은 배수량 280 ton , 거북선은 그이상으로 추측 됩니다. 일본 아타케부네 장갑 나무 두께가 6 cm 나무 재질 삼나무, 조선의 판옥선 나무 두께 12 cm, 재질 소나무(삼나무보다 강도가 30% 강함). 일본의 배는 내구성이 너무 약해서 두배가 충돌하면 일본배는 타격이 심할거라고 예상 됩니다. 원균이 아닌 이순신이 바다를 지키고 있을때는 마지막 노량전까지 한척의 배도 잃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다.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명량 해전에 남은 12척에 거북선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준공했다면 어딘가에서 침몰했을 텐데 잔해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거북선의 재현을 시도했지만 곧 침몰해 버렸다. 갑판의 철의 가시가 무겁고 뒤집힌 것이다. 흑색화약을 사용했던 당시 조선의 대포를 선내에 탑재하면 발사시 흑연으로 선내는 새까맣게 될 것이다. 또 철의 가시 때문에 돛을 뻗을 수 없었을 텐데, 인간이 젓아도 용골이 없는 평저한 배는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거북선은 조선에 무지한 이순신이 망상한 결함선으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From this video, i don’t know that RUclips algorithm for your youtube channel is not introducing anymore to someone who wants to watch your videos. Anyway, Thanks a lot!!
영화관에서 봤을때의 웅장함이란!! 물을 전혀 쓰지 않고 촬영했다는 사실을 잊고 푹 빠져서 봤었는데~ 역사 다큐에서의 내용을 보면 거북선은 처음 유인하는 배로 쓰였었다고 해요. 일반 배보다 회전과 대시가 용이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저렇게 박는 용도가 아니라 포탄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사하고 이동하기 좋도록 용두를 설계했다고 하네요. 두분도 푹 빠져서 보시고 의미있는 장면들을 이야기하시는 모습 항상 너무 좋아요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다.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명량 해전에 남은 12척에 거북선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준공했다면 어딘가에서 침몰했을 텐데 잔해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거북선의 재현을 시도했지만 곧 침몰해 버렸다. 갑판의 철의 가시가 무겁고 뒤집힌 것이다. 흑색화약을 사용했던 당시 조선의 대포를 선내에 탑재하면 발사시 흑연으로 선내는 새까맣게 될 것이다. 또 철의 가시 때문에 돛을 뻗을 수 없었을 텐데, 인간이 젓아도 용골이 없는 평저한 배는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거북선은 조선에 무지한 이순신이 망상한 결함선으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Hello Chad and professor Peterson! It's always so nice to see you. There are lots of us waiting for your videos and we are so happy to see this one. Please stay healthy and happy.
8:05 To be clear, any Korean ships that were lost were not under Yi Sun Shin. Yi Sun Shin did not lose a single ship under his command in his entire military career (except for Chinese ships who defied his orders in later battles). All the turtle ships that were lost were during the disastrous Battle of Chilcheollyang which was completely commanded by Won Gyun. Yi Sun Shin was tortured, imprisoned, and demoted to rank and file soldier during this time by the inept Korean court and paranoid King. Yi Sun Shin won 23 battles out of 23 battles. A perfect record which seems unbelievable especially considering he didn't even lose a single ship.
Yi Sun Shin discovered historical references to the turtle ship but had no blueprints so he had to improvise. What he did was took regular Panokseons (the main and largest battleships) and put a roof on it so in this regard, the Professor is incorrect. The turtle ships were about the same size as the Panokseons. The source of this information comes directly from Yi Sun Shin's War Diary or 난중일기. English translations of this book are difficult to find and expensive unfortunately.
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이 그 예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패퇴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그들은 모두 후세의 조선인에 의한 날조입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은 없고, 일본군과 싸운 사실도 없습니다.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하여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직후의 3개월간만으로, 그 후의 7년간은 이순신은 기습 공격해도 모두 일본군에 역습되어 도망치고 있습니다. 일본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중요한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 남아 있는 그의 기록은 그의 사망을 전한 것뿐입니다.
Just finished watching this movie and saw this video in my feed. Of course I recognized the professor and had to watch. I also thought the gisaeng was Nongae at first. I was waiting to see if Jinjuseong would come into play in the movie (a place on my to-go list in Korea). Overall I thoroughly enjoyed this movie as well. Happy to see others with the same opinion! Thanks for sharing
이순신과 같이 한산의 배우들 역시 명량의 배역들과 이어짐. 명량이 신파로 많은 비판을 받아서 그랬는지 감독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한 장면 이외의 허구의 스토리 부분을 많은 부분 줄여서 관객들이 이를 잘 알아채지 못해서 아쉬움. 각 배역들이 한산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인물이 변하는 씬을 영화 마지막 부분에 넣어 줬으면 명량을 봤던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죠. 이순신 - (명량) 최민식 -> (한산) 박해일 와키자카 야스히루 - (명량) 조진웅 -> (한산) 변요한 임준영(남자 스파이) - (명량) 진구 -> (한산) 옥택연 정보름(여자 스파이) - (명량) 이정현 -> (한산) 김향기 ※ 명량에서 허구의 신파라는 비판을 제일 많이 받았던 임준영과 정보름 부부가 어떻게 만나게 됐고, 정보름이 왜 말을 못하는 언어장애를 갖게 됐는지 한산편에서 설명이 됩니다. 준사(항왜군사) - (명량) 오타니 료헤이 -> (한산) 김성규 나대용(거북선 제작자) - (명량) 장준녕 -> (한산) 박지환
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이 그 예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패퇴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A movie about the last battle of Lee Soon-sin is about to release in Korea at Dec 20, 2023. You will be able to watch it soon there in America, I guess. Cheers.
두 분이 함께 나올때 마다 너무좋아요ㅋㅋ 한산도대첩 일본측 사령관(와키자카 야스하루)도 한국에선 무척 유명한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님과는 라이벌처럼 등장하는 드라마도 많아서인지 꽤 익숙해요! 대표적인 전투가 왜란 초기 용인전투인데 2000명이 채 안되는 병사로 7만명의 조선군을 패퇴시킨 전투입니다. 일본입장에서 대표적인 맹장중 한 명이었죠.
왜군 장군 중 패하는 장수는 ‘미역장군 와키쟈카’ 로 꽤 유명한 장수 입니다. 한산에서 패 한 후 무인도에서 미역으로 버티다가 탈출해서 미역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죠. 유일하게 조선 수군과 기록이 일치 하는 정직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패함에 대해 숨김 없이 적은 사람이죠. 이런 두가지 때문에 왜군 하면 와키쟈카가 떠 오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고 하던데…) 그래선지 전편인 명량에도 꽤 비중있게 등장 합니다.
제가 알기로 거북선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철로 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못을 사용했습니다. 판과 판 사이의 이음매에 나무 쐐기를 박는 특수한 공법을 사용하여 구조물의 강성을 매우 강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배와는 다르게 조선의 배가 충돌하여 파쇄하는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게 바로 이 공법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이순신 시기의 거북선은 용머리가 아래에 붙어 있고, 용머리가 위로 솓은 형태의 거북선은 정조가 제위에 있던 18세기에 만든 거북선입니다. 그리고 역사기록에는 세조(15세기) 때에도 거북선은 존재했던 걸로 보입니다. 조선의 전투선은 밑바닥이 편평하여 조수간만에도 배를 제어하기 쉬웠으며, 특히 적선이 다가올때 한쪽면으로 포격하고 180도를 돌아서 반대면에서 포격하고 다시 180도 돌아서 반대면의 포병이 포격하는 식으로 계속 돌면서 연사했습니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않더군요.
일본배는 기동력을 위해 조선배에 비해 가벼워 비교적 내구성이 약하였기 때문에 조선배와 일본배가 부딪히면 일본배가 손실이 심했고 거북선은 일본배 사이에 들어가서 교란시키는 목적이였는데 물에서는 조종(control) 이 쉽지 않다보니 부딪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거북선과 일본배의 충돌도 연출이 되었고 원래는 충돌 목적의 배는 아니였지요.
Hello proffesor!!!! I really really enjoyed this and your reaction of roaring currents. I hope that you will also react in the future this year to NORYANG SEA OF DEATH. It will be 3 hours!!
예상이지만. 아니 전술적으로 본다면. 거북선은 주력이 아니라 포위섬멸 전에서 '망치와 모루'전술에서 모루의 역할이죠. 소수로 다수의 집중된 공격력을 받아내서 버티는 역할. 버텨주는 동안 포위 섬멸 기동을 할 수 있으니까. 중장보병의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수에 둘러쌓이게 될게 뻔하니까 지붕을 막아서 넘어오지 못하게 만들었죠. 포위섬멸전을 하는 방법은 2가지 입니다. 적의 총공격을 받아서 정체를 시키던가. 스스로 올가미 속으로 들어오도록 유인작전을 하던가. 어쨌든 전투의 승패는 중앙돌파를 어떻게든 뚫리지않고 막아내야 한다는거. 누구나 다 아는 전술이지만 해내는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애초에 포위 섬멸전은 적보다 3배쯤 우리 숫자가 많을때 쓰는게 정상입니다. 근데 우리가 소수다? 안그래도 숫자가 적은데 길게 늘려서 안그래도 얇은 반어망을 더 얇게 만든다? 이 방어망 중 1점이 적의 총공격에 안뚤리겠어요? 다 뚫리지. 근데 이순신 장군이 이걸 해낸 겁니다. 그러니까 군신 이라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다.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명량 해전에 남은 12척에 거북선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준공했다면 어딘가에서 침몰했을 텐데 잔해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거북선의 재현을 시도했지만 곧 침몰해 버렸다. 갑판의 철의 가시가 무겁고 뒤집힌 것이다. 흑색화약을 사용했던 당시 조선의 대포를 선내에 탑재하면 발사시 흑연으로 선내는 새까맣게 될 것이다. 또 철의 가시 때문에 돛을 뻗을 수 없었을 텐데, 인간이 젓아도 용골이 없는 평저한 배는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거북선은 조선에 무지한 이순신이 망상한 결함선으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The background of this Seven Years' War is that the carelessness and arrogance of Joseon (Korea), which enjoyed only peace and culture for 200 years, treated Yamato (Japan) as a barbaric pirate group rather than a country. However, Yamato had a high level of tactics through clan battles for 100 years, and the 170,000 troops of Toyotomi, who unified the whole country, armed with Portuguese matchlocks and attacked Joseon. Historically, Japan has waged a surprise war without a declaration of war.The 16,000 Elite heavy cavalry that Joseon was proud of, which had suppressed the cruel northern peoples, was defeated by the Yamato Matchlock unit, and 70, 000 Joseon Army was pushed back all the way to Pyongyang. Yamato, which was a medieval feudal lord era, gained land and people if it won a war, but in Joseon, which was a centralized country, the king fled to the north, but the people and monks formed a militia and fought to the end , the Japanese army was embarrassed by the existence of the Militia.Admiral Yi Sun-sin of Joseon defeated the Japanese navy by winning all 33 naval battles despite overwhelming odds. The basic weapons of the Joseon army were bows, spears, and swords, as well as gunpowder bombs and various cannons of different sizes..The Ming Dynasty (China) sent reinforcements to help Joseon, but instead harassed Joseon by plundering and engaging in internal communication with Japan, but helped Yi Sun sin in the final naval battle.Yamato, who did not have the technology to make pottery, Taken in hundreds of Joseon pottery craftsmen to make pottery and exported the pottery to Europe, where it received favorable reviews. Joseon was unable to recover from the aftereffects of this war for 300 years and suffered the humiliation of being annexed by Japan, which it regarded as an uncivilized island, and being ruled for 35 years.A quarter of Koreans were sacrificed in this terrible war, and in Japan, there is a grave of head, ears,nose, a Korean civilian, as a record of the war. This Great War was a symbolic event in which the international status of the Korean Peninsula with 4,800 years of history was reversed by the Japanese archipelago with 1,800 years of history. 300 years later, Joseon became a reclusive country with a policy of isolation, and Japan defeated the Russian fleet through the strategy of Yi Sun-sin(T tactic, a modification of A cran's wing formation), the great naval admiral of the country it invaded 400 years ago, and later joined the ranks of the great powers. Yi Sun sin's the world's top 3 naval admiral and the turtle ship is an invincible Korean Item in the Age of Empires PC Games.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Japanese soldier located near tongyoung and geoje island in which many people lived. Admiral Yi soon sin want japanese to move to han san island because he didn't want japanese to slaughter joseon civilian people after their arrival to tongyoung and geoje and japanese defeat in combat. There are no people in hansan island. Actually, most of the japanese who lose in the combat are starved and killed by joseon soldier in hansan island.
@@honshin23 충파 자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충돌해 파괴하는게 아니라 멀리서 포를 쏴서 파괴하는 방법이었을 거라는 말이 있죠 역사에 기록된 일부도 충돌이 아니라 포로 파괴한다는 듯한 의미의 글이 있기도 하고 우리 군의 공격 방법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구요 상식적으로 충돌해 파괴하려면 엄청난 속도가 필요한데 속도가 느린 평선인 판옥선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이면 그런 속도를 내기도 힘들고 한번 충돌을 일으키면 다시 가속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겠죠 거북선의 역할은 군의 선두에서 적의 진영을 돌파하거나 그 사이로 들어가 포를 쏘고 돌아다니며 적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교수님! 늘 항상 한국에 대해 잘 전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지식을 다른 교수님들과 공유 하실 수 없나요? 요새 보면 어설프게 한국에 대해 안다고 하는 교수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는데 교수님 같은 깊이가 없어요. 그 분들은 어떻게 한국에 와보지도 않고 한국을 안다고 강의 하는지 어의 없어요. 책으로만 공부하는 한국이 아닌 교수님처럼 제대로 된 지식을 알고 계신 분들이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오시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요. 건강하세요!!
한산대첩에서는 거북선이 건재해있었고.. 원균이 칠천량에서 거북선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선군함을 잃었죠.. 아마도 저때 거북선이 없었다고 하는 건 명량해전을 이야기하는 거 같네요. 전투의 순서가 '..한산대첩-칠천량대패-명량대첩..' 이었으니..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도.. 거북선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김향기가 맡은 역할이 명량에서 말 못하던 그 여인(이정현)입니다. ^^ 그 부부의 프리퀄이죠. 이렇게 두 영화가 이어지는거죠 ㅎㅎ 논개는 아니고 가공의 인물이지요.
한국을 사랑하는 교수님과 채드를 사랑합니다 💜 항상 건강하시길..
근데 자막에 왜놈이라고 쓴거 ㅋㅋㅋㅋㅋㅋㅋㅋ 왤케 웃겨요?? ㅋㅋㅋㅋㅋㅋ 한국인들이 일본 말할때 왜놈이라고 하는데 ㅋㅋㅋㅋ 외국인 두분이서 왜놈이라고 하니까 너무 웃기고 재밌네요 ㅋㅋㅋㅋㅋ 역시 명예한국인 채드와 피터슨 교수님!! 사랑합니다 🧡
영상 감사히 잘 봤습니다 ~ 노량도 부탁 드립니다 ! 😀😁😄
명량 리액션 이후로 오랫만이네요~^%^ 너무 좋아요
안녕하세요
오래만에 뵙습니다
날씨가 쌀쌀한데 건강 잘 챙기세요
항상 행복하세요🤗
교수님과 채드님 리액션 영상 잘봤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위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이 그 예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패퇴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두분다 정말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Yi Sun Shin the greatest Korean legend and Jumong just behind him.
Jumong established Koguryo. Koguryo means korea. Jumong conquored nearly all of north china nowdays.
초기 태종때 거북선은 크기가 작았습니다. 임진왜란때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조했기 때문에 크기가 판옥선하고 동일 했습니다.
일본 기함배 아타케부네 무게가 180 ton 이상, 중형선 세끼부네 120 ton 이하 소형선 50 ton, 조선의 판옥선은 배수량 280 ton , 거북선은 그이상으로 추측 됩니다.
일본 아타케부네 장갑 나무 두께가 6 cm 나무 재질 삼나무, 조선의 판옥선 나무 두께 12 cm, 재질 소나무(삼나무보다 강도가 30% 강함). 일본의 배는 내구성이 너무 약해서 두배가 충돌하면 일본배는 타격이 심할거라고 예상 됩니다. 원균이 아닌 이순신이 바다를 지키고 있을때는 마지막 노량전까지 한척의 배도 잃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그알에서 본 내용인데 실제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그린 그림이 있어서 보니 거북선이 무려 3층짜리로 그려져 있더라구요... 이부분에 대한 연구도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그들은 모두 후세의 조선인에 의한 날조입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은 없고, 일본군과 싸운 사실도 없습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다.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명량 해전에 남은 12척에 거북선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준공했다면 어딘가에서 침몰했을 텐데 잔해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거북선의 재현을 시도했지만 곧 침몰해 버렸다. 갑판의 철의 가시가 무겁고 뒤집힌 것이다. 흑색화약을 사용했던 당시 조선의 대포를 선내에 탑재하면 발사시 흑연으로 선내는 새까맣게 될 것이다. 또 철의 가시 때문에 돛을 뻗을 수 없었을 텐데, 인간이 젓아도 용골이 없는 평저한 배는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거북선은 조선에 무지한 이순신이 망상한 결함선으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한산" 리뷰하는 영상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올려주셨군요!! 저는 이 영화를 5번 보았답니다.😃🤣
오랜만에 귀중한 영상이네요! 영화 마지막편도 기대하고 있어요!
한산 나왔을때
채드님과 교수님 영상 찍으시겠구나
생각하구 기다렸습니다!ㅎㅎ
교수님 예고편 리액션 하신거 보고
어느 채널에 올라올까 했는데
드디어 올라왔네요^^
Hi, chad... what did u do past days? I am your fan and I waited your episode. did you so busy? plz uplode ur ep continuously! You are very good man!
좋아하는 두 분~~~
싸랑합니당~~^^
감사합니다 우리가 역사를배우는건 더이상 과거에 일이 일어나지않게 하려는거 이순신장군님 감사합니다
교수님, 여기서 오랜만에 얼굴 뵙네요..^^
채드님, 영상 잘 봤습니다.
“We are proud descendants of admiral Yi Sun-shin.” - From the creed of ROK Navy
이순신을 저보다 잘 아시는 교수님 응원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제가 그리고 모든한국인들이 두분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는이유❤ 고맙습니다.
교수님 논개 너무 좋아하셔ㅋㅋ
멍뭉이 귀여웡~~
피터슨 교수님과 채드의 조합 제일 좋아하는 조합입니다 채드 자주 보자구요!
From this video, i don’t know that RUclips algorithm for your youtube channel is not introducing anymore to someone who wants to watch your videos. Anyway, Thanks a lot!!
영화관에서 봤을때의 웅장함이란!!
물을 전혀 쓰지 않고 촬영했다는 사실을 잊고 푹 빠져서 봤었는데~
역사 다큐에서의 내용을 보면 거북선은 처음 유인하는 배로 쓰였었다고 해요. 일반 배보다 회전과 대시가 용이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저렇게 박는 용도가 아니라 포탄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사하고 이동하기 좋도록 용두를 설계했다고 하네요.
두분도 푹 빠져서 보시고 의미있는 장면들을 이야기하시는 모습 항상 너무 좋아요
n차 관람했어요. 여러가지 버전으러 4dx도 장난아님.
그들은 모두 후세의 조선인에 의한 날조입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은 없고, 일본군과 싸운 사실도 없습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다.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명량 해전에 남은 12척에 거북선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준공했다면 어딘가에서 침몰했을 텐데 잔해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거북선의 재현을 시도했지만 곧 침몰해 버렸다. 갑판의 철의 가시가 무겁고 뒤집힌 것이다. 흑색화약을 사용했던 당시 조선의 대포를 선내에 탑재하면 발사시 흑연으로 선내는 새까맣게 될 것이다. 또 철의 가시 때문에 돛을 뻗을 수 없었을 텐데, 인간이 젓아도 용골이 없는 평저한 배는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거북선은 조선에 무지한 이순신이 망상한 결함선으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항상 응원해요~`
We thank you both creating contents about the history of Korea.
겨울이니 감기 조심하세요라고 쓰고 보니 반팔을 입고 계시네요ㅎㅎ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채드 모자 옆에 태극기 그려져 있는거 너무 기여워 ~ >ㅡ
고맙고, 사랑합니다.❤️
충남 아산 현충사옆 온천동에서~~~
Hello Chad and professor Peterson! It's always so nice to see you. There are lots of us waiting for your videos and we are so happy to see this one. Please stay healthy and happy.
이순신의 상대장수도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용인전투에서 약 2000명의 병력으로 조선군 약 7만 대군을 이겼죠.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도 명문 막부로 살아 남았습니다.^^
와키자카군은 1500명이라는 당시의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8:05 To be clear, any Korean ships that were lost were not under Yi Sun Shin. Yi Sun Shin did not lose a single ship under his command in his entire military career (except for Chinese ships who defied his orders in later battles). All the turtle ships that were lost were during the disastrous Battle of Chilcheollyang which was completely commanded by Won Gyun. Yi Sun Shin was tortured, imprisoned, and demoted to rank and file soldier during this time by the inept Korean court and paranoid King. Yi Sun Shin won 23 battles out of 23 battles. A perfect record which seems unbelievable especially considering he didn't even lose a single ship.
Yi Sun Shin discovered historical references to the turtle ship but had no blueprints so he had to improvise. What he did was took regular Panokseons (the main and largest battleships) and put a roof on it so in this regard, the Professor is incorrect. The turtle ships were about the same size as the Panokseons. The source of this information comes directly from Yi Sun Shin's War Diary or 난중일기. English translations of this book are difficult to find and expensive unfortunately.
Chinese navy wasn't available in this battle.
@@ytn00b3 That's why I said, "in later battles."
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이 그 예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패퇴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그들은 모두 후세의 조선인에 의한 날조입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은 없고, 일본군과 싸운 사실도 없습니다.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하여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직후의 3개월간만으로, 그 후의 7년간은 이순신은 기습 공격해도 모두 일본군에 역습되어 도망치고 있습니다. 일본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중요한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군에 남아 있는 그의 기록은 그의 사망을 전한 것뿐입니다.
이순신장군의 덕장면모 치밀한 전략 대응 고뇌와 번민
지켜내야하는 국란극복
지도자의 외로움
이런걸 교수님은 어떻게 디테일하게 체크하실까 와 정말 대단하고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항상 존경합니다
김향기 암살자 기생은 말못하게 된것보니 명량 영화에서 바위위에서 흰 천? 치마던가? 휘두르던 이정현 배우의 젊었을 당시를 연기한거 같아요. 아마 같은 인물이라 생각돼요.
맞아요....한산에서 혀가 잘려서 명량편에서는 말을 못하는 것으로 나온 것이죠...
두 분의 영상 ~잘 봤습니다.
한국역사를 많이 아시네요. 대단합니다.이런분이 한국역사 강의하면 잼있을것같아요.
와 드디어 보네요! 늘 감사합니다 ㅎ
멋진 리액션 잘 보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길 바랍니다. ^__________^
우물밖개구리와 동시에 런칭안데 여긴 너무 늦게 올라왔 ㅠㅠ 뭐 그라도 고맙습니다.
당시 조선에 투항한 항왜 숫자가 1만명이나 됐다고 합니다. 한양 인구가 당시 10만명이였습니다.
대구 우록동에 김충선(사야가)의 집성촌이 있지요 교수님 역시!
😊🐲 잘봤습니다.
Just finished watching this movie and saw this video in my feed. Of course I recognized the professor and had to watch.
I also thought the gisaeng was Nongae at first. I was waiting to see if Jinjuseong would come into play in the movie (a place on my to-go list in Korea).
Overall I thoroughly enjoyed this movie as well. Happy to see others with the same opinion!
Thanks for sharing
영어공부중인데 이순신에대해 영어로 설명을 들을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잘보고 가요~
오늘 인천에서 시애틀 오는 비행기에서 피터슨 교수님 뵜었는데.. 사진 한장 같이 찍어달란 말이 참 안떨어졌네요ㅜ 늘 건강하시고, 채드 영상도 곧 올라오길 기대하겠습니다. Good night.
두분 ,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
교수님 존경 합니다 ~ 항상 건강하세요
이순신과 같이 한산의 배우들 역시 명량의 배역들과 이어짐. 명량이 신파로 많은 비판을 받아서 그랬는지 감독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한 장면 이외의 허구의 스토리 부분을 많은 부분 줄여서 관객들이 이를 잘 알아채지 못해서 아쉬움. 각 배역들이 한산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인물이 변하는 씬을 영화 마지막 부분에 넣어 줬으면 명량을 봤던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죠.
이순신 - (명량) 최민식 -> (한산) 박해일
와키자카 야스히루 - (명량) 조진웅 -> (한산) 변요한
임준영(남자 스파이) - (명량) 진구 -> (한산) 옥택연
정보름(여자 스파이) - (명량) 이정현 -> (한산) 김향기
※ 명량에서 허구의 신파라는 비판을 제일 많이 받았던 임준영과 정보름 부부가 어떻게 만나게 됐고, 정보름이 왜 말을 못하는 언어장애를 갖게 됐는지 한산편에서 설명이 됩니다.
준사(항왜군사) - (명량) 오타니 료헤이 -> (한산) 김성규
나대용(거북선 제작자) - (명량) 장준녕 -> (한산) 박지환
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이 그 예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패퇴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두분진짜성덕같아요ㅋㅋ
A movie about the last battle of Lee Soon-sin is about to release in Korea at Dec 20, 2023. You will be able to watch it soon there in America, I guess. Cheers.
거북선 등장 장면이 정말 멋졌고 극적이었죠
그들은 모두 후세의 조선인에 의한 날조입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은 없고, 일본군과 싸운 사실도 없습니다.
두 분이 함께 나올때 마다 너무좋아요ㅋㅋ
한산도대첩 일본측 사령관(와키자카 야스하루)도 한국에선 무척 유명한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님과는 라이벌처럼 등장하는 드라마도 많아서인지 꽤 익숙해요!
대표적인 전투가 왜란 초기 용인전투인데 2000명이 채 안되는 병사로 7만명의 조선군을 패퇴시킨 전투입니다. 일본입장에서 대표적인 맹장중 한 명이었죠.
도요토미 7명 장수중 한명이니 분명 유능했겠으나 해군장수가 아닌거에서 지식이 부족했을터 육지에선 강력한 장수중 한명으로 알고있는데 제가 틀렸나?싶네요
와키자카군은 1500명이라는 당시의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좋아하는 두 분~~!!!
왜군 장군 중 패하는 장수는
‘미역장군 와키쟈카’ 로 꽤 유명한 장수 입니다.
한산에서 패 한 후 무인도에서 미역으로 버티다가 탈출해서
미역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죠.
유일하게 조선 수군과 기록이 일치 하는 정직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패함에 대해 숨김 없이 적은 사람이죠.
이런 두가지 때문에 왜군 하면 와키쟈카가 떠 오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고 하던데…)
그래선지 전편인 명량에도 꽤 비중있게 등장 합니다.
맞습니다. 일본에서는 취급이 좋지않죠. 규모면에서도 그다지 큰편이 아니고요.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에서 띄어준거라...
그렇게 대패한 장수의 취급이 좋을리가 없죠
그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 본인은 당일 중에 부산으로 돌아가고 있다. 미역을 먹은 것은 섬에 잠복한 병사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대답하십시오.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 후세의 조선인에 의한 날조입니다. 와키자카는 전투 직후 부산항으로 돌아온다. 미역을 먹은 것은 섬에 잠복한 와키자카의 부하입니다. 그래서 후세의 와키자카의 후손이 미역을 먹을 이유도 없습니다.
와키자카는 한산도 해전 당일 중에 부산으로 귀환하고 있기 때문에 미역을 먹을 필요는 없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병사이다.
와키자카의 본거지는 미역의 특산지이므로 잘 먹히지만, 그것과 이순신은 관계가 없다.
많이자라는 삼나무로는 얼마 못가? 백제? 한국에 소나무~
왜군의 장수(와키자카) 역할을 맡은 배우가 바로 "미스터 션샤인"에서 애기씨(김태리)의 약혼자 역할로 나왔던 전요한 배웁니다.
연기 스펙트럼이 아주 넓어서 이 작품의 배역도 훌륭하게 잘 소화해냈어요.
변요한입니다
영화 `사도` 송강호 유아인 배우가 출연한 영화 리뷰도 보고 싶네요
어...교수님 ㅡㅡ:;;;
그 와키자카가 일본 칠본창 중 하나인데요.
유명한 놈(?) 맞아요. ㅡㅡㅋ
채드님 문득 할머니 어머니 드라마 리뷰가 생각나네요 건강하게 잘계시죠?
잘보고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거북선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철로 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못을 사용했습니다. 판과 판 사이의 이음매에 나무 쐐기를 박는 특수한 공법을 사용하여 구조물의 강성을 매우 강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배와는 다르게 조선의 배가 충돌하여 파쇄하는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게 바로 이 공법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이순신 시기의 거북선은 용머리가 아래에 붙어 있고, 용머리가 위로 솓은 형태의 거북선은 정조가 제위에 있던 18세기에 만든 거북선입니다. 그리고 역사기록에는 세조(15세기) 때에도 거북선은 존재했던 걸로 보입니다.
조선의 전투선은 밑바닥이 편평하여 조수간만에도 배를 제어하기 쉬웠으며, 특히 적선이 다가올때 한쪽면으로 포격하고 180도를 돌아서 반대면에서 포격하고 다시 180도 돌아서 반대면의 포병이 포격하는 식으로 계속 돌면서 연사했습니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않더군요.
2층 건물도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이 일본보다 튼튼한 배를 만들 수는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나는 이영화를 아직 못봐서 나중에 다시 들를께요.
finally🎉
일본배는 기동력을 위해 조선배에 비해 가벼워 비교적 내구성이 약하였기 때문에 조선배와 일본배가 부딪히면 일본배가 손실이 심했고 거북선은 일본배 사이에 들어가서 교란시키는 목적이였는데 물에서는 조종(control) 이 쉽지 않다보니 부딪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거북선과 일본배의 충돌도 연출이 되었고 원래는 충돌 목적의 배는 아니였지요.
2층 건물도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이 일본보다 튼튼한 배를 만들 수는 없다.
일본의 배는 못을 박아서 만든 배고 조선의 배는 못을 박지 않고 만든 배라서 충격에 대한 균열이 나타나는 증상의 차이가 있지요. 일본의 배는 작은 충격에도 못과 못 사이의 틈 때문에 크랙이 쉽게 나기 때문에 잘 가라앉았던 것으로 조사결과 판명 되었습니다.
2층 건물도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이 일본보다 튼튼한 배를 만들 수는 없다.
Hello proffesor!!!! I really really enjoyed this and your reaction of roaring currents. I hope that you will also react in the future this year to NORYANG SEA OF DEATH. It will be 3 hours!!
누렁이 강아지 귀여워요
예상이지만. 아니 전술적으로 본다면. 거북선은 주력이 아니라 포위섬멸 전에서 '망치와 모루'전술에서 모루의 역할이죠. 소수로 다수의 집중된 공격력을 받아내서 버티는 역할. 버텨주는 동안 포위 섬멸 기동을 할 수 있으니까. 중장보병의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수에 둘러쌓이게 될게 뻔하니까 지붕을 막아서 넘어오지 못하게 만들었죠. 포위섬멸전을 하는 방법은 2가지 입니다. 적의 총공격을 받아서 정체를 시키던가. 스스로 올가미 속으로 들어오도록 유인작전을 하던가. 어쨌든 전투의 승패는 중앙돌파를 어떻게든 뚫리지않고 막아내야 한다는거. 누구나 다 아는 전술이지만 해내는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애초에 포위 섬멸전은 적보다 3배쯤 우리 숫자가 많을때 쓰는게 정상입니다. 근데 우리가 소수다? 안그래도 숫자가 적은데 길게 늘려서 안그래도 얇은 반어망을 더 얇게 만든다? 이 방어망 중 1점이 적의 총공격에 안뚤리겠어요? 다 뚫리지. 근데 이순신 장군이 이걸 해낸 겁니다. 그러니까 군신 이라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다.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명량 해전에 남은 12척에 거북선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준공했다면 어딘가에서 침몰했을 텐데 잔해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거북선의 재현을 시도했지만 곧 침몰해 버렸다. 갑판의 철의 가시가 무겁고 뒤집힌 것이다. 흑색화약을 사용했던 당시 조선의 대포를 선내에 탑재하면 발사시 흑연으로 선내는 새까맣게 될 것이다. 또 철의 가시 때문에 돛을 뻗을 수 없었을 텐데, 인간이 젓아도 용골이 없는 평저한 배는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거북선은 조선에 무지한 이순신이 망상한 결함선으로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법 한 번 봅ㅈ시다
~
채드님도 이번에 같이 한국 와서 이런저런 영상 찍으면 좋았을텐데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브로맨스를 그린 “천문”이라는 영화도 보셔야죠!! 😁
The background of this Seven Years' War is that the carelessness and arrogance of Joseon (Korea), which enjoyed only peace and culture for 200 years, treated Yamato (Japan) as a barbaric pirate group rather than a country. However, Yamato had a high level of tactics through clan battles for 100 years, and the 170,000 troops of Toyotomi, who unified the whole country, armed with Portuguese matchlocks and attacked Joseon. Historically, Japan has waged a surprise war without a declaration of war.The 16,000 Elite heavy cavalry that Joseon was proud of, which had suppressed the cruel northern peoples, was defeated by the Yamato Matchlock unit, and 70, 000 Joseon Army was pushed back all the way to Pyongyang. Yamato, which was a medieval feudal lord era, gained land and people if it won a war, but in Joseon, which was a centralized country, the king fled to the north, but the people and monks formed a militia and fought to the end , the Japanese army was embarrassed by the existence of the Militia.Admiral Yi Sun-sin of Joseon defeated the Japanese navy by winning all 33 naval battles despite overwhelming odds.
The basic weapons of the Joseon army were bows, spears, and swords, as well as gunpowder bombs and various cannons of different sizes..The Ming Dynasty (China) sent reinforcements to help Joseon, but instead harassed Joseon by plundering and engaging in internal communication with Japan, but helped Yi Sun sin in the final naval battle.Yamato, who did not have the technology to make pottery, Taken in hundreds of Joseon pottery craftsmen to make pottery and exported the pottery to Europe, where it received favorable reviews. Joseon was unable to recover from the aftereffects of this war for 300 years and suffered the humiliation of being annexed by Japan, which it regarded as an uncivilized island, and being ruled for 35 years.A quarter of Koreans were sacrificed in this terrible war, and in Japan, there is a grave of head, ears,nose, a Korean civilian, as a record of the war. This Great War was a symbolic event in which the international status of the Korean Peninsula with 4,800 years of history was reversed by the Japanese archipelago with 1,800 years of history. 300 years later, Joseon became a reclusive country with a policy of isolation, and Japan defeated the Russian fleet through the strategy of Yi Sun-sin(T tactic, a modification of A cran's wing formation), the great naval admiral of the country it invaded 400 years ago, and later joined the ranks of the great powers. Yi Sun sin's the world's top 3 naval admiral and the turtle ship is an invincible Korean Item in the Age of Empires PC Games.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읽으면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이후 한 번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은 한 번만 쓰여져 있다. 그가 사망한 것뿐이다. 이순신은 평범한 조선의 약한 사령관이었다.
해상전투장면을 전부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CG로 후반 작업을 했다고 하네요.
우리 판옥선과 왜선의 큰 차이점은 첫째로 우린 소나무를 사용해 배가 무거웠지만 튼튼했고 왜선은 삼나무를 사용해 배가 가벼웠지만 약했습니다.
둘째로 우리 판옥선은 못을 사용하지 않아 운항할 수록 단단했지만 왜선은 못을 사용하여 충격에 매우 약했습니다.
2층 건물도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이 일본보다 튼튼한 배를 만들 수는 없다.
하이채드.하이교수님 반가워요~
교수님 채드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군수 다음은 안댈듯
시장은
그걸 모르나~
아히고~
Japanese soldier located near tongyoung and geoje island in which many people lived. Admiral Yi soon sin want japanese to move to han san island because he didn't want japanese to slaughter joseon civilian people after their arrival to tongyoung and geoje and japanese defeat in combat. There are no people in hansan island. Actually, most of the japanese who lose in the combat are starved and killed by joseon soldier in hansan island.
교수님 얼마전 비지니스로 한국 방문하신다고 영상 봤던 기억이 있는데...
"방탄브론즈"팀과 한국에서 만나셨는지 궁금해지네요?🤫
채드님은 한국 오실 계획이 없으신가요?!
항상 영상 잘보고 있습니다! 💜
채드랑 교수님 잘 봤어영 한산 나도 아직 못봤는뎅... 채드 영상 자주 올려주세영~~~
Hansan?
요새는 영화 리뷰 안하나요?
초능력자 라는 영화 추천드립니다!
대작은 아니지만 연기력이 상당하고 몰입감이 좋습니다
강동원의 몇안되는 좋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한국 특유의 웃음포인트는 외국인노동자들의 한국어실력입니다 ㅎㅎㅎㅎ
한산 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실제로 싸우지 않았답니다^^*
논개를 안다면 깊 공부한 증거지요. 다만 논개는 다툼의 여지가 있어요
오~~~
가장 존경하는 분 이순신 장군. 단재 신채호 선생님
신사를만드는대는 반드시 소나무~ 해 안에 주인목까지~
확실히 영화적 허구가 적지않게 보이는게 사실이에요 엄청난속도로 적선을 갈아버린다든지 ㅎㅎ 하지만 이야기의 심지는 변한게없으니 한국의 젊은친구들도 진실과 영화적 허구정도는 다구분해서 보고있으니
교수님께서 크게 걱정하진 않으셔도 되실거에요 항상건강하세요 교수님 ㅎ
거북선은 아마도 충파보다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왜선의 진형에 들어가 대포를 쏨으로 써...
왜선의 진형을 흐트려서 전진 속도를 늦추는 게 목적이었을 거임.
그 후에 함포 사격으로 이길려는 전략....
우리가 게임할때 어그로 끌잖아요 적의 진을 망칠때 잘 쓰죠. 거북선이 딱 그역할을 제대로 했을거 같네요 적진 뒤에서나 옆에서 거북선이 저렇게 들어오면 적은 멘붕일거 같네요
@@honshin23 충파 자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충돌해 파괴하는게 아니라 멀리서 포를 쏴서 파괴하는 방법이었을 거라는 말이 있죠 역사에 기록된 일부도 충돌이 아니라 포로 파괴한다는 듯한 의미의 글이 있기도 하고 우리 군의 공격 방법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구요 상식적으로 충돌해 파괴하려면 엄청난 속도가 필요한데 속도가 느린 평선인 판옥선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이면 그런 속도를 내기도 힘들고 한번 충돌을 일으키면 다시 가속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겠죠
거북선의 역할은 군의 선두에서 적의 진영을 돌파하거나 그 사이로 들어가 포를 쏘고 돌아다니며 적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대구에사는데 사야가 김충선이고요 사당도있어요
원래 본국에있을때도 어렸을때 한학을 쪼금배워서 유학적소양이좀있었고 정한론에 회의적이였죠
그리고 소정방밑에 장수가 일본에 대패한적있는데 그때 장군이름이 두사충. 분국으로돌아가면 죽을까 걱정됐는지 대구 대명동(명나라를향해서)에 귀화하고 자리잡았습니다
두사충사당도있구요
아,첨언좀하자면 논개가 여기 나오는건 아니지만
논개가 원래부터 기생인게 아니고 임실쪽 사람인데,남편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장수라 복수하러 일본장수와 접촉하기위해 들어갔단 설이있지요. 실존인물 맞구요
소정방? 이여송을 말하려던 거 같은데
일본 삼나무 한국 소나무 차이~
Thank you for the video. I want to see the reaction video of the Korean movie "SVAHA: THE SIXTH FINGER". Please.😊
옆에 비서들이 돈 쳐먹곻 끝 나몰라
ㅋㅋㅋㅋ
거북선은 다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몇백년 뒤 1800년대 조선시대 말엽까지 존재 했습니다.
교수님! 늘 항상 한국에 대해 잘 전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지식을 다른 교수님들과 공유 하실 수 없나요? 요새 보면 어설프게 한국에 대해 안다고 하는 교수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는데 교수님 같은 깊이가 없어요. 그 분들은 어떻게 한국에 와보지도 않고 한국을 안다고 강의 하는지 어의 없어요. 책으로만 공부하는 한국이 아닌 교수님처럼 제대로 된 지식을 알고 계신 분들이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오시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요. 건강하세요!!
한산대첩에서는 거북선이 건재해있었고.. 원균이 칠천량에서 거북선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선군함을 잃었죠..
아마도 저때 거북선이 없었다고 하는 건 명량해전을 이야기하는 거 같네요. 전투의 순서가 '..한산대첩-칠천량대패-명량대첩..'
이었으니..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도.. 거북선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거북선이 준공한 기록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ruclips.net/video/auloLpwKn2k/видео.html 가장최근에 나온 임진왜란 관련 다큐멘터리 방송입니다. 피터슨 교수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이 많이 있는 내용이니 피터슨 교수님이 한번 보시면 좋을것 같네요. .
채드 올만에 뜸 zz
요즘 왜 안나오세요!? 근황이 궁금합니다.
퍼거슨 감독님인줄 알았네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