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당시 일본이 더 잘살았다고 볼수있군요 .. 비단옷은 ..양반아니면 입을수도 없는데 .. 백성들이 비단옷을 다입을정도 였다면 .. 상공업이 발달했었고 .. 우린 농업국가였었고 .. 우리도 일본이 당시 작은통로를 통해서 외국여러나라와 무역을 했었는데 .. 조선도 항구를 개방하고 무역을 했다면 .. ??? 참 .... 조선왕조 를 보면 ..우물안 개구리 가 생각납니다 ..
조선은 유교 사상에 젖어 가장 비생산적이고 하잘것 없는 당파싸움과 자국민을 대다수를 (40%)노비로 만들어 그자식까지 매매한 저열한 민족이었죠. 흥선 대원군 민비 등등을 보면 일제 침략과 조선 양민이나 노비들에겐 갑오개혁이 신의 축복이었음 지금 조선을 계승한 북괴보면 답나옴 수백만명이 굶어 죽어도 누구하나 개혁하는 놈이 없는 민족성 그 북괴를 추종하는 남한 세력 ㅜㅜ 참 좃같음
그냥 에도 시대 하면 긴 설명이나 추측이 필요 없죠…. 유럽이 일본에 열광 하게 된 자포니즘을 불러 일으킨 것도 에도 시대의 일본.. 근데 조선은 에도 일본을 보고 최 전성기의 청나라를 보고도 왜놈이니 떼놈이니 조롱하고 정신 승리 하다가 백년후에 처절하게 가 ㅇ 가 ㄴ 당함.. 요즘과 좀 비슷..
실제 사행록들을 보면, 통신사들이 오랑캐로 여겨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일본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에 놀라면서도 애써 '사치한 오랑캐의 습성'이라고 정신승리를 하려하는 내용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난리통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원하면 다시 데려가려고 했었었는데, 생각보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 통신사들이 애통해 하거나 당황하는 내용도 나오죠(임진, 정유재란이 끝나고 25년이 지난 1624년 통신사 일행 당시). 대부분 기와로 이어진 집을 보며 조선의 초가집과 같이 흙으로 지은 집이 없어서 놀라는 가 하면, 어느 정도 사는 집의 경우 집의 기와나 처마에 황금칠과 주석을 입히고 검은색 옻칠을 해 놓고 화려한 장식을 해 놓았는데, 그 화려함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한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당시 조선과는 경제력이 비교가 되지 않게 풍요로운 시기를 일본은 지내고 있었던 거죠.
또한, 조선, 일본의 사공들을 비교하면서 여러가지 잡다한 불만과 노젓는것도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인 조선사공에 비해서 마치 한 몸과 같이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는 일본사공들이 놀랍다는 내용도 나오기도 하고, 일본의 기율이 엄해서 사회질서가 잘 잡혀진 것을 보고 이것만은 오랑캐이지만 잘하는 것이다라고 칭찬하는 부분도 나오죠. 다만 통신사들은 유교성리학적인 지식적, 도덕적 우위를 정신승리로 삼아, 글(한문)도 제대로 못하는 왜인들이라는 식으로 얕잡아 보려는 시각이 전반적으로 있었습니다.
반대로 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한 일본 장수가 남긴 글에는 한양의 화려함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음. 금입택은 당시 기준으로 천 년도 전인 신라 서라벌에도 수십 채가 있었음. 부잣집의 장식도 경제력 차이라기 보다는 건축 문화의 차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듯. 초가집이야 일본도 많았을 거고(조선과 건축양식이 다르긴 하지만.). 조선의 건축이 소박해진건 가난해져서가 아니라 온돌이 대중화 된 영향도 크다고 압니다. 그냥 새로운 문화를 접한 충격이라고 보는게 더 자연스러울거 같은데. 뭐, 보빙사가 맨해튼 가 보고 당황한거랑은 다른 맥락으로 생각됩니다. 왜란 당시의 포로 귀환이라면, 기술자들의 경우에는 조선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기에 정착을 택했을 것이고, 포로로 끌려가서 사는 동안 일본에 가정이 생긴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호란에서 끌려갔다 온 귀환포로들을 환향년이라고 멸시하던 풍조를 생각 해 보면 또 충분히 이해됨. 조선과 비교도 되지 않는 경제력이라기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발육 상태가 많이 부실했음. 먹는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 못하는데 경제력이 좋다는건 어폐가 있죠. 그래서 에도시대의 일본이 풍요롭다는 것에는 의문. 물론 그게 시간이 지날 수록 조선이 병신이 되면서 실제로 격차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조선이 우리 민족 제일 암흑기. 신라 전성기 서라벌엔 초가집이 없고 전부 기와집들이며 처마와 처마, 담과 담이 서로 이어져 동해까지 뻗어있고, 30채가 넘는 부윤대택(금입택) 이 존재하고, 금이 너무 많아 키우는 개과 원숭이 목 사슬도 금으로 씀. '사사성장 탑탑안행' 이라해서 서라벌에는 하늘의 별같이 절들이 많고 탑들이 기러기 처럼 줄지어 있다고도 함. 고려시대 몽고변란 이후로도 경주는 바둑판 같이 번듯한 대로에 건물들의 열에 아홉이 황금사찰이라 길손들이 다투어 구경했다고도 함. 건축뿐만 아니라 서긍의 고려도경엔 남녀 평등사상도 조선에 비하면 되게 강했음. 조선이 괜히 숭유억불, 남존여비한 건 아니겠지만 확실히 실패한 국가정책.
조선 후기는 대기근과 당쟁을 거치며 쇠락해가고 있던 반면 서구는 세계 무역과 이어 산업 혁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일본은 그런 서구의 흐름을 일부나마 함께하고 있었던 국가이구요. 물론, 일본 열도가 한반도 보다 농업 생산성이 높은 편이기도 하지만. 당대 조선 지배층은 여튼 그런 차이 점을 깨닫지 못하니,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씨앗을 유교적인 해석에 빗대에 보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보이네요.
일본은 300여년전부터 뉴톤의 만유인력 등이 전해졌으며 이때 신문 지폐 은행 전당포 서점 극장 유곽 여행 여행가이드 인기전업작가 등등....... 시장경제가 활활 타올랐습니다 소위 말하는 '눈부신 에도시대'인데 한국은 이걸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주로 임진왜란 끌려간도공 정도 이야기하지요 일본도 마찬가지로 선택적으로 교육하는데, 아베 일본수상도 전후세대로서 조선에 대한 만행을 깊이 몰랐으며 위안부 건도 일이 제기되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퇴물도살자-k3d 똥은 수세식 변기가 대중화 되기 전까지 지구상의 모든 문명에 엄청 많았습니다... 하이힐이 만들어진 이유가 똥 안밟으려고일 정도로... 볏짚으로 만든 지붕, 나무와 흙으로 만든 집은 일본 전통가옥도 해당되는 이야기고요. 임진왜란의 기록은 고니시 유키나가 측에서 쓴 기록을 보면 경복궁이 아방궁 같다느니 하면서 오히려 한양의 찬란함을 찬양합니다. 조선이 그렇게 가난했으면 항왜들의 존재 또한 설명이 힘들어지겠죠. 식민지 조선에 처음에는 돈이 많이 들어갔겠죠. 인프라 다 깔아야 하니까. 그런데 아무리 미국에 선제타격을 때릴 만큼 정신이 나가있었던 일본제국 지도부라 하더라도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손익계산도 없었을까요?
제가 알기론 18세기 기준으로는 그냥 관광객(?) 정도인 통신사가 딱 봐도 알만큼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가 크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시는 에도시대 일본과 조선 후기 두 나라의 평균 신장이죠. 두 나라의 생활 수준과 영양 상태가 비슷한 최근에는 남자 기준으로 한국인의 평균키가 일본인보다 2cm정도 큽니다. 그러나 에도시대 일본인은 동시기 조선인보다 6cm가량 작았다고 합니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 전통적인 일본 식단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육식의 비중이 크지 않은 것은 조선도 다를 바 없었기에 식단보다는 일반적인 영양상태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는 부모가 신생아를 죽이는 풍습까지 있었죠. 그래서 일반 서민이 살기에는 에도시대 일본보다 조선이 더 좋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기모노가 한복보다 화려한 옷이죠.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흔히 입던 "무늬 없는 흰 옷"은, 보기에는 소박할지언정, 당시 기준으로 보면 유지, 관리에 있어 무늬가 화려한 일본의 옷보다 훨씬 더 높은 난이도를 가진 옷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에는 복층 가옥이 많아, 시가지가 화려했겠죠. 다만, 한반도에서도 원래는 복층 가옥이 흔했습니다. 고려의 기록을 보면 벽란도에서 개경까지 복층 상점가가 이어져 있었다는 대목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며 복층 가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이 가난해서라기 보다는, 온돌이라는 고급 설비가 대중화 된 영향입니다. 온돌의 구조상 단층 가옥이 유리해진거니까요. 물론 한반도는 산이 많아, 풍수지리적으로 낮은 건물이 좋다는 생각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당시 일본이 조선보다 상업이 훨씬 발달한 사회였던건 사실입니다. 국내외의 무역도 활발했고, 정작 조선에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쓰지도 않던 도자기 기술과 은 제련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세계에 수출하는 상품으로 만들었죠. 그러나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놓고 봤을 때, 구한말 개막장국가 시절을 제외한다면 아마 조선이 일본보다 눈에 띄게 부족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Nomad-e6i 조선통신사 기록에 일본애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 여자들도 예쁘고 시가지 모습에 눈이 빙빙 돌아가서... 하늘이시여 어찌 이런 오랑캐들에게 이런 복을 주셨나이까 하고 한탄하는 기록이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나요? 이미 국력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졌던겁니다.
일본의 에도 시대는 세계사에서도 따로 언급될 만큼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사실 조선 통신사는 그냥 이벤트였지 그들이 우리로 부터 뭘 배울 상황이 아니었죠. 그 이후로도 국력 차이는 말할 수 없이 벌어집니다. 종국엔 비극이 찾아왔죠.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발전이 있습니다. 비뚫어진 유치한 극일, 반일 감정으론 정작 일본을 이길 실력을 쌓을 수 없어요. 그 당시 통신사들도....벌린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일본의 문명에 충격을 받았지만, 애써 아닌 척 외면했습니다. 그런 결과들이 모여 조선이 식민지가 됐죠. 그래도 많이 따라잡았습니다. 더 가야죠. 앞으로.
@@theself-tq6xq 어떻하면 제대로 청산하는 겁니까... 일본에 협조한 사람은 다 처벌해야 하나요.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연스레 일본을 조국으로 알고 살았고 그래서 공무원도 하고 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일본군도 된것이죠. 세계역사상 식민지배에 대해서 사과한것은 일본과 이탈리아뿐이고 그나마 물질로 보상한것은 일본이 유일합니다. 사과의 대명사 독일도 식민지인 나마비아에서 12만명을 생매장하고 때려 죽였지만 독일대법원에서 자기들은 첵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역사를 정치에 이용 해먹는건 더더욱 안되겠지요
조선에 대한 혐오와 일뽕으로 가득찬... 기독교는 일본에서 제대로 정착도 못하고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숨어서 암호처럼 종교생활을 이어가다 수백년 뒤에 서양 선교사를 보고 기뻐했다는, 카쿠레키리시단의 나라가 일본입니다. 오히려 조선이 서양에서는 선교사를 보낸 적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경전 공부하다가 성직자가 필요하다고 김대건을 중국에 보냈죠.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기적으로 인정하고 김대건을 시성했기도 하고요. 기독교 선교가 가장 성공한 지역이 한반도고, 가장 실패한 지역이 일본열도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카스테라를 빨아요...? 당시 일본과 서양 무역선에는 냉장고가 있었나 보죠? 카스테라 재료가.... 개화는 일본도 19세기에 미국이 무력으로 강제로 시킵니다. 200년이 아니라 20년 정도 난 것은 사실이고요.
@@Nomad-e6i 멍청한거 티내지 마시길 ㅋㅋㅋㅋ초기엔 기독교도 일본내에 엄청 번성 햇엇다 영주의 지배 사상에 안맞아서 나중에 배척 당한거구 그리고 카스테라가 저당시엔 대항해 시대에 배 타면서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엄청 딱딱하게 만들엇고 그걸 일본이 배워서 부드럽게 만든게 현재 카스테라임
@@MichelanLAKE ; 일본의 쇄국은 자국 선박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할 정도로 아주 강력한 수준이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과의 교역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되고 서양 군함인 모리슨호가 자국 영해안에 나타나니까 격침까지 하려고 했을 정도로 강력한 쇄국을 펼친게 에도 막부다 페리 제도의 내항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지 그 나마 페리의 압박으로 200년간 지속된 일본의 쇄국이 철폐될수밖에
서기 1123년 중국 宋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개경에 와서 고려의 성읍 궁전 관복 인물 풍속 백성들의 생활등을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 궁궐의 화려함과 금과 은 비단으로 장식된 고려 관료의 복식등 900년전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기록했는데, 고려는 조선과 달리 개방적인 남녀평등의 개방적인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y8xk6bi7i ; 선박 제조 기술과 장거리 무기인 활 성능에서 한국보다 뒤쳐진게 일본이고 13세기 일본원정때 규슈 하카다만에서 고려군의 궁술에 박살난 것을 몰라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대마도를 비롯한 서일본의 영주들은 조선산 쌀에 의존해야 했음 이건 사대주의 중화사상에 갇힌게 아니라 당시 객관적인 팩트가 그러하기 떄문 뭐가 일본을 우습게 여겨서 36년간 털린 것이라고 과장 호들갑 떠냐 일본에게 36년간 털린건 일본보다 근대화적인 국가체제의 교체를 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조선내부에 일본에 협조하는 친일파들의 득세와 청나라와 러시아 등 일본 견제하는 외세들이 전쟁으로 지면서 그로 인한 일본의 침략에 보호망이 약화될수밖에 없어서 그리 된것이지 단순한 식민사관의 시각으로 한부분만 과장해서 볼게 아니라 당시 복잡한 요인들을 디테일하게 봐야된다
5:38 도쿄가 아니라 에도입니다. 검색해보니 도쿄는 메이지 시대부터 부른 명칭이라고 나오네요. 자막에 차라리 에도(도쿄) 이렇게 적으셨으면 좋았을 것 같네요...그리고 우삼동이 일본을 방문한 것이 임진왜란 후네요.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은 그 전에 죽고 오사카는 그 이후 에도 막부의 직할령이였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쌓아뒀던 금은보화가 그대로 있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막부에서 이미 회수에서 에도로 옮겼거나 일부만 오사카성에서 따로 관리를 했거나 했을테니. 6:00 그리고 에도 막부 쇼군의 관직은 관백이 아닌 정이대장군입니다. 관백 관직을 받았던건 히데요시입니다 (추후 태정대신을 거쳐 태합으로 최종 승진)
실제 동사록이나 봉사일본시문견록 등 당대 통신사로 참여했던 분들의 기록에 쇼군은 모두 '관백'으로 인지되어서 나옵니다. 1748년 통신사 기록에도 쇼군을 관백으로 기록했으니 사실여부를 떠나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의 최고 실력자를 '관백'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실제로 일본에서도 그렇게 호칭을 했을 수도 있구요. 나중에 쇼군의 답서에서도 쇼군은 자신을 일본의 '왕(王)'으로 칭하지 않고 자신을 칭할 때도 '여(余)'라고 써서 보냈었는데, 오히려 조선통신사측에서 쇼군을 '일본국왕', 그리고 '여' 대신 '과인'으로 고쳐줄 것을 요구해서 그렇게 써서 보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교토(당시 표현으로 '서경')에 천황이 명목적으로 있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죠.
졸라 아는 척 하네. ㅋ 관백은 원래 섭관가/공가 출신 애들만 맡는 천황 관할 신하들 중 최고 직위였지만, 섭관가가 아닌 히데요시가 어거지로 제수받기도 했지. 높은 신분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정이대장군은 줄여서 쇼군(장군). 하지만, 막부 소속 신하들이 쇼군을 부를 때는 장군이 아닌 관백이라고 불렀지. 그러니 조선에서 온 놈이 관백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 ㅋ 글구... 오사카는 그 이후 에도 막부의 직할령이였기 때문에... 에도 막부의 수십개 직할령 가운데 하나. 오사카에서 뜯어간 쌀과 돈은 홋카이도에서 뜯어간 거에 비하면 얼마 안됨. ㅋ
일뽕아 양적인 인구에서 일본이 앞서 있으면 뭘하나 당시 훗카이도는 아직 일본 수중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라 영토격차도 1.2배에 불과했고 그나마 에도 중기에 들어서면 아이 살해하는 미비키의 증가로 인한 인구 감소하여 인구 성장율이 지체되어 조선과의 격차가 작은 상태로 떨어진게 일본이었지 게다가 양국 사람들의 신장 체격에서 조선인보다 뒤쳐진게 당시 일본인들이라 이런 양국 국민들의 신장 체격의 격차는 질적인 군사력에 그 영향을 미치지 당시 군사력의 기본은 병사의 체격이나 체력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거든 백병전 같은 근접 전투를 많이 하려면 말이야 지역상업 발전 웃기고 있네 중후반 기근과 폭동 은 부족 사태로 인한 화폐 인플레이션으로 직격탄을 맞은게 일본의 지역 상업인데
지금의 북한이 과거 조선의 폐쇄성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습니다. 강냉이쌀 한 줌도 안되는 기득권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측은합니다. 북한인들은 갖혀 있기에 외부를 접할 수 없어 사고가 꽉 막혀 있습니다. 조선과 똑같죠. 그들에게 햇볕을 쬐어 외투를 벗도록 유도하는게 햇볕정책이었는데 미국의 약속 불이행과 북한의 벼랑끝 외교가 극단적 충돌을 빚으며 햇볕이 금새 지고 다시 차가운 응달이 된 것이 아쉽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다른 점은 없다 다만 교통편이 다르다는 점이고 모든 외교절차도 똑같고 문화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이 사는 곳은 모두 똑같은 풍습과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조물주의 법칙이 아닌가 싶다. 유전의 법칙인지도 모르고 과거를 돌아보면 주마등같이 지나갔고 미래를 가는 길도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것같이 현재를 살아간다. 하루라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 당나라 군대라는 말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 던 일본군에 의해서 퍼진 말입니다 ㅋㅋㅋ 진짜 역사를 알면 왜곡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많아요 황현필.설뭐라는 작자들 또한 역사를 잘 통달했다고 주자하는 자들 조심해서 가려서 들으세요 항상 의심하고 자료를 찿아서 보시길 그 사람들 말이 진실이고 정의라고 하지 마시고 그 사람들 속으로는 역시 민중은 아둔하구마 비웃을 것입니다 뭐든지 의심하라
@@세상발견 ; 인사하러 간것이 아니라 축하하러 간것이라고 보는게 정확하죠 그리고 국력이 몇배 차이나도 일본은 외교 의례에서 조선보다 낮은 대우를 받은 상황이죠 일본 사신은 한양에 오지 못하고 동래까지만 오는데 조선 사신은 수도 에도까지 와서 쇼군을 알현하고 화려한 접대를 받는 등 일본 사신보다 높은 대접을 받았죠
@@심해-s1i ; 그렇게 조선보다 국력이 강한 에도 일본이라면 미쳤다고 조선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 이런 외교 관계를 맺는단 말이냐 자국 사신이 조선의 수도에 가서 국왕을 알현못하는 그런 불평당한 외교 의례가 지배적인 수교를 맺는 것을 보면 에도 일본도 그다지 절대적으로 강한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감사합니다.재미있게 보다보니 20분이 30초 같습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가 수십차례 발전된 일본을 보고 갔으면 이를 배워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었어야하는데 사신이 그저 관광을 갔거나 조정에 제대로 보고했으나 개무시당했거나 그랬을것같습니다. 도쿠가와이예야스때부터 일본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던때입니다. 서구의 종교를 받아들였으며 그들과 문물을 교류하여 식량증산과 근대무기,서양식화폐,도량형 등등 한국이 한국전쟁후 서구의 조선,철강,자동차등 서구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듯 도쿠가와시대에 그들은 그렇게 했었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그때부터 받아들였으면 일제36년을 겪지도 않았을것이요 중국을 발아래 둘수도 있었을텐데.
서구의 종교를 받아들였....을까요?ㅋㅋㅋㅋㅋㅋㅋ 받아들이려다가 말았고, 그 여파로 지금까지도 서양의 종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선교가 가장 실패한 지역으로 꼽힐 정도인데요. 그리고 에도막부 시대까지는 일본도 외세를 배척했습니다. 조선보다 정보가 조금 더 많았을 정도이죠. 일본 근대화 과정을 보시면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 유신 과정에서의 반대세력 등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선이 제대로 된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본도 무슨 별천지는 아니었습니다.
속터지는 건 청나라가 영국에 떡실신 되는 걸 조선과 일본이 동시에 봤는데 일본은 화들짝놀라 메이지유신을 통해 나라체질을 바꾸고 강대국으로 성장한 반면 조선은 “아이고 우리 황제님 우짤꼬 어지러우신 마음 보살펴야 하는데”이러면서 걱정만 했지. 개혁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neohuman4137 일본도 중국이나 조선처럼 똑같이 쇄국했음. 근데 못 막고 제일 먼저 뚫려버림. 근데 그게 나중에 오히려 득이되니까 마치 일본이 깨어있어서 스스로 받아들인걸로 포장함 ㅋㅋㅋ 윗댓글에도 써있듯이 그 전까지 계속 조선이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막대한 정부 예산을 써가며 조선 통신사를 모신것임.
@@sungminkim6309 일본이 스스로 교류해서 발전시킨게 아니고 서양에게 강제로 교류 당하다보니 얼떨결에 발전한거라는 말임. 일본도 쇄국했음. 윗댓글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셈. 원래 칼질로 해적질하던 국가였는데 최신 총도 사고 조선에 있는 일뽕들이 나라를 공짜로 넘겨주니까 대규모 해적질이 가능해진 것.
@@yck-c1t 사기그릇 없었다 치고 우리 도공 다 잡아갔다 치자. 그 뒤로 조선 뭐했는데? 왜란때 잡혀간 도공들은 조선에서 개취급 받다 일본가니 조선보다 훨 나은 대접을 받게 되고 그래서 전쟁 후 조선통신사 따라 조선 가려 하는 도공들이 없어져버렸어. 그리고 그 도공들의 후예들은 일본 도자기를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렸어. 중요한건 조선도공들이 조선식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일본미의 정수를 창조했다는거야 . 거기서도 조선 백자 청자 만든게 아니라
일본에 환상을 가지는게 꼭 이상한건 아니지만 배울점은 배우고 경계해야죠 환상에 눈이 멀어 현실을 왜곡해서 부정적인것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것 또한 경계 해야 겠습니다 일단 일본이 개국이래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가장 잘 살았던 1970년대 사진보다 화려한 에도시대 그림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도시대 (아마도 초기겠지만) 다이묘가 도자기가 없어서 말그대로 원시시대 토기를 사용했다는걸 알고 충격 먹었기 때문입니다 뭐 개밥그릇을 쓰는 사발을 보물인양 차도에 쓴 일본이니 놀랍지도 않는.. 일본이 세계2위로 잘살았던 시점이 세계 대호황과 냉전으로 전세계의 돈이 일본에 흘러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죠 그리고 사진에 나오는 화려한 문화재 건축물들도 1층을 2층으로 올리는등 찾아보시면 완전히 개축한 신축입니다 좀 황당하긴 하지만 그리고 일본의 사회와 현실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껴볼수 있는 용과같이 같은 게임등을 해보시면 아니 에도시대가 훨씬 잘 살았던거 아냐? 싶을정도로 통신사들이 본건 일반인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입니다 그러기에 통신사로 뽑히면 서로 떠밀고 안가려고 했습니다 정말 일본이 살기 좋았다면 왜 왜인들처럼 오지 말라고 해도 조선에 온것처럼 서로 필사적으로 갔겠죠 일본특유의 보여주기식 군대 사열문화가 스며져 있는것을 알 수 있는 점이죠 (간단하게 선교사 온다는 이유만으로 전마을 청소 시킨 히데요시건만 봐도 알수 있는대목으로 님들이 그당시 일본에 살면 툭하면 무임금으로 노동에 강제동원되어 시달려야 됨) 상식적으로 일본이 그렇게 은이 많으면 네덜란드만 교역 했겠습니까? 당대 강대국들 다 눈이 돌아가죠 조선이나 중국도 눈 돌아가서 침략 준비 했을지도 모름 일본이 실제로 서양에 팔았던건 은이 아니라 인적자원 즉 인간 이였습니다 그러기에 경쟁에서 이긴 강대국들은 가깝고 강인한 흑익을 얻을수 있는 아프리카에서 경쟁에서 진 네덜랜드가 먼곳에서 노예를 수입한것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이 됨 한예로 이에야스도 히데요시도 서양교역선들이 인신매매 너무 해간다는 명분으로 서양과 교역을 조절했죠 실상은 다른영주들이 화약과 조총을 얻는 루트를 차단하려 했던거고 그 비싼 조총과 화약 뭘로 교역 했나요? 말만 농민일뿐 사무라이의 재산인 농민들이 노예로 팔려갔었죠 아프리카등지에 일본인 노예 기림비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마비키 같은게 성행 하고 풍습이 됐겠죠 자식 안뺏길려면 새로 태어난 애는 죽여야 노동력 손실을 우려해서 아이들을 뺏기지 않을테니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아직까지도 그런 썩어빠진 문신정치는 공무원사회, 정치사회에서 계속되고 있죠. 언제나 그랬듯이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이들은 제일 먼저 제 살길 찾아 도피하고, 민초들은 목숨바쳐 나라를 구하죠. 이러한 악습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IMF시대에도 민초들이 자신을 희생시켜 나라를 구해냈죠.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19세기 말까지 조선이나 일본이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도찐개찐 이었습니다. 심지어 화포 수준은 조선이 더 높았고요... 문젠느 일본이 미국과 교류하고 메이지 유신을 거쳐 동양보다 수백년 앞선 서양 문물을 무제한 받아들이다 보니 한중일 삼국 중에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지금도 한국이 아프리카 아무 나라중에 하나 찍어서 군용기에 탱크 지원해 주면 그 나라는 아프리카 최강국이 됩니다. 일본 위치가 딱 그 정도였다는 겁니다.
@@자룡-q4j 일본은 16세기부터 gdp10위밑으로 떨어진적이 없습니다. 1600년대에 보면 조선인구는 1100만명인 것에비해 일본은 인구 2200만명으로 이미 인구수 2배에 17세기에 1990년 가치 달러 기준 gdp 96억일 때 조선은 19세기에 28억 달러였습니다. 이미 상공업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났죠 뭐 메이지유신때문에 일본과 격차가 벌어졌다고 하는데 메이지 유신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미 서양과 교역하기전부터 적게는 수배에서 수십배 차이났어요 ko.wikipedia.org/wiki/%EA%B3%BC%EA%B1%B0_%EC%A7%80%EC%97%AD%EB%B3%84_%EA%B5%AC%EB%A7%A4%EB%A0%A5_%EA%B8%B0%EC%A4%80_GDP_%EB%AA%A9%EB%A1%9D
너무 재밌네요. 아들이 일본에서 유학중이라 늘 유투버로 검색하고 찾아보는데 흥미진진했습니다. 비록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서로 사신을 교환하며 사이좋게 지낸듯한데 일제시대 이후 지난정권에서 또 사이가 틀어졌다가 최근에야 국교회복이 되는 듯하여 양국 지도자들이 이런 예전의 국왕들간 우호를 떠올리며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랍니다.
댓글들을 다 읽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지네. 우리나라 문명이 쫌...... 일본이 많은 개방을 했으면서도 왜? 미국에 개항을 당하지? 역사가 부족한가? 아니 일본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네. 동학 이후의 인물들이 일본에 넘어가 일본 문물을 보고 동색이 되었다고 해서.... 쓰레기라고 생각했는 데. 일본을 몰랐네. 전혀.
우리나라가 광복 6.25 동란의 시대를 격으면서 국뽕이 많이 필요한 시대라서 시대적으로 그렇케 가르켜서 그런겁니다 우리나라가 노비가 세계최초로 연은분리법이란 획기적인 은 분리법을 연산군때 발견햇는데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의 주자 성리학에 빠져서 기술을 천대하던 나라엿죠 그후 그 기술은 사장되고 마침 일본 섬에서 엄청난 양의 은광이 발견되면서 개발자들이 일본으로 가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엄청난 은을 채광하게 됩니다 그돈으로 동남아와 무역을 하면서 대항해 시대를 개척하던 서양 문물을 은으로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총 인쇄술 의학서 제조술 등등을요 특히 포루투칼 상인에게 화승총 2자루를 사오면서 그걸 진상하고 섬주가 또 그걸 대장간에게 모양따윈 상관 없으니 똑같이 복사하라 시켯고 1년만에 대장장이가 만들어서 영주에게 설계도와 총을 바치고 전일본으로 확대 연은분리법 기술이 일본으로 넘어간후 100년후 조선은 조총을 든 일본에게 침략 당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국뽕 역사만 배워서는 이해 안가는 역사가 너무 많습니다 세계사를 같이 알아야만 이해가 갑니다 일본은 조선중기에 이미 동남아 까지 진출해서 대항해시대 선진 문물을 마구마구 받아들엿고 통신사 이야기 중에 도시 규모에 놀라고 층층으로 만든 누각에 놀라고 이미 일본 일반인들이 비단을 입고 잇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조선은 2층 3층집은 상상도 못할 시대엿죠 조선통신사도 임진왜란이후에 파견된거니 그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잇엇을까요 우리나라는 집권층이 부패하고 당파싸움에만 빠져잇엇고 주자성리학에 빠져서 조선중기 이후 임란이후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고 병자호란까지 거치면서 각자도생을 시작하엿고 중국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 돈을 번 천민들도 족보를 모두 사서 중국식 창씨 개명을 적극적으로하엿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우리나라를 속국이라 칭하는 겁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성씨의 70프로가 중국에서 왓다고합니다
정말 정말...좋은 영상입니다.... 그리고...우울한것은...우리가 문화를 전파했고 우리를 우러러보던 왜 였지만...이미...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국력이 우리를 넘어섰고....이후...저때는 우리보다 경제력과 문화력이 ... 우리를 넘어섰구나.......그때의 우리가 참 안타까운 상황이었구나...싶은 마음에...우울해졌습니다. 우리가 전해줬는데 우리가 더 우월했는데...라는 말은, 내가 초등학교떄 공부 더 잘했는데, 왜 쟤가 서울대가? 라는 것보다도 더 한심한 한탄이라고 해야 될까....우울하네요. 다시는 그런일이 없도록, 우리의 문화력이 더 창대해지도록.... 끝으로 에라이 굥 x새끼야 꺼져라!
조선은 주자 성리학 사상에 빠져서 필요도 없는 예송논쟁 당파싸움 때문에 망햇어요 그런데 그 중국을 바라보고 쓸데없는 정의 싸움에 나라를 나락으로 만들고 잇는게 주체사상에 빠져잇는 386 운동권 세력인데 그 주체가 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당신은 ㅋㅋㅋㅋㅋ 정책을 들여다보고 생각 좀 하자구요 민주당이 미래로 가자고 하나요? 과거로 회귀하자고 하나요? 아직도 구시대적인 사고로 망해버린 공산주의 주장하는데 혁명 적폐청산 이지랄하면서 ㅋㅋㅋㅋㅋㅋ
일본의 화려함과 풍부한 물자를 보고 조선의 낙후함을 극복하여야 겠다는 생각도 있어야 했을텐데 오직 자기 자신의 한문 자부심만 보여주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예를 어마어마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인듯.. 복장부터 태도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지적사항이 엄청 많네요
외교관이니까 국가를 대표하는지라 그에 맞는 존중을 예의로 받고자 한게 아닐까요?
중국에게 사대를 하던 나라니까요 우물안의 개구리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사신도 고려의 화려함에 놀랐는데 조선 후기는 진짜 맛이 갔긴 갔나봄ㅋㅋ 장사를 천시했으니 어쩔 수 밖에 없는 결과다
고려시대까지 우린 실크로드, 해상을 통해서 큰규모로 교역했고, 조선시대
들어가면서 이씨 왕조가 스스로 그 교역을 제한하고 우물안 개구기를 자처했죠. 대신 중국으로부터 확고한 기득권을 얻었구요. 그야말로 조선은 건국세력 자체가 노답이였던...
지도자가 체통을 지켜야 부강해진다는 생각을 했다니...
우리나라의 지도층이 얼마나 좁은 우물안에서 살고 있었던가 짐작도 힘드네요. -_-;
시쓰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나 싶기도 하고... 아... 어지럽네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저때나 지금이나.... 세계정세를 파악도못하는.. 것들이... 정권을 잡았었으니..
유학을 국책으로 삼았던 나라이니..
틀린 말이 전혀 아님.
위신은 목숨과도 같습니다...
자극적인 썸네일에 이끌렸지만 내용이 좋아 끝까지 보았읍니다
저런 썸네일이 자극적이라니...
머리속에 색이 가득차있군요.
그당시 일본이 더 잘살았다고 볼수있군요 .. 비단옷은 ..양반아니면 입을수도 없는데 .. 백성들이 비단옷을 다입을정도 였다면 .. 상공업이 발달했었고 .. 우린 농업국가였었고 .. 우리도 일본이 당시 작은통로를 통해서 외국여러나라와 무역을 했었는데 .. 조선도 항구를 개방하고 무역을 했다면 .. ??? 참 .... 조선왕조 를 보면 ..우물안 개구리 가 생각납니다 ..
조선은 유교 사상에 젖어 가장 비생산적이고 하잘것 없는 당파싸움과 자국민을 대다수를 (40%)노비로 만들어 그자식까지 매매한 저열한 민족이었죠. 흥선 대원군 민비 등등을 보면 일제 침략과 조선 양민이나 노비들에겐 갑오개혁이 신의 축복이었음 지금 조선을 계승한 북괴보면 답나옴 수백만명이 굶어 죽어도 누구하나 개혁하는 놈이 없는 민족성 그 북괴를 추종하는 남한 세력 ㅜㅜ 참 좃같음
조선후기는 삼정의 문란과 소빙하기로 인한 흉년으로 백성들은 지옥 그자체였죠. 스스로 노비가 되는 사람도 많았다함.
더 잘살았다 정도가 아니라 80_90년대 보다 더 큰 차이...
조선의 왕들은 개쓰레기 우물안 개구리들였죠!
그냥 에도 시대 하면 긴 설명이나 추측이 필요 없죠…. 유럽이 일본에 열광 하게 된 자포니즘을 불러 일으킨 것도 에도 시대의 일본.. 근데 조선은 에도 일본을 보고 최 전성기의 청나라를 보고도 왜놈이니 떼놈이니 조롱하고 정신 승리 하다가 백년후에 처절하게 가 ㅇ 가 ㄴ 당함.. 요즘과 좀 비슷..
실제 사행록들을 보면, 통신사들이 오랑캐로 여겨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일본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에 놀라면서도 애써 '사치한 오랑캐의 습성'이라고 정신승리를 하려하는 내용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난리통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원하면 다시 데려가려고 했었었는데, 생각보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 통신사들이 애통해 하거나 당황하는 내용도 나오죠(임진, 정유재란이 끝나고 25년이 지난 1624년 통신사 일행 당시). 대부분 기와로 이어진 집을 보며 조선의 초가집과 같이 흙으로 지은 집이 없어서 놀라는 가 하면, 어느 정도 사는 집의 경우 집의 기와나 처마에 황금칠과 주석을 입히고 검은색 옻칠을 해 놓고 화려한 장식을 해 놓았는데, 그 화려함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한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당시 조선과는 경제력이 비교가 되지 않게 풍요로운 시기를 일본은 지내고 있었던 거죠.
또한, 조선, 일본의 사공들을 비교하면서 여러가지 잡다한 불만과 노젓는것도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인 조선사공에 비해서 마치 한 몸과 같이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는 일본사공들이 놀랍다는 내용도 나오기도 하고, 일본의 기율이 엄해서 사회질서가 잘 잡혀진 것을 보고 이것만은 오랑캐이지만 잘하는 것이다라고 칭찬하는 부분도 나오죠. 다만 통신사들은 유교성리학적인 지식적, 도덕적 우위를 정신승리로 삼아, 글(한문)도 제대로 못하는 왜인들이라는 식으로 얕잡아 보려는 시각이 전반적으로 있었습니다.
교육과정엔 없는 숨겨진 사실을 알아가는게 재밌네요😊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사신도 고려의 화려함에 놀랐는데 조선 후기는 진짜 맛이 갔긴 갔나봄 장사를 천시했으니 어쩔 수 밖에 없는듯
반대로 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한 일본 장수가 남긴 글에는 한양의 화려함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음. 금입택은 당시 기준으로 천 년도 전인 신라 서라벌에도 수십 채가 있었음. 부잣집의 장식도 경제력 차이라기 보다는 건축 문화의 차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듯. 초가집이야 일본도 많았을 거고(조선과 건축양식이 다르긴 하지만.). 조선의 건축이 소박해진건 가난해져서가 아니라 온돌이 대중화 된 영향도 크다고 압니다. 그냥 새로운 문화를 접한 충격이라고 보는게 더 자연스러울거 같은데. 뭐, 보빙사가 맨해튼 가 보고 당황한거랑은 다른 맥락으로 생각됩니다.
왜란 당시의 포로 귀환이라면, 기술자들의 경우에는 조선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기에 정착을 택했을 것이고, 포로로 끌려가서 사는 동안 일본에 가정이 생긴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호란에서 끌려갔다 온 귀환포로들을 환향년이라고 멸시하던 풍조를 생각 해 보면 또 충분히 이해됨. 조선과 비교도 되지 않는 경제력이라기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발육 상태가 많이 부실했음. 먹는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 못하는데 경제력이 좋다는건 어폐가 있죠. 그래서 에도시대의 일본이 풍요롭다는 것에는 의문. 물론 그게 시간이 지날 수록 조선이 병신이 되면서 실제로 격차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조선이 우리 민족 제일 암흑기. 신라 전성기 서라벌엔 초가집이 없고 전부 기와집들이며 처마와 처마, 담과 담이 서로 이어져 동해까지 뻗어있고, 30채가 넘는 부윤대택(금입택) 이 존재하고, 금이 너무 많아 키우는 개과 원숭이 목 사슬도 금으로 씀. '사사성장 탑탑안행' 이라해서 서라벌에는 하늘의 별같이 절들이 많고 탑들이 기러기 처럼 줄지어 있다고도 함.
고려시대 몽고변란 이후로도 경주는 바둑판 같이 번듯한 대로에 건물들의 열에 아홉이 황금사찰이라 길손들이 다투어 구경했다고도 함.
건축뿐만 아니라 서긍의 고려도경엔 남녀 평등사상도 조선에 비하면 되게 강했음.
조선이 괜히 숭유억불, 남존여비한 건 아니겠지만 확실히 실패한 국가정책.
그 시대로 여행 다녀 온 기분
그 당시 조선은 지금 북한과 같습니다. 전세계의 나라도 모르고 오로지 중국만 아는 세상 이 삶이 최선인줄 알고 있는 삶. 거지 자체죠. 유럽인들이 보면 놀랐정도 돼지 축사가 사람이 살거라곤 모를정도죠.
후진국 사람이 선진국 관광한 견문록이네. 조선의 갑~갑하고 꽉막힌 사상이 통신사 한명을 통해 잘들어나네.
조선 후기는 대기근과 당쟁을 거치며 쇠락해가고 있던 반면 서구는 세계 무역과 이어 산업 혁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일본은 그런 서구의 흐름을 일부나마 함께하고 있었던 국가이구요. 물론, 일본 열도가 한반도 보다 농업 생산성이 높은 편이기도 하지만. 당대 조선 지배층은 여튼 그런 차이 점을 깨닫지 못하니,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씨앗을 유교적인 해석에 빗대에 보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보이네요.
일본은 300여년전부터 뉴톤의 만유인력 등이 전해졌으며 이때 신문 지폐 은행 전당포 서점 극장 유곽 여행 여행가이드 인기전업작가 등등....... 시장경제가 활활 타올랐습니다
소위 말하는 '눈부신 에도시대'인데 한국은 이걸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주로 임진왜란 끌려간도공 정도 이야기하지요
일본도 마찬가지로 선택적으로 교육하는데, 아베 일본수상도 전후세대로서 조선에 대한 만행을 깊이 몰랐으며 위안부 건도 일이 제기되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일본인이 아무리 만행을 저질렀다 해도 ㅈ조선 관리들의 만행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습니다.
위안부? 엄연히 돈받고 했지요.
@@박희욱-h5p ; 뭔 돈을 받고 했다는 그따위 거짓말이나 해 친일파 시키야 일본측도 고노 담화로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한게 위안부다 어거지적 황국 사관으로
사실 왜곡이나 하지 마라
너무 재밌게 봤네요. 옛 일본의 상황이 눈에 보이듯 하네요.
임란때 왜군이 조선 침공 후 가장 놀란거이 조선이 너무 가난하다는
놀랐다고 한다
볏집으로 만든 지붕 흙으로 만든집 똥 이 넘쳐나는 거리
구한 말까지 이어짐
신민지 조선에서 제일 먼저 한일 위생시설 일본에서는
식민지 조선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한탄했다고 함
ㄹㅇ 조선은 적자 식민지 ㅋㅋ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진짜 똥이 그렇게 많았다고하던데 솔찍히 국뽕싹다빼면 조선시대 중반 후반은 암흑기나 다름없음
@@퇴물도살자-k3d 똥은 수세식 변기가 대중화 되기 전까지 지구상의 모든 문명에 엄청 많았습니다... 하이힐이 만들어진 이유가 똥 안밟으려고일 정도로... 볏짚으로 만든 지붕, 나무와 흙으로 만든 집은 일본 전통가옥도 해당되는 이야기고요. 임진왜란의 기록은 고니시 유키나가 측에서 쓴 기록을 보면 경복궁이 아방궁 같다느니 하면서 오히려 한양의 찬란함을 찬양합니다. 조선이 그렇게 가난했으면 항왜들의 존재 또한 설명이 힘들어지겠죠. 식민지 조선에 처음에는 돈이 많이 들어갔겠죠. 인프라 다 깔아야 하니까. 그런데 아무리 미국에 선제타격을 때릴 만큼 정신이 나가있었던 일본제국 지도부라 하더라도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손익계산도 없었을까요?
이런걸 일본에서 방영하면 대박칠듯
명칭이나 표현을 잘못한 부분들이 조금 있어서 지적 많이 당했을거에요. 제가 보면서도 지적할 부분들이 보이니..
물론 주제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다시 국교가 회복된 이후의 통신사 견문록에 대한 소개이니.
역사왜곡한 조선인들 방송은 신뢰할수 없기때문에 보지않는다
@@JapanKorea824 역사왜곡은 서로 하고있고 문제는 초총련것들과 일본우익 그리고 민주당것들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정립할수가 없음
그렇게 천지개벽을 했는데도 받아들이지못하고 부징만하는
한국이여 지금은 달라졓을까
일본 에도시대의 풍요로움이 글 에서 전해집니다.. 통신사의 글에서 부러운데 애써 내색하지 않고 절제하는 듯한 표현이 보입니다.. 참 아쉽습니다.. 조선이 저 시대 때부터 조금씩만 더 문물의 성장과 국력강화에 힘을 기울였더라면 일제 36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제가 알기론 18세기 기준으로는 그냥 관광객(?) 정도인 통신사가 딱 봐도 알만큼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가 크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시는 에도시대 일본과 조선 후기 두 나라의 평균 신장이죠. 두 나라의 생활 수준과 영양 상태가 비슷한 최근에는 남자 기준으로 한국인의 평균키가 일본인보다 2cm정도 큽니다. 그러나 에도시대 일본인은 동시기 조선인보다 6cm가량 작았다고 합니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 전통적인 일본 식단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육식의 비중이 크지 않은 것은 조선도 다를 바 없었기에 식단보다는 일반적인 영양상태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는 부모가 신생아를 죽이는 풍습까지 있었죠. 그래서 일반 서민이 살기에는 에도시대 일본보다 조선이 더 좋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기모노가 한복보다 화려한 옷이죠.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흔히 입던 "무늬 없는 흰 옷"은, 보기에는 소박할지언정, 당시 기준으로 보면 유지, 관리에 있어 무늬가 화려한 일본의 옷보다 훨씬 더 높은 난이도를 가진 옷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에는 복층 가옥이 많아, 시가지가 화려했겠죠. 다만, 한반도에서도 원래는 복층 가옥이 흔했습니다. 고려의 기록을 보면 벽란도에서 개경까지 복층 상점가가 이어져 있었다는 대목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며 복층 가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이 가난해서라기 보다는, 온돌이라는 고급 설비가 대중화 된 영향입니다. 온돌의 구조상 단층 가옥이 유리해진거니까요. 물론 한반도는 산이 많아, 풍수지리적으로 낮은 건물이 좋다는 생각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당시 일본이 조선보다 상업이 훨씬 발달한 사회였던건 사실입니다. 국내외의 무역도 활발했고, 정작 조선에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쓰지도 않던 도자기 기술과 은 제련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세계에 수출하는 상품으로 만들었죠. 그러나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놓고 봤을 때, 구한말 개막장국가 시절을 제외한다면 아마 조선이 일본보다 눈에 띄게 부족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역사를 가정하지마라 역겹다
그나마 신이 도와서 일본에 병합된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일본 없었으면 북한처럼 살았다
@@Nomad-e6i 통신사가 도시규모와 층층 누각에 놀라는 부분은 어떻케 설명하실건가요? 국뽕 나으리? ㅋㅋㅋㅋㅋㅋ
@@Nomad-e6i 조선통신사 기록에 일본애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 여자들도 예쁘고 시가지 모습에 눈이 빙빙 돌아가서... 하늘이시여 어찌 이런 오랑캐들에게 이런 복을 주셨나이까 하고 한탄하는 기록이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나요? 이미 국력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졌던겁니다.
@@Nomad-e6i 저 대략 200년뒤 1800년 후반 조선시대 영상이나 자료 보고서는 글쓰세요 수백년전 일본이 훨 상황이 좋아보이는데요
설명에 등장하는 조선인을 당인이라고 부른 것은 당나라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가진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높여 부르는 말임.
지금으로 치면 선진국 문명국 정도 되려나요? 그런데 1900년이 넘었으면 일본이 근대화가 어느정도 지났을 시기인데 중국은 서방에 엄청나게 털리고 더이상 강국의 위상이 없는시기인데 아직 그 사실이 전달이 덜 된 시기였나 보군요
그건 그냥 구라고.. 그냥 중국속국이라 당인이라 부른거지. 자기보다 거지에 졷밥국가 사람을 왜 높여불러 ㅋㅋㅋ
당나라 사람이라 당인이라 부른거지
개헛소리 하지마라 짜증나니까
짱 잼있네요!
이 나라의 역사를 보면 가장 화려 하였던 시대는 고려시대다.
남 문화 깎아내리기전에 자기 문화부터 사랑하자
자기 문화를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사람만이 국민으로써 애국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밌네요 이런 컨텐츠
일본의 에도 시대는 세계사에서도 따로 언급될 만큼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사실 조선 통신사는 그냥 이벤트였지 그들이 우리로 부터 뭘 배울 상황이 아니었죠.
그 이후로도 국력 차이는 말할 수 없이 벌어집니다. 종국엔 비극이 찾아왔죠.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발전이 있습니다. 비뚫어진 유치한 극일, 반일 감정으론
정작 일본을 이길 실력을 쌓을 수 없어요. 그 당시 통신사들도....벌린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일본의 문명에 충격을 받았지만, 애써 아닌 척 외면했습니다.
그런 결과들이 모여 조선이 식민지가 됐죠. 그래도 많이 따라잡았습니다. 더 가야죠. 앞으로.
암만 이벤트였지. 일본인들은 조선사신들이 지들 쇼군에게 문안인사하러 오는줄 알았을걸? 그리고 일본도 조선에 답방하려 사신파견을 타진했는데 조선 지배계급이 ㅈ나 멍청해서 무산됨. 그들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드나들면 다시 쳐들어올줄 알고 겁냈거든
현실을 똑바로 봐야한다는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니 극일 반일이 삐뚤어진 유치한 감정일까요?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울분이지요.
친일매국을 본받을점과 같은맥락으로 엮어선안됌 .. 무턱대고 반일 극일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친일매국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명분을 정당화하기위해 극일 반일로 매도해서 정치편향을 지향하는거죠
@@jclee8826그렇습니다
@@theself-tq6xq 어떻하면 제대로 청산하는 겁니까... 일본에 협조한 사람은 다 처벌해야 하나요.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연스레 일본을 조국으로 알고 살았고 그래서 공무원도 하고 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일본군도 된것이죠. 세계역사상 식민지배에 대해서 사과한것은 일본과 이탈리아뿐이고 그나마 물질로 보상한것은 일본이 유일합니다. 사과의 대명사 독일도 식민지인 나마비아에서 12만명을 생매장하고 때려 죽였지만 독일대법원에서 자기들은 첵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역사를 정치에 이용 해먹는건 더더욱 안되겠지요
장로나 보좌인 사람들이 아마도 학식 있는 승려들이라 말이 통했던 것 같습니다.
승려가 평균적으로 보통 교양이나 학식들이 높고 다이묘끼리 주고 받는 문서를 승려들이 전달하며 담당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왜군의 정세를 살피러 가토기요마사한테 찾아갔을 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를 갖추며 매우 흡족해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그로도 좋았고 내용도 좋았다
04:24 도지야 아프지마..ㅠ
저 시절 조선과 일본의 국력차이 무려 200년......일본은 이미 개화해서 서양문물 들어오고 카스테라 빨면서 기독교 믿었는데......조선은 19세기 되서야 개방을 하지......
사실은 조선이 본받아야 하는 상황인데.....참 우물 안 개구리.....
조선에 대한 혐오와 일뽕으로 가득찬... 기독교는 일본에서 제대로 정착도 못하고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숨어서 암호처럼 종교생활을 이어가다 수백년 뒤에 서양 선교사를 보고 기뻐했다는, 카쿠레키리시단의 나라가 일본입니다. 오히려 조선이 서양에서는 선교사를 보낸 적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경전 공부하다가 성직자가 필요하다고 김대건을 중국에 보냈죠.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기적으로 인정하고 김대건을 시성했기도 하고요. 기독교 선교가 가장 성공한 지역이 한반도고, 가장 실패한 지역이 일본열도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카스테라를 빨아요...? 당시 일본과 서양 무역선에는 냉장고가 있었나 보죠? 카스테라 재료가.... 개화는 일본도 19세기에 미국이 무력으로 강제로 시킵니다. 200년이 아니라 20년 정도 난 것은 사실이고요.
@@Nomad-e6i 멍청한거 티내지 마시길 ㅋㅋㅋㅋ초기엔 기독교도 일본내에 엄청 번성 햇엇다 영주의 지배 사상에 안맞아서 나중에 배척 당한거구 그리고 카스테라가 저당시엔 대항해 시대에 배 타면서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엄청 딱딱하게 만들엇고 그걸 일본이 배워서 부드럽게 만든게 현재 카스테라임
일본의 개방은 19세기에 이루어진 것이지 에도막부가 쇄국으로 서양과의 교역을 축소 시켜 놨는데
@@가불-w1k 네덜란드와 계속 교역 하였기 때문에 쇄국이라고 말하기 힘듬.
@@MichelanLAKE ; 일본의 쇄국은 자국 선박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할 정도로 아주 강력한 수준이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과의 교역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되고 서양 군함인 모리슨호가 자국 영해안에 나타나니까 격침까지 하려고 했을 정도로 강력한 쇄국을 펼친게 에도 막부다 페리 제도의 내항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지
그 나마 페리의 압박으로 200년간 지속된 일본의 쇄국이 철폐될수밖에
서기 1123년 중국 宋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개경에 와서 고려의 성읍 궁전 관복 인물 풍속 백성들의 생활등을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 궁궐의 화려함과 금과 은 비단으로 장식된 고려 관료의 복식등 900년전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기록했는데, 고려는 조선과 달리 개방적인 남녀평등의 개방적인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시기에 일본에 뒤쳐졌군요. 나라를 개방하지 않고 우물안 개구리였으니 어쩔수 없죠. 정치를 제대로 못한 관리들이 나라를 망쳤어요
그 훨씬 이전부터 입니다. 당장 1592년 임진왜란 보세요. 일본은 총 들고 싸웠고 조선은 활과 창이었습니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때는 조선과 사이가 아주좋았다 그걸 모르는사람 많음...
중국 청나라는 조선을 꼬붕취급했고...
물론 베트남도 마찬가지
1:30 일본 풍습
서로간 오간 대화 내용이 참 재미 있네요.
이 내용만 봐도 일본이 훨씬 경제적으로 발전한것 같네요. 쇄국은 망국의 지름길인듯.
조선이 얼마나 우물안개구리였고 꽉 막혔는지 알수있는 대목이다
조선이 왜 망했는지 알거 같네요.. 예 만 너무 중시하고, 실용적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임진왜란 병자호란 겪고 신분질서에 혼란이 생기려는 조짐이 보이자 성리학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 결과 여자의 신분은 더욱 낮아지고 장사는 천한자들만 하는거라고 하다 결국 경제도 뭐 ㅈ망한거죠
이영상을 보고 왜 일본이 조선보다 앞서갔는지 느낄수잇엇습니다
조선 제일의 글재주 있는 사람일텐데 그 시라는게 좀 수준이 높진 않네요
이게 기록과 정립 교육의 대단함인가?
글쎄 한자로 풀어서 쓴면 운치가 날수도
이미 일본 경제 규모는 저떄부터 조선보다 앞지르기 시작했음
저 때 부터가 아니라 전반적인 국력(인구, 농지, 세금, 군사력 등)은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 전성기 즘)이후 서서히 앞지르기 시작했음. 사대주의 중화사상에 갖혀 일본을 왜라고 우습게 1천년 여긴 댓가로 36년 탈탈 털림.
일본 나라현에 있는 동대사 (토다이지) 본당 규모 보면 답 나오죠.
동원할 수 있는 재정과 노동력이 어느 나라가 더 많았는지 ㅋㅋㅋㅋㅋㅋㅋㅋ
@y8xk6bi7i ; 선박 제조 기술과 장거리 무기인 활 성능에서 한국보다 뒤쳐진게 일본이고 13세기 일본원정때 규슈 하카다만에서 고려군의 궁술에 박살난 것을 몰라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대마도를 비롯한 서일본의 영주들은 조선산 쌀에 의존해야 했음 이건 사대주의 중화사상에 갇힌게 아니라 당시 객관적인 팩트가 그러하기 떄문 뭐가 일본을 우습게 여겨서 36년간 털린 것이라고 과장 호들갑 떠냐
일본에게 36년간 털린건 일본보다 근대화적인 국가체제의 교체를 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조선내부에 일본에 협조하는 친일파들의 득세와 청나라와 러시아 등 일본 견제하는
외세들이 전쟁으로 지면서 그로 인한 일본의 침략에 보호망이 약화될수밖에 없어서 그리 된것이지 단순한 식민사관의 시각으로 한부분만 과장해서 볼게 아니라 당시 복잡한 요인들을 디테일하게 봐야된다
@@삐용삐용-s8p ; 동대사 그건 백제계 기술진들의 노력으로 한것이잖아 그 당시에 동대사에 댄 비용이라는게 일본자체적으로 조달한 비용으로 했겠나 신라 당과의 무역으로 들여온 비용으로 충당했을 것이지
@@가불-w1k 백제계 기술자들의 노력? 근거는요? ㅋㅋㅋㅋ
무역이든 세금이든 그것 자체가 당대 일본 정부의 재정력 수준입니다.
그리고 신라와 당나라와의 무역에서 얻은 이익으로 건설했다? 근거는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근거 없으면 거짓말인 거 아시죠? ㅋㅋㅋㅋㅋㅋ
일본은 중세이후 세계 GDP순위에서 5위 밖으로 나간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거기에 지배층에의한 세금제도가 가혹해서 자기들끼리 잘먹고 잘사는 귀족문화가 발달을 했죠
4:45 온동네돌며 야경꾼 막대기 두드리는소리가 어제같았는데, 세월이 빛보다 빠르군아
구독했네요 .. 잘 봤습니다.
최근 두 영상처럼 사신기나 견문록 영상을 전문적으로 해보심이 어떠실까 싶습니다.
5:38 도쿄가 아니라 에도입니다. 검색해보니 도쿄는 메이지 시대부터 부른 명칭이라고 나오네요. 자막에 차라리 에도(도쿄) 이렇게 적으셨으면 좋았을 것 같네요...그리고 우삼동이 일본을 방문한 것이 임진왜란 후네요.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은 그 전에 죽고 오사카는 그 이후 에도 막부의 직할령이였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쌓아뒀던 금은보화가 그대로 있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막부에서 이미 회수에서 에도로 옮겼거나 일부만 오사카성에서 따로 관리를 했거나 했을테니.
6:00 그리고 에도 막부 쇼군의 관직은 관백이 아닌 정이대장군입니다. 관백 관직을 받았던건 히데요시입니다 (추후 태정대신을 거쳐 태합으로 최종 승진)
말씀하신 말이 맞습니다 보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현재 통용되는 지명으로 말했는데 같이 병기해둘걸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실제 동사록이나 봉사일본시문견록 등 당대 통신사로 참여했던 분들의 기록에 쇼군은 모두 '관백'으로 인지되어서 나옵니다. 1748년 통신사 기록에도 쇼군을 관백으로 기록했으니 사실여부를 떠나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의 최고 실력자를 '관백'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실제로 일본에서도 그렇게 호칭을 했을 수도 있구요. 나중에 쇼군의 답서에서도 쇼군은 자신을 일본의 '왕(王)'으로 칭하지 않고 자신을 칭할 때도 '여(余)'라고 써서 보냈었는데, 오히려 조선통신사측에서 쇼군을 '일본국왕', 그리고 '여' 대신 '과인'으로 고쳐줄 것을 요구해서 그렇게 써서 보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교토(당시 표현으로 '서경')에 천황이 명목적으로 있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죠.
졸라 아는 척 하네. ㅋ 관백은 원래 섭관가/공가 출신 애들만 맡는 천황 관할 신하들 중 최고 직위였지만, 섭관가가 아닌 히데요시가 어거지로 제수받기도 했지. 높은 신분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정이대장군은 줄여서 쇼군(장군). 하지만, 막부 소속 신하들이 쇼군을 부를 때는 장군이 아닌 관백이라고 불렀지. 그러니 조선에서 온 놈이 관백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 ㅋ 글구... 오사카는 그 이후 에도 막부의 직할령이였기 때문에... 에도 막부의 수십개 직할령 가운데 하나. 오사카에서 뜯어간 쌀과 돈은 홋카이도에서 뜯어간 거에 비하면 얼마 안됨. ㅋ
요즘으로 표현한다면 강원도 시골구성에서 30년 농사만 짓다가 서울구경 처음온 사람같은 소리를 주절주절 적었네.
이때부터지 국격차이가 벌어지게 시작한게.....
조선은 사농공상....일본은 지역상업발전......인구도 3배 gdp도 3배 영토도 3배...조선담당일진 갓본 ...갓본담당 일진 천조국....
일뽕아 양적인 인구에서 일본이 앞서 있으면 뭘하나 당시 훗카이도는 아직 일본 수중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라 영토격차도 1.2배에 불과했고 그나마 에도 중기에 들어서면 아이 살해하는 미비키의 증가로 인한 인구 감소하여 인구 성장율이 지체되어 조선과의 격차가 작은 상태로 떨어진게 일본이었지 게다가 양국 사람들의 신장 체격에서 조선인보다 뒤쳐진게 당시 일본인들이라
이런 양국 국민들의 신장 체격의 격차는 질적인 군사력에 그 영향을 미치지 당시 군사력의 기본은 병사의 체격이나 체력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거든 백병전 같은 근접 전투를 많이 하려면 말이야 지역상업 발전 웃기고 있네 중후반 기근과 폭동 은 부족 사태로 인한 화폐 인플레이션으로 직격탄을 맞은게 일본의 지역 상업인데
구독 박습니다 좋아요b
흥하세요 재밌게 봣습니다.
지금의 북한이 과거 조선의 폐쇄성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습니다.
강냉이쌀 한 줌도 안되는 기득권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측은합니다.
북한인들은 갖혀 있기에 외부를 접할 수 없어 사고가 꽉 막혀 있습니다. 조선과 똑같죠.
그들에게 햇볕을 쬐어 외투를 벗도록 유도하는게 햇볕정책이었는데
미국의 약속 불이행과
북한의 벼랑끝 외교가 극단적 충돌을 빚으며
햇볕이 금새 지고 다시 차가운 응달이 된 것이 아쉽습니다.
저시대 조선은 양반 쌍놈 놀이한다고 상업 공업은 일본보다 200년 뒤쳐짐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릎꿇고 앉는데 예의가 아니라 아마도 바지가 없어 치부를 가리기 위함이리라..."여기서 빵 터졌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그것보다도 더 원초적인 본능때문에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바지가 없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급한 성문화의 본고장이라...ㅋㅋ
조선인들의 성문란을 모르시겠지요?
남녀7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과거나 현재나 다른 점은 없다 다만 교통편이 다르다는 점이고 모든 외교절차도 똑같고 문화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이 사는 곳은 모두 똑같은 풍습과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조물주의 법칙이 아닌가 싶다. 유전의 법칙인지도 모르고 과거를 돌아보면 주마등같이 지나갔고 미래를 가는 길도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것같이 현재를 살아간다.
하루라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잘 보고 갑니다
조선통신사는 참으로 순진하고 받아 들이지 못하기에
얻어가는 것은 업었을 것이다. 일본이 우리를 얼만아
바보처럼 보왔을지 참으로 챙피하다.
맞춤법이나 고쳐쓰세요. 참으로 챙피하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부르는 '당나라군대'가 혹시???
그 당나라 군대라는 말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 던 일본군에 의해서 퍼진 말입니다 ㅋㅋㅋ 진짜 역사를 알면 왜곡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많아요 황현필.설뭐라는 작자들 또한 역사를 잘 통달했다고 주자하는 자들 조심해서 가려서 들으세요 항상 의심하고 자료를 찿아서 보시길 그 사람들 말이 진실이고 정의라고 하지 마시고 그 사람들 속으로는 역시 민중은 아둔하구마 비웃을 것입니다 뭐든지 의심하라
1919년이면 이미 메이지 유신을 거친후 1차세계대전도 일본이 치룬후 아닌가요?
그러면 저때 슬슬 영국이 남하하는 러시아 견제를 위해서 일본과 여러 외교적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인데
알다시피 2차 세계대전 일본 해군의 모태는 영국 해군 입니다
자막 오타죠. 1719년입니다.
당나라랑 연합해 고구려 백제 같은 민족,영토 삭제했자나. 이게 고려와 조선의 역사관 차이.
참 열받지만, 이미 임진왜란 전에 조선과 격차가 너무나 벌어져 있었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분발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였네.. 그나마 2000년들어서 많이 따라와서 이만큼 만들었네요.. 영상 만드느라 엄청 고생이 많았을꺼 같은데 재미있게 봤습니다.
에도 시대는 임란후이고 저 시대는 아마도 17~18세기 일겁니다. 말이 통신사이지 인사하러 간것이고 이미 저때 국력이 몇배 차이 나던 시기였었죠...
@@세상발견 ; 인사하러 간것이 아니라 축하하러 간것이라고 보는게 정확하죠 그리고 국력이 몇배 차이나도 일본은 외교 의례에서 조선보다 낮은 대우를 받은 상황이죠
일본 사신은 한양에 오지 못하고 동래까지만 오는데 조선 사신은 수도 에도까지 와서 쇼군을 알현하고 화려한 접대를 받는 등 일본 사신보다 높은 대접을 받았죠
@@가불-w1k 이미 일본이 자신들이 우위에 있음을 알기에 침략하는겁니다. 모든 인류사는 침략국이 국력이 우위에 있기 때문이에요. 무슨 평화타령이 아니고. 힘이 모이면 분출하는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가불-w1k 그건 조선이 편협해서지 조선의 국력이 강해서가 아닌데?
@@심해-s1i ; 그렇게 조선보다 국력이 강한 에도 일본이라면 미쳤다고 조선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 이런 외교 관계를 맺는단 말이냐 자국 사신이 조선의 수도에 가서 국왕을 알현못하는 그런 불평당한 외교 의례가 지배적인 수교를 맺는 것을 보면 에도 일본도 그다지 절대적으로 강한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국력차에 십선비들이 얼마나 ㅂㄷㅂㄷ 정신승리 했을까
지금도 똑같다
DNA는 변하지 않는다
서양과 무역을 일찍이 이뤄져 생활은 풍족하고 여유로웠으나 성리학 수준이 조선만 못해 항상 문화적 열등의식있었습니다,
북한인(조선통신사)가 남한 (일본)에 와서 느낀 후기를 보는 듯.
감사합니다.재미있게 보다보니 20분이 30초 같습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가 수십차례 발전된 일본을 보고 갔으면 이를 배워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었어야하는데 사신이 그저 관광을 갔거나 조정에 제대로 보고했으나 개무시당했거나 그랬을것같습니다. 도쿠가와이예야스때부터 일본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던때입니다.
서구의 종교를 받아들였으며 그들과 문물을 교류하여 식량증산과 근대무기,서양식화폐,도량형 등등 한국이 한국전쟁후 서구의 조선,철강,자동차등 서구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듯 도쿠가와시대에 그들은 그렇게 했었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그때부터 받아들였으면 일제36년을 겪지도 않았을것이요 중국을 발아래 둘수도 있었을텐데.
청나라에서 살다온 소현세자가 청나라 상공업과 서양기술학문에 대한 얘기 했다가 인조 눈밖에 난 일도 있으니 조정에 보고 할때는 그냥 듣기 좋은 말만 했을듯
서구의 종교를 받아들였....을까요?ㅋㅋㅋㅋㅋㅋㅋ 받아들이려다가 말았고, 그 여파로 지금까지도 서양의 종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선교가 가장 실패한 지역으로 꼽힐 정도인데요. 그리고 에도막부 시대까지는 일본도 외세를 배척했습니다. 조선보다 정보가 조금 더 많았을 정도이죠. 일본 근대화 과정을 보시면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 유신 과정에서의 반대세력 등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선이 제대로 된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본도 무슨 별천지는 아니었습니다.
너처럼 역사를 가정하는 놈들이 가장 한심하고 의미없는 놈들임
@@JapanKorea824 너네 애미 애비가 그런식으로 사람을 판단하라고 가르쳤니?
문과생을 고위관직에 올리는 것은 참 미련한 짓같다. 물론 문과생 나름이지만 조선은 문장덕후의 나라 였나 ㅎ
시로 관직을 정하는 나라였죠
이때는 일본의 원시 문화가 많이 개화된 시기임
원시 문화는 이미 고대에 개화됐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쯔쯔, 일본의 국가 시스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니,..
시모 카마카리입니다 시모카 마카리 아닙니다😅
고려시대까진 우리나라도 교역 많이해서 화려했는데 조선시대부터 망함
당시 조선은 한마다로 국제거지떼나 다름없었습니다...그렇게 가난하게 나라도 건사못하고 비참하게 살았어도 그게 비참한 것인지도 모르고 산겁니다!
조선역사는 정말 반성해야 하는 부끄러운 역사지.
저 통신사란 작자 하는꼴 보면 답답하다.
남창이 뭐임??
매춘하는 게이
보다보니 열받는게 조선시대사람들도 서양사람은 만날수 있었네?????아주그냥 보고도 배우질안았던인간들 두들겨패주고싶을정도다 .....
속터지는 건 청나라가 영국에 떡실신 되는 걸 조선과 일본이 동시에 봤는데 일본은 화들짝놀라 메이지유신을 통해 나라체질을 바꾸고 강대국으로 성장한 반면 조선은 “아이고 우리 황제님 우짤꼬 어지러우신 마음 보살펴야 하는데”이러면서 걱정만 했지. 개혁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ㅋㅋㅋㅋㅋ
하... 답답하구나
나가사키 가다가 표류한 하멜과 선원들을 관노로 부렸죠.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 저 당시 일본은 상업이 크게 발달하고 이미 네델란드 상인과 유럽 정세를 읽고 있었으니......공자왈 맹자왈 하는 한국의 통신사가 얼마나 한심 스러웠을까? ◆
네덜란드 기술이 발달한거지 무슨 일본이 네덜란드를 찾아가기라도 한 줄 아나보네
한심스럽다고 생각했다면 엄청난 예산을 써가며 조선통신사를 맞아하지 않았겠죠. 식민사관에 입각한 시선으로 역사를 보면 자학에만 빠지고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neohuman4137 일본도 중국이나 조선처럼 똑같이 쇄국했음. 근데 못 막고 제일 먼저 뚫려버림. 근데 그게 나중에 오히려 득이되니까 마치 일본이 깨어있어서 스스로 받아들인걸로 포장함 ㅋㅋㅋ
윗댓글에도 써있듯이 그 전까지 계속 조선이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막대한 정부 예산을 써가며 조선 통신사를 모신것임.
@@bill_blackhands 무슨 한심한 소리요. 기술이 발달한 나라와 교류를 하면
기술이 발달할 수 밖에 없잖소! ㅎㅎㅎ
@@sungminkim6309 일본이 스스로 교류해서 발전시킨게 아니고 서양에게 강제로 교류 당하다보니 얼떨결에 발전한거라는 말임. 일본도 쇄국했음. 윗댓글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셈.
원래 칼질로 해적질하던 국가였는데 최신 총도 사고 조선에 있는 일뽕들이 나라를 공짜로 넘겨주니까 대규모 해적질이 가능해진 것.
너무나도 재밌고
3:48 다들 그렇게 게2가 되는거야...
그놈에 시 짓는거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거가지고 자랑질은 저딴거 나도 짓겟다
일본인들 예의바르고 정직하고 진지하죠. 무릎꿇는 게 바지가 없어서? 바지를 안입는 문화니 그렇죠. 음란? 기생지역일테죠... 일본? 백제호이죠. 일본의 경제규모가 중세 때도 어마어마했음을 말해줌
서로 저렇게 좋게 유지 됐다면 아마 동아시아의 평화는 오래토록 유지 되었을 것이다. 일본아 제발 욕심좀 버려라. 그로므로 우리가 서로 번영하자!
그 일본이 이제 수명이 다하여 물속에 가라앉네요..
1:37 이사진들은 일본이 조작한사진인데......하도 못나서 사진고쳤다는.....
통일신라때부터 경제나 기타모든면에서 일본이 앞서가기 시작함..
이걸 국뽕으로거꾸로 생각하는 애들이 많지요. 객관적으로 못사는 나라에서 (깔보았던) 선진국을 보고 놀랐던거지요.
와 이런 정신나간 소리까지. 임진왜란 전에 사기그릇도 없던 일본을. 정신차려라. 여진족이 병자호란에서 이겼다고 고대부터 강대국이란 말처럼 헛소리.
@@yck-c1t사기그릇하고 국력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야만적인 몽골이 전세계를 휩쓴건 멀로 설명하나요? 우리나라 역사교과서 반이 국뽕에 거짓입니다. 그 야만족 여진이 금청을 세웠고 현 중국영토의 대부분을 만들어준 민족입니다. 한민족보다 어찌보면 더 우월하지요. 우물안개구리식 역사관에서 빠져나오시길 바랍니다.
@@yck-c1t 사기그릇 없었다 치고 우리 도공 다 잡아갔다 치자. 그 뒤로 조선 뭐했는데? 왜란때 잡혀간 도공들은 조선에서 개취급 받다 일본가니 조선보다 훨 나은 대접을 받게 되고 그래서 전쟁 후 조선통신사 따라 조선 가려 하는 도공들이 없어져버렸어. 그리고 그 도공들의 후예들은 일본 도자기를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렸어. 중요한건 조선도공들이 조선식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일본미의 정수를 창조했다는거야 . 거기서도 조선 백자 청자 만든게 아니라
@@yck-c1t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도 도기가 있었습니다. 정신 차리세요.
일본에 환상을 가지는게 꼭 이상한건 아니지만 배울점은 배우고 경계해야죠
환상에 눈이 멀어 현실을 왜곡해서 부정적인것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것 또한 경계 해야 겠습니다
일단 일본이 개국이래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가장 잘 살았던 1970년대 사진보다 화려한 에도시대 그림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도시대 (아마도 초기겠지만) 다이묘가 도자기가 없어서 말그대로 원시시대 토기를 사용했다는걸 알고 충격 먹었기 때문입니다 뭐 개밥그릇을 쓰는 사발을 보물인양 차도에 쓴 일본이니 놀랍지도 않는..
일본이 세계2위로 잘살았던 시점이 세계 대호황과 냉전으로 전세계의 돈이 일본에 흘러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죠
그리고 사진에 나오는 화려한 문화재 건축물들도 1층을 2층으로 올리는등 찾아보시면 완전히 개축한 신축입니다 좀 황당하긴 하지만
그리고 일본의 사회와 현실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껴볼수 있는 용과같이 같은 게임등을 해보시면
아니 에도시대가 훨씬 잘 살았던거 아냐? 싶을정도로 통신사들이 본건 일반인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입니다
그러기에 통신사로 뽑히면 서로 떠밀고 안가려고 했습니다 정말 일본이 살기 좋았다면 왜 왜인들처럼 오지 말라고 해도 조선에 온것처럼 서로 필사적으로 갔겠죠
일본특유의 보여주기식 군대 사열문화가 스며져 있는것을 알 수 있는 점이죠
(간단하게 선교사 온다는 이유만으로 전마을 청소 시킨 히데요시건만 봐도 알수 있는대목으로
님들이 그당시 일본에 살면 툭하면 무임금으로 노동에 강제동원되어 시달려야 됨)
상식적으로 일본이 그렇게 은이 많으면 네덜란드만 교역 했겠습니까? 당대 강대국들 다 눈이 돌아가죠 조선이나 중국도 눈 돌아가서 침략 준비 했을지도 모름
일본이 실제로 서양에 팔았던건 은이 아니라 인적자원 즉 인간 이였습니다
그러기에 경쟁에서 이긴 강대국들은 가깝고 강인한 흑익을 얻을수 있는 아프리카에서 경쟁에서 진 네덜랜드가 먼곳에서 노예를 수입한것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이 됨
한예로 이에야스도 히데요시도 서양교역선들이 인신매매 너무 해간다는 명분으로 서양과 교역을 조절했죠
실상은 다른영주들이 화약과 조총을 얻는 루트를 차단하려 했던거고 그 비싼 조총과 화약 뭘로 교역 했나요? 말만 농민일뿐 사무라이의 재산인 농민들이 노예로 팔려갔었죠
아프리카등지에 일본인 노예 기림비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마비키 같은게 성행 하고 풍습이 됐겠죠 자식 안뺏길려면 새로 태어난 애는 죽여야 노동력 손실을 우려해서 아이들을 뺏기지 않을테니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3:38 남성간의 성관계라는 얘기네.
유럽도 있었고 고대 그리스도 철학자 옆에 남창이 한명씩 껴서 서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유교 탈레반. 조선 시대. 퇴보. 조선 후기 서양인들의 시선에서 보면 아프리카 원주민 보다 미개 하다 함.
훔터레스팅
저때부터 현재까지 한국은 일본을 넘어선 적이 없음
썩고 썩은 문신조선과 문무겸비일본의 산업발달 군대발전과 게임이 안되네요
아직까지도 그런 썩어빠진 문신정치는 공무원사회, 정치사회에서 계속되고 있죠. 언제나 그랬듯이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이들은 제일 먼저 제 살길 찾아 도피하고, 민초들은 목숨바쳐 나라를 구하죠. 이러한 악습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IMF시대에도 민초들이 자신을 희생시켜 나라를 구해냈죠.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19세기 말까지 조선이나 일본이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도찐개찐 이었습니다.
심지어 화포 수준은 조선이 더 높았고요...
문젠느 일본이 미국과 교류하고 메이지 유신을 거쳐 동양보다 수백년 앞선 서양 문물을 무제한 받아들이다 보니 한중일 삼국 중에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지금도 한국이 아프리카 아무 나라중에 하나 찍어서 군용기에 탱크 지원해 주면 그 나라는 아프리카 최강국이 됩니다.
일본 위치가 딱 그 정도였다는 겁니다.
국민의 나라 만세 외쳤지? 딱 그래 보여.
@@자룡-q4j 일본은 16세기부터 gdp10위밑으로 떨어진적이 없습니다.
1600년대에 보면 조선인구는 1100만명인 것에비해 일본은 인구 2200만명으로 이미 인구수 2배에 17세기에 1990년 가치 달러 기준 gdp 96억일 때 조선은 19세기에 28억 달러였습니다. 이미 상공업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났죠
뭐 메이지유신때문에 일본과 격차가 벌어졌다고 하는데 메이지 유신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미 서양과 교역하기전부터 적게는 수배에서 수십배 차이났어요
ko.wikipedia.org/wiki/%EA%B3%BC%EA%B1%B0_%EC%A7%80%EC%97%AD%EB%B3%84_%EA%B5%AC%EB%A7%A4%EB%A0%A5_%EA%B8%B0%EC%A4%80_GDP_%EB%AA%A9%EB%A1%9D
@@자룡-q4j 도찐개찐? 근거는요? ㅋㅋㅋㅋㅋㅋ
사츠에이 전쟁에서 사츠마번은 영국에 큰 피해를 입혔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일방적으로 얻어터졌죠 ㅋㅋㅋㅋㅋㅋㅋ
유학으로 망하는 나라...일찍부터 깨어있던 나라...아직도 정신승리하는 현재
썸네일 낚시 지겹다..
일빠들 또 조선 깐다고 난리구먼 기록은 기록 그대로 보면 될것을...
님이야말로 그냥 칭찬은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안됨? 일본에 관해 조금만 좋게 말하면 일빠로 몰아세우는 짓도 좀 그만하고...
@@lagrange1013 일본을 좋게 이야기한다고 댓글 적은게 아니고 일본 찬양하는 애들은 그냥 그대로 안받아들이고 누워서 침뱉기를 하기에 그리 적은겁니다. 조선은 미개하다 등등으로
우물 안 씹선비의 우물 밖 여행기인가?
식민사관에 찌들린 인간한들이 한둘이 아니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위해 일본 1년예산의 4분에1를 쏟아부었다!
왜 그랬는지 생각 좀하고 살자
탈북자 애들이 서울 와서 다 거짓이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인 원리다 댁은 근거없는 택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인정할건 인정해야한다 제발 눈가리고 아웅하지는 말자
그 땐 쟤네들이 우리보다 잘 살았구나 하고 쿨하게 넘기면 되지, 뭘 식민사관까지 찾습니까? 그런 게 다 열등감에서 나온 자격지심입니다. 이만큼 먹고 살게 됐으면 좀 세상도 여유롭게 바라볼만 하지 않을까 싶네요.
식민사관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장택성-r4t ; 너같은 일뽕이 이해못할 얘기다
ㅈㄹ하네... 저 당시 일본은 이미 넘사벽이었고 상업의 발달은 아시아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역시 성진국 ㅋ
음양이 유별하거늘
니는 그 즐거움을 모르제
한일 사상의 차이 극명하네 ㅋㅋ
그놈에 체통. ㅎㅎㅎㅎ
너무 재밌네요. 아들이 일본에서 유학중이라 늘 유투버로 검색하고 찾아보는데 흥미진진했습니다. 비록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서로 사신을 교환하며 사이좋게 지낸듯한데 일제시대 이후 지난정권에서 또 사이가 틀어졌다가 최근에야 국교회복이 되는 듯하여 양국 지도자들이 이런 예전의 국왕들간 우호를 떠올리며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랍니다.
ㅋㅋㅋㅋㅋ
세계적으로 반한감정 최고의 나라에 뭘 바래
@@lukeseo4879반한감정 최고는 중국이다. 그리고 최근엔 상호 호감이 5:5 정도로 올라 왔다. 아무대나 근거없는말 반말로 찍찍 남기지 말아라.
@@맥디ㄹㅇ 일본하고 친하게지내야죠
댓글들을 다 읽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지네. 우리나라 문명이 쫌...... 일본이 많은 개방을 했으면서도 왜? 미국에 개항을 당하지? 역사가 부족한가? 아니 일본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네. 동학 이후의 인물들이 일본에 넘어가 일본 문물을 보고 동색이 되었다고 해서.... 쓰레기라고 생각했는 데. 일본을 몰랐네. 전혀.
우리나라가 광복 6.25 동란의 시대를 격으면서 국뽕이 많이 필요한 시대라서 시대적으로 그렇케 가르켜서 그런겁니다 우리나라가 노비가 세계최초로 연은분리법이란 획기적인 은 분리법을 연산군때 발견햇는데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의 주자 성리학에 빠져서 기술을 천대하던 나라엿죠 그후 그 기술은 사장되고 마침 일본 섬에서 엄청난 양의 은광이 발견되면서 개발자들이 일본으로 가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엄청난 은을 채광하게 됩니다 그돈으로 동남아와 무역을 하면서 대항해 시대를 개척하던 서양 문물을 은으로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총 인쇄술 의학서 제조술 등등을요 특히 포루투칼 상인에게 화승총 2자루를 사오면서 그걸 진상하고 섬주가 또 그걸 대장간에게 모양따윈 상관 없으니 똑같이 복사하라 시켯고 1년만에 대장장이가 만들어서 영주에게 설계도와 총을 바치고 전일본으로 확대 연은분리법 기술이 일본으로 넘어간후 100년후 조선은 조총을 든 일본에게 침략 당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국뽕 역사만 배워서는 이해 안가는 역사가 너무 많습니다 세계사를 같이 알아야만 이해가 갑니다 일본은 조선중기에 이미 동남아 까지 진출해서 대항해시대 선진 문물을 마구마구 받아들엿고 통신사 이야기 중에 도시 규모에 놀라고 층층으로 만든 누각에 놀라고 이미 일본 일반인들이 비단을 입고 잇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조선은 2층 3층집은 상상도 못할 시대엿죠 조선통신사도 임진왜란이후에 파견된거니 그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잇엇을까요 우리나라는 집권층이 부패하고 당파싸움에만 빠져잇엇고 주자성리학에 빠져서 조선중기 이후 임란이후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고 병자호란까지 거치면서 각자도생을 시작하엿고 중국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 돈을 번 천민들도 족보를 모두 사서 중국식 창씨 개명을 적극적으로하엿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우리나라를 속국이라 칭하는 겁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성씨의 70프로가 중국에서 왓다고합니다
한양이 도쿄보다는 더 화러했으나
전란으로 초라해졌음.
말이 되냐 ?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이고 일본은 상업 국가나 마찬가지인데 뭐가 일본보다 화려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trinity120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신같은 새기야 임진왜란때 궁궐의 모습을
묘사한 것 좀 읽고 댓글달아 모자란 난독증환자새기야
거짓... 임란 전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부잣집이 조선의 궁전보다 크다고 나와있는데..
@@charlieshin9513 신선이 어쩌고 그랫다는데 뭔 소리야 기록을 찾아보고 말하셔..
인구 규모가 있는데 상대가 안되죠. 한양이 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정말...좋은 영상입니다.... 그리고...우울한것은...우리가 문화를 전파했고 우리를 우러러보던 왜 였지만...이미...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국력이 우리를 넘어섰고....이후...저때는 우리보다 경제력과 문화력이 ... 우리를 넘어섰구나.......그때의 우리가 참 안타까운 상황이었구나...싶은 마음에...우울해졌습니다. 우리가 전해줬는데 우리가 더 우월했는데...라는 말은, 내가 초등학교떄 공부 더 잘했는데, 왜 쟤가 서울대가? 라는 것보다도 더 한심한 한탄이라고 해야 될까....우울하네요. 다시는 그런일이 없도록, 우리의 문화력이 더 창대해지도록.... 끝으로 에라이 굥 x새끼야 꺼져라!
일본이 조선보다 더 발전한 건 '자율과 경쟁' 덕분입니다. 그런데 '자율과 경쟁'을 하지 말자는 정당이 어느 쪽? ㅋㅋㅋㅋㅋㅋㅋ
조선은 주자 성리학 사상에 빠져서 필요도 없는 예송논쟁 당파싸움 때문에 망햇어요 그런데 그 중국을 바라보고 쓸데없는 정의 싸움에 나라를 나락으로 만들고 잇는게 주체사상에 빠져잇는 386 운동권 세력인데 그 주체가 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당신은 ㅋㅋㅋㅋㅋ 정책을 들여다보고 생각 좀 하자구요 민주당이 미래로 가자고 하나요? 과거로 회귀하자고 하나요? 아직도 구시대적인 사고로 망해버린 공산주의 주장하는데 혁명 적폐청산 이지랄하면서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