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Видео 118
- Просмотров 314 819
박동
Добавлен 19 май 2014
하북 보정시 박물관의 고조선 유물을 찾아서
하북성 보정시 박물관에는 보정고성 모형, 위촉오 삼국 시대 유비 3형제의 도원결의 장면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이 도원결의를 한 곳은 현 북경 남쪽의 유주 탁군이다. 보정 일대에서는 5호 16국 시대에 래이 마한의 주축이었던 모용 선비족들이 근거를 두고 활동했다. 조선 후예인 모용 선비족의 연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대륙 백제의 근거지가 되었다.
Просмотров: 405
Видео
후연 모용수 황제가 래이 마한의 후손이라고?
Просмотров 7952 месяца назад
두로영은(豆盧永恩)묘비에는 공이 조선공 모용황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의 성씨는 노(盧)씨이다. 유주 탁군의 범양 노씨로, 이는 모용선비가 노씨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범양 노씨는 래이족으로 부여계 우이족과 일체가 된 선비족들이다. 양직공도에는 백제가 옛 래이 마한에 속한 나라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용수는 대륙에서 부여계 백제가 흥기하기 전 후연의 황제로 군림한 한민족 출신 중 가장 위대한 황제이다. 5호16국 시대라는 난세에 한민족의 기상을 보여준 모용수는 하북성 정주에 도읍하고 있었다.
하북성 보정(保定)에 발조선-마한이 있었다고?
Просмотров 1,7 тыс.2 месяца назад
하북성 보정고성은 고조선 무종(無終) 세력, 즉 관자에 기록된 발조선(發朝鮮)의 도읍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정(保定)의 지명은 밝은 자리라는 뜻으로 영산강 나주 반남에 있었던 보라국(保羅國) 세력과 동일한 부여 세력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는 보라국이 나주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정의 남쪽에는 정주(定州)가 있는데, 이곳에 조선의 방계국인 중산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중산국은 석가장 북쪽 정정(正定)고성에 도읍했었는데, 나중에 정주로 이주했다. 정정고성 바로 남쪽으로 호타하가 해자역할을 하며 흐르고 있다.
한국 황씨의 태시조 황운(黃雲) 공의 삼호지역 황국을 찾아서
Просмотров 8772 месяца назад
요임금이 혜련(惠連)을 삼호(參胡)에 봉하고 황운(黃雲)이라는 이름을 사여했다. 요임금은 혜련 공이 황제(黃帝)의 후손이므로 황씨라는 성을 주었고, 이름은 황제의 관직인 구름 운(雲)이라 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황제는 모든 관직 이름을 구름 운이라는 글자를 넣어 지었고, 군대 이름은 운사(雲師)라 했다. 고조선의 환웅인 태호 복희가 중원에 들어올 때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렸다고 했는데, 황제가 바로 운사이다. 황운 공의 후손 황정보 선생이 한국에서 1만리를 달려 조상님을 찾아왔다.
한국 황씨의 뿌리, 산서성 분양시 황국고성을 찾아서
Просмотров 7022 месяца назад
서기전 2300년경 요임금은 황제의 후손인 혜련공에게 치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신서성 분양의 참호지역을 분봉하고 최초의 황국을 건국하도록 했다. 서기전 891년 황운공의 후손들은 하북성에도 황국을 건국하였으나 서기전 845년 멸망하고, 다시 하남성 황천현 일대에 황국을 건국하였다. 황국은 산서성의 황국과 더불어 두 개가 동시에 존재했으며, 하남성 황천현의 황국은 서기전 845년 건국 이후 200여년만인 서기전 648년에 초나라에 멸망당했다. 그리고 산서성 황국은 서기전 541년 진(晉)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이후 황씨들은 한반도로 집단 이주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조선 무종 대 진나라의 산서성 태원전쟁 현장을 찾아서
Просмотров 4552 месяца назад
산서성 태원은 진양(晉陽)으로 불리웠으며, 서기전 541년 고조선 무종(無終) 대 진(晉)나라 간 대전쟁이 발생한 곳이다. 춘추좌전에는 진나라 순오가 군사를 이끌고 북정하여 고조선의 무종을 대파했다고 기록했다. 진나라 위서 장군은 조선의 보병전에 맞서 진을 짜 대응하는 포병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전국시대 전쟁 양상이 급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고조선의 후계국 중 하나인 고구려가 모본왕 시기에 이곳까지 공격을 했다. 원화군현지에 따르면 대원, 대로, 대하, 평양, 진양, 하허의 6개 지명은 실상 동일한 지명이다.
산서성 대동시의 북위시대 운강석굴에서 일제가 총질을?
Просмотров 6292 месяца назад
운강석굴(雲崗石窟)은 북위 시대인 서기 460년~494년 북위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졌으며, 중앙아시아와 중국이 혼합된 양식이다. 중앙아시아의 문물이 대동시를 통해 중원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운강석굴은 낙양의 용문석굴, 돈황의 막고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 200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부처님 세 분의 온 몸에 총알 자국이 선명해 일제의 만행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유적으로 불교문화의 정수로 평가된다.
산서성 대동시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Просмотров 1,7 тыс.2 месяца назад
대동시는 북방의 관문인 운중(雲中), 평성(平城)으로 불리웠으며, 요임금이 태호 복희의 넷째 화숙을 봉해 고조선을 건국하게 한 곳이다. 춘추좌전에서 이들은 무정, 북융으로 불리웠으며, BC 541년 진(晉)나라와의 대원전쟁에서 대패해 태행산맥 동쪽으로 이주했다. 한나라 유방이 흉노에게 포위된 마읍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북위가 이곳에 도읍하고 후연 모용수와 참합피전쟁을 했으며 모용수가 이곳을 점령하고 돌아가는 도중 사망했다. 두로영은묘비에 이곳이 고조선의 땅 고류(高柳)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경 북쪽 탁록에서 동이족 황제와 치우가 전쟁을 했다고?
Просмотров 2,9 тыс.2 месяца назад
북경 북서쪽으로 2시간 이상 가면 5천년전 황제와 치우의 전쟁터 탁록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치우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제후들을 불러모아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했다. 황제는 화하족이 아니라 동이족 한국 횡씨의 시조이다.
수, 당의 고구려 침략시 백제가 등거리 외교를 했다고?
Просмотров 2622 месяца назад
수, 당 전쟁시 고구려가 북경 일대에 있었다는 근거는 광개토왕비문, 삼국사기, 삼국유사,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수없이 많다. 수,당 병사들이 축지법을 쓰지 않는한 4천리도 넘는 북한 평양까지 쳐들어갔다는 허구적 주장은 성립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치통감 수기5 양제 대업 8년(612년)에는 백제가 수양제 침공시 수나라군이 요수를 건너자 경계에서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며 겉으로는 수나라를 원조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경시 문명의 시원인 상나라 후계 기자조선 유적지 유리하에서 이에 대해 살펴본다.
백제시조 구태의 옥갑이 하북성 정주에서 발굴됐다고?
Просмотров 4,1 тыс.2 месяца назад
하북성 정주고성(定州古城)은 석가장시 정정고성(正定古城)과 더불어 중산국(中山國)이 도읍하였던 곳이다. 남쪽으로 호타하가 흐른다. 정주고성은 옛지명이 노노현(盧奴縣)으로 노(盧)씨인 모용수가 후연의 황제로 군림하던 곳이다. 이곳에 부여왕으로서 백제의 개국시조로 추앙받던 구태(仇台)의 옥갑이 전시되어 있다.
북경시 영정하에서 집안까지 침공했다고?
Просмотров 1,3 тыс.2 месяца назад
국내 강단시학에서는 수양제와 당태종이 북경 영정하에서 집안에 있는 고구려를 쳐들어 갔다고 주장한다. 북경 영정하에서 그곳까지는 차로 달려도 1200키로나 떨어져 있다. 난하까지도 1천리나 된다. 수양제나 당태종이 북경 인근에서 무운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무기를 만들어서 그 먼 곳까지 원정을 갔다는 것인가? 자치통감과 삼국사기가 헛된 이야기를 썼단 말인가?
고구려 요동성이 북경 동남쪽의 당산시에 있었다고?
Просмотров 9822 месяца назад
수양제와 당태종이 침공한 고구려 요동성은 북경시 동남쪽 당산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이두에는 당산시의 지명유래를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한데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태종은 요동성을 점령하고 9일만에 안시성에 도착했다. 당산시에서 북경시 밀운 당지산촌까지는 차량으로 2시간 30분이 걸린다.
수양제 30만 대군을 물리친 실수가 북경에 있다고?
Просмотров 8762 месяца назад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양제의 우중문 우문술 군대는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을지문덕 장군의 유인책에 속아 실수를 반쯤 건너 도망치다가 고구려군이 후미를 치자 군대가 무너져 30만 5천명 중 2,700명만이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갔다. 구당서 등에는 평양성은 한나라 때 낙랑군으로 장안에서 5천리 떨어진 곳으로 남쪽이 패수와 닿아 있다고 했다.
고구려 안시성이 북경 밀운구(密雲區)에 있다고?
Просмотров 3,1 тыс.2 месяца назад
북경시 밀운구 역사를 추적한 결과 이곳이 고구려 시기에 어양군 소속의 안시로 밝혀졌다. 안시성은 현재의 당지산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탐사팀이 당지산 일대를 탐사한 결과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한다. 당지산 욕자구 산 위에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비도를 수련한 연무대가 있다.
부여족들의 나라 마한은.. 광개토 대왕한테 부여가 망한 다음 망명세력들이 서쪽으로 와서 서부여를 형성 한다음 저기 마한 소국들 같은 명칭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기원전. 연나라 진개랑 부딪힐때 부터..이미 저런 명칭은 있었는지요?.
아는만큼 보인다고 백제에 대성팔족은 없습니다. 대성팔족은 본디 북주와 북제의 관롱집단에서 나온 개념인 것입니다. 백제에 대성팔족이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 시대에 쓰여진 사대적인 사관에 따라서 지어낸 거짓말로 보는 것이 마땅한 것이며, 그 명칭 또한 관롱집단의 8주국 가문입니다. 그걸 모사해서는 조선새끼덜이 백제사에 후대에 외삽한 것입니다. 관롱집단의 팔주국 가문 대성8가를 백제사에 쳐 집어넣은 것은 조선왕조의 사대적인 역사관에 의한 것이며, 그 자체로 역사 왜곡인 것입니다.
한민족도 다른 민족도 아프리카에서 왔습니다
@@dongjoonglee3432 아프리카 기원설이 맞습니다.^^
잘 봣습니다 저는 나주오씨 입니다
@@Yerimhusband 네 반갑습니다.^^
@@Yerimhusband 네 반갑습니다. 나주 오씨는 고려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혜종의 모친이 나주 오씨입니다.
예전부터사서에 마한이54개국이나된다고?여기에의문이있었는데 조금씩의문이풀리는것같습니다. 조금씩박사님영상보면서 공부해보겠습니다. 感謝합니다.
@@Ideaasset 네 삼국지에는 55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월나라에 패한 오나라 유민들이 흩어져 여러저기 해안가에 정착한거고 이것이 왜라고 불렸다.
@@Huhjiwon 그렇습니다
대륙에 고구려ㅜ백제 신라가 있었다 ~ 그래서 중국에도 우리나라에도 같은 지역명이 있다 지도층은 소수이고 호주나ㅜ캐나다 처럼 영국 명 이름이 있듯 우리가 동아시아의 주역이다
나주 오씨입니다~^^
@@바람-p7i 네 안녕하세요-
구태의 나라 = 구태라 = 구다라
@@simhopp 네~
진인 이라고 하지, 왜 진조인 이라고 할까? 진조선인 이란 소리니까.
건국된게 아니고 고조선의 지방정부 이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나주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 피장자는 목씨이고 그 후손은 나주 임씨라 결론 내주셨는데에 질문 있습니다. 나주 임씨는 족보상 고려 시대 장군 임비를 시조(또는 원조)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비 장군이 활동했던 시기는 13세기, 나주 복암리 고분은 3~7세기의 무덤으로 둘의 시간차가 대략 10세기 정도가 나는데요. 나주 임씨와 열도 소아 씨가 같은 계통이라는 근거 내지는 추정 이유가 있으신가요? 고견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sl9886 근거 1. 일본서기에 적혀 있습니다. 제 유튜브 영상에서 여러 번 설명했으니 참조하세요. 2. 나주 임씨 세거지 회진 아파트형 고분이 백제 대성팔족 목씨 고분입니다. 이것도 유튜브 영상 참조하세요.
@@asl9886 3. 신찬성씨록에 백제 임씨는 목귀공(목씨) 후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asl9886 4. 한일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목협만치가 열도에서 소아만지로 활동한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asl9886 5. 나주 회진 아파트형 고분 일대에 나주 임씨가 살고 있습니다
@@asl9886 6. 일본서기에 을사의 변과 관련해 시해된 소아입록의 이름이 임신안작 즉 임씨라고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구독은 깜빡하고 가서 또와서 하고 갑니다
@@임야매매 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저는 남평문씨 시중공파(문익점 할아버지 4남 중진)20세 손입니다 문씨가 주문왕(주나라 문왕)의 묘호로 봉작되었다는것도 처음알았습니다
@@문추길-h7w 네 앞으로 면밀히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치우천황때도 하북성,산동성과강소성일때에 위치한 걸로 볼 동이가 이지역에 수천년간 살아온 원주민이네요. 그렇다면 참 동이족의 후예로 참 가슴이 아프네요. 역사조차 왜곡되서 조상들의 땅도 못 알아보고.
@@Username34857 네 가슴이 아픕니다.
감사합니다
@@진구우-o5n 네 감사합니다^^
네이버웹툰에서 삼국사기 고대 사료 원문을 바탕으로 연재중인 찐삼국사 웹툰이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관과 다르고 환단고기에 얽매여있다는 식의 어이없는 이유로 네이버 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고소를 당했고 단행본을 처분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네이버의 역사관 탄압에 저항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잘 나가시다가 총일신라, 후삼국과 고려를 홀라당 빼버리시네^^
장정정 넷째천간정입니다 고무래는 아니죠
감사합니다
월지 관련 고귀한 의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주등 한반도 지명, 대륙동부에 다 있는데 그 당시 한나라에서 작은 한반도 남부 역사를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됩니다.
당군13만. 신라군 5만인데 그당시 한반도에 백제에는 과연 얼마정도 인구가 살았을까요
정림사지5층석탑은 전후관계로 보아 개인적으로 조작이 확실해보이고 백제서기나 백제왕기 200여개성, 77만호 인구, 지진. 메뚜기 피해 등을 볼때 한반도에서 일어나기 어렵다고 봅니다.
혹시, 제가 아는 거래처 사장님 중에 '예' 씨가 계신데, 이분들의 뿌리는 어떻게 되는 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
예씨는 한문이 여럿입니다. 그중 가장 많은 예(芮)씨는 1만4천여명이 있는데, 다른 성씨들과 마찬가지로 중원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파악됩니다. 주나라 문왕의 신하 양부가 산서 예성(山西芮城)과 섬서성 일대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이 지명을 따서 성씨로 삼았다고 합니다. 춘추시대에는 예나라가 진나라에 병합되었고, 그 왕족들은 진나라의 귀족이 되었습니다. 중원의 예씨는 대부분 부풍에서 나와서 부풍(扶风) 예씨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박동-h4p 박동 선생님 답해주신 내용 감사합니다.
@@휴림-f3n 네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4:27 은둔거사랑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는거 ㅋㅋㅋㅋㅋ ㅠㅠ 진짜 지금 제 삶이랑 딱 맞네요
@@user-21wind19 정말인가요?
백제 전지 태자는 진짜 倭에 인질로 갔을까? ※백제 왕자 久尒辛구이신 倭王이 되다. ●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太子 腆支의 渡倭 기사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 아신왕이 자신의 아들 '태자 전지'를 倭와 우호를 맺어서 볼모로 보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 ( 397년 05월 )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6년 여름 5월에 왕이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기"의 기록을 보면 △ 일본서기 277년 (+120년 교정기년 397년)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8년 봄 3월 百濟人이 來朝하였다 『百濟記』에는, “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日本이) 우리의 枕彌多禮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直支를 天朝에 보내어 先王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위 일본서기 "백제기"의 기록에선 삼국사기 백제본기처럼 볼모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倭와의 우호를 목적으로 倭로 보내진 건 맞으므로 두 史書의 교차검증으로 전지 태자는 그 당시 倭로 간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이 백제 전지 태자가 우호를 닦을 목적으로 정말 볼모로 갔을까요? 거기에 대한 의문은 백제에서 倭로 보낸 칠지도라는 칼의 명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 칠지도는 백제 전지왕 4년 (408년)에 만들어져 倭로 보내지게 되는데 그 칼의 명문을 살펴보면, ● 백제왕이 王世子 奇生기생(久尒辛구이신)을 倭王으로 임명 △ 칠지도 명문 (앞면) 奉[ ]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鉄]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口口口口作 "봉[ ]4년 11월 16일 병오정양에 백 번을 단련한 철로 만들어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마땅히 후왕에게 줄만 하다. [ ][ ][ ][ ] 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선세이래로 이러한 칼은 없었으며 백제 왕세자 기생은 성스러운 소리이다. 그런고로 倭王을 삼고자 하는 뜻으로 만드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건국대학교 홍성화 교수는 이 칠지도는 408년 전지왕 4년11월 16일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고증합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칠지도 연구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이 칠지도는 백제 전지왕 4년(408년)에 만들어지며 명문의 내용과 같이 자신의 아들 △ "백제 왕세자 奇生 (久尒辛구이신)"을 △ "...爲倭王..." △ 즉, "倭王으로 세운다"는 뜻(旨)으로 만든(造) 칼입니다. ● 백제 제19대 國王, "久尒辛王"의 이름은 "奇生" △ 日本書記에는 "久爾辛구이신" 이라 쓰고 있으며, 일본말 독음으로 "久爾辛쿠지신" 이며, △ 王世子 奇生기생의 "奇"를 일본말 훈음으로, "生"을 일본말 독음으로 읽으면, "奇生 쿠시세이" "奇生 쿠스시세이" 이며 △ 당시 久尒辛구이신은 奇生의 奇를 훈음으로 漢字의 소리를 빌려 쓴 것이고, "生"을 독음으로 썼는데 일본말로 "生세이" 한국말로 "生생"의 독음은 그 당시에는 "신"으로 소리가 났던 거 같습니다. 당시 1600년전에는 "生생" "生세이"의 독음은 한국이나 열도나 "신"이나 "세이"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 久尒辛구이신과 奇生기생을 종합하여 비교해 볼 때 久尒辛 구이신 奇生 기생=키세이=키신 (한국말 일본말 독음) 奇生 쿠시세이=쿠시신 (일본말 "奇"훈과 "生"독) 奇生 쿠스시세이=쿠스시신 (일본말 "奇"훈과 "生"독) 그러므로 백제 제19대 國王 △ "久尒辛구이신王"의 이름은 "奇生"이 확실합니다. ※1600년의 시차가 있지만 현재 일본말이 백제말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 백제국왕이 倭王을 侯王이라 하여 자신이 임명 백제왕이 倭王을 侯王이라 하고 있으며 倭王을 자신의 혈족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입니다. 삼국사기 기록이 사실 그대로라면 백제 전지왕이 태자시절 볼모로 있던 倭에서 귀국한 뒤 왕으로 즉위한 다음 자신의 아들을 倭王에 임명한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 당시 서기 397년 아신왕 6년 백제 전지 태자는 倭에 볼모로 간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일어난 직접 기록인 칠지도 명문에 의거 △ 倭王으로 임명되어 간 것이고 △ 본국에서 아버지 아신왕이 405년 崩御하시자 倭王으로 있던 전지 태자가 본국으로 귀국하고 △ 백제왕으로 즉위한 뒤에 자신의 아들 태자 구이신(奇生기생)을 倭王으로 임명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백제의 비슷한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 "...封於黒齒..." "...흑치에 봉해지다..." 『흑치상지 묘지명』 "府君諱常之字恒元百濟[人]也. 其先出自扶餘氏封於黒齒子孫因以爲氏焉." "묘주는 이름이 상지(常之)이고 자가 항원(恒元)이며 백제 사람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았다." 위 백제인 흑치상지 묘지명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 칠지도의 명문 "...爲倭王..." 기록과 마찬가지로 백제왕족을 △ "...封於黒齒..." 기록에 의해 "흑치" 라는 곳에 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강역은 본국에서 바다를 건너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倭로 건너간 백제 왕자는 명문의 기록처럼 倭王에 임명되어서 간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그 볼모로 보냈다는 그 기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 인용이 된 '구삼국사와 삼한고기'와 같은 史書는 통일신라 사람들이 그것과 관련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고친 것입니다. ● 삼국사기의 그 "質" 볼모라는 기록은 "...以太子腆支爲質." "...태자 전지를 볼모로 삼았다." △ 위 기록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 당시를 기록한 칠지도 명문에 의거한 역사적 사실로써 다시 글을 고치면 "...爲質."을 "...爲倭王." 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以太子腆支爲倭王." "...태자 전지를 倭王으로 세웠다." △ 이렇게 바꿔야 올바른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일본서기는 아주 작정을 하고 황제국인 백제를 제후로 격하시키고 일본천황이라는 뜬구름 잡는 허깨비를 하나 만들어서 날조왜곡한 책입니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내용은 있는 그대로 믿으면 곤란합니다. 일본서기엔 사실도 있고 거짓도 있고 왜곡도 있고 날조도 있고 굉장히 복잡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사료의 교차검증이 필수이며 거짓과 사실을 가려내야 합니다.
오늘날 천진시 신분고국 산동 신운국 황해도 충청 전라도의 모든자치단체는 Bc296년 마한 월지국에서 시작이 되네요! 경상 강원도는 진나라 때로부터 시작되구요!
@@문창훈-w5e 네 고조선이 마한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진한은 진시황의 진역 이후 들어왔던 흉노족입니다.^^
사람이 산 밑에서 흙을 쌓고 있으니까 광부 집안이지
@@user-asdfasfdasdf ㅎㅎㅎ 산밑의 새는 태양을 가리킵니다
연5군은 산서성 태원 북쪽에서 하북성 북서쪽으로 보아야 합니다.
@@gn.l3762 사기 흉노열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초계 최씨 입니다. 당연 전주최씨 분파로 알고있지만 “최” 라는 성 자체는 신라 백제 가야 에서 나온 성씨는 아니라는 거네요…
@@최도라이바 최씨는 강태공의 제나라 후손입니다.
짱개 공산당이 많이 주시하셨을텐데 어찌 찍으셨나요 ? 무사하셔서다행입니다
고조선 고구리 고리 전부 있었죠 참....개탄스러운 우리 한반도 역사관 진짜 부끄럽네요
@@jangmi486 한국의 역사교육은 가짜입니다. 참으로 낯이 뜨거울 지경입니다.^^
고수전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선 그리고 고당전 당시 국경선을 대륙의 지도로 그려 보시죠ㆍ
@@강명구-k9f 북경시 동쪽의 조백하와 상류의 백하가 국경선이에요
살수와 패수가 같은 강이라구요?
@@강명구-k9f 평양성 30리 남쪽 실수까지 수나라군이 쳐들어왔고, 평양성은 패수에 임하고 있으니 두 강은 같은 물줄기죠
😢설명이 재밋고 한데 5.18을 연관시키는 등 엉뚱한 야사로 또 만드시네 그러나 새로운 분석 관심은 끌겠어요 근디 노태우,노무현등 盧氏는 염제신농의 姜姓에서 분파된 102개 姓氏중 하나라고 해서 노태우대통령도 방중시 방명록에 메모를 남겼다는데 그럼 姜氏도 그쪽에서 발원했을까? 추가 설명좀 부탁해요😢
@@강명구-k9f 강씨의 역사적 기원에서 설명했습니다.
요동 의 위치가 연나라 의 위치 입니다 즉 요동 의 동쪽 인 갈석산 을 지나 "조선" 입니다. 요동 의 남쪽 경계 인 역수 호타하 에 요동군 요서군 이 던 겁니다 즉 "연5군" 은 요동 안에 있던겁니다. 요동의 서쪽에 운중 구원 북쪽에 임호 누번 남쪽이 역수 호타하 입니다. 요동 이 동호 이자 조선 입니다.
@@임승식 서기전 296년 이전 연나라 위치는 산서성 입니다. 운중이 대동시에요. 조선 요동은 그 동쪽이니 태행산맥 동쪽입니다.
연로하신 몸을 이끌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지나가 보정시를 "중산국"으로 왜 인정할까요? "연"은 산서성을 벗어난적이 없습니다 보정시 유적은 고조선의 "번조선" 강역 입니다 산서성 진중시 석양현 인근을 고대 중산국으로 비정하면 우리 고조선의 강역이 태행산맥 동쪽 하북성이 되기 때문에 지나가 중산국을 보정시 인근으로 비정하는 것입니다 보정시에서 발굴되는 명도전을 지나 "연"의 화폐라고 하기 위함 입니다 "조"가 거용관을 넘어 북경을 침략했다는 말도 안되는 지나 공산당의 역사왜곡에 동조하시는 역사탐방에 안타까움이 드는군요 고대 보정시 인근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서쪽으로 태행산맥이 있고 동으로 내륙호수인 발해가 있어 물류의 중심이자 물산이 풍부한 지리적 특성이 있어 홍산 요하문명 세력인 고조선이 지나 대륙으로 남하하여 "상"을 건국한 후 "주"에 밀려 다시 북상한 지역의 요충지로서 보정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즉, 황하이남의 화하족과 요하인근 동이족의 남단 거점도시이며 현재 보정시 박물관의 유적은 번조선의 유물, 유적 입니다 본인의 아집을 버리고 2천여년 전 지정학과 기후의 변화를 조금만 살핀다면 쉽게 알수있는것을 버리지 않는것은 학문의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쉬운 예로 오늘날 한강이 얼지 않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한강이 얼어 얼음위로 도강이 가능한 시절이 박사님 삶의 기억에 있는것과 같습니다 대동시, 장가구시는 고대 지나인들은 아예 알지도 못하였고 알 필요도 없던 그저 북방의 땅이었습니다 지나인들은 황하 이남에서 서로 다투던 시기 였습니다
해자와 성벽의 치가 딱 봐도 북방민족의 고구려성이네요.
@@패미박멸 고조선 무종 세력이 있던 곳입니다
베트남 북부의 베이하이 지역은 과거에 하북(河北)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거기 하북 아닙니다. 가짜 역사 그만 퍼트리시오 일본이 만주국을 세웠 듯 현재 중국도 과거의 하북 지명을 현재의 하북으로 옴김 왜 일본이 만주국을 옴겼을까를 생각해 보시오 만주에 랴오닝성의 지명은 있지만 라오족 있지 않죠? ㅋㅋ 랴오허가 요수인 건 알죠? 라오족이 있는 장소가 요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거기가 하북이어야 하는 것 스스로 지금 동북공정에 이바지를 열심히 하시네,,, 하노이 지역에는 갈석산(Đá Chồng)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갈석산은 하노이에서 가까운 하이장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를 과거 동황으로 불렸고 탕롱으로 불렸던 지역 왕검성은 여길 말하는 것 탕롱(탁록) 이것이 변천되서 하노이(하동)으로 발음 된 것이고 고대 > 탕롱> 고대, 중세> 동황(당항)> 근대> 하동(해동)> 현재 (하노이) 앙코르에서 2004년 프랑스 고고학 팀이 발해 기왓장 발견한 건 알고 있음? ㅋㅋ 이걸 우리나라에서 뭐라고 한 줄 알음? 뉴스에서 발해가 교류가 활발했다고 이지랄 ... 이 수준이 우리나라임 앙코르, 서양식 표기법 동양식으로 표기하면 코르앙 예)김개똥은 서양식으로 개똥김 예)개똥김은 동양식으로 김개똥 앙코르는 코리안을 말하는 거임 15세기 앙코르왕조가 동남아에서 사라지고 16세기부터 한반도가 서양인들 지도 표기에 korea 표기 됨 1436영 앙코르는 태국에 공격을 받고, 태국의 시암은 동남아 열도에 있던 사일란드가 육상으로 올라오면서 시암이 되는 것 일본이 과거 점령한 지역의 이름 베트남 남부, 태평양 지역의 두곳(사이공, 사이판) 일본은 육지국, 해양국 두개의 나라임 16세기 일본이 미얀마에서 사무라이들이 포루투칼과 은, 노예 거래를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구글 위키백과에 근데 이것이 한글판으로는 나오질 않고 영문판으로 나옵니다.
그러다가 점차 요수를 기준으로 또 그 다음 만주 압록강으로 지명이동 등 아무튼 요동 요서 기준은 시대별 검증이 좀더 필요 해 보입니다.
@@soulmate8594 요동 요서 구분은 바뀐적이 없습니다. 마한백제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는 항상 조백하기 요수이자 패수였어요
삼한시대 요동요서에 대한 정의가ㅈ굉장히 중요하군요 당나라때까지 태행산맥을 기준으로 요동요서로 나누었다고 의견을 제시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soulmate8594 사마천의 사기의 연5군 설치 기록을 통해 조백하가 요수로 파악됩니다.
郡縣제는 진시황이 처음 실시했습니다.ㅡ 때문에 연 5군은 조작된 기록으로 보입니다. 진개의 침공으로 빼앗은 연 5군은 진시황 때로 보아야 되지 않을까요.ㅡ 한무제의 한 4군도 조작 된게 확실합니다. 한4군은 후한 초기 고구려 태조 대왕께서 요서에 10성을 쌓은 이후 고구려 연나부에 소속된 부여 세력(당시 요동의 백랑곡에 주둔하고 있었음)과 후한의 밀약으로 요서 요동과 부여 본국을 장악한 후한은 요서 요동에 낙랑 현도 임둔의 삼군을 설치 했고 고구려 연나부에 소속되어 있던 부여는 본국을 되찾아 독립했고 이후 후한과 부여는 혈맹 관계를 유지하게 된것입니다.
무종이 태원에서 싸웠다면 연나라는 어찌된거죠. 무종이 점령했나요.
@@gn.l3762 시기와 공간을 구분해야 합니다. 서기전 541년 이전까진 고조선 무종이 산서성 태원 북쪽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후 연나라가 그곳으로 들어온거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서에 있는 주요 삼국사기.고려사 등 전쟁지명이 중국대륙에 다수 분포하는 것을 보면 한반도와 중국동부지역에 중복해서 (마한 등) 분포하지 않았을 까요.
@@soulmate8594 광개토왕비문, 부여융묘지명, 연남생묘지명, 두로영은묘비 등 묘비만 봐도 고조선과 마한백제는 산동 하북성에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삼국사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제부여씨계의 비유왕이 대륙에 있는 산서성 서하태수 임명 요청 기록이 나오는데 산서성 서하지역이 한반도 한성백제와 무슨연고가 있는지요? 이 어마어마한 대동고성이 서하인가요?
@@문창훈-w5e 대동시 남쪽 분수 일대가 서하군입니다. 산서성 일대에 비유왕이 서하태수를 임명했습니다. 이곳에서 북위와 전쟁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음악이 너무 커서 잘 안들립니다.
@@cimkim 배경음악이라고 봐주세요
안시성 있었다면 성터의 흔적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이영민-k2o 성터 영상에 나오잖아요
수고 많이 하십니다.
@@박경옥-f9s 네 안녕하세요^^
13-7 남송의 수도~ 출발지를 삭제하지 않고 도착. (출발지~대명여지도 초기본 초중본, 도착지~중초본 이후본). 북송의 수도~ 출발지를 삭제하고 도착. (중기본) 명나라 수도~ 1388년까지의 수도 지명 삭제.(중중기본) 웅진~ 과 주변의 관련 지명을 모두 삭제.(중초본)
낙수와 낙양이 하남에 도착 (대명여지도 중중기본,중중초본) 황하가 大河에 도착 (중초본) 大江의 삭제와 양자강의 시작 (대명여지도 중중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