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시골집에 할머니가 증조부가 쓰시던 거라고 부싯돌을 보관해 두고 계셨었는데, 담배 피울때 사용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암만 두들겨도 불꽃도 일어나지 않고 뭐 그렇더라구요. 할머니도 불꽃 일으키지 못하시구요. 뭔가 요령이 있는 거 같긴 한데... 만약 조선에서 나던 부싯돌이 이런 수준이라면 수석식 소총에 쓸 물건은 아닐듯도 하네요.
쉽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게 아마도 석영의 일종인 황백색 차돌인 거 같은데...부싯돌로 불을 붙이려면 예전에 솜이나 한지, 혹은 쑥잎이나 취, 칡같은 것을 볶고 말려서 수분을 빼고 숯성분과 섞어서 미립형태로 쌈지같은데 보관 휴대하다가, 불붙일 때 소량을 돌위에 얹어놓고 부딛혀서 불꽃을 내 불을 붙이는 방법인데, 아무 재료를 가져다가 할 수 없죠. 부시란 말은 어원이 '불+쇠' 불을 붙이는 철기인 화도, 즉 쇠로 주조한 조그만 편도인데, 이걸 가지고 차돌과 불붙는 재료를 같이 써서 불을 붙이게 된다고 합니다.
유럽 기록에서도 부싯돌이 소모품인데 너무 잘 마모돼 부싯돌의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가 가격이 크게 올랐다더라구요 근데 부싯돌 질도 떨어지고 수량도 적은 동아시아에서 플린트락...? 가망이 없는 얘기였군요ㅠㅠ... 궁금하던 점이 해결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환경이 인류 발전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지대하다고는 하지만 가끔은 씁쓸하네요
영상에도 기술과 관련된 부분이 잠깐 나오지만 동남아 각국들, 시암이나 대월도 플린트락을 도입하면서 국산화 시도를 했다가 결국 실패해 동인도회사나 유럽 상인들로 부터 공급 받았던거 생각하면 분명 기술적 난도도 있을거라 생각함. 단순히 문화의 상대를 넘어 근본적인 기술적 기반의 격차가 나기 시작한게 그 무렵이고 플린트락의 발사장치는 조총의 장치와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동력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게 유럽에서는 군사기술 뿐만이 아니라 시계 등 다른 야금 및 제조 기술의 발전과 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라 분명 쉬운 기술은 아님. 동력장치 만들어내는것도 어려운 마당에 한국의 차돌따위는 연구원님 말씀대로 불꽃이 잘 안일어나는데 황철석같은거 쓰는거 아닌이상 더 어려운 환경임
당시 조선인들 마음을 알 거 같기도 함. 눈으로만 얼핏 봤을 때는 둘의 차이가 그리 커 보이진 않네요. 어떤지 시험해보고 눈에 확 띌 정도로 체감되는 총이라면 모를까 요즘처럼 우리 회사 제품보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그냥 우리 회사 제품 쓸 거 같음. 굳이 시간들여서 부싯돌 구하러 다니고 싶어 하진 않을듯..또한 전투가 자주 벌어져서 실전에서 내가 직접 쓰며 비교해볼 기회가 잦았으면 모를까...
본문에도 나오는 기술적 문제는 스프링 문제가 큼... 부싯돌이 좋아도 그게 불꽃이 튈만한 파워로 튕겨져나가야 하는데, 조선은 그만한 스프링장치를 만들 야금술이 아직 없었음. 부싯돌이 안 좋으니 발명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도 일부 있겠지만, 시계기술을 비롯해서 각종 기계 공학이 발전한 유럽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기술이 뒤쳐진 시기라....
1654년 나선정벌을 보면, 미스킷총이 조선의 조총보다 딱히 우월함을 증명해 내지 못했습니다. 플리트락이나 조총이나 거기서 거기였던 거죠. 플린트락이나 조총이나 잘 만들지 않으면 성능이 저열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총기의 차이가 상대가 안될정도로 벌어진것은 미니에탄과 퍼커션캡의 등장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1861년 남북전쟁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플린트락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쟁이 터지자 다급하게 1842년 영국이 채용한 퍼커션캡을 사용할 수 있게 머스킷을 개조 했고, 미니에탄을 사용하게 됩니다. (조선도 의병들이 조총을 퍼커션캡을 사용할 수 있게 개조를 했다는 썰이 돕니다. 조총이나 머스킷이나 작동원리가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죠.) 유럽은 크림전쟁에서 미니에탄 비슷한 원추형 총알이 쓰이긴 했지만 미니에탄이 가장 유명합니다. 미니에탄이 원추형 탄환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유는 사람을 어마어마하게 죽였기 때문이죠. 크림전쟁에서 원추형 확장탄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사람을 죽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현실을 무시했다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과거에서 못 벗어난거죠. 이시기에 활약한 사람이 나이팅게일입니다. 당시는 원추형 확장탄이 그렇게 무서운 탄환인지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남북전쟁에서 퍼커션캡과 미니에탄으로 무장한 군대가 나폴레옹식의 전열보병형태로 싸우게 됩니다. 그러자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어마 어마하게 죽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북전쟁에서 참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남북전쟁 말기가 되면 북군은 연발소총에다가 탄피를 사용하는 소총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남군은 퍼커션캡에 미니에탄을 써서 일일이 전장식으로 장전을 하고 있는데, 북군은 탄피를 두른 탄환으로 까딱 까딱 재장전을 하면서 총을 쏘아대니, 남군은 속절없이 당합니다. 이 탄피를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들고 오게 됩니다. 10년만에 머시킷 소총이 탄피 연발소총이 되어 버린겁니다. 더 무서운것은 남북전쟁시작할때만 해도 청동제 대포였는데, 전쟁이 끝날 시전에는 강철제 대포였죠. 그 당시 조선은 뭐하고 있었냐하면, 세도정치를 하고 있었고, 흥선대원군이 잠시 세도정치를 눌렀지만 결국 실패를 했습니다. 돈 주고 벼슬을 산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죠. 백성은 화전이나 일구고 살았으니 나라 재정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청나라와 일본이 서양제 무기로 무장할때, 민비는 굿으로 나라재정을 날려 버리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건 뇌홍식 부터라는건 동의하지만 나선정벌 한번으로 플린트락과 조총의 차이가 없다 하기엔 전투 사례가 너무 지엽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번의 전투 여러번의 전역 장기간 비교를 통해 우열이 드러나는거라 봐서.. 근대 국가들도 전근대 국가들한테 한두번씩 얻어맞곤 했는데 그걸로 별 차이 없다 할 수 없는것 처럼요. 전열을 이룰때도 불씨가 꺼지지 않게 관리해줘야 하는 화승식보다 분명 불씨관리가 훨씬 간편하고 사격통제가 간편했다는 직접적인 장점은 분명있고 유럽의 전술 발달도 그것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다 봅니다. 조총에서 뇌홍식으로 쉽게 변경이 가능했고 의병들이 쓰던 유물도 남아있을정도로 개조가 가능했던건 머스킷과 뇌홍식이 별 차이 없었던게 아니라 뇌홍식의 발화 방법이 구리에싸인 뇌홍을 격발할 정도의 힘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캠핑할때 완전 날 부싯돌로 내리치며 빡시게 불꽃을 일정도의 동력은 필요없긴 했습니다. 머스킷에서 뇌홍으로 바꾸고 조총에서 뇌홍으로 쉽게 간다고 화승식과 플린트락이 비슷하구나 할 수는 없죠. 조총에 플린트를 끼운다 해서 격발이 가능한건 아니니까요
@@libero4392 1879년 이산들와나 전투를 떠올려 보시면, 전근대국가들이 냉병기를 들고, 열병기로 무장한 군대를 학살한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영국군 소총은 단발식 탄피소총입니다. 단발식 탄피소총을 가지고도 냉병기를 상대로 우리가 생각하듯이 압도적인 학살을 할 수 있었던게 아닌거죠. 플린트락이라면 더하면 더하겠죠. 번거로움이 조총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일단 부싯돌은 관리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도 안합니다. 부싯돌을 생산 보급하는것도 그리 녹녹하지도 않구요. 그리고 불발율도 조총보다 높습니다. 불로 화약을 폭발시키는것과 불꽃으로 화약을 폭발시키는것중 어느게 더 확실할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폴레옹시절의 플린트락은 대규모로 무장하니까 대단해 보이지만, 조총도 대규모로 무장하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우위는 없었다는거죠. 플린트락이 조총보다 발전된 총기인것은 맞지만, 지금의 돌격소총에 도트사이트를 단것과 안단것의 차이정도라고 봐야 합니다. 조선의 화승총에 대해서 말하자면 스프링탄성을 이용해 용두가 화약접시에 처박는 구조입니다. 코킹을 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플린트락과 딱히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방적인 학살은 탄피소총과 기관총의 등장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우금치 전투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1895년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군대는 일본군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은 소수였고, 조선 관군이 개틀링기관총과 단발식 탄피소총으로 일방적인 학살을 한 겁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조선의 무기는 서양의 무기와 압도적인 격차가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1800년대 중반만해도, 서양이나 동양이나 무기 수준이 교전이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청나라, 조선, 일본 모두 서양의 총기를 수입해서 무장 수준을 올리기도 했고, 조선이 망할때 화승총을 들고 일본군과 대항을 했던게 아닙니다. 당시는 아직도 냉병기를 들고 있을 정도로 과도기적인 상황이었고, 경제적 수준과 나라의 건전성에 따라서 발전의 수준이 달랐던 겁니다. 혁신이 너무나 빠른 수준이었기 때문에 열강들은 혁신을 이루기 위해 피말리는 경쟁을 했고, 그 중요한 시기를 조선은 세도정치로 날려 먹고 있었던 겁니다. 10년만에 청동제 대포가 강철대포가 되는 현실에서 세도정치를 극복하지 못한 그 짧은 시기가 결정적이었던 겁니다. 1860년대만 해도 나무배 시절이고, 스크류도 없으며, 증기선 시절입니다. 1911년에 석유로 가는 전함이 등장을 합니다. 50년만에 나무배가 석유 연료로 가는 강철전함으로 바뀐거죠. F4 팬텀 전투기가 1960년대에 개발해서 지금까지 사용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무기가 얼마나 정신없이 발전했는지 짐작하기도 힘들지요. 1년, 2년만에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던 시대였고, 조선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김구선생이 동학농민운동에서 접주였습니다. 접주면 상당한 수준의 간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875년 생입니다. 이분은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그리고 자기손으로 독재시대를 만들었죠. 생각해보시면 그 격변이 얼마나 짧은시간안에 벌어졌는지 감이 오실 겁니다. 조선이 발전 못한 것은 세도정치 떄문인겁니다. 당시 지식인이나 일반사람들이 시대흐름을 모른게 아닙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어버린게 문제였던 겁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당시는 시사점이 많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당시처럼 세도정치를 하고 있는게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국익이 손해를 입는지도 따져 봐야 합니다. 플린트락과 냉병기는 공존했습니다.
프로이센이 현대식 볼트액션 소총을 개발했지만, 어째서인지 유럽열강들도 도입하지 못하고(안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이 치고나오는 보오전쟁이 1866년이고 신미양요는 1970년 단지 5년차이라, 화승총이 좀 구리긴 했지만, 당시에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물건 까지는 아닌 것 같고, 사실 총의 차이보다는 대포의 사거리와 작열탄, 특히 증기기관의 위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독일의 드라이제 소총과 프랑스의 레벨소총이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총기에서는 화승총은 상대가 안됐죠 특히나 1800년대 후반 서구권에서는 크림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미니에탄보다 발전된 탄을 사용하면서 관통력과 사거리 모두 기존의 플린트락시대에 사용하던 납탄을 능가하는 탄을 운용하던 시기였고 거기에 소총의 격발기구도 기존의 부싯돌이 아닌 퍼커션캡을 이용해서 사용했던터라 장전속도도 더 상승했죠 거기다 미군은 남북전쟁당시 이미 퍼커션캡을 이용하면서도 강선이 파여진 후장식 라이플을 대량으로 운용하던 군대였던터라 개화전까지도 화승총을 사용했던 조선군 입장에서는 보병간의 총격전에서도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buckston201 상당한 발전이 있었지만, 병인양요의 전투를 봐도 상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런 기준은 좀 주관적인 면이 있죠. 남북전쟁에서 후장식은 기병대가 극소수로 운용한 걸로 알고있는데, 대량으로 운용되었나요? 남북전쟁 시작부터 사용되었다고 쳐도 9년차이인데
8:06 복명 세력이 아니라 명나라입니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한 이후에도 홍광 융무 영력제 등이 1662년까지 청과 대전을 벌였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숭정제 때까지로 취급해서 그렇지 효종 때 청과 싸운건 명나라 군입니다 복명세력은 1662년이후 정성공의 동녕국입니다 삼번이 진압된 이후 멸망 했죠 어쨌든 명나라는 1644년이 아니라 1662년에 멸망한겁니다
참판:조선에는 철도 있고, 단조기술도 있고, 화약 만드는 기술도 있다, 그러면! 수석식 조총을 지금말곤 언제 만듭니까! ???: 아니... 그런데 참판... 참판: 지금이야말로 조선의 조총 제조역량을 수석식 조총을 만드는데 써야 합니다! ???:참판대감,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그러고 싶습니다 참판: 그럼 왜 안하나? ???:하지만... ???: 하지만 뭔가! 판서: 실은... 부싯돌이 없다. 참판: (털석)
아이러니한것이 유럽은 18세기당시 계속되는 전란으로 무기개발및전술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던것이 현재 냉전종식이후 군대를 해체하는등 군축을 했다가 러시아가 우크라니아전쟁 으로 침략을 하니 군사비를 늘리고 무기를 수입한다는등 반대로 일어나고 있다는것이죠.한국은 분단국으로 늘상 긴장상태로 있으니 꾸준히 무기개발을 하고 있다는점이고
비용문제도 한몫했습니다 나선정벌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50년정도가 지났었고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조선은 엄청난 숫자의 조총을 생산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명청교체기떄 명나라 지원갈때도 다수가 조총병이었다고도하죠 그로인해 이미 조총은 그로인해 생산단가가 상당히 낮아진상태였습니다 나선정벌당시 플린트락 머스킷을 입수한 조선은 복제생산을 시도했습니다 북벌을 명분삼고있는 효종입장에서 신무기를통한 전력우위를 시도하는건 어찌보면 당연했죠 하지만 너무비쌋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당시 조총가격의 20배정도라고 알고있구여 물론 시간이지나서 생산량이늘고 숙련도나 기술력이 상승한다면 생산단가가 낮아지겠지만 그렇다고해도 조총보다비쌉니다 그뿐아니라 유지문제도있죠 까놓고말하면 화승심지야뭐 비싸바야 얼마나 비싸겠습니까만 부싯돌은 캐는비용도 비용이고 운송무게나 비용적 측면도 고려한다면 더비싸죠 심지어 극단적인 예시를들면 플린트락머스킷1명들고 창칼10명쯤들고 9명은 맨손으로 있을바에 조총병 20명들고 싸우는게낫죠 이후에도뭐 굳이 무기개발에 노력해야할 이유가 없는 평화적인 시대가 이어지다보니까 그냥 해봐야 조총개량만 주구장창해왔습니다
예전 시간탐험대라는 예능프로의 파일럿 방송인 노비편에서 식사준비를 맡게된 출연자 두명이 부싯돌로 불붙인다고 개고생하던게 생각나네요. 몇시간이고 그것만 하는데 다른 역할 맡은 출연자들도 자기 분량 끝내고 합세해 번갈아 시도하는데 쉽지 않더라는... 결국 불 붙이는데 성공하긴 하는데 진짜인지 다른 수단으로 불 붙인건지 조금 의심스럽더라는...
1500년부터 1870년까지의 머스킷 소총과 조총이 1세대 소총이라면 1871년부터의 볼트액션 소총의 2세대의 의 현대 소총이 개발된게 결정적임 이것을 바탕으로 일본은1880년 무라타 소총을 개발하여 아시아를 공격한거임 조선은 이 10년의 유럽의 귀중한 소총 개발사를 눈치채지 못했지
그 시점 중국은 청나라인데, 청나라는 화기의 발전을 억누르던 나라였습니다. 그야 화기는, 다루기 쉽고, 다루기 쉬우면, 쪽수가 많은 한족이 반란읗 일으키기도 쉬울테니까요. 그래서 한족 군영이자 화기를 적극 운용한 청군의 녹영도 계속 뭐만 하면 탄압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내전이 계속 일어남에도 화기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런 연유가 있습니다.
@@닉네임추천좀-m2g 강희제가 화기발달을 억제한건 맞지만 건륭제때 그렇게 많은 원정을 치루면서도 월남이나 티벳에서는 그닥 힘을 못썻음에도 화기발달을 안한거는 그냥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본질 자체가 잘못됐기때문인거같아요 글구 조선도 효종때부터 정조까지 북벌한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닥 발전이 없어서 아쉬움 중간중간에 내전도 있었음에도
18세기 한중일이 서양 유럽국가에 비해 군사무기 경쟁에서 뒤 떨어진 이유? 한중일은 이 시기 평화시기고 유럽은 허구한 날 전쟁을 해서 군사 수요나 무기 개선 욕구가 넘쳐서 그렇다.....그런데....이 설명만으로 되나? 조선과 일본은 18세기 동안 국내외적으로 안정적인 평화의 시대라 무기 개발 수요가 없었서 그럴디고 하더라도, 청은 이 시기에도 대외정벌이나 주변국가와의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도, 서양 같은 별다른 신무기 개발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며.. 청이 경제력이나 군사적 수요가 부족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유가 뭘까......주변국이 이런 신무기 개발 없이도 충분히 제압 가능한 약한 적이라서....그런가... 아니면, 서양은 18세기 산업 및 과학기술혁명이 일어나면서 군사적 무기까지 혁명 수준의 진보가 있었던 반면, 청은 과거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서,,,국가 시스템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한게 더 큰 요인이 아닐지.... 이것이 한중일 모두 서양에 비해 군사기술이 뒤 떨어진 가장 주된 요인 아닐까
청이 상대했던 적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유목기병대들을 운용하는 적들인지라, 화기의 업그레이드 필요성을 못 느꼈을 거에요. 도리어 화력을 앞세운 명 제국을, 자신들의 팔기로 제압한 (물론 자세히 보면 명의 화기와 운용법을 입수해서 사용했지만) 그 사례만으로도 업그레이드 필요성을 잘 못 느꼈을 거에요.
그랬었군요. 궁금증을 풀어 주었네요 동아시아 부싯돌은 불꽃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총의 스프링 힘으로는 세게 칠 수가 없다 동아시아는 서양과 비슷한 수준의 스프링을 만들 수 있었나요? 코사크인이 말 하길 한국인은 대두인이라? 정말 한국인들이 머리가 커 보였나 보군요 동양인도 남방계는 머리가 그리 크지 않은데? 몽골족도 덩치가 커서 그런지 머리가 작아 보이는데?
조선이 플릭트락을 도입하지 않은 이유를 알려면, 우선 매치락과 프린트락의 차이를 알아야합니다..... 당시 서양의 판금갑옷의 방어력은 세계 최강수준으로 매치락의 사격은 중거리 이상에서는 튕겨냈습니다.... 따라서 갑옷을 관통시키기 위해 탄환의 위력과 사거리를 늘린게 플린트락입니다..... 가격은 매치락의 3배 이상이었죠..... 근데 동아시아는 애초부터 프린트락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가 동아시아의 갑옷은 매치락으로도 다 관통되기 때문입니다..... 매치락으로도 원샷원킬인데 굳이 돈 더 들여서 플린트락을 만들 필요가 없던거죠 ㅎㅎㅎ
잘못일고 계시네요 플릭트락과 조총의 운동량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쓰는 소총과도 별차이 없어요 ㅋㅋ발사방식의 차이지 위력의 차이가 아니며 플리트락 나올당시 총구에 나선을 파 조중력이 좋아졌습니다 우리도 초기 조총과 후기조총의 위력이 다릅니다 조총에도 강선을 팟거든요
@@chrisst.simmonkang2942 하멜이 표류한게 1653년 이고 나선정벌 처음 출정 한게 1654년임 하멜배에 수석식 총과 대포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전부 획득함 국립진주 박물관에서는 하멜이전 명나라 에서 들어 왔다는데 그보다 이전에 박연이 사로 잡힐때 수석식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시각도 많음
필요성을 못 느꼈음 유럽처럼 전쟁이 많았으면 상대보다 개미똥꼬만큼이라도 나은 무기를 가지려고 할 텐데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전쟁이 없었죠. 필요성을 못 느끼니 보수적으로 가는 거죠 그래서 기존 무기체계 유지하거나 개량만 하지 새로운 신무기 도입에는 보수적으로 갈 수 밖에 없죠. 새로운 시도 하는 것 이거 쉽지 않죠. 평화시기에 무쓸모인 신무기 도입은 말입니다. 부싯돌이나 기술적 문제는 이건 생존에 위협에 있으면 어떻게든 대체 방법을 찾아 극복하기 때문에 주 원인은 아니죠 주 원인은 필요성을 못 느꼈다임
@@chrisst.simmonkang2942 동서고금 평화 시기에는 군대는 다 나약해집니다. 비생산 조직이라 세상 쓸모 없는 집단이 군대니깐요. 유럽 보세요. 냉전 끝나자 바로 군축으로 갔죠.그러다 우크라 전쟁으로 뜨악 하고 다시 군비 확장하며 재무장에 들어가고 있죠. 그리고 필요성을 못 느끼면 발전에 제약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필요성을 증폭 시키는 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전쟁입니다. 인간은 생존에 위협에 쳐하면 무슨 짓이든 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하늘에 떠 있는 달 따는 게 도움이 된다면 따려고 합니다. 그 어떤 자원이 소모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평화 시기에는 저 달 왜 따? 돈만 들게 그냥 백열전구 큰 거로 대체하면 되자나 이렇게 갑니다.
조선에서 플린트락 머스킷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했던건 부싯돌 문제 뿐 아니라 플린트락 구조에 필수적인 스프링 등의 정밀부품을 균일하게 대량으로 제작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도 한몫 했죠
ㅅㅂ 세금은 이런데 쓰는거라고 퀄리티를 보여주는 진주 박물관 홍경래 난 영상 만든거 보고 쌉 지림
정작 플린트락 머스킷을 쓰던 유럽도 부싯돌이 귀해서 훈련때는 부싯돌 대신 목재를 끼우고 실전에만 부싯돌을 사용함.
진주박물관은 뭘 해도 잘 하네. 늘 감탄 함.
진주출신으로 진주박물관이 열일중이라는게 참 뿌듯하네요
이 영상들을 보는것으로 이미 박물관 한번은 들렀던것 같네요
진짜 누차 말하지만 이 분야에 진심인 사람인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런 퀄리티, 나올수가 없죠
저희 시골집에 할머니가 증조부가 쓰시던 거라고 부싯돌을 보관해 두고 계셨었는데, 담배 피울때 사용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암만 두들겨도 불꽃도 일어나지 않고 뭐 그렇더라구요. 할머니도 불꽃 일으키지 못하시구요. 뭔가 요령이 있는 거 같긴 한데... 만약 조선에서 나던 부싯돌이 이런 수준이라면 수석식 소총에 쓸 물건은 아닐듯도 하네요.
쉽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게 아마도 석영의 일종인 황백색 차돌인 거 같은데...부싯돌로 불을 붙이려면 예전에 솜이나 한지, 혹은 쑥잎이나 취, 칡같은 것을 볶고 말려서 수분을 빼고 숯성분과 섞어서 미립형태로 쌈지같은데 보관 휴대하다가, 불붙일 때 소량을 돌위에 얹어놓고 부딛혀서 불꽃을 내 불을 붙이는 방법인데, 아무 재료를 가져다가 할 수 없죠.
부시란 말은 어원이 '불+쇠' 불을 붙이는 철기인 화도, 즉 쇠로 주조한 조그만 편도인데, 이걸 가지고 차돌과 불붙는 재료를 같이 써서 불을 붙이게 된다고 합니다.
저희는 차돌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네요
파이어스틸도 쓸줄 모르면 불 못붇이죠.
심지어 비흡연자라 라이타 만져본적 없는 사람은 라이타 불도 제대로 못켬.
@@팩폭좋아 쓸줄 몰라서가 아니라 품질차이가 맞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나선정벌때 러시아 머스킷을 얻었음에도 국내에서 시도를 했지만 부싯돌 품질차이 때문에 실패했다고요. 수입을 했으면 어땠을까 교수님이 이야기하는 것 들었어요.
유럽의 부싯돌과 한국의 부싯돌 성능 차이 ... 디테일한 설명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와 설명 감사합니다. 재밌네요.
믿고 보는 진박
유럽 기록에서도 부싯돌이 소모품인데 너무 잘 마모돼 부싯돌의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가 가격이 크게 올랐다더라구요
근데 부싯돌 질도 떨어지고 수량도 적은 동아시아에서 플린트락...? 가망이 없는 얘기였군요ㅠㅠ... 궁금하던 점이 해결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환경이 인류 발전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지대하다고는 하지만 가끔은 씁쓸하네요
부싯돌의 차이가 중요 포인트의 하나가 됬군요
부싯돌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흥미로웠습니다
상당히 좋은 자료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
믿고 보는 진주박물관
너무 좋네요~~^^ 앞으로도 쭉 영상 만들어주세요~~
진짜 유튜브의 순기능. 이런 정보는 알려고하면 책은 어렵고, 박물관 가기엔 시간 내기 힘들고, 전문가 강의 들을려고 해고 강의 자체가 너무 적음. 근데 이렇게 유튜브로 전문가가 실물을 보여주면서 자세한 정보까지 설명해준다? 너무좋아용
역덕 밀덕 모두에게 칭송받는 유튜브!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주제를 잘 다뤄주셔서 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재밌어요~
이야 이런게 진짜 도슨트지..쏙쏙들어옴
정말....저는 이런분야에 관심이 많은데 옛날 논문의 한문을 해석해가면서 찾아봤었는데....이렇게 유튜브로 다뤄서 정리해주는 공신력있는 곳을 찾기가힘들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정말 감사합니다.
조총에 세겨진 무(武)가 군기시를 뜻한다는...이런 부분은 정말 당대의 기록을 살펴보지않으면 후대의 사람은 알기힘든데 이렇게 후대의 사람들이 참고할수있게 해주시는 활동이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플린트락 한자루값으로 매치락(화승총) 3자루 만들수 있다고 했으니까요...전시상황이었으면 몰라도 평시상황에서는 제가 예산담당자라도 쉽게 허가 못내줬을것같네요.
전쟁해서 약탈물을 가져오는 문화여야 예산투입해 개발을 했을텐데 말이죠ㅋ
하지만 화력차이로 전쟁에서 패하고 땅을 치죠
부품공학,소재공학이 유럽보다 덜 발전되었다만 알고 있었는데, 부싯돌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그리고 당시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플린트락 머스킷 제조비용 감당못했을거 같긴 합니다...화승총에 비해 몇배는 들었을걸요...
나선정벌때 조선군은..
오버워치의 석양맨급이었다는..
실제로 구석기 시대 아슐리안 주먹 도끼도 동서양 차이가 큰 이유가
서양은 플린트란 석재가 흔하고 많은데 비해 동아시아는 플린트가 없고 규암과 석영 같은 석재로 석기 만들어야해서 석기 수준 차이가 크게보이죠
영상에도 기술과 관련된 부분이 잠깐 나오지만 동남아 각국들, 시암이나 대월도 플린트락을 도입하면서 국산화 시도를 했다가 결국 실패해 동인도회사나 유럽 상인들로 부터 공급 받았던거 생각하면 분명 기술적 난도도 있을거라 생각함. 단순히 문화의 상대를 넘어 근본적인 기술적 기반의 격차가 나기 시작한게 그 무렵이고 플린트락의 발사장치는 조총의 장치와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동력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게 유럽에서는 군사기술 뿐만이 아니라 시계 등 다른 야금 및 제조 기술의 발전과 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라 분명 쉬운 기술은 아님. 동력장치 만들어내는것도 어려운 마당에 한국의 차돌따위는 연구원님 말씀대로 불꽃이 잘 안일어나는데 황철석같은거 쓰는거 아닌이상 더 어려운 환경임
톱니바퀴의 개념을 모르면 플린트락을 만들 수 없죠
@@Doyouknow-e6w 톱니보단 판 스프링 아님?
톱니바퀴는 동아시아도 다 만들었어요@@Doyouknow-e6w
초기 화승총 매치락 방식 보면, 심지 불 안꺼지게 하려고 사수들이 입으로 호호 불거나 빙빙 돌렸다고 하더군요.
화승식에서 수석식으로 넘어가냐 마냐의 기로에서 '(평화로운 이 시대에)굳이 비싼거 만들 필요가?'로 화승으로 남았다고 알고있었는데, 그게 기술적 문제(탄성)만이 아니라 소재 문제도 엮여 있었나보군요.
인천 계양산에서 부싯돌 나왓는데 민간에서만 사용함
조총은 그냥 민간 시장에서 팔건 총....
4:51 총용청이 아니고 총융청 아닌가요?
아무래도 1400년대부터 기술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었으니 이때는 따라가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ㅎㅎ
왜 우린 화승총에 머물렀을까 궁금했는데 간단한 문제군요. 평화와 소재.
와... 생각지도 못했다. 부싯돌.....
당시 조선인들 마음을 알 거 같기도 함. 눈으로만 얼핏 봤을 때는 둘의 차이가 그리 커 보이진 않네요. 어떤지 시험해보고 눈에 확 띌 정도로 체감되는 총이라면 모를까 요즘처럼 우리 회사 제품보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그냥 우리 회사 제품 쓸 거 같음. 굳이 시간들여서 부싯돌 구하러 다니고 싶어 하진 않을듯..또한 전투가 자주 벌어져서 실전에서 내가 직접 쓰며 비교해볼 기회가 잦았으면 모를까...
마치 일본인들이 아직도 110 볼트와 아날로그 시스템을 고수하는거와 비슷하죠.
러시아 카자크병사들을 상대한 조선군은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기존 화승총보다 수석식총이 제작비가 곱절로 들어가서
군기시에서 제작을 안했다고 하죠
당장은 별로 차이가 안 나 보이는 것도 있고, 제작비는 곱절로 드는데 전쟁 수요는 없고 하면 만들기가 싫을 법 하죠. 하지만 그 댓가는 200년 뒤 찾아오는데...
@@긴들매 200년 후에 맞이한 건 탄피식 소총 입니다.
나선정벌 내용서 생각나는 재밌는 기록
1. 대두인.. 조선군모가 특이하고 총을 잘쏴서 눈에 띄었던모양. 총병은 조선군만 갔슴
2. 생포된 카작인 러시아군에 조선간장에 절인 주먹밥을 줬나봄. 도저히 못먹겠던지 몇일 굶었음에도 퉤~ 뱉고 버렸다던
화력맛집에서 말아주는 뜨~끈한 국밥
혹시 세종시대의 화약무기 체계나 군사 관련 내용도 이렇게 정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ㅠㅠ 세종시대도 보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본문에도 나오는 기술적 문제는 스프링 문제가 큼... 부싯돌이 좋아도 그게 불꽃이 튈만한 파워로 튕겨져나가야 하는데, 조선은 그만한 스프링장치를 만들 야금술이 아직 없었음. 부싯돌이 안 좋으니 발명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도 일부 있겠지만, 시계기술을 비롯해서 각종 기계 공학이 발전한 유럽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기술이 뒤쳐진 시기라....
1654년 나선정벌을 보면, 미스킷총이 조선의 조총보다 딱히 우월함을 증명해 내지 못했습니다. 플리트락이나 조총이나 거기서 거기였던 거죠. 플린트락이나 조총이나 잘 만들지 않으면 성능이 저열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총기의 차이가 상대가 안될정도로 벌어진것은 미니에탄과 퍼커션캡의 등장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1861년 남북전쟁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플린트락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쟁이 터지자 다급하게 1842년 영국이 채용한 퍼커션캡을 사용할 수 있게 머스킷을 개조 했고, 미니에탄을 사용하게 됩니다. (조선도 의병들이 조총을 퍼커션캡을 사용할 수 있게 개조를 했다는 썰이 돕니다. 조총이나 머스킷이나 작동원리가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죠.) 유럽은 크림전쟁에서 미니에탄 비슷한 원추형 총알이 쓰이긴 했지만 미니에탄이 가장 유명합니다. 미니에탄이 원추형 탄환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유는 사람을 어마어마하게 죽였기 때문이죠. 크림전쟁에서 원추형 확장탄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사람을 죽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현실을 무시했다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과거에서 못 벗어난거죠. 이시기에 활약한 사람이 나이팅게일입니다. 당시는 원추형 확장탄이 그렇게 무서운 탄환인지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남북전쟁에서 퍼커션캡과 미니에탄으로 무장한 군대가 나폴레옹식의 전열보병형태로 싸우게 됩니다. 그러자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어마 어마하게 죽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북전쟁에서 참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남북전쟁 말기가 되면 북군은 연발소총에다가 탄피를 사용하는 소총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남군은 퍼커션캡에 미니에탄을 써서 일일이 전장식으로 장전을 하고 있는데, 북군은 탄피를 두른 탄환으로 까딱 까딱 재장전을 하면서 총을 쏘아대니, 남군은 속절없이 당합니다. 이 탄피를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들고 오게 됩니다. 10년만에 머시킷 소총이 탄피 연발소총이 되어 버린겁니다. 더 무서운것은 남북전쟁시작할때만 해도 청동제 대포였는데, 전쟁이 끝날 시전에는 강철제 대포였죠. 그 당시 조선은 뭐하고 있었냐하면, 세도정치를 하고 있었고, 흥선대원군이 잠시 세도정치를 눌렀지만 결국 실패를 했습니다. 돈 주고 벼슬을 산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죠. 백성은 화전이나 일구고 살았으니 나라 재정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청나라와 일본이 서양제 무기로 무장할때, 민비는 굿으로 나라재정을 날려 버리고 있었습니다.
정조의 장용영이 꾸준히 유지되며 발전되었다면 상당한 자체 재정력을 바탕으로 무기도입이나 개발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건 뇌홍식 부터라는건 동의하지만 나선정벌 한번으로 플린트락과 조총의 차이가 없다 하기엔 전투 사례가 너무 지엽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번의 전투 여러번의 전역 장기간 비교를 통해 우열이 드러나는거라 봐서.. 근대 국가들도 전근대 국가들한테 한두번씩 얻어맞곤 했는데 그걸로 별 차이 없다 할 수 없는것 처럼요.
전열을 이룰때도 불씨가 꺼지지 않게 관리해줘야 하는 화승식보다 분명 불씨관리가 훨씬 간편하고 사격통제가 간편했다는 직접적인 장점은 분명있고 유럽의 전술 발달도 그것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다 봅니다.
조총에서 뇌홍식으로 쉽게 변경이 가능했고 의병들이 쓰던 유물도 남아있을정도로 개조가 가능했던건 머스킷과 뇌홍식이 별 차이 없었던게 아니라 뇌홍식의 발화 방법이 구리에싸인 뇌홍을 격발할 정도의 힘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캠핑할때 완전 날 부싯돌로 내리치며 빡시게 불꽃을 일정도의 동력은 필요없긴 했습니다.
머스킷에서 뇌홍으로 바꾸고 조총에서 뇌홍으로 쉽게 간다고 화승식과 플린트락이 비슷하구나 할 수는 없죠. 조총에 플린트를 끼운다 해서 격발이 가능한건 아니니까요
@@libero4392 1879년 이산들와나 전투를 떠올려 보시면, 전근대국가들이 냉병기를 들고, 열병기로 무장한 군대를 학살한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영국군 소총은 단발식 탄피소총입니다. 단발식 탄피소총을 가지고도 냉병기를 상대로 우리가 생각하듯이 압도적인 학살을 할 수 있었던게 아닌거죠. 플린트락이라면 더하면 더하겠죠. 번거로움이 조총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일단 부싯돌은 관리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도 안합니다. 부싯돌을 생산 보급하는것도 그리 녹녹하지도 않구요. 그리고 불발율도 조총보다 높습니다. 불로 화약을 폭발시키는것과 불꽃으로 화약을 폭발시키는것중 어느게 더 확실할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폴레옹시절의 플린트락은 대규모로 무장하니까 대단해 보이지만, 조총도 대규모로 무장하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우위는 없었다는거죠. 플린트락이 조총보다 발전된 총기인것은 맞지만, 지금의 돌격소총에 도트사이트를 단것과 안단것의 차이정도라고 봐야 합니다.
조선의 화승총에 대해서 말하자면 스프링탄성을 이용해 용두가 화약접시에 처박는 구조입니다. 코킹을 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플린트락과 딱히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방적인 학살은 탄피소총과 기관총의 등장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우금치 전투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1895년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군대는 일본군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은 소수였고, 조선 관군이 개틀링기관총과 단발식 탄피소총으로 일방적인 학살을 한 겁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조선의 무기는 서양의 무기와 압도적인 격차가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1800년대 중반만해도, 서양이나 동양이나 무기 수준이 교전이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청나라, 조선, 일본 모두 서양의 총기를 수입해서 무장 수준을 올리기도 했고, 조선이 망할때 화승총을 들고 일본군과 대항을 했던게 아닙니다. 당시는 아직도 냉병기를 들고 있을 정도로 과도기적인 상황이었고, 경제적 수준과 나라의 건전성에 따라서 발전의 수준이 달랐던 겁니다. 혁신이 너무나 빠른 수준이었기 때문에 열강들은 혁신을 이루기 위해 피말리는 경쟁을 했고, 그 중요한 시기를 조선은 세도정치로 날려 먹고 있었던 겁니다. 10년만에 청동제 대포가 강철대포가 되는 현실에서 세도정치를 극복하지 못한 그 짧은 시기가 결정적이었던 겁니다. 1860년대만 해도 나무배 시절이고, 스크류도 없으며, 증기선 시절입니다. 1911년에 석유로 가는 전함이 등장을 합니다. 50년만에 나무배가 석유 연료로 가는 강철전함으로 바뀐거죠. F4 팬텀 전투기가 1960년대에 개발해서 지금까지 사용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무기가 얼마나 정신없이 발전했는지 짐작하기도 힘들지요. 1년, 2년만에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던 시대였고, 조선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김구선생이 동학농민운동에서 접주였습니다. 접주면 상당한 수준의 간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875년 생입니다. 이분은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그리고 자기손으로 독재시대를 만들었죠. 생각해보시면 그 격변이 얼마나 짧은시간안에 벌어졌는지 감이 오실 겁니다. 조선이 발전 못한 것은 세도정치 떄문인겁니다. 당시 지식인이나 일반사람들이 시대흐름을 모른게 아닙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어버린게 문제였던 겁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당시는 시사점이 많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당시처럼 세도정치를 하고 있는게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국익이 손해를 입는지도 따져 봐야 합니다.
플린트락과 냉병기는 공존했습니다.
아하... 어쩌면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이 플린트락 머스킷을 대량생산을 하고 싶었어도 부싯돌의 차이에서 접었을 수 도 있겠네요.
결국 평화에 찌들어서 그렇게 되었다..슬프구만
뇌관을 끼우는 방식이 더욱 빨리 나타났다면 달라졌을까요?
플린트락 문제 보다는 총검을 사용했는지 그게 궁금하군요.
이분 눈은 엄청 흥분했는데 목소리는 차분함ㅋㅋㅋㅋㅋ
프로이센이 현대식 볼트액션 소총을 개발했지만, 어째서인지 유럽열강들도 도입하지 못하고(안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이 치고나오는 보오전쟁이 1866년이고 신미양요는 1970년 단지 5년차이라,
화승총이 좀 구리긴 했지만, 당시에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물건 까지는 아닌 것 같고, 사실 총의 차이보다는 대포의 사거리와 작열탄, 특히 증기기관의 위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독일의 드라이제 소총과 프랑스의 레벨소총이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총기에서는 화승총은 상대가 안됐죠 특히나 1800년대 후반 서구권에서는 크림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미니에탄보다 발전된 탄을 사용하면서 관통력과 사거리 모두 기존의 플린트락시대에 사용하던 납탄을 능가하는 탄을 운용하던 시기였고 거기에 소총의 격발기구도 기존의 부싯돌이 아닌 퍼커션캡을 이용해서 사용했던터라 장전속도도 더 상승했죠 거기다 미군은 남북전쟁당시 이미 퍼커션캡을 이용하면서도 강선이 파여진 후장식 라이플을 대량으로 운용하던 군대였던터라 개화전까지도 화승총을 사용했던 조선군 입장에서는 보병간의 총격전에서도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buckston201 상당한 발전이 있었지만, 병인양요의 전투를 봐도 상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런 기준은 좀 주관적인 면이 있죠.
남북전쟁에서 후장식은 기병대가 극소수로 운용한 걸로 알고있는데, 대량으로 운용되었나요? 남북전쟁 시작부터 사용되었다고 쳐도 9년차이인데
총용청 → 총융청 아닌가요?
예전 시간탐험대라는 예능프로의 노비편에서 부싯돌로 불피우느라 엄청나개 고생하던데 그게 출연자들이 부싯돌이 처음인게 크겠지만 한반도의 부싯돌 자체의 문제도 있었나 보네요.
옛날 조상님들이 불씨 안꺼트리고 보존하는 걸 왜 그리 중시했는지 알겠네요.
팩트: 조선 후기 정도 되면 계속 계량해서 플린트 락이랑 성능 차이가 거의 없다
영상에서처럼 서양은 플린트락이라고 해서 부싯돌이 흔하게 쓰였지만 동양은 그러하지 못했지요. 그리고 서양의 부싯돌은 가격이 매우 비싸서 몰래 빼돌리는 경우도 흔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총기 검사할 때 부싯돌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수였다 하지요.
화약 구하는 것도 불지옥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이었을텐데, 불 잘 붙는 부싯돌을 구하는 것도 힘들었을테죠. 효율성의 문제지 않았나 싶네요.
궁금한 것이 기록상에 수석식 총이라고 기록했을텐데, 노획한 총이 휠락인지 플린트 락인지 어떻게 구분했나요? 조선에서 플린트 락과 휠락을 구분하지는 않았을것 같은데 혹시 휠락을 노획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시기도 1640년대이니, 유럽에서는 30년전쟁 할때 쯤이고 휠락과 플린트락, 메치락이 혼용되던 시대로 알고있습니다.
초기 형태의 수석식 소총이라고 설명을 했는데 그게 안들려요???
잘하네 부싯돌은 교역 문제라고 봄 성능 좋은 부싯돌을 찾을 이유가 없었으니 불만 일어나는 수준에서 만족
효종은 청나라 정벌을 꿈꾼 인물인데 차라리 러시이와 연합해 만주를 탈환할 일이지 청나라의 부역만해주고 말다니.ㅡ
부지런한 천재 한명이 박물관을 부흥시키는군요.
진주박물관 모두의 땀이죠
보이지않는 곳에서 박물관 모두가 함께하고있습니다
8:06 복명 세력이 아니라 명나라입니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한 이후에도 홍광 융무 영력제 등이 1662년까지 청과 대전을 벌였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숭정제 때까지로 취급해서 그렇지 효종 때 청과 싸운건 명나라 군입니다 복명세력은 1662년이후 정성공의 동녕국입니다 삼번이 진압된 이후 멸망 했죠 어쨌든 명나라는 1644년이 아니라 1662년에 멸망한겁니다
스프링, 톱니, 나사를 못만든 이유는 동아시아가 자랑하는 훌륭한 문화, 나무에 못을 박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쇠를 특수하게 만드는 기술이 발전할 수 없었을겁니다
9:00 대두인....털벙거지는 핑계고 그냥 그때부터....어흑...
참판:조선에는 철도 있고, 단조기술도 있고, 화약 만드는 기술도 있다, 그러면! 수석식 조총을 지금말곤 언제 만듭니까!
???: 아니... 그런데 참판...
참판: 지금이야말로 조선의 조총 제조역량을 수석식 조총을 만드는데 써야 합니다!
???:참판대감,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그러고 싶습니다
참판: 그럼 왜 안하나?
???:하지만...
???: 하지만 뭔가!
판서: 실은... 부싯돌이 없다.
참판: (털석)
기름이... 없다...
부싯도루가 나인다..
전쟁할 일도 없고 전쟁할 자원도 부족하니깐
아이러니한것이 유럽은 18세기당시 계속되는 전란으로 무기개발및전술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던것이 현재 냉전종식이후 군대를 해체하는등 군축을 했다가 러시아가 우크라니아전쟁
으로 침략을 하니 군사비를 늘리고 무기를 수입한다는등 반대로 일어나고 있다는것이죠.한국은 분단국으로 늘상 긴장상태로 있으니 꾸준히 무기개발을 하고 있다는점이고
5:53 이게 참....전쟁은 물론 잔혹하지만 기술 개발 인센티브를 확실히 제공한다는 점도 있어. 2차대전 때 온갖 것들이 개발된 것도 있고.
라디오...까르보나라...식목일...필라댄스...스팸...등등
일단 화약의 원료를 구하기가 무척 어려워 발전하기가 어려웠지 않았을까요? 숯가루빼고 유황이 나오나요? 초석도 거의 나오지 않고...유럽서 화약무기 발전한 이유가 식민지서 무궁 무진한 구아바나 유황을 구하기가 용이했단거죠
일부 추측이나 재미있게 보게되네요 감사합니다. 1:02
코자크족과의 충돌했을 때 수석식이 아닌 뇌산수은(뇌홍)이나 아자이드화납으로 도입이 되었다면...
효종 때 머스킷을 어느 정도 만들긴 했는데 비용은 훨씬 많이 드는데다가 사거리는 조총보다 조금 나은 정도여서 생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가장 중요한 부싯돌에서 차이가 있었다니 의문이 좀 해소되는 느낌입니다.
매치락(화승총)과 플린트락 둘 다 머스킷입니다. 조선이 양산에 실패했던건 플린트락이구요. 본격적인 매치락 머스킷 양산은 임진왜란 시기입니다. 조선에선 플린트락에 필요한 부싯돌을 구할 수 없었고, 스프링에 쓸 스프링강을 만들 기술력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총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
한중일 모두 17세기 이후부터는 무기 발달이 거의 횡보에 가깝죠 열심히 개발할 이유도 없고
1800년대 일본은 정신 차리고 탈아시아해서 중국 한국을 눌렀고
한국은 망하는 순간까지 이하 생략
비용문제도 한몫했습니다
나선정벌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50년정도가 지났었고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조선은 엄청난 숫자의 조총을 생산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명청교체기떄 명나라 지원갈때도 다수가 조총병이었다고도하죠
그로인해 이미 조총은 그로인해 생산단가가 상당히 낮아진상태였습니다
나선정벌당시 플린트락 머스킷을 입수한 조선은 복제생산을 시도했습니다
북벌을 명분삼고있는 효종입장에서 신무기를통한 전력우위를 시도하는건 어찌보면 당연했죠
하지만 너무비쌋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당시 조총가격의 20배정도라고 알고있구여
물론 시간이지나서 생산량이늘고 숙련도나 기술력이 상승한다면 생산단가가 낮아지겠지만
그렇다고해도 조총보다비쌉니다
그뿐아니라 유지문제도있죠
까놓고말하면 화승심지야뭐 비싸바야 얼마나 비싸겠습니까만
부싯돌은 캐는비용도 비용이고 운송무게나 비용적 측면도 고려한다면 더비싸죠
심지어 극단적인 예시를들면 플린트락머스킷1명들고 창칼10명쯤들고 9명은 맨손으로 있을바에 조총병 20명들고 싸우는게낫죠
이후에도뭐 굳이 무기개발에 노력해야할 이유가 없는 평화적인 시대가 이어지다보니까 그냥 해봐야 조총개량만 주구장창해왔습니다
왜 그렇게 외국군대에 패했을까.
주구장창 개발했다면서.
@@금도끼-u9v 현대로따지면 아무리 t62전차를 북한이 천마호니 폭풍호니 개량을했어도 우리나라k2에는 안되는거랑 같은이유입니다
조선도 대한제국쯤되면 플린트락 머스킷소총 사용함
대한제국 되면 수석식은 매우 구식이라서 근대화 시작할 때도 퍼커션캡을 먼저 사용했고 이후에 탄피식으로 넘어갑니다.
대한제국시기엔 볼트액션 소총이나 단발식 소총썼는데 뭔소리함?
언급하신 기술적차이도 너무 큰것 같아요. 유럽은 시계까지 만들정도로 태엽기술이 꾸준히 발전했는데, 이런 금속 가공기술이 플린트락의 발화를 가능하게 해준것 같습니다. 반면 동아시아는 태엽시계가 없을 정도로 금속이 발전하지 못했으니..
예전 시간탐험대라는 예능프로의 파일럿 방송인 노비편에서 식사준비를 맡게된 출연자 두명이 부싯돌로 불붙인다고 개고생하던게 생각나네요. 몇시간이고 그것만 하는데 다른 역할 맡은 출연자들도 자기 분량 끝내고 합세해 번갈아 시도하는데 쉽지 않더라는... 결국 불 붙이는데 성공하긴 하는데 진짜인지 다른 수단으로 불 붙인건지 조금 의심스럽더라는...
기술적인 요인이 더크다고 보네요 플린트락 소총은 스프링이 들어가는데 스프링을 만들려면 스프링강 제련기술이 필수적이죠
스프링강을 만들수있는 기술력이 당시 조선에 있었을까요?
산업혁명이 안됐으니 당연히 없었죠
조선은 19세기 말에도 스프링강을 만들지 못했음 ㅇㅇ.
진주박물관 볼게 많습니다 가봐요 진주성 안에 있는데 미니 영화관도 있더이다
뇌홍만드는법이 빨리 나왔으면
금기시의 이칭은 무고 라면 금기시는 어떤 기관이가요? 첨들어서
군기시(軍器寺)는 군용 기물 제작소 같은겁니다
조병창과도 비슷하다고 보면 되지않을까싶네요
@@진쌈매 답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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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맛집인듯
우리나라는 인문학에 투자가 너무 인색한듯 조금만 투자해도 이런 영상이 많이 나올텐데 너무 아쉽네
애초에 영국 제외한 유럽도 질 좋은 부싯돌이 부족해서 훈련 때 안 쓴 나라가 허다했음
대두인.....
수석식이 아니라 퍼커션캡이 국내로 들어왔으면 적어도 발전할 기회가 있었을듯 한데 아쉽네 ㅠ
들어왔었습니다 그것도 엄청 많이
1500년부터 1870년까지의 머스킷 소총과 조총이 1세대 소총이라면
1871년부터의 볼트액션 소총의 2세대의 의 현대 소총이 개발된게 결정적임
이것을 바탕으로 일본은1880년 무라타 소총을 개발하여 아시아를 공격한거임
조선은 이 10년의 유럽의 귀중한 소총 개발사를 눈치채지 못했지
격발방식에 따라 국력이 좌우되었던 시대!
머두인 ㅋㅋ 이 노서아스키들아!!
첫번째 패대기친 자전거는 뭐지? 뭔가 설명이 필요한듯~
돈땜에
6:00 근데 이런 논리면 당시에 동양도 내전이라던가 굵직한 전쟁은 제법 많았음 특히 중국은 내전 한번 일어나면 어지간한 국가간의 전쟁보다 더 크기에 그냥 동양이 전반적으로 뒤처진거같음
그 시점 중국은 청나라인데, 청나라는 화기의 발전을 억누르던 나라였습니다. 그야 화기는, 다루기 쉽고, 다루기 쉬우면, 쪽수가 많은 한족이 반란읗 일으키기도 쉬울테니까요. 그래서 한족 군영이자 화기를 적극 운용한 청군의 녹영도 계속 뭐만 하면 탄압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내전이 계속 일어남에도 화기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런 연유가 있습니다.
@@닉네임추천좀-m2g 강희제가 화기발달을 억제한건 맞지만 건륭제때 그렇게 많은 원정을 치루면서도 월남이나 티벳에서는 그닥 힘을 못썻음에도 화기발달을 안한거는 그냥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본질 자체가 잘못됐기때문인거같아요
글구 조선도 효종때부터 정조까지 북벌한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닥 발전이 없어서 아쉬움 중간중간에 내전도 있었음에도
한국사극같은데서 매치락 구현은 커녕 심지줄에 불붙여서 탕 쏘는거보면 ㅋㅋㅋ
한국드라마에서 플린트락 볼수는있을까
18세기 한중일이 서양 유럽국가에 비해 군사무기 경쟁에서 뒤 떨어진 이유?
한중일은 이 시기 평화시기고 유럽은 허구한 날 전쟁을 해서 군사 수요나 무기 개선 욕구가 넘쳐서 그렇다.....그런데....이 설명만으로 되나?
조선과 일본은 18세기 동안 국내외적으로 안정적인 평화의 시대라 무기 개발 수요가 없었서 그럴디고 하더라도,
청은 이 시기에도 대외정벌이나 주변국가와의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도, 서양 같은 별다른 신무기 개발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며..
청이 경제력이나 군사적 수요가 부족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유가 뭘까......주변국이 이런 신무기 개발 없이도 충분히 제압 가능한 약한 적이라서....그런가...
아니면, 서양은 18세기 산업 및 과학기술혁명이 일어나면서 군사적 무기까지 혁명 수준의 진보가 있었던 반면,
청은 과거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서,,,국가 시스템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한게 더 큰 요인이 아닐지....
이것이 한중일 모두 서양에 비해 군사기술이 뒤 떨어진 가장 주된 요인 아닐까
한족민초들 입장에서 총 생기면 조정의 만주족부터 쏴죽이지 뭐하러 힘들게 외적을 치러가요
크고작다고 해봤자 청나라 크기에 비하면 다 작아서ㅎㅎ 주변 큰 세력은 18세기 초반에 다 때려잡았고(티벳 몽골 준가르 대만 등등) 한족이 들고 일어날거 같아서 화기 개발 억제함
양은 사람이 득실득실하고 인건비가 워낙 싸서 기계를 쓰는게 더 비싸서 그랬다는 말도 있음
설명됨. 기술 발전은 상대도 그럴 여력이 되야하는데 기술 기울기가 있으면 기술 발전이 없어요. 동양쪽은 대규모 세력간의 큰 전쟁 없었던 것이랑 서양처럼 돈줄과 이권이 될 식민지가 없었던 것도 큰편이죠.
청이 상대했던 적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유목기병대들을 운용하는 적들인지라, 화기의 업그레이드 필요성을 못 느꼈을 거에요. 도리어 화력을 앞세운 명 제국을, 자신들의 팔기로 제압한 (물론 자세히 보면 명의 화기와 운용법을 입수해서 사용했지만) 그 사례만으로도 업그레이드 필요성을 잘 못 느꼈을 거에요.
Percussion lock이 더 비싸을까요? 이게 들어 왔다면 판도가 바뀌었을지도
당시 조정 신료들의 논의를 보면 비쌌던 건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논의의 결론이 "좋은 건 알겠는데 (바람과 비의 영향을 덜 받으니까) 비싸고 만들기 어렵고 지금 딱히 긴급히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였습니다.
그랬었군요. 궁금증을 풀어 주었네요
동아시아 부싯돌은 불꽃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총의 스프링 힘으로는 세게 칠 수가 없다
동아시아는 서양과 비슷한 수준의 스프링을 만들 수 있었나요?
코사크인이 말 하길 한국인은 대두인이라?
정말 한국인들이 머리가 커 보였나 보군요
동양인도 남방계는 머리가 그리 크지 않은데?
몽골족도 덩치가 커서 그런지 머리가 작아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 투구 랑 모자가 큰 편이라 그걸 착용하니 대두로 착각한거
조선이 플릭트락을 도입하지 않은 이유를 알려면, 우선 매치락과 프린트락의 차이를 알아야합니다..... 당시 서양의 판금갑옷의 방어력은 세계 최강수준으로 매치락의 사격은 중거리 이상에서는 튕겨냈습니다.... 따라서 갑옷을 관통시키기 위해 탄환의 위력과 사거리를 늘린게 플린트락입니다..... 가격은 매치락의 3배 이상이었죠..... 근데 동아시아는 애초부터 프린트락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가 동아시아의 갑옷은 매치락으로도 다 관통되기 때문입니다..... 매치락으로도 원샷원킬인데 굳이 돈 더 들여서 플린트락을 만들 필요가 없던거죠 ㅎㅎㅎ
잘못일고 계시네요 플릭트락과 조총의 운동량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쓰는 소총과도 별차이 없어요 ㅋㅋ발사방식의 차이지 위력의 차이가 아니며 플리트락 나올당시 총구에 나선을 파 조중력이 좋아졌습니다 우리도 초기 조총과 후기조총의 위력이 다릅니다 조총에도 강선을 팟거든요
1627년 박연이 조선에 식수를 구하러 왔다가 사로 잡혔는데 그때 이미 수석식 소총을 가지고 있었던지
박연이 조선에서 최초로 샘플로 수석식 소총을 만들었을수도 있음
아님. 나선정벌 때 처음 접했음.
@@chrisst.simmonkang2942 하멜이 표류한게 1653년 이고 나선정벌 처음 출정 한게 1654년임
하멜배에 수석식 총과 대포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전부 획득함 국립진주 박물관에서는 하멜이전 명나라 에서 들어 왔다는데
그보다 이전에 박연이 사로 잡힐때 수석식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시각도 많음
@@chrisst.simmonkang2942
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holland14.htm
@@부엉이동생 벨테브레이(박연)는 해적출신이라 무기체계에 해박했던 것은 사실이나, 표류해서 맨몸으로 살아남은 것임. 조선이 당시 플린트락 머스킷이나 화포 실물을 입수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임. 서양인이면 무기 다 잘 만드는줄 알았던 것은 박연 때문이긴 함.
@@chrisst.simmonkang2942 당시는 납탄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 하던 시대임
해적이 무장상인 이자 어떻게 보면 국가 에서 인정 하는 사략선 군인임
효종 북벌이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았다는걸 보여준거지 뭐.
필요성을 못 느꼈음 유럽처럼 전쟁이 많았으면 상대보다 개미똥꼬만큼이라도 나은 무기를 가지려고 할 텐데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전쟁이 없었죠. 필요성을 못 느끼니 보수적으로 가는 거죠
그래서 기존 무기체계 유지하거나 개량만 하지 새로운 신무기 도입에는 보수적으로 갈 수 밖에 없죠. 새로운 시도 하는 것 이거 쉽지 않죠. 평화시기에 무쓸모인 신무기 도입은 말입니다.
부싯돌이나 기술적 문제는 이건 생존에 위협에 있으면 어떻게든 대체 방법을 찾아 극복하기 때문에 주 원인은 아니죠 주 원인은 필요성을 못 느꼈다임
조선도 바보가 아닌지라 무기체계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필요성을 못느낀 것이 아니라 청나라가 통제했습니다. 조선은 수뢰포에 부싯돌 격발장치를 사용했는데 청나라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꼭 전쟁이 일어나야 무기 개발을 하나요? 좋은 무기를 가지고 국방력 강화해서 평화롭게 살고싶은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였습니다.
꼭 전쟁 위협뿐만 아니라 북방 국경 방어때문에 골머리가 빠그라졌던게 조선인데...
책 하나만 읽은사람이 이렇게 무섭네.
전쟁이 없으면 무쓸모라는 건 무슨 소리여 ㅋㅋ태평성세 세종시기에 무기개발은 왜 했던거여 지금 역대급 방산국가로 거듭나고 있는 대한민국은 바보인가?
@@chrisst.simmonkang2942 동서고금 평화 시기에는 군대는 다 나약해집니다. 비생산 조직이라 세상 쓸모 없는 집단이 군대니깐요. 유럽 보세요. 냉전 끝나자 바로 군축으로 갔죠.그러다 우크라 전쟁으로 뜨악 하고 다시 군비 확장하며 재무장에 들어가고 있죠. 그리고 필요성을 못 느끼면 발전에 제약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필요성을 증폭 시키는 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전쟁입니다. 인간은 생존에 위협에 쳐하면 무슨 짓이든 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하늘에 떠 있는 달 따는 게 도움이 된다면 따려고 합니다. 그 어떤 자원이 소모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평화 시기에는 저 달 왜 따? 돈만 들게 그냥 백열전구 큰 거로 대체하면 되자나 이렇게 갑니다.
대두인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