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시143 김소월의 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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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0 сен 2024
  • 김소월(金素月, 1902년 9월 7일~1934년 12월 24일)
    그는 일제 강점기 시인으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素月)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이다.
    그는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여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곽산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조만식과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오산학교 시절에 김소월은 3살 많은 ‘오순’을 알게 됐다. 둘은 서로 의지하고 상처를 보듬어주며 사랑했다. 그러나 일 년 후, 그는 오산학교 재학 중인 1916년 14살 때, 할아버지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혼인했다. 오순은 19살에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나 힘든 결혼생활을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면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에 향년 33세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뇌졸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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