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이버펑크는 '독점적 거대기업' '개인의 말살' '욕망의 극대화' 로 대표되는 디스토피아 이야기인데 오늘날엔 그건 곁다리고 사이버네틱 증강기술, 전뇌해킹, 미래적인 디자인에 더 관심을 가지는거 같네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건 결국 현실과 괴리된 세계이며 이는 결국 도피라는 문구가 와닿네요.
현대에 부활한 사이버펑크가 기술에 집중하는건 제 생각에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 인류를 밀어붙이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암암리에 그 압력을 느끼고 있는 거겠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기술에 대한 집착과 그 결과물이 인간을 대체하고 있으니까요.
사이버 펑크 장르가 꿈꿔왔던 미래의 시간인 2023년이 되었지만 세상은 당시에 생각했던 것 만큼 신비롭게 돌아가기는 커녕 각종 첨단장치를 냉각 시키기 위해 선풍기와 같은 장치를 쓰는 등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적"기계에 더 많이 의존하는 상황이고, 사이버 펑크 장르가 예언했던 미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는 끝도 없이 부유해지는 반면 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출산률은 낮아지는 등 다수의 삶은 계속 망가져가고만 있고 인터넷과 같은 공간은 끊임없이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실은 "도피"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재의 상황... 그러니까 백수들이 할 거없이 인터넷이나 뒤적거리는 것이 빈번히 보이는 현상이라는 점을 볼 때 뉴로맨서의 예측은 어느정도... 맞았으려...나?
꿈의 세계 오즈의 마법사 크리스탈 네온 빛으로 된 오즈의 성 네온 빛으로 빛나는 격자선을 그리는 마천루들, 도시 사이버스페이스 꿈의 공간 최첨단 연필깎이에 빅토리아의 무언가가 있었다. 달로 향하는 로켓은 고대 시대 마차 바퀴의 폭으로 이루어진 철도를 타고 운송 되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생각해보면 몸을 양철로 바꾸어가면서 심장을 잃어버린 모습이, 사이버사이코시스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약일까요?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상념체, 꿈과, 개념, 그리고 환상으로 도피하려는건 인간의 본능일까요? 신기하게도 이러한 개념이 여러 sf의 하위 장르로 파생됬다는게 흥미롭습니다. 건너 건너 워해머 40K라는 SF 스페이스 오페라 미니어쳐게임의 테마중 하나로 쓰이고 있죠. 어쩌면 우린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서 먼 옛날까지 이러한 개념을 내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천국으로써의 구원은 죽어서겠지만 더럽고 힘든 현실에서 착실히 교리에 맞는 선행을 실행했다면 티없이 맑은 천국으로써 가게 된다는 제일 원초적 교리는, 저에게는 이런 도피가 역사적인 흐름에 맞춰 변화해온 구원서사와 비슷하다고 받아들여지네요. 다만 사이버펑크 장르에서는 그런 사이버스페이스는 전혀 구원이 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비틀린 서사가 사이버펑크가 독자들에게 주는 냉소같은 느낌마저 주네요.
sf에 f는 판타지가 아닌 픽션이죠, 사이언스 픽션. 어째서일까요? 또한 사이언스라는 이름 때문인지 다른 장르들보다 사건에 당위성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는 것 같더군요. 저는 이것이 영상속에 나온'컴퓨터 속에는 빅토리아시대의 것과 비슷한 기술이 들어있었다'는 구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컴퓨터를 열어보기 전엔 크리스탈로 된 장치나 뇌와 비슷한 무언가가 들어있지않을까? 하는 자유로운 상상들이 실제로는 과거의 기술에서 조금 더 발전하였을 뿐 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sf는 미래에 기술이 발전 하더라도 지금과 조금 달라졌을 뿐 그리 나아지지 않은 삶이고 그러한 시각에서 발전된 미래에 대한 판타지(환상)이 아닌 픽션(공상)이 sf가 아닐까 싶네요.
사이버펑크가 인간에게 시사하는 점은 자본주의가 자본에만 머물고 덩치만 키웠을때 도래하는세상이기에 우리에게 더욱 큰의미가 있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진화하지 못하고 그랬을 때 인류의 파멸이 어떤식으로 오게 되는지 미리보기 하는 것 이기에 우리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것이고 사이버 스페이스는 환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두뇌를 지배당해 임의로 표현되는 모든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불가능한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이 중헌지 알 방법이 없어진다는 것 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자본이 우리가 파멸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환각과 매우 유사 한... 아니 같은 범위의 것 이겠고, 현재 세태가 그런 쪽으로 돌진해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중하다 할 수 있겠지요.
마약의 환각을 사이버 스페이스, 버추얼 리얼리티와 연결하는 것은 정말 재밋는 발상이네요. 이전부터 고작 사이버 스페이스에 들어가거나 연결하는데 (특히 네트와 연결할 때의 사이버 펑크 장르의 애니에서) 눈동자가 수축 또는 확장되거나, 침을 질질 흘리거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일어난 뭔가의 사건이 몸에 피드백이 될 경우 발작 일으키는 모습을 어딘가 약 빤 것처럼 묘사하는 것 같아서 대체 어디서 저런 식의 연출을 가져온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냥 처음부터 SF 사이버 펑크 장르의 사이버 스페이스 묘사가 그랬던 것이었군요. 어떤 의미에서 사이버 펑크 장르의 애니에서의 사이버 스페이스와의 연결이 고전 SF의 묘사에 가까울 수록 부작용이 큰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좀 더 모던한 가상 현실 계열 SF 작품은 장치 개발자가 일부러 유저의 몸을 파괴하도록 만들지 않는 이상, 가상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나 사념 또는 해킹 실패에 의한 페널티적인 신호가 역류한다고 해도 현실의 몸에 대한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장치를 넣거나 하더라고요.
이런 거 보면 깁슨이 60년대 한 구석을 주름잡았던 유토피아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이나
(약물 사용으로 대표되는)무책임할 정도의 낙관에 대한 몰락도 미리 예견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역시 선구자...
사실 사이버펑크는 '독점적 거대기업' '개인의 말살' '욕망의 극대화' 로 대표되는 디스토피아 이야기인데 오늘날엔 그건 곁다리고 사이버네틱 증강기술, 전뇌해킹, 미래적인 디자인에 더 관심을 가지는거 같네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건 결국 현실과 괴리된 세계이며 이는 결국 도피라는 문구가 와닿네요.
현대에 부활한 사이버펑크가 기술에 집중하는건 제 생각에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 인류를 밀어붙이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암암리에 그 압력을 느끼고 있는 거겠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기술에 대한 집착과 그 결과물이 인간을 대체하고 있으니까요.
어찌보면 사이버펑크야 말로 오래된 미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고려청자를 묘사한 하늘빛 조차도 절망 내지는 회한에 가까운 느낌이니까요. 길게 보면 스팀펑크의 발랄한 느낌이나 디젤펑크의 그 무분별한 낙관주의가 별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이버 펑크 장르가 꿈꿔왔던 미래의 시간인 2023년이 되었지만
세상은 당시에 생각했던 것 만큼 신비롭게 돌아가기는 커녕
각종 첨단장치를 냉각 시키기 위해 선풍기와 같은 장치를 쓰는 등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적"기계에 더 많이 의존하는 상황이고, 사이버 펑크 장르가 예언했던 미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는 끝도 없이 부유해지는 반면
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출산률은 낮아지는 등 다수의 삶은 계속 망가져가고만 있고
인터넷과 같은 공간은 끊임없이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실은 "도피"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재의 상황...
그러니까 백수들이 할 거없이 인터넷이나 뒤적거리는 것이 빈번히 보이는 현상이라는 점을 볼 때
뉴로맨서의 예측은 어느정도... 맞았으려...나?
꿈의 세계
오즈의 마법사
크리스탈 네온 빛으로 된 오즈의 성
네온 빛으로 빛나는 격자선을 그리는 마천루들, 도시
사이버스페이스
꿈의 공간
최첨단 연필깎이에 빅토리아의 무언가가 있었다.
달로 향하는 로켓은 고대 시대 마차 바퀴의 폭으로 이루어진 철도를 타고 운송 되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생각해보면 몸을 양철로 바꾸어가면서 심장을 잃어버린 모습이, 사이버사이코시스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약일까요?
흥미롭네요. 뉴로멘서를 읽어보긴 했지만, 몽환적이라는 생각은 했어도 약물 문화에서 파생되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못했습니다.
어쨋든 이야기가 이어지면 전설이 되는 법이죠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상념체, 꿈과, 개념, 그리고 환상으로 도피하려는건 인간의 본능일까요? 신기하게도 이러한 개념이 여러 sf의 하위 장르로 파생됬다는게 흥미롭습니다. 건너 건너 워해머 40K라는 SF 스페이스 오페라 미니어쳐게임의 테마중 하나로 쓰이고 있죠.
어쩌면 우린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서 먼 옛날까지 이러한 개념을 내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천국으로써의 구원은 죽어서겠지만 더럽고 힘든 현실에서 착실히 교리에 맞는 선행을 실행했다면 티없이 맑은 천국으로써 가게 된다는 제일 원초적 교리는,
저에게는 이런 도피가 역사적인 흐름에 맞춰 변화해온 구원서사와 비슷하다고 받아들여지네요.
다만 사이버펑크 장르에서는 그런 사이버스페이스는 전혀 구원이 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비틀린 서사가 사이버펑크가 독자들에게 주는 냉소같은 느낌마저 주네요.
오랜만에 모험러 허튼소리네요 이것 정말 좋아합니다
이게 진국이죠 키햐
사실 명작을 시대와 분리해서 어디서 뚝 떨어진거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시대상이나 영향받은 다른 작품까지 같이 생각해보는거도 흥미롭죠
근데 논문 쓰신 분이 SF에 아주 진심이신
sf에 f는 판타지가 아닌 픽션이죠, 사이언스 픽션. 어째서일까요?
또한 사이언스라는 이름 때문인지 다른 장르들보다 사건에 당위성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는 것 같더군요.
저는 이것이 영상속에 나온'컴퓨터 속에는 빅토리아시대의 것과 비슷한 기술이 들어있었다'는 구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컴퓨터를 열어보기 전엔 크리스탈로 된 장치나 뇌와 비슷한 무언가가 들어있지않을까? 하는 자유로운 상상들이
실제로는 과거의 기술에서 조금 더 발전하였을 뿐 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sf는 미래에 기술이 발전 하더라도 지금과 조금 달라졌을 뿐 그리 나아지지 않은 삶이고
그러한 시각에서 발전된 미래에 대한 판타지(환상)이 아닌 픽션(공상)이 sf가 아닐까 싶네요.
물론 미래를 우주의 미지와 환상으로 채운 스페이스 오페라 라는 장르도 있지만 말이죠
사이버펑크가 인간에게 시사하는 점은 자본주의가 자본에만 머물고 덩치만 키웠을때 도래하는세상이기에 우리에게 더욱 큰의미가 있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진화하지 못하고 그랬을 때 인류의 파멸이 어떤식으로 오게 되는지 미리보기 하는 것 이기에 우리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것이고
사이버 스페이스는 환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두뇌를 지배당해 임의로 표현되는 모든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불가능한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이 중헌지 알 방법이 없어진다는 것 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자본이 우리가 파멸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환각과 매우 유사 한... 아니 같은 범위의 것 이겠고,
현재 세태가 그런 쪽으로 돌진해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중하다 할 수 있겠지요.
마약의 환각을 사이버 스페이스, 버추얼 리얼리티와 연결하는 것은 정말 재밋는 발상이네요.
이전부터 고작 사이버 스페이스에 들어가거나 연결하는데 (특히 네트와 연결할 때의 사이버 펑크 장르의 애니에서) 눈동자가 수축 또는 확장되거나, 침을 질질 흘리거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일어난 뭔가의 사건이 몸에 피드백이 될 경우 발작 일으키는 모습을 어딘가 약 빤 것처럼 묘사하는 것 같아서 대체 어디서 저런 식의 연출을 가져온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냥 처음부터 SF 사이버 펑크 장르의 사이버 스페이스 묘사가 그랬던 것이었군요.
어떤 의미에서 사이버 펑크 장르의 애니에서의 사이버 스페이스와의 연결이 고전 SF의 묘사에 가까울 수록 부작용이 큰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좀 더 모던한 가상 현실 계열 SF 작품은 장치 개발자가 일부러 유저의 몸을 파괴하도록 만들지 않는 이상, 가상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나 사념 또는 해킹 실패에 의한 페널티적인 신호가 역류한다고 해도 현실의 몸에 대한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장치를 넣거나 하더라고요.
이사람 뭐하는 사람일까
결국 도망친 곳에는 낙원은 없었다는 걸까요?
그러면 도망치지 않고 극복한다면 낙원이 있는 걸까요?
왜 어디에도 낙원 같은 건 없다는 불길한 예감만 들까요 흑흑
실체화된 낙원 따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666kuruption8 맞습니다. 낙원이란 개념도 인간의 상상에 불과하고 개인적인 느낌일뿐 생명체의 삶에서 낙원이란 존재할수가 없지요
tv화면 본적있는 사람 여기있습니다. 첨언하여 염두하다는 말은 없고 염두에 두다 라는 말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