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메이지 시대 전후 특히 전에 해당되는 시점에대해서 아는바가 전혀 없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걸 보고 이해해야 일본의 근대화나 현대의 일본 정치적 상황이나 지역간에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게 되네요. 일본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 (역사)일것같네요.
나중에 아이즈번의 백호대 이야기나 보신전쟁 마지막인 하코다테 결전 이야기 등등 다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ㅠㅠ 영상 잘 보고 갑니다. 결국엔 토바/후시미 전투가 다카모리의 도발에 일어난 구막부 사무라이와 사츠마번 병사들의 무력충돌로 일어난 것이었군요. 상당히 치밀한 전력이네요 거진 200여명이나 고용하여 에도 시내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면 ㄷㄷ;
이런 요청이 있을 때 마다 좀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내용일 것이라 어떤 부분에 촛점을 맞춰야 할지가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인 듯 합니다.제 영상 대부분이 일반적인 일본 역사의 흐름을 다루지는 않거든요. 글로 설명하기 좀 애매한데... 뭔가 여러 스토리를 수평으로 꿰어서 들어올리는 듯한 내용을 담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합니다. 저는 연구자가 아니라, 연구자들의 결과물을 읽는 입장이기에 이런형태라도 고민하지 않으면 그냥 너무 평범한 내용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백호대도 제 입장에서는 영상으로 만들기에 수평으로 엮을 스토리가 좀 부족합니다. 제가 관련 지식이 깊지 못하다는 이야기지요. 관점이 확대될 때, 그 내용을 가지고 꼭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samurairomance 그렇게 느끼셨다면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흥미 있고 사료 깊은 정보를 영상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제가 로망스님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항상 재밌게 시청하고 있으니 유익한 영상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앗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어떤 요청이 있을 때, 상대방이 어느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 하기 때문에 기준점을 잡기 어렵다는 것과 제가 지식이 부족한 경우 그냥 인터냇 뒤진 내용을 떠드는 것 밖에 안되는 것이라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 고민된다 정도 입니다. 하코다테는 이야기 해 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코다테에는 직접 다녀오기도 했었고요. 하코다테 이야기 먼저 함 가보도록 할게요 !!
@@samurairomance 아앗.. 저도 관련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라서; 다만 전쟁사를 공부하는 걸 취미로 사전이나 다큐를 보는걸 즐겨하는 평범한 청년입니다ㅠ 백호대에 대한 것은 일본에서 제작한 영화 '백호대'를 보고 실제로는 어떤 조직이었고 현재에는 어떤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남아있는지 등이 궁금했습니다. 아이즈번 전투에서 사무라이들 처럼 자결로 모두 죽었다고 하던데, 왜 다른 막부파들 처럼 훗카이도로 가서 항전하지 못했을까 등등 사소한 궁금증도 있었구요 ㅠㅠ
안녕하세요.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사무라이들이 나오는 매체를 보다보면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무사들이 결투를 할 때에 갑옷이나 조총 등의 병장기로 무장을 했다면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텐데, 대부분 평상복에 검 하나를 들고 결투에 임하는 장면을 자주 보곤 했습니다. 이렇게 무사들이 요로이를 착용하지 않고 결투에 임한 것이 매체에서 나온 표현인가요 아니면 실제로도 어떤 이유가 있어 그렇게 한 것인가요?
일단 결투 같은 일이 많이 발생하지는 않았고요. 카부토 요로이를 입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에 임할 때 하는 행위로 에도시대에는 카부토 요로이를 팔아버리고 보관함에 비슷한 무게의 돌을 넣어 둔 무사도 있었습니다. 착용법을 모르는 사무라이들도 존재했고요. 전쟁이 없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타시아이(果たし会い)로 불리우는 결투에 있어서는 히타이아테(額当て)로 불리우는 머리 방어용 띠 정도만 두르고 싸움에 임하곤 했습니다.
메이지 유신에 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음모론 같은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관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양이의 초기에 막부측은 프랑스, 삿초측은 영국측의 지원을 받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쨋든 결국엔 유신의 결과로 주요 관직은 삿초에서 차지하게 되었는데 사이고는 왜 정한론 이후 왜 그토록 몰락했을까요? '나는듯이' 등에서는 사이고를 상당히 현자로, 그리고 정한론의 시각을 상당히 대의적인 관점(러시아 견제)으로만 해석하더라구요. 물론 미국/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개화 시킨 것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진 음모론 같은 진실(?)이죠 그러나 메이지에 이은 새로운 전쟁은 그런 대의명분(그것도 사츠마만 해당되는 명분)보다 중요한게 물자, 그보다는 돈이라고 보는데요. 당시 일본의 전쟁 물자 등은 외국 특히 영국에 상당히 의존했는걸로 알고 있는데 조슈에서 왜 세이난 전쟁까지 굳이 흐름을 이어갔을까요?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막부 할복 조건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존속을 구제하기까지에 외국의 입김이 상당한걸로 알고 있는데 세이난전쟁도 억지로 일으킨 전쟁같은 느낌이 상당히 강한것 같습니다. 삿초의 내분으로 사츠마세력의 몰락이 외국의 공작 결과로 보시는지요?
이 부분은 제가 깊이 있게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전제해 두고요. 영국의 Great Game 과정에서 부동항을 찾아 남아하는 러시아를 틀어 막고자 영국이 일본을 선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즉,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면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눈에 보이는 어떤 이익이 있어야 겠지요. 일단은 쵸슈와 사츠마가 갈등을 일으켜 사츠마 세력이 몰락한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권력갈등의 시작을 살펴 보면, 이와쿠라사절단으로 사츠마의 오오쿠보, 쵸슈의 키도, 이토 등이 미국, 유럽을 다녀 다녀오는 기간동안 메이지 신정부는 사츠마의 사이고가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사츠마, 쵸슈의 파벌을 유지하지 않고, 토사, 히젠 출신의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는 것입니다. 돌아와보니 권력구조가 복잡해진 상태였던 것이지요. 특히, 히젠출신의 "에토 신페이"가 주역이 되어있는 점이 오오쿠보의 눈에 가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이고의 정한론에 찬성하는 에토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을 얻기위해 정한론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쵸슈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카오루에게 "오직(汚職)" 혐의를 씌워 일시적이나마 실각 시킨 것도 바로 에토 였습니다. 어쨌든, 정한론이 막판에 오오쿠보의 사주로 인하여 좌절되자 사이고는 사직하고 카고시마로 낙향하게 되지요. 이 때 사이고를 따르는 600여 명의 관료가 함께 사직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인원이지요. 이 1차 권력구조의 개편에 외세의 개입여지는 아무리 봐도 없어 보입니다. 쵸슈와 갈등구조도 아닌 것으로 보이고요. (이 부분은 제가 지식이 짧아서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츠마의 오오쿠보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지요. 이 때, 낙향한 인물들이 불만이 극에달한 사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요. 에토가 중심이되어 발생한 "사가의 난"이 있었고, "신푸렌의 난" 등이 유명합니다. 모두 진압되고 말지요. 그리고, 세이난 전쟁이 발발합니다. 반란세력의 규모가 꽤 컸지만, 사이고 군대의 무장상태는 별볼일 없었습니다. 외세가 신정부에 무기를 공급할 개연성 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무장상태 때문에 신정부가 고전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 전쟁 발발에 외세의 개연성을 찾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억지로 일어난 전쟁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고향에 내려가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려했으나, 사이고 정도 되는 인물이 하야하고 내려왔으니 불만세력은 "사이고의 불만"을 활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이고 정도 되는 인물이 전쟁을 통해 신정부를 이길 수 있다라는 판단을 했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불만사족계급이 제어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고 결국 폭빌하게 된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사이고가 취할 행동은 그 세력의 리더가 되는 것 밖에 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사이고와 "라스트 사무라이" 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새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요. 사츠마의 오오쿠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살당합니다만, 이시카와현 출신 사족들의 소행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암살 사건을 쵸슈 파벌이 사주했다고는 못들어 봤습니다.(몰라서 못들어 봤을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메이지 초기는 사츠마, 중기는 쵸슈가 권력의 중점에 서 있었습니다만, 과정을 보면 사츠마 쵸슈의 갈등 구조가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외세 개입 여지가 있었는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네요. 메이지 초기에 사츠마가 주도권을 잡은 이유 증 하나로, 메이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쵸슈 번의 인재가 많이 죽었던 것도 원인으로 들 수 있겠습니다. 중간 계층에 많이 포진해 있던 쵸슈 번 인재들이 사츠마 번 주요 세력 몰락과 더불어 한 박자 늦게 두각을 나타낸 것이지요. 장황한 내용 답변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사무라이 로망스 성의있는 답변에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이고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보면, 어느시점에서 과한 감이 드러난다고 봤습니다. 낙향한 사이고를 억지로 전쟁판에 불러일으킨 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누군가에게 죽어야만 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사이고도 전쟁과 전략에 뛰어난 인물로 파악되었기에 결과가 뻔한 무리한 전쟁을 한것도 결과를 스스로 받아드린감도 있고요. 막말 유신사는 정말 재미있네요. 특히 이런 이야기엔 음모론도 다양하니 그만큼 다양한 해석을 보고 듣는것만으로도 시야가 트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시 한번 친절하게 알려주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
사이고 타카모리를 끝없는 영웅으로 추대하는 음모론 중 하나가, 마지막 불만세력 사족을 싹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함께 일망타진 당하는 것으로 새 시대를 열도록 해주는 것이 의도된 사이고의 마지막 임무였다는 건데요. 말씀하신대로 사이고의 반란과 세이난 전쟁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보니까 이런 음모론도 나오나 봅니다.
사무라이 로망스 말씀하신 내용은 들었지만 말씀하신대로 너무 우상화 된 음모론 아닌가 합니다. 사이고 타카모리 역시 메이지유신의 영웅이며 사무라이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이기에 더 우상화 된 듯합니다. 단순 뇌피셜입니다만, 사이고의 청나라는 물론 개화된 조선과 함께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행동이 실제가 될시에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이 강해지는것을 우려한 열강들의 견제가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러시아 남하견제 하랬디 너네들 한편으로 묶어서 힘쎄지랬냐? 이런 느낌으로요. 거기에 동조하는 세력도 어마어마했고 (사나운 사츠마)메이지유신을 지지한 열강 이외 다른 열강이 사이고에 지원을 한다면 또 다른 골칫덩이가 아니였을까? 란 제 상상입니다 ^^;;하하 수정글: 다시 댓글들을 읽어보고 에토 신페이란 인물에 대해 더 흥미를 갖고 알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런 측면을 생각하셨군요.. 있을 법 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 다만, 러일전쟁을 영국이 지원했고, 이것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가는 절차였고요. 사이고의 이야기는 러일전쟁 이전 이라서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에 대해서 실력을 발휘하기 전이지요. 러시아 견제에 일본이 역량이 되는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조선과 합세하는 것은 오히려 영국이 바라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토 신페이에 대한 오오쿠보의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던 예로... 사가의 난 진압 후, 에토 신페이에게 할복의 기회를 주지 않고 참수한 후 머리를 효수까지 했다는 점도 흥미롭게 볼 포인트입니다.
보신전쟁의 내막(?)을 알게 되었네요 ㅎ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세이난 전쟁의 내막도 한번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평소 궁금했던 것이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계를 은퇴하고 사츠마에 돌아와서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런 일도 안일어나고 자신도 천수를 누리며 살았을텐데 왜!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는지 이해가 잘안되더라구요. 물론 사회의 변화로 기존 사무라이들의 실직, 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자신들의 희생에 대한 부당한 대우도 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결국엔 사이고 다카모리가 전쟁 안한다고 했으면 전쟁이 안일어나지도 않았을까...하는게 제 추측입니다.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사이고 타카모리 정도 되는 리더라면,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수 많은 몰락한 사무라이 세력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소 무리한 억측입니다만, 실각 후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고가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마지막 사무라이 잔당 세력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의도된 마지막 역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세이난 전쟁에서는 발도대가 등장하게 되지요. 국민개병제를 유지하기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뇌, 발도대의 등장과 활약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samurairomance 말씀 하신 의도된 마지막 그게 사실이라면 뭐라 말해야할까요..참 말하기 어렵네요.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잊지 않겠다라는 남자들의 결심인지 아니면 판단이 흐려진 것인지...고견 감사합니다. 보신전쟁에서 끝까지 싸웠던 히지카타가 생각이 납니다.
필요한 때 나타나고, 그 역할이 소진되었 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일본 근현대사에는 이러한 장면이 종종 나오는 것 같습니다. 평화로운 에도시대를 통해 자리잡은 무사도라는 유교적 개념이 죽음을 미학적 관점애서 바라보는 독특한 일본인의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네요.
@@samurairomance 죽음이라..미시마 유키오가 죽음에 대해 NHK에서 인터뷰한 영상이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선택적이며 능동적인 죽음을 맞고 싶다고 한 것 같습니다. 하가쿠레도 언급하면서요. 아마 미사마의 생각이 막말 사무라의 생각과 조금은 공통점이 있을듯합니다. 4:27 부터 시작합니다. 언어는 일본어, 자막은 영어입니다. ruclips.net/video/hLGMm6c_BCA/видео.html
일본역사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메이지 시대 전후 특히 전에 해당되는 시점에대해서
아는바가 전혀 없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걸 보고 이해해야 일본의 근대화나 현대의 일본 정치적 상황이나 지역간에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게 되네요. 일본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 (역사)일것같네요.
오늘도 역시..
사츠마번 이야기는 늘 재미납니다..
감사합니다..
이뤄 놓은 것이 많은 번이라 그런지 이야기 거리가 참 풍부한 동네인 것 같습니다.
@@samurairomance
세고돈 너무 보고싶은데 자막과 영삼보는법을 아시면 제발 꼭 가르쳐주세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무라이로망스님 께서 꼭 가고시마에 방문해보셨음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성터도 그렇고 사쿠라지마도 볼만하며, 유신고향관도 의외로 알차게 되어있거든요
사츠마는 2주 짜리 코스 정도 되야할텐데요.카고시마와 미야자키 일부, 타네가시마와 아마미 오오시마까지...쭈욱 돌고 싶습니다.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조정의 손에 죽어 정한론에 불을 지피려는 생각까지 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다운 생각이라는 감상이 드는 사건이군요;;
정말 어지간한 인물이지요. 초상화 속의 사이고 라면 그 정도 뚝심은 있어보이는 얼굴입니다만... 실제 사이고 알굴이 아닌지라... 실제로는 어떻게 생긴 인물이었을지 정말 궁금힙니다.
이 시절은 유독 혼란의 정도가 심했던듯 하네요.
사이고 활약하던 시대에 시마즈 당주들은 어땠나요? 한발짝 뒤에서 밀어주는 포지션?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사이고를 근처에 두고 잘 활용했지만, 나리아키라가 급사한 후 집권한 시마즈 히사미츠에게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마미 오오시마로 유배를 다녀오기도 했지요.
검술만 봐도 사츠마지겐류 유명하죠 곤도이사미가 이런말 했죠 사츠마무사 첫일격은 무조건 피해라
막아도 이마에 칼박혀 죽는경우가 많타죠
괴성을 지르며 내리꽂는 일격
나중에 아이즈번의 백호대 이야기나 보신전쟁 마지막인 하코다테 결전 이야기 등등 다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ㅠㅠ 영상 잘 보고 갑니다.
결국엔 토바/후시미 전투가 다카모리의 도발에 일어난 구막부 사무라이와 사츠마번 병사들의 무력충돌로 일어난 것이었군요.
상당히 치밀한 전력이네요 거진 200여명이나 고용하여 에도 시내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면 ㄷㄷ;
이런 요청이 있을 때 마다 좀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내용일 것이라 어떤 부분에 촛점을 맞춰야 할지가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인 듯 합니다.제 영상 대부분이 일반적인 일본 역사의 흐름을 다루지는 않거든요.
글로 설명하기 좀 애매한데... 뭔가 여러 스토리를 수평으로 꿰어서 들어올리는 듯한 내용을 담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합니다.
저는 연구자가 아니라, 연구자들의 결과물을 읽는 입장이기에 이런형태라도 고민하지 않으면 그냥 너무 평범한 내용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백호대도 제 입장에서는 영상으로 만들기에 수평으로 엮을 스토리가 좀 부족합니다. 제가 관련 지식이 깊지 못하다는 이야기지요. 관점이 확대될 때, 그 내용을 가지고 꼭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samurairomance 그렇게 느끼셨다면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흥미 있고 사료 깊은 정보를 영상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제가 로망스님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항상 재밌게 시청하고 있으니 유익한 영상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앗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어떤 요청이 있을 때, 상대방이 어느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 하기 때문에 기준점을 잡기 어렵다는 것과 제가 지식이 부족한 경우 그냥 인터냇 뒤진 내용을 떠드는 것 밖에 안되는 것이라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 고민된다 정도 입니다.
하코다테는 이야기 해 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코다테에는 직접 다녀오기도 했었고요. 하코다테 이야기 먼저 함 가보도록 할게요 !!
@@samurairomance 아앗.. 저도 관련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라서; 다만 전쟁사를 공부하는 걸 취미로 사전이나 다큐를 보는걸 즐겨하는 평범한 청년입니다ㅠ 백호대에 대한 것은 일본에서 제작한 영화 '백호대'를 보고 실제로는 어떤 조직이었고 현재에는 어떤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남아있는지 등이 궁금했습니다. 아이즈번 전투에서 사무라이들 처럼 자결로 모두 죽었다고 하던데, 왜 다른 막부파들 처럼 훗카이도로 가서 항전하지 못했을까 등등 사소한 궁금증도 있었구요 ㅠㅠ
@@wjdqhrlwl 저는 지나가다 본거 같은데 막부가 전쟁에서 졌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위해 자결했다는데...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사무라이들이 나오는 매체를 보다보면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무사들이 결투를 할 때에 갑옷이나 조총 등의 병장기로 무장을 했다면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텐데, 대부분 평상복에 검 하나를 들고 결투에 임하는 장면을 자주 보곤 했습니다. 이렇게 무사들이 요로이를 착용하지 않고 결투에 임한 것이 매체에서 나온 표현인가요 아니면 실제로도 어떤 이유가 있어 그렇게 한 것인가요?
일단 결투 같은 일이 많이 발생하지는 않았고요. 카부토 요로이를 입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에 임할 때 하는 행위로 에도시대에는 카부토 요로이를 팔아버리고 보관함에 비슷한 무게의 돌을 넣어 둔 무사도 있었습니다.
착용법을 모르는 사무라이들도 존재했고요. 전쟁이 없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타시아이(果たし会い)로 불리우는 결투에 있어서는 히타이아테(額当て)로 불리우는 머리 방어용 띠 정도만 두르고 싸움에 임하곤 했습니다.
@@samurairomance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궁금한 내용이었는데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어차피 결투에 지면 살더라도 할복 강요를 받을 테니 그냥 깔끔하게 칼 맞고 죽는게 나아서 그런거 아닐까요
메이지 유신에 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음모론 같은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관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양이의 초기에 막부측은 프랑스, 삿초측은 영국측의 지원을 받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쨋든 결국엔 유신의 결과로 주요 관직은 삿초에서 차지하게 되었는데 사이고는 왜 정한론 이후 왜 그토록 몰락했을까요?
'나는듯이' 등에서는 사이고를 상당히 현자로, 그리고 정한론의 시각을 상당히 대의적인 관점(러시아 견제)으로만 해석하더라구요.
물론 미국/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개화 시킨 것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진 음모론 같은 진실(?)이죠
그러나 메이지에 이은 새로운 전쟁은 그런 대의명분(그것도 사츠마만 해당되는 명분)보다 중요한게 물자, 그보다는 돈이라고 보는데요.
당시 일본의 전쟁 물자 등은 외국 특히 영국에 상당히 의존했는걸로 알고 있는데 조슈에서 왜 세이난 전쟁까지 굳이 흐름을 이어갔을까요?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막부 할복 조건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존속을 구제하기까지에 외국의 입김이 상당한걸로 알고 있는데
세이난전쟁도 억지로 일으킨 전쟁같은 느낌이 상당히 강한것 같습니다.
삿초의 내분으로 사츠마세력의 몰락이 외국의 공작 결과로 보시는지요?
이 부분은 제가 깊이 있게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전제해 두고요. 영국의 Great Game 과정에서 부동항을 찾아 남아하는 러시아를 틀어 막고자 영국이 일본을 선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즉,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면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눈에 보이는 어떤 이익이 있어야 겠지요.
일단은 쵸슈와 사츠마가 갈등을 일으켜 사츠마 세력이 몰락한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권력갈등의 시작을 살펴 보면, 이와쿠라사절단으로 사츠마의 오오쿠보, 쵸슈의 키도, 이토 등이 미국, 유럽을 다녀 다녀오는 기간동안 메이지 신정부는 사츠마의 사이고가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사츠마, 쵸슈의 파벌을 유지하지 않고, 토사, 히젠 출신의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는 것입니다.
돌아와보니 권력구조가 복잡해진 상태였던 것이지요. 특히, 히젠출신의 "에토 신페이"가 주역이 되어있는 점이 오오쿠보의 눈에 가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이고의 정한론에 찬성하는 에토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을 얻기위해 정한론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쵸슈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카오루에게 "오직(汚職)" 혐의를 씌워 일시적이나마 실각 시킨 것도 바로 에토 였습니다.
어쨌든, 정한론이 막판에 오오쿠보의 사주로 인하여 좌절되자 사이고는 사직하고 카고시마로 낙향하게 되지요. 이 때 사이고를 따르는 600여 명의 관료가 함께 사직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인원이지요. 이 1차 권력구조의 개편에 외세의 개입여지는 아무리 봐도 없어 보입니다. 쵸슈와 갈등구조도 아닌 것으로 보이고요. (이 부분은 제가 지식이 짧아서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츠마의 오오쿠보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지요.
이 때, 낙향한 인물들이 불만이 극에달한 사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요. 에토가 중심이되어 발생한 "사가의 난"이 있었고, "신푸렌의 난" 등이 유명합니다. 모두 진압되고 말지요.
그리고, 세이난 전쟁이 발발합니다. 반란세력의 규모가 꽤 컸지만, 사이고 군대의 무장상태는 별볼일 없었습니다.
외세가 신정부에 무기를 공급할 개연성 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무장상태 때문에 신정부가 고전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 전쟁 발발에 외세의 개연성을 찾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억지로 일어난 전쟁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고향에 내려가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려했으나, 사이고 정도 되는 인물이 하야하고 내려왔으니 불만세력은 "사이고의 불만"을 활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이고 정도 되는 인물이 전쟁을 통해 신정부를 이길 수 있다라는 판단을 했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불만사족계급이 제어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고 결국 폭빌하게 된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사이고가 취할 행동은 그 세력의 리더가 되는 것 밖에 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사이고와 "라스트 사무라이" 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새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요.
사츠마의 오오쿠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살당합니다만, 이시카와현 출신 사족들의 소행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암살 사건을 쵸슈 파벌이 사주했다고는 못들어 봤습니다.(몰라서 못들어 봤을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메이지 초기는 사츠마, 중기는 쵸슈가 권력의 중점에 서 있었습니다만, 과정을 보면 사츠마 쵸슈의 갈등 구조가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외세 개입 여지가 있었는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네요.
메이지 초기에 사츠마가 주도권을 잡은 이유 증 하나로, 메이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쵸슈 번의 인재가 많이 죽었던 것도 원인으로 들 수 있겠습니다. 중간 계층에 많이 포진해 있던 쵸슈 번 인재들이 사츠마 번 주요 세력 몰락과 더불어 한 박자 늦게 두각을 나타낸 것이지요.
장황한 내용 답변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사무라이 로망스 성의있는 답변에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이고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보면, 어느시점에서 과한 감이 드러난다고 봤습니다.
낙향한 사이고를 억지로 전쟁판에 불러일으킨 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누군가에게 죽어야만 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사이고도 전쟁과 전략에 뛰어난 인물로 파악되었기에 결과가 뻔한 무리한 전쟁을 한것도 결과를 스스로 받아드린감도 있고요.
막말 유신사는 정말 재미있네요. 특히 이런 이야기엔 음모론도 다양하니 그만큼 다양한 해석을 보고 듣는것만으로도 시야가 트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시 한번 친절하게 알려주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
사이고 타카모리를 끝없는 영웅으로 추대하는 음모론 중 하나가, 마지막 불만세력 사족을 싹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함께 일망타진 당하는 것으로 새 시대를 열도록 해주는 것이 의도된 사이고의 마지막 임무였다는 건데요.
말씀하신대로 사이고의 반란과 세이난 전쟁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보니까 이런 음모론도 나오나 봅니다.
사무라이 로망스 말씀하신 내용은 들었지만 말씀하신대로 너무 우상화 된 음모론 아닌가 합니다.
사이고 타카모리 역시 메이지유신의 영웅이며 사무라이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이기에 더 우상화 된 듯합니다.
단순 뇌피셜입니다만, 사이고의 청나라는 물론 개화된 조선과 함께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행동이 실제가 될시에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이 강해지는것을 우려한 열강들의 견제가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러시아 남하견제 하랬디 너네들 한편으로 묶어서 힘쎄지랬냐? 이런 느낌으로요.
거기에 동조하는 세력도 어마어마했고 (사나운 사츠마)메이지유신을 지지한 열강 이외 다른 열강이 사이고에 지원을 한다면 또 다른 골칫덩이가 아니였을까? 란 제 상상입니다 ^^;;하하
수정글: 다시 댓글들을 읽어보고 에토 신페이란 인물에 대해 더 흥미를 갖고 알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런 측면을 생각하셨군요.. 있을 법 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
다만, 러일전쟁을 영국이 지원했고, 이것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가는 절차였고요. 사이고의 이야기는 러일전쟁 이전 이라서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에 대해서 실력을 발휘하기 전이지요.
러시아 견제에 일본이 역량이 되는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조선과 합세하는 것은 오히려 영국이 바라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토 신페이에 대한 오오쿠보의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던 예로... 사가의 난 진압 후, 에토 신페이에게 할복의 기회를 주지 않고 참수한 후 머리를 효수까지 했다는 점도 흥미롭게 볼 포인트입니다.
하지만 10년 후에 자신들이 도발을 당함
감사합니다.
보신전쟁의 내막(?)을 알게 되었네요 ㅎ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세이난 전쟁의 내막도 한번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평소 궁금했던 것이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계를 은퇴하고 사츠마에 돌아와서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런 일도 안일어나고 자신도 천수를 누리며 살았을텐데 왜!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는지 이해가 잘안되더라구요. 물론 사회의 변화로 기존 사무라이들의 실직, 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자신들의 희생에 대한 부당한 대우도 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결국엔 사이고 다카모리가 전쟁 안한다고 했으면 전쟁이 안일어나지도 않았을까...하는게 제 추측입니다.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사이고 타카모리 정도 되는 리더라면,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수 많은 몰락한 사무라이 세력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소 무리한 억측입니다만, 실각 후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고가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마지막 사무라이 잔당 세력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의도된 마지막 역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세이난 전쟁에서는 발도대가 등장하게 되지요. 국민개병제를 유지하기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뇌, 발도대의 등장과 활약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samurairomance 말씀 하신 의도된 마지막 그게 사실이라면 뭐라 말해야할까요..참 말하기 어렵네요.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잊지 않겠다라는 남자들의 결심인지 아니면 판단이 흐려진 것인지...고견 감사합니다. 보신전쟁에서 끝까지 싸웠던 히지카타가 생각이 납니다.
필요한 때 나타나고, 그 역할이 소진되었 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일본 근현대사에는 이러한 장면이 종종 나오는 것 같습니다. 평화로운 에도시대를 통해 자리잡은 무사도라는 유교적 개념이 죽음을 미학적 관점애서 바라보는 독특한 일본인의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네요.
@@samurairomance 죽음이라..미시마 유키오가 죽음에 대해 NHK에서 인터뷰한 영상이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선택적이며 능동적인 죽음을 맞고 싶다고 한 것 같습니다. 하가쿠레도 언급하면서요. 아마 미사마의 생각이 막말 사무라의 생각과 조금은 공통점이 있을듯합니다. 4:27 부터 시작합니다. 언어는 일본어, 자막은 영어입니다.
ruclips.net/video/hLGMm6c_BCA/видео.html
제가 알기론 세이난전쟁은 사이고다카모리가 원하지 않은 상황..
고향에 조용히 머물려고 하였는데
사츠마에서 떠밀려서..
이게 아닌데라는걸 알면서도..나설수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알고 있어요..
료마는 유신디사인가 아님 희대의 장사꾼인가?
사이고 다카모리 저 양반만 없었어도
조슈정벌로 신정부의 싹을 끊을수있지않았을까 싶네요
유신3걸들 중에서 사이고가 가장 중요한 인물 같습니다
정한론자임. 이미 자기가 메이지유신 주역으로 막번체제 해체해놓고 몰락한 사무라이들 규합해서 반란한 것 자체가 정당성이 떨어짐.
주로 초슈번이 호전적이라고 알고있었는데 사츠마도 만만치않았군요ㄷㄷ
그래도 쵸슈가 더 악랄했던 것 같습니다. 이 내용도 조만간 영상으로 올라갈 겁니다.
@@samurairomance 맞습니다. 조선에서 식민지배하던 정치인들 대부분이 초슈였으니까요
쌩양아치네 강도 방화짓을 하면 피해보는건 일반시민인데 차라리 쇼군 암살을 시도하지
못됐다 사츠마번..
감사합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