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상 잘 보았습니다...💘 💝 💖 우리 모두가 싯다르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전엔 그 누구도 알수 없는 얘기죠~ 다만 사람들은 각자의 해석을 할 뿐이구요~ 너무 경전에 집착하지 마세요~ 오히려 깨달음을 막는 존재일수도 있으니... 깨달은 자의 말이 문자로 전해진 것을 그 문자만의 해석으로 깨달은 자의 뜻을 알수는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대화하면서도 상대의 정확한 의미를 모두를 전달 받는게 어려운데 어찌 그걸 직접 가보지 않고 그 말의 뜻을 알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린 그러하다 정도만 알고 수행의 목적을 가지고 수행을 할뿐이고 자신이 터득한 정견의 혜안으로 그 길을 찾아 가야만 할뿐이죠~ 하지만 그길을 모두 다다를수 있는것도 아니죠~ 정견을 갖지 못하면 삿된길로... 지극정성을 갖지 못하면 평생을 하여도 아마도 아무 의미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중생은 그냥 평상심을 갖는것만으로 훌륭하다고 보여집니다~
수행이란 자체도 한번도 해보진 않았는데, 태어나서 부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때(3살쯤 일까) 그때부터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고 무덤에 들어갈까봐 걱정을 많이 했지요(아직 잘 걷지도 못하고 하늘이 그리고 무덤도 모를때인데,,,)어렸을때 부터 신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많이 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이 영상을 보면서 조금씩 깨달아 젔으면 좋겠습니다(저의 최종 목표는 인류가 아직 이루지 못한 부분을 이루는것 입니다)
수행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은 만약 참나가 허상이라면 무아도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무아가 만물의 본성이라면 이 무아를 깨달으려는 불교적 노력도 무의미해집니다. 차라리 도교의 무위자연처럼 그냥 놔두면 저절로 무아가 될 것입니다. 만약 무아가 본성이라면... 그러나 인간은 만물의 근본이 무아이더라도 참나가 있는 것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선 만물을 허무하게 바라보더라도 곧 죽어도 극락 왕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무아는 우리에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무인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다만 무아를 깨달으려는 것은 번뇌의 고통을 무아 속으로 투영하여 번뇌를 없애고 싶은 바람 때문입니다. 이 또한 집착인데 말이지요. 그러므로 무아야말로 번뇌를 떨치기 위한 방편이지 본성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무아이든 공이든 원래 없기에 그 본성도 무의미합니다. 원래 없는데 애초부터 본성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헛깨비일 뿐입니다! 이 헛깨비를 왜 쫓습니까? 무아 사상은 번뇌를 떨치기 위한 방편 이외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염세적이고 허무주의 사상에 빠진 인도와 불교 국가들이 발전이 더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실적 괴로움을 일으키는 낙후된 생활의 고통이 악순환이 되는 현실적 고통이 윤회하는 삶으로부터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타파하려고 문명의 발전만 추구하다보면 한 없이 물질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이 제동이 걸리지 않은 채 스스로를 점령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앙적 대상으로 뭔가 제동을 걸어서 참나를 얻은 것처럼 살고 싶어합니다. 참나(아트만)을 추구하여 우주의 본질(브라흐만)과 일치하려는 노력이 인도적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어떤 추앙하는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추앙하는 대상은 실은 인간이 빚어낸 인간의 피조물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나가 본래 없든 있든 사람들은 참나가 있는 것처럼 믿고 그것을 자아가 체득한 것처럼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나의 투영이 잘못되면 엉뚱한 것에 일생을 낭비하며 평생을 갇혀살게 됩니다. 최소한 참나적 삶을 추구하며 사는게 무아적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현실적 고통을 해결하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무아적 허무주의에서 현실을 등한시 하면 낙후된 삶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기본도 못되는 잘못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염세적이고 탈속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수행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수행입니다. 만약 석가모니의 수행이 원래 이런 것이라면 근본에서 잘못된 깨달음입니다. 어쩌면 부처나 예수 같은 고대 사람들의 사상을 아무런 비판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의 원본은 그대로 보전하되 각 시대의 삶에 어떻게 투영할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교적 맹신은 근본적으로 어리석음의 표현형입니다.
무아를 깨달으려는것은 무의미한 짓이고 참나를 추구하는 것이 자발적인 셀프기만이라면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채로 살아가야겠군요. 멀쩡하게 살 수있다면 그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할까요? 정말 멀쩡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한때 패기만만하게 생각했었지만 끊임없이 그 질문으로 돌아가는것이 인간의 조건 그 자체인것 같아요. 나이가 먹을 수록 생생하게 느껴지는 삶의 생동과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의미에 대한 갈구를 부정하는 것은 추상적사고의 인플레이션이라고 느껴져요. 그냥 인정합니다. 나는 그러한 처지에 처한 그러한 인간이라고.
출생이 선택이라면 인생은 추구하는 것이고 죽음은 진정 원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지 않습니다 댁이 '깨달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시기를 부디 간청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그 깨달음을 취소하게 된다면 '괴로움의 명분이 고통'이라는 이상한 말이 됩니다 왜 고통스럽냐고 물으면 아프다고 하겠고 아픈 이유에 대하여 물으면 병에 걸린 이유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픈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치료의 조건과 병석의 대가를 동일시 하는 미친 의사는 없기 때문이죠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착한 일을 100가지 했더라도 죄는 1가지만 드러나도 범죄자가 되고, 그 죄값 받아야 하는데요. 하지만, 사람은 생각으로, 행동으로, 말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무시하고, 음란하고, 시기 질투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 속이고, 험담하고, 미워하고...등. 매일 수없이 죄를 짓고 살았어요. 수행, 고행하는 과정이라도 죄를 짓고요, 오랜 수행 끝에 결국에는 정말 해탈 했다고 해도, 이미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나도 많아서 죽으면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합니다. 참회를 한다고 끝나는게 아니죠. 참회를 했더라도 지은 죄값은 치뤄야 합니다. 해탈했다고 끝나는게 아니죠. 지은 죄값은 치뤄야 합니다. 범죄자이고 죄인이기 때문이죠. 수없이 범죄한 범죄자가 자신은 해탈했다고 그 죄값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죄값은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범죄자는 재판관이 심판하여 처분을 내립니다. 그런데, 수없이 범죄한 자가 자신은 해탈했다고 재판관이 아닌 자신이 처분을 내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요. 정의가 살아 있다는 말은 죄지은 자들이 결국에 마땅히 그 죄값을 받게 될 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석가모니께서 자신이 지은 죄값을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에 가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도 당연히 죽어서 그 곳에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행위로는 모든 사람은 범죄자들이고 모두 지옥 갈 자들입니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자신이 짓고 있는 수많은 죄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했던 착한 일들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그 어떤 노력, 열심, 선행, 고행으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지은 죄값도 자신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되셨을 겁니다. 정말 깨닳으셨다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발견 했을 것이구요, 자신이 마땅히 영원한 지옥불에 태워져야 할 "악취나는 쓰레기 죄악덩어리" 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패륜아, 대역죄인), 지금까지 수도없이 죄를 지어왔었고, 지금도 죄를 짓고 있고, 앞으로도 죄를 짓습니다. 은혜아니고서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우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죄사함" 아니고서는 내가 구원받을 길이 도저히 없음을 깨닳았을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가시지 마시고 꼭 천국 가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 있을때가 돌이킬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이니 정말로 깊은 고민을 해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원인은 집착 욕심때문입니다 불교의 핵심 은 조건 무아 무상 고 입니다 공사상은 대승들이 가짜로 만든것 뿐입니다 .왜태어냐는냐 ?조건에서 그조건이 욕심 .집착입니다 수행은 복잡하지않습니다 돈욕심때문에 대승불교승들이 공.염불 만들어서 이용할뿐이죠 초기불교 니까야 에 보시면 태어나고죽는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탐진치 욕심집착을 버리라고 합니다 .태어나는 조건이 집착이니 집착을 버리고 운회에서 벗어나라고 설명한듯해요
세존께서 설하신것은 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셨습니다. 인간은 수억겁동안 욕심에 의해 윤회를 끊지 못했고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자는 그 세계의 업력에 얽매입니다. 신도 마찬가지. 중생에 불과합니다. 수행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떠나는가? 같은 형이상학적인 수행을 따르면 안됩니다. 욕심을 끊지못해서 태어난 것이고 내생은 도과를 성취하지 못하면 악도에 떨어집니다. 업에 따라 로또 식입니다. 예류과부터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성자의 반열 예류자,일래자.불한자.아라한 경에는 인간몸 받기를 맹귀우목이라 설합니다. 공부가 많이되시고 신통있으신 수행자 분들은 인간몸 받기가 어려운것을 아실것 입니다. 또한 신통과 해탈은 연관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신,염불,만트라 해몽,관상.등을 금하셨습니다. 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아 해탈하여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수행자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수행도 알고보면 몸과 마음 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삶이 괴로우니 수행을 하는 것이지요. 대승경전 이전에 초기불교가 있었습니다. 니까야가 진리입니다. 니까야를 보세요. 오직 세간법이 아닌 출세간법을 닦아야 합니다. 세간의 도는 신통기복, 미신 등을 쫒으며 삿된 마도를 닦는자들이 가득함. 신통같은게 수행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 견성후 안의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됩니다. 수행이 막히는 이유는 마장(악마)때문 입니다. 탐욕이 가득하고 청정하지 못한자는 죽었다 깨어도 법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도과를 사칭하거나, 법을 변질시키면 지옥행입니다. 잘못된 설법은 돌이킬 수 없는 죄업이 되기도 합니다. 도과를 사칭하거나, 부처님법을 훼손시키는 이는 하늘에 그 죄가 울려퍼집니다. 이러한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동방불패] 인생은 고통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전부이며, 행복이란 전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의 시간이 잠시 주춤할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합니다. 수행자는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을때, 비로소 참된 깨달음을 얻을수 있습니다. 즉, 깨달음 역시 어느순간 우연히 얻어지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노마디언님. 수행이란 '나'의 문제를 푸는 것이고, '나'의 문제를 풀려면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존재'를 알려면 그 시작점인 '제1원인'을 알아야 하고요. 따라서 수행이란 ['제1원인'을 풀어 '존재(실존)'를 알고, 이로써 '나'의 문제를 푸는 행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제1원인'을 풀려면 有, 無, 空을 가지고 가장 단순한 구조를 찾으면 되고요. 사실 [단예소피아]의 모든 영상은 지금 말씀드린 내용만 반복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분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네요. ^^
@@danyesophia 이렇게 명쾌하게 답을 주시는데도 문제만 내고 답을 안준다는 분들이 간혹 보여서 안타깝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영상이지만 시청할 때마다 새롭고 다시 배우게 돼서 좋습니다. 소피아님의 여러 구독님들에 대한 반야의 보시와 지혜 주심에 아낌없는 감사와 응원 보냅니다^^
있다하는 것도 나이고 없다하는 것도 나인데 이 때의 나를 있다해도 이상하고 없다해도 이상함. 나는 유무에 한정을 받는 존재가 아닌 것 같음. 그림자는 있다해도 이상하고 없다해도 이상함. 그림자라고 해도 이상하고 그림자가 아니라고 해도 이상함. (그림자=공=보편자=추상명사=정신) 물은 있다해도 이상하고 없다해도 이상함. 물이라고 해도 이상하고 물이 아니라고 해도 이상함. (물=공=보편자=추상명사=정신). 나에게는 그림자도 있고 물도 있고 불도 있고 바람도 있고 산도 있고 구름도 있고 길도 있고 별도 있음. 똑같은 공이 현상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남 나는 눈 앞 세계에 이미 개입이 되어 있음
단예소피아 추천채널
[아리수가 유튜브] ruclips.net/channel/UCzkTlLKcQ6m6vhTWN8malCQ
[아리수가 공식블로그] blog.naver.com/arisuga2021/222586795422
일요일에도 영상 업로드 감사드립니다^^
정말 궁금했던 부분을 풀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굿!!!
좋은 영상 잘 보았습니다...💘 💝 💖
우리 모두가 싯다르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전엔 그 누구도 알수 없는 얘기죠~
다만 사람들은 각자의 해석을 할 뿐이구요~
너무 경전에 집착하지 마세요~ 오히려 깨달음을 막는 존재일수도 있으니...
깨달은 자의 말이 문자로 전해진 것을
그 문자만의 해석으로 깨달은 자의 뜻을 알수는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대화하면서도 상대의 정확한 의미를 모두를 전달 받는게 어려운데
어찌 그걸 직접 가보지 않고 그 말의 뜻을 알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린 그러하다 정도만 알고 수행의 목적을 가지고 수행을 할뿐이고
자신이 터득한 정견의 혜안으로 그 길을 찾아 가야만 할뿐이죠~
하지만 그길을 모두 다다를수 있는것도 아니죠~
정견을 갖지 못하면 삿된길로...
지극정성을 갖지 못하면 평생을 하여도
아마도 아무 의미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중생은 그냥 평상심을 갖는것만으로 훌륭하다고 보여집니다~
경전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게 맟습니다
맞습니다
그곳에 들지 않고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공 속에서 `나`라는 것도 놔버리면 알 수 있는 것을
1+1=2 도 되고 3도 되고 + 알파도 되는 것이지요
수행이란 자체도 한번도 해보진 않았는데, 태어나서 부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때(3살쯤 일까) 그때부터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고 무덤에 들어갈까봐 걱정을 많이 했지요(아직 잘 걷지도 못하고 하늘이 그리고 무덤도 모를때인데,,,)어렸을때 부터 신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많이 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이 영상을 보면서 조금씩 깨달아 젔으면 좋겠습니다(저의 최종 목표는 인류가 아직 이루지 못한 부분을 이루는것 입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수행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은 만약 참나가 허상이라면 무아도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무아가 만물의 본성이라면 이 무아를 깨달으려는 불교적 노력도 무의미해집니다. 차라리 도교의 무위자연처럼 그냥 놔두면 저절로 무아가 될 것입니다. 만약 무아가 본성이라면...
그러나 인간은 만물의 근본이 무아이더라도 참나가 있는 것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선 만물을 허무하게 바라보더라도 곧 죽어도 극락 왕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무아는 우리에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무인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다만 무아를 깨달으려는 것은 번뇌의 고통을 무아 속으로 투영하여 번뇌를 없애고 싶은 바람 때문입니다.
이 또한 집착인데 말이지요.
그러므로 무아야말로 번뇌를 떨치기 위한 방편이지 본성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무아이든 공이든 원래 없기에 그 본성도 무의미합니다.
원래 없는데 애초부터 본성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헛깨비일 뿐입니다!
이 헛깨비를 왜 쫓습니까?
무아 사상은 번뇌를 떨치기 위한 방편 이외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염세적이고 허무주의 사상에 빠진 인도와 불교 국가들이 발전이 더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실적 괴로움을 일으키는 낙후된 생활의 고통이 악순환이 되는 현실적 고통이 윤회하는 삶으로부터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타파하려고 문명의 발전만 추구하다보면 한 없이 물질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이 제동이 걸리지 않은 채 스스로를 점령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앙적 대상으로 뭔가 제동을 걸어서 참나를 얻은 것처럼 살고 싶어합니다.
참나(아트만)을 추구하여 우주의 본질(브라흐만)과 일치하려는 노력이 인도적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어떤 추앙하는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추앙하는 대상은 실은 인간이 빚어낸 인간의 피조물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나가 본래 없든 있든 사람들은 참나가 있는 것처럼 믿고 그것을 자아가 체득한 것처럼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나의 투영이 잘못되면 엉뚱한 것에 일생을 낭비하며 평생을 갇혀살게 됩니다.
최소한 참나적 삶을 추구하며 사는게 무아적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현실적 고통을 해결하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무아적 허무주의에서 현실을 등한시 하면 낙후된 삶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기본도 못되는 잘못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염세적이고 탈속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수행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수행입니다.
만약 석가모니의 수행이 원래 이런 것이라면 근본에서 잘못된 깨달음입니다.
어쩌면 부처나 예수 같은 고대 사람들의 사상을 아무런 비판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의 원본은 그대로 보전하되 각 시대의 삶에 어떻게 투영할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교적 맹신은 근본적으로 어리석음의 표현형입니다.
무아를 깨달으려는것은 무의미한 짓이고 참나를 추구하는 것이 자발적인 셀프기만이라면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채로 살아가야겠군요. 멀쩡하게 살 수있다면 그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할까요? 정말 멀쩡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한때 패기만만하게 생각했었지만 끊임없이 그 질문으로 돌아가는것이 인간의 조건 그 자체인것 같아요. 나이가 먹을 수록 생생하게 느껴지는 삶의 생동과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의미에 대한 갈구를 부정하는 것은 추상적사고의 인플레이션이라고 느껴져요. 그냥 인정합니다. 나는 그러한 처지에 처한 그러한 인간이라고.
멋진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영상도 정말 재밌고 흥미로웠어요~
1원인이 궁금하네요 ㅎㅎ
안녕하세요
너는 나다. 좋네요
제1원인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들어 보셨으면 알려주실수 있나요?
제1원인을 화두 삼아 얻어지는건 미치거나 모든걸 내려 놓게 되거나..그냥 그 어떤차원의 누구도 모른다가 제일 모순이 덜한것 아닐까 합니다.
본질, 바탕,근원,법성,불성...이것을 가리키는 수 많은 방편의 말들과 제1원인이 다른것 같진 않은데 굳이 제1원인이란 말이 필요한지 모르겠네요.
출생이 선택이라면 인생은 추구하는 것이고 죽음은 진정 원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지 않습니다
댁이 '깨달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시기를 부디 간청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그 깨달음을 취소하게 된다면 '괴로움의 명분이 고통'이라는 이상한 말이 됩니다
왜 고통스럽냐고 물으면 아프다고 하겠고
아픈 이유에 대하여 물으면 병에 걸린 이유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픈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치료의 조건과 병석의 대가를 동일시 하는 미친 의사는 없기 때문이죠
결국은 정답이없네요~~~
또다시~~~
나의삶으로~~
카르마로고뇌~~~
일단모든분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착한 일을 100가지 했더라도
죄는 1가지만 드러나도
범죄자가 되고, 그 죄값 받아야 하는데요.
하지만, 사람은 생각으로, 행동으로, 말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무시하고,
음란하고, 시기 질투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 속이고, 험담하고, 미워하고...등.
매일 수없이 죄를 짓고 살았어요.
수행, 고행하는 과정이라도
죄를 짓고요,
오랜 수행 끝에 결국에는
정말 해탈 했다고 해도,
이미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나도 많아서 죽으면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합니다.
참회를 한다고 끝나는게 아니죠.
참회를 했더라도 지은 죄값은 치뤄야 합니다.
해탈했다고 끝나는게 아니죠.
지은 죄값은 치뤄야 합니다.
범죄자이고 죄인이기 때문이죠.
수없이 범죄한 범죄자가
자신은 해탈했다고 그 죄값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죄값은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범죄자는 재판관이 심판하여 처분을 내립니다.
그런데, 수없이 범죄한 자가
자신은 해탈했다고 재판관이 아닌 자신이 처분을 내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요.
정의가 살아 있다는 말은
죄지은 자들이 결국에 마땅히 그 죄값을 받게 될 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석가모니께서
자신이 지은 죄값을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에 가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도
당연히 죽어서 그 곳에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행위로는 모든 사람은 범죄자들이고
모두 지옥 갈 자들입니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자신이 짓고 있는 수많은 죄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했던 착한 일들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그 어떤 노력, 열심, 선행, 고행으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지은 죄값도 자신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되셨을 겁니다.
정말 깨닳으셨다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발견 했을 것이구요,
자신이 마땅히 영원한 지옥불에 태워져야 할 "악취나는 쓰레기 죄악덩어리" 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패륜아, 대역죄인),
지금까지 수도없이 죄를 지어왔었고, 지금도 죄를 짓고 있고, 앞으로도 죄를 짓습니다.
은혜아니고서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우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죄사함" 아니고서는 내가 구원받을 길이 도저히 없음을 깨닳았을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가시지 마시고
꼭 천국 가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 있을때가 돌이킬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이니 정말로 깊은 고민을 해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도 영상감사합니다 ❤❤
무었을 깨닳는것인지 깨닳으면 무엇이좋은지 알고싶읖니다
고마워 욥~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위,하늘아래 오직☝
나 만이 홀로 존재한多
나는 당신입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
모든 경우의 수를 벗어난 거기에 있다. 있다고 하니 또 있는 것으로 믿겠구나.
거기라하니 또 거기가 어떤 곳으로 알겠구나...
그래서 제1원인이 머에요?
여기는 답글을 안달아주나요?
태클이 아니고,
정말로 제1원인이 무얼 말하는건지 궁금합니다.
제1원인을 깨달으란 말인지,
제1원인이라는게 있는데
그 제1원인으로 깨달으란 말인지
그렇다면 제1원인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야단법석-i6s 승려들은 한 평생 수행하는데 단번에 얻으려고 하지마시구요
이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고
잘 모르시겠으면 다른영상도 보시길
불교는 괴로움의 소멸인데 그 어떤형태로든 무언가 있다라고 한다면 괴로운것 입니다.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면 괴로울것이 없는것이고 집착할 필요도 없는것 임
괴로움 은 어디서 오느냐?
태어나기때문입니다
태어나는 조건은? 욕심.집착이라는거죠
부처님 께서는 탐진치를 버리라 햇어요
죽고 다시태어나는 고통을 끊어실려고 수행을 하셧지요
아무것도 업다면 수행 은 왜하며 왜사나요? 삼라만상 실상을 있는그대로보면서 깨우쳐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의미를 모르는 이가
생각으로는 갈 데까지 갔구나.
그런데 생각이 마침내 끊어지면
그 주체라 할 수 있는 것은
대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논리가 아니라 경험일 뿐이다~
없다 하면 이글을 보는 그것이 분명히 이글을 보고있고
있다 하면 항상 변하는 것인대 있다고 말 못하고~~
이렇게 질문해본다. '그대가 태어나기전에 그대는 어디 있었는가?'
꿈꾸시네...라고 느꼈습니다...이 채널이 이야기 할수록
🙏
차원 상승을 하지 않으면 모든게 무의미한가?!
감사합니다
금강경 제17분 구경무아 (궁극에 이르면 나는 없다) 금강경 공부중에 연결해서 봄ㆍ이 영상 올려주심에 감사합장 _()_
부처님의 진실됀 법문 경전은 초기불교 니까야 를 보셔요 세월이 흐르면서 대승불교 경전들은 사람들이 만든거라
옆길러 샛습니다 .반야심경.금강경 등등 만든거라 진실이 없어요
@@이정숙-b7k7t 앗! 감사합장_()_
한편 있다 없다의 구별은 언뜻 유무의 이원적 사고에 바탕한 평가라고 들립니다 제1원인으로의 문제 전환은 이원적 사고를 지적하는 인식론적인 내용을 다시 세상의 구조에 대한 존재론적인 내용으로 치환하는거으로 보입니다만
부처님도 깨닫고 나서 이건 아무나 할수없다고 설법을 안하실라고 하셨다는데... 지금까지도 그깨닮을을 채득한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
이런게 의미가있을까요 이런건 수행이 높으신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현실적인 수행을 알려주심이...
초기불교 니까야 에 보면 마라빠피만 군대를 무리치고 사차원 세계를 보시고 수행에 한단계 더 올라가셔죠
지금 대승불교경전들은 엉터리라는거죠
인위적으로 만든거죠 .
부처님께서는 사후세겨등 만은 차원들을 보시고 일반사람들이 절대 이해못하기에 그리 하신듯 합니다만
제1원인은 창조자체 ,일종의 원시적 생각에너지가 아닐까요.. 그냥 ㅎ ㅎ
나가 있는 이유는 나가 있기를 희망했기에 존재합니다
실체도 있고 생각도 있는데
무아를 글로 표현했다면 거짓이 되겠지요
유든 무든 공이든 내려놓고
제1원인을 찾으면 나의 삶이 저절로 풀리겠지요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있는 환상에서 벗어 날 수 있을겁니다^^
원인은 집착 욕심때문입니다
불교의 핵심 은 조건 무아 무상 고 입니다
공사상은 대승들이 가짜로 만든것 뿐입니다 .왜태어냐는냐 ?조건에서
그조건이 욕심 .집착입니다
수행은 복잡하지않습니다
돈욕심때문에 대승불교승들이 공.염불 만들어서 이용할뿐이죠 초기불교 니까야 에 보시면 태어나고죽는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탐진치 욕심집착을 버리라고 합니다 .태어나는 조건이 집착이니 집착을 버리고 운회에서 벗어나라고 설명한듯해요
@@이정숙-b7k7t
글을 적고 있는 이정숙님은 누구시고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시나요?
@@perfection-mk4wz 저도 이제 갓 불교 에 관심 이 있어서 공부중입니다. 너무나 방대 해서 초기불교 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이구요 .아직 아기수준입니다
세존께서 설하신것은
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셨습니다.
인간은
수억겁동안 욕심에 의해 윤회를
끊지 못했고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자는 그 세계의 업력에
얽매입니다.
신도 마찬가지. 중생에 불과합니다.
수행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떠나는가?
같은 형이상학적인 수행을 따르면
안됩니다.
욕심을 끊지못해서 태어난
것이고
내생은 도과를 성취하지 못하면
악도에 떨어집니다.
업에 따라 로또 식입니다.
예류과부터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성자의 반열
예류자,일래자.불한자.아라한
경에는 인간몸 받기를 맹귀우목이라
설합니다.
공부가 많이되시고 신통있으신 수행자 분들은 인간몸 받기가 어려운것을
아실것 입니다.
또한 신통과 해탈은 연관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신,염불,만트라
해몽,관상.등을 금하셨습니다.
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아
해탈하여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수행자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수행도 알고보면 몸과 마음 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삶이 괴로우니 수행을 하는 것이지요.
대승경전 이전에 초기불교가 있었습니다.
니까야가 진리입니다. 니까야를 보세요.
오직 세간법이 아닌 출세간법을
닦아야 합니다. 세간의 도는
신통기복, 미신 등을 쫒으며
삿된 마도를 닦는자들이 가득함.
신통같은게 수행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
견성후
안의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됩니다.
수행이 막히는 이유는
마장(악마)때문 입니다.
탐욕이 가득하고 청정하지 못한자는
죽었다 깨어도 법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도과를 사칭하거나,
법을 변질시키면 지옥행입니다.
잘못된 설법은 돌이킬 수 없는
죄업이 되기도 합니다.
도과를 사칭하거나, 부처님법을
훼손시키는 이는
하늘에 그 죄가 울려퍼집니다.
이러한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태나-m8w 자세히 완벽하게 답변 해주신 테나님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제1원인 화두를 잡기
그냥살어 밥 잘먹고 똥 잘싸고 여유가 되면 이웃 도와주고 하면돼야
저는 원인이 조건이라고 봅니다
태어나는 조건이 집착 욕심 이니깐요
다시 태어나지 안으므로써 윤회에 들지 않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길 밖에 없으니까 요 .그래서 조건 무아 무상 고 가불교의 정수라고 봐야해요
8053님 반갑습니다.^^
@@태나-m8w 헉 테나님 방가 방가^^
@수반바닥데드라메시 태어나는 조건이 없다니요. 중생은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태어납니다. 12연기.. 그럼 영혼이 모태에 드는이유는 무엇이죠?
@수반바닥데드라메시 부처님 께서는 내가 원해서 집착.욕심때문에 태어난다 햇습니다 .태어나고 고통받고 죽고 .그러면 스스로 만든것 아닐런지요
[동방불패]
인생은 고통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전부이며, 행복이란 전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의 시간이 잠시 주춤할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합니다.
수행자는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을때, 비로소 참된 깨달음을 얻을수 있습니다.
즉, 깨달음 역시 어느순간 우연히 얻어지는 것입니다.
구천을 떠돈다는 귀신은
왜 그리 떠돌까요?
언제쯤 떠돌기를 멈출까요?
제 1원인은 나 입니다
유무와 공을 화두로 삼아 제1원인을 깨달야 하는데 이는 결국 참나 단계에서 한 차원을 높이지 않으면 제자리에서 제꼬리를 물고 돌고도는 형국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거늘... 오늘 영상으로 참나니 무아니 공이니 끊이질 않는 논쟁이 종식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안녕하세요. 노마디언님.
수행이란 '나'의 문제를 푸는 것이고, '나'의 문제를 풀려면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존재'를 알려면 그 시작점인 '제1원인'을 알아야 하고요. 따라서 수행이란 ['제1원인'을 풀어 '존재(실존)'를 알고, 이로써 '나'의 문제를 푸는 행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제1원인'을 풀려면 有, 無, 空을 가지고 가장 단순한 구조를 찾으면 되고요. 사실 [단예소피아]의 모든 영상은 지금 말씀드린 내용만 반복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분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네요. ^^
@@danyesophia 이렇게 명쾌하게 답을 주시는데도 문제만 내고 답을 안준다는 분들이 간혹 보여서 안타깝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영상이지만 시청할 때마다 새롭고 다시 배우게 돼서 좋습니다.
소피아님의 여러 구독님들에 대한 반야의 보시와 지혜 주심에 아낌없는 감사와 응원 보냅니다^^
참나 . 공 은 진실이 아닙니다
불교의 핵심은 조건 무아 무상 고 라고 해야돼지안나 합니다만
중도 = 1원인 ?? ....... ^ㅣ^
아 ㅡㅡ 왜 제1원인을 풀라는지 이제 조금은 알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힌트들을 수없이 주는데 중생들은 딴 소리들만 하고 있구나
혼자의나는 있지만 공동체의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인생무상.함
간사람은 있어도
어떻게갈것인가는 말로 표현하는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요
있다하는 것도 나이고 없다하는 것도 나인데 이 때의 나를 있다해도 이상하고 없다해도 이상함. 나는 유무에 한정을 받는 존재가 아닌 것 같음.
그림자는 있다해도 이상하고 없다해도 이상함. 그림자라고 해도 이상하고 그림자가 아니라고 해도 이상함.
(그림자=공=보편자=추상명사=정신)
물은 있다해도 이상하고 없다해도 이상함. 물이라고 해도 이상하고 물이 아니라고 해도 이상함.
(물=공=보편자=추상명사=정신).
나에게는 그림자도 있고 물도 있고 불도 있고 바람도 있고 산도 있고 구름도 있고 길도 있고 별도 있음.
똑같은 공이 현상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남
나는 눈 앞 세계에 이미 개입이 되어 있음
여실지견
실상 을 그대로보는것
공사상은 거짓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