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크리스찬(카톨릭)입니다만 평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고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교수님 강의도 많이 잘 듣고 있어요. 사실 신기할것도 없지만 교수님 모든 강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에 대입해서 들어도 거의 틀림이 없는 진리라고 여겨집니다. 큰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예전에 이자랑 교수가 부파는 법에 의해 갈라진 것이 아니라 계율의 차이로 갈라졌다는 논문을 보고 100%동감을 했었는데 ᆢ강교수님이 재삼 말씀하시고 강조하시니 확신이 섭니다. 인도를 여행했던 구법승들의 기록을 보면 소승과 대승 비구들이 한 사찰안에 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도 같이 살 수 있지만 먹고 생활하는게 다르면 절대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전 강성용 교수님 강의 재미있습니다. 맥락이 두서없다는 분도 계시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사심이 없으시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역사속에서 편승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시 무수하게 갈라지고 각 가지에서 꽃이 피여 있는 현재의 모습을 그나마 재미있게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점도 참 배울것도 무지하게 많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줍니다. 여러 넘치는 미디어 속에서 숨겨진 독이 발라진 비수같은 사심에 찔리때마다 강교수님의 강의는 해독제처럼 느껴집니다.
아~ 강성용교수님! 물에 빠진 자에게 하늘의 도를 말한들 뭣하나? 그저 손을 내밀어라~ 백이면 백의 인생의 길이 있는데, 그게 다 하늘의 도~ 그래 이 '도'로 저 '도'를 무시하거나 멸시치 말라~ 참 진리의 말씀입니다. 무아! 이제야 전후좌우가 이해됩니다. 늘 그 진지함과 학구적임과 겸손한 모습에 믿음이 가는, 시대적 학자이십니다.~ 또 기대 만발!!
이바구가 나누기 더하기가 기본이네. 자네 생각은 자네한테 딱맞다고 다른사람에게도 먹힐거라는건 모자라는생각이다. 간단한 예로 자네가 예시로 든 지성드린 할머니 공덕을 손주가 왜 받어 라는말은 죽을 고행으로 진리를 깨우친건 부처인데 아무 고행도 않는 자네가 선지식을 왜 주워 담어 라는소리와 같다.그냥 아닥 허고 지네시게.
어려운 이야기네요. 내가 없다라는 무아라는 삼법인 혹은 사법인 중의 핵심 개념이 어려운 철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집착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한거라는 이야기네요. 나와 나의것이 없으면 집착의 대상이 사러지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있다. 훌륭한 강의 입니다. 내가 아는것 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것은 타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있다는 겸손한 태도. 이게 불교도들의 자세라는 말이네오. 강의 감사합니다.
선생의 통찰이 탁월하십니다!용수의 대지도론에 그런 설명이 나오지요. 삼법인 제행무상은 항상하다는 중생의 집착을 깨기위한 시설물. 일체개고는 즐겁다는 집착을 깨기위한 시설물. 제법무아는 유아라는 고집을 깨기위한 시설물. 이것을 불교용어로 방편설법이라고 합니다. 집착을 깬 마음을 성스러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이 마음에 있다는 맥락과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석가모니가 설파했다는 원형의 불교 모습을 바라보면 지금과 다른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가지 이해관계도 작용을 했을 것이고, 혹은 더 나은 진리를 위함도 있었겠죠. 그럼에도 지금의 것들이 무의미하지 않음과 지금의 것들과의 불일치함에 대해 마음 씀이 불필요함을 아주 완곡하게 돌려 돌려 풀어서 재미있게 설명하시는 그 노련함과 배려심에서 엄청난 내공이 느껴집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러기 위한 가장 기본이 무아이지 않나 싶습니다. 나라는 형식에 얽메이기 보다 변화의 방향성을 인정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슬기로운 삶의 자세이자 교훈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할머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심인당에서 불교를 접하고 친구들과 놀고 설법을 자연스레 많이 들었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들어왔는데 중간 중간에 어려운 말이 많네요 ㅋㅋㅋㅋㅋㅋ😂 하지만 그걸 짐작하시듯 구체적이고 현시대적인 비유들이 많아서 너무 재밌고 어렴풋이 나마 맥락과 의도는 전해집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카르마와 상속세, 100일기도하는 할머니와 수능생의 이야기와 전생의 카르마를 내가 이어받는것 이런 생각은 아마 제가 스스로는 생각을 발전시키기는 어려울거같은데 교수님의 생각의 깊이에 놀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강성용 교수는 경전의 원형(original form)을 찾아가려 애쓰되, 종교가 시대적 상황의 요청과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 테다. 종교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작동할 때 유의미한 것이지, 사회적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종교적 가르침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행간에 숨긴 듯하다. 특히 철학과 졸업생들을 철학관 도사로 오해한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의 운세풀이 요청에, 자신의 친구가 넉살 좋게 운세풀이하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에피소드는 강성용 교수의 강의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본다. 정답과 진실이 때론 오답과 거짓이 되고, 오히려 오답과 거짓이 정답과 진실이 되느냐는 바로 사회적 요청에 대해 적절히 반응했는지로 결정된다는 역설의 미학을 강성용 교수는 담담히 내뱉고 있다. 가끔 강성용 교수의 강연을 듣다 보면, 철학자라기보다는 비교종교학자 내지 종교현상학자다운 풍모를 보인다. 그리스도교에서 다양한 학자들이 비평학 기술을 통해 '역사적 예수' 혹은 '역사적 바울' 찾기에 골몰하고 있으나, 결국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쪽으로 연구를 진행하듯이, 불교의 '역사적 붓다' 찾기도 비슷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강성용 교수가 불교인의 입맛에 맞는 무아 교리 설명 대신에, 열린 해석으로 남겨둔 것은 그래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강성용 교수의 강의를 유튜브로 얼마 전부터 보고 있지만, 참 건강하고 겸허한 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강연 고맙습니다.
교수님 강의가 훌륭합니다. 전 PTS(Pali Text Society, 빨리 성전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이기도 했던 곰브리치 교수도 "빨리어는 절대 붓다가 사용했던 언어가 아니고, 빨리 경전은 절대 붓다의 친설이 아니다."라고 논문에서 밝혔습니다. 남방불교를 믿고 안믿고는 자신의 자유이지만, 현재 테라바다 불교만이 정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와 아집의 주장입니다.
교수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태어나면서 기독교였고 살아오면서 불교 그런데 절에가면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불교라도 교회에 안가고 절 행사에 안갑니다. 아마 저와 같은 심정일 겁니다. 가끔 절에 혼자가서 기도하고 옵니다. 신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그사이 스님도 절의 규범도 그무엇도 없고 오직 불경을 읽고 강의를 듣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지나치게 많이 교육받은 1인이며 치열하게 공부한 1인입니다.
강성용 교수님의 이번 강연에선 단답으로 맺음될 수 있는 정답보다, 오히려 그 답없는 의문을 가지게 된 여정 그 자체가 핵심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진리가 이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면, 5분만에 강연도 끝났을테고 설령 그 내용이 수십여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진들 이후 풍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허나 그 의문을 갖게된 과정 그 자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다양한 방식대로 해석되고 소비되어질 절대반지 같은것이라 본다. 붓다라는 초인은 게임으로 치면 끝판까지 다 깬 능력자이다. 그 게임을 깨고싶은 다른사람들이 붓다를 숭상하면서 배워야 할건, 붓다가 보이는 프로게이머의 현란한 플레이 그 자체가 아니라 미니맵이 어떤지 보스몹이 어떤지 속성이 어떤지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붓다의 플레이에 탐닉하면 개인에게 답이 나올리 없다. 플레이가 아니라 맵을, 아이템을, 보스를 어떤지를 알아야지 똑같이 플레이한다고 깰수있는게 아니다. 제3자로 시청자라면 페이커라면 메시라면 이렇게 플레이 해야지 라는 그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제3자가 아니라 스스로 게임에 뛰어든 플레이어가 된다면 자신은 페이커처럼 메시처럼 바라볼 순 있어도 그렇게 플레이 할 수 없다. 내가 플레이어가 되었을때 중요한건 페이커나 메시의 플레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위기를 판단하는 방법... 옳바른 의문을 갖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옳바른 의문... 저 보스몹을 나는 어떻게 깨야하지... 가 되어야지, 어떻게해야 메시처럼(붓다처럼) 플레이하지...가 아닐것이다.
무상을 직접 체험하여 알지 못하고, 무아를 논하는것은 그어떤 논설이라도 소설과 같습니다. 무상을 아주 또렷하고 분명하고 명료하게 관찰하는 자신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 입니다. 무아는 무상을 넘어 합일 한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만법일여 등등으로 표현 하는것으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43:30 아트만과 무아 1:08:20 무아에 대한 불교 학자의 입장 1:10:00 대승불교의 힌두교적 관점의 근거 1:17:37 인과의 원리가 작동하는 현상계에서는 '나'라는 것이 없지만 '나'라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현상계에서 만들어낸 상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고'와 다름 아니다라는 말이 아닐까요? 현상계와 다른 차원인 절대계에 존재하는 참'나'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나'는 불생불멸의 자리이자, 인과가 끊어진 자리이자, 진공묘유로서 글자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당연히 집착도 있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오직 체험으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상계와 절대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듯하나 아주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5장 불교의 출발 - 누가 듣고자 했는가'에서 언급을 하셨더군요. 우빠니샫 텍스트들에서 보이는 자아(atman)가 브라흐만(brahman)과 일치되는 경지는 외견상으로 보기에 사라진다거나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서 분리된다는 함의가 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근본적인 틀, 즉 시간과 변화의 틀에서 벗어나는 경지로 제시된다. 이 경지가 무엇인지 혹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경지가 실제로 구현된다고 했을 때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 즉 시간과 변화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 Music ] ★반야심경 (Heart Sutra, KOR)★ by Gomdan ruclips.net/video/g4xh9MBT8_8/видео.htmlsi=DN0Yh-8BFz2GlJ_v 1:18:51 자신의 옳음과 타인의 바람에 대한 고찰 1:28:56 아트만의 존재에 대한 문헌학적 근거 1:34:35 인도 출가의 의미와 불교ㆍ유교의 이데올로기 갈등
듣다 보니 에 대한 선생님의 조심스런 태도가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에 대한 오해가 극단적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지는 위험성에 대한 고민이 있으신 게 아닌가 싶어요. 만약 극단적 허무주의로 빠지면 사실 '자이나교도'가 되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일 테니까요. 불교가 고행주의가 아니고, 고통의 소멸을 통해 행복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를 어떻게 설명해 낼 것인지가 선생님의 숙제처럼 보여집니다. 선생님의 통찰처럼, 니까야에 나타나는 내용은 대부분 갈망과 집착을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인식틀이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것을 아예 부정해버리면, 숙고하고 고찰하며 정진하게 만드는 마음작용은 그럼 무엇인가라는 고민. 즉 '사띠'를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생님께 있는 것 같습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전통처럼 그것을 '아트만'이라고 규정하고, 이 '아트만'이 끝없이 윤회한다고 한다고 해 버리면 설명이 간단한데, 불교는 '무아'를 말하면서 윤회를 얘기하니까 설명이 복잡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선생님은 '무아'를 인정하고, '윤회'를 부정해버리든지, '무아' 대신 '아트만'을 인정하고 '윤회'를 받아들이든지의 양자택일을 고민했던 불교의 많은 이론가들과 대동소이한 것 같습니다. 만약 시원한 답이 있었다면,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겠지요.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영역이기에 수많은 집단지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저는 이론으로는 결코 진실과 만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론은 수행과 만날 때 비로소 그 신비한 비밀을 드러낸다고 믿습니다. 정직하고 겸손하신 선생님께서 수행을 통해 이론의 깊이가 더 깊어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user-mm1zy3bs7k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어리석은 상태에서 하는 수행은 겉보기엔 훌륭해 보여도, 열매 없는 방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가 가장 강조한 것이 지혜이고, 제대로 깨닫는 것, 즉 정견(바른 견해)을 팔정도의 첫단추로 놓은 것이겠지요. 저는 일반인에게 수행을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강성용 교수애게 권유한 것입니다. 정견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팔정도의 나머지 수행이니까요. 지혜와 자비와 수행은 서로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제가 수행을 통해 세 가지가 상호작용하는 걸 경험했거든요. 물론 제 사견일 수 있습니다. 뜻깊은 하루하루 되시길.
@@김구성 무아와 아트만의 논쟁이 끊임없는 이유가 있었군요. 저는 열반을 등한시 하고 무상 고 무아만 주장하는 자는 반드시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강성용 교수님도 문헌학적 근거를 제시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학문이 아닌 종교적인 체험으로 스스로 찾는 수 밖에요.
무아에 집착하고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특별하다는 분별 상을 지니는 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무아는 아트만(참나)을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오온은 아트만이 아니라고 아트만의 개념을 바로 세우는 과정에 나온 말이죠.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열반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것은 범아일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우파니샤드는 불교를 통해 베단타 철학이 완성되었기에 힌두교 설립의 공적은 브라만교보다 불교가 더 크다고 봅니다.
교수님은 학자이시니 수행보다는 학자의 본분이자 직업인 연구를 더 하시는게 한국불교계와 대중들에게는 더 좋은 일일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런 역사적, 문헌적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결과물들은 오직 학자들만이 오랜 연구와 공부를 통해 밝혀내고 발굴해낼수 있는 것들일테니까요. 이 강의도 교수의 본분으로서 학술적인 내용을 신도들에게 맞춰서 강연해주시는 것이지, 수행자나 승려의 입장에서 하시는건 아니기도 하고요. 학자는 이론을 정립, 재정립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게 본분에 맞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활동도 하신다면야 좋겠지만, 대중과 신도들을 향해 이런 좋은 강연 해주시는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역할을 하고 계시가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네요.
’나‘가 생각하는게 아니라, 생각을 하니 ’나‘가 생긴다. 원래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믿는건 상상이고, 원래 없는 것이 반응하고 판단하는 대상(세상)에 대한 믿음은 모두 환상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는 상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환상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집착.
강성용 교수의 무아론 주장의 장점과 한계를 언급하자면, 일단 장점은, 붓다의 무아 주장은 철학적 의미 부여나 장식들 없이 단지 '자기'와 '자기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본 점은 아주 단순하고 깔끔한 해석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강성용 자신의 주장에 대한 집착마저 내려놓고 있다는 점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불교를 소개하는 많은 사람들이나 불교 사이트들은 대체로 라고 내세우지만 사실 자신의 주장도 틀릴 수 있음을 열어놓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자기 것에 대한 어떤 집착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고, 그럴 경우 이것은 일종의 이율배반이 된다. 또한 강성용 선생도 대승불교 경전에 나오는 불성 사상이 오히려 우파니샤드 힌두 전통에 굉장히 가깝다고 본 점0(1:10:36)도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실제로 인도 유학을 갔던 어느 한 스님도 이미 힌두교 학자들 역시 불성 여래장 불교에 가깝다는 점을 전하기도 했었다. 말미에 인도의 출가 문화가 중국과 한국의 동아시아 출가 문화와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원래 인도의 출가 문화는 동아사이에 만연한 가부장적 가족/조직 집단/공동체 사회의 가부장제 권력 고리를 끊는 기능도 있음을 암시한 점도 특기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는 인도 출가 문화가 아니어서 유가 전통 사회와 어느 정도 타협된 출가 문화라는 점을 암시하는듯 했다. 강성용 교수의 무아론 주장에 대한 한계는(이는 장점과 맞물려 있는 것이지만), 붓다 이후의 2천5백년 불교철학사를 초기 붓다의 통찰에서 보면 매우 부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를 거의 무효화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강성용 선생도 그것이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붓다 이후로 왜 많은 부파불교들이 생겨난 것인지 붓다의 가르침이 왜 자꾸만 여러 철학적 고찰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지점으로 남게된다는 것이다. 강성용 선생은 기존 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는 연기설도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33:34). 이런 점에서 강성용 교수의 인식에는 붓다와 불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언젠가 다른 곳에서 표현하길 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이미 점유하고 있는 대승불교 전통에서 보면 아무래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으로 본다. 즉 단 하나의 불교가 있는 게 아니라< 천개의 불교>, 가 있는 셈이기에 결국 기존 불자들한테는 아예 거부되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혼동스럽게도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용수의 대지도론에 무아는 중생의 유아에 대한 해독제, 무상은 항상에 대한 해독제, 괴로움은 즐거움에 대한 해독제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즉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삼법인 이라는 원리는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고갱이 입니다. 천개 만개 불교라도 삼법인이 없다면 엉터리 가짜 불교인 셈이지요. 통찰력있는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집착은 분별심에서 나오죠, 분별이 쌓이면 사물을 보는 관념이 고정되구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사실 이건 아기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죠. 그렇기에 전 윤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처음부터 아무런 집착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난다면, 그 생명은 삶을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나라는 아트만을 태우는 등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집착이죠. 자아가 없다 =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자아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아트만이 있다라는 것을 알고 인지하는 것은 다른 상황이죠. 삶은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고정된 시공간입니다. 이 고정된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경험하고 나라고 느끼는게 집착이 결국 내것을 만들고 나라는 아트만이 형성되죠. 사람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실제 느끼고 생활하는 거주 반경의 공간만을 인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서는 사고를 하지 않으면 분별심이 깨지지 않고 집착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내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은 감정이 있습니다. 내 것을 빼앗기면 감정이 일어나죠. 특히 소중한 것이라면 말이죠. 소중한 것을 빼앗기거나 잃는 상황에는 육신의 아픔도 있죠. 나의 부모, 자녀의 이별도 마찬가지. 내가 태어나고 병들고 아프고 고통을 느끼는 것 모두 내가 조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응하는 감정도 말이죠. 그 감정의 과정인 생각도 마찬가지. 내가 태어난 이상, 받아들여야 하는 나라는 존재의 시공간 이라는 거죠. 하지만. 내가 내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더 이상 분별하지 않으며 지혜라는 사고를 통해 집착이 사라져 나라는 아트만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요? 나라는 아트만을 태우는 등불, 집착이 꺼진 무아의 상태, 이것을 알게 될 때, 깨달음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번외로 태어났다면 아트만은 존재 할 수 밖에 없으니, 자신의 아트만을 사랑하고 받아 들이고 달래야 합니다. 이는 타인도 마찬가지 그 사람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자아는 동시에 다르게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그 자아를 인지하고 달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애와 연민, 올바르게 보는 것을 행하는 것.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 봅니다.
무상 인과응보 윤회 물질문명 지구 종교와 과학 아전인수 욕망 우상화 몸 건너!!!!!!!!X? 무아 업장소멸 해탈 정신문명 시공 우주와 자연 진공묘유 자신 이뭣고 맘 발견!!!!!!!!X? 열반 천지일월 부모 착하고 바르고 깨끗한 삶 즐거운 행복 오색찬란한 빛 빵상+0-.......
무아란 변하지도 않는 영원한 나가 없다는 말입니다 힌두교가 주장하는 영원하 지배계급로만 존재한다는 그런 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지금의 나는 주위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그런 나에요 그래서 오늘의 나는 과거의 행동으로 먼들어진 나이고 오늘의 행동으로 미래의 나가 만들어진 다는 의미예요 오늘의 나가 만들어져 과정을 설명하는것이 연기법이예요
#헬로붓다TV 에서 #강성용 교수님의 좋은강의 진행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조금 더 다가간 느낌이네요😃 강성용 교수님이 1~2시간이 아니라, 1년 정도 초기불교와 부처님 강의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강의장 커튼이 없애서 부처님의 모습을 불상을 볼수 있게 해주시면 더 좋을거 같아요, 많은 준비해주신 헬로붓다TV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고 소원성취하시며 성불하세요🙏🙏🙏
오늘 하나 건져 가네요 불교 무아론(아트만은 없다)은 집착을 없애는 목적으로 얘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혼의 유무에 대한 얘기인 경우는 극히 적었다 아트만 = 자아 = 의식 환생할 때 가지고 가는 기억은 핵심적인 것들이라 전생의 기억이 없다? 그 말은 본능이나 성품에 반영 된다는 걸로 보이네요 제1집착 : 자신 → 무아론 제2집착 : 소유 → 무소유 소유자가 없는데 소유가 있을 수 없는 것 헌데 이건 삶에 대한 포기와도 비슷해서 자살 비슷한데요? 또한 동양의 기독교와 불교는 오리지날과 다르기 때문에 시비 따지느라 똥고집 부릴 필요가 없다 동양인은 좀 더 현세적이고 집단적이다 사람들이 갈라서는 이유는 이념/철학/종교/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 속의 삶의 스타일/방식/취향 때문이다 기독교의 이단 논쟁이 권력 다툼인 것처럼... 이슬람의 종파(수니/시아) 대결이 권력 다툼인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건 죽어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실 세계 속의 행복이거나 고통이라도 줄여 주는 마취제 그래서 기복 종교가 근본인 것이다 (여기서 종교는 마약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저는 크리스찬(카톨릭)입니다만 평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고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교수님 강의도 많이 잘 듣고 있어요. 사실 신기할것도 없지만 교수님 모든 강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에 대입해서 들어도 거의 틀림이 없는 진리라고 여겨집니다.
큰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가르침을 안다면 아직 모르는 겁니다.
강성용 교수님 덕분에 처음 붓다의
생각을 접해보고 생각해봅니다
이별 헤어짐으로 너무 힘들었는데
집착에 대해 아트만에 대해 이제는
조금은 편하게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교수님,
그 순수함과 진실함,
그 정직하고 용감한 마음의 태도
정말정말 아름답습니다!!!!!!!!^^~~🎉🎉🎉❤❤❤🎉🎉🎉~~
정말 학자로서 참 존경스러운 어른이셔요!!!!!!!!!!👍🏼👍🏼👍🏼💘💘💘👏🏿👏🏿👏🏿🎉🌈🍀🎊🎹🎶🎼🎵🤗😋~~
예전에 이자랑 교수가 부파는 법에 의해 갈라진 것이 아니라 계율의 차이로 갈라졌다는 논문을 보고 100%동감을 했었는데 ᆢ강교수님이 재삼 말씀하시고 강조하시니 확신이 섭니다. 인도를 여행했던 구법승들의 기록을 보면 소승과 대승 비구들이 한 사찰안에 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도 같이 살 수 있지만 먹고 생활하는게 다르면 절대 같이 살 수 없습니다.
강성용교수님... 강의나 글 많이 읽고 보고있는 불자입니다... 늘 학자적 견지에서 해주시는 말씀이 제겐 들었던 많은 큰스님들 법문들과 함께 사고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
모르는 것을 모른다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열린 사고는 이런게 아닐까요?
진정 존경스런 분이시네요
요즘 *낮은 인문학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강의를 깊이있게 하면서도 비유를 쉽게해서 이해가 빠릅니다 .명강의 입니다
교수님~ 지적으로 사랑합니다~.
참 대단하신 학자님이십니다. 삶의 한 부분을 이리도 넓게 보고 풀어 주시니 조금이나마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가 있었고, 좋은 강의를 듣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 강성용 교수님 강의 재미있습니다. 맥락이 두서없다는 분도 계시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사심이 없으시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역사속에서 편승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시 무수하게 갈라지고 각 가지에서 꽃이 피여 있는 현재의 모습을 그나마 재미있게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점도 참 배울것도 무지하게 많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줍니다. 여러 넘치는 미디어 속에서 숨겨진 독이 발라진 비수같은 사심에 찔리때마다 강교수님의 강의는 해독제처럼 느껴집니다.
맞고요 맞읍니다
카르마 업식 업식은 기도로 사라지나요 갓바위에서 할머니가 기도 햇는데 기도 효과는 왜 손자가 가지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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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현-u7v아트만이 있다면 '카르마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는게 말이 안되는 것이다'를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것 같습니다
맥락없는 인간이 ...교수님을...
지혜가 많으셔서 마음속에 쏙쏙 들어옵니다.
어묵 아주머니 이야기에 참 많은걸 배웠습니다.
자기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왜 해로운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00ㆍ
지혜 🙏
교수님에 말씀은 영혼을 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듣는놈없이 듣는다면
내것이요
내식으로 듣는다면 무용지물이라
최고강의
김성철교수님 이후 최고로 좋아하는 강연이 강성용교수님 강연입니다 *^^*
중립적이고 이론적 명쾌함으로 설명을 정말 잘 해주십니다. 어려운 이슈를 애두르지않고 정면돌파해 주셔서 정말 큰 지식을 얻었습니다. 😊
늦었지만 교수님 강의를 들을수있어서..
내가 문제있는건 아니구나
위로가되고
공부를 더해야할 이유를 보게됐습니다
감사 합니다
강성용교수님 감사드립니다❤
현실 불교를 명쾌히 말씀해 주심.
다들 형이상학적 얘기에만 치우치는데 어차피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말이죠,
이게 더 어렵고 이해와 연구가 훨 더되야 가능한 말씀.
강교수님, 진정코 존경스럽습니다. 불자로 70평생을 살면서 배우려 애 썻던 설법공부중... 가장 정확한, 가장 알아 듣기 쉬운, 가장 정직한, 그래서 가장 아룸다운 강의이십니다. 진정코 업이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감사드립니다.
🎉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인식 생각하는 폭이 넓어졌어요 ~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
교수님께 감히 한마디 합니다!
이 양반 물건이네!!😅😅
감사합니다 😊😊
많은것을알고있지만 정말 겸손하신분같습니다.
겸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요즘 찾아보는 명강 의
제대로 법공부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명강의 잘 들었습니다.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유투브에 나온 강의 찾아가며 듣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함께하는 시간안에 지성좌✨️강 성 용✨️ 교수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감동적인 강의입니다.
비로서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Professor. K 최고! 명강의 최고!!
감탄 나와서 여러번 숨이 멎었네요 알게되어서 영광입니다 쭉 틀어놓고 경청해야겠네요
내려놓음. 집착을 버리는 방법 한마디로 정리 됐습니다. 몇년을 고생했는데... 내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핵심적으로 한마디로 정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국 5-6,000만원 주고 교육 참여 할 만하겠네요.
강성용 교수님은 일을 여쭤보면 진법 속에서 일의 위치를 알려주십니다. 교수님 강의는 지식을 아는 재미가 너무 커요!!! 한국에 이런 학자가 계시다는게 전 너무 자랑스러워요!
감사합니다~()
이미 없는 것을 붙잡고 집착한다는 걸 알아차리면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거나 할 필요도 없지요.^^ 허상에 대한 환상은 환상인줄 알면 일시제거..
강의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내용을 예를 들어가며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수님 덕분에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 점에도 감사드립니다.🎉🎉🎉
비교 종교학 잘시청하고 정치 경제등 모든 문화의 심층 해설 감사 드립니다
어묵이야기에서 저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소중한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명강의 이십니다.
우리의 사고라는것이 바로 업력의 작용뿐입니다.
실재의 나의 사고는 아닙니다
무아는 그대로의 보살도입니다
또박 또박 얘기하시는데 간식 먹다 뿜었습니다. 교수님 "출가 근데 몸종이 5이야. 그절은 아무도 못건드려" 저도 학생들 가르치는데 별로 웃긴거 못듣다 교수님 강의는 하나도 안웃긴데 들으면 웃다 뿜어요. 강성용 교수님 천재십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어떤 강의를 찾아 들어도 너무 좋습니다.
강의 들을 수 있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감사합니다😊
진짜 깊은 지식을 연구하신 대 학자이신것 같네요
역시 강성용 석학님!
그 어떤 스님 말씀보다 더 명쾌하십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아~ 강성용교수님! 물에 빠진 자에게 하늘의 도를 말한들 뭣하나? 그저 손을 내밀어라~ 백이면 백의 인생의 길이 있는데, 그게 다 하늘의 도~ 그래 이 '도'로 저 '도'를 무시하거나 멸시치 말라~ 참 진리의 말씀입니다. 무아! 이제야 전후좌우가 이해됩니다. 늘 그 진지함과 학구적임과 겸손한 모습에 믿음이 가는, 시대적 학자이십니다.~ 또 기대 만발!!
34:04 34:04 34:08 34:13 34:35 34:36 34:40 34:41 35:04 35:08 35:11 😊,
헛똑똑이 보이네. 좀 안다는 놈들은 전부 헛소리나 하고 있으니.
이바구가 나누기 더하기가 기본이네. 자네 생각은 자네한테 딱맞다고 다른사람에게도 먹힐거라는건 모자라는생각이다. 간단한 예로 자네가 예시로 든 지성드린 할머니 공덕을 손주가 왜 받어 라는말은 죽을 고행으로 진리를 깨우친건 부처인데 아무 고행도 않는 자네가 선지식을 왜 주워 담어 라는소리와 같다.그냥 아닥 허고 지네시게.
@@나홀로할베 할매랑 손주랑 같다면
할매가 손주를 위해 기도를 왜하냐 ㅋㅋㅋㅋ
둘이 같다면 뭘 할까? 뭘 하겠어?
@@incheolkim4171ㅁ
무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백에 양심 있는 학자를 봅니다.
제 생각에 무아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나라는 착각에 깊고 강하게 휘감겨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무아를 건드리면...
기형적인 한국불교 풍토에서 외톨이가 될 각오를 해야 하기에...
어려운 이야기네요. 내가 없다라는 무아라는 삼법인 혹은 사법인 중의 핵심 개념이 어려운 철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집착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한거라는 이야기네요. 나와 나의것이 없으면 집착의 대상이 사러지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있다. 훌륭한 강의 입니다. 내가 아는것 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것은 타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있다는 겸손한 태도. 이게 불교도들의 자세라는 말이네오. 강의 감사합니다.
선생의 통찰이 탁월하십니다!용수의 대지도론에 그런 설명이 나오지요. 삼법인 제행무상은 항상하다는 중생의 집착을 깨기위한 시설물. 일체개고는 즐겁다는 집착을 깨기위한 시설물. 제법무아는 유아라는 고집을 깨기위한 시설물. 이것을 불교용어로 방편설법이라고 합니다. 집착을 깬 마음을 성스러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이 마음에 있다는 맥락과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석가모니가 설파했다는 원형의 불교 모습을 바라보면 지금과 다른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가지 이해관계도 작용을 했을 것이고, 혹은 더 나은 진리를 위함도 있었겠죠.
그럼에도 지금의 것들이 무의미하지 않음과 지금의 것들과의 불일치함에 대해 마음 씀이 불필요함을 아주 완곡하게 돌려 돌려 풀어서 재미있게 설명하시는 그 노련함과 배려심에서 엄청난 내공이 느껴집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러기 위한 가장 기본이 무아이지 않나 싶습니다.
나라는 형식에 얽메이기 보다 변화의 방향성을 인정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슬기로운 삶의 자세이자 교훈인 것 같습니다.
강의 유인물이라도 받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가장이해하기쉅게강의하심에 감사감사합니다
자런 석학이 대한민국에 있어 참 다행입니다.
훌륭한 강의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철학적으로 재미있게 푸시네요. 참 훌륭한 인문학강의입니다.
멋지고 깊은 의미를 전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긴 명제를 의심해보는 것.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 이것이 우리를 대자유로 이끌 수 있다.
교수님 늘 감사합니다 🙏🏻🙏🏻🙏🏻
저는 어릴때부터 할머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심인당에서 불교를 접하고 친구들과 놀고 설법을 자연스레 많이 들었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들어왔는데 중간 중간에 어려운 말이 많네요 ㅋㅋㅋㅋㅋㅋ😂 하지만 그걸 짐작하시듯 구체적이고 현시대적인 비유들이 많아서 너무 재밌고 어렴풋이 나마 맥락과 의도는 전해집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카르마와 상속세, 100일기도하는 할머니와 수능생의 이야기와 전생의 카르마를 내가 이어받는것 이런 생각은 아마 제가 스스로는 생각을 발전시키기는 어려울거같은데 교수님의 생각의 깊이에 놀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상속세는 폐지되야 중소기업 유지가 되고 직원들 일자리 유지가 되고 사회경제가 돌아갑니다.50프로 현금세금부과 하루빨리 폐지되서 건물들 흉하지않고 재투자되서 이쁘게 단장해서 북적거리는 길가모습 보고싶어요
지금 시대에 몇 안되는 존경할 만한 분
수고 하셨습니다
강성용 교수는 최고입니다.
학자로써 불교에 대한 맥락과 현실적 사안들을 있는그대로 솔찍 담백하게 강의하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해석과 판단은 이역시 각자의 길이 됩니다
지식적인 세계관보다 몸의 습관이 더 생존, 삶에,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군요 유전자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단단한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 수행 수련 단기출가 출가..
강성용 교수님 강의 너무 감사합니다.
강교수님, 정말 똑똑하시다,,,,, 아는건 안다, 모르는건 모른다,,,, 정말 많이 배운사람이 저렇게하기 힘든데 대단하십니다,,,,
강교수님 진짜 실력은 삼프로 헌대인도얘기가 아니라 인도고전에서 나오네요,,,
깨닫지 못하면 모르는건 당연하죠
저는 지금까지 깨달았다고 하는 분도 '무아'를 이 정도 쉽게 설명하시는 분 못 봤습니다.
누구보다 강교수님은 대중이 궁굼해 하는 것을 이해하시고, 그것을 쉬운 말로 전달할 수 있는 분입니다.
강성용 교수는 경전의 원형(original form)을 찾아가려 애쓰되, 종교가 시대적 상황의 요청과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 테다. 종교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작동할 때 유의미한 것이지, 사회적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종교적 가르침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행간에 숨긴 듯하다.
특히 철학과 졸업생들을 철학관 도사로 오해한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의 운세풀이 요청에, 자신의 친구가 넉살 좋게 운세풀이하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에피소드는 강성용 교수의 강의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본다. 정답과 진실이 때론 오답과 거짓이 되고, 오히려 오답과 거짓이 정답과 진실이 되느냐는 바로 사회적 요청에 대해 적절히 반응했는지로 결정된다는 역설의 미학을 강성용 교수는 담담히 내뱉고 있다.
가끔 강성용 교수의 강연을 듣다 보면, 철학자라기보다는 비교종교학자 내지 종교현상학자다운 풍모를 보인다. 그리스도교에서 다양한 학자들이 비평학 기술을 통해 '역사적 예수' 혹은 '역사적 바울' 찾기에 골몰하고 있으나, 결국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쪽으로 연구를 진행하듯이, 불교의 '역사적 붓다' 찾기도 비슷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강성용 교수가 불교인의 입맛에 맞는 무아 교리 설명 대신에, 열린 해석으로 남겨둔 것은 그래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강성용 교수의 강의를 유튜브로 얼마 전부터 보고 있지만, 참 건강하고 겸허한 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강연 고맙습니다.
크게 공감합니다. ^^
맹자曰
惻隱之心 仁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대승불교는 힌두교 베딕의 우파니샤드에 더 가깝다고 봐야할것입니다. 깊이있는 내용 감사합니다.
교수님 강의가 훌륭합니다.
전 PTS(Pali Text Society, 빨리 성전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이기도 했던 곰브리치 교수도
"빨리어는 절대 붓다가 사용했던 언어가 아니고, 빨리 경전은 절대 붓다의 친설이 아니다."라고 논문에서 밝혔습니다.
남방불교를 믿고 안믿고는 자신의 자유이지만, 현재 테라바다 불교만이 정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와 아집의 주장입니다.
교수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태어나면서 기독교였고 살아오면서 불교 그런데 절에가면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불교라도 교회에 안가고 절 행사에 안갑니다. 아마 저와 같은 심정일 겁니다. 가끔 절에 혼자가서 기도하고 옵니다. 신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그사이 스님도 절의 규범도 그무엇도 없고 오직 불경을 읽고 강의를 듣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지나치게 많이 교육받은 1인이며 치열하게 공부한 1인입니다.
참~강의멋집니다
수준에 맞게 말씀해주시는것 같은ㄷ0
감동적이다. 마음에 와닿는다.
부처가 설마 불교를 설파했을까.
말씀이 뭉쳐 후대에 불교가 됐겠지.
말씀이 저마다의 가슴에 스며들어 삶의 지표가 되고.위안이 된다면 부처도 이미 웃지 않을까.
말씀보다 해설이 더 어려운 논리에 머리 아프지 맙시다.
옮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불확실할 수도 있다는 핵폭탄급 강연.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 건가. 여기서부터 '실전'이라는 것. 종교틀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의 수행.
추천부터 하고 보는 학자님
볼 때마다 고맙습니다.
강성용 교수님의 이번 강연에선 단답으로 맺음될 수 있는 정답보다, 오히려 그 답없는 의문을 가지게 된 여정 그 자체가 핵심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진리가 이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면, 5분만에 강연도 끝났을테고 설령 그 내용이 수십여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진들 이후 풍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허나 그 의문을 갖게된 과정 그 자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다양한 방식대로 해석되고 소비되어질 절대반지 같은것이라 본다.
붓다라는 초인은 게임으로 치면 끝판까지 다 깬 능력자이다. 그 게임을 깨고싶은 다른사람들이 붓다를 숭상하면서 배워야 할건, 붓다가 보이는 프로게이머의 현란한 플레이 그 자체가 아니라 미니맵이 어떤지 보스몹이 어떤지 속성이 어떤지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붓다의 플레이에 탐닉하면 개인에게 답이 나올리 없다. 플레이가 아니라 맵을, 아이템을, 보스를 어떤지를 알아야지 똑같이 플레이한다고 깰수있는게 아니다. 제3자로 시청자라면 페이커라면 메시라면 이렇게 플레이 해야지 라는 그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제3자가 아니라 스스로 게임에 뛰어든 플레이어가 된다면 자신은 페이커처럼 메시처럼 바라볼 순 있어도 그렇게 플레이 할 수 없다. 내가 플레이어가 되었을때 중요한건 페이커나 메시의 플레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위기를 판단하는 방법... 옳바른 의문을 갖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옳바른 의문... 저 보스몹을 나는 어떻게 깨야하지... 가 되어야지, 어떻게해야 메시처럼(붓다처럼) 플레이하지...가 아닐것이다.
무상을 직접 체험하여 알지 못하고, 무아를 논하는것은
그어떤 논설이라도 소설과 같습니다.
무상을 아주 또렷하고 분명하고
명료하게 관찰하는 자신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 입니다.
무아는 무상을 넘어 합일 한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만법일여 등등으로 표현 하는것으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가 아니라 이 생에 형성된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즉 비아가 맞는 번역이며 의미임
무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알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교리발달사는 별론으로 하고, 부처님의 처음 말씀은 단순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좋은 강의와 책을 토대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43:30 아트만과 무아
1:08:20 무아에 대한 불교 학자의 입장
1:10:00 대승불교의 힌두교적 관점의 근거
1:17:37
인과의 원리가 작동하는 현상계에서는 '나'라는 것이 없지만 '나'라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현상계에서 만들어낸 상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고'와 다름 아니다라는 말이 아닐까요? 현상계와 다른 차원인 절대계에 존재하는 참'나'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나'는 불생불멸의 자리이자, 인과가 끊어진 자리이자, 진공묘유로서 글자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당연히 집착도 있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오직 체험으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상계와 절대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듯하나 아주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5장 불교의 출발 - 누가 듣고자 했는가'에서 언급을 하셨더군요.
우빠니샫 텍스트들에서 보이는 자아(atman)가 브라흐만(brahman)과 일치되는 경지는 외견상으로 보기에 사라진다거나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서 분리된다는 함의가 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근본적인 틀, 즉 시간과 변화의 틀에서 벗어나는 경지로 제시된다. 이 경지가 무엇인지 혹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경지가 실제로 구현된다고 했을 때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 즉 시간과 변화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 Music ] ★반야심경 (Heart Sutra, KOR)★ by Gomdan
ruclips.net/video/g4xh9MBT8_8/видео.htmlsi=DN0Yh-8BFz2GlJ_v
1:18:51 자신의 옳음과 타인의 바람에 대한 고찰
1:28:56 아트만의 존재에 대한 문헌학적 근거
1:34:35 인도 출가의 의미와 불교ㆍ유교의 이데올로기 갈등
감사합니다
듣다 보니 에 대한 선생님의 조심스런 태도가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에 대한 오해가 극단적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지는 위험성에 대한 고민이 있으신 게 아닌가 싶어요. 만약 극단적 허무주의로 빠지면 사실 '자이나교도'가 되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일 테니까요. 불교가 고행주의가 아니고, 고통의 소멸을 통해 행복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를 어떻게 설명해 낼 것인지가 선생님의 숙제처럼 보여집니다.
선생님의 통찰처럼, 니까야에 나타나는 내용은 대부분 갈망과 집착을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인식틀이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것을 아예 부정해버리면, 숙고하고 고찰하며 정진하게 만드는 마음작용은 그럼 무엇인가라는 고민. 즉 '사띠'를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생님께 있는 것 같습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전통처럼 그것을 '아트만'이라고 규정하고, 이 '아트만'이 끝없이 윤회한다고 한다고 해 버리면 설명이 간단한데, 불교는 '무아'를 말하면서 윤회를 얘기하니까 설명이 복잡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선생님은 '무아'를 인정하고, '윤회'를 부정해버리든지, '무아' 대신 '아트만'을 인정하고 '윤회'를 받아들이든지의 양자택일을 고민했던 불교의 많은 이론가들과 대동소이한 것 같습니다. 만약 시원한 답이 있었다면,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겠지요.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영역이기에 수많은 집단지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저는 이론으로는 결코 진실과 만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론은 수행과 만날 때 비로소 그 신비한 비밀을 드러낸다고 믿습니다. 정직하고 겸손하신 선생님께서 수행을 통해 이론의 깊이가 더 깊어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수행은 답이 아니라 현상태를 더욱 어렵게 한다고 믿음
@@user-mm1zy3bs7k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어리석은 상태에서 하는 수행은 겉보기엔 훌륭해 보여도, 열매 없는 방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가 가장 강조한 것이 지혜이고, 제대로 깨닫는 것, 즉 정견(바른 견해)을 팔정도의 첫단추로 놓은 것이겠지요.
저는 일반인에게 수행을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강성용 교수애게 권유한 것입니다. 정견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팔정도의 나머지 수행이니까요. 지혜와 자비와 수행은 서로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제가 수행을 통해 세 가지가 상호작용하는 걸 경험했거든요. 물론 제 사견일 수 있습니다. 뜻깊은 하루하루 되시길.
@@김구성 무아와 아트만의 논쟁이 끊임없는 이유가 있었군요. 저는 열반을 등한시 하고 무상 고 무아만 주장하는 자는 반드시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강성용 교수님도 문헌학적 근거를 제시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학문이 아닌 종교적인 체험으로 스스로 찾는 수 밖에요.
무아에 집착하고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특별하다는 분별 상을 지니는 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무아는 아트만(참나)을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오온은 아트만이 아니라고 아트만의 개념을 바로 세우는 과정에 나온 말이죠.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열반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것은 범아일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우파니샤드는 불교를 통해 베단타 철학이 완성되었기에 힌두교 설립의 공적은 브라만교보다 불교가 더 크다고 봅니다.
교수님은 학자이시니 수행보다는 학자의 본분이자 직업인 연구를 더 하시는게 한국불교계와 대중들에게는 더 좋은 일일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런 역사적, 문헌적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결과물들은 오직 학자들만이 오랜 연구와 공부를 통해 밝혀내고 발굴해낼수 있는 것들일테니까요. 이 강의도 교수의 본분으로서 학술적인 내용을 신도들에게 맞춰서 강연해주시는 것이지, 수행자나 승려의 입장에서 하시는건 아니기도 하고요. 학자는 이론을 정립, 재정립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게 본분에 맞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활동도 하신다면야 좋겠지만, 대중과 신도들을 향해 이런 좋은 강연 해주시는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역할을 하고 계시가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네요.
감사합니다 🙏🏻🙏🏻🙏🏻
’나‘가 생각하는게 아니라, 생각을 하니 ’나‘가 생긴다. 원래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믿는건 상상이고, 원래 없는 것이 반응하고 판단하는 대상(세상)에 대한 믿음은 모두 환상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는 상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환상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집착.
부분 부분이 마차가 아니라고 마차가 없는 건 아니고, 마차는 마차다. 나무관세음보살 🙏🙏🙏
내가 아는 것만 맞다고 생각하지말것.
불교에 대해서나 인간관계에서나
명강의 감사합니다.
0:30 😊
인간의 한 세계를 부수는 것 무아 멋진 강의입니다. 감사합니다.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무슨 공부를 이리 살벌하게 하셨나요 😮 와...
강성용 교수의 무아론 주장의 장점과 한계를 언급하자면,
일단 장점은, 붓다의 무아 주장은 철학적 의미 부여나 장식들 없이 단지 '자기'와 '자기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본 점은 아주 단순하고 깔끔한 해석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강성용 자신의 주장에 대한 집착마저 내려놓고 있다는 점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불교를 소개하는 많은 사람들이나 불교 사이트들은 대체로 라고 내세우지만 사실 자신의 주장도 틀릴 수 있음을 열어놓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자기 것에 대한 어떤 집착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고, 그럴 경우 이것은 일종의 이율배반이 된다.
또한 강성용 선생도 대승불교 경전에 나오는 불성 사상이 오히려 우파니샤드 힌두 전통에 굉장히 가깝다고 본 점0(1:10:36)도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실제로 인도 유학을 갔던 어느 한 스님도 이미 힌두교 학자들 역시 불성 여래장 불교에 가깝다는 점을 전하기도 했었다.
말미에 인도의 출가 문화가 중국과 한국의 동아시아 출가 문화와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원래 인도의 출가 문화는 동아사이에 만연한 가부장적 가족/조직 집단/공동체 사회의 가부장제 권력 고리를 끊는 기능도 있음을 암시한 점도 특기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는 인도 출가 문화가 아니어서 유가 전통 사회와 어느 정도 타협된 출가 문화라는 점을 암시하는듯 했다.
강성용 교수의 무아론 주장에 대한 한계는(이는 장점과 맞물려 있는 것이지만),
붓다 이후의 2천5백년 불교철학사를 초기 붓다의 통찰에서 보면 매우 부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를 거의 무효화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강성용 선생도 그것이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붓다 이후로 왜 많은 부파불교들이 생겨난 것인지 붓다의 가르침이 왜 자꾸만 여러 철학적 고찰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지점으로 남게된다는 것이다.
강성용 선생은 기존 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는 연기설도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33:34).
이런 점에서 강성용 교수의 인식에는 붓다와 불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언젠가 다른 곳에서 표현하길 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이미 점유하고 있는 대승불교 전통에서 보면 아무래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으로 본다.
즉 단 하나의 불교가 있는 게 아니라< 천개의 불교>, 가 있는 셈이기에 결국 기존 불자들한테는 아예 거부되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혼동스럽게도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감사합니다 😊
용수의 대지도론에 무아는 중생의 유아에 대한 해독제, 무상은 항상에 대한 해독제, 괴로움은 즐거움에 대한 해독제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즉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삼법인 이라는 원리는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고갱이 입니다. 천개 만개 불교라도 삼법인이 없다면 엉터리 가짜 불교인 셈이지요. 통찰력있는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저 자리에서 직강하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울림이 큰 강의였어요. 끝나고 깊이 생각해 볼 게 많네요.
집착은 분별심에서 나오죠, 분별이 쌓이면 사물을 보는 관념이
고정되구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사실 이건 아기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죠.
그렇기에 전 윤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처음부터 아무런 집착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난다면, 그 생명은 삶을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나라는 아트만을 태우는 등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집착이죠.
자아가 없다 =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자아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아트만이 있다라는 것을 알고 인지하는
것은 다른 상황이죠.
삶은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고정된 시공간입니다.
이 고정된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경험하고 나라고
느끼는게 집착이 결국 내것을 만들고 나라는 아트만이 형성되죠.
사람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실제 느끼고 생활하는 거주 반경의
공간만을 인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서는 사고를
하지 않으면 분별심이 깨지지 않고 집착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내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은 감정이 있습니다.
내 것을 빼앗기면 감정이 일어나죠.
특히 소중한 것이라면 말이죠.
소중한 것을 빼앗기거나 잃는 상황에는 육신의 아픔도 있죠.
나의 부모, 자녀의 이별도 마찬가지.
내가 태어나고 병들고 아프고 고통을 느끼는 것 모두
내가 조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응하는 감정도
말이죠. 그 감정의 과정인 생각도 마찬가지.
내가 태어난 이상, 받아들여야 하는 나라는 존재의 시공간
이라는 거죠.
하지만. 내가 내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더 이상 분별하지 않으며
지혜라는 사고를 통해 집착이 사라져 나라는 아트만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요?
나라는 아트만을 태우는 등불, 집착이 꺼진 무아의 상태,
이것을 알게 될 때, 깨달음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번외로 태어났다면 아트만은 존재 할 수 밖에 없으니,
자신의 아트만을 사랑하고 받아 들이고 달래야 합니다.
이는 타인도 마찬가지 그 사람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자아는
동시에 다르게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그 자아를 인지하고
달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애와 연민, 올바르게 보는 것을 행하는 것.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 봅니다.
무상 인과응보 윤회 물질문명 지구 종교와 과학 아전인수 욕망 우상화 몸 건너!!!!!!!!X?
무아 업장소멸 해탈 정신문명 시공 우주와 자연 진공묘유 자신 이뭣고 맘 발견!!!!!!!!X?
열반 천지일월 부모 착하고 바르고 깨끗한 삶 즐거운 행복 오색찬란한 빛 빵상+0-.......
무아란
변하지도 않는 영원한 나가
없다는 말입니다
힌두교가 주장하는
영원하 지배계급로만
존재한다는 그런 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지금의 나는 주위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그런 나에요
그래서 오늘의 나는 과거의 행동으로 먼들어진 나이고
오늘의 행동으로 미래의 나가 만들어진 다는 의미예요
오늘의 나가 만들어져 과정을 설명하는것이
연기법이예요
#헬로붓다TV 에서 #강성용 교수님의 좋은강의 진행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조금 더 다가간 느낌이네요😃 강성용 교수님이 1~2시간이 아니라, 1년 정도 초기불교와 부처님 강의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강의장 커튼이 없애서 부처님의 모습을 불상을 볼수 있게 해주시면 더 좋을거 같아요, 많은 준비해주신 헬로붓다TV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고 소원성취하시며 성불하세요🙏🙏🙏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내것이 아니다.
오늘 하나 건져 가네요
불교 무아론(아트만은 없다)은 집착을 없애는 목적으로 얘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혼의 유무에 대한 얘기인 경우는 극히 적었다
아트만 = 자아 = 의식
환생할 때 가지고 가는 기억은 핵심적인 것들이라 전생의 기억이 없다?
그 말은 본능이나 성품에 반영 된다는 걸로 보이네요
제1집착 : 자신 → 무아론
제2집착 : 소유 → 무소유
소유자가 없는데 소유가 있을 수 없는 것
헌데 이건 삶에 대한 포기와도 비슷해서 자살 비슷한데요?
또한 동양의 기독교와 불교는 오리지날과 다르기 때문에
시비 따지느라 똥고집 부릴 필요가 없다
동양인은 좀 더 현세적이고 집단적이다
사람들이 갈라서는 이유는 이념/철학/종교/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 속의 삶의 스타일/방식/취향 때문이다
기독교의 이단 논쟁이 권력 다툼인 것처럼...
이슬람의 종파(수니/시아) 대결이 권력 다툼인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건 죽어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실 세계 속의 행복이거나 고통이라도 줄여 주는 마취제
그래서 기복 종교가 근본인 것이다
(여기서 종교는 마약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
말씀 잘 들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티끌이 없고 닦을 것이 없고 빛나고' '한계가 없이 무한히 밝은' 이게 자성이 아니다. 이건 불교가 아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나눠서 밝은 것만 취하려 하는 건 불교가 아니다.
잡담이 너무 천하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