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때 정말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같은 태도를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제 앞에서 자기 친구를 욕을 하더라구요. 듣다가 저는 “걔가 이래서 이랬던 게 아닐까? 걔는 이렇게 받아들인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가 동생이 갑자기 막 화를 내면서 폭풍 울음을 쏟는 걸 보고 당황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언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일단 내 편이 되어주고 내 말에 공감을 해줘야지!”가 요지였어요. 이후부터 내가 뭔가 너무 이성적인 입장에서만 바라보려고 한 게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닫고 다음부터는 듣는 이의 입장을 공감부터 해주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 이런 전폭적인 공감이 과연 옳은지 다시금 회의가 들더라구요. 공감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성적 사고를 가로막고 상대방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집단주의로 쏠리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공감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성적 사고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옛어른들이 말씀하신 “중용”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요즘이네요.
@@정문환-y9w 맞아요. 그래서 항상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게 몸에 배다 보니 정작 저는 제 의견을 말하기가 어려워졌네요. 제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억지 공감을 해줘야 하니 어찌 보면 위선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관계를 위한 공감이 한쪽의 무조건적 공감이 되어버리면 이건 정말 공감인 걸까 싶기도 하고요. 원래부터 제가 가족이라 친구라 나라서 무조건 지지해주는 성향이 아니다 보니 제게는 이런 게 스스로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공감을 늘 해주다가 한번은 제 의견을 이야기하니 동생이 불같이 화를 내며 저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과연 우리는 늘 공감만 해주는 게 옳은 건지.. 또 항상 공감만 받아야 하는 건지.. 나에게 공감해주지 않으면 상대가 나쁜 사람인 건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공감으로 유지되는 관계와 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관계를 구분합니다. 어떤 사람과 만남의 자리가 친분을 위한 것이라면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 의견을 내는 자리에서는 제 의견을 말합니다. 하지만 후자는 보통의 삶에서 쉽게 접하기가 어려워 따로 독서모임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컨텍스트가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감정적이라는건 이성적이지 않다는거고, 동감할 수 없는 얘기를 하면 싫어하는게 당연합니다. 이건 중용의 문제가 아니고 정황의 문제 입니다. 만약 동생분이 이성적이고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으면 당연히 생소한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가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님이 이런 자세이시라면 생경한, 예를들어 살인자를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것입니다. 사회과학(실생활)의 영역에서 정황과 무관하게 언제나 좋기만한 태도는 그냥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공감이 발전의 방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 공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주입식 교육처럼 "네네" 하고 따르는 것이 아닌, "나는 이 부분이 어떠하기 때문에 공감합니다." 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등의 방식으로요 ㅎㅎ 또한 공감을 스펙트럼 개념으로 보면서 "여기까지는 공감하지만 이 부분은 공감하지 않습니다." 라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채사장님도 비슷한 말을 하셨었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읽어라”라고요. 하지만 사회가 개인화되고, 1인 가구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며 경쟁이 고도화되는 현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정서적 고립감과 불안을 많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실 불편한 내용보다는 공감되는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보입니다.
영상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저의 경우는 ‘공감한다’는 표현을 상대방을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자주 썼던 것 같네요. 이전에 뇌과학관련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모든 학습에는 어떤 감정이 동반된다-라고 하더라구요. 우리는 항상 어떤 감정, 기분에 처해있고 그것 없이는 어떤 기억이나 학습이 이뤄지지 않는다라고 한 점이 와닿았습니다. 감정과 이성은 상반된 것으로 보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어떤 개념적인 범주를 따로 설정해 두어야 그것에 대해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분류했지 않나 싶습니다ㅎㅎ
개인이 의도적으로 공감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려는 자세, 그리고 여러 의견과 생각에 열린 장소를 만드려는 시도들이 참 중요한거 같아요. 그리고 '음.. 뭔가 걸리는데' 싶은 경험은 대부분 우연히 찾아오더라고요. 의도치 않게 이질적인 것을 맞닥뜨렸을 때, 당황해서 무작정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해해보려는 태도도 동시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담이지만 가학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의 경우 감정적 공감은 못하지만 인지적 공감은 잘 한다고 합니다 계산적으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사람이 어느만큼 고통스러워 하겠구나라고 정확히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단지 생각일 뿐 거기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하죠
뭐랄까... 원래가 그렇지만, 사람들이 더욱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느낌입니다. 이게 건방일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시대가 그런 경향성에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아무래도 정보화시대로 들어러다보니 정보가 양적으로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다양한 정보를 접하기가 접근성은 높지만 소화해내기가 역설적으로 어렵고, 구독서비스와 알고리즘 큐레이팅이 필터버블을 만들다 보니 사람들이 고여가고, 게다가 고여있는걸 즐기는것 같아요. 이런 건 좀 걱정스럽습니다. 영상 중간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언급하신것처럼 여기에는 분명 자본주의의 영향도 강한 듯 하구요. 낯선 생각을 일부러 접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생각의 저변을 넓히고, 다양한 사상의 스펙트럼을 이해하는게 당연하다고 느껴왔는데, 요즘은 특정 주장을 우기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여기는 분위기인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를 따져 동의하거나 비판하는게 아니라, 내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공감하고 그 밖에 있는건 아예 부정하고 공격하려 드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자기경계에만 갇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읽어가는것 같아 조금 무섭고 안타깝습니다.
도구(스마트폰 등)에 의해 사람들이 연결된 만큼 단절된 시대이다 보니 공감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공감을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채우고, 설 수 있는 사람은 부족주의의 경계를 허물고 바깥 세상을 놀이하는 아이처럼 뛰놀겠죠! 🤸♂️🤸♂️ 개인적으로, 공감되는 책을 읽을 때의 순기능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상태의 경험, 감정, 표현들을 책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시인들이 대단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오늘도 좋은 내용 잘 들었습니다. 무조건적인 공감, 무조건적인 비판보다는 비판적인 사고과정과 대화의 목적에 부합하는 쌍방향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방적인 악성 댓글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무조건적인 공감 댓글로 자아도취에 빠진 교주들이 있는 것처럼 결국 대화의 목적에 맞춰 밸런스 있는 댓글이나 사고의 진화가 집단적으로 모이면 아주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주제로 마음속에 공감 얻어가기를 기원합니다.
공감을 못 하는 경험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압축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나 상황을 목격할 때,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이해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걸 방해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올리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영상을 감명깊게 보아서 번역본 책을 구해 읽어보았는데, 그 책의 ‘계몽의 한계’ 장을 읽으며 얻게 된 생각입니다.) 바로 ‘잘못된 투사’입니다.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둘 중 하나입니다. 호기심 또는 불쾌함입니다. 저는 불쾌함이 상대를 ‘이해가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할 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인간이기에, 나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대상을 보며 ‘인간이 저럴 수 있나?’ 라는 일종의 비인간화를 하게 되고, 따라서 이해 욕구; 호기심 대신 불쾌함을 느끼는 것이죠. 이런 타인에 대한 비인간화와 불쾌함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까 말한 ‘잘못된 투사’입니다. 몰이해로 인해 발생한 내면의 부정적 감정은 그 원인을 타인에게로 투사합니다. ‘저 사람이 가진 문제 때문에 내가 불쾌해졌다, 저 사람 짜증난다, 싫다!’ 라구요. 논리실증주의에서도 지적했듯이 사실 인간의 모든 지각 활동이 어쩌면 투사입니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대로의 사물을 반영하기 위해 주체는 사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저는 이러한 투사를 아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따라서 ‘공감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정과 상대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배척과 몰이해의 골짜기로 빠져듭니다. 일단 싫으면 이해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평소부터 편견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열린 마음인 사람들은 점점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닫힌 마음인 사람들은 점점 이해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더 이해해 나가는 반면에,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쾌함을 해결하기 위해 더 강한 부정적 투사를 하고, 그건 자신의 세계가 되어 세상을 더욱 편집적으로 바라보게 되니까요. 요약 1. 공감되지 않는 걸 볼 때 우리는 호기심 또는 불쾌함을 느낀다. 1-2. 불쾌함은 상대가 이해가 가능한 범주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 때 일종의 비인간화를 통해 생긴다. 2. 불쾌함이 생기면 상대에게 감정의 잘못된 투사를 하게 되고, 상대가 부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편집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3. 편집적인 생각은 불쾌함을 강화하고 일말의 이해 가능성조차 없앤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있다면, 또는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누구라도, 꼭 답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의견에 대한 비판을 자신을 향한 비난이라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비판을 반갑게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에 깊은 울림을 받아 댓글 처음으로 남겨봅니다. 충코님 책도 주문했어요~ 철학서 오랜만에 다시 읽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독하고 댓글은 처음 답니다. 개인적으로 감정적 공감이 누적되야 인지적 공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누군가는 팔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 감정적 공감이 먼저겠지만, 인지적 공감 때문에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한 또 다른 개인도 있기 마련입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고 유가족에 대해 인지적 공감으로 반응하는 누군가는 있을거구요. 우위를 나누기는 힘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마인드 너무 멋지네요 제스타일이에요! 지적이나 편협하지 않고 방법에 있어서도 깔끔하고! 저는 일반인들과 다름을 늘 추구하고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공감'하는 내용이네요.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할수록 다원화된 민주 시민으로 성장 할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봅니다.
공감은 결국 이성적인 부분과 감정적인 부분이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회에서는 이제 사회적인 용도에서 공감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감정이 즉각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부류되기에 이성보다 조금 낮다는 인식이 있는 듯하지만, 이성도 결국은 타인의 언어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에 치중 되거나 변형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성에 대한 부분을 너무 신뢰하는 것도 위험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뭐 인간이라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게 쉽지 않지만 결국 뭐든지 '중용'이구나 하는 생각도 지속해서 드네요. 여하튼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충코님:)
마지막에 감정과 생각이 생각보다 서로 따로따로이지 않다는 말씀은 실제로도 근거가 있습니다 뇌를 다쳐서 감정을 못느끼게 된 사람은 의사결정과 가치판단에서 판단장애가 같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감정을 못느끼는 사람은 지능에 문제가 없어도 특정한 종류의 인지적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말씀하시는 안 좋은 예에 공감이 동질감을 느끼다에 공감 아닌가 해요 그 활동이 좋다 안 좋다로 정의되는 것은 무리인 것 같고 다만 문제가 편가르기식 논리로 전락해 버리는 게 문제가 될 것 같아요 사회적 활동하면서 정도에 소속감은 필연적 필수적이라고 보는데 과도한 옹호는 고립되게 만들거나 또는 배신감을 들게 만들죠 차연에 개념처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수가 있는건데 자신이 편이 필요한건지 생각이 필요한건지 잘 이해해봐야 할 것 같네요
감정의 충격에서 생각의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마치 이성과 감성을 분리할 수 있다는 듯한 늬앙스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뇌가 그렇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감정을 배제하고 생각하려는 노력은 할 수 있으나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뇌를 공부할수록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구조에서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지 고심해보는 것이 삶을 더 즇은 방향으로 이끌 것 같습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8:55부터 '~의견에 공감합니다'라는 문장이 어색하다고 느끼는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충코님은 이후 agree와 accord의 어원을 찾아보고 어색함을 덜 느끼시게 된 것 같지만, 저는 단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의미가 바뀌기 때문에 원래 기원의 의미대로 꼭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폴 블룸의 감정적공감/인지적공감은 확실히 구별되는 서로 다른 종류의 공감입니다. 따라서 옛날부터 서구권에서 쓰인 단어들(agree,accord)을 우리가 그대로 따를 필요없이 "동의"와 "공감"의 구별을 명확히 하는게 감정적공감/인지적공감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자신의 감정/생각을 분리해 상황에 따라 더 좋은 공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늘 영상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공감합니다😅 이성적인 공감, 비판적인 태도는 상대방과 자기 자신이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내 부족함을 인지하고 개선해 나가는 것, 내가 감정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항상 이성적일 수는 없듯이 이성적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상적 공감으로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의 심리적인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이성적 공감 만큼 중요한 능력이라고 봅니다!😊 요약: 감성적 공감: 힐, 이성적 공감: 딜
말씀하신대로 ‘공감’이라는 단어가 생각의 일치, 동의 한다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이 되어서 공감을 하지 않는다는게 ‘내 의견’에 반기를 든다 /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부정적인 인식을 주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친구든 지인이든 누군가와 의견을 공유할 때, 내 의견에 대해서 상대방이 ‘나는 네 생각에 공감이 안되는데..?’라고 하면 반감이 들기 쉬운 것 같아요. 공감이 너무 폭넓게 사용이 되어서 생각과 감정을 분리하지 않고 사용되어서 발생하는 문제라도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하는 늬앙스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같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나는 네 생각과 감정에 공감이 안돼 라고 말을 들으면, 가깝거나 의지하던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게되면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진정성 있는 말을 하고 싶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이런 감정과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건 너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네가 불안을 느끼는 거니까 너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줘서 결국 너에게 피해가 가는거라,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하지 않으면 좋겠어. 공감으로 인해 감정에 대한 손실이 생기잖아. 그리고 그로 인해 에너지가 고갈되니 결국 너를 위해 이러한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 좋지 않을까요? 총기사고 예시 등을 잘 들어주셔서 말씀해주시는 내용을 저도 감명깊게 들었어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저러한 일이 나에게도 발생하는게 아닐까?‘하는 공포심 때문에 감정이 혼란스러워지고, 그러한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 피곤해지는 느낌이어서, 과도한 공감이나 잘못된 감정에 대한 주변인들의 공감은 내가 잘못된 감정에 매몰되게 하니 위험하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생각이 전환되는 아주 좋은 영상이었어요. 말씀하신대로 공감이라는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어서 ’나는 공감 안되는데‘라는 말이 상대에게는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조심해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공감이 안된다고 한다면, 그 표현을 잘 풀어서 하는게 맞다고봐요. 그치만 디테일한 설명을 피곤해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자기 주장과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과 대화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튼 정말 도움되는 영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아요. 공감되지 않는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를 변화시키려 노력해야하는 것도 맞는데, 결국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세상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생각들은 더 많은 이에게 공감을 주는 생각들인 것 같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강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종종 내집단 외집단을 분리하는 식으로 생각들이 발전하기도 하는 거 같고요. 역시 중요한 건 항상 중용을 지키는 개인과 단체가 아닐까...합니다.
자기가 공감되는 내용의 책만 보고 공감되는 정보만 골라서 보는 것이 진짜 위험한 행동인게 그만큼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편협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극우, 극좌 등 극단적인 성향까지 가게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저도 다른 의견, 다른 시각에서 나온 정보 등을 받아들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감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할 때는 불의한 사고나 천재지변 등 타자나 이웃이 재난을 당했을 때 한 개체가 동정이나 연민을 느낄 때 공감이라 하고 공감능력을 가졌다 없다로 표현되는 감성 지수를 나타낸다고 보는데...그 외에 다른사람의 의견일치는 동의 단어로 표현하는 게 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네요.저도 다른이의 의견의 공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이게 맞나?못마땅하고 먼가 개운치가 않았는데 '동의'라는 표현이 괜찮은 것 같네요.같은 뜻이긴하지만....ㅎㅎ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는 없다고 악플도 수용하는 열린마인드가 마음에 와 닿고 심장에 울림이 오네요.
정치(종교)병에 걸린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영상입니다. 자기가 믿는 주장과 다른 이야기는 제대로 들을 생각 없이 바로 무시하고 욕하는 좌파, 우파들, 종교인들.. 맹먹적인 사이비, 정치 지지자들... 나와 다른 의견이나 비판을 겸허히 듣고 잘 살필줄 아는 건강한 사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유튜브 댓글은 생전 처음 남겨봅니다....님의 말씀이 상당히 일리는 있는데요....너무 이상주의에 치우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동물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거든요. 자신과 성향이 다르거나 이질적인 것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갖는게 우리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간의 수많은 전쟁, 학교에서의 왕따, 부부간 갈등, 가족간 갈등 이 모든 것들이 사실 그 부산물이죠. 단순한 갈등도 큰 싸움으로 번질수 있는데 그게 만약 정치나 종교 같은 거대담론에서 공감이 안되고 이질성을 겪는다면 사회가 내전으로도 갈수있구요. 사실 저도 맹목적으로 자신의 의견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어떤 사람들에겐 눈살이 찌푸려지는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또한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그리고 현대사회는 워낙 스트레스가 심한 사회고 거기다 한국은 OECD 최악의 행복지수를 가진 나라라 더욱 더 사람들이 공감에 굶주릴수밖에 없는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한국에서 공감이란 "내 기분에 맞추면서 맞장구 치는 거"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거지, 무조건 "그래 니가 옳고 걔가 잘못했어"라고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예를 들어 어떤 엄마가 자식이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고 왔다고 칩시다. 때린 이유를 물었을 때 'ㅇㅇ보다 나한테 과자를 덜 나눠줘서 화가 났어"라고 하면 무조건 자식한테 잘했다고 해줘야 할까요? 속상한 마음은 공감해줘야하겠지만 때리는 건 안된다고 확실히 말을 해줘야 합니다. 어린아이 예가 잘 안 다가오면 어른을 예로 들어봅시다. 내 친구가 어린시절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음식에 대한 집착이 생겼고, 성인이 된 후에 폭식이 습관이 되어 위염, 고지혈증, 비만등 건강에 이상이 왔다고 상상해봅시다. 친구가 어린시절 불우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 안타깝다고 할 때 '그래 너 너무 힘들었겠어. 니가 왜 이러는지 알겠어'라고 우쭈쭈해주기만 해야 좋은 친구일까요, 아님 과거는 안타깝지만 생활습관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해줘야 좋은 친구일까요?
영상을 보고 나서, 과학사에서 과학이 지동설, 진화론, 양자역학 등 인간의 직관에 반하는 지식을 발견하여 인간의 지성을 확장시킨 것이 떠올랐습니다. 한 개인에게도 내가 알던 것, 선입견에 어긋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지적 자극과 인격적 성숙에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걸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때가 많지만..
공감은 주로 긍정적인 부분을 공통분모로 둘 때 쓰여 질 때가 많기 때문에 이성적인말이나 의견에도 두루 쓴다고 생각합니다. 공감을 좌표로 나타낼 수 있다면 감성적 영역의 표현이므로 사실 정확하게 같은 지점을 나타 내는지 또한 타이밍이 다르므로 시간차로 나타나는 정황?차이가 있으므로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요. 부정적인 부분에서도 예를 들면 스톡홀름증후군 정도에 분별없는 공감?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위험한 경우지요. 세상에 같은말은 없다고 봅니다. 완벽하게 같은 단어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비슷한말이 생기지 않지요. 즉 어떤 것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동의하나 다 공감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공감을통해 게을로져 발전을 못하는 ‘경우’도있고 근상님이말씀하신 순기능이라는 긍정적인 ‘경우’도 공존하는데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긍정적인 경우에 주목을 하니 주목받지 못한 경우를 인지하지 못했을때 문제가 생기니까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는것 같네요 무조건 한쪽측면만 옳다가 아니라 공감이란것의 양면성에관한 이야기쯤으로 해석됩니다
저는 내용이 100% 다 공감된 책은 없어요 그 속에서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안되는 부분도 존재하죠 그런데 100% 다 비공감되는 사람은 있더라구요ㅎㅎ 인간관계를 유지 하려면 공감할수 없어도 공감한척 해야할 때가 있고 그러면 또 나중에 인간관계에 현타가 오죠. 사람은 바른말 하는 사람보다 자기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원한다고 합니다. 자기편을 원하는거죠 그리고 이것을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죠. 대부분 신념은 없고 돈만 쫓는 사람들이죠. 제 주위를 봐도 돈과 권력이 있는 곳은 늘 이것이 통하더군요. 안타깝게도 자신의 신념을 갖고 바른말을 하거나 바른일을 하려는 사람은 질려서 나가 떨어지거나 그냥저냥 타협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죠 철학을 알면 알수록 현실세계와의 괴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정말 철학이 필요한곳엔 철학이 없어요. 요즘같은 시대에는 중용 필요해 보입니다. 구독자가 몇십만인 어느 철학, 책소개 유투버가 중용을 내세우면서 한다는 말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싸우지 마라 아무리 설명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다 보면 우리 대신 싸워줄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과연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어떤 영웅을 원하는 걸까요? 그 영웅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전 좀 두렵습니다. 마치 양떼들에게 늑대가 나타나면 무조건 양치기에게 알려라 가르치고 있는 양고기 먹는 사람 같아서요^^
작년 11월경에 서점에서 책으로 먼저 작가님을 알게 됐는데, 이제야 유툽으로~~ 내용 잘 들었습니다. 공감은 비판적사고랑 어울리는 단어..죠..? 작가님이 어떤 면에서 혼란?을 느꼈을지 이해가 가네요. 성숙한 토론문화. 반대 의견을 수용할줄 아는 자세가 필요한데…흑백논리로 상대를 나눠버리는 문화..?가 공감의 순기능을 후퇴시키는거 같네요..
과연 인간인 이상 자신이 비공감하는것을 공감할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떠난 완벽히 다른 얘기라고 볼수도 있으니까요 점점 경험이 쌓일수록 많이 보이게 되는게 어차피 자신이 비공감하는 것을 공감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네가티브하게 공격을 해서 이기려고 하는게 인간세상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재미있는 소재라 한번 썰을 풀어보면요 우리가 언어을 사용하는 가장 기본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함이잖아요 그런데 어찌 된것이 언어를 사용함으로 인간관계의 이해관계에 오해나 곡해 더 나아가 상대에 대해 사기나 배신감 마저 느낄 때가 다반사예요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중 가장 주된 바는 바로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각각의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들의 사고의 폭이 생각보다 꽤나 차이가 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위의 영상에서 예를 드신 것처럼 '공감' 이란 단어로 얘기해보자면 누군가는 정말 상대의 글이나 말을 보고 들으며 자신의 뇌리에 언뜻 스쳐지나가는 좋은 느낌 한 줄기만 가지고도 '공감한다'라는 어휘를 사용할 수도 있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글과 말에서 주제와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는 즉 전체적 의미를 살펴본 후에 '공감 한다' 라 할 수도 있구요 또 다른 누군가는 위의 두가지 경우를 다 갖추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생각과 글과 말을 한 상대의 생각구조에서 어느정도 생각의 차이가 발생하는지 어느 부분에서 빼고 더하고의 가감이 필요한지 그러한 차이로 발생한 생각의 변화가 발전적인지 퇴보하는 쪽인지 발전적이라면 동의가능하며 인정해줄만한지 까지 즉 느끼고 살펴보고 가감한 부분으로 차이의 변화까지 선행과 파악을 한 후에 '공감한다' 란 표현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러므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한국어' 의 특징은 사람마다 아는 만큼 어떤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파생의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어 즉 한글안에 이미 수많은 뜻의 한자(고대어, 자연어)를 품고 있기 때문이죠 왜 금융상품만 파생상품이 있나요? 이미 금융이전에 언어에 이런 파생언어가 먼저 있는거죠 그러니 금융에 파생도 생기는거죠 인간의 사고 구조가 그렇게 흘러가게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니까요 이러하기에 국어사전이 참 위험한 물건일수도 있어요 고위험상품같이... 국어사전적 뜻만 인지한 체로 살면 이 세상에서 결국 오해와 곡해 또는 사기와 배신감만 느끼며 괴로운 삶만 살 확률이 높아지겠죠 특히 '사랑'한다' 이 말이 더욱더 그렇죠
중간에 예시로 드신 인사채용 문제로 저도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생각에 진정한 문제는 예를 들어 인사문제라면 본인 스스로는 이러이러한 이유들에 의해(사회적 통념에 의하면 합리성에 가까운) 답을 얻고 이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인식하면서도 실은 자기 식대로 판단할 때 (보통의 인간이 그렇듯 판단에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포함된) 그 문제가 더 가중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때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 얼마나 고귀한 인간인지, 스스로를 얼마나 극복하였는지에 따라 인지적, 감정적 공감 같은 개념들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타인들에게 이로운 사람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심리적, 철학적 지식들을 가지고 그것들로 자신을 감싸는 용도로 사용할 경우에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러한 지식의 이해도와는 별개로 이에 전혀 상응하지 못하는 결과들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하이데거 번역된 영상 잘 보았습니다~ 감사해요 저도 기회가 되면 존재와 시간 강의하시는 데 참석하고 싶은데 아직은 여건이 되지 못하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수학스러운 논리 구조가 아닌, 직관/직감적 판단의 경우엔 감정이랑 뭐 별다를게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연속된 논리적 전개의 결과로써 받아들이기보단, 직감에 의한 개소리다 아니다 잠정적 판단 이후에 진짜 그러한가 이유를 끼워맞춰 보니까요. 직감적으로 저거 개소리인데? 라고 느낄 때나 감정적으로 역겨운데? 라고 느낄 때나 비슷한 느낌이겠죠. 수학스러운 것의 근간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느끼는 인간의 추론 회로가 있는데... 이것도 어쩌면 그저 일종의 느낌일 수도 있고요.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에 관해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폴블룸의 심리학은 지극히 주관적인 뇌피셜로 보여요.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공감이 편향됐다고 느낀다면 그걸 조정하려고 할 겁니다. 그게 공감이 하는 일이니까요. 학연 지연에 관해 예를 드셨는데 연줄은 감정적 공감보다는 인지적 공감에 가깝습니다. 감정 자체는 연줄을 의식하지 못하잖아요. 화남, 슬픔, 허무. 이런 게 감정이죠. 연줄은 정보를 통해서 인지하니 인지적 공감이죠. 공감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폴블룸이 제시하는 문제 의식은 공감의 종류나 공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공감의 정량적 문제같아요. 공감 과다의 문제. 공감의 배신은 책 제목부터 자본주의 마케팅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뒤 배경 좀 어떻게 해봐요. 너무 딱딱해 ㅎ
우리사회가 어느때보다도 공감능력에 대한 사회적으로 많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공감이라는 감정적인 경험을 생각과 의견의 동의로도 판단할수 있다면 지금의 우리사회는 앞으로 이성적인 인지적 경험에 의한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 보다는 감정적인 공감능력사회로 빠져들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에 내제된 전통적 사유의 관념적 사고관으로서는 현대문명의 진보적 진화의 변화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물론 공감하는 감정선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공감능력을 요구하는 사회로 가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 것은 지금의 우리사회가 공감능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제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 PC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놓고 이야기 해야 할듯합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서는 공감을 생각과의견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 우리사회에서 공감능력을 요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인지적 경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가치.사고관에 대한 생각과의견에 반하면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폴 블룸이 한국에 와서 강의한 "공감에 반대한다" 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 한국인 관중들은 공감에 반대한다, 라는 말을 공감능력으로 해석하려는 분위기는 생각과의견으로 받아들인다는 모습이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쉽게 이성적인 공감을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죠. 공감을 생각과의견의 동의로 담아낸다면 사회는 매우 편향적일 경우가 매우 높습니다,
아주 통찰력있는 논리입니다. 감정적 공감이라는 것은, 흔한말로 내편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경우로만 쓰일 때가 많습니다. 공감이라는 것을 이해와 도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공감은 말씀하신대로 독이 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공감이라는 단어는 무기에 가깝지요. 일반인에게는 차라리 논리적인 반공감이 훨씬 더 유익할 때가 많을겁니다. 깊은 사유에서 나온 훌륭한 영상 감사합니다.
대개 반갑고 흥미로운 영상인데요^^얼마전 패널 분석에 실시간 댓글 달려는 찰나에 공감과 동감 두 단어가 떠올라 어느게 적절한 용어인지 헷갈려 시간상 공감을 선택하며 개운치가 않아 개념을 확실히 알아봐야지 하고 잠시 잊고있었는데 이 영상을 만나게 됐네요.방금 사전적 의미를 찿아보니 공감 동감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는 점이에요.저가 언뜻 든 생각이 동감과 공감은 뜻의 약간의 차이가 있을거라 추측했는데 심리학자의 연구 분석 관점에서는 굳이 미세한 차이라고 나눌 수도 있겠으나...이 글을 쓰는 지금 떠오른 생각은 중코님이 울나라 학연 지연 연고주의를 대입시킨 승진 예시가 공감도로 표현한 게 오류 아닐까요?승진 예시는 동질감이나 정문화가 있는 유일한 울나라나 유교사상 문화권 나라들의 보편적인 통념이자 불공정한 사회를 낳는 뿌리뽑아야 할 나쁜 악습이라고 보는데...영상 다시 봐야 겠네요
저는 한때 정말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같은 태도를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제 앞에서 자기 친구를 욕을 하더라구요. 듣다가 저는 “걔가 이래서 이랬던 게 아닐까? 걔는 이렇게 받아들인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가 동생이 갑자기 막 화를 내면서 폭풍 울음을 쏟는 걸 보고 당황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언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일단 내 편이 되어주고 내 말에 공감을 해줘야지!”가 요지였어요. 이후부터 내가 뭔가 너무 이성적인 입장에서만 바라보려고 한 게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닫고 다음부터는 듣는 이의 입장을 공감부터 해주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 이런 전폭적인 공감이 과연 옳은지 다시금 회의가 들더라구요. 공감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성적 사고를 가로막고 상대방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집단주의로 쏠리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공감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성적 사고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옛어른들이 말씀하신 “중용”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요즘이네요.
대부분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닌 공감일 경우가 많더라구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관계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문환-y9w 맞아요. 그래서 항상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게 몸에 배다 보니 정작 저는 제 의견을 말하기가 어려워졌네요. 제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억지 공감을 해줘야 하니 어찌 보면 위선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관계를 위한 공감이 한쪽의 무조건적 공감이 되어버리면 이건 정말 공감인 걸까 싶기도 하고요. 원래부터 제가 가족이라 친구라 나라서 무조건 지지해주는 성향이 아니다 보니 제게는 이런 게 스스로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공감을 늘 해주다가 한번은 제 의견을 이야기하니 동생이 불같이 화를 내며 저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과연 우리는 늘 공감만 해주는 게 옳은 건지.. 또 항상 공감만 받아야 하는 건지.. 나에게 공감해주지 않으면 상대가 나쁜 사람인 건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공감으로 유지되는 관계와 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관계를 구분합니다. 어떤 사람과 만남의 자리가 친분을 위한 것이라면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 의견을 내는 자리에서는 제 의견을 말합니다. 하지만 후자는 보통의 삶에서 쉽게 접하기가 어려워 따로 독서모임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헐 이거 INTP이다
컨텍스트가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감정적이라는건 이성적이지 않다는거고, 동감할 수 없는 얘기를 하면 싫어하는게 당연합니다. 이건 중용의 문제가 아니고 정황의 문제 입니다. 만약 동생분이 이성적이고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으면 당연히 생소한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가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님이 이런 자세이시라면 생경한, 예를들어 살인자를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것입니다. 사회과학(실생활)의 영역에서 정황과 무관하게 언제나 좋기만한 태도는 그냥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가끔 제가 제대로 살고 있나 의구심이 들 때 날 것 그대로의 제 뒷담화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니 해결 됐습니다
객관적인 팩트 폭행이 이루어지더군요
결혼이 이렇게 좋습니다 모두 결혼하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김밥 먹다가 밥알 튈 정도로 웃었어요.
찾았다 내 답! 결혼이었구나!
😅
공감이 발전의 방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 공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주입식 교육처럼 "네네" 하고 따르는 것이 아닌, "나는 이 부분이 어떠하기 때문에 공감합니다." 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등의 방식으로요 ㅎㅎ 또한 공감을 스펙트럼 개념으로 보면서 "여기까지는 공감하지만 이 부분은 공감하지 않습니다." 라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채사장님도 비슷한 말을 하셨었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읽어라”라고요.
하지만 사회가 개인화되고, 1인 가구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며 경쟁이 고도화되는 현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정서적 고립감과 불안을 많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실 불편한 내용보다는 공감되는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보입니다.
채사장의 넖고 얇은 지식이란 책이 불편하더라고요 시대에 뒤떨어진 책
영상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저의 경우는 ‘공감한다’는 표현을 상대방을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자주 썼던 것 같네요.
이전에 뇌과학관련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모든 학습에는 어떤 감정이 동반된다-라고 하더라구요. 우리는 항상 어떤 감정, 기분에 처해있고 그것 없이는 어떤 기억이나 학습이 이뤄지지 않는다라고 한 점이 와닿았습니다.
감정과 이성은 상반된 것으로 보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어떤 개념적인 범주를 따로 설정해 두어야 그것에 대해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분류했지 않나 싶습니다ㅎㅎ
개인이 의도적으로 공감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려는 자세, 그리고 여러 의견과 생각에 열린 장소를 만드려는 시도들이 참 중요한거 같아요. 그리고 '음.. 뭔가 걸리는데' 싶은 경험은 대부분 우연히 찾아오더라고요. 의도치 않게 이질적인 것을 맞닥뜨렸을 때, 당황해서 무작정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해해보려는 태도도 동시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공감합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배척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차분히 이해하려는 자세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여담이지만 가학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의 경우 감정적 공감은 못하지만 인지적 공감은 잘 한다고 합니다 계산적으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사람이 어느만큼 고통스러워 하겠구나라고 정확히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단지 생각일 뿐 거기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하죠
뭐랄까... 원래가 그렇지만, 사람들이 더욱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느낌입니다. 이게 건방일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시대가 그런 경향성에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아무래도 정보화시대로 들어러다보니 정보가 양적으로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다양한 정보를 접하기가 접근성은 높지만 소화해내기가 역설적으로 어렵고, 구독서비스와 알고리즘 큐레이팅이 필터버블을 만들다 보니 사람들이 고여가고, 게다가 고여있는걸 즐기는것 같아요. 이런 건 좀 걱정스럽습니다.
영상 중간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언급하신것처럼 여기에는 분명 자본주의의 영향도 강한 듯 하구요.
낯선 생각을 일부러 접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생각의 저변을 넓히고, 다양한 사상의 스펙트럼을 이해하는게 당연하다고 느껴왔는데,
요즘은 특정 주장을 우기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여기는 분위기인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를 따져 동의하거나 비판하는게 아니라, 내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공감하고 그 밖에 있는건 아예 부정하고 공격하려 드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자기경계에만 갇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읽어가는것 같아 조금 무섭고 안타깝습니다.
도구(스마트폰 등)에 의해 사람들이 연결된 만큼 단절된 시대이다 보니 공감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공감을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채우고, 설 수 있는 사람은 부족주의의 경계를 허물고 바깥 세상을 놀이하는 아이처럼 뛰놀겠죠! 🤸♂️🤸♂️
개인적으로, 공감되는 책을 읽을 때의 순기능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상태의 경험, 감정, 표현들을 책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시인들이 대단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오늘도 좋은 내용 잘 들었습니다. 무조건적인 공감, 무조건적인 비판보다는 비판적인 사고과정과 대화의 목적에 부합하는 쌍방향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방적인 악성 댓글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무조건적인 공감 댓글로 자아도취에 빠진 교주들이 있는 것처럼 결국 대화의 목적에 맞춰 밸런스 있는 댓글이나 사고의 진화가 집단적으로 모이면 아주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주제로 마음속에 공감 얻어가기를 기원합니다.
공감을 못 하는 경험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압축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나 상황을 목격할 때,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이해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걸 방해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올리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영상을 감명깊게 보아서 번역본 책을 구해 읽어보았는데, 그 책의 ‘계몽의 한계’ 장을 읽으며 얻게 된 생각입니다.) 바로 ‘잘못된 투사’입니다.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둘 중 하나입니다. 호기심 또는 불쾌함입니다. 저는 불쾌함이 상대를 ‘이해가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할 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인간이기에, 나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대상을 보며 ‘인간이 저럴 수 있나?’ 라는 일종의 비인간화를 하게 되고, 따라서 이해 욕구; 호기심 대신 불쾌함을 느끼는 것이죠.
이런 타인에 대한 비인간화와 불쾌함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까 말한 ‘잘못된 투사’입니다. 몰이해로 인해 발생한 내면의 부정적 감정은 그 원인을 타인에게로 투사합니다. ‘저 사람이 가진 문제 때문에 내가 불쾌해졌다, 저 사람 짜증난다, 싫다!’ 라구요.
논리실증주의에서도 지적했듯이 사실 인간의 모든 지각 활동이 어쩌면 투사입니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대로의 사물을 반영하기 위해 주체는 사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저는 이러한 투사를 아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따라서 ‘공감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정과 상대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배척과 몰이해의 골짜기로 빠져듭니다. 일단 싫으면 이해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평소부터 편견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열린 마음인 사람들은 점점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닫힌 마음인 사람들은 점점 이해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더 이해해 나가는 반면에,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쾌함을 해결하기 위해 더 강한 부정적 투사를 하고, 그건 자신의 세계가 되어 세상을 더욱 편집적으로 바라보게 되니까요.
요약
1. 공감되지 않는 걸 볼 때 우리는 호기심 또는 불쾌함을 느낀다.
1-2. 불쾌함은 상대가 이해가 가능한 범주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 때 일종의 비인간화를 통해 생긴다.
2. 불쾌함이 생기면 상대에게 감정의 잘못된 투사를 하게 되고, 상대가 부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편집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3. 편집적인 생각은 불쾌함을 강화하고 일말의 이해 가능성조차 없앤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있다면, 또는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누구라도, 꼭 답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의견에 대한 비판을 자신을 향한 비난이라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비판을 반갑게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에 깊은 울림을 받아 댓글 처음으로 남겨봅니다.
충코님 책도 주문했어요~
철학서 오랜만에 다시 읽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은 절대 이성적이지 않아요. 습관과 익숙함으로 판단하죠. 다름과 또다름을 통해 배우면서 진화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천재 철학자님이십니다!!!
홍보를 많이많이해서 철학자님 방송을 다 들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 내용을 쉽게 그리고 와닿게 하는 분은 우리나라에 몇분 안 계실듯 합니다!!!!
이 좋은 방송을 무료로 듣다니~ 감동!!!
독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독하고 댓글은 처음 답니다. 개인적으로 감정적 공감이 누적되야 인지적 공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누군가는 팔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 감정적 공감이 먼저겠지만, 인지적 공감 때문에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한 또 다른 개인도 있기 마련입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고 유가족에 대해 인지적 공감으로 반응하는 누군가는 있을거구요.
우위를 나누기는 힘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에서 은연중 감정적인 단어가 많이 나오는 현상은 반대로 감정이 매말라버린 여유없는 사회분위기의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다들 이해받고 이해하고 살고 싶어하니까요
한국포함하여 아시아 국가들은 실수나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너무 수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공감 이전에 이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
진짜 마인드 너무 멋지네요 제스타일이에요! 지적이나 편협하지 않고 방법에 있어서도 깔끔하고! 저는 일반인들과 다름을 늘 추구하고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공감'하는 내용이네요.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할수록 다원화된 민주 시민으로 성장 할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봅니다.
나의 의견에 공감이 아닌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굉장히 큰 에너지가 필요한 행동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생각하시려는 모습에 많은 감탄과 배움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한편의 글을보는 느낌이예요. 기승전결이 확실한 그런 멋지십니다 머리를 땡하게 하는 영상이네요.
아직 젊으신데 통찰력이 놀랍네요
많이 배우고 가게 되어
고맙습니다!!!!
공감은 결국 이성적인 부분과 감정적인 부분이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회에서는 이제 사회적인 용도에서 공감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감정이 즉각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부류되기에 이성보다 조금 낮다는 인식이 있는 듯하지만, 이성도 결국은 타인의 언어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에 치중 되거나 변형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성에 대한 부분을 너무 신뢰하는 것도 위험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뭐 인간이라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게 쉽지 않지만 결국 뭐든지 '중용'이구나 하는 생각도 지속해서 드네요. 여하튼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충코님:)
마지막에 감정과 생각이 생각보다 서로 따로따로이지 않다는 말씀은 실제로도 근거가 있습니다 뇌를 다쳐서 감정을 못느끼게 된 사람은 의사결정과 가치판단에서 판단장애가 같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감정을 못느끼는 사람은 지능에 문제가 없어도 특정한 종류의 인지적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말씀하시는 안 좋은 예에 공감이 동질감을 느끼다에 공감 아닌가 해요 그 활동이 좋다 안 좋다로 정의되는 것은 무리인 것 같고 다만 문제가 편가르기식 논리로 전락해 버리는 게 문제가 될 것 같아요 사회적 활동하면서 정도에 소속감은 필연적 필수적이라고 보는데 과도한 옹호는 고립되게 만들거나 또는 배신감을 들게 만들죠 차연에 개념처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수가 있는건데 자신이 편이 필요한건지 생각이 필요한건지 잘 이해해봐야 할 것 같네요
매우 좋은 지적이시네요. 그래서 세상에 현명한 사람이 별로 없는거죠. 편향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죠.
공감하다는 동의하다와 감화되다의 중간에 있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아요
썸넬 제목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 옵니다
공감되지 않는 경험이 내게 중요할 수 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ㅎㅎ
자주 찾아와서 뇌가 말랑해 지는 시간을 가져 봐야 겠습니다 감사해요
감정의 충격에서 생각의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마치 이성과 감성을 분리할 수 있다는 듯한 늬앙스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뇌가 그렇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감정을 배제하고 생각하려는 노력은 할 수 있으나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뇌를 공부할수록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구조에서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지 고심해보는 것이 삶을 더 즇은 방향으로 이끌 것 같습니다.
공감이 되지 않는생각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양날의 검 같습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면 공유하는 윤리적 직관에서 벗어난 생각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영상 매번 감사드립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8:55부터 '~의견에 공감합니다'라는 문장이 어색하다고 느끼는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충코님은 이후 agree와 accord의 어원을 찾아보고 어색함을 덜 느끼시게 된 것 같지만, 저는 단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의미가 바뀌기 때문에 원래 기원의 의미대로 꼭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폴 블룸의 감정적공감/인지적공감은 확실히 구별되는 서로 다른 종류의 공감입니다. 따라서 옛날부터 서구권에서 쓰인 단어들(agree,accord)을 우리가 그대로 따를 필요없이 "동의"와 "공감"의 구별을 명확히 하는게 감정적공감/인지적공감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자신의 감정/생각을 분리해 상황에 따라 더 좋은 공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감이라는 말이 이미 있는데 공감이라는 단어로 퉁치는 상황은 어휘의 세밀함이 사라지는 요즘 세태를 고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안팔리는 창작을 하고 있습니다. 잘 먹고 사는 것 저도 참 좋아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나아지도록 노력해보렵니다. 좋은 생각들 감사합니다!
청개구리성격 인사람들은 보통사람들 보다는 철학적인사람인듯 하네요
그리고 이런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늘 영상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공감합니다😅 이성적인 공감, 비판적인 태도는 상대방과 자기 자신이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내 부족함을 인지하고 개선해 나가는 것, 내가 감정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항상 이성적일 수는 없듯이 이성적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상적 공감으로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의 심리적인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이성적 공감 만큼 중요한 능력이라고 봅니다!😊
요약: 감성적 공감: 힐, 이성적 공감: 딜
인지적 공감, 열린 마음과 사고… 가슴 속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공감’이라는 단어가
생각의 일치, 동의 한다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이 되어서
공감을 하지 않는다는게 ‘내 의견’에 반기를 든다 /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부정적인 인식을 주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친구든 지인이든 누군가와 의견을 공유할 때, 내 의견에 대해서 상대방이 ‘나는 네 생각에 공감이 안되는데..?’라고 하면 반감이 들기 쉬운 것 같아요.
공감이 너무 폭넓게 사용이 되어서 생각과 감정을 분리하지 않고 사용되어서 발생하는 문제라도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하는 늬앙스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같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나는 네 생각과 감정에 공감이 안돼
라고 말을 들으면, 가깝거나 의지하던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게되면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진정성 있는 말을 하고 싶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이런 감정과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건 너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네가 불안을 느끼는 거니까 너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줘서 결국 너에게 피해가 가는거라,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하지 않으면 좋겠어. 공감으로 인해 감정에 대한 손실이 생기잖아. 그리고 그로 인해 에너지가 고갈되니 결국 너를 위해 이러한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 좋지 않을까요?
총기사고 예시 등을 잘 들어주셔서 말씀해주시는 내용을 저도 감명깊게 들었어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저러한 일이 나에게도 발생하는게 아닐까?‘하는 공포심 때문에 감정이 혼란스러워지고, 그러한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 피곤해지는 느낌이어서, 과도한 공감이나 잘못된 감정에 대한 주변인들의 공감은 내가 잘못된 감정에 매몰되게 하니 위험하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생각이 전환되는 아주 좋은 영상이었어요.
말씀하신대로 공감이라는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어서
’나는 공감 안되는데‘라는 말이 상대에게는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조심해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공감이 안된다고 한다면, 그 표현을 잘 풀어서 하는게 맞다고봐요.
그치만 디테일한 설명을 피곤해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자기 주장과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과 대화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튼 정말 도움되는 영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영상에 공감해버렸네요.... 충코님 성장에 필요한 비판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아요. 공감되지 않는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를 변화시키려 노력해야하는 것도 맞는데, 결국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세상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생각들은 더 많은 이에게 공감을 주는 생각들인 것 같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강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종종 내집단 외집단을 분리하는 식으로 생각들이 발전하기도 하는 거 같고요. 역시 중요한 건 항상 중용을 지키는 개인과 단체가 아닐까...합니다.
쉽게말하면 완벽하게 주관적인 경험을 추구하는것과 비슷한것같아요
세상을 바꾸는 것들은 보통 인지하지 못한 것들을
혁신하는것과 가까워서 공감이랑은 많이 다르죠
지동설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만 봐도 공감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이거든요
@@fhrhjghh914 완벽하게 주관적인 경험이나 감정을 느끼는게 중요한듯합니다 그렇다면 그자체로도 첫번째이자 고유하니까요
@@fhrhjghh914 하지만 천동설과 뉴턴역학 대비 부족한 예측능력을 가지고 있던 초기 가설 상태를 벗어나서 포괄적인 주류이론이 될 수 있었던건 역시 당대 학자들의 협업의 결과물이고, 초기에는 학계 내부의 인지적 공감이 그런 협업을 이끌었다고 봅니다.
우와~
이분 찐이다.
공감보다 공감되지 않는 것에 대한 경험과 그런 창작물이라..
내가 요즘 한창 고민하고 있던 주제인데...
극 공감ㅋㅋ
전달력이 참 좋은 유튜버
언제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생각의 깊이를 늘릴수 있어서 좋습니다.
공감만 남아버린 읽기나 대화가 문제죠..
논리와 사실, 감정과 지향을 함께 읽어 낸다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논리 없는 공감은 독단적 경향을 띌 수밖에 없겠죠.
공감 없는 논리 역시 진정한 대화라고 보기엔 힘들거구요.
자기가 공감되는 내용의 책만 보고 공감되는 정보만 골라서 보는 것이 진짜 위험한 행동인게 그만큼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편협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극우, 극좌 등 극단적인 성향까지 가게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저도 다른 의견, 다른 시각에서 나온 정보 등을 받아들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내용이네요...집단적인 사고를 잘 가지는 한국인의 특성상 많이 생각해봐야 할 소재인것 같습니다.
공감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할 때는 불의한 사고나 천재지변 등 타자나 이웃이 재난을 당했을 때 한 개체가 동정이나 연민을 느낄 때 공감이라 하고 공감능력을 가졌다 없다로 표현되는 감성 지수를 나타낸다고 보는데...그 외에 다른사람의 의견일치는 동의 단어로 표현하는 게 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네요.저도 다른이의 의견의 공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이게 맞나?못마땅하고 먼가 개운치가 않았는데 '동의'라는 표현이 괜찮은 것 같네요.같은 뜻이긴하지만....ㅎㅎ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는 없다고 악플도 수용하는 열린마인드가 마음에 와 닿고 심장에 울림이 오네요.
너무 인지적 공감 됩니다^^
정치(종교)병에 걸린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영상입니다. 자기가 믿는 주장과 다른 이야기는 제대로 들을 생각 없이 바로 무시하고 욕하는 좌파, 우파들, 종교인들.. 맹먹적인 사이비, 정치 지지자들... 나와 다른 의견이나 비판을 겸허히 듣고 잘 살필줄 아는 건강한 사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유튜브 댓글은 생전 처음 남겨봅니다....님의 말씀이 상당히 일리는 있는데요....너무 이상주의에 치우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동물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거든요. 자신과 성향이 다르거나 이질적인 것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갖는게 우리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간의 수많은 전쟁, 학교에서의 왕따, 부부간 갈등, 가족간 갈등 이 모든 것들이 사실 그 부산물이죠. 단순한 갈등도 큰 싸움으로 번질수 있는데 그게 만약 정치나 종교 같은 거대담론에서 공감이 안되고 이질성을 겪는다면 사회가 내전으로도 갈수있구요. 사실 저도 맹목적으로 자신의 의견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어떤 사람들에겐 눈살이 찌푸려지는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또한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그리고 현대사회는 워낙 스트레스가 심한 사회고 거기다 한국은 OECD 최악의 행복지수를 가진 나라라 더욱 더 사람들이 공감에 굶주릴수밖에 없는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반합으로 인한 성장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공감만 한다면 반이 나올 수 없으니 합도 없고 성장도 없어질 가능성이 커지니
개인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이 다른 의견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좋아합니다.
인지적 공감은 공감이라기보다는 반응이 아닐까 하네요.
정말 배우는게 많은 채널입니다.
물리학자가 물질을 계속 쪼개내듯...철학자인 충코님은 생각을 계속 잘게 쪼개내고 성질을 밝?혀보고 맛보고..삶의 재미시군요 허허
제 생각에 한국에서 공감이란 "내 기분에 맞추면서 맞장구 치는 거"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거지, 무조건 "그래 니가 옳고 걔가 잘못했어"라고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예를 들어 어떤 엄마가 자식이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고 왔다고 칩시다. 때린 이유를 물었을 때 'ㅇㅇ보다 나한테 과자를 덜 나눠줘서 화가 났어"라고 하면 무조건 자식한테 잘했다고 해줘야 할까요? 속상한 마음은 공감해줘야하겠지만 때리는 건 안된다고 확실히 말을 해줘야 합니다.
어린아이 예가 잘 안 다가오면 어른을 예로 들어봅시다.
내 친구가 어린시절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음식에 대한 집착이 생겼고, 성인이 된 후에 폭식이 습관이 되어 위염, 고지혈증, 비만등 건강에 이상이 왔다고 상상해봅시다. 친구가 어린시절 불우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 안타깝다고 할 때 '그래 너 너무 힘들었겠어. 니가 왜 이러는지 알겠어'라고 우쭈쭈해주기만 해야 좋은 친구일까요, 아님 과거는 안타깝지만 생활습관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해줘야 좋은 친구일까요?
공감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때가
많다는건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공감 그 자체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을 보고 나서, 과학사에서 과학이 지동설, 진화론, 양자역학 등 인간의 직관에 반하는 지식을 발견하여 인간의 지성을 확장시킨 것이 떠올랐습니다. 한 개인에게도 내가 알던 것, 선입견에 어긋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지적 자극과 인격적 성숙에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걸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때가 많지만..
공감은 주로 긍정적인 부분을 공통분모로 둘 때 쓰여 질 때가 많기 때문에 이성적인말이나 의견에도 두루 쓴다고 생각합니다.
공감을 좌표로 나타낼 수 있다면 감성적 영역의 표현이므로 사실 정확하게 같은 지점을 나타 내는지 또한 타이밍이 다르므로 시간차로 나타나는 정황?차이가 있으므로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요.
부정적인 부분에서도 예를 들면 스톡홀름증후군 정도에 분별없는 공감?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위험한 경우지요.
세상에 같은말은 없다고 봅니다.
완벽하게 같은 단어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비슷한말이 생기지 않지요.
즉 어떤 것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동의하나 다 공감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5:40 그는 새디스트인가?라는 철학적 고찰을
다수가 자신을 공감해준다고 그걸 믿고 게을러져 발전을 못한다는 것은 궤변입니다 저는 반대로 공감으로 인해 사회적 외톨이가 희망을 되찾는 순기능에 주목합니다
맞아요 전문가들도 지지가 사회적 외톨이들을 끄집어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했구요
공감을통해 게을로져 발전을 못하는 ‘경우’도있고 근상님이말씀하신 순기능이라는 긍정적인 ‘경우’도 공존하는데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긍정적인 경우에 주목을 하니 주목받지 못한 경우를 인지하지 못했을때 문제가 생기니까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는것 같네요 무조건 한쪽측면만 옳다가 아니라 공감이란것의 양면성에관한 이야기쯤으로 해석됩니다
저는 내용이 100% 다 공감된 책은 없어요 그 속에서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안되는 부분도 존재하죠 그런데 100% 다 비공감되는 사람은 있더라구요ㅎㅎ 인간관계를 유지 하려면 공감할수 없어도 공감한척 해야할 때가 있고 그러면 또 나중에 인간관계에 현타가 오죠. 사람은 바른말 하는 사람보다 자기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원한다고 합니다. 자기편을 원하는거죠 그리고 이것을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죠. 대부분 신념은 없고 돈만 쫓는 사람들이죠. 제 주위를 봐도 돈과 권력이 있는 곳은 늘 이것이 통하더군요. 안타깝게도 자신의 신념을 갖고 바른말을 하거나 바른일을 하려는 사람은 질려서 나가 떨어지거나 그냥저냥 타협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죠 철학을 알면 알수록 현실세계와의 괴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정말 철학이 필요한곳엔 철학이 없어요.
요즘같은 시대에는 중용 필요해 보입니다. 구독자가 몇십만인 어느 철학, 책소개 유투버가 중용을 내세우면서 한다는 말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싸우지 마라 아무리 설명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다 보면 우리 대신 싸워줄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과연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어떤 영웅을 원하는 걸까요? 그 영웅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전 좀 두렵습니다. 마치 양떼들에게 늑대가 나타나면 무조건 양치기에게 알려라 가르치고 있는 양고기 먹는 사람 같아서요^^
작년 11월경에 서점에서 책으로 먼저 작가님을 알게 됐는데, 이제야 유툽으로~~
내용 잘 들었습니다. 공감은 비판적사고랑 어울리는 단어..죠..? 작가님이 어떤 면에서 혼란?을 느꼈을지 이해가 가네요. 성숙한 토론문화. 반대 의견을 수용할줄 아는 자세가 필요한데…흑백논리로 상대를 나눠버리는 문화..?가 공감의 순기능을 후퇴시키는거 같네요..
오오 저는 누가 "공감합니다." 라고 말하면 "이제 곧 너의 의견에 반박할 것이지만 기분 나쁘지 않게 미리 쿠션을 까는 거야" 정도로 이해되는데 그렇게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가보군요.
과연 인간인 이상 자신이 비공감하는것을 공감할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떠난 완벽히 다른 얘기라고 볼수도 있으니까요 점점 경험이 쌓일수록 많이 보이게 되는게 어차피 자신이 비공감하는 것을 공감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네가티브하게 공격을 해서 이기려고 하는게 인간세상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감성과 이성이 모두 일치하면 공감한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이성적으로는 네 말이 맞다면 동의한다.
재미있는 소재라 한번 썰을 풀어보면요
우리가 언어을 사용하는 가장 기본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함이잖아요 그런데 어찌 된것이 언어를 사용함으로 인간관계의 이해관계에 오해나 곡해 더 나아가 상대에 대해 사기나 배신감 마저 느낄 때가 다반사예요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중 가장 주된 바는 바로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각각의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들의 사고의 폭이 생각보다 꽤나 차이가 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위의 영상에서 예를 드신 것처럼 '공감' 이란 단어로 얘기해보자면 누군가는 정말 상대의 글이나 말을 보고 들으며 자신의 뇌리에 언뜻 스쳐지나가는 좋은 느낌 한 줄기만 가지고도 '공감한다'라는 어휘를 사용할 수도 있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글과 말에서 주제와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는 즉 전체적 의미를 살펴본 후에 '공감 한다' 라 할 수도 있구요 또 다른 누군가는 위의 두가지 경우를 다 갖추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생각과 글과 말을 한 상대의 생각구조에서 어느정도 생각의 차이가 발생하는지 어느 부분에서 빼고 더하고의 가감이 필요한지 그러한 차이로 발생한 생각의 변화가 발전적인지 퇴보하는 쪽인지 발전적이라면 동의가능하며 인정해줄만한지 까지 즉 느끼고 살펴보고 가감한 부분으로 차이의 변화까지 선행과 파악을 한 후에 '공감한다' 란 표현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러므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한국어' 의 특징은 사람마다 아는 만큼 어떤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파생의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어 즉 한글안에 이미 수많은 뜻의 한자(고대어, 자연어)를 품고 있기 때문이죠 왜 금융상품만 파생상품이 있나요? 이미 금융이전에 언어에 이런 파생언어가 먼저 있는거죠 그러니 금융에 파생도 생기는거죠 인간의 사고 구조가 그렇게 흘러가게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니까요
이러하기에 국어사전이 참 위험한 물건일수도 있어요 고위험상품같이...
국어사전적 뜻만 인지한 체로 살면 이 세상에서 결국 오해와 곡해 또는 사기와 배신감만 느끼며 괴로운 삶만 살 확률이 높아지겠죠 특히 '사랑'한다' 이 말이 더욱더 그렇죠
충코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이 순간부로 충코님에게 늘 욕할 것을 다짐합니다.
중간에 예시로 드신 인사채용 문제로 저도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생각에 진정한 문제는 예를 들어 인사문제라면 본인 스스로는 이러이러한 이유들에 의해(사회적 통념에 의하면 합리성에 가까운) 답을 얻고 이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인식하면서도 실은 자기 식대로 판단할 때 (보통의 인간이 그렇듯 판단에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포함된)
그 문제가 더 가중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때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 얼마나 고귀한 인간인지, 스스로를 얼마나 극복하였는지에 따라
인지적, 감정적 공감 같은 개념들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타인들에게 이로운 사람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심리적, 철학적 지식들을 가지고 그것들로 자신을 감싸는 용도로 사용할 경우에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러한 지식의 이해도와는 별개로 이에 전혀 상응하지 못하는 결과들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하이데거 번역된 영상 잘 보았습니다~ 감사해요
저도 기회가 되면 존재와 시간 강의하시는 데 참석하고 싶은데
아직은 여건이 되지 못하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수학스러운 논리 구조가 아닌, 직관/직감적 판단의 경우엔 감정이랑 뭐 별다를게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연속된 논리적 전개의 결과로써 받아들이기보단, 직감에 의한 개소리다 아니다 잠정적 판단 이후에 진짜 그러한가 이유를 끼워맞춰 보니까요. 직감적으로 저거 개소리인데? 라고 느낄 때나 감정적으로 역겨운데? 라고 느낄 때나 비슷한 느낌이겠죠.
수학스러운 것의 근간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느끼는 인간의 추론 회로가 있는데... 이것도 어쩌면 그저 일종의 느낌일 수도 있고요.
매서운 망치질로 칼날을 연단하듯이 사람도 비판과 반박으로 더 성숙하게 단련되는 것 같습니다 ㅎㅎ
정말 공감되는 영상이군요
공감의 위험성중 하나가 잘못된걸 공감해서 잘못된 길로 빠져들수 있는게 있기때문에 세상을 볼떄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보는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음
이해한다는 것과 공감의 확실한 차이는 무엇인가요???무식한 할매가 알고 싶어서요🎉❤첫 댓글합니다😮 좋은 영상감사합니다 😊
어떠한 주장의 맞고 틀림을 판단하는 기준이 근본적으로 감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공감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3등이네요. 주제가 재미있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생각나네요.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내용은 특히 생각의 지평을 넓히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맞아요 저도 목차 쭉 보고 아 여기서 얻을 게 없겠구나 하면 절대 안 삽니다
남자는 출산을 해본적이 없고
여성은 군대를 가본적이 없다
서로 공감대는 없지만 노력해야하는 부분😮
공감과 동의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먼저 일어나고 동의라는 것은 그 공감의 감정에 대해서 조금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주석을 다는 심리 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인지과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안그래도 공감되지 않는 소설을 읽는 게 저를 넓힌다고 느껴서 일부러 읽고 있습니다 ㅎㅎ
적을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군요 !! 적은 주로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인간인데, 그의 행동양식을 보면서 더욱 강한 정신을 가지게 될 수 있겠네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에 관해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폴블룸의 심리학은 지극히 주관적인 뇌피셜로 보여요.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공감이 편향됐다고 느낀다면 그걸 조정하려고 할 겁니다. 그게 공감이 하는 일이니까요. 학연 지연에 관해 예를 드셨는데 연줄은 감정적 공감보다는 인지적 공감에 가깝습니다. 감정 자체는 연줄을 의식하지 못하잖아요. 화남, 슬픔, 허무. 이런 게 감정이죠. 연줄은 정보를 통해서 인지하니 인지적 공감이죠. 공감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폴블룸이 제시하는 문제 의식은 공감의 종류나 공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공감의 정량적 문제같아요. 공감 과다의 문제. 공감의 배신은 책 제목부터 자본주의 마케팅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뒤 배경 좀 어떻게 해봐요. 너무 딱딱해 ㅎ
내가 죽도록 증오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아무리 논리적이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기에 공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사회가 어느때보다도 공감능력에 대한 사회적으로 많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공감이라는 감정적인 경험을 생각과 의견의 동의로도 판단할수 있다면 지금의 우리사회는 앞으로 이성적인 인지적 경험에 의한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 보다는 감정적인 공감능력사회로 빠져들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에 내제된 전통적 사유의 관념적 사고관으로서는 현대문명의 진보적 진화의 변화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물론 공감하는 감정선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공감능력을 요구하는 사회로 가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 것은 지금의 우리사회가 공감능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제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 PC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놓고 이야기 해야 할듯합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서는 공감을 생각과의견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 우리사회에서 공감능력을 요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인지적 경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가치.사고관에 대한 생각과의견에 반하면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폴 블룸이 한국에 와서 강의한 "공감에 반대한다" 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 한국인 관중들은 공감에 반대한다, 라는 말을 공감능력으로 해석하려는 분위기는 생각과의견으로 받아들인다는 모습이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쉽게 이성적인 공감을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죠. 공감을 생각과의견의 동의로 담아낸다면 사회는 매우 편향적일 경우가 매우 높습니다,
바사삭 쿠크다스 멘탈은 충코님의 탄력성이 강한 멘탈을 매우 부러워 합니다...ㅎㅎ
2015년 무렵부터 난무한 공감 의 무분별한 의미확장에 대해 인지하신 분이 계셨군요..
내가 누군가에게 항상 공감한다면 그 사람은 내가 듣고 싶은 말만하고 보고 싶은 행동만 의도적으로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죠 ㅎㅎ
동의는 안하지만 상대방 기분 나쁘게 안하려고 공감이란말을 쓰기도 해서....ㅋ
"니 말에 감정적으론 동의하지만 논리적으론 니 말 틀렸어"
공감이라는 것이 꼭 좋지만은 않다고 하실때 공감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도덕관념과 일치하는 자신의 가치 체계가 있다면 공감이 유용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진 않겠군요..
공감합니다 ㅎㅎ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최근에 하고 있던 생각과 맞닿은 부분이 있는 영상이었습니다. 영상을 본 뒤에 새로운 생각들을 더 해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
아주 통찰력있는 논리입니다. 감정적 공감이라는 것은, 흔한말로 내편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경우로만 쓰일 때가 많습니다. 공감이라는 것을 이해와 도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공감은 말씀하신대로 독이 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공감이라는 단어는 무기에 가깝지요. 일반인에게는 차라리 논리적인 반공감이 훨씬 더 유익할 때가 많을겁니다. 깊은 사유에서 나온 훌륭한 영상 감사합니다.
야 이 충코 씨볼로마!!!!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평론가들 말은 절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머리가 커버려서 유명감독을 숭배하는경우가 많아요 그들이 말하는 걸작은 나에겐 졸작일수있고 내가 재밌으면 그게 바로 걸작입니다
형님 취업 어디 하시려구요?
취업은 의치한약수 아니면 공대입니다
대개 반갑고 흥미로운 영상인데요^^얼마전 패널 분석에 실시간 댓글 달려는 찰나에 공감과 동감 두 단어가 떠올라 어느게 적절한 용어인지 헷갈려 시간상 공감을 선택하며 개운치가 않아 개념을 확실히 알아봐야지 하고 잠시 잊고있었는데 이 영상을 만나게 됐네요.방금 사전적 의미를 찿아보니 공감 동감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는 점이에요.저가 언뜻 든 생각이 동감과 공감은 뜻의 약간의 차이가 있을거라 추측했는데 심리학자의 연구 분석 관점에서는 굳이 미세한 차이라고 나눌 수도 있겠으나...이 글을 쓰는 지금 떠오른 생각은 중코님이 울나라 학연 지연 연고주의를 대입시킨 승진 예시가 공감도로 표현한 게 오류 아닐까요?승진 예시는 동질감이나 정문화가 있는 유일한 울나라나 유교사상 문화권 나라들의 보편적인 통념이자 불공정한 사회를 낳는 뿌리뽑아야 할 나쁜 악습이라고 보는데...영상 다시 봐야 겠네요
저는 제 생각이 무조건 옳고 다른사람들의 생각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왜냐하면 이세상은 메트릭스이고 전 빨간약을 먹은 사람이고 다른사람들은 메트릭스 시스템에 세뇌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