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2 여기서 말한 22년 개량식은 1922년이 아니라 1889년 (메이지 22년)을 말하는 겁니다. 1922년이면 1차대전도 끝난 뒤인데 이땐 무라타 소총이 아니라 아리사카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죠… 일본군이 서양 열강에 비해 뒤쳐졌다지만 1920년대까지 단발소총 쓸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밍고-u7p 본인 박사논문이랑 전문분야가 본인피셜 조선 중기 사회인디 당연히 우리수준에서는 전쟁도 전문가지 역사학자들 기준으로는 곁다리에요. 뭔 말같도 않은 소리를 당연히 본인도 전쟁사쪽으로 연구는 많이 하셨지 역사학자 자체가 일반인들은 범접 불가로 연구들을 하는 사람들인데. 경제학자가 케인즈쪽으로 팠다고 보수턴학파를 설명을 못하겠어요? 그리고 박사님도 자주 틀리십니다. 팩트체크 하면 받아들이시고 인정하니까 비판을 안받는거지 전쟁사도 파면은 시대마다 전문가가 다 따론데 그리고 내가 언제 박사님이 아는게 짧다 했어요? 사회 전문인데 전쟁사쪽도 절어신다고 한거지?
16:32 유럽전쟁에서 여러국가의 참관인들이 오는 것이 돈벌이는 후대에 생긴 일일것 같습니다. 주변국들과 전멸전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심판과 관중이 그 승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니, 타국의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봐 줘야만 했던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단순히 일본에게 당했다는 측면만 너무 강조해서 가르치는 것 같아 아쉬움 1. 오랜 기간 격동하는 국제 정세에 귀 닫고 눈 감고 지낸 나라가 있었고 2. 국제 정세의 흐름을 타 부국과 강병을 이뤄, 패권을 노리던 강대국이 있었다 3. 한국 일본이 중요한 게 아니라 1~2의 구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며 4.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자면, 현재 한국-중국의 구도가 과거와 같다 5.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국제 정세에 눈 뜨고 함께 반중전선 펼칠 아군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둬야 한다 까지 가르쳐야 할 텐데..
@@user-sd8fe8ij7l 그러게요. 역사는 드라마로 배우면 안되는데, 나는 고딩때까지도 을미사변때 일본군은 노란 서양식 군복에 소총 들고 쳐들어왔는데, 조선 궁궐수비대는 상투에 검은색 포졸옷 입고 삼지창 들고 싸운줄 알았음...나중에 조선군들도 서양식 군복에 독일제 소총 들고 싸웠다는것 알고 한국 드라마작가들은 매국노라고 생각했음.
질문이 좀 어이없는게, 이미 임용한박사님이 당시에 일본군 4000명이 가용병력으로 한성에 있었고 조선측에 싸울 수 있는 병력은 500정도 밖에 안됐다고 언급하셨는데, 거기에 신식무기를 갖췄는데 왜 졌냐는 좀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같음. 4000명 대 500명이라면 애초에 숫적으로 불리한데 신식무기는 우리만 갖고있던게 아니지 않나;
왕조시대에 민란은 반란입니다 왕이 이땅과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의 법규상 그렇습니다 왕건이나 이성계같이 새로운 왕조를 세운경우는 예외로 건국으로 쳐줍니다 그러나 동학반란은 우금치에서 조선왕조의 군대와 일본군대에 박살났습니다 당연히 조선왕조가 엄연한 조선의 주인이던 세상이었으므로 역사에서는 반란으로 기록 되어야 맞습니다 국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역사관에 혼란을 줍니다 김사미의 혁명 정중부의 혁명 홍경래의 혁명이 맞는 말인가요? 더군다나 일본군과 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외국군대 전쟁터로 만들어 국가와 백성들이 피해를 보게 만들었으며 더구나 일본군이 눌러앉자 결국 한일합병으로 나라까지 잃게 만든것이 동학반란 입니다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우리도 메이지 유신에 버금가는 개혁으로 근대화 할수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미국이 통상으로 자의든 타의든 기회를 줬건만 그걸 버리고 어리버리 꼭꼭 잠그다..... 후손들만 여지껏 고통속에 살고 있네. 당시 일본과 대등한 전력이었음 지금 우리 분단이 되었을까? 결국 욕먹을 위인들 다 정해져있음 ㄷㄷㄷㄷ
대등한 전력일 수가 없었어 비슷한 시기에 개화 했어도 나라엔 체급차이도 중요하고 지형도 중요함 우리나란 자원 거의 자급자족 불가 어찌어찌 개화해도 수출할 만한 자원도 거의 없어서 드라마틱하게 발전하거나 자금을 들여올수가 없었음 그거에 비해 일본은 수출할만한 것들이 많고, 식량도 풍부하고 땅넓지 인구는 그 당시 이미 1억명이 넘지 같은 시기에 개항 했어도 우리는 졌음
또 하나 어떤 사람들은 개항을 하면 다른 서구 열강 세력에 방해로 인해 일본에게 져도 식민지는 안됐을거라 하는데.. 그 당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등 모두가 동아시아는 중국 말곤 굳이 가서 집어먹을게 없었음 심지어 그 중국에서도 오히려 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상황이였고 그나마 지형적으로 바다와 가까운 일본마져도 굳이 저길?.. 인데 한국이면 미국처럼 거의 쳐다도 안보고 가스라테프트 조약 처럼 야 조선줄게 다른거 우리가 가질게 정도의 패임
세계사, 국제정치 배우고나서 국사를 배워야 왜곡없고 당시 사람들이 그런선택을 왜? 했는지 알수있는데 반대로 하다보니 특히 근현대사는 진짜 제대로 알거나 이해한사람이 별로없음 기록이나 증언도 사실 적은데 자기입맛대로 골라서 편향된 자료들을 논문이나 책에 그냥 이건 역사다 하는거 처럼 나오는데 근거가 빈약한게 천지임;; 근데 이게 교과서에도 많이보임
6:20 멍청했든 아니었든 결론은 동일했습니다…자신의 왕권을 지킬 능력조차 없었던 정부가 자기 정권을 유지하려고 잘 알면서도 농민을 상대로 외세를 끌어들인 판단은 용서받기 힘들어보입니다. 국민이 혁명으로 정부를 무너뜨리지 못했던 점이 아쉽고, 혁명이 너무 늦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동학 잔당들이 고종 치하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도 현실이어서 한편으론 일진회가 된게 이해가 되기는 했음 고종은 잔인한 명령을 민보군한테 내려서 살아남은 동학 잔당들 찾아내서 모조리 불에 태워 죽여버리라고까지 했음 거기다 동학의 목표였던 민비가 명성황후가 되어서 반일의 상징이 된 것도 원인이기도 하고 목표 대상이 반일의 상징이라면 동학은 그 반대가 될 수밖에 없음 바로 친일
대한제국에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무기를 수입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는 했지만, 통합된 무기체계를 도입하지도 못했고 전적으로 군대 양성에 집중하지도 못했습니다. 누가 한국 역사를 난도질했다며 탓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한제국이 최선을 다했는데 패배의 역사를 교육받았다? 오히려 그 반대죠. 조선의 축적된 모순과 패배를 숨기고, 마치 조선 왕실에서 최선을 다해 나라를 지켰던 것처럼 포장되어 있는 거죠.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말씀 중, 경복궁에서 일본군과의 충돌 당시 경복궁 무기고에는 크루프산포 8문, 개틀링기관총 8정, 그 외의 소총이 무려 2000여 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도 한낱 필부에 불과한 고종은 그대로 꼬리를 내리죠. 뻔히 나라가 어찌될 것을 알면서도 본인 한목숨 보존하고자.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우금치에서 전투에서 도주하기 바빳던 그냥 지들도 권력한번 잡아보고자 반란을 일으켰던 민비일족들의 부정부패 정치로 어렵게 살던 동학교도 들이었을뿐입니다
@@Joyen9787 서구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조차도 서양열강들이 뜯어먹고 남은 것은 중국땅의 20%도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는 동남아진출을 위해서 한반도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종이 아관파천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팔짱끼고 있으면 바보지요. 일본은 일본열도의 안보를 위해서 한반도 병합은 불가피했습니다.
고종은 에당초 민비와 흥성대원군에 꼭두각시에 불과했음 누군가한테 배우고 실천해야 성장하는대 흥선대원군하고 민비에 꼭두각시로 산 고종이 멀 알겠음 자기들이 해먹을려고 하는 인간들 수두룩 빽빽하고 고종은 제대로 배운것도 없고 경험도 없던 왕이었음 그런왕한테 무언가를 바라는거 자체가 힘들고 저당시 암울한 조선은 정조나 영조 어디뭐 세종이와도 결코 피할수 없는시대였음 유렵에 유명한 인재들이면 모를까 저때조선은 누가와도 뜯어고치기 힘든나라였음 진짜 뜯어고쳤으면 두손들고 절해도 이상할게없을정도 저당시 조선은 나라 상황이 좋지가 않았음 다른나라도 매한가지죠 조선만 그런게 아니라 지금이렇게 우리나라가 발전한것만으로도 선조들에 노력과 지혜도 담겨있으니 가능했던거죠
임용한 교수님 많이 좋아했는데 경복궁 쿠데타 사건에 대해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이 서울로 올라오자 동학진입군으로 나간 초토사를 급히 부르고 방어가 용이한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그러자 경군이 복귀하면서 어느정도 우위를 가지자 다시 경복궁으로 복귀한거고요. 청군 철수를 요구하는 일본군의 요구를 거절하자 무력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데, 이때 광화문과 건춘문에서 궁궐수비대를 붙잡아두고 영추문으로 진입하고자 1개연대를 동원합니다. 영추문에만 1개연대인데 총병력 1000명은 될 수가 없습니다. 이미 평양 기영,당시 친군서영이 이를 대비해서 경복궁에 숙위하다가 영추문을 부수기 위한 폭약소리에 방어하러 오면서 치열한 격전지가 됩니다. 크루프 야포에 가진 무기들 다 쏟아부으면서 대대급 병력으로 3시간동안 연대를 막아냅니다. 그러다 겁에 질린 고종의 명으로 교전중지 명령을 받았다? 내부고발자 안경수와 김가진이 거짓교서로 중지시킨겁니다… 북한산성으로 피신해 저항하는 조선의 전시 메뉴얼이 있습니다. 이곳은 최대의 방어시설로 최신무기로 무장한 총융청과 경리청이 주둔합니다. 고종의 이어가 결정되지만 신무문의 일본군 9중대와 평양 기영간의 교전까지 벌어지면서 근처 함화당에 대기하다 영추문을 통해 들어온 일본군에게 포위되면서 끝납니다. 무려 고종이 직접 나와서 군대를 물려달라 하지만 듣지 않구요. 조선군이 신무문을 돌파해 국왕을 북한산성으로 피신시키느냐, 일본군이 영추문을 뚫어내느냐의 문제였는데 김가진 안경수의 위조 교서로 뚫린거죠. 고종좋아하는건 아닌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무능하게 비추는거 같더라구요.
이게 가장 합리적인 분석이라고 생각 당시 조선이 아무리 병신이라지만 일본군이 기껏해야 8천인데 나라가 넘어간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됨 왕이 산성같은데 들어가서 버텼으면 아무리 나라가 개판이었어도 그렇게 허무하게 넘어가진 않았음 왕이 튀기전에 체크메이트 당한거지 ㅋㅋㅋㅋ 아즈텍제국처럼
@@mkim7684 정말 간발의 차이라 아쉬울 따름입니다. 북한산성은 대대 병력으로도 만 명을 막아낼 수 있다고 외국 공사들 사이에서 평가가 자자한 조선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이곳에 들어가 농성하면서 지방의 근왕군들이 집결하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한성부 전역에 걸친 군인들이 부대별로 집결하기 시작하기도 했고, 경기에서도 군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혼성 여단 7천여명중에서 부산과 원산 등지에 1,000명, 인천에 1,000명이 주둔하고 나머지 5,000 여명이 조선과 어떠한 합의도 없이 서울에 무단 입성합니다. 무단 입성한 일본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경부간 전선을 가설한 겁니다. 웃긴건 조선측 암호 해독에 실패하자 전보국을 장악해버려서 지방과의 교신도 끊깁니다. 이들이 가장 경계한건 조선은 경군 이외에도 야심차게 준비하던 신식 군대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경기도의 지방군과 신식 야포로 무장한 총융청과 경리청(이떄는 분리되어 있는게 맞습니다.), 강화도에는 원세개가 작정하고 키운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인 친군심영, 대한제국기까지 고종의 비수이자 국왕에 대한 광신 집단인 평양의 친군서영부터 하물며 제물포의 총제영까지 근왕을 위해 수도로 올라오면 고작 여단 규모의 점령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서 일본군이 국왕의 소재를 파악한 새벽 5시 40분 이전에 국왕의 교전 중지 교서가 나올 수 없으니 안경수와 김가진이라는 내부 협력자들의 거짓 전교로 해산한게 확실하다는 겁니다. 이를 모두 목격한 주한 영국공사 조던은 주청 공사 오코너에게 '평양병들이 국왕에게 교전 지속 명령서를 허락받았으면 많은 수의 일본군들의 훌륭한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후술한 기록이 있네요. 워낙 강경한 국왕의 광신집단이고 역사적으로 드센 평안도쪽이라 일본을 강렬하게 혐오해서 대한제국기까지 자주 대치합니다. 그러나 결국 5시 40분 우포장 김가진이 왕궁으로 들어오면서 혼성여단장이 국왕의 소재를 알아내어 함화당이 포위됩니다. 이때 평양 서영병들은 신무문을 중심으로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21연대를 상대로 격전을 치뤘으나 아침 7시가 넘을 때까지 이들의 제압에 실패합니다. 일본 방위연구소 군사문서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키면서 이들이 군수물자를 강에 빠트려 대부분을 압수하지 못했는데도 압수한 물자들만 해도 당시 최상급 질을 자랑하는 최신 무기들로 수량이 상당했습니다. 제가 공부하던 분야라 신나서 말하고 있지만, 얘네 진짜 답없는게 점령 직후 교전의 책임 문제로 조선 군병이 이유없이 먼저 발포하여 생긴 일이라고 조선 정부가 책임져야한다고 했음. 교전 당시 일본군의 궁내 진입을 힘껏 저지하던 외무독판 조병직은 이에 맞서 '무력을 써서 귀국 병사들이 궁성을 침범했는데 서로 총격전에서 누가 먼저 쐈는지 상관없이 우리 잘못이 아니다. 철군해라'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조선군의 무장 해제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주한일본공사 오오토리는 외무대신 김윤식과 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해 일본군이 광화문 밖에 주둔하도록 합니다. 그전에는 경회루에 주둔했습니다. 이 주둔군은 나중에 한국군의 군대 규모가 커지면서 용산으로 쫓겨나긴 합니다만..
@@삐용삐용-s8p 사회의식의 성장으로 일어난 움직임이었으니 혁명이라는 말도 하는 것이겠죠. 뭐라고 부르시건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용어는 정치적으로 현대에 필요한 무언가로 해석할테니까요. 그 시대 사람들이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대한 변화를 주장하면서 일어난 공동의 운동이라고 보시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지배층에 반하는 환란이라는 의미로 보아 반란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누구 말 마따나 실패하면 반란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고요. 민중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건 외부에서 보는 시각은 다를테니까요. 간단히 보자면 현재 미얀마 군부와 반군과의 내전을 뭐라고 규정하실지 생각해보세요.
왕조시대에 민란은 반란입니다 왕이 이땅과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의 법규상 그렇습니다 당연히 조선왕조가 엄연한 조선의 주인이던 세상이었으므로 역사에서는 반란으로 기록되어야 맞습니다 국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역사관에 혼란을 줍니다 김사미의 혁명 정중부의 혁명 홍경래의 혁명이 맞는 말인가요? 더군다나 일본군과 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외국군대 전쟁터로 만들고 일본군이 눌러앉자 결국 한일합병으로 나라까지 잃게 만든것이 동학반란 입니다
썸네일에 교수님 얼굴 넣어주세요
ㄹㅇ 그러면 조회수 최소 3배는 뛸듯
이게 맞지
얼굴만 봐도 기분좋아짐😊
이게맞지
맞습니다!!!
박사님 강의너무재밌어요
요번에 답사 가서 박사님 말씀하신거 들었는데 확실히 학교에서 배우는 외우기식의 지루한 역사를 잘풀어서 재밌게 잘 말씀해주셔서 역시 이래서 임용한 박사님 하나 싶었습니다. 존경합니다 박사님
고급진 강의!!
재밌습니다! 팬입니다 임용한 박사님!
참 재밋고 유익하네요
🎉🎉 임용한 박사 님.. 🎉🎉🎉
20:32 여기서 말한 22년 개량식은 1922년이 아니라 1889년 (메이지 22년)을 말하는 겁니다. 1922년이면 1차대전도 끝난 뒤인데 이땐 무라타 소총이 아니라 아리사카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죠… 일본군이 서양 열강에 비해 뒤쳐졌다지만 1920년대까지 단발소총 쓸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역시 공무원이나 수능수준 가르치는 강사들이랑 깊이가 다르네.
학부출신과 대학원출신은 학문깊이가다르죠
마지막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역시 전쟁사는 군사 전문가의 영역.
청일전쟁, 동학전쟁 수없이 들었지만 차원이 다르네..
이분 전문은 사회전문임 ㅋㅋㅋ 주변에 군사전문가가 많아서 본인도 알게된거지
@@user-uc4px3vu6z샤를세환 팬이신가요ㅎ
@@retrox7553 예 근데 임박사님은 이세환기자뿐 아니라 국제정치계열쪽도 친분이 두루 있으시죠
@@밍고-u7p 본인 박사논문이랑 전문분야가 본인피셜 조선 중기 사회인디 당연히 우리수준에서는 전쟁도 전문가지 역사학자들 기준으로는 곁다리에요. 뭔 말같도 않은 소리를 당연히 본인도 전쟁사쪽으로 연구는 많이 하셨지 역사학자 자체가 일반인들은 범접 불가로 연구들을 하는 사람들인데. 경제학자가 케인즈쪽으로 팠다고 보수턴학파를 설명을 못하겠어요? 그리고 박사님도 자주 틀리십니다. 팩트체크 하면 받아들이시고 인정하니까 비판을 안받는거지 전쟁사도 파면은 시대마다 전문가가 다 따론데 그리고 내가 언제 박사님이 아는게 짧다 했어요? 사회 전문인데 전쟁사쪽도 절어신다고 한거지?
임용한 박사님 주전공이 조선사라서.
난 이분의 역사얘기를 들으면 박진감.이 느껴집니다.
박진감👍
동감
오 임소장님 ㅎㅇㅌ ❤❤❤
언제 하셨습니까?! 좋습니다!
29:36 이부분 자막이 "백제가 한성을 포기하고 남하 했을 때" 인것 같네요
소장님 ❤
16:36 와 이부분이 좀 충격이네요ㄷㄷ 이렇게하면 확실이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뭐가 문제였고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다음 전투에선 그부분을 개선할수도있고.
와 이걸 몰랐었네....
전쟁은 또 일어날텐데 나부터 노력을 해서 우리와 후손들에게는 괴롭고 슬픈역사가 반복되지 안기를 다짐해봅니다. 그리고 언젠간 치욕의 역사를 갚아줄 후손이 나오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역사는 정말 재밌는거구나
우리 군대에서 얘기하는 조롱조로 얘기하는 당나라 군대가 이 당시 청군이라는 게 정설이라고 하더군요
조선군대는? 당연히 청나라의 밑이지!
조선군대는? 당연히 청나라의 밑이지!
당나라 군대는 일본이 만들어낸겁니다
일본에서 중국을 의미하는 단어가 '당' 인데 이때랑 중일전쟁때 중국군대가 개판이라서 당나라 군대 싸움 개못한다 = 싸움 개못하는 당나라군대다 로 변질..
@@김우진-o3t아니 누가 조선군대가 청나라보다 강하다고 했나? 강한 청군 이미지가 없어졌다는데;;
16:32 유럽전쟁에서 여러국가의 참관인들이 오는 것이 돈벌이는 후대에 생긴 일일것 같습니다.
주변국들과 전멸전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심판과 관중이 그 승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니, 타국의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봐 줘야만 했던것 아닌가 싶습니다.
30년전쟁만 해도 참관인들이 있음
임용한 박사님이 직접 국사교과서 편찬하시고 역사교육의 지침을 마련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단순히 일본에게 당했다는 측면만 너무 강조해서 가르치는 것 같아 아쉬움
1. 오랜 기간 격동하는 국제 정세에 귀 닫고 눈 감고 지낸 나라가 있었고
2. 국제 정세의 흐름을 타 부국과 강병을 이뤄, 패권을 노리던 강대국이 있었다
3. 한국 일본이 중요한 게 아니라 1~2의 구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며
4.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자면, 현재 한국-중국의 구도가 과거와 같다
5.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국제 정세에 눈 뜨고 함께 반중전선 펼칠 아군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둬야 한다
까지 가르쳐야 할 텐데..
잘나가다가 결론이 이상한데ㅋㅋ
@@김현성-n8u 숭미 식민지사관으로 배워와서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많음
현재 일본이 미국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발톱을 최대한 감추고 있지만 그들의 궁국의 외교전략적 목표는 한반도 전쟁이라는 걸 모르는 바보가 바로 당신!!!
@@kju42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역사 강사 전한길 선생님도 식민사관임?
니들이 종북 친중인 거겠지
자기 의견에 조금만 반대되면 다 그걸로 보이나봐ㅋㅋ
이거 임용한 으로 검색해도 안떠요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드라마들 보면 일본군이랑 싸우던 조선 궁궐 수비다는 삼지창 들고 싸우든데....한두 드라마가 아니라 한국 드라마는 99.99퍼센트 전부.
당파라고 한단다 삼지창이 아니라..
처절함을 보여주려한거같긴한데 그러기엔 너무 역사왜곡이 심했지
역사는 드라마로 배우면 안되지 ㅋㅋ
@@user-sd8fe8ij7l 그러게요. 역사는 드라마로 배우면 안되는데, 나는 고딩때까지도 을미사변때 일본군은 노란 서양식 군복에 소총 들고 쳐들어왔는데, 조선 궁궐수비대는 상투에 검은색 포졸옷 입고 삼지창 들고 싸운줄 알았음...나중에 조선군들도 서양식 군복에 독일제 소총 들고 싸웠다는것 알고 한국 드라마작가들은 매국노라고 생각했음.
제3자 입장에서 봐봐요. 19세기 후반에 아직도 삼지창 들고 궁궐 수비하면 겁나게 미개한 거죠. 그리고 우리나라 드라마 작가들이 역사를 왜곡해서 우리나라는 당시 그랬다고 하는건데.
질문이 좀 어이없는게, 이미 임용한박사님이 당시에 일본군 4000명이 가용병력으로 한성에 있었고 조선측에 싸울 수 있는 병력은 500정도 밖에 안됐다고 언급하셨는데, 거기에 신식무기를 갖췄는데 왜 졌냐는 좀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같음. 4000명 대 500명이라면 애초에 숫적으로 불리한데 신식무기는 우리만 갖고있던게 아니지 않나;
민씨들의 김옥균 암살도 전쟁의 이유
왕조시대에 민란은 반란입니다 왕이 이땅과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의 법규상 그렇습니다 왕건이나 이성계같이 새로운 왕조를 세운경우는 예외로 건국으로
쳐줍니다 그러나 동학반란은 우금치에서 조선왕조의 군대와 일본군대에 박살났습니다 당연히 조선왕조가 엄연한 조선의 주인이던 세상이었으므로 역사에서는 반란으로 기록
되어야 맞습니다 국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역사관에 혼란을 줍니다 김사미의 혁명 정중부의 혁명 홍경래의 혁명이 맞는 말인가요? 더군다나 일본군과 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외국군대 전쟁터로 만들어 국가와 백성들이 피해를 보게 만들었으며 더구나 일본군이 눌러앉자 결국 한일합병으로 나라까지 잃게 만든것이 동학반란 입니다
조선말기 부패한 왕조가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한국을 군대를 약화시키고 폄하하는 민주당은 한국에서 있을 자격이 없다
우리도 메이지 유신에 버금가는 개혁으로 근대화 할수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미국이 통상으로 자의든 타의든 기회를 줬건만 그걸 버리고 어리버리 꼭꼭 잠그다..... 후손들만 여지껏 고통속에 살고 있네. 당시 일본과 대등한 전력이었음 지금 우리 분단이 되었을까? 결국 욕먹을 위인들 다 정해져있음 ㄷㄷㄷㄷ
대등한 전력일 수가 없었어 비슷한 시기에 개화 했어도
나라엔 체급차이도 중요하고 지형도 중요함
우리나란 자원 거의 자급자족 불가
어찌어찌 개화해도 수출할 만한 자원도 거의 없어서 드라마틱하게
발전하거나 자금을 들여올수가 없었음
그거에 비해 일본은 수출할만한 것들이 많고, 식량도 풍부하고 땅넓지
인구는 그 당시 이미 1억명이 넘지
같은 시기에 개항 했어도 우리는 졌음
또 하나 어떤 사람들은 개항을 하면 다른 서구 열강 세력에 방해로 인해 일본에게 져도 식민지는 안됐을거라 하는데..
그 당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등
모두가 동아시아는 중국 말곤 굳이 가서 집어먹을게 없었음 심지어 그 중국에서도
오히려 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상황이였고
그나마 지형적으로 바다와 가까운 일본마져도 굳이 저길?.. 인데 한국이면 미국처럼 거의 쳐다도 안보고 가스라테프트 조약 처럼 야 조선줄게 다른거 우리가 가질게 정도의 패임
@@김리크그렇긴해도 방어하는 입장이고 바다라는 장애물이 있어서 무조건은 아님. 임진왜란처럼 불리해도 어찌어찌 막을수도…
@@김리크 이건 개헛소리인게 중국 러시아조차 눈독들이던게 조선임 그리고 당대 일본인구는 2차대전말때조차 8천만수준이었는데 솔직히 반박할 가치조차 안느껴짐.. 그냥 무턱대고 지하고싶은말만 지어내는게 보여져서 ..
@@경기도성남시아탑동에 중국, 러시아조차가 아니고 중국, 러시아니까 눈독을 들이는 거에요 ㅋㅋㅋㅋㅋ 붙어있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
세계사, 국제정치 배우고나서 국사를 배워야 왜곡없고 당시 사람들이 그런선택을 왜? 했는지 알수있는데 반대로 하다보니 특히 근현대사는 진짜 제대로 알거나 이해한사람이 별로없음
기록이나 증언도 사실 적은데 자기입맛대로 골라서 편향된 자료들을 논문이나 책에 그냥 이건 역사다 하는거 처럼 나오는데 근거가 빈약한게 천지임;; 근데 이게 교과서에도 많이보임
청 러시아 보다 그나마 일본에 점령당한게 미국에의한 해방을 보게되어 다행 일수 있다.
6:20 멍청했든 아니었든 결론은 동일했습니다…자신의 왕권을 지킬 능력조차 없었던 정부가 자기 정권을 유지하려고 잘 알면서도 농민을 상대로 외세를 끌어들인 판단은 용서받기 힘들어보입니다. 국민이 혁명으로 정부를 무너뜨리지 못했던 점이 아쉽고, 혁명이 너무 늦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병력 수송함과 호휘함1척은 중국에서 오고 있었고, 군함 두척이 아산에서 마중나가다가 조우... 왜 아산에서 다시 빠져나가나 싶어서
적군이 왕이 있근 궁을 공격하는데 수비대가 500명..
질문이 참 답답하네
아니 말하는건 듣지는 않고 자기가 정해둔대로 생각하고 질문하는건가…
맞아요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는게 아니라 그냥 뜬금없이 자기가 알고싶은거 준비해서 질문할듯.
청일전쟁 얘기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왜나와 ㅋㅋ😂
질문하는 사람은 제대로 공부를 못 한 사람으로 보이네.. 뭔 병력을 흡수해? 머리가 나쁜 건가..
독일 힌덴부르크 장군 회고록이 나왔습니다!!!
* 인터넷 교보문고 독점 판매
일본군기관총사용동학군진압
28:00 오디오에 뭔가 겹쳤네
질문 자체가 너무 멍청해서 김 빠지네..
동학혁명이 아쉽기만 할까? 그 후, 동학 교도는 소수만 천도교도가 돼고 가장 많은 인원이 '일진회' 회원이 돼었다.
근데 동학 잔당들이 고종 치하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도 현실이어서 한편으론 일진회가 된게 이해가 되기는 했음 고종은 잔인한 명령을 민보군한테 내려서 살아남은 동학 잔당들 찾아내서 모조리 불에 태워 죽여버리라고까지 했음 거기다 동학의 목표였던 민비가 명성황후가 되어서 반일의 상징이 된 것도 원인이기도 하고 목표 대상이 반일의 상징이라면 동학은 그 반대가 될 수밖에 없음 바로 친일
엥? 이거 언제한거임? 임용한 선생님 검색하다 갑자기 나오네??
무조건 개추
백범일지보니까 동학운동이 왜 실패할수밖에 없었는지 알겠던데..
존경합니다 세계최고 위대한 민족 대일본인들이여
동북아 기준으로 당시 청일, 러일 전쟁들은 뭔가 어리숙해...
쇄국을 외쳤지만 일본에게 명분을 준게 흥선대원군이군요
청..동..대..포...
설민석은 틀린 사실을 가르친거네;;
그 사람은 그냥 만담꾼임ㅋㅋㅋㅋ
청.일 전쟁 보면 입다물고 상상해보면
모르쇠 하는게 정답 쇠
러시아를상대할수있었던가장큰힘은영국의 도움과협조
+ 미국 ㅎㅎ
조선후기는 건들건들에서 만들어진 조총은 강선이라던데...
동학농민군이 입수한 총은 지방관아를 털어서 나온 총들이니, 강선총이 개발되었다한들 지방관아에는 없었을 것 같아요. 민방위 훈련 할 때 아직도 가끔 한국전쟁 때 썼던 M-1 개런드를 쓰는 것처럼..
그럼 고종이 포로가 되서 전투 중단 명령을 내린게 아닌건가???
깊이가 다르네
억울합니다. 제가 교과서에서 배운 근대 역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당파 싸움하다가 식민지가 된 역사인데 조선 대한제국에서 그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는 것을 교육 받지 못했습니다. 패배의 역사를 교육받았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한국 역사를 난도질이 놓은 걸까요
패배의 역사가 맞음. 님이 알던거보다 더 처참하게 패배함.
대한제국에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무기를 수입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는 했지만, 통합된 무기체계를 도입하지도 못했고 전적으로 군대 양성에 집중하지도 못했습니다. 누가 한국 역사를 난도질했다며 탓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한제국이 최선을 다했는데 패배의 역사를 교육받았다? 오히려 그 반대죠. 조선의 축적된 모순과 패배를 숨기고, 마치 조선 왕실에서 최선을 다해 나라를 지켰던 것처럼 포장되어 있는 거죠.
고종은 개혁군주..
당시 백성들이 게으르고 무지몽매해서 망함..
전투는 무슨 그냥 학살이지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말씀 중, 경복궁에서 일본군과의 충돌 당시 경복궁 무기고에는 크루프산포 8문, 개틀링기관총 8정, 그 외의 소총이 무려 2000여 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도 한낱 필부에 불과한 고종은 그대로 꼬리를 내리죠. 뻔히 나라가 어찌될 것을 알면서도 본인 한목숨 보존하고자.
쯧쯧 500명이 한성전체를 방어해야되고 일본군은 8000명이 집중공격해올텐데 생각이 이리 짧으시요.
그리고 어디서 배우셨는지 고종욕만 하는데 세도정치 200년 가까이 나라 망한상태에서 고종,민비,순종비,순종아들까지 죽어가며
끝까지 버텻던게 고종입니다.
@@tiziano2726 왕이 목숨걸줄 모르는데
왜 백성이 목숨을 걸어야하나
조선은 망해도 아쉽지않은 나라였다.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충청도를 유린한 남접들
중국군대를당나라군대
라불러지기시작함
멍청했네 뭐
동학은 난
기관총으로동학군박살남
동학난의 전봉준의 사당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아버지가 죽게되자 전봉준이 장날 백성들을 선동하여 1894년3월에 일으킨 난이지만
최근에 와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켰죠 전라도의 정치세력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봉기때는 조정이 달래고 협상해서 철수를 했고 2차봉기때는 일본군이 사전약
속대로 조선에 들어와서 동학반군들과 전투를 하여 동학군이 패했죠 그때 들어온 일본군들이 눌러 앉잤기 때문에 한양과 조선조정이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한일
합병 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한때는 숨죽이고 동학반란에 가담했다고 말도 못꺼내다가 독립하니 너도나도 동학난의 영웅이라면서 이제는 엄청난 세금을 써서 황토
현 전적지을 건립하여 사적295호가 되었고 동학반란 기념관, 울림의기둥, 동학캠핑장, 연수동, 등을 갖추었으며 기념탑 전봉준의 동상 및 동학농민 군상, 사당 그리고
동학난 추모 사찰인 구민사 기념관 제민당 농민의벽 조형물 등등 무수한 추모 기념물들이 국가세금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거대한 조형예술품으로 기념물 전체는 수천억
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동학난은 그당시 기준으로 볼때 홍경래의난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정여립의난 이징옥의난 같은 조선시대 흔했던 민란일뿐인데 유독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학난을 조선정부로 부터 지시받아 진압하던 전라도 관아들의 포졸들이나 한양에서 내려간 군사들의 죽음이 반란입니까? 이건뭐 그짝지방에
서 한짓은 전부 혁명이고 우상화를 하면서 잘한일이라고 하니.... 일본군 청군등 외세를 불러들인 민비의 친일족들도 민비를 명성황후라며 높여부르고 ...억울하다고 하니 .
사실 민비 친일족들이 권력잡고 민비와 함께 백성들을 죽지못해 살아가도록 만들고 국고탕진과 고부군수 조병갑 같은 인물을 파견한것 아닙니까? 우금치에서 전투에서
도주하기 바빳던 그냥 지들도 권력한번 잡아보고자 반란을 일으켰던 민비일족들의 부정부패 정치로 어렵게 살던 동학교도 들이었을뿐입니다
약은 약사에게 역사는 역사학자에게
청.일 잔쟁 왕족 귀족이 아님 선교사.상인집권군대
병력이 충분하긴...
저 정도가 합리적 설명이지. 일본이 조선을 자기네 체제로 흡수하기 위해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갑오전쟁
일본 참
선교전쟁
동학난 때문에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청일 전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한일합방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동학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참 원망스럽다.
일본이 제국주의 서구국가들 롤모델로 발전하기위한 전략을 다 세웠다잖아요. 하나의 명분이었을뿐
명분은 또 만들면 그만인것을
조선이 정치를 ㅂㅅ처럼한거지 무슨 농민탓
@@Joyen9787 서구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조차도 서양열강들이 뜯어먹고 남은 것은 중국땅의 20%도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는 동남아진출을 위해서 한반도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종이 아관파천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팔짱끼고 있으면 바보지요.
일본은 일본열도의 안보를 위해서 한반도 병합은 불가피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조선이 힘이 없어서지 동학농민의 난 때문은 아니죠.
@@박찬수-u2m 동학운동이 명줄을 재촉한건 맞음
일청전쟁은 지나의 속국 신세였던 조선을 해방시킨 영웅적 사건. Period.
부모는 있니?
너희 엄마는 뭐하는사람이니?
@@으헿으헤헿 반도인이 발작하면 진실.
일뽕 어서오고
맞는 말씀임.일청전쟁으로 조선이 속국에서 독립국으로 됨.
임용한 박사님, 영화 건국전쟁에 참여한 연세대 교수였던 류석춘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류석춘은 국뽕사학을 경멸하고 현실 사실 팩트를 중시하는 교수임..
챗GPT는 청일전쟁이 신미양요라는 거야. 그리고 프랑스를 일본이라고 함 ㅎㅎ 실제로 영국국립도서관이 2014년? 공개한 청일전쟁 그림중에 고려월야우진대득승전도에 보면 일본군이 나폴레옹 모자 쓰고 있음.
만주족은 신라의 후예,
일본은 백제의 후예.
고로, 청일전쟁은 신라의 후예와 백제의 후예 들이 중원을 두고 마지막 한판 승부.
결과는 하화족의 어부지리.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기원론...
@@Shell_Mini 흠정만주원류고 읽어본적 없지?
일본은요 신라가 일본이 되었어여 이분 모르네 신라왕 56명의 이름 80프로가 일본이름인거를 내가 일본서 찾아 가져다 두었는데 16대까지는 수녀라고 불렷는데
역사적으로
대진국이 두번 있었지
물론 한문은 다르지만 ㅋ
그게 뭔 상관이냐??? 그런 논리가 미개함을 만든다. 현재가 중요하지
자신의 민족이 망국시대인 사학자. 기분이 어떨까? 평생을 가르친 제자들이 선택한 망국시대에 갖는 소감이 궁금해요? ㅎㅎ
동학혁명군이라고 정확하게 불러주셔서 좋네요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란 아입니까?
망이망소이혁명군
김사미혁명군..
묘청혁명군
홍길동혁명군
@ 다 반란군임
우금치전투때 일본군이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금도끼-u9v
조선군이 동학혁명군을 학살...
일본군은 극소수 있었다 함..
ㅅㅂ 고종이란 ㅎㅎㅎ
이걸 또 고종탓하네 ㅋㅋ 당시에도 정조 사후에 이뤄진 세도정치가 안 끝난 상태였다는 것은 아세요?
@@kaiserthum 먼 헛소릴까
그럼 신라가 고구려 팔아먹은게 잘못된거지
아님 단군이 고조선 건국한게 문제고
정말 개 답답허다 ㅎ
고종 무능한 왕임
너무 미화되어 있음
@@절영도-t3x산업혁명에 의한 역사의 흐름을 한 군주 개인을 탓하는 무식함 보소. ㅉㅉㅉ.
고종은 에당초 민비와 흥성대원군에 꼭두각시에 불과했음 누군가한테 배우고 실천해야 성장하는대 흥선대원군하고 민비에 꼭두각시로 산 고종이 멀 알겠음 자기들이 해먹을려고 하는 인간들 수두룩 빽빽하고 고종은 제대로 배운것도 없고 경험도 없던 왕이었음 그런왕한테 무언가를 바라는거 자체가 힘들고 저당시 암울한 조선은 정조나 영조 어디뭐 세종이와도 결코 피할수 없는시대였음 유렵에 유명한 인재들이면 모를까 저때조선은 누가와도 뜯어고치기 힘든나라였음 진짜 뜯어고쳤으면 두손들고 절해도 이상할게없을정도 저당시 조선은 나라 상황이 좋지가 않았음 다른나라도 매한가지죠 조선만 그런게 아니라 지금이렇게 우리나라가 발전한것만으로도 선조들에 노력과 지혜도 담겨있으니 가능했던거죠
임용한 교수님 많이 좋아했는데 경복궁 쿠데타 사건에 대해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이 서울로 올라오자 동학진입군으로 나간 초토사를 급히 부르고 방어가 용이한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그러자 경군이 복귀하면서 어느정도 우위를 가지자 다시 경복궁으로 복귀한거고요.
청군 철수를 요구하는 일본군의 요구를 거절하자 무력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데,
이때 광화문과 건춘문에서 궁궐수비대를 붙잡아두고 영추문으로 진입하고자 1개연대를 동원합니다. 영추문에만 1개연대인데 총병력 1000명은 될 수가 없습니다.
이미 평양 기영,당시 친군서영이 이를 대비해서 경복궁에 숙위하다가 영추문을 부수기 위한 폭약소리에 방어하러 오면서 치열한 격전지가 됩니다.
크루프 야포에 가진 무기들 다 쏟아부으면서 대대급 병력으로 3시간동안 연대를 막아냅니다. 그러다 겁에 질린 고종의 명으로 교전중지 명령을 받았다? 내부고발자 안경수와 김가진이 거짓교서로 중지시킨겁니다…
북한산성으로 피신해 저항하는 조선의 전시 메뉴얼이 있습니다. 이곳은 최대의 방어시설로 최신무기로 무장한 총융청과 경리청이 주둔합니다. 고종의 이어가 결정되지만 신무문의 일본군 9중대와 평양 기영간의 교전까지 벌어지면서 근처 함화당에 대기하다 영추문을 통해 들어온 일본군에게 포위되면서 끝납니다. 무려 고종이 직접 나와서 군대를 물려달라 하지만 듣지 않구요.
조선군이 신무문을 돌파해 국왕을 북한산성으로 피신시키느냐, 일본군이 영추문을 뚫어내느냐의 문제였는데 김가진 안경수의 위조 교서로 뚫린거죠.
고종좋아하는건 아닌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무능하게 비추는거 같더라구요.
구체적이고 귀한 지식 공유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분석이라고 생각
당시 조선이 아무리 병신이라지만 일본군이 기껏해야 8천인데 나라가 넘어간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됨
왕이 산성같은데 들어가서 버텼으면 아무리 나라가 개판이었어도 그렇게 허무하게 넘어가진 않았음
왕이 튀기전에 체크메이트 당한거지 ㅋㅋㅋㅋ 아즈텍제국처럼
@@mkim7684 정말 간발의 차이라 아쉬울 따름입니다. 북한산성은 대대 병력으로도 만 명을 막아낼 수 있다고 외국 공사들 사이에서 평가가 자자한 조선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이곳에 들어가 농성하면서 지방의 근왕군들이 집결하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한성부 전역에 걸친 군인들이 부대별로 집결하기 시작하기도 했고, 경기에서도 군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혼성 여단 7천여명중에서 부산과 원산 등지에 1,000명, 인천에 1,000명이 주둔하고 나머지 5,000 여명이 조선과 어떠한 합의도 없이 서울에 무단 입성합니다.
무단 입성한 일본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경부간 전선을 가설한 겁니다. 웃긴건 조선측 암호 해독에 실패하자 전보국을 장악해버려서 지방과의 교신도 끊깁니다.
이들이 가장 경계한건 조선은 경군 이외에도 야심차게 준비하던 신식 군대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경기도의 지방군과 신식 야포로 무장한 총융청과 경리청(이떄는 분리되어 있는게 맞습니다.), 강화도에는 원세개가 작정하고 키운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인 친군심영, 대한제국기까지 고종의 비수이자 국왕에 대한 광신 집단인 평양의 친군서영부터 하물며 제물포의 총제영까지 근왕을 위해 수도로 올라오면 고작 여단 규모의 점령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서 일본군이 국왕의 소재를 파악한 새벽 5시 40분 이전에 국왕의 교전 중지 교서가 나올 수 없으니 안경수와 김가진이라는 내부 협력자들의 거짓 전교로 해산한게 확실하다는 겁니다. 이를 모두 목격한 주한 영국공사 조던은 주청 공사 오코너에게
'평양병들이 국왕에게 교전 지속 명령서를 허락받았으면 많은 수의 일본군들의 훌륭한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후술한 기록이 있네요. 워낙 강경한 국왕의 광신집단이고 역사적으로 드센 평안도쪽이라 일본을 강렬하게 혐오해서 대한제국기까지 자주 대치합니다.
그러나 결국 5시 40분 우포장 김가진이 왕궁으로 들어오면서 혼성여단장이 국왕의 소재를 알아내어 함화당이 포위됩니다. 이때 평양 서영병들은 신무문을 중심으로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21연대를 상대로 격전을 치뤘으나 아침 7시가 넘을 때까지 이들의 제압에 실패합니다.
일본 방위연구소 군사문서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키면서 이들이 군수물자를 강에 빠트려 대부분을 압수하지 못했는데도 압수한 물자들만 해도 당시 최상급 질을 자랑하는 최신 무기들로 수량이 상당했습니다.
제가 공부하던 분야라 신나서 말하고 있지만, 얘네 진짜 답없는게 점령 직후 교전의 책임 문제로 조선 군병이 이유없이 먼저 발포하여 생긴 일이라고 조선 정부가 책임져야한다고 했음.
교전 당시 일본군의 궁내 진입을 힘껏 저지하던 외무독판 조병직은 이에 맞서 '무력을 써서 귀국 병사들이 궁성을 침범했는데 서로 총격전에서 누가 먼저 쐈는지 상관없이 우리 잘못이 아니다. 철군해라'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조선군의 무장 해제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주한일본공사 오오토리는 외무대신 김윤식과 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해 일본군이 광화문 밖에 주둔하도록 합니다. 그전에는 경회루에 주둔했습니다. 이 주둔군은 나중에 한국군의 군대 규모가 커지면서 용산으로 쫓겨나긴 합니다만..
@@isadjhosdi7935그저 슬픈역사... 아므리 좋은무기와 인재들이있어도 배신자 몇몇에 의해 무력화됬다니 .. 농민운동때 청군안부르고 그냥 나라 뒤엎어서 개혁했다면 많은게 변했을텐데
이런 전쟁을 했으니 미국도 그럴 줄 알고...
제 셍각에는 tsmc가 메모리까지 할 거 같습니다. 메모리가 이제는 주문형으로 되어 가고 있기에 tsmc에서 더 잘할 수 있습니다.그 증거 hbm4세대에서 로직다이를 대만이 직접 만들겠다고 나섬
이번 총선은 한일전 이다.
황군의 분전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동양 평화의 수호를 위하여 황군으로 거듭나 주세요.
딱봐도 어그로라 하트안준거 개웃기네 ㅋㅋㅋㅋ
@@경기도성남시아탑동에 저 시절 조선군은? 웃고 만다.^^
이정도면 정신병이다
와 남보고 그래삿노 니가 거듭나라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이 동학군을 더 학살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 일본군은 소수 밖에 안되었음
근데 왜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는거임? 운동, 전쟁, 혁명?
동학농민혁명이라하려면 중국에 태평천국혁명이라해야되고 의화단혁명이라해야되는거아님?
앤간하면 농민반란은 다혁명붙여질거같은디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반봉건 민중혁명의 시초가 '동학'이 되어야 하거든요.
동학혁명 -> 3.1혁명 -> 4.19혁명 -> 5.18혁명 -> 촛불혁명
이런 계보를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계보의 마지막이 뭐가 되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ㅋㅋㅋㅋㅋ
@@삐용삐용-s8p 사회의식의 성장으로 일어난 움직임이었으니 혁명이라는 말도 하는 것이겠죠. 뭐라고 부르시건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용어는 정치적으로 현대에 필요한 무언가로 해석할테니까요. 그 시대 사람들이 당시의 사회시스템에 대한 변화를 주장하면서 일어난 공동의 운동이라고 보시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지배층에 반하는 환란이라는 의미로 보아 반란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누구 말 마따나 실패하면 반란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고요. 민중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건 외부에서 보는 시각은 다를테니까요. 간단히 보자면 현재 미얀마 군부와 반군과의 내전을 뭐라고 규정하실지 생각해보세요.
@@Tuna011 사회의식, 사회시스템, 사회주의.. 혁명이죠 ㅎㅎ
왕조시대에 민란은 반란입니다 왕이 이땅과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의 법규상 그렇습니다
당연히 조선왕조가 엄연한 조선의 주인이던 세상이었으므로 역사에서는 반란으로 기록되어야 맞습니다
국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역사관에 혼란을 줍니다 김사미의 혁명 정중부의 혁명 홍경래의 혁명이
맞는 말인가요? 더군다나 일본군과 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외국군대 전쟁터로 만들고 일본군이 눌러앉자
결국 한일합병으로 나라까지 잃게 만든것이 동학반란 입니다
주공
헛소리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