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전봉준은 동학 타이틀을 달았지만 동학과는 관련없는 사람이었고, 1891년 부터 흥선대원군 사저에 3년간 식객으로 있었으며,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 또한 전봉준의 동학란은 동학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고 심지어는 동학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근데 전봉준이 동학과 어떤 관련이 있었나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 애들 저거 끝나고 일진회 만들어서 친일했죠. ㅋㅋ 이건 논문도 있음. 실제 사실임. 저렇게 역사를 미화시키고 말도 안되게 가르치면 역사가 정말 재미없어집니다. 왜? 말이 안되거든... 그냥 말이 안되도 외워야하거든. 역사적 흐름으로 이야기가 이어져야하는데...그런게 없죠.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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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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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적으로 전봉준이 서울로 향하고자 한 것은 체제를 뒤엎고자 함이 아니라, 탐관오리들에게 눈과 귀가 차단당한 왕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왕이 지금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서 진상을 알린다면 분명히 합당한 조치를 내려줄 것이라는 기대로 상경을 계획한 겁니다. 그래서 혁명이 아니고 단순한 민란인 것이고요. 무기고 탈취해서 서울로 향했기 때문에 혁명이면, 뭐 이괄의 난도 이괄군사혁명입니까? 그리고 농민 혁명인 것도 잘못되었죠. 농민 말고도 다양한 계층이 다수 참여하였고, 동학 특성상 보부상 들의 상인들도 많았습니다. 농민자가 붙은건 동학을 신성시하는 현대 정치집단이 농민이란 개념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멋대로 붙인 것이고요. 그래서 담백하게 동학의 난 혹은 전봉준의 난 정도가 적절합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YTN은 정확한 역사적 근거도 없이 동학 과 전봉준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인가? 정말 역사적 근거도 없이 동학을 미화한 이런 프로그램이 부끄럽지 않은지? 동학민란 촉발의 원인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지만 목적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전제 국가가 목적이었는데 무슨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인지.....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우발적인게 맞죠. 미리 계획과 인원이 준비된 일이었다면, 장터에서 일장연설로 불특정 다수를 선동할 필요가 없는거에요. 전봉준이 몰락한 양반가라 부자가 글을 알았고, 조병갑의 학정에 힘들어하던 사람들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라 대표로 항의문을 적어 조병갑에게 전달합니다. 이에 조병갑은 전봉준의 아버지를 압송해 장형을 내렸고 장독이 올라 사망합니다. 이에 전봉준은 말로 통하지 않는다 판단하여 무장봉기를 획책한 것이고요. 전봉준은 동학 교도였고, 친구며 지인들이 대부분 동학교도였습니다. 그래서 실력행사를 같이 한 동지들도 다 동학교들이었던 겁니다. 참고로 전봉준이 도움을 요청했던 동학 지역 간부들은 전부 무시했었고요. 후에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사교도 취급으로 옥에 갖혀있던 동학교도들을 구출하니까 지역 동학 내 전봉준의 입지가 급상승하고 전봉준이 접주로까지 추대되는 거에요.
동학농민운동은 1. 농민저항의 측면도 있지만, 2. 일제의 부추김과, 3. 고종과 대원군의 권력다툼의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이 일본에서 소총 4,000정을 밀수하여 동학군에 넘겨주는데 1882년 임오군란때 문제된 별기군이 소총 500정이였습니다. 무슨 동학군이 무장없이 전주성 함락했다 이야기하면 역사왜곡입니다.
@@성계강-j4q 흥선대원군의 동학농민운동 사주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 -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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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참고로 전봉준은 동학 타이틀을 달았지만 동학과는 관련없는 사람이었고, 1891년 부터 흥선대원군 사저에 3년간 식객으로 있었으며,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 또한 전봉준의 동학란은 동학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고 심지어는 동학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근데 전봉준이 동학과 어떤 관련이 있었나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 애들 저거 끝나고 일진회 만들어서 친일했죠. ㅋㅋ 이건 논문도 있음. 실제 사실임.
저렇게 역사를 미화시키고 말도 안되게 가르치면 역사가 정말 재미없어집니다. 왜? 말이 안되거든... 그냥 말이 안되도 외워야하거든. 역사적 흐름으로 이야기가 이어져야하는데...그런게 없죠.
탐관오리 남자 두목 고종, 여자 도목이 민비.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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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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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적어도 혁명이라는 단어가 붙으려면, 사상가들이 근왕사상을 버렸어야 했는데, 조선이라는 큰 틀을 마지믹까지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혁명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죠. 프랑스 혁명이 왜 혁명이라고 불리는지 생각하면 간단하게 답이 나올 문제입니다.
그럼 그냥 농민반란? 제정신?
전주성 함락까진 성공.
그냥... '운동'이 딱 맞죠...
대한민국이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혹익인간, 동학은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폐정개혁 12조를 내용을 보면 그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한건 맞아요
조병갑의 후손이 조기숙 입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냈죠.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소설이 아니고 기록입니다.
선생님께서 어떤 이상한 분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쓴 것 같은데 구운 최제우에서
해월 최시영에 이르기까지
동학혁명 당시 발생한 수 많은 기록을 읽어보면 그런 말씀을 쉽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동학의 포와 접에 대한 조직을 모르기 때문에
강제 동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동학의 토벌자들이 남긴 기록을 분석없이 읽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야외촬영이라 신기하네요
그럼 흥선군 이하응은?
앞뒤가 안맞습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대원군을 옹립하려고 했는데 무슨
엉터리같읁개소리야
와...야외라 므찌네요잉 쭈니형은 살이 점점빠지시고, 마님은 더이뻐지셧네 데헷
동학농민혁명을 국제정치와 역학관계 측면에서도 분석을 했으면 좋겠네요. 왜냐하면 취지와 달리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무능한 정치와 외교 그리고 내치에 실패하면 어떻게 나라가 붕괴하는지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마음이 아픈 역사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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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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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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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성강현쌤 진짜 명강의를 하십니다!! 화이팅 하십쇼!!
세상 과 싸운게 아니라
이씨조선과 싸운거지
동학농민 제압하려고
중국과 일본을 끌려들이는
무능한 이씨조선
그러면서 대한독립만세 ㅇ ㅣ ㅈㄹ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본군이 이곳의 성인남성들을 죽인 사건도 조사되어야 하고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국사책에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임용한교수님,샤르님.허준님,윤아님을 한팀으로 구성하여 진행 좀 부탁드려요
동조하는 시청자도 많을 듯 합니다
오~ 우리 윤아나운서님 이쁘게 나오셧네!😅
물론 허준님도 젠틀하게 나오셧고 ㅎㅎ
뭐가 평등한세상? 탐관오리 안동김씨 풍양조씨들이 싹다 해먹고 나라에는 세금도 않내고 농민은 죄다 노비로 만들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조선이란 나라가 왜 500년이넘게 존제했는지 쪽팔린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조기숙의 할아버지 조병갑이와 같은 탐관오리 때문에!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혁명을 다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학의 진실을 잘모르는 방송이라고 보겠다.
허준님 화무십일홍은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는것이지 동학도의 2차봉기, 집강소 설치에 대한 멘트로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좋은 특집
조선의 눈동자/ 곽재구(낭송: 손효성) / 영상문학-MultiVideoArt GW.
ruclips.net/video/lLLXJEcK6Cs/видео.html
관군이 동학농민운동 하고 연합해서 일본군을 몰아내야지.... 일본군편을들면어떻게.....😢😢😢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또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바란다는 것은 동학의 사상이었고, 동학과 관련 없는 전봉준의 주장은 척양척왜, 전제군주를 지양하는 사람이었다... 제발 동학을 미화, 성역화하지 말고 진실을 진실로 보 자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알게되면 민자영(명성황후라고 해주는 머저리들 많더라만...난 민비로도 불러주기 싫은 ㄴ일 뿐!)이 욕하게 될 수 밖에 없음.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국방티비 소재 가져다 쓰다가 동학으로... 피디가 어떤 생물인지 궁금하다.
하여튼 정치에 목숨 건 인간들 동학이 국방관련 중요하지.
외세군대에 국방을 다 맡기다가 나라말아먹은 좋은 교훈인데.
혁명 좋아하네!
권력 야합꾼이지.
엉터리 뉴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민비 ㄱㄴ 때문에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사기꾼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반란이 외세를 부르니 하루빨리 진압못한 조정의 무능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의미없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안타까운 동학운동... ㅡㅡ...
추가적으로 전봉준이 서울로 향하고자 한 것은 체제를 뒤엎고자 함이 아니라, 탐관오리들에게 눈과 귀가 차단당한 왕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왕이 지금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서 진상을 알린다면 분명히 합당한 조치를 내려줄 것이라는 기대로 상경을 계획한 겁니다. 그래서 혁명이 아니고 단순한 민란인 것이고요. 무기고 탈취해서 서울로 향했기 때문에 혁명이면, 뭐 이괄의 난도 이괄군사혁명입니까? 그리고 농민 혁명인 것도 잘못되었죠. 농민 말고도 다양한 계층이 다수 참여하였고, 동학 특성상 보부상 들의 상인들도 많았습니다. 농민자가 붙은건 동학을 신성시하는 현대 정치집단이 농민이란 개념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멋대로 붙인 것이고요. 그래서 담백하게 동학의 난 혹은 전봉준의 난 정도가 적절합니다.
왜 당시 썩은 정치인들 입장에서. 전봉준을 바라봅니까? 전봉준이 ..난을 일으키자 하면서, 농민들을 모았겠나요?
혁명한답시고 하다가 일본 쳐들어올 명분만들어줘서
조선 박살난거지..?
동학혁명은 기득권의 탄압과 압제애 대한 민중들의 저항으로 의의가 있는거지 일본은 이미 팽창주의가 주류이던 상황이라 동학혁명이 아니라도 다른 이유를 트집 잡아 침략 했을거다. 역사를 참 쓸모없이 배웠네.
아따 동학혁명하면 일본이 올 명분을 준당께요. 우린 시작부터 다 알고 있었당께
홍경래의 난은? .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동학을 제대로 봐야지 전라도 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12가지 조건도 한참지난 1930년대 후반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마치 동학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포장해서 미화한것이고
전주성 확약도 전주성에 포위되어 식량마져 떨어지자 항복이나 다름없는 투항을 하고 조정도 민심과 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포위를 풀어주고 물러난 것입니다 작지만 포
도 있었기에 전주성 같은성은 방어막이 될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처럼 짓자총통 천자총통 이런것이 아니고 제대로된 홍이포 이상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
듯이 .... 우금치 전투는 조선군 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동학반란군 3만5천명이 붙은 전투인데 ... 우금치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한명뿐이었죠 일본군의 수나 사망자와 부상자 열몇명을
볼때 일본군의 역활은 구식 기관총인 개털링 기관총이 몇정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민비척족들이 보낸 관군에게 반란군이 당한것입니다 동학군 상당수는 자의
적으로 참석한게 아니라 반강제로 위협이나 협박을 받아 끌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당시는 정황상 일본측의 기록이 더정확하고 객관적일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YTN은 정확한 역사적 근거도 없이 동학 과 전봉준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인가? 정말 역사적 근거도 없이 동학을 미화한 이런 프로그램이 부끄럽지 않은지? 동학민란 촉발의 원인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지만 목적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전제 국가가 목적이었는데 무슨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인지.....
허준이 쌀마이뺏네~
쬐끔~ 보기가 안스러워~~ ㅋ
돌아오는 주 수요일엔 쌀빠진 허준을 역전다방에서 보는건가요~~ ㅋ
결혼하고 나서는 치마 안입나요? 혹시 보톡스 많이 맞으셨나요? 엄청 빵빵해졌네요.
동학 농민 혁명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우발적인게 맞죠. 미리 계획과 인원이 준비된 일이었다면, 장터에서 일장연설로 불특정 다수를 선동할 필요가 없는거에요. 전봉준이 몰락한 양반가라 부자가 글을 알았고, 조병갑의 학정에 힘들어하던 사람들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라 대표로 항의문을 적어 조병갑에게 전달합니다. 이에 조병갑은 전봉준의 아버지를 압송해 장형을 내렸고 장독이 올라 사망합니다. 이에 전봉준은 말로 통하지 않는다 판단하여 무장봉기를 획책한 것이고요. 전봉준은 동학 교도였고, 친구며 지인들이 대부분 동학교도였습니다. 그래서 실력행사를 같이 한 동지들도 다 동학교들이었던 겁니다. 참고로 전봉준이 도움을 요청했던 동학 지역 간부들은 전부 무시했었고요. 후에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사교도 취급으로 옥에 갖혀있던 동학교도들을 구출하니까 지역 동학 내 전봉준의 입지가 급상승하고 전봉준이 접주로까지 추대되는 거에요.
당시 정치인들은 본인 반대파들이 서학 천주교 믿는다고 가차없이 참수했죠. 동학인은 감옥에 넣어 살려는 두었나 보군요....하층계층 평민들이 믿는 거라 .위협을 못 느꼈나.....?
동학농민운동은 1. 농민저항의 측면도 있지만, 2. 일제의 부추김과, 3. 고종과 대원군의 권력다툼의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이 일본에서 소총 4,000정을 밀수하여 동학군에 넘겨주는데 1882년 임오군란때 문제된 별기군이 소총 500정이였습니다. 무슨 동학군이 무장없이 전주성 함락했다 이야기하면 역사왜곡입니다.
밀수해서 줬다는 근거는?
@@성계강-j4q 흥선대원군의 동학농민운동 사주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 -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
@@성계강-j4q 그래서 전봉준이 거병 명분으로 대원군 섭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준용이 한양에서 동학군(동비)랑 고위관료들 암살하러 돌아다니는 것이고 그래서 고종이 한양이 병사를 못내려보내고 청나라에 청병하는 것이고요.
와..그렇군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군요.
도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것인가요?
@@vinniekim6899 원래 다들 아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대한민국 사학계는 갑신정변은 부르주아 혁명으로, 동학농민운동은 프로레탈리아 혁명으로 비정하기 때문에 이야기안하는거에요.
동학의 잔당은 일진회가 됩니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이미 인지하고 있는 역사를 처절하게
들으니 빡쳐서 내일 바쁜데 술먹으니
안되니 더 이상 뚜껑 열려서 못 보겠다.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세계적으로 인간을 위한 혁명은
동학농민혁명 밖에 없는듯 합니다~대부분 신을 위한다는 핑계로 계급투쟁,권력투쟁이지요
사발통문은 지도자를 숨기는 기능보다 인간평등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여전히 진행중이지요~
사람이 하늘인 세상이 아직 아니기에~ㅠㅠ
인간평등사상이란 서구적인 개념에 동학을 끼워맞추고, 그걸 기반으로 다른 혁명들을 평가절하하는건 부끄러운 일이죠.
그리고 사발통문 어디가 인간평등사상을 보여주죠?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흥미있는 과거 역사를 접하면서 교통난의 흐름의 현실에 비추어 보니 지금도 혁명이 있어야 할 떼이지 싶네요 흐름을 막아 물세 받던것이나 자동차 흐름을 막아 가렴주구 하는것이나 뭐가 다를까 싶고 똑같은짓 아닌가 합니다
쪽팔리까
학살은 급 종료 마무리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선동꾼에
속으면
저렇게 개죽음 당한다
역사를 그렇게 배웠다니, 안타까운 인생이시네요.
걱정하지 마십숑 이런분은 가족이 개죽음 당해도 이해 하실 분입니다
한심하네 한심해
괜찮습니다.
저들의 희생으로 댁같은 사람도 이렇게 댓글을 쓸수있는 세상이 되었잖습니까?
@@vinniekim6899 이런사고방식 조금더 확장되면 폴포트/마오쩌둥 스타일됨,.. 본인 기준에 대로 역사가 진해되서 너도 살수있다라고 가스라이팅하는거고,... 조금더 나가면 나하고 생각이 틀리면 너는 버러지야 이런식이됨 ㅋㅋ
All the Lies !!
동학농민혁명 그러니까 별로다... 괜히 볼세비키?혁명 이런식으로 공산당 느낌남ㅠ 그냥 운동으로 해요. 충분히 운동이어도 좋아요ㅎㅎ
사족이지만, 혁명을 붙이나 안 붙이나는 실제로 정치성향에 따라 달라져요. 역사학이 해석의 학문이라 의의에 대한 해석이 학자마다 다르기도 하고, 말씀하신대로 그런 느낌 때문에.
@@kanvarry3356 아... 또 그게 그런가요..??? 그건 몰랐네요 ' ' ;;;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폭동 DNA
우리 홍범도 장군께서 동학농민들을 사살하고 다니셧지
내가보는 동학난은 조선말기 민비일족들의 전횡으로 국가부채가 조선의 국가재정의 3년치 이상 규모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민가에 숫가락 하나까지 수탈을 해갈정도 였다고한다
그혼란과 민심이반 및 흥선대원군과 밀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뒤엎고 권력을 직접잡아 왕이 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관대작 자리라도 한자리 할려고 난을 일으켰을뿐 그이상
은 아니었다 겉으로 당시 동학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척왜 양이였다 서양과 일본세력을 물리치자고 한것인데 동학난 진압후 남은 잔당들은 일진회란 조직을 만들어 한일합방에 앞
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이 바뀌고 있고 서양세력들이 밀려오며 조선을 억압하던 청나라도 망해가고 있으니 너도나도 혼란을 틈타서 권력한번 잡아 보자는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음 폐정개혁 12조는 동학난 발생시기에서 30년이상 지난다음에 일제시대때인 1930년대 후반에 오지영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에 오지영이 이런것을 주장하였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해서 집어넣은 것일뿐 동학난 발생당시 이런주장은 그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그걸 마치 동학난이 정의로운 것인양 꾸미기 위해서 전봉준이 주장한것 처럼 포장되어 유통되
고 있으니 반란을 찬양하는 이상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것이다 동학난이 운동이나 혁명이면 홍경래 난도 혁명이다
찌찌 뽕
윤석열 끌어 내리려다 일본군 쳐들어 올라.
윤지연 아~~이 추임새좀 안하면안되나 아직도하노;;
엉터리 내용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