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쉬워 하는 한국사의 여러 패전이 있습니다만, 후대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던 가장 아쉬움 많이 남는 전투가 바로 갈라수 전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승전 외에도 의미 있는 패전에 대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가봐요. 대부분 나라가 아마 그럴겁니다. 임진왜란을 생각해보면 중국에서는 벽제관전투보다는 4차평양성전투를 앞세우고 우리가 임진왜란하면 칠천량이나 용인에서의 전투보다는 3대대첩을 앞세우는것처럼... 그치만 오늘 이 영상처럼 패배한전투에서도 생각할거리와 고쳐나가야할 배울점들이 있을것같습니다.
@@MiReukGungYe 딱히 오욕의 역사를 마주보기 싫어서 다루지 않는게 아니라 한국사 과목 자체가 필수 과목이 아니라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전쟁만 나열하고 수박 겉핣기 식으로 다루는 겁니다. 만약 한국사가 영어나 수학처럼 필수 과목 이었다면 어떻게든 수능점수 조절하려고 한국사를 방대하게 다룰 겁니다. 그럼 승전 기록 뿐 아니라 패전 기록도 엄청 상세하게 다루겠죠. 오히려 그렇게 해야 역사의 원인과 결과를 알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여건이 생기는데 한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보니 반쪽짜리 역사만 배우는 셈이죠. 솔직히 고대사 기록이 없어서 고조선 2천년도 대충 넘어간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그건 먹고 살기 어려워 고고학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을 때 이야기고 현재 고대사나 상고사 관련 유물이나 발견이 상당히 많이 진척되어 교과서에 실으면 한국사를 다시 배워야 할 정도의 내용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기존 역사학계를 꽉잡고 있던 교수들이 자기들 권위가 깍일까봐 절대 인정안하고 발표도 못하게 막고 있죠. 그 사람들 다 뒤져야 여지껏 발견한 고고학적 성과들이 전면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한국사를 대하는 태도도 문제고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 발표도 못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합니다.
@@자룡-q4j 제가 20년동안 아이들 역사 가르치고 있는 사람인데, 한국사는 수능 기준으로 필수 과목입니다. 영어와 같이 절대 평가제 과목이고 아이들 입시에 나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패전을 잘 다루지 않는 것은 동북아 역사 서술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한계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최대한 감추려고 하는 것이 그리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혼자서 생각하시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은 자제하셨으면 합니다
@@zzang-mathis 한국사는 선택과목입니다. 영어, 수학처럼 수능 비중이 높지도 않고요. 그리고 내가 말한 내용이 제 뇌피셜이 아니고 실제 한국사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대학에서도 파벌이 장난 아닌 건 잘 아실 겁니다. 대학원생한테 갑질하다 못해 똥까지 먹이는 변태 교수도 있으니까요. 대학교수들 입장에선 자기가 쌓아온 학문이 부정당하는 순간 주요학계에서 밀려나가는게 일도 아닌데 특히 역사학처럼 변동이 심한 학문의 경우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기존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 입장에선 모골이 송연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소한 자기가 죽기전까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도 최대한 부정합니다. 이덕일 같은 경우도 정조 독살설 주구장창 주장했다가 심환지 비밀편지까지 발견되버리니 완전 사이비 역사가로 찍히잖아요. 그나마 이덕일은 주류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밀려나지만 주류사학자 취급받는 이병도 계파 교수들은 정말 난공불락이죠.
윤관은 나름 정보 차단을 하겠다고 여진 추장들을 살해했는데 그들 중 다수는 고려의 호출을 받고 왔을 정도로 친고려 성향을 지닌 이들이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진처럼 뭉치면 굉장히 강해지지만 자주 분열하는 집단에게는 적절히 쪼개고 이간질해서 힘을 분산시키면서 그들의 일부를 야금야금 흡수해 가야 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강경파만 제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통합해야 하는데, 윤관은 애초부터 완벽 제압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기적인 안목에서 실수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수의 여진 추장들을 살해했고 그것이 여진 거의 전체를 반고려파로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었지요.
@@뇸뇸뇸-o3v 그게 아닙니다! 내성을 튼튼하게 쌓고 외성을 쌓았어야 했었고, 이점은 그당시 장수들이 우려한바가 있었습니다!! 성과 성사이를 간극을 좁혀 한쪽이 받더라고 다른쪽에서 공격한쪽의 후방을 교란시켜 충분히 공격을 분산시켰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길주성의 경우에도 외성이 무너 졌지만 어느정도 내성을 건축했기에 하루안에 내성을 어느정도 방비 할수 있었고 그 내성을 보고 여진족은 곧바로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6진이 200년이 넘은 세월간 여진의 공격에도 버틸수 있었던건 강을 경계로 성을 밀집시켜 쌓았기에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지켜낼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고 아쉽기만 했는데 동북 9성을 반환한 것은 아쉬운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고려는 동북 9성을 만들어 놓으면 가장 무너뜨리기 힘든 남북으로 이어진 방어 지점을 확보한 줄 알았으나 알고 봤더니 백두대간 곳곳에는 고려가 알지 못했던 길들이 많아서 여진이 전장 선택을 제한 없이 선택할 수 있고 방어력도 취약한 일자 방어선이 되어 버렸고 더군다나 야전에서까지 대패해버렸으니 고려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또한 여진도 그때 했었던 약속을 끝까지 지켰던 것도 그나마 위안이 되고
말씀하셨던 지형 상의 문제에 대해 고려가 오판했던 것이 여진 정벌 실패의 근본 원인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이전 여진정벌 영상에서도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고려는 원래 중첩된 방어선을 형성하고자 계획했습니다만, 해당 지역의 지형은 접근 루트가 많아 각 성이 모두 여진의 공격에 개별적으로 노출되었고, 성과 성 사이의 거리도 멀어서 유기적인 협력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전쟁 과정에서 상당한 피로를 고려에게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성공했다면 우리 역사의 큰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을 여진 정벌이 그런 난관을 겪다가 결국 갈라수 전투의 패배로 인해 좌절되었다는 점이 참 아쉽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진 정벌이 결과적으로 예방전쟁의 효과가 있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나중에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이 고려와의 싸움에는 진저리가 났기에 우리 서로 건드리지 말자는 식으로 나왔고, 고려 또한 여진족이라면 진절머리가 났으니 서로 좋게 좋게 지낼 수 있었지요. 심지어 고려 반란 세력이 북방 영토를 바칠 테니 함께 고려를 공격하자고 금나라에 제안했어도 금나라가 이를 거절하면서 고려와 전쟁하지 않았습니다. 고려도 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함께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요청했지만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youp7964이건 약간다른게 몽골 주력은 동유럽을 정복할때까지 끝까지버티던 금나라,남송이었죠... 고려는 이미 왕족,군벌들만 섬으로 튀면서 국가라고 부를수도 없을만큼 황폐화됐으며 그냥 몽골의 신병,예비군들 경험치쌓는 놀이터로 전락했습니다 결국 중국을 점령하고 눈을 고려로 돌린순간 바로 납작 엎드려서 항복하죠... 체급이 비슷할때 예방전쟁이 의미가 있는거지 여몽항쟁의 의의는 타이밍맞게 항복하는게 목숨은 보존할 수 있다 라는 의미같습니다
갈라수 전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기록이 부실해서 ㅠㅠ 아쉬운 부분이네요 고려사가 문제가 한세기 간격으로 거란 여진 몽골제국에게 국토가 유린당하면서 기록이 소실되고 문화재도 다 타버려서 남은게 없고 중국사를 기반으로한 삼국사기로 접해야한다는 현실이 참혹합니다 그러나 그 기록도 없었다면 아예 고려라는 나라자체를 모를수도 있는 한국사의 고려..... 현종시기의 전성기가 여진에게 종말을 고하고 나중에는 금나라 더나아가 청나라로 우리보다 우월한 힘으로 중원을 차지한걸보면 결국 강한자는 살아남아 힘을 키운자가 맞는것 같습니다 뭐 나중에 한족에게 잡아먹혔긴했지만....
중국 정복 왕조들의 말로를 보면 중원에 진출해서 영토를 넓히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냥 우리 터전을 잘 지킨 상태에서 요동과 만주, 연해주 등 한반도 + 고구려나 발해 영토 정도를 점유한 상태로 현대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만의 정체성과 체제를 잘 유지해 오기만 했다면, 그게 베스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됐었다면 동아시아 역사가 굉장히 달라졌겠지요. 일단 청나라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고 세계사적으로도 많은 게 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합니다만,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유사역사학의 유행 또한 그런 아쉬움의 그릇된 표출 현상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규모 병력을 운용해본 경험이 적은 게 결국 탈이 난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려가 수성에 강했고, 그래서 일단 점유 후에 성을 세워 수성한다는 전략으로 간 것 같은데 성들이 종심으로 방어되는 게 아니고 그냥 전면에서 두들겨 맞고, 보급도 어려워지니 어쩔 수 없이 야전으로 전쟁이 진행된 게 아닐까 하는데 여진은 기병에 보병까지 합친 전술도 운용할 줄 아는 민족이다보니 당한게 아닌가 싶네요. 영상처럼 그 피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니 결국 포기하게 되는 방향으로 가고
@@단군자손 회전을 많이 한다고 강한게 아니죠. 당장 귀주대첩 때말곤 승리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수틀리면 싸우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당하니까 싸운건 다른측면이라고 봐야합니다. 거란전쟁시기때도 수성하면서 돌아가는 거란의 뒤를 치거나 게릴라전으로 싸워서 타격을 준것이지 회전에서 다 이긴게 아닙니다. 요즘 올라오는 영상들만 보셔도 고려가 평야에서 거란이랑 싸우다 피해가 상당했다고 하는 영상들도 많은데 무슨 수틀리면 싸웁니까 그리고 통주성 전투때 30만도 방심이든 어쩃든 쓸려나갔는데 그런건 다 빼고 회전많이 했다고 강한거면 이후 여진이랑 싸우면서 갈라수 전투에서의 피해를 결국 못이겨내고 북벌도 포기한 건 님말대로 수틀리면 싸우는 나라의 모습입니까?
동북9성 개척은 애초에 시작부터 지리를 제대로 알지못했다는 점에서 패배가 예정되어 있었음.. 그걸 세종이 반면교사 삼아서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4군6진 개척에 성공했다는게 다행일정도 이성계의 거점이 함경도~만주지역이었으니 지리를 잘 알고 있었지만 함경도가 발해 멸망후에 우리 민족이랑 인연이 끊겼다는걸 보면 지형을 몰랐다는게 이해가 안가는건아님 엄청 아쉽기는함
아직 확실하게 신뢰할 만한 정설은 없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함흥평야설은 신빙성이 굉장히 떨어진다고 보고 있고, 이미 학계에서도 사실상 폐기된 이론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논의 가치는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2~3학설이 많이 얘기되다가 최근에는 5학설을 미는 연구자들도 나오는 상황인데요, 저도 조심스럽게 5학설 쪽에 기울고 있긴 합니다만, 자신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료를 보자면 대략 두만강 인근으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최북단이 두만강 이북 700리였다는 설이 제 생각에 가장 유력해 보이긴 합니다만, 이 또한 조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북방 개척을 하기 위해 당시 떠도는 설 중 가장 먼 곳에 대한 주장을 강조하면서 근거화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조선 초기 세종대에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동북 9성의 위치인 만큼 한참 더 후대인 현재로서는 진실을 확인하기 불가능한 상황이라 아쉬울 따름입니다. 보다 확실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배운 동북 9성은 정말 코딱지 만한 작은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90년대) 마저도 국사선생이 이건 말이 안된다..겨우 요정도 땅으로 수십만 대군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싸울 정도겠냐? 그리고 겨우 그 정도 영토를(함흥평야설) 기반으로 금나라라는 거대 제국을 세웠겠냐? 아마도 두만강 넘어 연해주까지 진출한게 합리적이다 라고 하였죠. 당시 환단고기가 유행했던 시절이라 국뽕 가득한 역사관이 지배하던 시기였으나 그걸 감안해도 함흥평야설은 말도 안되고 지금은 폐기된 학설이고, 방어선이 길어져 전투가 연계가 안되어 퍠배했다는 당시 기록을 보면 두만강 넘어 연해주 범위까지 넘어가야 이게 설명이 됩니다. 국뽕 좀 집어넣으면 시베리아까지 진출했다고 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하면 세계를 지배하는 건 몽골이 아닌 고려제국......
@@마라도나-d6b "반면에 조선의사대주의자들은 고려를 부정하기 위해서 고려사를 편찬해 고려영토를 우리가아는 고려한반도지도로 가뒤버리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 버젓이 나와있죠, 고려 동북면은 선춘령 공험진이라고 돌려주어 고려 땅도 아닌데 고려 땅이라고 버젓이 쓴게 조선입니다. 줄이 긴 뭘 줄입니까 늘렸지 ㅎㅎㅎ 정작 공험진 위치도 모르면서 고려사 지리지와 조선시대 편찬된 관찬 지리지에 팩트가 아닌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확인되지 않는 공험진 위치(백두산 북쪽 두만강 700리 등등)를 주석으로 적은 것도 조선입니다. 고려를 한반도에 가두려면 이런 주석을 왜 답니까? ㅉ 그리고 이렇게도 쓰고 있죠 동북면이 고구려 크기를 넘어 섰다고 했고 조선은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이라 보고 명나라가 허락한 공험진 이남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이래도 조선이 줄인 겁니까? 되려 늘린 거지 ㅉ
어떻게 보면 여진족들이 점거했던 땅은 한창 고구려의 옛 영토이기도 했는데 한민족이 거기서 쓸려나간지 수백년이 지나서인지 남남의 땅이 된지 오래라 고려에게 매우 불리했고 그마저도 세계사적으로보면 너무나도 작은 영토인데도 이마저도 정복하지 못한 점에서... 역시 우린 급이 안 맞던 걸까요... 수백배의 적들을 통쾌하게 파괴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팔짱끼고 상대를 노예로 만들던 19세기 서구열강들이 대단했다고 봐야하나...
개인적으로는 한민족 왕조가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봅니다. 한민족이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고구려, 발해, 거란전쟁 이후 고려와 같이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한 축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여진정벌 이후로는 고려가 너무 약해져버렸고, 원나라 성립 이후부터는 그대로 명, 청까지 쭉 중원에 강력한 통일왕조가 유지되어 아무리 왕조가 바뀌고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도 한반도의 국력으로는 중원의 견제에 눌려 기껏해야 4군6진이 한계.. 물론 저때 윤관에게 카이사르가 빙의한것처럼 천재적인 전략과 외교로 여진을 복속하여 만주 일부와 한반도를 모두 지배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가정해도 상황은 힘들었을것입니다. 다민족국가이자 유목세계와 농경문화권을 모두 아우르던 고구려, 발해와 달리 고려는 뼛속부터 농경문화 단일민족 국가였습니다. 고려는 문화적, 정치적 차이로 인한 갈등을 고구려보다 훨씬 더 많이 경험했을것이고, 만주를 여기저기 누비며 이러한 갈등을 제압할 기병 자원을 양성하는 것도 발해에 비해 더욱 버거웠을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만주를 통제하고 안정화시키는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만주-한반도 통합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달려올 요나라군까지 맞상대 했어야 했을테니 매우 높은 확률로 발해 시즌2를 찍으며 요나라에게 만주를 뱉어내거나 아예 주권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예종은 여진 정벌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선왕이었던 숙종의 의지가 강했고, 그 유지를 이어야 한다는 중신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결국 여진 정벌을 결정하게 됩니다. 만약 숙종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생존해 있을 때 여진 정벌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 보곤 합니다만, 결과는 비슷했을 듯합니다. 고려의 여진 정벌은 비록 고려 측의 실수가 있긴 했습니다만, 고려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대응했고 그렇게까지 잘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지형이 생각보다 너무 불리했고, 여진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더 심했던 데다가 여진의 사묘아리가 지나친 사기 캐릭이었기 때문에 결국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즉 고려가 뭔가 굉장히 잘못했다기 보다는 최선을 다했지만 애초에 기본 역량 자체가 여진 정벌을 완벽히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고,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고 봐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당시 인구가 지금의 10분의 1정도 일텐데 수만명이나돼는 군대를 양성 보유 유지 전쟁투입이 가능이나 했을지가 의문입니다. 무장기병 한명을 양성하는데도 엄청난 돈이 들었을텐데 대부분의 국가가 농업국가인걸보면 추측으로 실제군대는 공격측 8000~10000명, 수비병력 3000~5000명이 아니었을지 현실성있는 추측을 해봐요.
고려 여진 전쟁은 고려 입장에서 단순히 침입해 온 적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자리 잡고 있는 적을 몰아내고 그곳을 자기 영토로 삼는 점령전입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 뿐만 아니라 바로 영토로 만드는 작업까지 같이 해야 하는데 그 넓은 땅을 점령 관리하려면 최소 5만에서 10만명의 군대는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보다 훨씬 협소하고 기존의 북쪽 거점까지 있었던 상태에서 상대도 약했던 지역이었던 4군을 점령하는데 동원된 병력이 3만명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25000정도의 병력으로 함경도 진출했다가 현지 수성이 되지 못해서 호되게 혼났던 것 생각하면 여진족이 한참 강력해지고 있던 시절에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고려의 확실한 영토로 삼아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임무는 2만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훨씬 따뜻한 경주의 신라왕조는 지금의 함경도를 점령하고도 그냥 버렸지만, 나름 추운 땅 개경에서 시작한 고려는 어떤 이유에선지 함경도를 차지해보려한 듯한데, 이 경향은 조선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현대에 와서야 아오지 탄광이라던가 뭔가 돈될만한 것이 발견되었을 뿐, 그 당시엔 농사도 잘 안되, 몹시 추워 ... 똥땅이던 그곳이 무슨 매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군대를 몰고 수 만명이나 죽여가면서도 고려-조선에 걸쳐 사람들을 갈아 넣었는지 "그것을 알고싶다." 추측을 해보면, 그곳에서나는 미역, 물개 가죽이 좋았거나... 아뭏튼 그 딴 것 얻자고 수 만명을 투입한다? 요즘같은 인명 중시 시대엔 이해 불가이지만, 당시가 왕조, 신분 사회임을 감안하면 그 딴 것 얻자고 투입하는 것도 자연스러움. 비버가죽 확보한다고 활동하다가 생긴 나라가 캐나다인것 보면, 결코 허황된 이유는 아닐듯.
진흥왕 때 잠깐 차지했을 시절에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뱉어냈고, 통일 이후에는 간신히 나당전쟁 넘기고 보니 이미 발해가 만주와 대동강 이북을 통합하여 신라의 국력으로는 시도해보기 힘들었던게 크죠. 통일신라도 혼자서는 안되니 당나라와 함께 북진을 시도해보았으나 추위와 보급문제로 간만보다가 실패..
7세기에는 신라의 북쪽 경계가 대체로 북한강 유역 정도였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힘에 부쳤는지 황해도 지역에 행정구역 설치 안 하다가 발해가 남쪽을 점점 세력을 뻗어오자 8세기 중반에야 황해도에 행정구역을 설치한 걸로 압니다. 황해도 평안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후 몇 십 년간 버려져 있었던 듯.
고려를 다루는 대부분 영상에서 병력은 15만 + - 에 직업군인으로 설명하거나 그런 인상을 피우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정규군은 최대로 봐도 5만 정도고 나머지는 민간인 징집병으로 생각함 . 이 중에서 국왕 친위대 + 수도방어군 + 경상도 전라도 충정도에 남은 병력을 생각하면 정규군 5만 중에서 북벌에 참여한 병력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4만 정도로 판단함 .
@@부엉이동생 조선 시대 기록은 그렇다 커더라로 접근하시면 안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긴 나라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농사 짓다가 끌려오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당연히 훨씬 병력이 크죠 조선 시대 초중기 중앙군인 5위 중에 하나인 중위 갑사(상비 직업군)만 세종시대 8000명에서 성종시대 14800명입니다. 평상시에는 이들이 2000명 정도로 번을 나누어서 근무했습니다 경국대전에 규정하는 중앙군인만 63100명이고 이들이 5번제로 운영되었으니 실제 규정상 병력은 12000명이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정상 조선 중앙군중 상번 병력은 5000에서 6000명을 유지했습니다 지방군도 상비군만 37500을 유지하는 것이 규정이었고, 아무리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 20000명 이상의 병력은 상시로 유지했습니다
ㄴㄴ 이미 금나라 건국한 형제가 여진을 하나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고려파와 아골타가 이끄는 완안부와 격돌했는데 참패를 했고 친고려파 여진은 고려에 넘어오게 됨으로써 완안부 여진과 격돌하게 됩니다. 격돌하고 나서 고려와 여진이 맞붙었는데 깨집니다. 그래서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침략하죠. 결국 지죠
당연히 있었고 그게 대여진 기본 정책입니다 그런데 여진족은 하나의 정치 체계를 갖춘 부족이 아닙니다 각 부족이 독립되어 있고 그들과의 관계도 복잡하기 때문에 일관된 정책을 적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여진 부족과 B라는 여진 부족이 사이가 나쁩니다. 그래서 A부족이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하죠 그러면 B부족은 고려와 적대시되거나 아니면 요나라와 편을 먹고 고려에 대항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중국의 제국들이나 우리도 고려 조선 시기에 여진족을 대할 때 그들을 분열책을 써서 니편, 내편 나눠서 이간질하는 정책을 많이 이용했던 것이구요
이걸보면 정말 충격적인게 여진족이 요나라를 정복하고 금나라를 건국하기전, 출하점전투때 이미 완안부도 고려의 침략에 당해서 재기불능에가까운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던데 어떻게 남아있는 패잔병(??)만 가지고 요와 송까지 굴복시킨건지;; 정말 금나라도 미스테리한 엄청난 나라입니다.
지도만 봐도 동북9성은 먼가 상당히 많이 잘못 된 걸 알 수가 있음. 지형 자체로 점령하기 힘든 지역이기에 제대로 방어를 할 시간도 부족했고 결국 기형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수 밖에 없음. 저 방어선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임진왜란 때 가토군이 어떻게 정문무장군에게 털렸나 보면 잘 알 수 있음. 할려고 했다면 4군 6진 식으로 강을 끼고 수비 병력을 세우고 천천히 점령하는 방식으로 포위하다가 나중에 길을 열어주는 형식으로 잡아 먹었어야 함.
말씀대로 동북 9성 지역은 공격에게는 유리하고, 방어에는 불리한 지형인 것 같습니다. 동북 9성의 위치가 아직 학술적으로 확정되지는 않았기에 확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기되는 여러 학설을 보면 그 어느 학설이 맞든 모두 수비에 불리한 지형으로 보입니다. 고려는 아마 국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속전속결로 목표했던 지역을 점령한 후 서둘러 성을 쌓아서 빠르게 안정적인 점유 상태로 전환하고자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그렇게까지 협조적이지 않은 데다가 여진의 저항 또한 예상보다 훨씬 거셌기에 결국 수렁처럼 빠져드는 소모전이 되어 버렸고, 그러다가 갈라수 전투라는 큰 타격을 받으면서 결국 포기하게 된 듯합니다.
고려사는 기록이 거의 없지. 조선실록은 왜곡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고려사는 기록왜곡이 너무 심해서 믿지 못하지. 조선실록은 집권이후에 발표하게 해서 정확도가 높지. 거란 40만이 몰살되었는데 중국본토를 공격했을까? 상식적으로 40만 몰살되면 그거 수습하는데 10년이상 걸리는데 국가패망으로 직결되는 사안인데 무인따위가 뭔 수로 이기겠냐. 항복했겠지. 애초에 궂이 싸울 이유도 없었으니
고려가 패배할수 밖에 없는 이유는 친고려 여진무리를 죽인게 최악의 실수였음. 그계기로 여진이 고려에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진에는 사묘아리라는 최고의 명장이 있었음
@GFD0116근데 그옹호론자들도 결과적으론 전쟁에 패배한요인으로 뽑기도 함 (당장 고려거란전때도 여진족들도 고려측에서 같이 싸워주기도함)
한국사 3대 대첩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한국사 10대 패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거나 논의도 하지않음
오늘 제대로된 이야기를 들었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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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쉬워 하는 한국사의 여러 패전이 있습니다만, 후대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던 가장 아쉬움 많이 남는 전투가 바로 갈라수 전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승전 외에도 의미 있는 패전에 대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가봐요. 대부분 나라가 아마 그럴겁니다.
임진왜란을 생각해보면 중국에서는 벽제관전투보다는 4차평양성전투를 앞세우고
우리가 임진왜란하면 칠천량이나 용인에서의 전투보다는
3대대첩을 앞세우는것처럼...
그치만 오늘 이 영상처럼 패배한전투에서도 생각할거리와 고쳐나가야할 배울점들이 있을것같습니다.
@@MiReukGungYe 딱히 오욕의 역사를 마주보기 싫어서 다루지 않는게 아니라 한국사 과목 자체가 필수 과목이 아니라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전쟁만 나열하고 수박 겉핣기 식으로 다루는 겁니다.
만약 한국사가 영어나 수학처럼 필수 과목 이었다면 어떻게든 수능점수 조절하려고 한국사를 방대하게 다룰 겁니다.
그럼 승전 기록 뿐 아니라 패전 기록도 엄청 상세하게 다루겠죠.
오히려 그렇게 해야 역사의 원인과 결과를 알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여건이 생기는데 한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보니 반쪽짜리 역사만 배우는 셈이죠.
솔직히 고대사 기록이 없어서 고조선 2천년도 대충 넘어간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그건 먹고 살기 어려워 고고학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을 때 이야기고 현재 고대사나 상고사 관련 유물이나 발견이 상당히 많이 진척되어 교과서에 실으면 한국사를 다시 배워야 할 정도의 내용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기존 역사학계를 꽉잡고 있던 교수들이 자기들 권위가 깍일까봐 절대 인정안하고 발표도 못하게 막고 있죠.
그 사람들 다 뒤져야 여지껏 발견한 고고학적 성과들이 전면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한국사를 대하는 태도도 문제고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 발표도 못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합니다.
@@자룡-q4j 제가 20년동안 아이들 역사 가르치고 있는 사람인데, 한국사는 수능 기준으로 필수 과목입니다.
영어와 같이 절대 평가제 과목이고 아이들 입시에 나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패전을 잘 다루지 않는 것은 동북아 역사 서술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한계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최대한 감추려고 하는 것이
그리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혼자서 생각하시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은 자제하셨으면 합니다
@@zzang-mathis 한국사는 선택과목입니다.
영어, 수학처럼 수능 비중이 높지도 않고요.
그리고 내가 말한 내용이 제 뇌피셜이 아니고 실제 한국사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대학에서도 파벌이 장난 아닌 건 잘 아실 겁니다.
대학원생한테 갑질하다 못해 똥까지 먹이는 변태 교수도 있으니까요.
대학교수들 입장에선 자기가 쌓아온 학문이 부정당하는 순간 주요학계에서 밀려나가는게 일도 아닌데 특히 역사학처럼 변동이 심한 학문의 경우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기존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 입장에선 모골이 송연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소한 자기가 죽기전까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도 최대한 부정합니다.
이덕일 같은 경우도 정조 독살설 주구장창 주장했다가 심환지 비밀편지까지 발견되버리니 완전 사이비 역사가로 찍히잖아요.
그나마 이덕일은 주류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밀려나지만 주류사학자 취급받는 이병도 계파 교수들은 정말 난공불락이죠.
고려거란전쟁에서 귀주대첩 이후 거란이 고려 정벌을 포기했듯이,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갈라수전투가 고려의 귀주대첩과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얘긴데요, 갈라수가 현재의 어디죠? 성천강 확실한가요?
대륙에서 벌어진일입니다 요샌 누가 우리 삼국과 고려가 한반도에만있었다고 믿습니까 그래서 중국이 죽도록 동붕공정으로 우리나라를 한반도에 가두는 이유입니다 일본놈들도 한패고요
대륙에 우리지명이 판박이처럼 다 일치합니다 ㅎㅎ
상대가 너무 강했는데 그 상대를 강하게 만들어준게 고려. 윤관이 고려에 호의적인 여진 추장을 몰살시킴으로써 여진을 똘똘 뭉치게 해버렸다
윤관은 나름 정보 차단을 하겠다고 여진 추장들을 살해했는데 그들 중 다수는 고려의 호출을 받고 왔을 정도로 친고려 성향을 지닌 이들이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진처럼 뭉치면 굉장히 강해지지만 자주 분열하는 집단에게는 적절히 쪼개고 이간질해서 힘을 분산시키면서 그들의 일부를 야금야금 흡수해 가야 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강경파만 제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통합해야 하는데,
윤관은 애초부터 완벽 제압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기적인 안목에서 실수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수의 여진 추장들을 살해했고 그것이 여진 거의 전체를 반고려파로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것보다 6진 처럼 강을 경계로 성을 밀집시켯으면 어땟을까 싶습니다
@@안드로이드-g2q성을 밀집시키면 다른 쪽으로 돌아올테고 성이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만들어지는것도 아니고 그 사이 공격받을테고 성을 지키고 개간해야될 농민들은 남쪽에서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것만해도 시간과 비용이 막대하고.. 추장 살해건부터 끝난 게임이었어요
@@뇸뇸뇸-o3v6진때는 우호적인 여진을 포섭했으니 우호세력을 제거한 고려가 당시애 오만했고 그게 패배로 갔다고 봐야겠네요.
@@뇸뇸뇸-o3v 그게 아닙니다! 내성을 튼튼하게 쌓고 외성을 쌓았어야 했었고, 이점은 그당시 장수들이 우려한바가 있었습니다!! 성과 성사이를 간극을 좁혀 한쪽이 받더라고 다른쪽에서 공격한쪽의 후방을 교란시켜 충분히 공격을 분산시켰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길주성의 경우에도 외성이 무너 졌지만 어느정도 내성을 건축했기에 하루안에 내성을 어느정도 방비 할수 있었고 그 내성을 보고 여진족은 곧바로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6진이 200년이 넘은 세월간 여진의 공격에도 버틸수 있었던건 강을 경계로 성을 밀집시켜 쌓았기에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지켜낼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고 아쉽기만 했는데 동북 9성을 반환한 것은 아쉬운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고려는 동북 9성을 만들어 놓으면 가장 무너뜨리기 힘든 남북으로 이어진 방어 지점을 확보한 줄 알았으나
알고 봤더니 백두대간 곳곳에는 고려가 알지 못했던 길들이 많아서 여진이 전장 선택을 제한 없이 선택할 수 있고 방어력도 취약한 일자 방어선이 되어 버렸고
더군다나 야전에서까지 대패해버렸으니 고려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또한 여진도 그때 했었던 약속을 끝까지 지켰던 것도 그나마 위안이 되고
말씀하셨던 지형 상의 문제에 대해 고려가 오판했던 것이 여진 정벌 실패의 근본 원인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이전 여진정벌 영상에서도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고려는 원래 중첩된 방어선을 형성하고자 계획했습니다만, 해당 지역의 지형은 접근 루트가 많아 각 성이 모두 여진의 공격에 개별적으로 노출되었고, 성과 성 사이의 거리도 멀어서 유기적인 협력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전쟁 과정에서 상당한 피로를 고려에게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성공했다면 우리 역사의 큰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을 여진 정벌이 그런 난관을 겪다가 결국 갈라수 전투의 패배로 인해 좌절되었다는 점이 참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런 실수덕(?)에 일본식민사관에 의한 함흥평야설이 허구임을 쉽게 알수 있죠. 세종실록지리지처럼 3성이 두만강 너머인가만 논란이 될뿐이라 생각합니다.
여진이 약속을 지키게 만든건 갈라수 이후 길주성의 5개월의 항쟁이 컷습니다! 오죽하면 아골타부터 그밑의 장수들 까지 치를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금나라가 고려를 건들지 않은건 나라세우기 전 서로 피터지게 싸워서 고려 처들어가면 잘못하다간 거란꼴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 특히 당시 고려 북방사령관이 척준경이라 머리만 좀 숙여주면 안건들인다 했죠 전쟁은 그래도 안일어나는게 서로 이득이니
그런 차원에서 여진 정벌이 결과적으로 예방전쟁의 효과가 있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나중에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이 고려와의 싸움에는 진저리가 났기에 우리 서로 건드리지 말자는 식으로 나왔고, 고려 또한 여진족이라면 진절머리가 났으니 서로 좋게 좋게 지낼 수 있었지요.
심지어 고려 반란 세력이 북방 영토를 바칠 테니 함께 고려를 공격하자고 금나라에 제안했어도 금나라가 이를 거절하면서 고려와 전쟁하지 않았습니다.
고려도 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함께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요청했지만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사실 길주성 전투에서 5개월간 버틴게 컸습니다!! 사묘아리도 성함락을 포기 했을정도니!!
@@Hmentary 사람이나 국가나 아무리 작고나약할지라도 싸움이나면 죽을기세로 싸워 상대에게 인상을심어주는게 답이라는 교훈이네요. 이후 원나라도 유일하게 고려만은 아우국으로 남겨주었죠. 한민족은 이렇게 살아남았던것 같습니다.
@@youp7964이건 약간다른게 몽골 주력은 동유럽을 정복할때까지 끝까지버티던 금나라,남송이었죠... 고려는 이미 왕족,군벌들만 섬으로 튀면서 국가라고 부를수도 없을만큼 황폐화됐으며 그냥 몽골의 신병,예비군들 경험치쌓는 놀이터로 전락했습니다
결국 중국을 점령하고 눈을 고려로 돌린순간 바로 납작 엎드려서 항복하죠... 체급이 비슷할때 예방전쟁이 의미가 있는거지 여몽항쟁의 의의는
타이밍맞게 항복하는게 목숨은 보존할 수 있다 라는 의미같습니다
갈라수 전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기록이 부실해서 ㅠㅠ
아쉬운 부분이네요 고려사가 문제가 한세기 간격으로 거란 여진 몽골제국에게 국토가 유린당하면서 기록이 소실되고 문화재도 다 타버려서 남은게 없고 중국사를 기반으로한 삼국사기로 접해야한다는 현실이 참혹합니다
그러나 그 기록도 없었다면 아예 고려라는 나라자체를 모를수도 있는 한국사의 고려.....
현종시기의 전성기가 여진에게 종말을 고하고 나중에는 금나라 더나아가 청나라로 우리보다 우월한 힘으로 중원을 차지한걸보면 결국 강한자는 살아남아 힘을 키운자가 맞는것 같습니다
뭐 나중에 한족에게 잡아먹혔긴했지만....
중국 정복 왕조들의 말로를 보면 중원에 진출해서 영토를 넓히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냥 우리 터전을 잘 지킨 상태에서 요동과 만주, 연해주 등 한반도 + 고구려나 발해 영토 정도를 점유한 상태로 현대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만의 정체성과 체제를 잘 유지해 오기만 했다면, 그게 베스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됐었다면 동아시아 역사가 굉장히 달라졌겠지요. 일단 청나라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고 세계사적으로도 많은 게 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합니다만,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유사역사학의 유행 또한 그런 아쉬움의 그릇된 표출 현상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려 역사기록은 조선이 대부분 다 지워버리거나 사라지게 방치해놨죠 그래서 조선 역사를 기반으로 배우는 우리 입장에서는 고려 기록이 알려진게 없고 부정적으로 그려져있죠. 조선 정당화를 위해 고려를 내려침. 그냥 조선은 쓰레기 흑역사국가임
고려 왕조 실록이 임진왜란까지는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선조가 피난 가면서.. 백성들에 의해 불타버린게.. 문제이지.. 조선 선조까지는 왕조 실록 자체가 보관되어 있었어요.
뭐 왕조 실록이 있었는데.. 거란 여진 몽골과는 상관 없습니다.
대규모 병력을 운용해본 경험이 적은 게 결국 탈이 난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려가 수성에 강했고, 그래서 일단 점유 후에 성을 세워 수성한다는 전략으로 간 것 같은데 성들이 종심으로 방어되는 게 아니고 그냥 전면에서 두들겨 맞고, 보급도 어려워지니 어쩔 수 없이 야전으로 전쟁이 진행된 게 아닐까 하는데 여진은 기병에 보병까지 합친 전술도 운용할 줄 아는 민족이다보니 당한게 아닌가 싶네요. 영상처럼 그 피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니 결국 포기하게 되는 방향으로 가고
고려 회전 많이했는데 ㅋ 수성은 대몽항쟁이후부터 병자호란까지 나타난 현상이지 대여진전쟁까지 고려군의 군사력은 존나강했음. 수틀리면 싸우는 나라였는데 좀 검색해보시고 글쓰시길
@@단군자손 회전을 많이 한다고 강한게 아니죠. 당장 귀주대첩 때말곤 승리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수틀리면 싸우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당하니까 싸운건 다른측면이라고 봐야합니다. 거란전쟁시기때도 수성하면서 돌아가는 거란의 뒤를 치거나 게릴라전으로 싸워서 타격을 준것이지 회전에서 다 이긴게 아닙니다. 요즘 올라오는 영상들만 보셔도 고려가 평야에서 거란이랑 싸우다 피해가 상당했다고 하는 영상들도 많은데 무슨 수틀리면 싸웁니까 그리고 통주성 전투때 30만도 방심이든 어쩃든 쓸려나갔는데 그런건 다 빼고 회전많이 했다고 강한거면 이후 여진이랑 싸우면서 갈라수 전투에서의 피해를 결국 못이겨내고 북벌도 포기한 건 님말대로 수틀리면 싸우는 나라의 모습입니까?
@@라이덴샤프트리히 진정하시고 저랑 생각 다르신거 이해하니까 싫으시면 걍 갈길 가세요. 관점에 틀리던 팩트가 틀리던 그냥 님이 믿고싶으신데로 믿고 쭉 가시면 됩니다.
@@단군자손 애초에 님께서 갈길 가시면 된 게 아닙니까? 위에 저렇게 쓰셔놓고 갈길 가세요?? 뭐죠? 님이 믿고싶은대로 믿으시면 굳이 답글쓰실 필요가 있으신가요? 이게 요즘 말하는 쿨 한척한다는 건가요?
정말 이 당시의 여진정벌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의 4군6진이 정말정말 대단하다는걸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네요..
그땐 여진 세력이 무지하게 약해졌을 시기임
이성계가 이미 힘든일은 다 해줬는데요 뭐
갈라수.벽등수는 현재 흑뇽강성 영안
경박호입니다
그건 대명일통지에 정확히 나옵니다
이래서 여진에게 땅을 내어 주는 거군요. 역사시간에는 너무 짧게 나오고 갈라수 전투 패배는 나오지도 않아요.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드라마도 한번 밖에 안 나오고 역사에 우리나라 만큼 크게 서술을 안 하는 것과 마찬가지겠네요.
그리고 일본 역시 침략자였듯이 우리가 침략자인면도있기도함
동북9성 개척은 애초에 시작부터 지리를 제대로 알지못했다는 점에서 패배가 예정되어 있었음..
그걸 세종이 반면교사 삼아서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4군6진 개척에 성공했다는게 다행일정도
이성계의 거점이 함경도~만주지역이었으니 지리를 잘 알고 있었지만
함경도가 발해 멸망후에 우리 민족이랑 인연이 끊겼다는걸 보면 지형을 몰랐다는게 이해가 안가는건아님
엄청 아쉽기는함
역사의 분기점이 된 참 안타까운 전쟁이었네요. 고구려시대는 삼국 통일이전이었고 우리의 역사는 세계사로 볼때 군사적인 성과보다 문화적인 성과를 보아야 할듯 합니다.
저때 전투도이기고 사묘아리도죽였으면 금나라는 없었으려나요
그래도 고려 역량이 대단했구나,,,몇만이나 동원가능했다니,,
동북9성을 통해 연해주지역을 식민지화 시키려했으나
애초에 전략을 잘못세웠다는 가설이 맞는듯함
9성을 종심으로 건설해서 종심방어선만 구축하면 안보가 해결된줄 알았으나
여진이 산길을 통해 측면에서 들이치면서 종심방어선 전략이 무용지물이 되버림
윤관의 동북9성 위치 추정이 제각각 이더라구요
1학설 함흥평야설
2학설 함경남도 일대설 (함흥~길주)
3학설 함경남북도 일대설 (함흥~두만강)
4학설 연길 일대설
5학설 두만강 이북 700리설
이중 어떤게 맞다고 보시는지요?
아직 확실하게 신뢰할 만한 정설은 없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함흥평야설은 신빙성이 굉장히 떨어진다고 보고 있고, 이미 학계에서도 사실상 폐기된 이론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논의 가치는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2~3학설이 많이 얘기되다가 최근에는 5학설을 미는 연구자들도 나오는 상황인데요,
저도 조심스럽게 5학설 쪽에 기울고 있긴 합니다만, 자신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료를 보자면 대략 두만강 인근으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최북단이 두만강 이북 700리였다는 설이 제 생각에 가장 유력해 보이긴 합니다만, 이 또한 조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북방 개척을 하기 위해 당시 떠도는 설 중 가장 먼 곳에 대한 주장을 강조하면서 근거화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조선 초기 세종대에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동북 9성의 위치인 만큼 한참 더 후대인 현재로서는 진실을 확인하기 불가능한 상황이라 아쉬울 따름입니다. 보다 확실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배운 동북 9성은 정말 코딱지 만한 작은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90년대) 마저도 국사선생이 이건 말이 안된다..겨우 요정도 땅으로 수십만 대군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싸울 정도겠냐? 그리고 겨우 그 정도 영토를(함흥평야설) 기반으로 금나라라는 거대 제국을 세웠겠냐? 아마도 두만강 넘어 연해주까지 진출한게 합리적이다 라고 하였죠.
당시 환단고기가 유행했던 시절이라 국뽕 가득한 역사관이 지배하던 시기였으나 그걸 감안해도 함흥평야설은 말도 안되고 지금은 폐기된 학설이고, 방어선이 길어져 전투가 연계가 안되어 퍠배했다는 당시 기록을 보면 두만강 넘어 연해주 범위까지 넘어가야 이게 설명이 됩니다.
국뽕 좀 집어넣으면 시베리아까지 진출했다고 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하면 세계를 지배하는 건 몽골이 아닌 고려제국......
@@Hmentary님말씀이 맞습니다
요사 금사 원사보면 고려국경을 거의전시기 만주요양~선춘령공험진으로 적시하고있습니다
두만강700리설 맞아요
반면에 조선의사대주의자들은 고려를 부정하기위해서 고려사를 편찬해 고려영토를 우리가아는 고려한반도지도로 가뒤버리고 이를 일제관변학자 쓰다소키치등이 날조왜곡하고 이병도등이 아무런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지금우리가 배운거죠
이 역사의 역적들이 고려를 삭제하다시피했습니다
이미 고려국경연구는 많이연구되어있어서 빨리 올바르게 돌려놔야합니다
2~3임... 성 고작 9 +2개인가 3개인가 쌓아서 그 넓은 땅 커버 못합니다. 고려 관서지역(평안북도) 보세요 성이 얼마나 많은지....
@@마라도나-d6b "반면에 조선의사대주의자들은 고려를 부정하기 위해서 고려사를 편찬해 고려영토를 우리가아는 고려한반도지도로 가뒤버리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 버젓이 나와있죠, 고려 동북면은 선춘령 공험진이라고 돌려주어 고려 땅도 아닌데 고려 땅이라고 버젓이 쓴게 조선입니다. 줄이 긴 뭘 줄입니까 늘렸지 ㅎㅎㅎ
정작 공험진 위치도 모르면서 고려사 지리지와 조선시대 편찬된 관찬 지리지에 팩트가 아닌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확인되지 않는 공험진 위치(백두산 북쪽 두만강 700리 등등)를 주석으로 적은 것도 조선입니다.
고려를 한반도에 가두려면 이런 주석을 왜 답니까? ㅉ
그리고 이렇게도 쓰고 있죠 동북면이 고구려 크기를 넘어 섰다고 했고
조선은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이라 보고 명나라가 허락한 공험진 이남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이래도 조선이 줄인 겁니까? 되려 늘린 거지 ㅉ
어떻게 보면 여진족들이 점거했던 땅은 한창 고구려의 옛 영토이기도 했는데 한민족이 거기서 쓸려나간지 수백년이 지나서인지 남남의 땅이 된지 오래라 고려에게 매우 불리했고 그마저도 세계사적으로보면 너무나도 작은 영토인데도 이마저도 정복하지 못한 점에서... 역시 우린 급이 안 맞던 걸까요... 수백배의 적들을 통쾌하게 파괴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팔짱끼고 상대를 노예로 만들던 19세기 서구열강들이 대단했다고 봐야하나...
❤❤❤❤❤
장기전을 할수없다는것이 많이 아쉬움. 이후 여진족의 전성기도찾아옴. 여로모로 보나 빼앗길수밖에 없는 땅이었는가 다시생각해봅니다
드라마에서 제대로 다루어 진적없는 여진정벌 한국사 최대의 원정이었던
이후 여진이 요 와 송을 멸망시킨거 보면 고려가 여진을 선제 공격한게 올바른 판단이었던듯
고려에서 금과 송이 연합을 하려 하자 하지 마라고 말렸는데 결국 송이 바보 같은짓을 해서
정강의 변이 일어 났죠
여진하고 동맹을 맺어 같이 대륙으로 나아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왜 야만인으로 아래로 보고 착취 정복의 대상으로만 봤는지
금송이 연합해서 요나라멸망시키고 송멸망시킴ㅋㅋ 같이대륙가는건 여진만좋은일하는거에요. 그리고 대륙엔 평지가많아 유목민족이 날라다녀요
개인적으로는 한민족 왕조가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봅니다. 한민족이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고구려, 발해, 거란전쟁 이후 고려와 같이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한 축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여진정벌 이후로는 고려가 너무 약해져버렸고, 원나라 성립 이후부터는 그대로 명, 청까지 쭉 중원에 강력한 통일왕조가 유지되어 아무리 왕조가 바뀌고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도 한반도의 국력으로는 중원의 견제에 눌려 기껏해야 4군6진이 한계..
물론 저때 윤관에게 카이사르가 빙의한것처럼 천재적인 전략과 외교로 여진을 복속하여 만주 일부와 한반도를 모두 지배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가정해도 상황은 힘들었을것입니다. 다민족국가이자 유목세계와 농경문화권을 모두 아우르던 고구려, 발해와 달리 고려는 뼛속부터 농경문화 단일민족 국가였습니다. 고려는 문화적, 정치적 차이로 인한 갈등을 고구려보다 훨씬 더 많이 경험했을것이고, 만주를 여기저기 누비며 이러한 갈등을 제압할 기병 자원을 양성하는 것도 발해에 비해 더욱 버거웠을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만주를 통제하고 안정화시키는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만주-한반도 통합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달려올 요나라군까지 맞상대 했어야 했을테니 매우 높은 확률로 발해 시즌2를 찍으며 요나라에게 만주를 뱉어내거나 아예 주권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갈라수 전투에서 10대 시절의 여진족 최강의 장수 사묘아리가 등장으로 고려군이 완패 했습니다 !!! 사묘아리는 육전 해전에서 양쪽 모두에서 전부 승리만 거둔 인류역사상 최초의 장군입니다! 다만 이관진의 길주성에서 성을 함락 못시킨건만 빼면요
사묘아리는 지략 무력 모두 갖춘 리처드1세랑 항우 느낌이라 척준경 있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거 같은데요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있던 시대인데도 졌다니 ..
척준경은 무력만 강했지만 사묘아리는 전술도 능했음 혼자서 칼춤춘다고 이기는것은 불가능
예종이 암군은 아니지만 전쟁실수는 아쉽죠 지금의 의주도 예종때 얻어낸건데...
사실 예종은 여진 정벌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선왕이었던 숙종의 의지가 강했고, 그 유지를 이어야 한다는 중신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결국 여진 정벌을 결정하게 됩니다.
만약 숙종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생존해 있을 때 여진 정벌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 보곤 합니다만, 결과는 비슷했을 듯합니다. 고려의 여진 정벌은 비록 고려 측의 실수가 있긴 했습니다만, 고려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대응했고 그렇게까지 잘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지형이 생각보다 너무 불리했고, 여진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더 심했던 데다가 여진의 사묘아리가 지나친 사기 캐릭이었기 때문에 결국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즉 고려가 뭔가 굉장히 잘못했다기 보다는 최선을 다했지만 애초에 기본 역량 자체가 여진 정벌을 완벽히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고,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고 봐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귀주대첩이후 천리장성만믿고 군사를 안키운 반면 여진은 끝없는 전쟁으로 단련되 있었고
급하게 만든 별무반으로 해결될게 어니었죠 점더 신중했으면 좋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천리장성때문에 고려의 북진이 좌절되는 중국의 만리장성같은 결과를 낳았던거 같아요
의주를 예종이 얻은게 아니라 거란이 본진 털리면서 버리고 가서 빈거 주워먹은거.. 사실상 여진이 떠먹여준거
@@안진수-k6v 귀주대첩 이후 천리장성만 믿고 군사를 안키운 것이 아니라 천리장성으로 방어력을 높이고 우선 회복과 안정을 이룬 후에 군사력에 집중했던거라고 봐야 맞는거 같습니다.
여요전쟁 즉 거란과 전쟁 100년후이고 그뒤 100년후 조선이 세워집니다
사묘아리...; ㄷㄷ 금나라 명장아닌가? 이 전투가 10대 시절 전초전이었구나.
크~ 사묘아리!
대~ 고려 만세! 만세! 만만세!
사묘아리의 요송과의 전투를 보건데 포기한게 아쉽지만 좀 더 최악을 피한 선택인것 같습니다.
그당시 인구가 지금의 10분의 1정도 일텐데 수만명이나돼는 군대를 양성 보유 유지 전쟁투입이 가능이나 했을지가 의문입니다. 무장기병 한명을 양성하는데도 엄청난 돈이 들었을텐데 대부분의 국가가 농업국가인걸보면 추측으로 실제군대는 공격측 8000~10000명, 수비병력 3000~5000명이 아니었을지 현실성있는 추측을 해봐요.
고려 여진 전쟁은 고려 입장에서 단순히 침입해 온 적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자리 잡고 있는 적을 몰아내고 그곳을 자기 영토로 삼는 점령전입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 뿐만 아니라 바로 영토로 만드는 작업까지 같이 해야 하는데 그 넓은 땅을 점령 관리하려면 최소 5만에서 10만명의 군대는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보다 훨씬 협소하고 기존의 북쪽 거점까지 있었던 상태에서 상대도 약했던 지역이었던 4군을 점령하는데 동원된 병력이 3만명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25000정도의 병력으로 함경도 진출했다가 현지 수성이 되지 못해서 호되게 혼났던 것 생각하면 여진족이 한참 강력해지고 있던 시절에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고려의 확실한 영토로 삼아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임무는 2만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조선의 세율이 20%대 였지만 고려는 50~60%세율로 군대를 양성한것이 어서 그정도는 충분히 가능 했습니다
고려는 부유한 나라였음 호족들이 돈 잘버는것도있었고
최수종을 보냈어야지😂
사묘아리는 진짜 사기캐다... 척준경도 개인 무력은 모르겠지만 지휘관으로 전쟁에서 맞 붙었으면 개털렸을듯... 아무튼 갈라수 천투는 진짜 고려 최악의 뼈아픈 패배...
하필 고려의 전성시기에 금나라 최고의 장수를 전장에서 만나서 ......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훨씬 따뜻한 경주의 신라왕조는 지금의 함경도를 점령하고도 그냥 버렸지만, 나름 추운 땅 개경에서 시작한 고려는 어떤 이유에선지 함경도를 차지해보려한 듯한데, 이 경향은 조선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현대에 와서야 아오지 탄광이라던가 뭔가 돈될만한 것이 발견되었을 뿐, 그 당시엔 농사도 잘 안되, 몹시 추워 ... 똥땅이던 그곳이 무슨 매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군대를 몰고 수 만명이나 죽여가면서도 고려-조선에 걸쳐 사람들을 갈아 넣었는지 "그것을 알고싶다." 추측을 해보면, 그곳에서나는 미역, 물개 가죽이 좋았거나... 아뭏튼 그 딴 것 얻자고 수 만명을 투입한다? 요즘같은 인명 중시 시대엔 이해 불가이지만, 당시가 왕조, 신분 사회임을 감안하면 그 딴 것 얻자고 투입하는 것도 자연스러움. 비버가죽 확보한다고 활동하다가 생긴 나라가 캐나다인것 보면, 결코 허황된 이유는 아닐듯.
진흥왕 때 잠깐 차지했을 시절에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뱉어냈고, 통일 이후에는 간신히 나당전쟁 넘기고 보니 이미 발해가 만주와 대동강 이북을 통합하여 신라의 국력으로는 시도해보기 힘들었던게 크죠. 통일신라도 혼자서는 안되니 당나라와 함께 북진을 시도해보았으나 추위와 보급문제로 간만보다가 실패..
신라시절과 달리 고려와 조선의 여진정벌은 만주와 함경도가 부족단위로 분열되어 있을 시기에 진행되어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진것으로 보입니다.
발해 두만강 부근 노주에서 쌀이 재배 되었답니다
7세기에는 신라의 북쪽 경계가 대체로 북한강 유역 정도였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힘에 부쳤는지 황해도 지역에 행정구역 설치 안 하다가 발해가 남쪽을 점점 세력을 뻗어오자 8세기 중반에야 황해도에 행정구역을 설치한 걸로 압니다. 황해도 평안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후 몇 십 년간 버려져 있었던 듯.
@@ruvoluble 평양 호족 검용이 궁예한테 항복항거 봐서는 발해가 평양인근까지 흡수못했을 확률이 커보인다고 하네여 ㅋㅋㅋ다만 발해 후기 발해남경과 서경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 난거 봐선 함경도, 평앙북도 지역은 확실히 발해 영향권에 있는건 확실해 보입니다
ㄹㅇ 완안부의 갈라쇼로 고려가 갈라져버린 전투 ㅋㅋㅋ
고려를 다루는 대부분 영상에서 병력은 15만 + - 에 직업군인으로 설명하거나 그런 인상을 피우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정규군은 최대로 봐도 5만 정도고 나머지는 민간인 징집병으로 생각함 .
이 중에서 국왕 친위대 + 수도방어군 + 경상도 전라도 충정도에 남은 병력을 생각하면
정규군 5만 중에서 북벌에 참여한 병력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4만 정도로 판단함 .
조선은 정규군 1만도 안됌
@@부엉이동생 무슨 정규군이 1만도 안됩니까
조선 초기에는 각 8도에만 1만명이 넘는 정규군이 있었고 1만도 안되는 정규군이 전국에 퍼져 있으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합니까
@@zzang-mathis 돈받고 복무하는 직업군인 말하는거지요 농사짓다가 끌려오는 어중이 떠중이 말고요
@@부엉이동생 조선 시대 기록은 그렇다 커더라로 접근하시면 안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긴 나라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농사 짓다가 끌려오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당연히 훨씬 병력이 크죠
조선 시대 초중기 중앙군인 5위 중에 하나인 중위 갑사(상비 직업군)만 세종시대 8000명에서 성종시대 14800명입니다.
평상시에는 이들이 2000명 정도로 번을 나누어서 근무했습니다
경국대전에 규정하는 중앙군인만 63100명이고 이들이 5번제로 운영되었으니 실제 규정상 병력은 12000명이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정상 조선 중앙군중 상번 병력은 5000에서 6000명을 유지했습니다
지방군도 상비군만 37500을 유지하는 것이 규정이었고, 아무리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 20000명 이상의 병력은 상시로 유지했습니다
@@부엉이동생 거참 조선이라는 나라의 크기와 인구가 얼마인데 정규군이 1만도 안되다니요
5위의 상번 병력만 12000명이 넘는 나라가 조선인데
다른건 좋은 의견이나 동북9성이 남의 땅이라는건 반대의견 고려의 국가존망을 부정하는 의견은 아닌듯
저때 여진 안건드렸으면 금이 성립 안됐을 수도?
ㄴㄴ 이미 금나라 건국한 형제가 여진을 하나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고려파와 아골타가 이끄는 완안부와 격돌했는데 참패를 했고 친고려파 여진은 고려에 넘어오게 됨으로써 완안부 여진과 격돌하게 됩니다. 격돌하고 나서 고려와 여진이 맞붙었는데 깨집니다. 그래서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침략하죠. 결국 지죠
사묘아리의 활약으로 갈라수에서 패배했구나
ㅠㅠ
이때 척준경이가 갈라수 전투때 있었는지 없었는지 말이 많음 .... 만약 있었다면 척준경은 사묘아리한테 패했다고 보면됨 ....
척준경은 개인무력이 무쌍인거지 대군을 이끄는 장군감은 아님
@@싱하-v7vㅇㄱㄹㅇ
왜 우리민족은 통일된국가를 세우질못했을까요?
몽골 여진 거란 고려가 통일된국가였다면...
고려 지도그려놓은거 어휴 ...
글쎄 다른 내용은 몰라도 천리장성의 위치가 넘 황당해서 ㅋㅋㅋ
형 우리 이제 국뽕 빼고 해보자ㅜ식민사관 이거 맞아? 지도 크기 보소ㅜ
진짜 우리선조분들 한테 죄송하다ㅜ
하 진짜 고등학교때 선생님이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ㅜ 너희들어게 이런 역사를 가르켜줘서 미안하다 ㅜ 그래도 해야된다
그래도 갈라수 전투 이후 길주성 5개월간 항쟁은 사묘아리 도 포기 하게 만들정도 였습니다!
여진을 회유정책이 없었던게 아쉽습니다. 고려의 고려인으로 살게하고 벼슬도 내리고 장군으로 공도 세우게 했으면, 고려는 여진과 같이 동생을 했으면 역사는 어땠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당연히 있었고 그게 대여진 기본 정책입니다
그런데 여진족은 하나의 정치 체계를 갖춘 부족이 아닙니다
각 부족이 독립되어 있고 그들과의 관계도 복잡하기 때문에 일관된 정책을 적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여진 부족과 B라는 여진 부족이 사이가 나쁩니다. 그래서 A부족이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하죠
그러면 B부족은 고려와 적대시되거나 아니면 요나라와 편을 먹고 고려에 대항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중국의 제국들이나 우리도 고려 조선 시기에 여진족을 대할 때 그들을 분열책을 써서 니편, 내편 나눠서 이간질하는 정책을 많이 이용했던 것이구요
로마도 그렇게이민족들 관리하다가 결국먹힘.
여진도 고려를 형으로 모시고 싶어 했었을까 ?? 거란국을 캐삭빵 시킨 제갈사묘가 있었는데 . 약처먹었나 ㅄ아 ?
척춘경은 걍 개인 무력이 강한거지 리더로서 능력은 제로임. 먼. 척준경임
중국에서 사묘아리를 이순신 장군만큼 영웅으로 생각하는가?
이걸보면 정말 충격적인게 여진족이 요나라를 정복하고 금나라를 건국하기전, 출하점전투때 이미 완안부도 고려의 침략에 당해서 재기불능에가까운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던데 어떻게 남아있는 패잔병(??)만 가지고 요와 송까지 굴복시킨건지;; 정말 금나라도 미스테리한 엄청난 나라입니다.
거란과 연합해서 갈라먹는것도 생각해보지.
4군 6진이 여진에게 안 빼앗긴 이유는 강을 경계로 땅을 차지해서 여진이 넘어오지 못하게 한 덕인듯
킹덤 아신전에 여진의 강함이 잘나온다
1109/
사묘아리 천하무적 인듯
사묘아리 한세충 척준경
지도만 봐도 동북9성은 먼가 상당히 많이 잘못 된 걸 알 수가 있음.
지형 자체로 점령하기 힘든 지역이기에 제대로 방어를 할 시간도 부족했고
결국 기형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수 밖에 없음. 저 방어선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임진왜란 때 가토군이 어떻게 정문무장군에게 털렸나 보면 잘 알 수 있음.
할려고 했다면 4군 6진 식으로 강을 끼고 수비 병력을 세우고 천천히 점령하는
방식으로 포위하다가 나중에 길을 열어주는 형식으로 잡아 먹었어야 함.
말씀대로 동북 9성 지역은 공격에게는 유리하고, 방어에는 불리한 지형인 것 같습니다. 동북 9성의 위치가 아직 학술적으로 확정되지는 않았기에 확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기되는 여러 학설을 보면 그 어느 학설이 맞든 모두 수비에 불리한 지형으로 보입니다.
고려는 아마 국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속전속결로 목표했던 지역을 점령한 후 서둘러 성을 쌓아서 빠르게 안정적인 점유 상태로 전환하고자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그렇게까지 협조적이지 않은 데다가 여진의 저항 또한 예상보다 훨씬 거셌기에 결국 수렁처럼 빠져드는 소모전이 되어 버렸고, 그러다가 갈라수 전투라는 큰 타격을 받으면서 결국 포기하게 된 듯합니다.
정문무장군이 아니고 정문부장군입니다.
고려(이름만 고구려 후예) vs 여진(진정한 고구려 후예)
어찌보면 윤관은 여진족을 한민족 역사로 편입시킬 마지막 기회를 걷어찬 민족적 역적임
고려사는 기록이 거의 없지. 조선실록은 왜곡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고려사는 기록왜곡이 너무 심해서 믿지 못하지. 조선실록은 집권이후에 발표하게 해서 정확도가 높지.
거란 40만이 몰살되었는데 중국본토를 공격했을까? 상식적으로 40만 몰살되면 그거 수습하는데 10년이상 걸리는데
국가패망으로 직결되는 사안인데 무인따위가 뭔 수로 이기겠냐. 항복했겠지. 애초에 궂이 싸울 이유도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