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글보다 먼저 생겼다. 한자는 청동기 시대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갑골문에서 유래했다는 한자의 기원은 잘 못된 것이다. 한자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가 있다는 것은 고대한자가 인도유럽어군의 조상어인 고대 인도어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발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역사적인 진리를 추론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한자는 고대 중국의 문명의 소산이 아니라 이미 홍산 문명으로 알려진 요하문명 시대로 고대 인더스 문명과 동시대에 산물이라는 것이다. 요하문명에서 중요시 되었던 한자어로 옥이란 글자는 임금 왕이 될 옥동자 옥이란 글자로 왕과 관련된 글자이다. 신석기 시대에 이미 상형문자가 암각화에 나타나고 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말을 글로 바꾸는 작업이 이미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은허 문명보다 훨씬 오래된 고대문명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나무 목이란 상형자는 대부분이 나무를 상형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원래는 태양이 올라오는 모양이며 태양의 근본인 근본 본자와 연관된 상형자이다. 목숨 목이란 한자도 삼라만상의 하나인 나무 목으로 태양에 비유된 아침 해에 비유된 아해 해자로 생명의 탄생을 아침해에 비유하였다. 임금 왕도 하늘 천과 땅 토를 합한 글자로 태양이 하늘과 땅을 주관한다고 생각하여 왕을 태양에 비유하고 태양이 주행하는 갈 왕에도 임금 주도 왕에서 나온 글자이다. 왕성할 왕이나 태양에서 양에도 왕이 들어 있다. 우리말은 원래 한자라는 글에 음을 실었던 시대부터 존재했었다. 한자에 발음을 실었던 시대에 이미 우리말이 있었다. 우리말을 사용했던 고대인이 고대 한자에 음을 실었다는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던 인도의 불경을 한자음만을 사용하여 오늘날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던 것처럼 불경의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글구를 한자의 음으로 음역한 것이다. 중국어는 원래 말이 먼저가 아니라 한자라는 글에 실린 음으로 일상어를 창제 하였다. 한자는 글로 역사를 남기기위한 오늘날 마이크로 필름에 해당되는 상형문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이 사용하던 성조로 동음이의어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였으나 원래 한자에 음을 실었던 말로 중국어보다 더 오래된 일상어였다. 중국어는 에스페란토와 같은 인조어라고 할 수가 있지만 우리말이란 한자를 만들었던 시대에 말은 토착어였다. 예를 들면 우리라는 가두리에서 우리처럼 한 울타리를 말하는 우리이었고 마을 리와 친구 또는 이웃 우의 합성어였다. 우리가 먼저이고 친구 우나 울타리 울 또는 땅이름 울로 한자에 음을 실었던 토착어인 우리말는 자연어 였다는 것이다. 동이족으로 불리웠던 고대 한자어를 창조했던 우리 조상은 자연재해로 중국으로 남하했던 일족과 한반도로 남하했던 일족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중국에서 성씨를 따왔다는 중국 중원사상에 세뇌되었던 성씨도 중국 성씨의 기원과 같은 동시대에 한자가 창조되었을 시대에 이미 갖게 된 성씨라는 것이다. 중국에 한국 성씨에 기원을 둔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뿌리를 억지로 접목하는 사대주의 사상의 발현이다. 고대한자가 만들어진 시대에 이미 성씨를 갖고 있었고 고대 중국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은 한자문명의 근원이었고 고대 한자라는 글이 창제되기 이전에 토착어가 바로 한국어의 기원이라는 말이다.
@@임규인-i4h 맞다고 봅니다. 한단고기에서도 한문은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대문자였고, 현제 제주방언으로 알고있는 제주도 사투리인 아래아 자 역시,,, 고대인의 문자였다는 걸 알게 되는 걸 보면, 오늘 날의 현대인들은 무조건 지금의 경기도 어 즉,,,서울말을 표준어라고 여러지방의 우리 언어를 배척하는 듯한 무지몽매함을 보이고 있는 거라, 국제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낯 부끄러운 거로, 한 예로,,,몇년 전 중국방송으로 세계 국가 중 고대언어를 쓰고있는 나라는 유독 대한민국의 제주도라고 방송 한 것을,,, 우리나라 방송국 라디오 진행자가 해설 하는 걸 직접 청취했던 바, 사투리라고 빈정 거리는 자는 무지몰각함을 드러내는 거라는 판단으로, 때로는 당당히 말하고 살아가는 계기가 된 것으로, 우리 것은 우리 자신이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잘난 자존심으로 배척함은 없어야하리라 보는 바입니다.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왜 여기서 싸우셈??? 대깨문씨랑 다른데 가서 싸우셈 근데 대깨문댓글금지란 아이디도 맘에 안들긴 한데 이번 댓글전쟁은 대 신라후예~~ 가 진거임 복잡하게 생각 할 필요 있음??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 계승한 나라이며 고려시대 때 일연의《삼국유사》와 이규보의《동명왕편》에 고구려가 나오며 조선시대 때 유득공의《발해고》를 지필한거 보며 고구려가 우리 역사임을 증명한거잖아 설령 고구려민족이 한족이라도 한반도에서 신라와 얽히고 천년동안 지내면 우리 조상이 되고 우리역사가 되지 문화와 민족은 순수한 것이 없고 얽히고 변해 융화되어 발전 되는것이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처럼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나
역사를 달리 보면 당시는 소수부족국가 시대로 주인없는 광활한 대지가 많이 존재하던 시기죠. 형제를 죽이고 왕권을 잡는 것보다 자신과 생각이 맞는 이를 규합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여러모로 보기에 좋죠. 중공측은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된 자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이 된 자 금수와 대름없는 인물들 투성이죠. 그에 비하며 아름다운 모습 아닌가?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선비족같은 소리 하네. 고구려와 선비족은 서로 싸웠는데 선비족은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고구려한테 대든 선비족 370년에 멸망했다. 참 일찍도 멸망하였지. 그러게 고구려를 왜 건드려가지고 나중에 또 이런식으로 멸망한 나라가 있는데 수나라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애초에 저 시기는 사신 보내면 조공했다고 기록하는 시대다 그 잘나신 광개토도 399~400사이에 후연에게 조공했다 근데 이게 형님형님 조공이 아니고 5만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 군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일종에 외교적 액션이다 근데 당연히 북연도 보통 놈이 아니라 바로 들어간거고 장수왕 시절을 보면 대부분 기록이 조공 조공들로 기록이 있어서 실망하는 사람 많은데 전혀 그럴 필요없다 당시 국제 정세를 잠간 설명하자면 5호16국이 막을 내리고 남쪽에는 송,북쪽에는 북위(북연에서 떨어저나온 나라) 그 위에는 유목국가중 약체로 유명한 유연 그리고 고구려 이렇게 4강체제 시기였다 근데 아직 요서쪽에 북연 세력이 남아있어서 북위는 조질려고 군대를 보냈는데 당시 고구려는 북 위,연 둘다 친한 상태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북연 수도세 2만 병력을 보내 점령한 다음 그곳에서 공방전을 치루다 가면 갈수록 힘들어지자 북연 수도를 초토화 시키고 이민,고위층.전리품 챙기고 돌아간다 그래서 북위는 재떠미만 남은 북연 수도를 점령함 이건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취할수 있는 행동이 아님 이건 장수왕이 북위에게 보내는 선전포고식 액션임 본래라면 북위는 바로 갔어야 했겠지만 오히려 그 일 이후로 혼인을 요청함 고구려는 유연.송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져 조심스레 북위를 견제함 왜 저런 대북방 외교를 오래세울동안 했냐면 양면전선을 막기위해 그런거지 고구려가 ㅈ밥이라 그런게 아니다 장수왕이 현명한거지 막상 북위랑 죽기 살고자 싸울 이유도 없음 당시 고구려 내부도 많이 불안정 햇고
@@davekim7777 정신병자 시키 그 동영상 1:19:30을 봐라. 그리고 마지막에 그럼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하는걸 성현식이 말하고 뭐라고 얼버무렸나 봐라. 1. 고구려가 컸으면 언제 어떻게 커졌고, 언제 어떻게 망했나 설명해. 그걸 못하면 역사가 아니라 장난질이지. 2. 성현식도 이야기 못한건데, 그러면 고구려가 중국사냐? 답변해봐. 간단 명료하게
겨울에 좀 춥긴 한데 부여는 오곡이 풍성히 난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부여와 영토가 거의 겹치는 발해도 동모산과 상경 주변 발해구국터에 널찍한 농경지 많고요 그것보다 북쪽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삼강평원은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와 맞먹는 타고난 곡창으로서 현재 중국 정부에서 어마어마한 농업지대로 개발중입니다. 옛날에는 안되었던 벼농사도 품종 개발로 지금은 크게 짓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 벼농사가 이주 조선인들에 의해서 개발된거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영토를 유지해서 삼강 장춘 농안평원 등을 우리가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여가 역사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부여 세력에 스키타이(흉노)가 다수 섞인데다, 일본이 편찬한 역사서의 지리 범위에 벗어났기 때문에 식민사학자들은 일본 편찬 역사서를 정설로 보기 때문임.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인의 역사가 요서,요동,만주,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을 극렬히 부정하는데, 한국인들은 요서,요동,만주,평양 지역에 부족연맹체로 살면서 스키타이(흉노)와 교역을 하면서 살다 이후 몇 천년 뒤에 국가를 건설하고 살다가, 기후변화와 황하문명의 지속된 공격에 몸살을 앓고는 결국엔 일부가 한반도로 대거 이주한 후 원주민 부족을 전부 통일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드세고 잔혹한 신민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교화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을 받아들이며 군자를 최고로 여기며 자칭하였는데, 이때 만주,요동,요서 지역과 사상적으로 분리된 것임. 어쨌든 막상 생각해보니 자기네 뿌리가 만주와 요서,요동지역에 거주하며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고 약탈을 서슴치 않으며 교역을 하다가도 상대가 약해보이면 강도로 돌변하고 짐승을 죽여 피를 만지며 가죽을 얻고 보이스피싱까지 하는 잔혹한 여진과 흉노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창피스러우니까 '우리는 그런 야만적인 놈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며 부정하고 족보세탁을 해버리고 기존 역사서는 그냥 방치를 해버린 것임. 그리고 일제는 방치된 상고사 등 한민족의 요동, 요서, 만주 시절 역사 20만여권을 전부 꺼내서 전부 소각한 후 역사서를 새로 편찬하여 2000년도 안되고 압록강 아래에만 쥐코딱지만하게 존재했던 보잘것 없는 노예사인데 자기네가 구원했다며 분탕쳐서 유포함. 이 결과로 1980년대 초 역사인식이 서해안에서 고려청자 침몰선만 나와도 떠들석 했을 정도로 한국인의 자국 역사인식은 매우 비좁고 짧아 보잘것 없었고, 중아시아풍, 정밀세공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 한국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했을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던 시절임. 당시 학교 선생들조차도 '한국의 조상들이 보잘것 없었지만, 중국과 이 정도 교역은 했다.' 고작 이랬으니. 이런 이유로 유교성리학과 식민사관에 영향을 받은 식민사학자들 입장에서는 중국식, 일본식 역사교육으로 인하여 민족이란 한 곳에서만 머물지 대이동을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유교성리학 원리주의에 따라 여진이나 스키타이같은 오랑캐와 같은 뿌리라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없기에 부여를 도저히 한민족의 역사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임. 지금도 유교성리학을 따르는 국내 유수 문중 어르신들더러 흉노가 실제 조상이라고 말하면 대대로 여기서 살아왔는데 뭔 개소리를 하느냐며 멱살을 틀어잡히게 되듯이.
환인 오녀산성이라고 전시에 외적을 방어하는 산성에 올라가면 이 정도 성을 쌓은 건국초기 고구려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어요. 산성아래로 흐르는 강은 비류일대로 보여요. 오녀산성은 중국이 붙인 이름입니다. 2000년에 저는 이영훈 선생님 모시고 환인지역을 답사했어요. 제가 선생님께 들었던 내용은 "장군묘에서 황금관이 나와서 요령성 박물관이 가져갔는데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서 어디론가 사라졌대요. 선생님은 누군가 빼돌린 걸로 보시더군요." "환인댐에 고구려 초기 고분군들이 수장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환인 평지엔 초기 성터와 고분이 있습니다. 환인에서 구불구불한 산길로 가면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길목에 산성하고분군이라고 피라미드같은 양식의 고구려 고분군이 있습니다. 중국은 길림지역 동모산유적을 부여유적이 아니라 중국 소수민족 유적으로 조작해요. 부여의 황금유물은 우리의 역사입니다.
올라가는 길만 막으면 공격자체가 불가능한 곳인데 뭐하러 성을 쌓나요. 마실 물도 별로 없는 곳인데...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거면 몰라도...저긴 공격도 수비도 제대로 못하는 곳입니다. 목숨걸고 끝까지 싸우다 전부 죽는 곳이면 몰라도, 입구만 막으면 굶어죽기 딱 좋은 곳입니다.
@@renovatio2946 그만큼 미약한 세력이었던 고구려 초기세력의 절박함을 나타내 주는 것이죠. 백제 초기 근거지도 현재 춘궁동 일대 검단산으로 추정되고 신라 월성도 원래 작은 세력의 방어성이었던 곳이 나중에 궁궐이 된것이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산성을 험준하다고 다 쌓을수 있는게 아니고 반드시 농성 인원이 버틸만한 식수가 확보된 곳에 성을 세웠습니다. 오녀산성 정상부엔 둔전을 펼칠만한 넓은 평지와 충분한 식수를 가둔 큰 연못이 있습니다.
이게 좀 옛날꺼긴 하지만 이정도로 모를때였나? ㅋㅋ 정말 고증이 허접 하기짝이 없네.. 고구려 역사서가 없으니.. 결국 신라나 고려는 중국의 사서를 대신해서 역사를 알기 시작 했다.. 특히 신라는 당나라에 유학을 엄청나게 보낼만큼 유학이 시대였다.. 그중에하나가 최치원이었죠.. ㅋ 당나라에서도 신동이라 불릴만큼 대단한 사람었습니다. 그때 간 사람들이.. 부여의 역사를 기록한것을 고구려로 착각을 했고. 그게 조금씩 내려와 동명왕이 되었고.. 그후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엮은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라의 역사서와.. 당나라의 역사를 보면서.. 그대로 부여의 탄생역사를 고구려의 역사로 기록한거죠.. 삼국사기는 대부분 중국사서를 보고 참고한것이고. 그걸 판별하고 고증 해야 했는데. 삼국사기를 만든 사람들은 그러한 전문지식이 없던 사람들 었죠.. 삼국사기의 최대 약점이죠. 또한 신라 역사도 마찬가지죠.. 신라의 시조는 성한왕인데.. 우리는 김알지로 알죠.. 허나 그역사는 기존에 있지도 않았고..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였습니다. 왜냐? 알수 없으니. ㅋㅋ 비석에는 멀쩡히 성한왕이라 쓰여 있는데 말이죠. 광개토왕비에도 추모왕이 있듯이.. ㅋㅋ 역사고증 없이 대충으로 만들다 보면 저렇게 되는것이죠.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는 고구려죠. ㅋㅋ 이미 부여는 없는데. ㅋㅋ 중국은 한나라는 물론 당나라때도.. 고구려를 부여로 기록한 역사가 많습니다.. 그러니 혼동이 되는것이죠..부여조라고 해서 부여로 착각 하면 안되죠. 이당시는 이미 관구검과 고구려가 삼국시대 위나라의 양평성을 두고 싸우고도 한참 지난 후인데.. ㅋㅋ 이렇게 뻔하게 할수 있는 역사고증을 그냥 필터 없이 방송으로 보내다니.. 너무 심한거 아니야. ㅋㅋ 이건 왠만큼 역사 공부한 사람들도 다 아는데.. 이걸 그냥 보내?? 이러니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지. 역사저널 사실 제가 봐도 엉터리가 심한 편이 몇편있죠
우리나라 고대 역사는 너무 기록이 안남겨져 있는게 아쉽네요 ㅠㅠ 동명왕인지 고주몽인지 추모성왕인지 이름도 확실하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구전 설화 같은 이야기들만 남겨져 있는게 너무 안타까워요(삼국유사) 주몽보다(bc58) 50몇년전에 태어난 세계사 인물이 로마의 카이사르(bc100)인데... 로마 공화정 당시 역사 기록은 진짜 자세하게 남겨져 있는거 보면 부럽더라구요.. 우리나라는 외침을 너무 많이 받아서 소실된게 너무 많은듯
주몽 관련 기록은 남아 있음. 단지 한족의 기록이고 지금까지 역사 주류 학계에서 주장한 내용과 전혀 반대 되는 내용이라 인용을 잘 안하는 거임. 한족의 기록도 수용 해서 보게 되면 고구려는 700년이 아니라 900년의 역사를 가진 국가가 되고 시조인 주몽의 활동 시기는 진시황 영정 사후 ~ 전한 2,3대 황제 시기 쯤으로 볼 수 있음.
고대 서요하 지역 농경민들에 대한 유럽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동아시아 문명의 형성과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매우 가치있는 시사를 해주었습니다... 약 1만년전 간빙기가 지나 요하유역의 농경민들은 인간이 농경에 집중할수 있을만큼 기온이 온난해진 시기 초원지대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들이죠... 그들은 수만년을 살아왔던 중국 내륙의 수렵 토착민들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bc 3천년~4천년경 요하인들은 조,기장 농사에서 벼농사로의 농업혁명을 통해 더 많은 인구를 가질수 있었고 더 넓은 농경지를 필요로 했죠... 그래서 그들 농경민들이 이동할수 있었던 곳은 .... 1. 인접한 만주평야 2.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연산산맥을 지나 하북평야, 산동반도, 중원내륙 황하유역의 하남평야지대 3.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 서부의 광활한 평야지대...입니다... 그중 기존 토착민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이 있었던 중국내륙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적으로 토착민들과 동화되었고 일부집단은 자신들끼리 뭉쳐서 살게 되었죠... 산동반도의 동이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와 중원지역의 동이족들도 기존 토착민 화하세력에 밀려 자신들이 살던 발해만 요하유역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로부터 동아시아는 화하와 동이의 세력이 현저히 구분되어지게 되고 언어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예쁜나-v8s 살수가 청천강이라 확언 하는 것도 무식한 소리라는 걸 모르나....... 살수가 진짜 어디 강인지 확언 못하는 게 현실임. 제도권 교육에서 말하는 고대 한국사에서의 강의 현재 위치는 다 그냥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임의대로 정한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지 진짜 해당 시대 해외 자료까지 찾아 보면서 대조한 결과가 아님. 진짜 해외 자료까지 대조해서 찾아 보면 오히려 한반도 내에 있는 강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는 못 갖추었을 가능성이 크죠. 실질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는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이죠. 그런데, 그 강력한 고구려도 말기에 가면 갈수록 호족들의 영향력이 강해집니다. 왕도 시해당할 정도로요ㅇㅅㅇ. 따라서, 부여가 고대 국가의 초기 모습은 갖추었다고 얘기할 수는 있어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는 갖췄다고 할 수 없죠ㅇㅅㅇ
@@김경환-f4k2s 중앙 집권을 갖췄을 가능성이 농후함. 그보다 더 왕실의 지지기반이 약했던 고구려 조차 초대 주몽 성왕 당시부터 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가 시행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음. 거기다 고구려, 전한과 부여가 전쟁을 벌인 기록을 보면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가 아니면 동원이 불가능한 수준의 군대를 파견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음.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나라였습니다. 고조선이 망하고 그 정통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 바로 북부여입니다.북부여는 고구려 이상으로 우리의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반드시 복원하고 연구해야할 소중한 우리의 역사입니다.일본에 의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북부여의 역사를 하루 빨리 복원하고 연구하여 민족의 정체성과 정기를 바로 세워야합니다.우리의 역사에서 통째로 날아가버린 북부여의 700년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TV 안보고 사는게 수십년 역사스페셜조차 안본 사람입니다 컴으로 봤어요 물론 ㅐ역사스페셜은 그 당시 빠르게 봤을겁니다 다만, TV 를 가까이 하지 않았죠 시간맞춰 TV 앞에 대기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언제부터 역저 그날이 뜨는데, 이 방송에서 화면에 2010년 이 뜨면서 유튜브에는 2020.1.22로 방영되는 이유가 이해 안됩니다. 궁금한데 누가 설명 좀 주세요 .
고대 국가들의 초기의 혼란이나 미약한 정통성을 부여라는 이름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각자의 나라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가 지워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제가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칭한 것으로 보아, (가야와 발해도 부여를 언급) 초기를 넘긴 고대 국가들에게도 여전히 부여라는 나라는 중국과 다른 우리 민족의 강한 국가라는 인식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러한 부여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고 말았다. 의도성을 가지고 부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부여와의 연관성을 밝히지 않았던 신라가 부여의 혈통임을 밝힌 고구려와 백제를 당의 힘을 빌려 무너뜨렸다고 남게 되면 신라 통일의 정당성이 흔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여가 활동했던 물리적인 공간도 빼앗기고 계승 의식도 사라지면서 부여는 더 이상 자랑스러운 우리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
고대 서요하 지역 농경민들에 대한 유럽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동아시아 문명의 형성과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매우 가치있는 시사를 해주었습니다... 약 1만년전 간빙기가 지나 요하유역의 농경민들은 인간이 농경에 집중할수 있을만큼 기온이 온난해진 시기 초원지대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들이죠... 그들은 수만년을 살아왔던 중국 내륙의 수렵 토착민들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bc 3천년~4천년경 요하인들은 조,기장 농사에서 벼농사로의 농업혁명을 통해 더 많은 인구를 가질수 있었고 더 넓은 농경지를 필요로 했죠... 그래서 그들 농경민들이 이동할수 있었던 곳은 .... 1. 인접한 만주평야 2.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연산산맥을 지나 하북평야, 산동반도, 중원내륙 황하유역의 하남평야지대 3.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 서부의 광활한 평야지대...입니다... 그중 기존 토착민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이 있었던 중국내륙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적으로 토착민들과 동화되었고 일부집단은 자신들끼리 뭉쳐서 살게 되었죠... 산동반도의 동이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와 중원지역의 동이족들도 기존 토착민 화하세력에 밀려 자신들이 살던 발해만 요하유역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로부터 동아시아는 화하와 동이의 세력이 현저히 구분되어지게 되고 언어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대부여,진조선,진한)을 이어받은 나라였고 동일 지역에 있었으므로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만주의 북부여도 조선이라 본것이다... 발해만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유민들을 모아 쇠퇴해가는 북부여를 대신하여 동명국을 세워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고두막한이 한사군을 몰아내어 얼마못가 한사군은 한나라와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된다... 낙랑 지역에 살던 조선유민들은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최씨의 낙랑국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단군 해우루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갈 것을 요구한다... 고두막한은 자신을 북부여가 멸망시킨 진조선(대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며 무력에 의한 시위와 더불어 단군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해우루가 얼마후에 죽고 동생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고두막한은 동명국을 동명부여, 홀본부여라 칭하고 단군을 계승한다...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미혼으로 임신을 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한반도 남부로 가서 박혁거세를 낳고 혁거세는 사로 6촌의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어린나이에 신라의 왕이 된다... 혁거세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천제 단군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기인한 것이며 박혁거세의 왕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또는 대부족장의 호칭인 가한(거서간)이라고 칭하게 된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고주몽과 재혼한다... 고주몽은 정략결혼으로 아들이 없는 고무서의 홀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며 어렵지 않게 나라를 세우게 되고 자신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홀본부여의 정통성을 버리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세운다 (사생아인 고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리(고죽)국의 가한이었던 고모수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인 고주몽은 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으며 단군조선, 진조선, 대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한 홀본부여는 고무서 단군에서 끊어지게 되고 소서노는 홀본부여의 정통을 잇고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가 살다가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우게 된다... 후에 백제는 홀본부여를 이은 남부여를 칭한다... 백제의 왕들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 기록이 있다... 5호16국 혼란기에 백제는 요서지역을 경략하여 차지하게 되는데 그곳이 자신들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요서지역 패대의 땅은 지금의 난하 서쪽 중국의 수도권지역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두고자 홀본부여를 지우고 북부여를 잇고자 하였다...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홀본부여가 망하게 되자 신라 혁거세의 손자 3대왕 유리는 가한, 차차웅의 칭호를 버리고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을 왕호로 삼는다...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예맥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가 되었으나 홀본부여와 북부여라는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역사적 혼란이 발생한다... 훗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역사에 무지한 인간이므로 이런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부식은 동명성왕 고두막한과 고구려 고주몽을 동일 인물인 것으로 왜곡하였다... 신라는 고조선 유민이 나라를 세우고 천제 단군(밝은임금)의 제후국인 가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임금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시기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원군을 청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속국, 제후국으로 삼고 왜를 물리쳤다... 내물왕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받들어 가한(마립간)의 칭호를 다시 사용한다... 내물왕 이후 신라는 1백년 이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간섭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내부적으로 골품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으로 김씨 왕위세습을 유지한다... 그후 고구려가 왕권분쟁으로 쇠퇴함에 따라 신라는 지증왕에 이르러 마립간 칭호를 버리고 '왕'을 칭한다... ... 이로서 만주와 발해만, 한반도의 동이가 세운 국가와 구성원들은 모두 예맥족이 정통이었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과 북부여, 홀본부여 등 만주, 한반도의 수십개 크고 작은 열국들은 모두 예맥이 지배층이요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후 중국 사료에는 동쪽의 이민족을 모두 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예맥이다 위 내용들은 모두 우리 사료에 근거한 것들이다... 고대역사를 몰라서 신화, 설화만 인용한 삼국사기, 유사보다는 더 신뢰성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의 흉노 김씨왕조는 예맥 부여를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신라는 만주, 한반도의 정통 예맥국가 왕조에 대한 사료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고대사 은폐와 왜곡의 시작점이다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抑 有以也. 사서에 부여왕이 자신을 망명자(亡人)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어디에서 왔는지 추적하는게 상식이다. 추적하기 귀챦으니 원래부터 거기서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사서를 볼 필요가 없다. 檀石槐旣立,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東西部大人皆歸焉。 兵馬甚盛,南鈔漢邊,北拒丁令,東却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삼국지 위서동이전 선비족 선비족 단석괴가 동명부여를 동쪽으로 쫓아냈다. 동명부여의 원거주지는 길림이 아니다. 동명부여가 동쪽으로 쫓겨났다는 기록을 보면... 어디에서 쫓겨났는지 추적하는게 정상이지, 원래부터 거기서 살았다고 우기면 안되는거 아닌가 ?
@@nature5120 삼국사기와 동일한 고구려-부여를 설명한 중국사서는 북위서-수서-북사입니다. 후한 탄생이전에 고구려가 22년 북부여를 병합, 통속 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북위서 에 기록됩니다. 한서-후한서-위지동이전 의 동명부여는 오환과 쌈박질하고 북부여가 멸망하고나니 49년에 후한과 첫 외교관계를 개통하고 요수 서쪽에서 살다가 2세기에 선비족 단석괴(~ 181)에게 동쪽으로 쫓겨나 요수 동쪽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동명부여의 왕은 자신을 망명자라 하지요
고구려 백제는 같은 혈통 같은민족..북방몽골계 혈통 신라는 완전 다른 혈통임..저멀리 아랍과 중앙아시아혈통..외모가 백인에 가까운... 독일 공영방송에서 다큐를 방영했는데 내용이 게르만족과 훈족 관련 내용임..그런데 다큐에서 훈족과 신라를 직접 연결시키며 같은 혈통일 가능성을 언급함....고로 지금 우리는 당시 삼국시대를 언급하며 같음민족끼리 이러지만 당시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은 말도 잘안통하고 외모도 다른 완전 다른 민족이었음
bc425년 단군조선(진조선, 진한)은 내부정변이 일어나 대부여로 국명을 바꿉니다... bc239년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웁니다 bc238년 대부여(진조선)은 멸망합니다 (고조선 47대 마지막 단군 고열가는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합니다)... 북부여가 대부여의 뒤를 잇습니다... bc194년 위만이 발해만의 번조선(번한) 정권을 찬탈합니다... bc108년 위만의 손자 우거의 위만조선은 한무제에게 멸망당합니다...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됩니다 bc108년 한무제의 한사군에 대항하고자 고리국에서 내려온 고두막한이 동명국을 세워 조선유민들을 모아 한나라에 대항하여 싸우고 한사군 4개군중 2개군이 얼마못가 철수합니다... 후에 한사군은 한나라에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됩니다 (한나라 낙랑군은 발해만 진황도시에 위치했고 조선유민이 세운 최리의 낙랑국은 한반도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습니다... 서로 다르며 모두 고구려에 멸망당합니다) bc87년 동명부여,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은 쇠퇴한 북부여를 몰아내게 되고 북부여 해부루는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웁니다... bc57년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한반도 남부로 내려가 아들 박혁거세를 낳고 박혁거세는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사로국, 신라를 건국합니다... bc37년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의 딸 소서노와 재혼한 고주몽은 후계자가 없는 졸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꿉니다...... bc18년 졸본부여를 고주몽에게 빼앗긴 소서노는 비류,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 살았고 훗날 온조는 한반도 마한땅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웁니다 결론 : 동명성왕은 예맥 배달민족 구국의 영웅으로 이민족 한나라 세력에 대항하여 싸운 동명부여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이며 고구려 고주몽은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고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이고 그의 아버지는 북부여 제후국인 고리국의 가한이었던 고무서입니다.... 이 모든 역사의 왜곡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역사에 대한 무지때문이며 동명부여,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을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우리 고대사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Since there was ancient civilization North of North Korea with Stonehenge and waved sword only mostly found in Korea and North region, there as a culture that had religion, language, culture, metallurgy. If that is the indication, the recent discovery of the red mountain including the Godness statue wearing a Bear necklace (Bear is symbolic for women in Korean culture at that time there was Bear nation and Tiger nation and Bird nation(the root of ancient Korea has bird at top of their totem poles) and most likely Bird nation took Bear nation's princess(VIP woman) as Bride) -- that dates back 7000 BC. Fast forward to about 700 AD, After writing was more prevalent, the numerous books scripted by "GongJa"(Confucius) words by his followers from China indicated "GongJa" say he learned everything from 'north' civilization. Thus, most historical documents indicate China's civilization was derived from this civilization. The Chinese books indicate 'north' civilization just 'north civilization' without a name. However, Korean calls in "GoChoSen" which means ancient (go) Cho (bird) sen (nation) of the old Korea. This first civilization of east Asia was so large that its people moved out to both east and westwards. The same or exact same artifacts are being discovered in North Italy to Ireland and Finland, to east all the way to Mexico, and along the traveling route, same or similar artifacts and languages are found. By the way, the next nation was called "Gogyro" which means hook which the ying-yang symbol came from, it means 'order or harmony via governing' set by GoChoSen. And following after GoChosen was the nation name of "Go (old) gyro (hook)' the 'hook' part 'gyro' became 'Korea' in the present day. It's interesting to find "Mississippi" "Michigan", etc and its meanings are the same as Korean! "Mi" - means in Korea is 'freshwater or river'; "chi or ci (si)" - means in Korea 'fish' - sippi and gan - means in Korea 'place (home or house), Again only in old GoChoSen languages. Note that in linguistics, it's very hard to not only match the sound but also the meaning. If I follow the logic, unless there was a large population and civilization with the resource and advancement of culture only can have the means to explore in the motivation of necessity or curiosity. And the people from such civilizations can only expand and overlap o ver further expansions It may be worth studying the "yo-dong" civilization and first nation of Eas Asia (or maybe the human Sapien Sapien) "GochoSen" more in-depth. It can bring together the puzzles of where nations come from and why there was a road before the silk road that was well-traveled with premium horses and carts with carts at least 5000 BC before the silk road.
부여는 동부여 북부여 등 여러 부여가 있는데 최초의 부여는 '고조선'후기에 나라이름을 '부여'로 바꾼것으로 부여 = 고조선 입니다 고조선이 '부여'가 되자 고조선 즉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등으로 '부여'라는 이름을 차용하는거죠. 우리가 고조선의 정통을 잇는다 그런걸 각인시키려고
광개토태왕릉비에 써 잇듯이 고구려의 역사는 700년이 아닌 900년이 되는것이다. 아들인 장수왕이 만든 비에 보면 광개토태왕부터 17세손이라 적혀있는데 왕의 계보를 따져봐도 고주몽까지는 13세밖에 않되고 나머지 4세가 바로 부여.. 정확히 말해 북부여가 된다. 동명왕도 고주몽이 아닌 북부여 마지막 4세왕이였던 고두막한의 별칭이였고, 일제강점시 시절 자신들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조선을 부정하며 고조선을 신화로 만들기 위해 북부여란 나라를 잘라내서 우리가 북부여에 대해 모르는거고. 암튼 우리 역사를 난도질한 일본놈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를 아직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네...
공영방송의 품격이 느껴지는 대장정의 역사스페셜. 사랑합니다. KBS.❤
역시 역사스페셜에는 한상권 아나운서님이
최곱니다!!
이 때는 공영방송에서 이렇게 알찬 다큐를 쏟아냈는데...
저게 역사저널 그날로 바뀐거 아닌가요요
@@이름성-x7i 역저그날도 없는거보단 낫지만 퀄리티가 다름
@@dakzang 그렇긴하죠 약간 역사저널 그날은 예능적인 모습도 쫌 들어가있는거같기도하고요ㅎ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그냥 있잖아... 어디 높은데서 뛰어내리라...반박할 가치가 없다. 진짜 왜 사냐? 이렇게 글 싸지르고 실룩실룩 쪼개고있것지? 한심한 종자야
Max 지금 방송기능상실한지 오래됏음
개쩐다..... 대박. 이런 탐구가 왜 더 알려지지 않는걸까?
부여 유적지를 문서로만 보던걸 영상으로보니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네요.
동명왕과 주몽에 대한 궁금증을 사이다로 풀어주시네요 정말 유익합니다
역사스페셜 다시 보고 싶다. KBS는 역사스페셜 다시 제작하라ㅠ
그러게요 요즘은 주둥아리만 나불거리고... 현장가서 찾아보고 이런 기록이 실제 있습니다 라고 보여주는게 없어요
고구려,부여,고조선의 뿌니찾기를,
친일매국집단 강단사학계가 집요하게 방해하고 있어요.
내용이 알차고 너무 재밌네요.. 부여는 한민족 역사에서 고조선 만큼이나 중요한 국가인데...국사 시간에 대충 배우는것 같네요 좋은 프로그램 감사합니다... 수신료의 가치가 느껴지네요..
말이 글보다 먼저 생겼다. 한자는 청동기 시대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갑골문에서 유래했다는 한자의 기원은 잘 못된 것이다. 한자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가 있다는 것은 고대한자가 인도유럽어군의 조상어인 고대 인도어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발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역사적인 진리를 추론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한자는 고대 중국의 문명의 소산이 아니라 이미 홍산 문명으로 알려진 요하문명 시대로 고대 인더스 문명과 동시대에 산물이라는 것이다. 요하문명에서 중요시 되었던 한자어로 옥이란 글자는 임금 왕이 될 옥동자 옥이란 글자로 왕과 관련된 글자이다. 신석기 시대에 이미 상형문자가 암각화에 나타나고 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말을 글로 바꾸는 작업이 이미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은허 문명보다 훨씬 오래된 고대문명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나무 목이란 상형자는 대부분이 나무를 상형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원래는 태양이 올라오는 모양이며 태양의 근본인 근본 본자와 연관된 상형자이다. 목숨 목이란 한자도 삼라만상의 하나인 나무 목으로 태양에 비유된 아침 해에 비유된 아해 해자로 생명의 탄생을 아침해에 비유하였다. 임금 왕도 하늘 천과 땅 토를 합한 글자로 태양이 하늘과 땅을 주관한다고 생각하여 왕을 태양에 비유하고 태양이 주행하는 갈 왕에도 임금 주도 왕에서 나온 글자이다. 왕성할 왕이나 태양에서 양에도 왕이 들어 있다. 우리말은 원래 한자라는 글에 음을 실었던 시대부터 존재했었다. 한자에 발음을 실었던 시대에 이미 우리말이 있었다. 우리말을 사용했던 고대인이 고대 한자에 음을 실었다는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던 인도의 불경을 한자음만을 사용하여 오늘날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던 것처럼 불경의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글구를 한자의 음으로 음역한 것이다. 중국어는 원래 말이 먼저가 아니라 한자라는 글에 실린 음으로 일상어를 창제 하였다. 한자는 글로 역사를 남기기위한 오늘날 마이크로 필름에 해당되는 상형문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이 사용하던 성조로 동음이의어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였으나 원래 한자에 음을 실었던 말로 중국어보다 더 오래된 일상어였다. 중국어는 에스페란토와 같은 인조어라고 할 수가 있지만 우리말이란 한자를 만들었던 시대에 말은 토착어였다. 예를 들면 우리라는 가두리에서 우리처럼 한 울타리를 말하는 우리이었고 마을 리와 친구 또는 이웃 우의 합성어였다. 우리가 먼저이고 친구 우나 울타리 울 또는 땅이름 울로 한자에 음을 실었던 토착어인 우리말는 자연어 였다는 것이다.
동이족으로 불리웠던 고대 한자어를 창조했던 우리 조상은 자연재해로 중국으로 남하했던 일족과 한반도로 남하했던 일족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중국에서 성씨를 따왔다는 중국 중원사상에 세뇌되었던 성씨도 중국 성씨의 기원과 같은 동시대에 한자가 창조되었을 시대에 이미 갖게 된 성씨라는 것이다. 중국에 한국 성씨에 기원을 둔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뿌리를 억지로 접목하는 사대주의 사상의 발현이다. 고대한자가 만들어진 시대에 이미 성씨를 갖고 있었고 고대 중국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은 한자문명의 근원이었고 고대 한자라는 글이 창제되기 이전에 토착어가 바로 한국어의 기원이라는 말이다.
@@임규인-i4h 맞다고 봅니다. 한단고기에서도 한문은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대문자였고, 현제 제주방언으로 알고있는 제주도 사투리인 아래아 자 역시,,, 고대인의 문자였다는 걸 알게 되는 걸 보면, 오늘 날의 현대인들은 무조건 지금의 경기도 어 즉,,,서울말을 표준어라고 여러지방의 우리 언어를 배척하는 듯한 무지몽매함을 보이고 있는 거라, 국제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낯 부끄러운 거로, 한 예로,,,몇년 전 중국방송으로 세계 국가 중 고대언어를 쓰고있는 나라는 유독 대한민국의 제주도라고 방송 한 것을,,, 우리나라 방송국 라디오 진행자가 해설 하는 걸 직접 청취했던 바, 사투리라고 빈정 거리는 자는 무지몰각함을 드러내는 거라는 판단으로, 때로는 당당히 말하고 살아가는 계기가 된 것으로, 우리 것은 우리 자신이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잘난 자존심으로 배척함은 없어야하리라 보는 바입니다.
@@임규인-i4h 억지주장.
@@임규인-i4h 환빠
@@박용훈-j8m 환빠2
역사를 제대로 다시 배웁니다~
끝까지 추적하는것이. 자랑스럽다
역사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고대역사 특히 상고사를 공영방송에서 많이 다루었으면 좋겠다
역사스페셜보면서 영화 시나리오 구상하기도 하고 참 즐겨보는 프로입니다~^^ 역사스페셜 다시 나오길!!
영화제작 하세요?
지금 역사 스페셜 없어졌나요?
유인촌 MC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가셨기 때문에 불가합니다
@@shiahlee3083 ㄱㅂ7777****
전부 왜곡된 역사를 봐서 머합니까? 일본놈들에 역사를~...
역사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살펴서 사실대로 지금이라도 바로 잡는것이 참된 일이다.
고대사는 그당시의 눈으로 바라볼수 있는 관점이 필요합니다.지금의 민족 국가체계로 보면 전혀 이해가 안될수가 있습니다. 작금의 우리가 왜 역사가 필요한가를 잘알수있는 다큐네요.좋습니다.
부여 백마강 낙화암 갔다가 백제 역사에 대해서 알고싶어서 보게되네요😊 좋은 방송이네요 감사합니다^^ㅎ 역사스페셜 다시 부활해서 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내용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우리는 부여, 고구려의 후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Korea 가 부여로부터 온거지요
훌륭한 프로그램 입니다
이런 알찬내용의 다큐 감사합니다.
소리가크고 정확히들려좋음
진짜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차라리 역사저널 그날 폐지하고 차라리 역사스페셜 다시 방송 했으면 좋겠음... 2022 역사스페셜 괜찮은데 ㅋㅋㅋㅋㅋㅋ
이영재 역사저널 시즌1 때까지는 그나마 볼만했는데 시즌2때 부타는 진짜 뭔가 삐딱한 듯해요!! 이상한 영화 관계자를 부른 것부터 시작해서!!
동감
100% 동감합니다.
걍 니생각으로 남길 바래
@@섬나라에게대륙국가의 ㅉㅉ 치킨교를 모독하는 자
역사는 배우면 배울 수록 조상님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왜 여기서 싸우셈???
대깨문씨랑 다른데 가서 싸우셈
근데 대깨문댓글금지란 아이디도 맘에 안들긴 한데 이번 댓글전쟁은 대 신라후예~~ 가 진거임 복잡하게 생각 할 필요 있음??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 계승한 나라이며 고려시대 때 일연의《삼국유사》와 이규보의《동명왕편》에 고구려가 나오며 조선시대 때 유득공의《발해고》를 지필한거 보며 고구려가 우리 역사임을 증명한거잖아
설령 고구려민족이 한족이라도 한반도에서 신라와 얽히고 천년동안 지내면 우리 조상이 되고 우리역사가 되지 문화와 민족은 순수한 것이 없고 얽히고 변해 융화되어 발전 되는것이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처럼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나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그때 한은 옛 삼한땅에 살던 사람이고.
정말 좋은 자료ㅠ감사합니다 너무 재밌고ㅠ공부도 되네요
동명왕을 고구려 주몽이라고 배웠는데 이 영상으로 본래 인물을 알게됩니다. 한국사의 연구는 아직도 끝이 없는 영역네요. 너무 재밌습니다. 부여에대해 더 알고 싶어지네요.
주몽이 아니고 추모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어요. 주몽은 흉노와 같은 이민족을 비하하기위한 음역
동명왕은 고두막한 본명이죠 신라의 박혁거세 장인이기도 하고 알영부인이 고두막한의 딸 주몽은 추모성왕이라 불리죠
@@itzy6307 같은 말을 다르게 표기한 것일뿐 나사렛 이나 나자렛 이나 뭐 그런거임
좋은 프로 감사드립니다
부여에서 이복형제들과 다툼으로 도망쳐 나라를 세워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 두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운명인지 아버지처럼 나라를 세워 백제의 시조가 됨.
참 이게 어느 나라 역사를 봐도 이런 사례가 있었나
희한한 집안이여
⚔글츄 내도 글케알고 있어요.
역사를 달리 보면
당시는 소수부족국가 시대로
주인없는 광활한 대지가 많이 존재하던
시기죠.
형제를 죽이고 왕권을 잡는 것보다
자신과 생각이 맞는 이를 규합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여러모로 보기에 좋죠.
중공측은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된 자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이 된 자
금수와 대름없는 인물들 투성이죠.
그에 비하며 아름다운 모습 아닌가?
@대깨문댓글금지 매금대왕 저 사람 다른곳에서 봤는데 유투브 역사영상 올라온곳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헛소리 환빠소리 해대고 있습니다. 그냥 무시하세요 ㅋ
탈주 닌자 집안임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백제는 중국사라고?
제'라는 나라는 산동에 있었고, 나중에 남쪽에 남제가 있었다.
백제는 온제(伯濟) 제나라들의 우두머리 국가란 이름이다. 중국남조와 산동성이 백제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뮨화,풍습,언어등이 비슷한 것이 당연하다.
만주지방은 진짜 보기만해도 날씨가 광장히 추워보이는데 제작하느라 고생 많으셨을꺼 같네요!!
700년이라.
가슴이 웅장해진다.
정확히는 천년입니다. 백제도 부여의 분국중하나였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꿀만큼 부여적통국이었죠. 백제의 멸망은 곧 부여의 멸망이었습니다.
@@gomanaru222
맞습니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인지알게하는 유용한 프로그램입니다
요즘아이들이좀 봤으면 합니다
이런 프로그램 보면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 할때 참고좀 했는데ㅋㅋ
역사를 배운다 라는 말은 정말 멀고도 어려운 길이다.
과거 기록을 보고 배운다 한들 과거 역사의 몇%나 될까? 흘흘.
어떤 놈이든 역사를 안다 라는 말은 해선 안 된다.
역사를 어느정도 짐작한다 라는 말도 역사학자들이나 해도 되는 말.
아~ 그리운 우리 역사 보고싶다.저 때 분들
지금 현세 사람들이 윤회를 거듭하여 고구려백제고려조선을 거듭하여 이땅에 다 있습니다. 오백년전 천년전 오천년전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져 이생에 온것이 아니지요 .윤회를 거듭하여 이생에 온 것입니다. 지천명 .각자 소임하는 일이 다 있지요
상고사 넘 좋아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고구려란 무엇인가
정말 확끈한 민족
지금 우리나라엔 고구려정신이 필요하다.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선비족같은 소리 하네. 고구려와 선비족은 서로 싸웠는데
선비족은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고구려한테 대든 선비족 370년에 멸망했다. 참 일찍도 멸망하였지. 그러게 고구려를 왜 건드려가지고
나중에 또 이런식으로 멸망한 나라가 있는데 수나라
매금대왕 댓글달시간 있으면 다른데다 투자해라 댓글보면 입에 개거품물고 덤벼드네 ㅋㅋㅋ 안끼는 데가 없어 ㅋㅋ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애초에 저 시기는 사신 보내면 조공했다고 기록하는 시대다 그 잘나신 광개토도 399~400사이에 후연에게 조공했다 근데 이게 형님형님 조공이 아니고 5만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 군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일종에 외교적 액션이다 근데 당연히 북연도 보통 놈이 아니라 바로 들어간거고
장수왕 시절을 보면 대부분 기록이 조공 조공들로 기록이 있어서 실망하는 사람 많은데 전혀 그럴 필요없다 당시 국제 정세를 잠간 설명하자면 5호16국이 막을
내리고 남쪽에는 송,북쪽에는 북위(북연에서 떨어저나온 나라) 그 위에는 유목국가중 약체로 유명한 유연 그리고 고구려 이렇게 4강체제 시기였다 근데
아직 요서쪽에 북연 세력이 남아있어서 북위는 조질려고 군대를 보냈는데 당시 고구려는 북 위,연 둘다 친한 상태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북연 수도세 2만 병력을 보내 점령한 다음 그곳에서 공방전을 치루다 가면 갈수록 힘들어지자 북연 수도를 초토화 시키고 이민,고위층.전리품 챙기고 돌아간다 그래서 북위는 재떠미만 남은 북연 수도를 점령함 이건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취할수 있는 행동이 아님 이건 장수왕이 북위에게 보내는 선전포고식 액션임 본래라면 북위는 바로 갔어야 했겠지만 오히려 그 일 이후로 혼인을 요청함 고구려는 유연.송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져 조심스레 북위를 견제함
왜 저런 대북방 외교를 오래세울동안 했냐면 양면전선을 막기위해 그런거지 고구려가 ㅈ밥이라 그런게 아니다 장수왕이 현명한거지 막상 북위랑 죽기 살고자 싸울 이유도 없음 당시 고구려 내부도 많이 불안정 햇고
@@류성룡-p2k 무슨북위가 북연에서 떨어져나가요 후연을실질적으로멸망시킨나라는 북위이고 모용선비족이세운후연멸망후생긴나라가 고구려계의고운이세운나라가 북연인데 그북연을 풍홍때 장수왕이 멸망시키고 그때까지북위는 강대했는데
알고리즘?? 뭔지 모르겠지만 자주 마주하다가 이제는 그냥 구~독~ 좋~아요~ ㅋㅋㅋ
응원합니다👏👏👏
옛날엔 이런거 지루했는데
슬금슬금 재밌네
나이를 슬금슬금 먹고 있다는 증거죠ㅋ
18:30 기원전후 철제 무기
36:00 백금보 유적 bc 15 -3
48:30 정약용 아방강역고
도장깨기 부지런하네. 01:15:00~01:19:15 ruclips.net/video/_RECSznh4xk/видео.html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제발 좀 정신차려라
도장 아우님 올만여! 요즘은 뜸 하시네. 설날 명절 잘보내시고 건강, 행운 듬뿍 차고 넘치길!😀👍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ㅋㅋㅋ 고구려가 중국사면 연호를 쓴건 뭐냐? ㅋㅋㅋ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사면
일본이 한국사지. 좀 일관되게 살거라. 패배주의 넘아 ㅋㅋㅋ
@@davekim7777 정신병자 시키 그 동영상 1:19:30을 봐라. 그리고 마지막에 그럼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하는걸 성현식이 말하고 뭐라고 얼버무렸나 봐라.
1. 고구려가 컸으면 언제 어떻게 커졌고, 언제 어떻게 망했나 설명해. 그걸 못하면 역사가 아니라 장난질이지.
2. 성현식도 이야기 못한건데, 그러면 고구려가 중국사냐? 답변해봐. 간단 명료하게
고대 우리나라의 뿌리 부여의
역사 , 우리가 찾아와야 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말이 쉽지..
재밌게 봤습니다. 저런 척박한 땅에서 부강한 국가가 탄생한다니 신기하네요.
남만주 압록강 두만강 인근은 척박하니 않아요. 숲이 우겨지고 물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농사로 따지자면 않좋은지역이지만.
그 당시는 지금보다 기온이 높았다고 하는 말 들었습니다.
이수용 근대시대에 비교하면 더 따뜻했지만 (1600-1800 년대는 소빙하기), 현대에 와서는 온난화때문에 오히려 지금이 더 덥슴니다. 제 입장에선 남한이 더워서 사람살곧 못되던대요.
겨울에 좀 춥긴 한데 부여는 오곡이 풍성히 난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부여와 영토가 거의 겹치는 발해도 동모산과 상경 주변 발해구국터에 널찍한 농경지 많고요 그것보다 북쪽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삼강평원은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와 맞먹는 타고난 곡창으로서 현재 중국 정부에서 어마어마한 농업지대로 개발중입니다. 옛날에는 안되었던 벼농사도 품종 개발로 지금은 크게 짓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 벼농사가 이주 조선인들에 의해서 개발된거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영토를 유지해서 삼강 장춘 농안평원 등을 우리가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미제드론
그렇지요
엄지인 아나 미모가 빛나네욬ㅋㅋ
20대의 엄지인은 귀엽네요 ㅎㅎ
네 ㅎㅎ 이쁘고 귀엽네요~^^
부여가 역사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부여 세력에 스키타이(흉노)가 다수 섞인데다, 일본이 편찬한 역사서의 지리 범위에 벗어났기 때문에 식민사학자들은 일본 편찬 역사서를 정설로 보기 때문임.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인의 역사가 요서,요동,만주,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을 극렬히 부정하는데, 한국인들은 요서,요동,만주,평양 지역에 부족연맹체로 살면서 스키타이(흉노)와 교역을 하면서 살다 이후 몇 천년 뒤에 국가를 건설하고 살다가, 기후변화와 황하문명의 지속된 공격에 몸살을 앓고는 결국엔 일부가 한반도로 대거 이주한 후 원주민 부족을 전부 통일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드세고 잔혹한 신민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교화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을 받아들이며 군자를 최고로 여기며 자칭하였는데, 이때 만주,요동,요서 지역과 사상적으로 분리된 것임. 어쨌든 막상 생각해보니 자기네 뿌리가 만주와 요서,요동지역에 거주하며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고 약탈을 서슴치 않으며 교역을 하다가도 상대가 약해보이면 강도로 돌변하고 짐승을 죽여 피를 만지며 가죽을 얻고 보이스피싱까지 하는 잔혹한 여진과 흉노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창피스러우니까 '우리는 그런 야만적인 놈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며 부정하고 족보세탁을 해버리고 기존 역사서는 그냥 방치를 해버린 것임. 그리고 일제는 방치된 상고사 등 한민족의 요동, 요서, 만주 시절 역사 20만여권을 전부 꺼내서 전부 소각한 후 역사서를 새로 편찬하여 2000년도 안되고 압록강 아래에만 쥐코딱지만하게 존재했던 보잘것 없는 노예사인데 자기네가 구원했다며 분탕쳐서 유포함. 이 결과로 1980년대 초 역사인식이 서해안에서 고려청자 침몰선만 나와도 떠들석 했을 정도로 한국인의 자국 역사인식은 매우 비좁고 짧아 보잘것 없었고, 중아시아풍, 정밀세공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 한국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했을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던 시절임. 당시 학교 선생들조차도 '한국의 조상들이 보잘것 없었지만, 중국과 이 정도 교역은 했다.' 고작 이랬으니. 이런 이유로 유교성리학과 식민사관에 영향을 받은 식민사학자들 입장에서는 중국식, 일본식 역사교육으로 인하여 민족이란 한 곳에서만 머물지 대이동을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유교성리학 원리주의에 따라 여진이나 스키타이같은 오랑캐와 같은 뿌리라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없기에 부여를 도저히 한민족의 역사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임. 지금도 유교성리학을 따르는 국내 유수 문중 어르신들더러 흉노가 실제 조상이라고 말하면 대대로 여기서 살아왔는데 뭔 개소리를 하느냐며 멱살을 틀어잡히게 되듯이.
부여
고구려ㅡ동명왕
백제ㅡ남부여
근원이 같다.
뿌리를 찾아야 한다.
맷돌은 부여에도 있었네?
맷돌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 공부는 우리의 근본을 아는 길이다.
공영방송에서 역사에대한 방송을 좀 많이해주었으면
후손들에게도 좋을텐데~
잘못된 몽골 세뇌교육서 벗어나야 !
진짜 역사스페셜, 대하드라마 부활 좀 해주세요. KBS 뭐하나요? 진짜ㅠㅠ
사람들이 생각보다 잘 안 봐요. 대하드라마도 연애사극, 게이사극아니면 인기가 없고요.
환인 오녀산성이라고 전시에 외적을 방어하는 산성에 올라가면 이 정도 성을 쌓은 건국초기 고구려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어요. 산성아래로 흐르는 강은 비류일대로 보여요. 오녀산성은 중국이 붙인 이름입니다. 2000년에 저는 이영훈 선생님 모시고 환인지역을 답사했어요. 제가 선생님께 들었던 내용은 "장군묘에서 황금관이 나와서 요령성 박물관이 가져갔는데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서 어디론가 사라졌대요. 선생님은 누군가 빼돌린 걸로 보시더군요." "환인댐에 고구려 초기 고분군들이 수장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환인 평지엔 초기 성터와 고분이 있습니다. 환인에서 구불구불한 산길로 가면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길목에 산성하고분군이라고 피라미드같은 양식의 고구려 고분군이 있습니다. 중국은 길림지역 동모산유적을 부여유적이 아니라 중국 소수민족 유적으로 조작해요. 부여의 황금유물은 우리의 역사입니다.
이영훈 선생님이라는분 식민사관파 아니신가요?
올라가는 길만 막으면 공격자체가 불가능한 곳인데 뭐하러 성을 쌓나요. 마실 물도 별로 없는 곳인데...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거면 몰라도...저긴 공격도 수비도 제대로 못하는 곳입니다. 목숨걸고 끝까지 싸우다 전부 죽는 곳이면 몰라도, 입구만 막으면 굶어죽기 딱 좋은 곳입니다.
@@renovatio2946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 수도라는 것도 사실 확언이 불가능함.......
@@renovatio2946 그만큼 미약한 세력이었던 고구려 초기세력의 절박함을 나타내 주는 것이죠. 백제 초기 근거지도 현재 춘궁동 일대 검단산으로 추정되고 신라 월성도 원래 작은 세력의 방어성이었던 곳이 나중에 궁궐이 된것이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산성을 험준하다고 다 쌓을수 있는게 아니고 반드시 농성 인원이 버틸만한 식수가 확보된 곳에 성을 세웠습니다. 오녀산성 정상부엔 둔전을 펼칠만한 넓은 평지와 충분한 식수를 가둔 큰 연못이 있습니다.
이게 좀 옛날꺼긴 하지만 이정도로 모를때였나? ㅋㅋ 정말 고증이 허접 하기짝이 없네..
고구려 역사서가 없으니.. 결국 신라나 고려는 중국의 사서를 대신해서 역사를 알기 시작 했다.. 특히 신라는 당나라에 유학을 엄청나게 보낼만큼
유학이 시대였다.. 그중에하나가 최치원이었죠.. ㅋ 당나라에서도 신동이라 불릴만큼 대단한 사람었습니다. 그때 간 사람들이.. 부여의 역사를 기록한것을
고구려로 착각을 했고. 그게 조금씩 내려와 동명왕이 되었고.. 그후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엮은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라의 역사서와.. 당나라의 역사를 보면서.. 그대로 부여의 탄생역사를 고구려의 역사로 기록한거죠.. 삼국사기는
대부분 중국사서를 보고 참고한것이고. 그걸 판별하고 고증 해야 했는데. 삼국사기를 만든 사람들은 그러한 전문지식이 없던 사람들 었죠..
삼국사기의 최대 약점이죠. 또한 신라 역사도 마찬가지죠.. 신라의 시조는 성한왕인데.. 우리는 김알지로 알죠.. 허나 그역사는 기존에 있지도 않았고..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였습니다. 왜냐? 알수 없으니. ㅋㅋ 비석에는 멀쩡히 성한왕이라 쓰여 있는데 말이죠.
광개토왕비에도 추모왕이 있듯이.. ㅋㅋ 역사고증 없이 대충으로 만들다 보면 저렇게 되는것이죠.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는 고구려죠. ㅋㅋ 이미 부여는 없는데. ㅋㅋ 중국은 한나라는 물론 당나라때도.. 고구려를 부여로 기록한 역사가 많습니다..
그러니 혼동이 되는것이죠..부여조라고 해서 부여로 착각 하면 안되죠. 이당시는 이미 관구검과 고구려가 삼국시대 위나라의 양평성을 두고 싸우고도 한참 지난 후인데.. ㅋㅋ
이렇게 뻔하게 할수 있는 역사고증을 그냥 필터 없이 방송으로 보내다니.. 너무 심한거 아니야. ㅋㅋ 이건 왠만큼 역사 공부한 사람들도 다 아는데.. 이걸 그냥 보내??
이러니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지. 역사저널 사실 제가 봐도 엉터리가 심한 편이 몇편있죠
@masoome shbnpor 이덕일역사tv
책보고tv
우리나라 고대 역사는 너무 기록이 안남겨져 있는게 아쉽네요 ㅠㅠ 동명왕인지 고주몽인지 추모성왕인지 이름도 확실하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구전 설화 같은 이야기들만 남겨져 있는게 너무 안타까워요(삼국유사) 주몽보다(bc58) 50몇년전에 태어난 세계사 인물이 로마의 카이사르(bc100)인데... 로마 공화정 당시 역사 기록은 진짜 자세하게 남겨져 있는거 보면 부럽더라구요.. 우리나라는 외침을 너무 많이 받아서 소실된게 너무 많은듯
주몽 관련 기록은 남아 있음.
단지 한족의 기록이고 지금까지 역사 주류 학계에서 주장한 내용과 전혀 반대 되는 내용이라 인용을 잘 안하는 거임.
한족의 기록도 수용 해서 보게 되면 고구려는 700년이 아니라 900년의 역사를 가진 국가가 되고 시조인 주몽의 활동 시기는 진시황 영정 사후 ~ 전한 2,3대 황제 시기 쯤으로 볼 수 있음.
역사서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거꾸로 하는 것임
없는게 아니라 한국인은 고려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뒤통수친 신라 백제가 고려인이라고 자꾸 우기믄 안되죠
고대 서요하 지역 농경민들에 대한 유럽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동아시아 문명의 형성과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매우 가치있는 시사를 해주었습니다... 약 1만년전 간빙기가 지나 요하유역의 농경민들은 인간이 농경에 집중할수 있을만큼 기온이 온난해진 시기 초원지대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들이죠... 그들은 수만년을 살아왔던 중국 내륙의 수렵 토착민들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bc 3천년~4천년경 요하인들은 조,기장 농사에서 벼농사로의 농업혁명을 통해 더 많은 인구를 가질수 있었고 더 넓은 농경지를 필요로 했죠... 그래서 그들 농경민들이 이동할수 있었던 곳은 .... 1. 인접한 만주평야 2.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연산산맥을 지나 하북평야, 산동반도, 중원내륙 황하유역의 하남평야지대 3.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 서부의 광활한 평야지대...입니다... 그중 기존 토착민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이 있었던 중국내륙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적으로 토착민들과 동화되었고 일부집단은 자신들끼리 뭉쳐서 살게 되었죠... 산동반도의 동이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와 중원지역의 동이족들도 기존 토착민 화하세력에 밀려 자신들이 살던 발해만 요하유역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로부터 동아시아는 화하와 동이의 세력이 현저히 구분되어지게 되고 언어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엄지인 아나운서 젊을때네.. 목소리는 늘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네
감사합니다...
우리가 잘살면 다 조상을 찾고 챙기게 되어있다.. 그것이 또다시 우리를 세우는길. 그러므로 그때까진 주변국과 친하게 잘 지내서 ..나중에 우리의 조상땅을 찾는 수 밬엔.. 자꾸 주변국과 다투고 싸우고 불편해지면 찾기가 힘들다 그땐 군사력 밬엔 없으니까
역사를 주제로 내용을 풀어내도 직접 가보고, 만들어보고 고증을 하려고 노력했던 역사스페셜하고 다르게 요즘 나오는 역사 주제 프로그램들은 그냥 대충 매번 나오는 패널들 앉혀두고 영상띄우고 패널들의 개인의견으로 역사를 마음대로 정의하죠. 진짜 그립습니다...역사스페셜ㅠ
패널들 정말 무식해요. 살수가 청천강인 줄도 모르는 애 앉혀놓질 않나
@@예쁜나-v8s 그게 프로그램의 목적이니까요.
@@예쁜나-v8s 경희잘지난다
@@예쁜나-v8s
살수가 청천강이라 확언 하는 것도 무식한 소리라는 걸 모르나.......
살수가 진짜 어디 강인지 확언 못하는 게 현실임.
제도권 교육에서 말하는 고대 한국사에서의 강의 현재 위치는 다 그냥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임의대로 정한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지 진짜 해당 시대 해외 자료까지 찾아 보면서 대조한 결과가 아님.
진짜 해외 자료까지 대조해서 찾아 보면 오히려 한반도 내에 있는 강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임.
ㅡ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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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교과서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다고 스쳐 지나가는 나란데, 엄청 중요한 나라구나. 만주에 너무 가까워서 자세히 다루지 않는 걸까
우리 에게 왜곡 된 역사를 가르치고 모르고 배워 왔습니다
식민사관에 찌든 사가 들에 게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는 못 갖추었을 가능성이 크죠. 실질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는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이죠. 그런데, 그 강력한 고구려도 말기에 가면 갈수록 호족들의 영향력이 강해집니다. 왕도 시해당할 정도로요ㅇㅅㅇ. 따라서, 부여가 고대 국가의 초기 모습은 갖추었다고 얘기할 수는 있어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는 갖췄다고 할 수 없죠ㅇㅅㅇ
@@김경환-f4k2s 그래서 병력을 5만이나 동원하네요 부족국간데?
역사학자들이 부여연구를 안해서 그래요. 부여의 건국시조가 해모수이고. 묘호가 동명왕 임. 500년후의고구려 건국시조추모(주몽)도 동명왕이라 함. 김부식의 헷갈림.
@@김경환-f4k2s
중앙 집권을 갖췄을 가능성이 농후함.
그보다 더 왕실의 지지기반이 약했던 고구려 조차 초대 주몽 성왕 당시부터 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가 시행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음.
거기다 고구려, 전한과 부여가 전쟁을 벌인 기록을 보면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가 아니면 동원이 불가능한 수준의 군대를 파견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음.
우리의 옛역사들의 흔적을 중국에서 찾아봐야 한다는 사실이 이 얼마나 슬픈가? 그것도 우리의 역사를 동북공정으로 자기네 역사로 둔갑시켜 버리고 그걸 또 세계에 그렇게 소개하고 있으니..중국 일본 정말 싫은 두 나라다
역사를 조작하지마세요 오천년역사가 중국에 잇는데 숭인하세요 중국에서 도망와서 한국이 먼들어졋다고
@@백달-e2j 개소리여?
@@생선이울면우럭 님이 개소리 하니간 교육해줫슴 ㅋㅋ
일제시대때 일본이 20만권 역사서 다 불태워없앴다네요.
젼이님, 이영재님 의견처럼
역사저널 그날 폐지하고
역사스페셜 부활시켜라~~~
역사 스페셜이랑 대하드라마 부활 좀 햇으면. ㅠ
옳소 재청이오
정권부터 바껴야 놀고 먹는 노조넘들 일하게 하지....
부여사ㆍ고구려사ㆍ백제사ㆍ발해사 이거 죄다 중공에서 갈취해가려는데 그런 강탈행위를 중점적으로 다뤄줬으면 합니다.
맞아요
그넓은 우리의대지
우리나라역사를 눈뜨고 통채로 뺏기게생겼으니 정말 열받지만
하루빨리 해결해야 될텐데
우리의 동북아역사재단에 계시는
분들은 모하고 있는지 제대로 동북공정에 반박하고 있는지
세금만 축내고 뜨듯한 온돌방에 엉덩이만 지지고 있는지
정말 답답하네요
무너벙이가 시진핑 따꺼로 받들자나
핑크당은 친일.
민주당은 친중.
나라가 개판여 아주,
@@강나르시스 제발 팩트를 들고 와라 니 상상을 얘기하지말고
@@doroshi99 중국몽 문재앙인거 팩트인데 왜 ㅂㄷ데냐
니들의 특... 모두다 너네것 ㅋㅋㅋ
고구려의 뿌리는 부여로 보았다는게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이였다.
우리선조님들이 묻힌땅
언제쯤이면 우리품으로 돌아올까
고구려의뿌리 부여
우리들의 선조나라
엄밀히 따지면 맞지 않나요? 주몽이 동부여의 왕자 출신이잖아요.
@@짱구는목말러-z4x 고조선 고구려가 우리 뿌리라고하면서 고구려가 뿌리라고 여긴 부여의 역사는 왜 관심이 없는가. 고구려가보다 부여사가 우리의 더 오래된 뿌리거늘
근데그거아세요?고조선과부여는이름이다르지동일하는나라에요
고구려보다 부여를 파고들면 이민족의 근본을알수있다
부여가 이렇게 중요한 나라인데 국사시간에 듣보로 갑툭튀하다 순삭되는 이유는 뭐지? 고구려 백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부여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는데 비중을 너무 적게 둔다
기록이 없어요...
@@doggeshiba276 동북공정에 의해 우리의 역사른 발굴하지 못하고 . 외곡되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머긴 유추로만 만든 구라의 역사
여러분들이 중세 1392년
욕단계 흉노족으로
리셋된 이유로 !
지리적으로 역사학적 조사 개발이 힘든 위치라 더그럴듯합니다. 뭐만할려고하면 즁국에서 막는것도 있고.
재밌다
영상 자막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있다.
자막이 앞뒤 문장.한글이 안맞다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영상이다. 몇천원 아깝지 않으니 앞으로도 kbs는 역사프로그램 제작에 최선을다하라
예 폐하~!
저 역사가 다 대한민국의 역사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임에도 유물이나 역사의 흔적이나 아무것도 마음 편히 연구도 못하고 엉뚱한놈들이 다 가져가서 지내꺼라 하니 안타깝다...
대한민국의 시조는 흉노 !
흉노는 욕단계 종족 !
우리와는 촌수가 없지 !
추적하는거 존잼
동복공정보고 조금도 슬퍼할 필요없습니다. 중국 한족은 조금있으면 모든 걸 다 잊을겁니다. 우리만 잊지 않으면 됍니다.
됍 → 됩
단군 고조선에서 시작 다음이
부여 동명왕, 다음이 주몽의 고구려, 온조의 백제, 김수로의 금관가야 이렇게 연결된거?
그리고 고조선의 아래에 있던 진한의 의지를 이은나라가 신라임.
탁리 - 단군 - 딘그르 - 탱그리 - 티그리스 - 탕라
동명(북극성) - 촐몽 - 추모 - 주몽 - 중모 - 도모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나라였습니다. 고조선이 망하고 그 정통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 바로 북부여입니다.북부여는 고구려 이상으로 우리의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반드시 복원하고 연구해야할 소중한 우리의 역사입니다.일본에 의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북부여의 역사를 하루 빨리 복원하고 연구하여 민족의 정체성과 정기를 바로 세워야합니다.우리의 역사에서 통째로 날아가버린 북부여의 700년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일본에 의해 사라졌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요?
@@천손유주 일본이 우리의 고대역사서를 훔쳐가지고 갔어요.
일본 궁내청이라는곳에 우리의 고대역사서들이 있습니다. 일본이 괘씸하게도 안돌려주고 있어요
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844§ion=sc2
@@AyChief
잘봤읍니다
몰랐던 역사를 알고 깜짝놀랐읍니다
지금의 일본은 고구려의 식민지 였군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인데 부여가 뭔 전통을 이어받아요? 혼란기 거쳐 고구려가 그지역을 차지했겠지.
고조선 멸망전에 부여는 존재했습니다 뭘 이어받습니까....거기에 고려, 조선시대만해도 저시대 역사는 지금보다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조선후기 발해고 집필전에는 발해 존재도 잘모르던 시대입니다... 일본이 가져간것도 있겠지만 조선 세조때 불태운게 가장큽니다.
자라가 떠올라 강을 건널수있엇다는것도 당시 겨울은 엄청난 강추위였는데 강이 얼지않은것으로볼때 깊지않은 강상류에 산란철이라 여러 생물이 많이 있엇을것으로 보이네요
국영방송이 한때는 신뢰도높았죠.아주..예전에.....요즘 그나마...다른언론들의 영향과 국민들반응.소리를 듣는듯....권언유착의 피폐..조중동이 지상파에서 시부리는것을..넘어서야하기에 나름...발전하는듯해요#역사스페셜은..책으로 이미 발간되어있습니다..10년전부터요
님 한겨레 좋아하죠?
@@jwkim2825 아뇨...스폰지밥이랑 꼬마망토차차만화책읽습니다.
TV 안보고 사는게 수십년 역사스페셜조차 안본 사람입니다 컴으로 봤어요 물론 ㅐ역사스페셜은 그 당시 빠르게 봤을겁니다 다만, TV 를 가까이 하지 않았죠 시간맞춰 TV 앞에 대기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언제부터 역저 그날이 뜨는데, 이 방송에서 화면에 2010년 이 뜨면서 유튜브에는 2020.1.22로 방영되는 이유가 이해 안됩니다. 궁금한데 누가 설명 좀 주세요
.
동명왕이 두 사람이라는 걸 부끄럽게도 이 나이에 처음 알았네요.
고대 국가들의 초기의 혼란이나 미약한 정통성을 부여라는 이름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각자의 나라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가 지워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제가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칭한 것으로 보아, (가야와 발해도 부여를 언급)
초기를 넘긴 고대 국가들에게도 여전히 부여라는 나라는 중국과 다른 우리 민족의 강한 국가라는 인식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러한 부여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고 말았다.
의도성을 가지고 부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부여와의 연관성을 밝히지 않았던 신라가 부여의 혈통임을 밝힌 고구려와 백제를 당의 힘을 빌려 무너뜨렸다고 남게 되면
신라 통일의 정당성이 흔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여가 활동했던 물리적인 공간도 빼앗기고 계승 의식도 사라지면서 부여는 더 이상 자랑스러운 우리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
고대 서요하 지역 농경민들에 대한 유럽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동아시아 문명의 형성과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매우 가치있는 시사를 해주었습니다... 약 1만년전 간빙기가 지나 요하유역의 농경민들은 인간이 농경에 집중할수 있을만큼 기온이 온난해진 시기 초원지대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들이죠... 그들은 수만년을 살아왔던 중국 내륙의 수렵 토착민들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bc 3천년~4천년경 요하인들은 조,기장 농사에서 벼농사로의 농업혁명을 통해 더 많은 인구를 가질수 있었고 더 넓은 농경지를 필요로 했죠... 그래서 그들 농경민들이 이동할수 있었던 곳은 .... 1. 인접한 만주평야 2.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연산산맥을 지나 하북평야, 산동반도, 중원내륙 황하유역의 하남평야지대 3.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 서부의 광활한 평야지대...입니다... 그중 기존 토착민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이 있었던 중국내륙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적으로 토착민들과 동화되었고 일부집단은 자신들끼리 뭉쳐서 살게 되었죠... 산동반도의 동이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와 중원지역의 동이족들도 기존 토착민 화하세력에 밀려 자신들이 살던 발해만 요하유역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로부터 동아시아는 화하와 동이의 세력이 현저히 구분되어지게 되고 언어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대부여,진조선,진한)을 이어받은 나라였고 동일 지역에 있었으므로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만주의 북부여도 조선이라 본것이다... 발해만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유민들을 모아 쇠퇴해가는 북부여를 대신하여 동명국을 세워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고두막한이 한사군을 몰아내어 얼마못가 한사군은 한나라와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된다... 낙랑 지역에 살던 조선유민들은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최씨의 낙랑국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단군 해우루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갈 것을 요구한다... 고두막한은 자신을 북부여가 멸망시킨 진조선(대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며 무력에 의한 시위와 더불어 단군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해우루가 얼마후에 죽고 동생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고두막한은 동명국을 동명부여, 홀본부여라 칭하고 단군을 계승한다...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미혼으로 임신을 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한반도 남부로 가서 박혁거세를 낳고 혁거세는 사로 6촌의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어린나이에 신라의 왕이 된다... 혁거세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천제 단군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기인한 것이며 박혁거세의 왕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또는 대부족장의 호칭인 가한(거서간)이라고 칭하게 된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고주몽과 재혼한다... 고주몽은 정략결혼으로 아들이 없는 고무서의 홀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며 어렵지 않게 나라를 세우게 되고 자신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홀본부여의 정통성을 버리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세운다 (사생아인 고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리(고죽)국의 가한이었던 고모수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인 고주몽은 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으며 단군조선, 진조선, 대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한 홀본부여는 고무서 단군에서 끊어지게 되고 소서노는 홀본부여의 정통을 잇고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가 살다가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우게 된다... 후에 백제는 홀본부여를 이은 남부여를 칭한다... 백제의 왕들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 기록이 있다... 5호16국 혼란기에 백제는 요서지역을 경략하여 차지하게 되는데 그곳이 자신들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요서지역 패대의 땅은 지금의 난하 서쪽 중국의 수도권지역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두고자 홀본부여를 지우고 북부여를 잇고자 하였다...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홀본부여가 망하게 되자 신라 혁거세의 손자 3대왕 유리는 가한, 차차웅의 칭호를 버리고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을 왕호로 삼는다...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예맥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가 되었으나 홀본부여와 북부여라는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역사적 혼란이 발생한다... 훗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역사에 무지한 인간이므로 이런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부식은 동명성왕 고두막한과 고구려 고주몽을 동일 인물인 것으로 왜곡하였다... 신라는 고조선 유민이 나라를 세우고 천제 단군(밝은임금)의 제후국인 가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임금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시기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원군을 청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속국, 제후국으로 삼고 왜를 물리쳤다... 내물왕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받들어 가한(마립간)의 칭호를 다시 사용한다... 내물왕 이후 신라는 1백년 이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간섭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내부적으로 골품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으로 김씨 왕위세습을 유지한다... 그후 고구려가 왕권분쟁으로 쇠퇴함에 따라 신라는 지증왕에 이르러 마립간 칭호를 버리고 '왕'을 칭한다... ... 이로서 만주와 발해만, 한반도의 동이가 세운 국가와 구성원들은 모두 예맥족이 정통이었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과 북부여, 홀본부여 등 만주, 한반도의 수십개 크고 작은 열국들은 모두 예맥이 지배층이요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후 중국 사료에는 동쪽의 이민족을 모두 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예맥이다
위 내용들은 모두 우리 사료에 근거한 것들이다... 고대역사를 몰라서 신화, 설화만 인용한 삼국사기, 유사보다는 더 신뢰성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의 흉노 김씨왕조는 예맥 부여를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신라는 만주, 한반도의 정통 예맥국가 왕조에 대한 사료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고대사 은폐와 왜곡의 시작점이다
캬~
이때만 해도 KBS 볼게 많았었는데
다 좋은데 KBS영상에 광고 너무 많아 불편합니다. 시청료 받는 곳이 이러는건 아닌듯..
나는 해방직후 소학교
(국민학교)에입학하였다
그때 배울때 고구려시조
는 동명성왕이라배웠다
옛날에는 태반채 아기가 나오기도 했다 한다. 그러면 알에서 나왔다는 말도 성립이 되는거지. 작년에도 어느나라에서 그런아기가 나왔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런건 재 업데이트해서 내보내도 됨...고대사 무척 중요한거임...
하루빨리 서기년도 없애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함...
드넓은 땅이 우리나라 땅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많은 세금 감당할 자신 있으면 ~
고구려 까지 찾어야죠!
꿈깨라
'대한민국' 땅은 아냐 !
부여건국왕도 동명왕
주몽도 부여왕자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도 부여출신이고
신라박혁거세의 어머니가 부여출신아니면 중국공주라는 설이 있던데 부여는 어쨌든 3국의 뿌리라늠 것이 확실한듯합니다. 백제도 남부여였음
부여 위에 고조선 력사는 흐른다
조선왕조에서 한민족의 시조를 단군과 동명왕, 온조, 박혁거세로 지정하고 제사를 지냈던만큼 중공의 부여사왜곡은 가만둘수 없다
거기나 잘 하셔
눈 멋있다
부여시조는 동명왕 이구 고구려 시조는 추모대왕 주몽이군요 ㅎ
고구려 세운 동명왕~ (×)
고구려 세운 추모왕~(♡)
고구려 세운 주몽~~(♡)
좋아요 눌렀는데 숫자가 안올라 가냐?
주몽이 정통성확보를 위해 동명왕을 자칭한거임
역사저널말고 역사스페셜해주세요
고리국을 탁리국, 색리국으로 표기하였는데 이건 실수로 잘못 쓴거에요. 고리국이라고 읽는게 맞아요. 부여는 중국에서 표기한걸 다시 요즘 우리 말로 번역하니 부여가 된 것이고 원래는 부리입니다.
ㅍ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抑 有以也.
사서에 부여왕이 자신을 망명자(亡人)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어디에서 왔는지 추적하는게 상식이다.
추적하기 귀챦으니 원래부터 거기서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사서를 볼 필요가 없다.
檀石槐旣立,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東西部大人皆歸焉。
兵馬甚盛,南鈔漢邊,北拒丁令,東却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삼국지 위서동이전 선비족
선비족 단석괴가 동명부여를 동쪽으로 쫓아냈다. 동명부여의 원거주지는 길림이 아니다.
동명부여가 동쪽으로 쫓겨났다는 기록을 보면... 어디에서 쫓겨났는지 추적하는게 정상이지,
원래부터 거기서 살았다고 우기면 안되는거 아닌가 ?
부여 시조 동명은
고리국왕과 시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남쪽으로 도망쳐 부여왕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내용입니다
@@nature5120 삼국사기와 동일한 고구려-부여를 설명한 중국사서는 북위서-수서-북사입니다.
후한 탄생이전에 고구려가 22년 북부여를 병합, 통속 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북위서 에 기록됩니다.
한서-후한서-위지동이전 의 동명부여는 오환과 쌈박질하고 북부여가 멸망하고나니 49년에 후한과 첫 외교관계를 개통하고
요수 서쪽에서 살다가 2세기에 선비족 단석괴(~ 181)에게 동쪽으로 쫓겨나 요수 동쪽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동명부여의 왕은 자신을 망명자라 하지요
그렇다면 부여와 신라의 뿌리의 관계는 어떤것이고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신라 진한은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고 신라 왕족은 흉노족임.
@@czh9528 훙노족은 중국이 뿌리인가요?
@@DG-jd8py 왕족이 흉노인 백성은 여러 지역 사람일수도.
다 좋은데 54:00 갑자기 식민사학자가 튀어나온게 함정
어째서 식민사학자인데?
지금은 중국으로 속해 있지만 원래 우리나라 땅인 만주벌판을 다시 찾아와야 됨.
古朝鲜、汉四郡、安东都护府是中国的
아니 왜 자료화면은 대조영꺼 쓰냐ㅋㅋㅋㅋ
고구려 백제는 같은 혈통 같은민족..북방몽골계 혈통
신라는 완전 다른 혈통임..저멀리 아랍과 중앙아시아혈통..외모가 백인에 가까운...
독일 공영방송에서 다큐를 방영했는데 내용이 게르만족과 훈족 관련 내용임..그런데 다큐에서 훈족과 신라를 직접 연결시키며 같은 혈통일 가능성을 언급함....고로 지금 우리는 당시 삼국시대를 언급하며 같음민족끼리 이러지만 당시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은 말도 잘안통하고 외모도 다른 완전 다른 민족이었음
bc425년 단군조선(진조선, 진한)은 내부정변이 일어나 대부여로 국명을 바꿉니다...
bc239년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웁니다
bc238년 대부여(진조선)은 멸망합니다 (고조선 47대 마지막 단군 고열가는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합니다)... 북부여가 대부여의 뒤를 잇습니다...
bc194년 위만이 발해만의 번조선(번한) 정권을 찬탈합니다...
bc108년 위만의 손자 우거의 위만조선은 한무제에게 멸망당합니다...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됩니다
bc108년 한무제의 한사군에 대항하고자 고리국에서 내려온 고두막한이 동명국을 세워 조선유민들을 모아 한나라에 대항하여 싸우고 한사군 4개군중 2개군이 얼마못가 철수합니다... 후에 한사군은 한나라에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됩니다
(한나라 낙랑군은 발해만 진황도시에 위치했고 조선유민이 세운 최리의 낙랑국은 한반도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습니다... 서로 다르며 모두 고구려에 멸망당합니다)
bc87년 동명부여,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은 쇠퇴한 북부여를 몰아내게 되고 북부여 해부루는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웁니다...
bc57년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한반도 남부로 내려가 아들 박혁거세를 낳고 박혁거세는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사로국, 신라를 건국합니다...
bc37년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의 딸 소서노와 재혼한 고주몽은 후계자가 없는 졸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꿉니다......
bc18년 졸본부여를 고주몽에게 빼앗긴 소서노는 비류,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 살았고 훗날 온조는 한반도 마한땅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웁니다
결론 : 동명성왕은 예맥 배달민족 구국의 영웅으로 이민족 한나라 세력에 대항하여 싸운 동명부여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이며 고구려 고주몽은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고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이고 그의 아버지는 북부여 제후국인 고리국의 가한이었던 고무서입니다.... 이 모든 역사의 왜곡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역사에 대한 무지때문이며 동명부여,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을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우리 고대사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역사완포인트TV입니다. 외우기 어려운 부분을 원포인트레슨을 통해 외워서 역사(한국사,세계사)를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고싶은 마음에 영상을 올렸습니다.기분좋게 봐주시고^모두모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_^
Since there was ancient civilization North of North Korea with Stonehenge and waved sword only mostly found in Korea and North region, there as a culture that had religion, language, culture, metallurgy. If that is the indication, the recent discovery of the red mountain including the Godness statue wearing a Bear necklace (Bear is symbolic for women in Korean culture at that time there was Bear nation and Tiger nation and Bird nation(the root of ancient Korea has bird at top of their totem poles) and most likely Bird nation took Bear nation's princess(VIP woman) as Bride) -- that dates back 7000 BC. Fast forward to about 700 AD, After writing was more prevalent, the numerous books scripted by "GongJa"(Confucius) words by his followers from China indicated "GongJa" say he learned everything from 'north' civilization. Thus, most historical documents indicate China's civilization was derived from this civilization. The Chinese books indicate 'north' civilization just 'north civilization' without a name. However, Korean calls in "GoChoSen" which means ancient (go) Cho (bird) sen (nation) of the old Korea. This first civilization of east Asia was so large that its people moved out to both east and westwards. The same or exact same artifacts are being discovered in North Italy to Ireland and Finland, to east all the way to Mexico, and along the traveling route, same or similar artifacts and languages are found. By the way, the next nation was called "Gogyro" which means hook which the ying-yang symbol came from, it means 'order or harmony via governing' set by GoChoSen. And following after GoChosen was the nation name of "Go (old) gyro (hook)' the 'hook' part 'gyro' became 'Korea' in the present day. It's interesting to find "Mississippi" "Michigan", etc and its meanings are the same as Korean! "Mi" - means in Korea is 'freshwater or river'; "chi or ci (si)" - means in Korea 'fish' - sippi and gan - means in Korea 'place (home or house), Again only in old GoChoSen languages. Note that in linguistics, it's very hard to not only match the sound but also the meaning. If I follow the logic, unless there was a large population and civilization with the resource and advancement of culture only can have the means to explore in the motivation of necessity or curiosity. And the people from such civilizations can only expand and overlap o ver further expansions It may be worth studying the "yo-dong" civilization and first nation of Eas Asia (or maybe the human Sapien Sapien) "GochoSen" more in-depth. It can bring together the puzzles of where nations come from and why there was a road before the silk road that was well-traveled with premium horses and carts with carts at least 5000 BC before the silk road.
고구려는 위대했지만 민족 구성에 아쉬움이 있고
백제가 알수록 정말 멋있는 나라였다는 생각
민족구성에 아쉬움은 발해 아닌가여?
@@hjdreamer2073고구려도 나라안에 여러 소수 민족이 있었습니다
@@seongjinlim2228여러소수민족을 .중국은 한족만 있냐고.
백제는 어떻다고.
공부 좀
홍어 ㅋㅋㅋ
부여에서 뭐 잔치하면 삼한부족장들이 다 와서 인사드리고 했다는거 보면 뭔가 있긴 있는나라일듯?
부여는 동부여 북부여 등 여러 부여가 있는데
최초의 부여는 '고조선'후기에 나라이름을 '부여'로 바꾼것으로
부여 = 고조선 입니다
고조선이 '부여'가 되자 고조선 즉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등으로 '부여'라는 이름을 차용하는거죠.
우리가 고조선의 정통을 잇는다 그런걸 각인시키려고
@@김영철-p7v 에라이 쯧쯧. 나라 영토의 위치는 초기 , 후기가 다를수 있다는걸 모르나. 수도의 위치도 바뀌고 말이야
@@김영철-p7v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 등 여러부여가 있는데, 첫 부여는 고조선이 '부여'로 국호를 개명한것이다
@@김영철-p7v 일부러 여러국가들이 고조선의 직통 국가임을 내세우려고 동부여가 '부여'를 사칭한거야
고조선을 물려받은 '부여'라는 이름이 얼마나 영향이 있었냐면
백제가 '남부여'로 국호를 개명한적이 있을정도야
광개토태왕릉비에 써 잇듯이 고구려의 역사는 700년이 아닌 900년이 되는것이다.
아들인 장수왕이 만든 비에 보면 광개토태왕부터 17세손이라 적혀있는데 왕의 계보를 따져봐도 고주몽까지는 13세밖에 않되고
나머지 4세가 바로 부여.. 정확히 말해 북부여가 된다. 동명왕도 고주몽이 아닌 북부여 마지막 4세왕이였던 고두막한의 별칭이였고,
일제강점시 시절 자신들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조선을 부정하며 고조선을 신화로 만들기 위해 북부여란 나라를 잘라내서 우리가 북부여에 대해 모르는거고.
암튼 우리 역사를 난도질한 일본놈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를 아직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네...
그쵸 삼국사기도 거의900년으로 적고있죠
그래서뭐??
중국 사서에는 왜 없는데? 일제가 타임머신 타고 중국 사서를 다 작업 해둔 모양이지?
@@TV-DOCJON 왜 없는데? 신당서에 나와 있는데?
@@암행어사출두여 너 같은 사람에게 쓴 글 아니거덩.. 꺼져주..
역스 진짜 그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