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훈련되지 않은 미숙한 병력일 수록 유리한 지형이나 요새를 근거해서 방어전을 하는 법입니다. 개활지에서 야전이야 말로 잘 훈련된 병력으로 해야하는 전투지요. 신립의 선택은 되려 조선군이 일본군과 정면 대결해서 해볼만하다고 판단한거지 병사들이 오합지졸이라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탈영병이 속출했다는건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고 병사들의 거처가 하급 간부인 대장과 초관들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는 상황에서 탈영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였습니다. 2. 조선은 신립이 한양을 떠나기 전에 이미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주요 길목인 조령, 죽령, 추풍령에 각각 장수들을 파견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경상도 상황이 심각해지자 우선 한양으로 넘어오는 길목을 즉각 차단하고 나선거지요. 따라서 조령 방어를 한다고 죽령이나 추풍령으로 우회를 우려해야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신립에게 조령를 요청하게 된건 조령 방어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앞서 다급히 경상도로 내려가던 이일이 원래 계획대로 경상도의 병력을 소집하기 힘들어지자 조령 방어선의 병력을 차출해 상주로 끌어들였다가 상주 전투에서 날려먹은겁니다. 상주전투로 경상도에 얼마 남지않은 기병 전력과 조령 방어 병력까지 상실했고 신립이 충주에 당도할 무렵 조령 방어선은 붕괴된 상태였던겁니다. 그래서 이일이 신립의 병력으로 자신이 만들어버린 조령 방어선 구멍을 매우고자 했고 애시당초 기병전을 준비했던 신립은 갑작스런 산악전으로 전환을 거부하고 원래 계획대로 기병전을 고집했던겁니다.
결국 본인의 무능함과 귀족들의 기대 때문에 진 전투가 아닐까 ... 보병없이 기병만으로 하려면 정말 넓은 평야 지대가 필요했을건데 그런 지역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적 1진과 교전해 시간을 끌어줄 탄탄한 보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질 수 밖에 없는 전투가 아니였을까.
조령, 죽령, 추풍령을 모두 방어해야만 하는 부담이 있었다면, 조령에 방어 진지를 틀고 적을 유인하하고 배후에서 기병으로 돌격하는 게 낫지는 않았을까요 물론 책상머리 상상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데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는 신립 장군은 어떤 생각이었는지 그게 진짜 미스테리네요~~
탄금대전투의 주전장은 충주달천평야 근데 평야는 전부 논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긴 트랙터 같은 농업용 장비 말고는 들어갈수없는곳인데 신립은 오로지 그냥 기마의 기동력만 믿고 무리하게 기병전술을 사용햇던것 물론 기병전술은 라인전을 자주벌이던 유럽전장에서도 미국독립전쟁에도 남북전쟁에도 심지어 6.25전쟁 초전에도 기병전술은 쓰였을 정도로 효과적인 전술이었습니다. 한국육군 독립기갑연대 제2기병대대 일명 장철부 기병대가 6.25전쟁때 어찌보면 기마병의 마지막을 장식한 기병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더군요 신립의 패한 원인은 최소한 지형에 맞는 전략을 써야 했는데 그냥 무리하게 밀어 붙인점 무리한 배수진이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이 탄금대 전투 이후로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왜란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화승총을 개발 양산에 들어가게 되고 군의 개편도 총병위주로 편제가 됩니다. 하지만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조선총병 들이 청나라 기병대인 팔기군에게 싹 갈려나가 버린것을 보면 무기의 차이 보다는 지형의 선택과 계절 날씨가 승패를 좌우 한다고 볼수있습니다.
그거 아심? 일본군도 배수진 썼었음. 신립이 심지어 충주성까지 있어서 더 유리했음. 그냥 신립이 전략적안목이 병크라 조선중앙군 최정예 보병이라는 예비대에 아무 오더도 안내리고 기병끌고 돌격했다가 병력을 4개로 쪼개어 배치한 고니시의 전술에 보병과 기병이 분리되어 물속으로 풍덩해버린거임.
비정규군급의 여진족기병과 싸울땐 기병돌격을 통한 기동전이 유리했는지 몰라도 전국시대를 통해 실전으로 다져진 정규군을 만나니 이게 먹힐리가 없는거죠. 옛날부터 우리가 잘해왔던 농성전을 하다가 적의 보급이 길어지면 후방을 치는 전술을 썼어야 함. 이런 가정도 웃긴것이 분명 정치적 논리가 개입돼서 신립이 장기전을 한다고 했으면 아마도 사약 받았을듯.
급조하여 병력을 꾸린 입장에서 지휘를 할 걸 생각하면, 말을 함부러 못 할 내용입니다만... 다만 개인적으로는 정보전이 안됨에 따른 전체적인 지휘의 실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 했는데, 적을 아는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했다고 보입니다. 특히나 그 점은 기병의 기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서 그 판단을 왜 했는지 역유추하여 엿볼 수 있다고 봅니다. 척후를 정말 치열하게 보내서 먼저 적군이 어떤 자들인지 집요하게 알아내는 노력이 선행하여 필요했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의 삼군사령관격인 사람이 용력만 믿고 너무 정보전을 허술히 했다는것이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그게 참 어이가 없네요. 문경세재를 포기한 이유가 결국 기병운영인데 간곳이 논밭이라니... 사전조사도 없었고 그곳에 주둔한지 얼마만에 왜군이 들어 닥친건지 알수는 없지만 논밭이 기병운영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다른곳으로 후퇴해서라도 다시 유리한 장소를 찾아야 할것인데 배수진치고 그냥 다 죽으니 웃음밖에 안나오네요
@@jsyoon3350 그건 좀 개소리임. 신립이 끌고간 중앙군 병사들은 기병 보병 할거 없이 조선에서 최정예 훈련을 받은 말그대로 주력군임. 탄금대 전투 패배 후 조선군이 완전히 모든걸 내주고 후퇴한 이유도 전라도에서 올라와 용인에서 패하거나 임진강에서 패한 대부분은 오합지졸이었어도 신립이 끌고간 군대는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최정예에 장비도 잘 보급된 군대여서 였음. 그냥 문경세제를 버린거 부터가 좇된거임. 보병, 기병 최정예인데 신립의 가장 큰 문제는 수적으로도 전투 투입병이 일본군이 더 많았는데 보병과 기병이 제병합동을 펼치지 않고 예비대 보병들에게 아무런 오더도 내리지 않아 각개격파당하는 꼴을 만들어서임. 전쟁에서 최악이 기병과 보병대가 적에게 분리되어 각개격파당하는건데 고니시가 유능하게 했음
"조선왕조오백년"이라는 80년대 드라마에 몇번째 시즌인지는 모르지만 시즌 "임진왜란" 편에 자세히 나온적이 있습니다.선봉부대인 고니시(소서행장) 왜군의 조총이 총병력 1만8천명중에 약 수천명인 조총부대가 있었습니다.드라마에서도 조선 육군들이 조총의 위력을 맛본뒤에 장수들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탈영과 도망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일본 전국시대에도 강력한 기병대를 가진 다케다 신켄의 기병대가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부대에 괴멸된 적도 있습니다.조총부대는 기병을 잡을때 말부터 먼저 쏘아서 말과 기병이 땅에 떨어지게 만드는 전술을 씁니다.신립장군은 기병대로 조총부대와 싸운것부터가 잘못이었고, 대포를 쓰는 수군이 아닌 이상 육군들끼리의 전투는 총과 화살의 싸움이니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습니다.그 당시의 조선 조정에서도 조총이 어떠한 무기인지 조차도 모르는 3정승과 6판서들이 선조와 도망갈 궁리만 짭니다.그러다가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의 조총부대가 구원을 와서 겨우 왜군의 조총부대와 싸움을 벌이나 승전보다 패전이 더 많았고, 결국 바다에서 강력한 대포를 가진 조선 수군들이 보급선을 끊어서 왜군이 후퇴를 한 것입니다.
기병으로 스타가 된 장수였기에 기병에 과도하게 의존하다가 조총을 사옹하던 일본군에게 찢긴 안타까운 사례... 밀집대형으로 사격하는 조총병은 사실상 매우 긴 장창을 든 대기병용 팔랑크스 진형과 비슷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산발적으로 사격하는 궁병과 비슷하게 여기면 이런 참사가 벌어지는듯...
지형을 잘 모르니 그런거 아닐까 싶습니다. 신립의 주무대는 북방.. 남쪽과 지형과 환경이 많이 다르죠. 직접 살피지 못한것도 병사들이 워낙 탈영할 위험성이 심해서 그런가 싶습니다. 사전지형조사를 하러간걸 탈주로 의심받을수도 있었을테니.. 실제로 동로마멸망때 용병대장이 부상을 입어서 들것에 실려간것뿐인데 그 실어간 병사들을 보고 패주해서 도주한다고 착각한 다른 병사들로 인해 진형이 흐트려져서 수습되지않아서 멸망했습니다.
항상 역사적 사건을 평가할 때 말하는건데, 우리는 결과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판단하니 혀를 차니까 모든게 한심해보이지만 그때 당시 사람들은 아니라는거지. 신립이 뭐 돌격대장 정도가 적당하다 어쩌구 해도, 어찌됐든 조선 최고의 장수를 내려보낸 것이고 그 역시도 병법에 밝았겠지. 조총의 위력을 몰랐을 리도 없고, 쓸 수 있는 여러 전략 중에서 그나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것을 골랐는데 결과가 안 좋았던거라고 생각함. 조총부대와 직접 싸워본 적도 없었고, 궁기병을 제외하면 오합지졸에 가깝고, 수적열세까지.....사실 뭘 해도 졌을 전투라고 생각함. 신립이나 옛날 한반도 문관무관들이나 바보병신도 아니고 다 그 때는 합리적인 판단 한거임.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는 임진-정유를 통틀어 가장 아쉬운 일임은 확실합니다. (두번째는 원균의 칠천량 해전) 다만, 당시 조선의 군제인 '제승방략'과 이를 추진한 선조를 먼저 거론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국가기반산업은 농업인데 생산량은 낮고 위아랫놈 할거 없이 드럽게 많이 쳐먹어서 군대를 유지할 여력이 점점 없어졌습니다. 또한 선조는 개 쫌팽이에다 모반과 역모가 두려워 지방의 상시군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만들어진 군사편제가 '제승방략'인데 요는 평시엔 농사짓다 전시에 군사를 소집하고, 그 지휘는 중앙에서 내려보내는 장수로 한다는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상시군으로 소요되는 군비도 아끼고 지방에서 역모를 꾀할 여지도 없앨수 있는 윈윈인 제도인 셈이죠. 단점으로는.. 역모를 방지할수있다는거 빼곤 다 단점이고 그중의 백미가 탄금대 전투인바.. 왜란이 벌어져 조정의 안위가 시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신립장군은 휘하 장수와 기마병을 데리고 조정으로 내려갔는데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이 뻥뻥 뚫리고 있으니 어서 가서 막으라고 합니다. 군사는??? 하고 물으니 저~기 충주로 가면 모여있다 합니다. 가서 봤더니 ㅅㅂ... 팔도에서 모인 오합지졸... 창은 들어본적도 없고, 활시위도 제대로 못당기는 명부속에만 있던 패잔병들이 잔뜩있었습니다. 니미.. 지휘관과 휘하 장수들의 신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여도 시원찮을판에.. 싸우다가 다 도망가게 생겼습니다. 방법이 없다. 이길수있는 전쟁이 아니다. 배수의 진으로 생전 보도못한 군세로 밀고 올라오는 왜놈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장렬히 전사하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런 진을 짜고 전투에 나섰으리라 생각 됩니다. 신립 장군은 조선의 엘리트 장군으로 전략 전술을 모르는 필부가 아닙니다. 단순히 깔게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조선의 제도와 상황을 보는 인식도 필요하다 생각 됩니다. 선조 이 개새끼야.
활의 사거리는 조총보다 길다는 말이 많고 실제로 활터에서 200보가 넘는 거리를 쏘고 하는거 보면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활터에서 쓰이는 목전이나 유엽전은 살상능력이 사실상 없는 비전투용 습사용 화살이라는게 문제고 편전이나 장전같은 전투용 화살의 사거리는 80-120보 사이로 수조규식과 같은 조선 수군 교본이나 정조 시절 장용영 훈련 기록을 보면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길게 잡았음. 게다가 조선의 상마대의 마상궁시는 당연히 평지에서 안정된 환경에서 쏘는것 보다 사거리가 더 줄어들수 밖에 없지. 아마도 탄금대에서 조선군 기병들은 화살과 총탄을 유의미한 사거리 차이 없이 주고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함. 어찌되었건 조총은 열병기고 관통력과 제압능력에 있어서 활은 따위인 수준이고 전투용의 고장력궁은 끊임없이 사수의 힘이 들어가는 고단한 무구인데다 영상처럼 숙련자의 숙련도가 보장되어야 성능을 내는 무기라 간단하게 배우고 총을 들 힘만 있으면 되는 총과 비교할수가 없게되었음. 활의 나라 조선군도 임진왜란 이후도 아닌 명군 참전 이후 부터 편제를 고쳐가며 조총으로 도배하게 됨. 이것은 시대적인 변화로 활이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하고 하는건(몇가지 총의 한계로 우위적인 부분이 없는건 아니지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함. 몽골을 회전에서 꺾은 유명한 맘루크 기병대도, 몽골 기병의 직계후손인 바시키르 기병들도 그리고 우리 조선의 기병들도 전열보병과 총병들에게 녹아내렸지. 다만 너무 아쉬운건 이런 총은 분명 당시로서는 한계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고 이를 잘 활용할 전술과 교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보조병과가 받쳐 줘야 그 효용이 폭발적으로 터지는 병기인데 전장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유목민족과의 비대칭성을 바꿀수 있었던 병기인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약점만 드러낸체 청군에게 쓸려버린건 너무 아쉽다. 야전포병이 받쳐주지 못하고 총검도 없고 근대적이고 정교한 소규모 제대의 교리가 부족했던 조선군이 전열보병으로 진화된 형태가 아니라 조선판 테르시오인 삼수병 편제가 망가지며 조총병만 남은 형태라 장창병과 같은 보조 병과가 반드시 필요한데 쇄도하는 청군 기마병을 상대로 탄금대의 일본군 입장에서 싸웠는데 광교산이나 김화전투 같이 지형이 보조 병과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널직한 평야에서는 괴멸을 면치 못했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약점이 활에 치중된 불균형이었는데 그때는 총에 취해 총에 치중된 불균형을 만들어버림. 근접병과 육성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체화되지 않은 남의 무술이라 정조때까지 수없이 반복되는 노력이 결국 전부 흐지부지 됨
전국시대동안 온갖 경험 다 겪은 베테랑 일본군과. 긴시간 평화로 인해 대규모 전쟁경험이 없는 조선군의 차이는 클수밖에 없죠. 그나마 이순신처럼 군사훈련이라도 열심히 하면 좋았을건데 전쟁을 안하니 군인들에게 노동을 시켰고 이때문에 군역을 기피하고 대리를 시키는 폐단이 발생하면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것도 큰 문제였던것 같네요.
덕분에 더 큰 피해를 입었고 군사 정비,보충할 시간이 부족해 더 많은 희생과 자력으로 막을수 있는 기회를 날렸죠. 일본이 아무리 백병전이 능해도 장거리 원정인데다 보급에 상당한 애를 먹고 있었는데 똥개도 자기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초반 원균의 자진 수군 제거와 신립의 기이한 삽질만 안했어도 전쟁 내용이 달랐을거임
이미 회전급 국운을 건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수도로 직행하는 침략에 멸망했는데도 조선의 군 징집체제는 과거로 부터 교훈을 못얻었고 그놈의 내부반란이 무서워 서 대규모 침략시 멸망하기 쉬운체제로 스스로 만들었음. 이걸 임진왜란 병자호란때 취약점을 크게 통감하게 겪고도 바뀌지가 않았음.
조선상황 1. 강점 : 기병, 수군 2. 약점 : 원균의 수군 자체 해산, 허술한 군역제도, 부족한 실전경험 신립의 실수 1. 기병 특수성 고려 평야전투고집 => 해당 평야는 조건이 다름(논,갈대,질척한 토지), 2. 배수진을 통해 실전경험없는 병력 통제 => 조선군 대다수 도망가다 강물에서 사망 결과 1. 왜군의 한양 점령, 선조피난 + 갓순신의 등장
@@pablop6361 ㄴㄴ, 이일은 정유재란 전에 함경도로 발령나서 죽을때까지 일선에서 배제되어 함경도에 짱박힙니다. 임진년에 이일은 비겁한 도망자라는 조정의 인식이 박혔는데 이를 일소할만한 전공은 세우지도 못한체 각종 불미스러운 일로 구설수에 올라 평판이 최악으로 떨어집니다. 한마디로 전쟁에선 못써먹을 장수 감도 못되는 인간으로 취급당해 정유재란 전에 일선에서 배제되어 함경도로 발령났고, 이후 그곳에서 살인죄로 체포되어 압송되던 중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한땐 조선 최고의 명장 소리를 들었던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너무 초라한 최후였습니다.
애시당초 선조가 생각이 있었으면 부산포 부근에 장성을 쌓고 육군과 수군을 집결시켜서 상륙을 못하게 했어야죠. 신립이야 왜군에 대해서 전혀 파악이 안되서 여진족한테 먹히던것을 그대로 한 것이구요. 다케다 가문이 하던것을 그대로 반복한 것입니다. 조총을 제대로 몰랐기때문에- 한번은 당했어야 할 결과입니다.
선조도 경상도에 성 더 쌓으려고 했음 근데 문제는 노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져서 민본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를 추진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해군이란 건 동 잡아먹는 하마이기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해군을 100% 상시 대기시킬 수가 없었음. 선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조선의 국가 체계가 왜군의 예봉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
조선군이 숫자적으로도 적고 전날 비가 내려 말이 달리지 못하는 상황도 생각못하고 1차 조령방어선 2차 탄금대방어선을 차선책을 생각도 안하고 자기 기동대의 장점만 믿다가 하늘도 안도와줘서 4만전체가 골로 가버린 상황 .....이치웅치전쟁에서도 보듯이 고개를 잡아 전투하는게 훨씬 나은데 왜 저런 악수를 두었는지 어이가 없음
잘 정리했습니다. 통치자의 문제, 문치와 문관의 군사통제, 인사문제, 국방시스템의 문제를 빼고 이야기하면, 결국 신립이라는 사람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도 어찌할 수 업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의 공격속도가 매우 빨랐고 우리정부의 대응은 매우 늦었다. 경보가 울리고 준비해서 싸우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 싸움을 벌였다. 경상, 전라, 충청 삼도 순변사이니까 적을 막으려면 적어도 충주, 제천에서는 싸워야 한다. 차라리 신립을 그냥 총사령관이라고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굳이 충청도에서 결판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경상도의 문경과 조령으로 달려가거나(사실 거기에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뒤로 후퇴하여 경기도에서 싸웠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결국 자연적인 장애물인 한강방어선이 될 것이다. 싸울 준비를 갖출 시간적 여유가 되어 지연전을 벌여 전력을 모은 뒤 싸우거나 지구전을 벌였더라면 조선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에게 최대 미스테리는 주력이 기병이고 보병은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이라 문경세재를 포기하고 충주평야로 갈 정도의 머리 굴림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도착하자마자 그곳이 논밭이고 말이 못뛴다는 걸 알았을텐데 그전에 사전조사는 안했는가 하는것과 못했다고 쳐도 그리 되면 기병의 장점이 사라지니 빨리 군대를 후퇴해서 기병을 활용할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배수진치고 모두 몰살... 정말로 신립은 쉴드 쳐주기 힘드네요.
전투 전날 밤에 비가 왔다고 하잖아요. ( 진흑탕, 끈적한 지형에서 말이 잘 달릴수 없는건 당연한거고욤) 전력(병력, 전술 전략)도 열세인데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으니 질수밖에 없었던 싸움이죠. 사람들이 날씨를 많이들 간과 하시던데, 전쟁에서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 안해도 아실겁니다. 그리고 신립도 당시 여러 전황을 판단하여 탄금대에 진을 쳤을거라고 봅니다. 과연 "신립이 무능한 장수였을까?"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은 조선군에게는 너무나 불리했다라는 것 이죠.
내가 알기론 신립이 원래 조령에 진을 쳤는데 도망가는 병사들이 많아서 어쩔수 없이 배수진을 치기에 적합한 탄금대로 진을 옮긴것으로 알고있다. 그리고 2만의 정예병과 급조한 8천의 오합지졸의 싸움인데 무슨 지휘관의 자질을 따질것인가? 조총소리만 들어도 도망 갈 판인데. 준비도 못한 조정의 안일함이 가장큰 문제였지.
전 신립을 옹호해주고 싶네요. 너무 오래 지속된 평화로 당시 조선군은 실전 경험도 매우 적고 그나마도 북방 넓은 개활지에서 싸운 경험이었죠. 게다가 평소엔 농사 짓고 전쟁 발발 때 모이는 예비군 같은 형태라 영상대로 오합지졸이었을거구요. 매복작전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한양으로 가는 루트도 많아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군대 질이나 경험도 일본군이 압도적인데 상황 자체도 너무 불리했어요.
@@xnclsien 참. 역사의 큰 물줄기라고 썼잖아. 거 참 길게 쓰기 싫어서 짧게 댓글달았구만 넌 왜 내 댓글에 와서 시비냐? 돌격앞으로!하는 소대장정도되는 신립이면 훌륭했는데, 사단장으로 쓰니 이 꼴났다 이말이야. 세조 왕위 찬탈이후 사병집단의 폐지 등. 그냥 그 시대에 신립을 최전선에 낼 수 밖에 없는 조선의 무능. 이미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왜군. 16만을 보낼 수 있었던 왜의 국력 등 큰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그렇다고. 너는 일일이 남의 댓글에 니 기준에 안맞으면 시비터는게 좋냐? 좋은 유튜브 동영상 서로 그냥 즐기자. 일일이 댓글로 시비걸지말고.
당시 왜군은 해군보다 생각보다 육군이 더 발달된 집단이였습니다. 아무래도 전국시대라는 장대란 시기를 거친 후여서 왜란때 민사심리전에서 졌지만 그외 전술적으로는 월등한 편이였습니다. 애초 조총의 단점을 당연히 알고있었고 조총을 대규모 정규군이 운용할시에 대한 대처 역시 있었습니다. 조선은 당시 왜군이 저런 자산을 대규모로 운용할시에 대한 대처가 부족해서 참사가 벌어집니다. 조선은 왜란 이후 주변국 중이서 인구비례 가장 많은 화승총을 찍어내는 나라가 됩니다.
애초에 조정에서 신립을 보낸이유가 미친듯이 밀고 올라오는 이 왜군들을 막기 위해서 였는데, 다른곳에 진을치고 싸웠다면.. 글쎄요. 그리고 일본군은 빠르게 진격해 조선왕을 잡기에 급급 했기때문에, 만약 신립이 장기전을 고집하고 전투를 했다면 왜군들은 우회해 올라갔을 거라고 보는게 맞죠. 왕이 잡히면 신립장군은 무사했을까요?
결론 : 신립은 훌륭한 소대장은 될순있어도 총사령관의 재목은 아니다.
1. 훈련되지 않은 미숙한 병력일 수록 유리한 지형이나 요새를 근거해서 방어전을 하는 법입니다. 개활지에서 야전이야 말로 잘 훈련된 병력으로 해야하는 전투지요. 신립의 선택은 되려 조선군이 일본군과 정면 대결해서 해볼만하다고 판단한거지 병사들이 오합지졸이라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탈영병이 속출했다는건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고 병사들의 거처가 하급 간부인 대장과 초관들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는 상황에서 탈영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였습니다.
2. 조선은 신립이 한양을 떠나기 전에 이미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주요 길목인 조령, 죽령, 추풍령에 각각 장수들을 파견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경상도 상황이 심각해지자 우선 한양으로 넘어오는 길목을 즉각 차단하고 나선거지요. 따라서 조령 방어를 한다고 죽령이나 추풍령으로 우회를 우려해야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신립에게 조령를 요청하게 된건 조령 방어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앞서 다급히 경상도로 내려가던 이일이 원래 계획대로 경상도의 병력을 소집하기 힘들어지자 조령 방어선의 병력을 차출해 상주로 끌어들였다가 상주 전투에서 날려먹은겁니다. 상주전투로 경상도에 얼마 남지않은 기병 전력과 조령 방어 병력까지 상실했고 신립이 충주에 당도할 무렵 조령 방어선은 붕괴된 상태였던겁니다. 그래서 이일이 신립의 병력으로 자신이 만들어버린 조령 방어선 구멍을 매우고자 했고 애시당초 기병전을 준비했던 신립은 갑작스런 산악전으로 전환을 거부하고 원래 계획대로 기병전을 고집했던겁니다.
처음 듣는 아주 보기 드문 수준 높은 해설과 영상들이네요
수고하셨어요 👍👍👍
조선은 몇천명 이상의 대군으로 전쟁을 해본적있는 지휘관이 없었음 신립이라 해봤자 북방에서 기마병 500정도 소규모 게릴라전 하던 장군임
전쟁에서 무능한 지휘관만큼 위험하고 무서운게 없다.
신립이 딱 멍청하고 부지런하면서 고집쎈 지휘관의 표본인데
군대에서 행보관도 그렇고 딱 저런 스타일 사관, 부사관이있음 ㅋㅋ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소블 같은 스타일
치욕적인 역사는 반드시 새겨들어야 된다.
여기서 중요한건 고려말 공민왕때 이후 수백년만의 첫 정규전이라는걸 감안해야됨 물론 신립의 과오는 부정할수 없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이래 대외적인 평화에 젖어있었던걸 잊지마시길
결국 본인의 무능함과 귀족들의 기대 때문에 진 전투가 아닐까 ... 보병없이 기병만으로 하려면 정말 넓은 평야 지대가 필요했을건데 그런 지역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적 1진과 교전해 시간을 끌어줄 탄탄한 보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질 수 밖에 없는 전투가 아니였을까.
조령, 죽령, 추풍령을 모두 방어해야만 하는 부담이 있었다면, 조령에 방어 진지를 틀고 적을 유인하하고 배후에서 기병으로 돌격하는 게 낫지는 않았을까요 물론 책상머리 상상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데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는 신립 장군은 어떤 생각이었는지 그게 진짜 미스테리네요~~
보병이 어제까지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라서 조령을 막았어도 전국시대를 거친 아시가루들에게 뚫렸을 것입니다
탄금대전투의 주전장은 충주달천평야
근데 평야는 전부 논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긴 트랙터 같은 농업용 장비 말고는 들어갈수없는곳인데
신립은 오로지 그냥 기마의 기동력만 믿고 무리하게 기병전술을 사용햇던것
물론 기병전술은 라인전을 자주벌이던 유럽전장에서도 미국독립전쟁에도
남북전쟁에도 심지어 6.25전쟁 초전에도 기병전술은 쓰였을 정도로 효과적인 전술이었습니다.
한국육군 독립기갑연대 제2기병대대
일명 장철부 기병대가 6.25전쟁때
어찌보면 기마병의 마지막을 장식한 기병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더군요
신립의 패한 원인은 최소한 지형에 맞는 전략을 써야 했는데 그냥 무리하게 밀어 붙인점
무리한 배수진이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이 탄금대 전투 이후로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왜란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화승총을 개발 양산에 들어가게 되고 군의 개편도 총병위주로 편제가 됩니다.
하지만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조선총병 들이 청나라 기병대인 팔기군에게 싹 갈려나가 버린것을 보면
무기의 차이 보다는 지형의 선택과 계절 날씨가 승패를 좌우 한다고 볼수있습니다.
이런거보면 조선은 잘한게 없는듯...
어쩌겄냐 저당시 군제가 저모양이고 신립이 아닌 어떤장수였어도 선택을같았다
그거 아심? 일본군도 배수진 썼었음. 신립이 심지어 충주성까지 있어서 더 유리했음. 그냥 신립이 전략적안목이 병크라 조선중앙군 최정예 보병이라는 예비대에 아무 오더도 안내리고 기병끌고 돌격했다가 병력을 4개로 쪼개어 배치한 고니시의 전술에 보병과 기병이 분리되어 물속으로 풍덩해버린거임.
와 아는척쩐다 방구석에서 ㅎㄷㄷ
비정규군급의 여진족기병과 싸울땐 기병돌격을 통한 기동전이 유리했는지 몰라도 전국시대를 통해 실전으로 다져진 정규군을 만나니 이게 먹힐리가 없는거죠. 옛날부터 우리가 잘해왔던 농성전을 하다가 적의 보급이 길어지면 후방을 치는 전술을 썼어야 함. 이런 가정도 웃긴것이 분명 정치적 논리가 개입돼서 신립이 장기전을 한다고 했으면 아마도 사약 받았을듯.
일본 군대는 이미 전국시대때 저런 기병상대를 질리도록 해봤을테니 그에맞는 대응전술도 빠싹했겠죠
당시 종사관 김여물도 문경새재에서 싸울것을 건의 했는데, 신립이 충주로 밀어 붙인것은 희대의 오판인것은 확실합니다. 참고로 김여물은 후백제 견훤의 심복 김총장군의 후손 입니다.
신립은 고려 태조왕건의 심복중의 심복 신숭겸장군의 후손이라죠ㄷㄷㄷ 후삼국의 라이벌이었던 고려장수와 후백제 장수의 후손들끼리 모여서 작전을 지휘했었다니 상당히 의미있긴 했네요.. 비록 무참히 패하긴 했지만
@@昴星-f1f 빛바랜 의미.
백성들이 아들들이 도륙되고 어육이 된 마당에 의미찾는 양반.. 참 의미찾기 좋아해
의미는 니가 가지고 백성들 아들들 살리고 일본 도적들도 아작내고 싶소만. 말이 다소 거칠었으나 넘 안타까운 역사라 울분이 ㅠ
????몇백년 전의 이야길 해봐야ㅋㅋㅋ
@@昴星-f1f 그렇군요.
신립도 싸우기 싫었을겁니다..하지만 무조건 막아야하고..기세로 몰아부칠려고 한거 같은데 실전경험이 많은 왜군들이라 어림도 없었죠..
신립은 여진족과의 소부대전투만 경험해본 자라서 대부대전술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었기에 이런 참패라고 하기에도 부끄런 전멸이라는 결과로 끝났다
가장 정확한 글을 드디어 보네요. 소부대전만 해봐서 평원에서 두 군대가 진을 치고 회전타입으로 싸우는 탄금대전투에서 이미 신립은 고니시에게 후달렸죠
@@Mollar2357 뭘 알고서나 말해;
괜히 지피지기라는말이 있는게 아님 적을 몰라도 너무 몰랐음
신립은 걍 돌격대장급 지휘관이 였다는 거지 ㅠㅠㅠㅠ 야전 사령관급은 아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danielhhlee 이기 현실이다. 니 머리가 장식인 이유지.
급조하여 병력을 꾸린 입장에서 지휘를 할 걸 생각하면, 말을 함부러 못 할 내용입니다만...
다만 개인적으로는 정보전이 안됨에 따른 전체적인 지휘의 실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 했는데, 적을 아는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했다고 보입니다.
특히나 그 점은 기병의 기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서 그 판단을 왜 했는지 역유추하여 엿볼 수 있다고 봅니다.
척후를 정말 치열하게 보내서 먼저 적군이 어떤 자들인지 집요하게 알아내는 노력이 선행하여 필요했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의 삼군사령관격인 사람이 용력만 믿고 너무 정보전을 허술히 했다는것이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전략적 이해도가 없는 거죠.
제대로된 개활지도 아닌데 쉽게 말해서 직접 가서 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 그냥 지도보고 판단.
이런 경우는 전사에서 무수히 많더라고요.
지형도 직접 가서 보지도 않고 지형적으로 기병에게 유리하다고 한 것 부터 망한거.
저도 그게 참 어이가 없네요. 문경세재를 포기한 이유가 결국 기병운영인데 간곳이 논밭이라니... 사전조사도 없었고 그곳에 주둔한지 얼마만에 왜군이 들어 닥친건지 알수는 없지만 논밭이 기병운영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다른곳으로 후퇴해서라도 다시 유리한 장소를 찾아야 할것인데 배수진치고 그냥 다 죽으니 웃음밖에 안나오네요
@@chriskim2958 다른 장수가왔어도 똑같아요 산에매복 했으면 고니시군 3분에1도 못죽였을거에요 이유는 보병은 잡군이었기에 이용가치가없고 기병뿐인데 지형파악을 할수없었어요 이일이 상주에서 어느정도버티지 못했기에 지형을 보기위해 군사들을 보냈더라면 몰살이었죠 왜군이 넘 빨리왔고 믿을건 기병이니 그렇게한거에요
@@jsyoon3350 그건 좀 개소리임. 신립이 끌고간 중앙군 병사들은 기병 보병 할거 없이 조선에서 최정예 훈련을 받은 말그대로 주력군임. 탄금대 전투 패배 후 조선군이 완전히 모든걸 내주고 후퇴한 이유도 전라도에서 올라와 용인에서 패하거나 임진강에서 패한 대부분은 오합지졸이었어도 신립이 끌고간 군대는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최정예에 장비도 잘 보급된 군대여서 였음. 그냥 문경세제를 버린거 부터가 좇된거임. 보병, 기병 최정예인데 신립의 가장 큰 문제는 수적으로도 전투 투입병이 일본군이 더 많았는데 보병과 기병이 제병합동을 펼치지 않고 예비대 보병들에게 아무런 오더도 내리지 않아 각개격파당하는 꼴을 만들어서임. 전쟁에서 최악이 기병과 보병대가 적에게 분리되어 각개격파당하는건데 고니시가 유능하게 했음
@@jsyoon3350 상주에서 북상하자마자 고니시가 바로 문경새재에 온게아니라 몇일동안 계속 정찰병보내면서 조선군이 없는지 확인했어요. 그 시간을 이용했다면 어느정도 병력 배치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user-ws6go2lb5z 짜피 신립은 여진족하고 싸우는장수 매복작전 펼쳐봤자 조총땜시
조선의 대규모 총력전에 무방비상태 200년간의 평화때문에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탄금대일대
이런 이야기 듣고 몰랐던 사실을 알고 그저 눈물이 흐르면서 감사합니다
"조선왕조오백년"이라는 80년대 드라마에 몇번째 시즌인지는 모르지만 시즌 "임진왜란" 편에 자세히 나온적이 있습니다.선봉부대인 고니시(소서행장) 왜군의 조총이 총병력 1만8천명중에 약 수천명인 조총부대가 있었습니다.드라마에서도 조선 육군들이 조총의 위력을 맛본뒤에 장수들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탈영과 도망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일본 전국시대에도 강력한 기병대를 가진 다케다 신켄의 기병대가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부대에 괴멸된 적도 있습니다.조총부대는 기병을 잡을때 말부터 먼저 쏘아서 말과 기병이 땅에 떨어지게 만드는 전술을 씁니다.신립장군은 기병대로 조총부대와 싸운것부터가 잘못이었고, 대포를 쓰는 수군이 아닌 이상 육군들끼리의 전투는 총과 화살의 싸움이니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습니다.그 당시의 조선 조정에서도 조총이 어떠한 무기인지 조차도 모르는 3정승과 6판서들이 선조와 도망갈 궁리만 짭니다.그러다가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의 조총부대가 구원을 와서 겨우 왜군의 조총부대와 싸움을 벌이나 승전보다 패전이 더 많았고, 결국 바다에서 강력한 대포를 가진 조선 수군들이 보급선을 끊어서 왜군이 후퇴를 한 것입니다.
3정승 6판서는 아니죠 유성룡
기병으로 스타가 된 장수였기에
기병에 과도하게 의존하다가
조총을 사옹하던 일본군에게 찢긴 안타까운 사례...
밀집대형으로 사격하는 조총병은 사실상 매우 긴 장창을 든 대기병용 팔랑크스 진형과 비슷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산발적으로 사격하는 궁병과 비슷하게 여기면 이런 참사가 벌어지는듯...
그에비해 이순신은 말도안되는 전력으로 승리한 최고의명장이라고해야하는게 맞는거같습니다.
신라로치면 장보고를 버리고
조선은 이순신을 버린...
hdmmxj as 왜 이승만이 언급? 적어도 이승만 대통령은 김홍일 장군을 내치지 않게 노력을 하고 내친후에는 한탄을 했지 선조는 그딴거 없음.
@@이동연-c6d 이승만은 선조보다ㅂㅅ
전략전술의 습득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전쟁을 겪은 국가와 전쟁을 겪지 못하고 소규모 국지전만 겪었던 국가의 전장이해도는 하늘과 땅의 차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립의 패배가 당연한것이고 이순신의 대승이 엄청난 것이지요
여진족과 너무나 많이 싸우다 스스로 여진족이 되어버린 케이스라봅니다 북방에서의 무공은 휼륭했지만 너무나 안타깝네요
가장 정확한 답변이십니다
여진족은 조선 명나라 화력부대를 기병으로 박살냈는데?
전술의 유연성 부재, 지리적 이점의 포기, 보병의 역량 부족... 이유를 찾자면 끝도 없겠으나 결국 '지휘관'.
멋도 모르는 군장 만나서
개죽음 했네.
나라가 망할려니
대가리가 없는 장수를
그냥 이름만 믿고 보내고
그놈은 또 지 맘대로 하고
나라가 망할 징조였지.
솔직히 신립을 무능하다고 보기에는 애매합니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에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고 정예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재밌는것 같아요
신립이 현실적으로 이기기 어려웠다 조령에서 매복을 한들 적이 우회할수도 있고 조령에선 기병을 못쓰니 탄금대로 간듯 한데
차라리 병력을 분할하여 한강 이남에서 버텼으면 최소한 전라도, 평안도 지원군을 기다릴시간은 벌었을텐데
이미 노부나가의 총병에 신겐의 기병대가 개발린 경험이 있는 데, 그 짓을 신립이 반복했으니 될리가 있나.....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
애초에 4m이상 창을 들고 싸우는 아시가루가 주력인 왜군에 기마로 돌격하는것은 자살하는것과 마찬가지인데.. 왜군은 주력은 저 창병이였음 물론 그 이후 대회전이 별로 없어서 많이 활약은 못하지만.. 신립이 일본군의 전투 방식을 몰랐던게 크져..
내 걔네 주력창병의 창길이 4m 안팍이에여... 그래서 무서운것임.. 원래 병자호란때도 이런 창병이 있었으면 개털리지 않았음...
@@dovob4806 징집병이어도 전쟁이 많으니깐요.
5미터짜리도 있고 더 긴 것도 있습니다.
창의 길이가 길어도 궁기병으로 궁시를 날리거나 빠른 기동력으로 보병의 측면을 노리면 되긴하지만 비가 와서 땅이 질퍽질퍽해서 기동력이 저하됐죠.
@@lucasromi83 맞습니다. 밀집된 청보병 특징상 중기병에게는 강할지 몰라도 궁기병에게는 매우 취약하죠 신립의 전술적 판단은 맞다고 봅니다. 단지 그 지역 지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루어 졌다는게 문제였죠
궁기병은 주변을 빙빙돌면서 싸우는건데..
무슨말을 하고싶은진 알겠지만 잘못짚고계신듯
신립과 비교되는게 정문부져. 기병운영의 극을 보여준 장군..
지형을 잘 모르니 그런거 아닐까 싶습니다.
신립의 주무대는 북방.. 남쪽과 지형과 환경이 많이 다르죠.
직접 살피지 못한것도 병사들이 워낙 탈영할 위험성이 심해서 그런가 싶습니다.
사전지형조사를 하러간걸 탈주로 의심받을수도 있었을테니..
실제로 동로마멸망때 용병대장이 부상을 입어서 들것에 실려간것뿐인데
그 실어간 병사들을 보고 패주해서 도주한다고 착각한 다른 병사들로 인해 진형이 흐트려져서 수습되지않아서 멸망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구체적으로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안강현-u2e 살라흐 앗딘이라는 분 계시는데 그분 글에 동로마 멸망편에 있어요
지휘관이 무지하면 병사를 다 죽임.상황에 따라 대처를 해야지 무지한 장수는 힘만 믿음
항상 역사적 사건을 평가할 때 말하는건데, 우리는 결과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판단하니 혀를 차니까 모든게 한심해보이지만 그때 당시 사람들은 아니라는거지.
신립이 뭐 돌격대장 정도가 적당하다 어쩌구 해도, 어찌됐든 조선 최고의 장수를 내려보낸 것이고 그 역시도 병법에 밝았겠지.
조총의 위력을 몰랐을 리도 없고, 쓸 수 있는 여러 전략 중에서 그나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것을 골랐는데 결과가 안 좋았던거라고 생각함. 조총부대와 직접 싸워본 적도 없었고, 궁기병을 제외하면 오합지졸에 가깝고, 수적열세까지.....사실 뭘 해도 졌을 전투라고 생각함.
신립이나 옛날 한반도 문관무관들이나 바보병신도 아니고 다 그 때는 합리적인 판단 한거임.
저는 개인적이지만 탄금대는 패할 확률이 거의 100%로 였다고 생각 합니다. 고니시 말고도 그와 비슷한 병력이 두갈래 더 있었으니까요. 여기 보다 왜군을 막을 가능성이 높았던 곳은 임진강 전투 였죠.
임란 단순 무식 장수 3인방 원균 신립 이일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는 임진-정유를 통틀어 가장 아쉬운 일임은 확실합니다.
(두번째는 원균의 칠천량 해전)
다만, 당시 조선의 군제인 '제승방략'과 이를 추진한 선조를 먼저 거론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국가기반산업은 농업인데 생산량은 낮고 위아랫놈 할거 없이 드럽게 많이 쳐먹어서
군대를 유지할 여력이 점점 없어졌습니다.
또한 선조는 개 쫌팽이에다 모반과 역모가 두려워 지방의 상시군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만들어진 군사편제가 '제승방략'인데 요는 평시엔 농사짓다 전시에 군사를 소집하고, 그 지휘는 중앙에서 내려보내는 장수로
한다는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상시군으로 소요되는 군비도 아끼고 지방에서 역모를 꾀할 여지도 없앨수 있는 윈윈인 제도인 셈이죠.
단점으로는.. 역모를 방지할수있다는거 빼곤 다 단점이고
그중의 백미가 탄금대 전투인바..
왜란이 벌어져 조정의 안위가 시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신립장군은 휘하 장수와 기마병을 데리고 조정으로 내려갔는데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이 뻥뻥 뚫리고 있으니 어서 가서 막으라고 합니다.
군사는??? 하고 물으니 저~기 충주로 가면 모여있다 합니다.
가서 봤더니 ㅅㅂ... 팔도에서 모인 오합지졸...
창은 들어본적도 없고, 활시위도 제대로 못당기는 명부속에만 있던 패잔병들이 잔뜩있었습니다.
니미.. 지휘관과 휘하 장수들의 신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여도 시원찮을판에.. 싸우다가 다 도망가게 생겼습니다.
방법이 없다. 이길수있는 전쟁이 아니다. 배수의 진으로
생전 보도못한 군세로 밀고 올라오는 왜놈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장렬히 전사하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런 진을 짜고 전투에 나섰으리라 생각 됩니다.
신립 장군은 조선의 엘리트 장군으로 전략 전술을 모르는 필부가 아닙니다.
단순히 깔게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조선의 제도와 상황을 보는 인식도 필요하다 생각 됩니다.
선조 이 개새끼야.
혹시 이 채널에 칠천량 해전도 있나요? 없으면 꼭한번 만들어주세요~!^^
활의 사거리는 조총보다 길다는 말이 많고 실제로 활터에서 200보가 넘는 거리를 쏘고 하는거 보면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활터에서 쓰이는 목전이나 유엽전은 살상능력이 사실상 없는 비전투용 습사용 화살이라는게 문제고 편전이나 장전같은 전투용 화살의 사거리는 80-120보 사이로 수조규식과 같은 조선 수군 교본이나 정조 시절 장용영 훈련 기록을 보면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길게 잡았음. 게다가 조선의 상마대의 마상궁시는 당연히 평지에서 안정된 환경에서 쏘는것 보다 사거리가 더 줄어들수 밖에 없지. 아마도 탄금대에서 조선군 기병들은 화살과 총탄을 유의미한 사거리 차이 없이 주고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함. 어찌되었건 조총은 열병기고 관통력과 제압능력에 있어서 활은 따위인 수준이고 전투용의 고장력궁은 끊임없이 사수의 힘이 들어가는 고단한 무구인데다 영상처럼 숙련자의 숙련도가 보장되어야 성능을 내는 무기라 간단하게 배우고 총을 들 힘만 있으면 되는 총과 비교할수가 없게되었음. 활의 나라 조선군도 임진왜란 이후도 아닌 명군 참전 이후 부터 편제를 고쳐가며 조총으로 도배하게 됨. 이것은 시대적인 변화로 활이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하고 하는건(몇가지 총의 한계로 우위적인 부분이 없는건 아니지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함. 몽골을 회전에서 꺾은 유명한 맘루크 기병대도, 몽골 기병의 직계후손인 바시키르 기병들도 그리고 우리 조선의 기병들도 전열보병과 총병들에게 녹아내렸지. 다만 너무 아쉬운건 이런 총은 분명 당시로서는 한계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고 이를 잘 활용할 전술과 교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보조병과가 받쳐 줘야 그 효용이 폭발적으로 터지는 병기인데 전장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유목민족과의 비대칭성을 바꿀수 있었던 병기인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약점만 드러낸체 청군에게 쓸려버린건 너무 아쉽다. 야전포병이 받쳐주지 못하고 총검도 없고 근대적이고 정교한 소규모 제대의 교리가 부족했던 조선군이 전열보병으로 진화된 형태가 아니라 조선판 테르시오인 삼수병 편제가 망가지며 조총병만 남은 형태라 장창병과 같은 보조 병과가 반드시 필요한데 쇄도하는 청군 기마병을 상대로 탄금대의 일본군 입장에서 싸웠는데 광교산이나 김화전투 같이 지형이 보조 병과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널직한 평야에서는 괴멸을 면치 못했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약점이 활에 치중된 불균형이었는데 그때는 총에 취해 총에 치중된 불균형을 만들어버림. 근접병과 육성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체화되지 않은 남의 무술이라 정조때까지 수없이 반복되는 노력이 결국 전부 흐지부지 됨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채널.
감사합니다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전략적오판이었기도 하지만 왜군의 전투력이 훨씬더 막강했다고봅니다
맞습니다.일본군 최소10년 전투경험이 있는 군대 였다.
전국시대동안 온갖 경험 다 겪은 베테랑 일본군과. 긴시간 평화로 인해 대규모 전쟁경험이 없는 조선군의 차이는 클수밖에 없죠. 그나마 이순신처럼 군사훈련이라도 열심히 하면 좋았을건데 전쟁을 안하니 군인들에게 노동을 시켰고 이때문에 군역을 기피하고 대리를 시키는 폐단이 발생하면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것도 큰 문제였던것 같네요.
군사력을 떠나 판정패하고 1라운드 KO당하는거하곤 다르죠.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중국서도 조선이 일본과 짜고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정도니까 말다했지
덕분에 더 큰 피해를 입었고 군사 정비,보충할 시간이 부족해 더 많은 희생과 자력으로 막을수 있는 기회를 날렸죠.
일본이 아무리 백병전이 능해도 장거리 원정인데다 보급에 상당한 애를 먹고 있었는데 똥개도 자기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초반 원균의 자진 수군 제거와 신립의 기이한 삽질만 안했어도 전쟁 내용이 달랐을거임
장수가 기본적인 지형의 장단점 조차 파악을 못하는데 무슨 명장인가?
그거파악하다간 왜놈한테 다죽음 그당시엔 발로뛰어야하는데 정찰병은 조총병의 딱좋은표적
그리고문경은 하이패스에요
@@jsyoon3350 뭔 개소리야. 정찰의 필요성은 이순신과 곽재우도 잘만 써먹었음. 심지어 고니시도 수십번의 정찰병을 문경세제에 보내고 나서도 조선군이 페이크 쓰는게 아닌가 끊임없이 정찰시킴.그냥 신립의 병크임
@@Mollar2357 그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거라말합니다
문경에서막았다라면은 결과적인 이야기입니다 고니시 1군만 막았다 처도 2군 가토군이 있었습니다 이래나 저래나 나가서 막아야했습니다
@@Mollar2357 정확히 말하면신립군이밖으로 나왔어야 어그로가 끌리기에 탄금대로 진을친거입니다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선택은 잘못된것은 맞지만 과연 당시 신립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에 대한 답을 내놓는 사람은 못 본거 같아요.
공감합니다 승전과 패전의 요인은 단순히 한 두개의 이유로 판가름되는건 아닌거 같습니다 신립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아쉬울 뿐이죠
임란 초기에 전력을 비교하자면 어디서 어떻게 붙었어도 이기기는 힘들었을 듯.
신립군대가 그때 7천명정도였는 데 문경새재에 배치했으면 적어도 고니시진로는 막았을거임
문경새재라면 어느정도 막았겠죠.
@@lucasromi83 최근 고증에 따르면 당시 문경새재 말고도 상경할 수 있는 길은 많았다고 합니다. 과거길도 여러 갈래였데요. 즉, 문경새재가 유일한 대안은 아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tothesun1875 그치만 일본군이 그냥 지나가면 일본군은 포위가 되겠죠
그래도 최소한 시간벌이는 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못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총으로 기병을물리치는방법을 제일먼저 알아서 전투에 다 이겨서 일본통일을한건데 그것도모르고 그런 일본군을 상대로 기병전술을 펼쳤으니 당연히 지게된걸일수도있지 그것도 뻘밭에서? 에휴 뻘짓
신립장군 나라에 충성하고 도망치지않고 용맹하게 싸우다 현장지휘 판단착오로 패하고 전사해서 안타깝네요
이미 회전급 국운을 건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수도로 직행하는 침략에 멸망했는데도 조선의 군 징집체제는 과거로 부터 교훈을 못얻었고 그놈의 내부반란이 무서워 서 대규모 침략시 멸망하기 쉬운체제로 스스로 만들었음. 이걸 임진왜란 병자호란때 취약점을 크게 통감하게 겪고도 바뀌지가 않았음.
신립이 당시 이끈 병력이 8천명의 수배에 달했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당시 이종장의 군대, 이일의 군대, 신립의 직할대, 한양 수비군 등.
1만 6천이었다는 말이있더군여
임용한 박사님 말씀하시길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싸웠지???
조선상황
1. 강점 : 기병, 수군
2. 약점 : 원균의 수군 자체 해산, 허술한 군역제도, 부족한 실전경험
신립의 실수
1. 기병 특수성 고려 평야전투고집 => 해당 평야는 조건이 다름(논,갈대,질척한 토지),
2. 배수진을 통해 실전경험없는 병력 통제
=> 조선군 대다수 도망가다 강물에서 사망
결과
1. 왜군의 한양 점령, 선조피난 + 갓순신의 등장
수군도일본이강했죠
근데 왜 이순신한테 한번도 못이기고 23전 연패함?
그런데 이일은 또 다시 도망가서 살았음. 평가가 엇갈린다고 하지만 두 번이나 도망간 장수는 군인으로서 최소한의 자격이 없음
도망가서 정유재란이 끝날때까지 1선에서 싸움
얍샵한 한국인의 저력 이일 ~~~~~♥
그래서 평가가 갈린다는 이유가 이거였군..
@@pablop6361 ㄴㄴ, 이일은 정유재란 전에 함경도로 발령나서 죽을때까지 일선에서 배제되어 함경도에 짱박힙니다. 임진년에 이일은 비겁한 도망자라는 조정의 인식이 박혔는데 이를 일소할만한 전공은 세우지도 못한체 각종 불미스러운 일로 구설수에 올라 평판이 최악으로 떨어집니다. 한마디로 전쟁에선 못써먹을 장수 감도 못되는 인간으로 취급당해 정유재란 전에 일선에서 배제되어 함경도로 발령났고, 이후 그곳에서 살인죄로 체포되어 압송되던 중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한땐 조선 최고의 명장 소리를 들었던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너무 초라한 최후였습니다.
@@agm1144 아 그래서 평양성 전투 이후엔 이렇다할 전공과 기록이 없는거였군요
진심 이순신장군님이 멱살잡고 캐리했구나;;;
나라구한 이순신 가사에 제일 적합
지금이라도 잊지말자!!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하던 장수임
넓은 들에서 기병을 운용하는데 특화된 장수임
무엇보다 조총의 무서움을 모름
사실 신립과 왜군의 상성이 안좋았다라 말할수도 있는게 북방서 여진상대로 무쌍찍던 신립이 왜군에 지지만 왜군 가토가 한번은 여진한태 시비털었다 여진한태 털렸다고하죠
미스테리라기보다는 병졸들이 처음 보는 철포의 굉음과 위력에 놀라 뿔뿔이 도망가서 조령을 사수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신립이 귀신에게 홀린 것 아닌가 하는 전설이 생겼죠
작전 조차 왜군에게 밀리는데... 뭐가 명장인지..ㅜㅜ
조령에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조령을 지키면 될
것 같은데 기병으론 조령에서
전투하는 것은 불가할 정도이니 아마 신립장군도 벌판에서 싸우면 기마군이
유리하다 판단한 것 아닌지
그러나 땅이 질척거리면 말은
발이 빠져 전투가 불가했을
것 이닐까?????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ㅠ-ㅠ
애시당초 선조가 생각이 있었으면 부산포 부근에 장성을 쌓고 육군과 수군을 집결시켜서 상륙을 못하게 했어야죠. 신립이야 왜군에 대해서 전혀 파악이 안되서 여진족한테 먹히던것을 그대로 한 것이구요. 다케다 가문이 하던것을 그대로 반복한 것입니다. 조총을 제대로 몰랐기때문에- 한번은 당했어야 할 결과입니다.
선조도 경상도에 성 더 쌓으려고 했음 근데 문제는 노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져서 민본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를 추진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해군이란 건 동 잡아먹는 하마이기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해군을 100% 상시 대기시킬 수가 없었음. 선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조선의 국가 체계가 왜군의 예봉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
사실 고니시 유키나가 자체도 만만한 장수는 아님
조선군이 숫자적으로도 적고 전날 비가 내려 말이 달리지 못하는 상황도 생각못하고 1차 조령방어선 2차 탄금대방어선을 차선책을 생각도 안하고 자기 기동대의 장점만 믿다가 하늘도 안도와줘서 4만전체가 골로 가버린 상황 .....이치웅치전쟁에서도 보듯이 고개를 잡아 전투하는게 훨씬 나은데 왜 저런 악수를 두었는지 어이가 없음
잘 정리했습니다. 통치자의 문제, 문치와 문관의 군사통제, 인사문제, 국방시스템의 문제를 빼고 이야기하면, 결국 신립이라는 사람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도 어찌할 수 업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의 공격속도가 매우 빨랐고 우리정부의 대응은 매우 늦었다. 경보가 울리고 준비해서 싸우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 싸움을 벌였다. 경상, 전라, 충청 삼도 순변사이니까 적을 막으려면 적어도 충주, 제천에서는 싸워야 한다. 차라리 신립을 그냥 총사령관이라고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굳이 충청도에서 결판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경상도의 문경과 조령으로 달려가거나(사실 거기에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뒤로 후퇴하여 경기도에서 싸웠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결국 자연적인 장애물인 한강방어선이 될 것이다. 싸울 준비를 갖출 시간적 여유가 되어 지연전을 벌여 전력을 모은 뒤 싸우거나 지구전을 벌였더라면 조선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죽령.조령의 끝내주는 계곡을 그냥 내줬을까?ㅋ.
전쟁 네임부터 바꿔야함........
아니 왕이 도망가고 명이 참전한 7년동안 전쟁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이게 난이되나????
역사학자들의 수구스러움.............. 일본 조선 7년전쟁이 맞는것임....................
전장에서 무능한 지휘관이 적보다 더 큰적이다는 격언의 딱떨어지는 표본이다.
저에게 최대 미스테리는 주력이 기병이고 보병은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이라 문경세재를 포기하고 충주평야로 갈 정도의 머리 굴림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도착하자마자 그곳이 논밭이고 말이 못뛴다는 걸 알았을텐데 그전에 사전조사는 안했는가 하는것과 못했다고 쳐도 그리 되면 기병의 장점이 사라지니 빨리 군대를 후퇴해서 기병을 활용할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배수진치고 모두 몰살... 정말로 신립은 쉴드 쳐주기 힘드네요.
병법에 대해 아는게 일도없는 장수임. 그냥 딱 들격대장이 최대 그릇인데~ 총사는 신립에게 너무큭 직분이었음
전투 전날 밤에 비가 왔다고 하잖아요. ( 진흑탕, 끈적한 지형에서 말이 잘 달릴수 없는건 당연한거고욤) 전력(병력, 전술 전략)도 열세인데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으니 질수밖에 없었던 싸움이죠. 사람들이 날씨를 많이들 간과 하시던데, 전쟁에서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 안해도 아실겁니다. 그리고 신립도 당시 여러 전황을 판단하여 탄금대에 진을 쳤을거라고 봅니다. 과연 "신립이 무능한 장수였을까?"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은 조선군에게는 너무나 불리했다라는 것 이죠.
@@happy-qh2tx 신립은 그냥 기병 닥돌 원툴 밖에 없는 장수였음.
임진왜란때의 조선장수들중에서는 거의 원균과 맞먹을 정도로 머리가 빠가인 수준임.
올..사나다 마루ㅋㅋ탄금대 전투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ㅎㅎㅎ그리고 마지막은 병자호란 남한산성ㅎㄷ...ㅋㅎ ,,
전세계에서 어떤 민족이던 약하고 스마트가 없는 민족은 매맞을것이고 그러므로 우리 위대한 민족으로 다시는 전역사의 길과 다른 승리의 길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당시 제승방략으로
끌어 모은 조선 육군의
전부였던 만 육천 섬멸당했고
그에 반해 왜군 150명을 죽였다면
역사와 후세는 그를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닌데.
이래서 전쟁이건 세상살이건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상대와의 조우가 가장 위험한 상태이기도 한데....
정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화력 전이라면 가능했겠지만 기마궁술병을 물가에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최악의 전술 특히나 탄금대 주변은 갈대 숲이 즐비한 진흙지대와 습지대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조선판 아쟁쿠르 전투네여
대비없이 전쟁이 발생하면 있는 군사들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지연술을 하면서 대규모 군들을 동원하거나 징집해서 군 전쟁태세를 갖추도록 준비할 시간을 벌어야 전쟁에 대비할수 있습니다. 있는 병력을 개활지에서 전투하게해서 전멸시키면 절대로 않됩니다
내가 알기론 신립이 원래 조령에 진을 쳤는데 도망가는 병사들이 많아서 어쩔수 없이 배수진을 치기에 적합한 탄금대로 진을 옮긴것으로 알고있다. 그리고 2만의 정예병과 급조한 8천의 오합지졸의 싸움인데 무슨 지휘관의 자질을 따질것인가? 조총소리만 들어도 도망 갈 판인데. 준비도 못한 조정의 안일함이 가장큰 문제였지.
헐 탄금대에서 싸운게 아니라 탄금대까지 밀려서 도망못가고 탄금대에서 죽었네
전 신립을 옹호해주고 싶네요. 너무 오래 지속된 평화로 당시 조선군은 실전 경험도 매우 적고 그나마도 북방 넓은 개활지에서 싸운 경험이었죠. 게다가 평소엔 농사 짓고 전쟁 발발 때 모이는 예비군 같은 형태라 영상대로 오합지졸이었을거구요. 매복작전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한양으로 가는 루트도 많아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군대 질이나 경험도 일본군이 압도적인데 상황 자체도 너무 불리했어요.
신이 보내주신 영웅 이순신 장군
목소리 크게 부탁드림
적재적소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봐요
이일은 싸워 보지도 못 하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간 것 아닙니까?
강아지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올린 글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덕분에 하나 배워서 갑니다.
이일이 참전한 상주전투 기록에는 조선군 전사자 8백, 일본군 전사자 1천 이라고 나옵니다,
조선 군에 대한 거의 공통적인 평가가 장교는 그럴저럭 질이 높고 우수했지만 이를 운용할 병사가 없었다라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죠. (그런데 당초 인구 문제가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
현대 뿔테군도 똑같 ㅋㅋ
신립입장에서는 한강은 이미 조정이 안됀다 했으니 조령으로 간다해도 8000이라는 병력을 정비할시간이 없다 탄금대가 가장 적합한다했지만 전투 당일 예상치 못한일이 일어난다 비가온다 이것만 봐도 이길거란 생각은 안하는것이 좋았죠
최소한 성을 지키고 훈련이 빈약한 오합지졸 보병으로 농성전은 시도를 했어야 하는데..보병에게 배수진을 친것이 문제..
저것보닌깐 항우 비슷한듯
방심해서 패한듯
평지에서 정면대결하면안될텐데요
유인책써서 산악지형 기습해야할텐데
그 무서운 여진족 애들도 쓸어버리던 신립. 200년 꿀빨던 시절.
이미 왜가 침공할거라고 예견되었 걸 개무시한 성리학의 나라 조선.
역사의 큰 물줄기에 희생된 신립이네요.
??? 신립도 개무능했던건데 뭔 소리 하는겨
@@xnclsien 참. 역사의 큰 물줄기라고 썼잖아. 거 참 길게 쓰기 싫어서 짧게 댓글달았구만 넌 왜 내 댓글에 와서 시비냐? 돌격앞으로!하는 소대장정도되는 신립이면 훌륭했는데, 사단장으로 쓰니 이 꼴났다 이말이야. 세조 왕위 찬탈이후 사병집단의 폐지 등. 그냥 그 시대에 신립을 최전선에 낼 수 밖에 없는 조선의 무능. 이미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왜군. 16만을 보낼 수 있었던 왜의 국력 등 큰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그렇다고. 너는 일일이 남의 댓글에 니 기준에 안맞으면 시비터는게 좋냐? 좋은 유튜브 동영상 서로 그냥 즐기자. 일일이 댓글로 시비걸지말고.
저는 신립이 희생됬다는 표현은 별루인거 같아요 ㅋㅋㅋ
당시 왜군은 해군보다 생각보다 육군이 더 발달된 집단이였습니다. 아무래도 전국시대라는 장대란 시기를 거친 후여서 왜란때 민사심리전에서 졌지만 그외 전술적으로는 월등한 편이였습니다.
애초 조총의 단점을 당연히 알고있었고 조총을 대규모 정규군이 운용할시에 대한 대처 역시 있었습니다.
조선은 당시 왜군이 저런 자산을 대규모로 운용할시에 대한 대처가 부족해서 참사가 벌어집니다.
조선은 왜란 이후 주변국 중이서 인구비례 가장 많은 화승총을 찍어내는 나라가 됩니다.
도대체 왜 그런장소에서 싸웠지
장고끝 악수일까요
여기서 신립이 무능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세히 보면 옹호 해줄 부분도 있다.
오합지졸에 전투라고는 해본적 없는 농민들 끌어다 막아야 하니 강을 등지는 배수의진을 칠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우물안에 개구리 장수가 우물밖에서 당했네
신립이 현장에 나가보지 않고 지도만 보고 작전을 짰을 겁니다..
신립이 활약했던 북방은 쌀농사를 짓지 않아서
탄금대가 질척질척한 논밭일 수도 있다는 점을
손쉽게 간과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립이 상대했던 여진족이 궁기병이였기에
조선군도 상대하기 좋게 대부분을 궁기병으로 전환했는데,
남쪽의 왜군에게는 조선 전기처럼 창기병이 적합했죠..
소리가 잘 안들립니다.
강을 건너지 말고 왜군의 도강을 막는 장기전으로 대처하던가,
문경에 궁수들을 배치하여 접근을 막은다음 충주성에서 주력군과 농성과
기마대를 이용한 보급로 차단ㆍ기습공격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임란 최대의 미스테리 라고 하잖음.
신립이 그당시 조선의 최고의 명장인데, 전략은 납득이 안되게 행동햇어니 미스터리지
신립이 어줍잖은 장군이엇어면 미스터리라고 하지 않지.
신립이 멍청이엿다면 명장이라고 하지도 않앗겟지.
그러니깐 미스터리지.
중대장도 족한 사람한테 군단장 시킨격
애초에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전쟁이었지
문종은 묘호와 다르게 군사력에 대해 지대한 공을 들엿다고 하네요 세종 후반 8년은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무방하답니다 군사에 관한한 세조가 문종보고 제갈량보다 뛰어나다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이민우-b9t9p 계유정난이 비극이죠.
일어는나죠 패하지않았죠
왜군은 기병부대를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신립은 자신의 기병부대를 너무 맹신하였다고 봅니다. 부하들 말대로 기병이나 보병을 조령이나 추풍령등에 배치하여 게릴라전으로 시간을 끌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애초에 조정에서 신립을 보낸이유가 미친듯이 밀고 올라오는 이 왜군들을 막기 위해서 였는데, 다른곳에 진을치고 싸웠다면.. 글쎄요. 그리고 일본군은 빠르게 진격해 조선왕을 잡기에 급급 했기때문에, 만약 신립이 장기전을 고집하고 전투를 했다면 왜군들은 우회해 올라갔을 거라고 보는게 맞죠. 왕이 잡히면 신립장군은 무사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