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세목차 및 추가토론 ** 00:00 1. 이란 지리 00:11 ┗① 산악 x 사막 벨트의 교차점 01:53 ┗② 이란 국경선 (동서남북) 02:04 ┗③ 주요 도시 3곳 02:34 ┗④ 호라산의 중요성★ 03:50 ┗⑤ 이란 아리아인의 기원★ 04:50 2. 이란 고대사 매핑 (조로아스터 4대 왕조) 05:20 ┗ 대칭의 제국들 (漢 & Iran) 07:02 3. 리디아 & 메디아 이야기 08:14 4. 키루스 대제 (키루스 2세) 10:00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대표 샤한샤 4명 11:00 ┗ 임모탈, 키루스 원통, 사트라프 12:15 5. 바빌론 유수와 제2 이사야 12:22 ┗ 바빌론 유수의 역사적 의미 13:22 ┗ 유일신 [숭배]에서 유일신 [신앙]으로★ 15:04 ┗ 이사야서 2부 (제2 이사야) 17:13 6. BCE 660 전후의 국제정세 17:58 요약 & 오늘의 Keep it ** @lucypark4416 님께서 주신 귀중한 댓글 **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페르시아 시대에 유대교 경전들을 집대성하여 명문화하고, 유일신 신앙을 정립한 대표자는 에스라로 보는 편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 작업을 에스라 혼자 했다고 평가되지는 않으며, 그 제자들과 함께 에스라 학파로 불리웁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 중간기 약 400년 동안 이 에스라 학파의 후대들이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이때 분파되어 나왔던 집단으로는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이 있습니다. 제2이사야라는 명칭은 신학자들이 이사야서의 시대 배경에 따라 시기적으로 두 번째 저자 공동체로 추측되는 학파를 명명한 것이며, 제2이사야 시기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과 신앙 정립을 역사적으로 이룬 대표 인물은 에스라와 그 제자들입니다 ** 킵잇 대댓글 ** 귀중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제가 읽었던 레퍼런스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 시기와 제 3 이사야의 최종 구성시기가 겹친다는 견해가 있었어서, 에스라보다는 그 앞쪽의 제2 이사야 시기에서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해당 부분에 대하여 조금더 깊이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 ** @lucypark4416 님께서 주신 대대댓글 ** 시기에 관하여 선생님께서 550년을 기준으로 제2이사야를 상정하신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강의의 목표가 역사상 기념비적 연도와 인물, 사건들의 기둥을 세움으로써 역사 이해에 대한 기초 작업을 원활하게 하시려는 데 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의 오차를 용인할 필요성이 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제2이사야를 에스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학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에스라의 생몰연대나 활동시기 등을 감안할 때 제3이사야의 시기와 더 어울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다만 포로기 이후 유대교 신앙의 재정립과 고토 귀환의 뚜렷한 업적을 세운 인물로서 에스라가 워낙 이견을 허하지 않는 대표자이기 때문에 에스라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제1이사야, 제2이사야, 제3이사야로 구분하는 것은 이사야에 대한 여러 해석 방법 중 하나로서, 아직 정립되지 않는 학설이라서 이 부분 또한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역사 이해의 백그라운드 형성을 목표로 하는 측면에서 선생님이 제2이사야를 기억하라고 하신 점에 저는 동의합니다. ** 킵잇 대대대댓글 ** 이토록 높으신 경지의 피드백을 받게 되다니.. 참으로 감사하고 전율이 흐릅니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께서 가르침 주신 내용을 반영하여 "BCE 550 전후라는 [시기]로서의 랜드마크 인물로는 제2 이사야를 기억하는 것이 [유리]하겠으나, 유대교 신앙의 재정립과 고토 귀환이라는 [업적]으로서의 랜드마크 인물로는 에스라를 기억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라는 언급을 하려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페르시아 시대에 유대교 경전들을 집대성하여 명문화하고, 유일신 신앙을 정립한 대표자는 에스라로 보는 편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 작업을 에스라 혼자 했다고 평가되지는 않으며, 그 제자들과 함께 에스라 학파로 불리웁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 중간기 약 400년 동안 이 에스라 학파의 후대들이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이때 분파되어 나왔던 집단으로는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이 있습니다. 제2이사야라는 명칭은 신학자들이 이사야서의 시대 배경에 따라 시기적으로 두 번째 저자 공동체로 추측되는 학파를 명명한 것이며, 제2이사야 시기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과 신앙 정립을 역사적으로 이룬 대표 인물은 에스라와 그 제자들입니다.
@@lucypark4416 귀중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제가 읽었던 레퍼런스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 시기와 제 3 이사야의 최종 구성시기가 겹친다는 견해가 있었어서, 에스라보다는 그 앞쪽의 제2 이사야 시기에서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해당 부분에 대하여 조금더 깊이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
시기에 관하여 선생님께서 550년을 기준으로 제2이사야를 상정하신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강의의 목표가 역사상 기념비적 연도와 인물, 사건들의 기둥을 세움으로써 역사 이해에 대한 기초 작업을 원활하게 하시려는 데 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의 오차를 용인할 필요성이 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제2이사야를 에스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학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에스라의 생몰연대나 활동시기 등을 감안할 때 제3이사야의 시기와 더 어울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다만 포로기 이후 유대교 신앙의 재정립과 고토 귀환의 뚜렷한 업적을 세운 인물로서 에스라가 워낙 이견을 허하지 않는 대표자이기 때문에 에스라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제1이사야, 제2이사야, 제3이사야로 구분하는 것은 이사야에 대한 여러 해석 방법 중 하나로서, 아직 정립되지 않는 학설이라서 이 부분 또한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역사 이해의 백그라운드 형성을 목표로 하는 측면에서 선생님이 제2이사야를 기억하라고 하신 점에 저는 동의합니다.
이번 영상도 역시 감동입니다. 강사님의 강의를 들으면 흐릿한 조각들이 아주 선명하게 틀이 잡히는 쾌감을 느낍니다.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혹시 업로드 시간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실까요. 토요일 오후 2시는 사람들이 유튜브를 잘 안 보거나 유튜브 피드에 새 영상이 뜨더라도 그냥 넘겨버리는 시간대입니다. 이토록 훌륭한 채널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려면 홍보에도 조금 관심을 기울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100만 구독자 될 것이니 영상 꾸준히 올려주시고 업로드 시간대 변경 고려해 주세요. 건강하시고 꼭 승리하세요. 전기욱
참! 재밌는 방송이네요! 덧붙이면 아브람과 사라는 수메르 우르 출신으로 이삭과 야곱도 배우자를 수메르 고향에서 대려 왔음. 그럼 검은머리 수메르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고고학적으론 마지막 간빙기때 아랄해 동쪽에 하와족 영역에 아담족이 정착 했다고 본다! 그곳은 사과와 포도의 원산지로 낙원과 노아의 대홍수 원형이 생긴 곳이다! 우리도 파미르에서 환웅천황께서 풍백우사와 무리 삼천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해서 곰족, 호족과 배달국을 세웠고 노아와 단군왕검은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대홍수를 만났는데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았고 단군은 치수사업으로 안전 했으며 중원지역은 물에 잠겼다는 기록!
이 영상 강의는 너무 한눈에 들어오는 지도 맵핑 구성 등으로 감동적으로 훌륭하시네요. 호라산주변 헷갈리기 쉬운데 짚어주시고, 나비모양도 너무 좋고, 기원0년 기점으로 한나라 파르티아, 또 다른 연표에서 춘추전국이랑 페르시아랑... 사실 이란의 역사가 굉장히 중추가 되는데도 서양중심 역사가 너무 무시했죠!!
안녕하세요? 사실 킵잇 세계사의 존재 이유가 그자체로 (문의주신 바를 만족하는) 거대한 팁이 되는 것이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동영상 ALL 정주행“ 재생목록을 순서대로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다만 영상 하나당 딱 하나의 강조사항만큼은 인위적으로라도 외워 가면서요 (수바아신 고중신, 헝 폰카 카 몽 만, 크미그미, 천천천 마쿠굽 등..)
너무 좋은 인사이트네요! 제가 감히 나무위키의 전문가분들의 글을 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는 언급 같습니다.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우선, 페르시아 (Persia)라는 이름 자체가, 이란인들 스스로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이란인을 부르던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어져서 현대 서구에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당시에는 [페르시아]라는 단어 혹은 그로부터 수반되는 [페르시안]이라는 정체성이 명확치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페르시아인" "이란인"의 정체성을 강조하여 역사 교육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도 꽤 후대 이후의 일로 알고 있고요 (대략 사파비 왕조 이후?) (2) 역사 정보가 충분히 누적된다거나, 자국 역사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성이 어느정도 허용되는 상황도 근세 이후의 일이라서..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 (대략 300~600년대)라면, 역사기록의 절대량과 접근성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구나 아케메네스와 사산조 사이에는 500년 가까운 파르티아 왕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사산 왕조 시대의 사람들 입장에서 아케메네스 역사에 대한 접근성 혹은 그로 인한 동질적 정체성...이 매우 흐리지 않았을까요? (아예 인지 자체를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을 듯합니다)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아주아주 후대에 (아마도 어느정도 정치적인 이유로) 생겨났을 확률이 높겠고... 그당시의 일반 주민들은 "나는 그냥 사산 왕조 소속이야"....도 아니고 ^^ 그냥 "저 멀리 궁전에 샤한샤께서 살고 계시고 (심지어 그 성씨가 사산인지도 모름), 나는 그냥 어느 마을/도시에 살고 있다" 정도로 생각하고 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인데, 고민해볼 기회를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
"최고의 신"이 있었는데, 그 후에 사람이 "유일한 나 자신"의 존재를 까달으면서, 그 이후의 인간에게 "내존재의 신"으로 바뀐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다툼을 부르는 것이므로,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라는 정도로 말하고 싶군요. 이를테면, 사람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 그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 때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를 통일한 키루스 페르시아의 역사가 필요했다, 라는 정도로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의 내면의 존재와 개인적 권리와 자유와 개성과 인권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비싼 값을 치르고 얻어진 것인가, 라고 생각해도 되나?... 싶네요. -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문득 이유는 알 수 업지만, 이수지의 왕간다 쏭이 떠오르는군요.~~
** 상세목차 및 추가토론 **
00:00 1. 이란 지리
00:11 ┗① 산악 x 사막 벨트의 교차점
01:53 ┗② 이란 국경선 (동서남북)
02:04 ┗③ 주요 도시 3곳
02:34 ┗④ 호라산의 중요성★
03:50 ┗⑤ 이란 아리아인의 기원★
04:50 2. 이란 고대사 매핑 (조로아스터 4대 왕조)
05:20 ┗ 대칭의 제국들 (漢 & Iran)
07:02 3. 리디아 & 메디아 이야기
08:14 4. 키루스 대제 (키루스 2세)
10:00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대표 샤한샤 4명
11:00 ┗ 임모탈, 키루스 원통, 사트라프
12:15 5. 바빌론 유수와 제2 이사야
12:22 ┗ 바빌론 유수의 역사적 의미
13:22 ┗ 유일신 [숭배]에서 유일신 [신앙]으로★
15:04 ┗ 이사야서 2부 (제2 이사야)
17:13 6. BCE 660 전후의 국제정세
17:58 요약 & 오늘의 Keep it
** @lucypark4416 님께서 주신 귀중한 댓글 **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페르시아 시대에 유대교 경전들을 집대성하여 명문화하고, 유일신 신앙을 정립한 대표자는 에스라로 보는 편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 작업을 에스라 혼자 했다고 평가되지는 않으며, 그 제자들과 함께 에스라 학파로 불리웁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 중간기 약 400년 동안 이 에스라 학파의 후대들이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이때 분파되어 나왔던 집단으로는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이 있습니다. 제2이사야라는 명칭은 신학자들이 이사야서의 시대 배경에 따라 시기적으로 두 번째 저자 공동체로 추측되는 학파를 명명한 것이며, 제2이사야 시기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과 신앙 정립을 역사적으로 이룬 대표 인물은 에스라와 그 제자들입니다
** 킵잇 대댓글 **
귀중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제가 읽었던 레퍼런스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 시기와 제 3 이사야의 최종 구성시기가 겹친다는 견해가 있었어서, 에스라보다는 그 앞쪽의 제2 이사야 시기에서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해당 부분에 대하여 조금더 깊이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
** @lucypark4416 님께서 주신 대대댓글 **
시기에 관하여 선생님께서 550년을 기준으로 제2이사야를 상정하신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강의의 목표가 역사상 기념비적 연도와 인물, 사건들의 기둥을 세움으로써 역사 이해에 대한 기초 작업을 원활하게 하시려는 데 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의 오차를 용인할 필요성이 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제2이사야를 에스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학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에스라의 생몰연대나 활동시기 등을 감안할 때 제3이사야의 시기와 더 어울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다만 포로기 이후 유대교 신앙의 재정립과 고토 귀환의 뚜렷한 업적을 세운 인물로서 에스라가 워낙 이견을 허하지 않는 대표자이기 때문에 에스라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제1이사야, 제2이사야, 제3이사야로 구분하는 것은 이사야에 대한 여러 해석 방법 중 하나로서, 아직 정립되지 않는 학설이라서 이 부분 또한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역사 이해의 백그라운드 형성을 목표로 하는 측면에서 선생님이 제2이사야를 기억하라고 하신 점에 저는 동의합니다.
** 킵잇 대대대댓글 **
이토록 높으신 경지의 피드백을 받게 되다니.. 참으로 감사하고 전율이 흐릅니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께서 가르침 주신 내용을 반영하여 "BCE 550 전후라는 [시기]로서의 랜드마크 인물로는 제2 이사야를 기억하는 것이 [유리]하겠으나, 유대교 신앙의 재정립과 고토 귀환이라는 [업적]으로서의 랜드마크 인물로는 에스라를 기억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라는 언급을 하려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
14:01 저는 여기가 너무 좋네요ㅠㅠㅠㅠ
@@Kimmy_Kim99 매번 귀중한 답신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좋아하는 포인트를 함께 좋아해 주시어 더욱 감사합니다
훌륭한 강의 감사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페르시아 시대에 유대교 경전들을 집대성하여 명문화하고, 유일신 신앙을 정립한 대표자는 에스라로 보는 편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 작업을 에스라 혼자 했다고 평가되지는 않으며, 그 제자들과 함께 에스라 학파로 불리웁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 중간기 약 400년 동안 이 에스라 학파의 후대들이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이때 분파되어 나왔던 집단으로는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이 있습니다. 제2이사야라는 명칭은 신학자들이 이사야서의 시대 배경에 따라 시기적으로 두 번째 저자 공동체로 추측되는 학파를 명명한 것이며, 제2이사야 시기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과 신앙 정립을 역사적으로 이룬 대표 인물은 에스라와 그 제자들입니다.
@@lucypark4416 귀중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제가 읽었던 레퍼런스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 시기와 제 3 이사야의 최종 구성시기가 겹친다는 견해가 있었어서, 에스라보다는 그 앞쪽의 제2 이사야 시기에서 유대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해당 부분에 대하여 조금더 깊이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
시기에 관하여 선생님께서 550년을 기준으로 제2이사야를 상정하신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강의의 목표가 역사상 기념비적 연도와 인물, 사건들의 기둥을 세움으로써 역사 이해에 대한 기초 작업을 원활하게 하시려는 데 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의 오차를 용인할 필요성이 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제2이사야를 에스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학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에스라의 생몰연대나 활동시기 등을 감안할 때 제3이사야의 시기와 더 어울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다만 포로기 이후 유대교 신앙의 재정립과 고토 귀환의 뚜렷한 업적을 세운 인물로서 에스라가 워낙 이견을 허하지 않는 대표자이기 때문에 에스라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제1이사야, 제2이사야, 제3이사야로 구분하는 것은 이사야에 대한 여러 해석 방법 중 하나로서, 아직 정립되지 않는 학설이라서 이 부분 또한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역사 이해의 백그라운드 형성을 목표로 하는 측면에서 선생님이 제2이사야를 기억하라고 하신 점에 저는 동의합니다.
헷갈리는 부분인데,반복해서 보고 익히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막 세계사에 관심 갖게 된 사람입니다. 이런 보물같은 강의들으며, 감탄과 탄성이 절로 나오네요. 음원 나오면 바로 구입 할게요
고맙습니다.👍
톰 홀랜드의 저서 “페르시아 전쟁” “이슬람 제국의 탄생” 접하는 중인데..진짜 도움이 많이 되는 영상이네요. 감사합니다.
이번 영상도 역시 감동입니다. 강사님의 강의를 들으면 흐릿한 조각들이 아주 선명하게 틀이 잡히는 쾌감을 느낍니다.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혹시 업로드 시간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실까요. 토요일 오후 2시는 사람들이 유튜브를 잘 안 보거나 유튜브 피드에 새 영상이 뜨더라도 그냥 넘겨버리는 시간대입니다. 이토록 훌륭한 채널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려면 홍보에도 조금 관심을 기울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100만 구독자 될 것이니 영상 꾸준히 올려주시고 업로드 시간대 변경 고려해 주세요. 건강하시고 꼭 승리하세요.
전기욱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희도 영상의 자체 만족도와 실제 조회수 간에 불일치 경향이 있어서.. (물론 세상의 컨텐츠가 다들 그렇긴 하겠지만), 내부 논의 후 정규 업로드 시간을 조정해 보는 안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귀중한 말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
기대됩니다. 역주행해야겠어요
우와! 대박입니다.
정말 인사이트 굉장하네요. 엄청난 두뇌입니다
앗 과찬이십니다 ㅜㅠ 감사합니다 💕❤️
역사 영상,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네요
감사하고 존경스럽습니다
6:55 조로아스터교라는 단어가 확 와닿네요. 고대 이란의 천년 종교~~!!!
너무 좋은 워딩입니다. 다음 영상 추가자막으로 반영하겠습니디
명강의 입니다
감사합니다 ~😅
대단히 고맙습니다.
역사 세계지리를 좋아했지만 이렇게 영상으로 다시 배우니 정말 즐겁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귀중한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꾸벅)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소중한 답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옆의 숫자는.. 일종의 후원.. 같은 개념인지요? 저희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 ^^;; 이또한 너무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억만금보다 더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Neomap102 네 저는 유투브를 통해 역사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강의는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산맥과 사막의 교차선을 그리시는거 보고 감동이였습니다
저도 댓글 옆에 후원금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소심하게 보내봤습니다^^
참! 재밌는 방송이네요!
덧붙이면 아브람과 사라는 수메르 우르 출신으로 이삭과 야곱도 배우자를 수메르 고향에서 대려 왔음.
그럼 검은머리 수메르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고고학적으론 마지막 간빙기때 아랄해 동쪽에 하와족 영역에 아담족이 정착 했다고 본다!
그곳은 사과와 포도의 원산지로
낙원과 노아의 대홍수 원형이 생긴 곳이다!
우리도 파미르에서 환웅천황께서 풍백우사와 무리 삼천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해서 곰족, 호족과 배달국을 세웠고 노아와 단군왕검은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대홍수를 만났는데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았고 단군은 치수사업으로 안전 했으며 중원지역은 물에 잠겼다는 기록!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자주 보면서 외워볼려합니다
빨리 감기로 생략된 내용도 많은 분들이 저처럼 보고 싶어 할꺼에요 볼 수있도록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생략된 부분은 추후 쇼츠 영상으로 따로 올리려 합니다 (꾸벅)
이 영상 강의는 너무 한눈에 들어오는 지도 맵핑 구성 등으로 감동적으로 훌륭하시네요.
호라산주변 헷갈리기 쉬운데 짚어주시고, 나비모양도 너무 좋고, 기원0년 기점으로 한나라 파르티아, 또 다른 연표에서 춘추전국이랑 페르시아랑...
사실 이란의 역사가 굉장히 중추가 되는데도 서양중심 역사가 너무 무시했죠!!
세계사 명강의 입니다. 감사합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꾸벅)
@@Neomap102 입에 바른게 아니고 세게사 강의 중에서 최고입니다!
소장각입니다
계속 유투브해주세요❤❤❤
격려 감사드립니다. BCE4000 수메르 정규 1편)부터 CE2020 코비드(정규 102편) 까지.. Ep1 to Ep102를 모두 완료하는 것이 목표입니다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
성경도 알고 세계사도 알고 냠냠 ~❤
여러나라를 동시에 정리하기가 넘 어려워요. 영상이나 팁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사실 킵잇 세계사의 존재 이유가 그자체로 (문의주신 바를 만족하는) 거대한 팁이 되는 것이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동영상 ALL 정주행“ 재생목록을 순서대로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다만 영상 하나당 딱 하나의 강조사항만큼은 인위적으로라도 외워 가면서요 (수바아신 고중신, 헝 폰카 카 몽 만, 크미그미, 천천천 마쿠굽 등..)
링크입니다. 세계사는 워낙 방대해서.. “유레카 모먼트”에 이르기까지 어느정도 시간투자와 노력은 필요할 듯합니다
ruclips.net/p/PL4s3ZEtyfN76k8C4YdFlxsiYwV7O4RiwF&si=u8XvYjf-CroNI0gP
더 짧게 말씀드리면..
어느 분야나 최고의 팁은
“Spend Time” 이라고..
제 분야의 강의에서 늘 강조하고는 있습니다 ^^;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이 아케메네스 왕조에 거의 무지했다는 나무위키발 정보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 좋은 인사이트네요! 제가 감히 나무위키의 전문가분들의 글을 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는 언급 같습니다.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우선, 페르시아 (Persia)라는 이름 자체가, 이란인들 스스로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이란인을 부르던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어져서 현대 서구에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당시에는 [페르시아]라는 단어 혹은 그로부터 수반되는 [페르시안]이라는 정체성이 명확치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페르시아인" "이란인"의 정체성을 강조하여 역사 교육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도 꽤 후대 이후의 일로 알고 있고요 (대략 사파비 왕조 이후?)
(2) 역사 정보가 충분히 누적된다거나, 자국 역사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성이 어느정도 허용되는 상황도 근세 이후의 일이라서..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 (대략 300~600년대)라면, 역사기록의 절대량과 접근성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구나 아케메네스와 사산조 사이에는 500년 가까운 파르티아 왕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사산 왕조 시대의 사람들 입장에서 아케메네스 역사에 대한 접근성 혹은 그로 인한 동질적 정체성...이 매우 흐리지 않았을까요? (아예 인지 자체를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을 듯합니다)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아주아주 후대에 (아마도 어느정도 정치적인 이유로) 생겨났을 확률이 높겠고... 그당시의 일반 주민들은 "나는 그냥 사산 왕조 소속이야"....도 아니고 ^^ 그냥 "저 멀리 궁전에 샤한샤께서 살고 계시고 (심지어 그 성씨가 사산인지도 모름), 나는 그냥 어느 마을/도시에 살고 있다" 정도로 생각하고 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인데, 고민해볼 기회를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
대단하다 !
대단한 열정과 인사이트입니다 ㅉㅉ
귀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이 영상을 보시는 모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생략된 리디아랑 메디아도 외전으로 다른 영상에서 풀로 풀어주세용 ㅠㅠ
송구합니다 ㅜㅠ 빨리감기한 영상들은 추후 다른 Ep 혹은 Sp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최고의 신"이 있었는데, 그 후에 사람이 "유일한 나 자신"의 존재를 까달으면서, 그 이후의 인간에게 "내존재의 신"으로 바뀐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다툼을 부르는 것이므로,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라는 정도로 말하고 싶군요.
이를테면, 사람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 그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 때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를 통일한 키루스 페르시아의 역사가 필요했다, 라는 정도로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의 내면의 존재와 개인적 권리와 자유와 개성과 인권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비싼 값을 치르고 얻어진 것인가, 라고 생각해도 되나?... 싶네요.
-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문득 이유는 알 수 업지만, 이수지의 왕간다 쏭이 떠오르는군요.~~
귀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인류사라는 흐름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생각보다 중요한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일본과 한국은 한민족인데 ㅎㅎㅎ
지리학 역사학 종교학을 망라하는게 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