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 학교 대도서관에서 이책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대출해 읽다가 정말 눈이 빠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독서 경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아마추어로서 책 내용을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발굴하고 논증해 나갈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모범사례라고 할만한 재미난 주장과 기법으로 가득찬 책이었습니다. 정말 실제 역사를 대상으로 한 긴장감 넘치는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성호 선생은 이후에도 관련 저작을 더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도 이와 연결된 후속 연구가 있었다는 것은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소심한 학자 나부랭이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대담한 연구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이렇게 소개해 주셔서 일반 독자로서 매우 반갑고 감사합니다.
고 김성호의 비류백제설을 계승 발전시킨 저서가 2004년에 나왔습니다. 밥그릇 카르텔 강단주류가 외면하니, '一道安士'라는 닉네임을 쓰던 재야사학자가 연구했습니다. (이분의 정체는 지구과학을 전공한 이공계 교수로 추정됩니다.) '삼한사의 재조명'이라는 책입니다. 아직 시중에서 판매중인 것으로 압니다. 고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가질 수 밖에 없는 숱한 의문들을 거의 한큐에 해결해버릴 정도의 명쾌한 책입니다. 물론 강단주류는 여전히 눈감고 귀막고 앵무새짓만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이주한 지역은 단군조선의 옛 서쪽 강역인 난하 일대로 보는 것이 옳은 듯 합니다 동명성왕의 다물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서방 공략에 나서 장남인 비류가 중국에 도읍하고 이후 온조가 한강 이남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22담로를 둔 해상왕국이 탄생했습니다
백제가 요서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산동반도에 발해관 신라관이 있었던 것도 중국이 아닌 우리 땅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금나라가 고구려 후손들이었던 것도 .... 이정기 역사도 고구려 유민의 역사 우리 역사입니다. 우리는 중국과 대등한 민족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역사가 왜곡됐고 가르치는지 ..... 친중 친일 정치인들에 밀려 연구조차 제대로 못하고.... 한글도 아리랑도 빼앗으려는 동북공정에 ..... 외면하는 정부가 답답합니다.
사실 고대 일본 열도사에도 두개의 뚜렷한 한반도 도래인과 연관된 왕조인 숭신왕조와 응신왕조의 대결사례에서도 보듯이... 물론 이는 백제계와 가야계 도래인으로 보는 견해이긴 합니다만... 여하튼 비류백제가 그간 알려진바와 같이 단순히 온조백제에 흡수 통합된 것이 아니라... 그 이남에 별도로 존재했었다는 견해는 나름 매우 흥미롭고 더욱 상세한 후속 연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요...
뭐 이런게 환빠니 뭐니 하면서 깔게 아니라 비류백제에 대한 주류사학의 연구가 미흡하고 모험을 안한건 사실이다 이렇게라도 연구한 것 중에 오버된건 바로 잡고 더많은 역사적 사료를 발견하고 연구해서 비류에대한 연구를 주류사학으로 끄러오려야한다 오죽하면 일왕이 자기들의 시조가 백제라고 할정도인데 이거에 대한 팩트체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추홀 문학산성에 가보니 그냥 약 500명이 주둔해 있기에도 버거운 좁은 산성이고, 그 곳에 마을이라고 형성되어 있어도 몇집 있지도 않더이다.. 무슨 그런곳이 비류백제 왕성인가 싶더군요. 우리가 모르는 역사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 싶네요.. 현재의 일본은 비류백제가 건너간 것이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살수대첩 장소가 일제 식민 교육 받은 한국교단의 학자들 주장대로 청천강이 아니라..살색의 누런물인 황하를 말하는것이 당연하다.지금도우즈벡등에선 황하를 살수라 부름. 또한 동이족의 영토를 따질때 한사군의 위치도 중국 중원부근(유주자사관리영역의 서쪽 끝)으로 해석해야한다.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지명이 현재 중국 중원에 그대로 남아있고 진짜 중요한것은 기마민족이 이동시에 수도등 지명도 함께 가지고 이동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요동과 요서가 현재의 위치가 아니고 중원 황하 한복판인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수 당의 싸움에 해전이 거의 없는것이다.(장수왕의 평양도 북경부근,고구려가 ) 말기에 당시 영토가 좁아져서 농성하는곳으로 쳐들어 올때나 수군이 온거고 , 이는 모두 동이(특히)의 선박 기술이다. 키르키즈스탄의 유목민 출신의 수. 당나라는 바다를 건너는 해양 기술이 없다.
살수가 황하라면, 살수에서 각각 하루길인 '압록수'와 '평양'은 각각 어디입니까? 또한 압록수 서쪽에 있어야할 '요동성'은 어디이고, 거기서 다시 '요수'를 건너면 있어야할 '무려라'는 어디입니까? 그냥 덮어놓고 국경을 북쪽으로 서쪽으로 밀어붙이면 다가 아닙니다. 이따위 수준이니 강단주류가 비웃는 겁니다.
비류백제의 내용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런데 여기ㅓ도 여전히 식민사학의 잔재를 발견할 수 었었다. 황해도를 대방고지라고 꾸며대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매우 완벽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강점이랄까 장점은 1. 백제의 국사서인 서기는 현존하지 않지만 일본의 국사서인 일본서기가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전반부가 동일하거나 유사한 기사가 많다는 점을 끄집어 낸 것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2.특히 삼국사기에도 김부식이 기술해놓은 해석 내용에 중국사서를 인용해 비류가 동이강국이 되었다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없다고 한 부분이나 광개토태왕 비문에 백잔과 이잔이라고 하는 돌림자가 같은 나라가 나오고 이중 백잔에 대해서눈 왕과 신하가 모두 항복한 내용이 나오지만 이잔의 경우에는 왕과 신하가 어찌되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 사실과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 응신천황이 등장하는 시기가 광개코태왕의 이잔(비류백제 추정) 토벌시기와 시간적으로 일치하는 시가가 됨을 밝혀낸 것도 큰 업적일 수 있다. 3. 그동안 우리나라 식민사학계가 그토록 외면해왔던 혹은 애써 외면하고자 햇던 중국사서-삼국사기-일본사서 등을 동시대 상황에 맞춰 동시대의 언어와 풍습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특히 지명이나, 인명, 관직명, 사건명의 실체를 밝히는데 있어서 이두식으로 표기된 내용이 많음에 주목하고 이를 당시의 발음대로, 의미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함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귀감이 될만하다. 이런 장점을 가진 역사서적류가 당시에도 꽤 힛트한 출판물이었는데. 이덕일 교수가 말하는 강단사학자들이라고 하는 부류들은 이상하게도 이에 대한 평가나 해석에 있어서 언급을 회피하거나 ,소설류라고 깎아내리거나 , 귓잔등으로 흘려넘기려고 하는 류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이책은 당시 일본 역사학계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는 평가들도 많았는데 말이다. 나는 40여년이란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 읽은 책의내용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일단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은 이책을 평가할 정도의 수준을 갖추지 못했다. 2. 우리나라 국사학계는 고대 문자표기방식이나 언어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나 식견이 ,,매우 낮다. 3. 심지어 아마추어인 나보다도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4..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이런 낮은 수준은 일본 국사학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재야사학이라고 하는 분들이 오히려 더 문헌해석, 고고학적해석, 언어에 대한 이해 ....유물과 유적에 대한 이해ㅔ와 해석이 더 다채롭고 체계적이다. 지금 이덕일 교수같은 분이나 윤내현 교수 같은 분들.... 이런 분들의 뒤를 잇는 젊은 후진들도 가끔 등장하는 것 같은데... 이정시간 지나면 이런 후진들조차 식민사학에 매몰되었는지 그 학문적 성과나 논문들이 케케묵은 것이거나 한탕주의식 아니면 말고류의 행태도 점점 증가하고 있는 국사학계의 현실이 매우 개탄스럽기만 하다.
백제가 두 개의 왕가 계통이 대립해온거는 사실...왕명만 분석해봐도 쉽게 유추가 되고... 심지어 일본 학자도 주장하는 비류계에 대해 좀더 열린 자세가 필요... 특히 비류와 온조, 소서노의 이동 경로를 유추해보면 매우 흥미로울듯... 당연 지명의 정확한 해석이 동반되어야함.. 황국 반도 사상이 아니라
오우치씨는 백제의 성왕(성명왕)의 제3 왕자인 琳聖太子의 후예라고 칭하고 있다. . 그러나 황성태자의 기록은 고대에는 없고, 오우치씨가 황성태자 후예를 자칭하는 것은 14세기 이후로 된다. 오우치씨는 조선과 무역을 하고 있어, 그것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백제의 자손이라고 자칭했을 뿐. 원래 800년이 지나 백제의 피를 유지할 리가 없다.
제가 많은 궁금증 가진 역사는 부여 가야 비류백제의 역사였어요 분명 두개의 나라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데도 비류백제는 너무 짧게 너무나 이상하게 사라졌지요. 부여는 고구려 백제의 뿌리이며 일본왕가의 궁극적 원뿌리입니다. 신라후기 왕가는 진지망인이라고 김일제의 후손 왕망의 동진 김씨입니다. 가야왕가는 신라시조 김일제의 후손중 하나고요. 일본왕가의 뿌리로 주몽과 비류백제를 섬기는것은 부여가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고조선시대부터 마한 진한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 이주민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대에 일본은 바다건너 잘알려진 지역입니다. 가야계가 처음 규슈에 나라를 열었고 이어 백제도 건너왔으며 곧이어 신라 고구려도 각자의 나라 세웠으니까요. 비류가 살아있을때 온조에 나라가 넘어갔다고 기록된 역사서도 고려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기록이므로 명확치않습니다. 그러므로 두개의 백제가 일정기간 존재했다가 하나로 합쳐진건 맞는듯합니다. 백제의 초기왕성중 하나인 한성의 위치 어디인지 알아내는게 비밀의 열쇄겠지요
태왕비에 임나가라를 지나 일본전체를 평정하고 안나인을 시켜 지키도록 한 몇해후에 왜가 만주에 나타나 왕검성(평양군)군사를 총동원시켜 대비하였다고 했는데 딱 맞아떨어지네요. 왜백제가 원래 자기터전이었던 만주땅에 무역과 군수조달을위해 되찾으려 노력했었네요. 일본서기에 찾아보면 나올듯합니다.
정확히는 온조백제가 비류백제 영역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비류계의 잔여세력이 온조계를 몰아내고 온조백제의 왕위까지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온조계의 마지막 왕은 구이신왕입니다. 추측컨대 아화왕 대 온조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오히려 비류계가 상대적으로 힘을 더 많이 보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래 '진왕'의 상징적 권위도 비류계의 것이었고요. 온조계는 해씨, 비류계는 여씨(부여씨)입니다. 온조계가 비록 왕위는 잃었으나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며, 백제 멸망기까지 '대성8족'의 하나로 남게 됩니다. 문주왕을 시해한 해구는 '국난기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역적'이 아니라,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했던 온조계의 후예입니다.
제 개인적인 추측이긴 합니다만... 만약 주장처럼 비류백제가 고구려 서쪽 지역인 요서지역 백제부를 두었다든지.. .하는 것이 팩트라면... 온조백제를 건너 뛰더라도 비류백제를 공략할 만한 필요성은 나름 가능성 있게 볼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고구려 서쪽에 세력을 뻗친 비류백제일테니까요... 뭐~ 정확한 것은 연구를 통해 밝혀야할 것으로 봅니다...
신은 신과 아닌자가 다름. 신은 임자하는 자로 온전한 시스템을 갖고 있어 온전한 시스템을 소유한자이다. 신녀와 같은 경우에는 카드를 공유하고 있어 온전한 시스템에서 일정한 시간마다 나오는 결과를 공유하는데 이는 담덕이 28이다 라고 하면 28번의 카드가 회전하면서 테이블 앞에 놓이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따라서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순서가 흐트러 질 수 있다.
비류백제 ====페르시아 온조백제 ===양자강이남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말레이시아 사바주, 필리핀 잠보앙가 마라위 , 브루나이 과거 왕족 귀족이 전부 백제인 이었음 지금도 저 지역에 가면 코리안과 소름끼치게 닮은 사람들 남아있음 이들은 백제 22담로 후손들임 필리핀 다바오에 가서 살아온 적이 있는데 다바오 다운타운 상권중 마라위 출신 이슬람인들이 장악한 거리가 있는데 자기들끼리 무섭게 뭉쳐서 상권을 장악하는데 그중에 코리안과 소름끼치게 닮음 사람이 꽤 있음 차이니스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고 조상 대대로 민다나오 섬 서남쪽에서 살아 왔다고 함 여기가 백제 22담로중 하나
광개토왕은 비류백제를 치기 전에 온조백제의 아화왕과 싸웠습니다. 국경에서 아주 치열하게 싸우죠. 광개토왕이 이기긴 했지만, 온조백제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근초고왕 이후로 온조백제는 백제연방 제일의 군사대국이었고, 백제의 군사력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하죠. 최대 강적인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니까. 반면 그 후방의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지동이전을 보면 비류백제(한)에는 성곽이 없었다고 할 지경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과감한 전략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쟁사를 좀 배웠다면 쉽게 예상되지 않나요? 그리고 역사는 정확히 그 예상대로 흘러갔고요. 왜 석연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정확한 기록일 것입니다. 여기서 '낙랑'은, 해당 기록에서 '낙랑 태수'가 등장하므로 한나라 낙랑군일 수밖에 없는데, 백제가 기원전 18년 처음 건국할때 자리잡았던 장소가 그 낙랑군의 서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여년 후 백제는 마한의 북쪽 땅으로 '遷國'합니다. 삼국사기는 정확히 '遷國'이라 했습니다. 의미심장한 표현이죠. 단지 도읍을 옆동네로 옮긴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류 백제가 성립하려면 고고학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의 1,2,3세기 묘제가 다릅니다. 일본은 한국과 다른 묘제들이 발견되며 심지어 한국보다 많고 규모도 큽니다. 1,2,3세기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당대 유물이 많은 나라를 건설했다고 하는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꿈인것이죠. 그랬으면 좋겟다.. 뭐 이런것.... 백제는 한국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못잡아서 말기까지 마한이 존재했는데.. 일본에 뭘 세운다는게 애초에 말이 되질 않고.. 더 심각한것은 왜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가서 인질 생활을 했는가 입니다. 일반적은로 인질이 더 약한 나라에 가서 잇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지요.. 호태왕 비문을 봐도 당대에 일본은 큰나라입니다. 삼국을 합쳐야 인구가 비슷햇을 정도입니다. 고대 사회에 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것입니다. 중국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도 못 풀어내면서.. 일본에 왕자들을 인질로 보낸 나라가 중국에 대륙 백제를 두엇다면... 소가 웃을일입니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세운 마한왕조는 서기 9년에 비류에게 멸망했고 이후 비류와 그 후손들이 마한왕(진왕)을 칭했습니다. 이건 '정복'이 아니라 '찬탈' 입니다. 왕건이 궁예를 찬탈하고 또 이성계가 왕씨를 찬탈한것과 같은 겁니다. 대략 4세기경부터는 대외적으로도 백제왕을 칭하면서, '마한'이라는 명칭은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백잔은 고구려가 백제를 낮추부르는 표현이고 백제 건국신화를보면 십제에서 시작해 비류세력을 흡수해 백제가 되었다고 하죠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실제 다른 나라 였다면 나라이름도 달랐을것이고 실제로 광개토대왕에게 멸망당할때까지 유지되었다고 하면 오랫동안 분단되어있을텐데 잔당들을 그대로 온조백제가 흡수한다? 이뿐만이아니라 우리가알고 있는 백제왕 계보는 무엇임?
웃기고 있네 진짜 소서노가 둘 아들 델고 지금에 대륙 항주 지역에 백제란 고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텃을 잡고 건국 한게 백제에 시초야 1대 소서노임 2대가 비류이고 동생인 온조가 운남.사천쪽에서 십제국 건국 했고 근데 소서노 백제가 멸망해 비류가 온조에게 몸을 의탁했고 온조는 십제국 형에게 넘기고 지금에 산둥지역으로 와 건국 했는데 그게 백제이고 훗날 십제국과 통합 소서노 백제국 영토.한반도.열도까지 다 장악 해 대백제국으로 된 거야 삼국사기는 신라에 여왕들 땜시 소서노 업적들 싸 그리 삭제 해 버렸어 비류가 열도로 넘어가 비류 백제를 건국 하고 오사카에 큰 왕릉이 있는데 100% 비류릉이야 삼국지에서 관우.장비가 디진곳이 뱩제성이다 한반도는 그냥 백제국에 일부분 일뿐이야 백제 땜시 아가리에 밥 쳐 먹는겨 고구려는 옥수수.보리 신라는 밀이 주식이였다 쌀은 백제 땜시 쳐 먹는거다 십제국도 모르는게 백제사 타령인데?
일본의 독특하고 찬란한 문화가 우리 영향을 받았다고 억울해 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렇게 따지면 백제도 당시 당나라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억울해 할 필요없음. 국뽕유튜버중 일본의 뿌리가 반도라는 것이 정설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디까지나 아주 많은 가설중 하나일 뿐임. 또한 만약 백제의 사람들이 건너가서 지금의 일본문화를 만들었다 한들, 현재 우리는 지명이며 사람이름까지 중국식이고 일본은 한자문화권에서 유일하게 독특하고 고유한 그들만의 문화를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누가 백제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지? 백제땅이 반도에 있다고? 그렇게 따지면 고구려 발해는 현재 중국땅에 있다. 후진국에서 선진국 순으로(중국-한국-일본) 후진국은 선진국과 엮이고 싶어하고 반대로 선진국은 후진국과 엮이기 싫어함. 중국이 자신들이 한국의 뿌리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이에 치를떨듯이 한국은 일본의 뿌리가 자기라고 주장하고 일본은 치를 떨고있음. 자신이 믿고 싶은 답을 정해놓고 보면 그것밖에 안보이는 법이기에 항상 경계해야 함.
거의 20년 전 학교 대도서관에서 이책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대출해 읽다가 정말 눈이 빠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독서 경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아마추어로서 책 내용을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발굴하고 논증해 나갈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모범사례라고 할만한 재미난 주장과 기법으로 가득찬 책이었습니다. 정말 실제 역사를 대상으로 한 긴장감 넘치는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성호 선생은 이후에도 관련 저작을 더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도 이와 연결된 후속 연구가 있었다는 것은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소심한 학자 나부랭이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대담한 연구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이렇게 소개해 주셔서 일반 독자로서 매우 반갑고 감사합니다.
이덕일tv
비류백제의 패망은 박창화님의 필사본 고구려사략에 자세히 나옵니다 비밀끝
그거 소설책입니다
@@아라구나 식민사학에 반대되면 모두 소설이라고 하지요.삼국사는 진서인가요.?
그것도 소설이라고 하시겠지요.?
충남 웅진에는.비류백제가 설립된 적이 없어요. 산동선에서 찾아야지요.
이분 주장이 맞네 여러가지 의문이 풀리는듯하내요
고 김성호의 비류백제설을 계승 발전시킨 저서가 2004년에 나왔습니다.
밥그릇 카르텔 강단주류가 외면하니, '一道安士'라는 닉네임을 쓰던 재야사학자가 연구했습니다.
(이분의 정체는 지구과학을 전공한 이공계 교수로 추정됩니다.)
'삼한사의 재조명'이라는 책입니다. 아직 시중에서 판매중인 것으로 압니다.
고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가질 수 밖에 없는 숱한 의문들을 거의 한큐에 해결해버릴 정도의 명쾌한 책입니다.
물론 강단주류는 여전히 눈감고 귀막고 앵무새짓만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삼한사의 재조명'도 삼한에 대한 전개과정이 논리적인 비약이 많음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이주한 지역은
단군조선의 옛 서쪽 강역인 난하 일대로 보는 것이 옳은 듯 합니다
동명성왕의 다물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서방 공략에 나서
장남인 비류가 중국에 도읍하고
이후 온조가 한강 이남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22담로를 둔 해상왕국이 탄생했습니다
대박 자료!!
돌아가신 저희 외할아버지께서 쓰셨던 책입니다 이렇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백제가 요서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산동반도에 발해관 신라관이 있었던 것도 중국이 아닌 우리 땅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금나라가 고구려 후손들이었던 것도 .... 이정기 역사도 고구려 유민의 역사 우리 역사입니다. 우리는 중국과 대등한 민족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역사가 왜곡됐고 가르치는지 ..... 친중 친일 정치인들에 밀려 연구조차 제대로 못하고.... 한글도 아리랑도 빼앗으려는 동북공정에 ..... 외면하는 정부가 답답합니다.
금나라는 이름부터 신라를 계승했다 하고있는걸요?
힘이 약해서 방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맞는거 같습니다겟죠
아무런 증거가 없음
물론 동이족이라는 세력이 그쪽에 살았다는 증거는 많지만
중국의 산둥반도 근처에는 “~제”로 끝나는 도시들이 모여있죠. 뭐뭐제 뭐제 뭐제 수십개가 모여 있는 걸로 봐서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십제라는 이름의 근거가 될수 있음.
산둥반도에 제나라라고 나라가 있었음
리씨조선이 1881년까지 북미대륙
천자국이었다가
유대자본 세력에게 망하고
1890년이후 한반도로 역사가가
이식됨
유투브검색
“””아메리카 대조선
맞아여
산동반도의 제나라가 바로 백제 맞아여
그후 남제 북제 로 이어지죠~~
아마도 백제 본국은 산동반도에 있었던거 같아요
서울대천문학과 박창범교수도 증언하죠..
산동반도 쯤에 백제가 있었다
전라도와 일본열도의 백제는 분국내지 식민지 정도 같음..
@@허수-r5i 마자요
@@amirhanabatamurmahkto937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류가 건너왔다는 패수와 대수는 지금의 호타하를 말하는 것으로 한수인 황하강 북쪽 제남시에 수도를 정했던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이책 20년전에 서점에서 제가 처음에 샀던 역사책입니다. 참 신기한 이론이였는데..^^ 지금도 책장에 있는 책입니다. 이잔국 백잔국 신선한 충격이였죠.
하늘의 아들 이잔국은 벌 잔국 그러니까 잔국을 토벌했다는걸 오독한거라고 김성호 본인이 스스로 시인함
@@yoshitsune1184 역사의 아리러니. 벌잔을 이잔으로 읽었으나,
다른 (이)잔과 백잔
잔(비류) 과 백잔(온조) 를 밝힌 케이스
@@johnk2149 벌잔임. 이잔 아님.
@@yoshitsune1184 벌잔을 이잔으로 읽었으나. (잘못 읽었으나)...
다른 백제를 발견함 ..그래서 역사의 아리러니..
@@johnk2149 잔국. 백잔. 그럼 이 잔국을 백제의 상국이 마한의 진왕의 진국(목지국)으로 해석해도 되는걸 굳이 자살한 수백년전의 비류로 보는건 그저 상상임.
재미 있는 주장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이책의 증보판 시중에서 구할 수 있어서 며칠전 구매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구다라 망명정권(김성호, 기파랑)
공부 좀 해보겠습니다. 머릿말 부터가 범상한 내용이 아닐 듯 하군요 ..
잘 봤습니다.
삼국시대........부여,낙랑,동예,옥저,마한,6가야 등....여러나라가 있었는데...4국이란말도..말이안됩니다...10국시대가 맞는표현인듯하네요...
윤내현 교수같은 분은 그래서 열국시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삼국이 그 국가들을 멸망시킨거죠
@@이나송-k2z 그 단계는 성숙의 단계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열국이 맞음
@@krauskim7662 222
렬국이라 합니다.
사실 고대 일본 열도사에도 두개의 뚜렷한 한반도 도래인과 연관된 왕조인 숭신왕조와 응신왕조의 대결사례에서도 보듯이... 물론 이는 백제계와 가야계 도래인으로 보는 견해이긴 합니다만... 여하튼 비류백제가 그간 알려진바와 같이 단순히 온조백제에 흡수 통합된 것이 아니라... 그 이남에 별도로 존재했었다는 견해는 나름 매우 흥미롭고 더욱 상세한 후속 연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요...
뭐 이런게 환빠니 뭐니 하면서 깔게 아니라 비류백제에 대한 주류사학의 연구가 미흡하고 모험을 안한건 사실이다 이렇게라도 연구한 것 중에 오버된건 바로 잡고 더많은 역사적 사료를 발견하고 연구해서 비류에대한 연구를 주류사학으로 끄러오려야한다 오죽하면 일왕이 자기들의 시조가 백제라고 할정도인데 이거에 대한 팩트체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환빠 운운하는 놈들은 그냥 역알못.
환단고기 이야기는 1도 안 꺼냈는데 교과서와 좀 다르면 개가 짖듯이 조건반사적으로 환빠 드립이 튀어나오는 잉여들 ㅎㅎ
미추홀 문학산성에 가보니 그냥 약 500명이 주둔해 있기에도 버거운 좁은 산성이고, 그 곳에 마을이라고 형성되어 있어도 몇집 있지도 않더이다.. 무슨 그런곳이 비류백제 왕성인가 싶더군요. 우리가 모르는 역사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 싶네요.. 현재의 일본은 비류백제가 건너간 것이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인천의미추홀구는엉터리지명입니다.몇년젼 제가구청가서항의한바있음.😊
이 논조와 같은 최근 주장은 김상의 (삼한사의 재조명) 이다. 보다 논리적인 접근방식을 갖추고 있다.
김성호의 계승자죠. 단지 비류백제라는 주장을 넘어서 고대사의 의문점들을 한큐에 꿰어버리는 엄청난 책입니다.
강단주류는 십수년째 꿀 먹은 벙어리^^
비류백제가 사실이냐기 보다 백제 건국 과정 자체가 실은 비류가 주도한 느낌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결정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이 심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한일이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국임을 증거하니까요.
사실 살수대첩 장소가 일제 식민 교육 받은 한국교단의 학자들 주장대로 청천강이 아니라..살색의 누런물인 황하를 말하는것이 당연하다.지금도우즈벡등에선 황하를 살수라 부름.
또한 동이족의 영토를 따질때 한사군의 위치도 중국 중원부근(유주자사관리영역의 서쪽 끝)으로 해석해야한다.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지명이 현재 중국 중원에 그대로 남아있고
진짜 중요한것은 기마민족이 이동시에 수도등 지명도 함께 가지고 이동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요동과 요서가 현재의 위치가 아니고 중원 황하 한복판인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수 당의 싸움에 해전이 거의 없는것이다.(장수왕의 평양도 북경부근,고구려가 ) 말기에 당시 영토가 좁아져서 농성하는곳으로 쳐들어 올때나 수군이 온거고 ,
이는 모두 동이(특히)의 선박 기술이다. 키르키즈스탄의 유목민 출신의 수. 당나라는 바다를 건너는 해양 기술이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어딘지 정확하지 않다고 하다가 요즘 교과서에서는 그냥 당연스레 청천강이다라고 설명하더라구요;;; 답답합니다
고려 국경도 잘못 기술되고 있어요
서쪽으로는 난하가 국경이라구 요사 금사에 나온다는데여~~
백제는 산동반도에서 이주해 나간 유민들이 개척한 땅들의 통칭으로 한중일에 모두 존재 합니다 . 백제는 물 건너간 제나라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 입니다 . 영상증거 46분 ruclips.net/video/lgPeTovH1fI/видео.html
살수가 황하라면, 살수에서 각각 하루길인 '압록수'와 '평양'은 각각 어디입니까?
또한 압록수 서쪽에 있어야할 '요동성'은 어디이고,
거기서 다시 '요수'를 건너면 있어야할 '무려라'는 어디입니까?
그냥 덮어놓고 국경을 북쪽으로 서쪽으로 밀어붙이면 다가 아닙니다.
이따위 수준이니 강단주류가 비웃는 겁니다.
@@선물-n7n 그 뜻인족 주나라 동쪽땅은 모두 우리꺼 라는 북한 사학계의 논리 입니다 . 환빠의 또 다른 변종 이지요.
김성호 박사 논문이 제일 정확하구만...식민 사학자들의 친일, 친중 역사보다 정확하구만...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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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광개토왕비 396년 토벌내용과 연관된 비류백제 설.
백잔국, 잔국
9:30
9:45
9:55 일본학자 견해 :
비류백제 일본 설립
비류백제의 내용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런데 여기ㅓ도 여전히 식민사학의 잔재를 발견할 수 었었다.
황해도를 대방고지라고 꾸며대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매우 완벽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강점이랄까 장점은
1. 백제의 국사서인 서기는 현존하지 않지만
일본의 국사서인 일본서기가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전반부가
동일하거나 유사한 기사가 많다는 점을 끄집어 낸 것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2.특히 삼국사기에도 김부식이 기술해놓은 해석 내용에
중국사서를 인용해
비류가 동이강국이 되었다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없다고 한 부분이나
광개토태왕 비문에
백잔과 이잔이라고 하는 돌림자가 같은 나라가 나오고
이중 백잔에 대해서눈 왕과 신하가 모두 항복한 내용이 나오지만
이잔의 경우에는 왕과 신하가 어찌되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 사실과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
응신천황이 등장하는 시기가 광개코태왕의 이잔(비류백제 추정) 토벌시기와
시간적으로 일치하는 시가가 됨을 밝혀낸 것도 큰 업적일 수 있다.
3. 그동안 우리나라 식민사학계가 그토록 외면해왔던 혹은 애써 외면하고자 햇던
중국사서-삼국사기-일본사서 등을 동시대 상황에 맞춰
동시대의 언어와 풍습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특히 지명이나, 인명, 관직명, 사건명의 실체를 밝히는데 있어서
이두식으로 표기된 내용이 많음에 주목하고 이를 당시의 발음대로, 의미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함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귀감이 될만하다.
이런 장점을 가진 역사서적류가 당시에도 꽤 힛트한 출판물이었는데.
이덕일 교수가 말하는 강단사학자들이라고 하는 부류들은
이상하게도 이에 대한 평가나 해석에 있어서
언급을 회피하거나 ,소설류라고 깎아내리거나 ,
귓잔등으로 흘려넘기려고 하는 류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이책은 당시 일본 역사학계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는 평가들도
많았는데 말이다.
나는 40여년이란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 읽은 책의내용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일단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은 이책을 평가할 정도의 수준을 갖추지 못했다.
2. 우리나라 국사학계는 고대 문자표기방식이나 언어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나 식견이
,,매우 낮다.
3. 심지어 아마추어인 나보다도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4..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이런 낮은 수준은 일본 국사학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재야사학이라고 하는 분들이 오히려 더 문헌해석, 고고학적해석, 언어에 대한 이해
....유물과 유적에 대한 이해ㅔ와 해석이 더 다채롭고 체계적이다.
지금 이덕일 교수같은 분이나 윤내현 교수 같은 분들....
이런 분들의 뒤를 잇는 젊은 후진들도 가끔 등장하는 것 같은데...
이정시간 지나면 이런 후진들조차 식민사학에 매몰되었는지
그 학문적 성과나 논문들이 케케묵은 것이거나 한탕주의식 아니면 말고류의
행태도 점점 증가하고 있는 국사학계의 현실이 매우 개탄스럽기만 하다.
훌륭한 논평입니다.
백제가 두 개의 왕가 계통이 대립해온거는
사실...왕명만 분석해봐도 쉽게 유추가 되고...
심지어 일본 학자도 주장하는 비류계에 대해
좀더 열린 자세가 필요...
특히 비류와 온조, 소서노의 이동 경로를 유추해보면 매우 흥미로울듯...
당연 지명의 정확한 해석이 동반되어야함..
황국 반도 사상이 아니라
비류백제는 중동지역 장악한 페르시아임
비류==>피르 ==>페르 +시아
구글에 과거 페르시아 궁정삽화 검색해
보세요
왕족 귀족 군대 모두 순혈 코리안 얼굴임
온조백제는 양자강 이남과
동남아시아 전체
일본 최고의 쇼군 오우치 가문이 백제에서 건너간백제왕의 태자의 후손인건 일본에서도 인정했죠. 그 54대손이 무령왕릉에 얼마전 방문해서 눈물 흘리며 제를 올리고 갔죠. 일본 왕가는 백제의 후손인건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인정하는 사실이죠
김성호씨 이상으로 일본인들이 자세히 연구해 놓은 관련 성과들이 많지요.
한국인들은 거의 모르지만
일본인들 중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하지만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 입니다.
한국에 비유하자면 '천안함 사건'과 비슷하달까...
일본 왕가는 가야계이고 모계에 백제계가 섞인겁니다
오우치씨는 백제의 성왕(성명왕)의 제3 왕자인 琳聖太子의 후예라고 칭하고 있다. . 그러나 황성태자의 기록은 고대에는 없고, 오우치씨가 황성태자 후예를 자칭하는 것은 14세기 이후로 된다. 오우치씨는 조선과 무역을 하고 있어, 그것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백제의 자손이라고 자칭했을 뿐. 원래 800년이 지나 백제의 피를 유지할 리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야가 있으니 오국시대라고 해야겠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다 하는데 그걸 충남일대라 주장하다니ㅋㅋㅋ 충남 위에 패수가 있나.
제가 많은 궁금증 가진 역사는 부여 가야 비류백제의 역사였어요
분명 두개의 나라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데도 비류백제는 너무 짧게 너무나 이상하게 사라졌지요.
부여는 고구려 백제의 뿌리이며 일본왕가의 궁극적 원뿌리입니다.
신라후기 왕가는 진지망인이라고 김일제의 후손 왕망의 동진 김씨입니다.
가야왕가는 신라시조 김일제의 후손중 하나고요.
일본왕가의 뿌리로 주몽과 비류백제를 섬기는것은 부여가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고조선시대부터 마한 진한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 이주민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대에 일본은 바다건너 잘알려진 지역입니다.
가야계가 처음 규슈에 나라를 열었고 이어 백제도 건너왔으며 곧이어 신라 고구려도 각자의 나라 세웠으니까요.
비류가 살아있을때 온조에 나라가 넘어갔다고 기록된 역사서도 고려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기록이므로 명확치않습니다.
그러므로 두개의 백제가 일정기간 존재했다가 하나로 합쳐진건 맞는듯합니다.
백제의 초기왕성중 하나인 한성의 위치 어디인지 알아내는게 비밀의 열쇄겠지요
인천지역에 비류백제가 존재하엿다는 설이 있어요 온조는 하남지역에 터를 잡앗고 이후 척박한 지역에 자리잡은 비류세력이 그곳을 버리고 온조쪽으로 흡수되엇다는 설이 현재 서울 강동구에 전해오고 있는 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고할수있는 왕조가 근원이 한국..한국의 위대함을 널리 퍼트려야하는데 우리나라 사학계는 왜 축소시키고 감추려들까
일본서기의 도모백제와 관련이 있는건가요?
비류 백제는 요서에다가 차리고망했다 그게 대륙백제이다
태왕비에 임나가라를 지나 일본전체를 평정하고 안나인을 시켜 지키도록 한 몇해후에 왜가 만주에 나타나 왕검성(평양군)군사를 총동원시켜 대비하였다고 했는데 딱 맞아떨어지네요.
왜백제가 원래 자기터전이었던 만주땅에 무역과 군수조달을위해 되찾으려 노력했었네요.
일본서기에 찾아보면 나올듯합니다.
그런식면가야포함하면 5국아닌가요?
당시 백제 밑에 마한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광개토 호태왕이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 라고 나오는데 고구려가 지금의 평양이라면 왜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 건너) 왔을까 평양에서 충청도를 치려면 기마부대가 .. 배를 만들 필요도 없는 그래서 나는 고구려 평양은 북경 일대였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을 짜집기 해보자
답이나온다
한국과 중국 역시 짜집기 해보자
역시 답이 나온다
그럼 답은!
형제가 비류와 온조만
잇겟어요 배다른 형제도
많겟죠
김성호님의 저서 중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권을 보면
고려 말 왜구와 명나라 동남해안에 출몰한 왜구의 정체를 백제계 실향민으로 보는 견해가 있던데
이 부분도 다뤄주시면 좋겠습니다.
비류백제가 마한 또는 임나가 아니었을까요?
삼국지동이전의 마한(한)이 바로 비류백제입니다.
비류 백제가 아니라 구태의 백제 설이 있습니다..삼국사기에도 나온답니다.
그렇다면 왜 광개토왕은 가까운 온조백제를 건너뛰어 상대적으로 더 먼 비류백제를 공략했는지? 그리고 비류백제멸망후 그 땅을 온조백제가 차지했다라고 하는데 결국 고구려는 온조백제를 도와준 꼴이 됩니다.
광개토왕이 전방의 온조백제를 우회하여 후방의 비류백제를 친 이유는,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 마지노선을 치지 않고 아르덴 숲으로 우회하여 후방을 친 이유와 같습니다.
정확히는 온조백제가 비류백제 영역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비류계의 잔여세력이 온조계를 몰아내고 온조백제의 왕위까지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온조계의 마지막 왕은 구이신왕입니다.
추측컨대 아화왕 대 온조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오히려 비류계가 상대적으로 힘을 더 많이 보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래 '진왕'의 상징적 권위도 비류계의 것이었고요.
온조계는 해씨, 비류계는 여씨(부여씨)입니다.
온조계가 비록 왕위는 잃었으나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며, 백제 멸망기까지 '대성8족'의 하나로 남게 됩니다.
문주왕을 시해한 해구는 '국난기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역적'이 아니라,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했던 온조계의 후예입니다.
@@지수신-j6l 온조왕 계 가 부(여)씨 입니다 그리고 고이왕 계를 우씨 또는 해씨 로 보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추측이긴 합니다만... 만약 주장처럼 비류백제가 고구려 서쪽 지역인 요서지역 백제부를 두었다든지.. .하는 것이 팩트라면... 온조백제를 건너 뛰더라도 비류백제를 공략할 만한 필요성은 나름 가능성 있게 볼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고구려 서쪽에 세력을 뻗친 비류백제일테니까요... 뭐~ 정확한 것은 연구를 통해 밝혀야할 것으로 봅니다...
신은 신과 아닌자가 다름. 신은 임자하는 자로 온전한 시스템을 갖고 있어 온전한 시스템을 소유한자이다. 신녀와 같은 경우에는 카드를 공유하고 있어 온전한 시스템에서 일정한 시간마다 나오는 결과를 공유하는데 이는 담덕이 28이다 라고 하면 28번의 카드가 회전하면서 테이블 앞에 놓이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따라서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순서가 흐트러 질 수 있다.
그말은 즉슨, 일본 건물이 백제 건물이랑 비슷했다는 건가...
@Amicus 일본에 이스라엘의 10개의 민족이 기원전 7세기에 건너와 일본의 지배계층 최초의 천황이 나옴
@프로이센 유투브에 日本 ユダヤ로 검색해보셈 존나 많은 관련영상 있음
백제는 산동반도에서 이주해 나간 유민들이 개척한 땅들의 통칭으로 한중일에 모두 존재 합니다 . 백제는 물 건너간 제나라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 입니다 . 영상증거 46분 ruclips.net/video/lgPeTovH1fI/видео.html
@露積成海 오해해서 죄송
@露積成海 백제 식이 한반도에서 창조 된것이 아니고 제나라 식을 이은 겁니다 . 제나라 사람들한테 라는 사자성구 있어요. 간략해서 백제 입니다 . 백가제해 뜻은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바다로 떠났다는 뜻인데 고기 잡으러 간것이 아니라 이민 갔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백제계가 일본으로 가서 정착하곶 그 이 후에 신라계의 왕성한 무역과 문화교류에 의해 대규모 이주가 일어남. 크게 생각할 필요가 있슴.
글쎄... 석연치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한 기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온조백제보다 더 남쪽에 있었다는 비류백제를 치러 광개토태왕이 온조백제를 건너 뛰어 그 이남을 치고 올라오다가 다시 온조백제까지 쳤다????
비류백제 ====페르시아
온조백제 ===양자강이남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말레이시아 사바주, 필리핀 잠보앙가
마라위 , 브루나이 과거
왕족 귀족이 전부 백제인 이었음
지금도 저 지역에 가면
코리안과 소름끼치게 닮은 사람들
남아있음
이들은 백제 22담로 후손들임
필리핀 다바오에 가서 살아온 적이
있는데 다바오 다운타운 상권중
마라위 출신 이슬람인들이
장악한 거리가 있는데
자기들끼리 무섭게 뭉쳐서
상권을 장악하는데
그중에 코리안과 소름끼치게
닮음 사람이 꽤 있음
차이니스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고 조상 대대로 민다나오 섬
서남쪽에서 살아 왔다고 함
여기가 백제 22담로중 하나
광개토왕은 비류백제를 치기 전에 온조백제의 아화왕과 싸웠습니다. 국경에서 아주 치열하게 싸우죠.
광개토왕이 이기긴 했지만, 온조백제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근초고왕 이후로 온조백제는 백제연방 제일의 군사대국이었고, 백제의 군사력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하죠. 최대 강적인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니까.
반면 그 후방의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지동이전을 보면 비류백제(한)에는 성곽이 없었다고 할 지경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과감한 전략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쟁사를 좀 배웠다면 쉽게 예상되지 않나요?
그리고 역사는 정확히 그 예상대로 흘러갔고요.
왜 석연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정확한 기록일 것입니다.
여기서 '낙랑'은, 해당 기록에서 '낙랑 태수'가 등장하므로 한나라 낙랑군일 수밖에 없는데,
백제가 기원전 18년 처음 건국할때 자리잡았던 장소가 그 낙랑군의 서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여년 후 백제는 마한의 북쪽 땅으로 '遷國'합니다.
삼국사기는 정확히 '遷國'이라 했습니다. 의미심장한 표현이죠. 단지 도읍을 옆동네로 옮긴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미추홀은 인천인데. 전세난으로 시끄러운 곳.
그때는 강력한 중앙 집권이 아니여서 귄역이 나누어 있던게 아닌데 기록이 없으니 알수 없죠..
84년도에 처음 읽고 또 읽고... 변하지 않는 강단사학 나부랑이들.
대마도를 쓰시마라고 읽는 것에 의아해 했던 공무원의 나홀로 분투기. 말 마(馬)자를 왜 발음하지 않는가, 강단사학 누구라도 시원하게 밝혀보길...
임나일본부설보단 훨씬 논리 있다
비류 백제가 성립하려면 고고학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의 1,2,3세기 묘제가 다릅니다.
일본은 한국과 다른 묘제들이 발견되며
심지어 한국보다 많고 규모도 큽니다.
1,2,3세기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당대 유물이 많은 나라를 건설했다고 하는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꿈인것이죠.
그랬으면 좋겟다.. 뭐 이런것....
백제는 한국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못잡아서
말기까지 마한이 존재했는데..
일본에 뭘 세운다는게 애초에 말이 되질 않고..
더 심각한것은
왜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가서 인질 생활을 했는가 입니다.
일반적은로 인질이 더 약한 나라에 가서 잇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지요..
호태왕 비문을 봐도 당대에 일본은 큰나라입니다.
삼국을 합쳐야 인구가 비슷햇을 정도입니다.
고대 사회에 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것입니다.
중국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도 못 풀어내면서..
일본에 왕자들을 인질로 보낸 나라가 중국에 대륙 백제를 두엇다면... 소가 웃을일입니다.
백제는 왕실이 두개에요
?
27이 가등청정인 이유, 카드가 채워지지 않은 경우에는 온건하지 않아 그들을 통제하는 것은 양날의 칼과 같다라고 보면 됨.
고구려사초를 못 봐서 해석을 잘못한 듯하네요.
온조는 궁예와 가족중에서 나옴.보통은 금권을 얻어 권씨가 됨.
비류백제는 건국하고 얼마 안되어 망했고, 온조가 그 백성들을 흡수했습니다.
일본의 건국은 백제의 멸망 이후이며 홀본부여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광개토 는 담덕으로 28 임.그들이 신의 입적 되지 않은 자식으로 남자가 28, 여자가 28과 같은 방식으로 출현.육체의 딸인지 아닌지는 모름.신의 딸은 신의 딸이 임재 함을 이야기 함.
광개토왕비 처럼 지면에 한계가 있는곳에 백잔과 잔국으로 달리 적은것은 두개가 다르기 때문이다. 잔국이나 백제나 두글자인데 잔국을 백잔의 약칭이란놈은 어디 돌대가리냐?
저 궁금한게 있는데, 문사 나레이터는 왜 이래요? 태클 아니고 그냥 진짜 궁금하기만 해서요. 뭔가 짜깁기한 느낌도 드는 소리...
비류백제 충남 아산만에 있었음 ~~^^~비류백제 멸망후 왕족과 지배층이 일본으로 3~4세기경 건너가 고대 문명과 왕국을건설했음~~ 일본 15대 응신일왕이 비류백제 마지막 왕임~일본 초대 왕 응신일왕 임
마한의 유적을 백제 유적이라고 우기는 사태를 뒤집을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
저는 백제 초기 유적 = 고구려 유적이라 생각합니다.
비류백제 충남 아님. 대륙 동부 산동 지역임. 끝
비류가 자살했다고?
삼국사기(x) 삼국사(o)
아니 분명히 책 표지에 삼국사라고 씌여 있건만 왜 자꾸 삼국사기라고 하나?
그리고 광개토태왕 이랬다가 대왕 이랬다가 오락가락 하네. 왜 다들 자신있게 태왕이라고 못하나?
우리역사는 대륙에 있다.....
에휴.....유적도 없는 반도에서 좀 벗어납시다..
궁예가 비류 임.
4국도아닌듯,ㅋㅋㅋㅋ
열국
대륙백제는 확실한데 백제는 왕실이 두개인 국가입니다
비류가또랑건느자마자,비루로이름바귀고유명해졋쪼¶
그럼 마한은 어떻게 설명되나요? 근초고왕때도 있었던 걸로 기억되는데요!
마한안에 백제가 있었죠 백제는 도시나 도였어요 도시국가였죠
마한 = 비류백제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세운 마한왕조는 서기 9년에 비류에게 멸망했고 이후 비류와 그 후손들이 마한왕(진왕)을 칭했습니다.
이건 '정복'이 아니라 '찬탈' 입니다. 왕건이 궁예를 찬탈하고 또 이성계가 왕씨를 찬탈한것과 같은 겁니다.
대략 4세기경부터는 대외적으로도 백제왕을 칭하면서, '마한'이라는 명칭은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시초가 뭐가중요한가... 시간이 흐르면 기술이 증명해주겠지 뿌리나 민족이나 다 따지고보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했으니 아프리카가 뿌리고 동아시아는 황허문명시작이니 전부 한족에서 출발한건가?? 너무 열내지마시길~
홍산문명이라고 우리 동이계 문명이 황허문명보다 1천년 앞 서는데요?
백잔은 고구려가 백제를 낮추부르는 표현이고 백제 건국신화를보면 십제에서 시작해 비류세력을 흡수해 백제가 되었다고 하죠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실제 다른 나라 였다면 나라이름도 달랐을것이고 실제로 광개토대왕에게 멸망당할때까지 유지되었다고 하면 오랫동안 분단되어있을텐데 잔당들을 그대로 온조백제가 흡수한다? 이뿐만이아니라 우리가알고 있는 백제왕 계보는 무엇임?
중국.백제.일본
전라도로 이어지는 횡적연대.
백제는 산동반도에서 이주해 나간 유민들이 개척한 땅들의 통칭으로 한중일에 모두 존재 합니다 . 백제는 물 건너간 제나라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 입니다 . 영상증거 46분 ruclips.net/video/lgPeTovH1fI/видео.html
그러니.. 임나 일본뷰라니, 웃기는 식민 왜곡역사사기네..
웃기고 있네 진짜
소서노가 둘 아들 델고
지금에 대륙 항주 지역에 백제란 고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텃을 잡고 건국 한게
백제에 시초야
1대 소서노임
2대가 비류이고
동생인 온조가
운남.사천쪽에서
십제국 건국 했고
근데 소서노 백제가 멸망해 비류가 온조에게
몸을 의탁했고
온조는 십제국 형에게 넘기고 지금에 산둥지역으로 와 건국 했는데 그게 백제이고
훗날 십제국과 통합
소서노 백제국 영토.한반도.열도까지
다 장악 해 대백제국으로 된 거야
삼국사기는 신라에 여왕들 땜시 소서노 업적들 싸 그리 삭제 해 버렸어
비류가 열도로 넘어가
비류 백제를 건국 하고
오사카에 큰 왕릉이 있는데 100% 비류릉이야
삼국지에서 관우.장비가
디진곳이 뱩제성이다
한반도는 그냥 백제국에 일부분 일뿐이야
백제 땜시 아가리에 밥 쳐 먹는겨
고구려는 옥수수.보리
신라는 밀이 주식이였다
쌀은 백제 땜시 쳐 먹는거다
십제국도
모르는게 백제사 타령인데?
가설로 생각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근거는 비문이라 1차사료로 가치있음 ..
이 설의 가장 큰 문제는 논리 자체도 허점이 많은 허황된 낭설에 불과하지만 내용 자체도 결국 종국에는 일본 식민사학이 주장한 내선일체설에 도달한다는 것이죠.
다~~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아담과 이브 나오고 우린 다같은 민족입니다~~
일본 백제, 북한 고구려, 한국 신라 해서 현재는 신삼국시대임
주장은 주장일뿐 주변을 정리못한 주장은 별로다
시작부터 오류...이거 뭐지? 가야도 없고...비류 어쩌고 저쩌고
잔시황이 불로초를 찾다가 일본을 발견 ~
후에 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 유민들이 새운 국가가 일본
이때 철기문화가 일본에 들어감, 이후 일본의 진구 황후가 삼한을 정벌 함
일본, 중국의 정사 및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
(일본, 중국의 대체로 정설 인정 함)
불로초 찾으러간 서불이 일본지방에 눌러앉아 왕이됬다는 기록 있고요 전체적으로 고대일본사는 우리민족의 열도식민개척사에 불과하죠
진나라가 망하고 동쪽으로 피신한 아들 두명에 이름이 부여.부소임 부여 건국 하신분이 진시황 아들임 충남 부여에 뒷산이 이름이 부소산임
제기 금문으로 다 밝혀졌음
졸본부여 마지막 공주가 소서노~ 비류~일본으로 연결됨
ㅋㅋ6세기까지 청동기 국가였던 왜
@@돈마니-u3h 동이족? 뜻은 아시는지요
백제는 산동반도에서 이주해 나간 유민들이 개척한 땅들의 통칭으로 한중일에 모두 존재 합니다 . 백제는 물 건너간 제나라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 입니다 . 영상증거 46분 ruclips.net/video/lgPeTovH1fI/видео.html
이런건 소설 삼국연의보다 재미 있지.. 월래 유사역사가 재미 있는거야.. 고리타분한 기본 역사보다.
세계관이 엉망인게 흥미롭거든
그죠?ㅋㅋㅋㅋ말하는거보면 ㅈㄴ스펙타클소설임ㅋㅋㅋㅋ
니 뇌구조가 엉망이거든
@@지수신-j6l 이야 재미있는넘 나왔네 ㅋㅋ
@@영민-v9c 아는 건 ㅈ도 없고 한마디 제대로 할말도 없으면서, 허세는 부려야겠으니 어디서 주워들은 유사역사니 뭐니 찌질거리면 뭐 있어뵈는줄 아나벼? ㅉㅉ
@@지수신-j6l 역시 환빠들은 이런맛이 있어.. 먼가 나사가 몇개빠진애들.. 느낌이 팍 하고 온다 말이야 ㅋ
일본의 독특하고 찬란한 문화가 우리 영향을 받았다고 억울해 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렇게 따지면 백제도 당시 당나라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억울해 할 필요없음. 국뽕유튜버중 일본의 뿌리가 반도라는 것이 정설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디까지나 아주 많은 가설중 하나일 뿐임.
또한 만약 백제의 사람들이 건너가서 지금의 일본문화를 만들었다 한들, 현재 우리는 지명이며 사람이름까지 중국식이고 일본은 한자문화권에서 유일하게 독특하고 고유한 그들만의 문화를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누가 백제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지? 백제땅이 반도에 있다고? 그렇게 따지면 고구려 발해는 현재 중국땅에 있다.
후진국에서 선진국 순으로(중국-한국-일본) 후진국은 선진국과 엮이고 싶어하고 반대로 선진국은 후진국과 엮이기 싫어함. 중국이 자신들이 한국의 뿌리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이에 치를떨듯이 한국은 일본의 뿌리가 자기라고 주장하고 일본은 치를 떨고있음. 자신이 믿고 싶은 답을 정해놓고 보면 그것밖에 안보이는 법이기에 항상 경계해야 함.
일본에 이스라엘의 10개의 민족이 기원전 7세기에 건너와 일본의 지배계층 최초의 천황이 나옴
개쌉소리 멍멍
한심하다. 식민지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에 식민지는 무슨 개소리냐?
여기 망상글 대잔치네 ㅋㅋㅋ
주류사학이 아무거나 다 역사로 인정하면 그게 더 문제 아님??
적어도 역사란 누구도 부정할수없는 정도의 증거가 없으면 성립 불가능 함.
제말이그말이에여 도대체 책이랑 다르게 해석하고 이런것들이 올바른 역사가맞음? 자기들이 그때 살았던것도아니구 부정적으로 말하구
잔국을 토벌했다, 백잔을 토벌했다. 김성호는 이 잔국과 백잔을 동일국가가 아니라 별개의 나라로 보고 잔국을 비류백제라 해석함. 흥미로운 상상의 해석이지만 다른 사료들과의 교차검증과 고증은 미흡한 부분이 많음.
잔국을 마한 54국을 다스리던 진왕의 목지국이고 비류는 마한 소국 비리국. 백잔왕은 도시국가 백제의 왕이지만 진왕의 목지국 즉 진국 즉 잔국의 왕이기도하다라고도 해석하는게 더 나을듯
마한 54국 중에 '비리국'이름 쓰는게 한둘이 아닌데?
지수신 아님 말고
@@yoshitsune1184 풉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