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김용옥 역사기행] 고구려기행 2 주몽의 첫 도읍지, 흘승골성 - 어떻게 이것이 신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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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30 окт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154

  • @ohjinyoung4931
    @ohjinyoung4931 2 года назад +2

    재밌고 유익하고 도울 선생님 강의는 사랑입니다

  • @뚱뚜루-x2k
    @뚱뚜루-x2k 4 года назад +3

    어디서 이런 영상을 보겠나 싶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

  • @이재송-b1z
    @이재송-b1z 25 дней назад

    고구려기행 정주행중입니다
    감사합니다🙏

  • @배용준-z5c
    @배용준-z5c 5 лет назад +7

    진짜~~~ 도올...쵝오...........................

  • @껍데기-x3l
    @껍데기-x3l 5 лет назад +4

    선생님의 이야기는 늘 감동입니다

  • @tundratiger9473
    @tundratiger9473 5 лет назад +5

    우리 역사에 高麗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高句麗가 한민족의 역사임은
    일만년이 지나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高麗 왕건이 나라이름 하나는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 @이형일-p7u
    @이형일-p7u 4 года назад +2

    고구려의 신화적 양식이 이미 저 흘슬골성과 비류수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서 정말 리얼한 그랜드 스케일로 확인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도올 선생님이 말씀하신 고구려패러다임은 곧 "나는 고구려를 따르겠다"는 선언으로 보입니다!

  • @August924
    @August924 5 лет назад +2

    한번도 고구려 주몽의 얘기를 신화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도올선생님 말씀처럼 모든 나라의 시작이 이렇더라구요.

  • @JYKei
    @JYKei 5 лет назад +10

    와 좋네요 언젠가 저도 한번 가보고싶어요

  • @physedu21
    @physedu21 5 лет назад +2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도울 샘 강의를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 @BlueMoon-pk6vn
    @BlueMoon-pk6vn 4 года назад

    중국과 정치, 통상 외교에 치중된 현실에서 벗어나 현 대한민국의 지적, 재적 인적 자원을 총동원해 문화적 외교로 이지역의 문화자산을 공동연구해 세계적으로 개방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우리민족의 뿌리였던 고대국가가 소유했다가 잃은 영토의 문화재 포함 반환주장으로 만약 분쟁을 한다면 끝이나질 않을테고 분쟁하는동안 문화재는 소실되거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니 의미없고 역사, 문화적 측면으로 접근해서 이 역사의 실증 문화재들을 관리 보존시켜 문화자산을 만들어야겠지요.
    유럽 고대국가의 잘 보존된 유적지들을 둘러보면 우리도 이런분야에 더 힘을 써야한다고 느낍니다. 교수님 강의는 민족의 눈을 뜨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동주-j4z
    @김동주-j4z 4 года назад +1

    이런 영상 시청해야 합니다! 민족 정기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이 얼마나 피가 끓어 올라요!

  • @hanalee4242
    @hanalee4242 5 лет назад +2

    감사히 잘보겠습니다~

  • @younghovan
    @younghovan 5 лет назад +2

    항상 존경합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 @윤경화-m2f
    @윤경화-m2f 5 лет назад +3

    교수님?
    그 산삼이 선조분들이 그 노인분을통해 내려주신 선물이 아닌가 싶어요 ᆢ
    그 만큼 ᆢ
    지금 교수님의 역활이 중요한 임무 이 겠지요ᆢ
    부디 건강 강건하셔서 후손들에게
    용기와. 큰포부를 자아감을. 깊이 심어주셔요~~^^
    우리 도울 잘한다 아자아자 얍~~!!ㅎㅎ

  • @하몽-k1c
    @하몽-k1c 5 лет назад +5

    감동입니다. 선생님. 수고많으셨습니다 . 큰 지혜로 어리석은 민족을 이끌어주세요.

  • @박인용박인용
    @박인용박인용 5 лет назад +4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 @광개토호태왕-j6i
    @광개토호태왕-j6i 5 лет назад +1

    도올선생,다큐영화 구독했고 답사여정
    대단하오.선생의 역사존중하나,도올선생이 생각하는 역사보다 고구려국은 대국이고 천자국이었다.이는 호태왕비문서 알수있고 북부여해모수임금을 천제로 기록하고 있고 보면 고구려국이 대단하지만 북부여시대때도 북부여국역사가 대단하다는걸알수있다.도올선생 만주일대 답사해서 고구려역사를 논하는데,대고구려수도평양성은 산시성중간에 있고 안시성은 산시성서쪽,요동성은 산시성동남쪽에 있다.이런 역사는 고구려역사기록에서 알수있고 모본태왕때 고구려초기때 산시성태원공격했다는 기록,그이후 태조태왕,미천태왕때 서안평을 공격하고 미천태왕때 낙랑군6000명 포로잡아 수도평양성으로 이동해 신민으로 삼았다는기록.이때에 보면
    낙랑군은 낙양동북쪽이고,갈석산이 낙양쪽이었고,낙양동북쪽에 낙랑군,현도,대방,요동군이 있었다가 맞는역사이다.고구려초기졸본성은 하북성쪽에 있었다보고 국내성은 그근처남단이고 그이후태왕때 환도산성인데 산시성중간이고 동천태왕태 동쪽 평양성천도했다는기록이 있다.하여 고구려국은 대국이자 천자국이다.하여 동천태왕과 관구검천투는 산시성서 일어났고 북위는 고구려건국 한참후의 하국이었고 낙양이 수도였다.하여 고구려국과 황하를 경계로 했고,관구검과 전투서 동천태왕이 초반이기다가 후반에 패전하고 수도를 환도성서 동쪽평양성 천도했다가 사실역사지.북위수도가 낙양인데,관구검이 만주까지 원정했다는거 가당치도 않다.

  • @광개토호태왕-j6i
    @광개토호태왕-j6i 5 лет назад

    만주 고구려영토 대단하다.산과들 하나라도 놓칠수없는 고구려영토고 남한하고는 다른 신성스런영토로 느낀다.도올선생의 감동은 당연하다.산과들이 강원도설악산비경같은 풍경과 익히알고있는 산림의 여러칼라 단풍이 그림같고 화폭에 담고싶은 기분인데.고구려영토는 감동이고 산새가 구비구비 바다를 이루고 구름인지 안개인지 신성스런느낌이 든다.가깝게 북한지역만봐도 감동이고 북한과 같은 산세와 고구려기운들이 흐른다.만주는 고구려국한국의 중심지였고 북부여국 동부여가 있었고 배달국치우천왕지역이고 한국이 9000년역사를 알수있고 그러니 만주가 신성한영토고 한국이 감동받는건 당연하다.동부여는 송하강일대서 동쪽땅이고 북부여는 요서 만주지역이고,서부여졸본부여는 북경,요서지역이고 북부여해모수임금때 하북성,요서,만주였다.그리고 오녀산성은 산성요새이지 수도는 아니라고 본다.나라의 수도는 백성과 같이 해야하기에 평지에 도읍한다.하여 도올선생 존중하나 도읍지는 아니다.그리고 고구려임금과 지도층릉이 많은데 아마도 고구려국의 선산이 만주인거 같다.고구려국사서 북부여인데 북부여국 해모수임금은 동몽골 고구리출신이고,동몽골이 고구려영토라는걸 알수있다.또한 내몽골북쪽에 고구려성터 고려성터자리 답사,고구려영토를 알수있다.그리고 문헌기록과 고구려벽화유적서 북경유주자사고구려태수라는 기록,하북성북경은 호태왕시기 서북쪽돌궐경계위해 고구려성이자 행정구역이었다.

  • @hanbaedal
    @hanbaedal 2 года назад

    우리에겐 사라지고 노래에만 남아있는 얼룩소가 있네요.

  • @홍영성-l4z
    @홍영성-l4z 4 года назад +1

    👍👍👍

  • @Goldnomad
    @Goldnomad 5 лет назад +4

    고맙습니다~

  • @septmerveilles
    @septmerveilles 5 лет назад +1

    자신의 팔꿈치를 들어 올리며, "여기 이렇게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담긴 방대한 내용에 적힌 지명과 인명을 근거로 성과 무덤이 발견되었고 문헌적 증거로 남아있는데 어떻게 이게 신화냐" 라고 말씀하시는 도올 선생님, 참 재미있고 귀여우심~ 신화에 대한 설명도 머릿 속에 쏘옥~ "신화는 비신화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그 속에 담긴 신화가 아닌 역사가 드러난다. 신화는 표현 양식일 뿐이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주몽 신화나 마리아의 성령 잉태로 태어났다는 예수나 모두 beginning을 위해선 부계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홀승골성 아래 환인현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사를 생각해 보자. 고구려 피지배세력 즉, 민중은 고구려 건국 이전에 벌써 탄탄하게 만들어져 왔을 것이고, 이것은 바로 고조선과 직결되는 역사의 흐름이었을 거라는 말씀. 내가 매번 도올 강의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새삼 확인하는 순간... 아놔... 넘 흥미진진한데... 이제 3부로 고고씽~~~

  • @brucean77
    @brucean77 5 лет назад +4

    스승님 이것은 우리민족의...
    이야기입니다..
    온 국민이 봐야할.....

  • @정호연-b6d
    @정호연-b6d 5 лет назад +1

    만주족 거란족 지배 한적있지만 결국에 고구려 역사 유적만 남아네 자랑스러운 역사다

  • @aa510009
    @aa510009 5 лет назад +3

    선생님 책 많이 팔렸으면 합니다.
    한국이 변하도록

  • @paran3373
    @paran3373 5 лет назад +2

    감사ㅚ 잘 보겠습니다~^^♥

  • @인디아나존
    @인디아나존 5 лет назад +2

    선생님의 존재가 이 나라의 복입니다. 어찌 이리 하늘이 복을 주신지. 찬탄이 아닌 아찔함입니다. 이러한 분이 이 나라에 없었다면. 암흑일 것입니다.

  • @3온달
    @3온달 5 лет назад +1

    해모수의 4대손 고주몽...만주의 자연환경이 우리민족의 정서와 함께하고 너무도 아름답다.

  • @August924
    @August924 5 лет назад +2

    도올선생님 늘 멋지십니다.

  • @jeongminkwon6779
    @jeongminkwon6779 5 лет назад +3

    고구려는 분명 우리역사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신라가 중심이며 어쩌고 혈통이 어쩌고 하지만 그런것들은 둘째치고 확실한것은 우리 조상들인 고려, 조선 선조들이 고구려를 우리역사라고 생각햇으니 우리가 이러다 저러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구려가 한국인 조상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중국한족, 여진족, 고대한국인 (예맥족) 을 놓고 생각해봐도 중국한족이 아닌건 100%이고 문제는 혹여 여진인들이 상당수 연계된 나라였지 않을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분명 여진족과 한국인은 다른 부류입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울시기 거란족들이 발해인 군사에게 정탐을 보냈는데 여진족들을 마주치고 너희 여진인들은 어쩌고 하며 질책하는게 역사서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럼 발해인과 여진인이 다른부류이고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국가니까 고구려는 여진인들과 별 관계없다는 추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중국인조상도 아니고 여진조상도 아닌 고구려는 누구조상일까요? 혹시 몽고와 관련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쿠빌라이가 원종이 항복해오자 자기가 당태종보다 성군이라고 했다죠 원종을 고구려의 후손이라 그런말을 한거고 만약 고구려가 몽고의 조상격이라면 그런말이 나올리가 없지요.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고구려는 우리민족다수와 여진인들이 섞여살았던 다민족국가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 @il1lllilll
      @il1lllilll 3 года назад

      댓글 잘 이해했습니다. 민족=역사라고 보고, 고구려가 다민족 국가라면, 여진(중국?), 우리민족(한국) 두 국가의 역사로 봐야하는건가요??
      역사의 주인을 피지배층으로 봐야하는지, 지배층을 봐야하는지 기준도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 나라 역사의 주인을 판단하는 기준을 뭘로 해야하는 걸까요??ㅜㅜ

  • @오직이것
    @오직이것 5 лет назад +6

    어떻게 이것이 신화냐

  • @bin2ggo
    @bin2ggo 2 года назад

    역사란 기록에 의한 것이지만
    그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서린 역사는
    흐름에 서려있는 의지의 나타냄이다
    그것을 문화라고 하겠다
    한국은 그 의지의 나타냄이 발현하여 문명선진국이 되었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그를 포함하여 문화사를 공부하라
    기록은 왜곡되지만 의지의 흐름은 언제나 진리를 찾아간다
    본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 갈래는 하나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내게 유일하다
    나와 같다면 너는 나와 함께할 것이다.

  • @광개토호태왕-j6i
    @광개토호태왕-j6i 5 лет назад

    도올선생답사 산성,위용이 대단하다.적군이 오르지못하게 직각에 가깝게 건설했고 지금봐도 올라가기 어렵다,또한 산성인데 비교적 높이 쌓았다.솔직히 남한산성 후방성문쪽으로 직접올라갔는데 쉽게 오를수있었다.허나 고구려산성은 요새다,가파르고 산성기술이 대단하다.하여 고구려성 위력을 볼수있고 조선시대 성곽하고는 규모나 높이가 다르다.하여 안시성같은 산성은 웅장하고 대단한요새였다본다.하여 당태종이 양만춘장군한테 패전하고 고구려국에 항복한다.

  • @양근모-e7v
    @양근모-e7v 5 лет назад +1

    가서 봤지만 오녀산성은 한 나라 도읍으로 삼기에는 너무 가파르고 좁다. 피난처가 될 수는 있어도 도읍지가 될 수는 없다. 산적들이나 머물 만한 곳. 그래서 고구려의 최초 도읍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

  • @DDqrodQQD
    @DDqrodQQD 5 лет назад +11

    저 광활한 만주벌판에 만주어를 제대로 하는 청나라 후손이 없습니다 청이라는 나라를 세운 중국을 지배한 만주족도 만주어를 모릅니다 다만 조선족은 아직도 한글을 쓰고 한글을 읽습니다 저 중화문명에 다 동화되어 사라져도 우리 민족은 살아 남았습니다 저들은 김치를 먹고 한글 간판을 달고 조선말을 합니다 저들은 우리와 동족입니다
    중국은 하나의 통일을 부르짖으며 56개의 소수민족을 자기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습니니다 홍콩은 독립을 했지만 위구르와 티벳은 무자비하게 학살했죠 고구려 발해 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한글 아리랑까지도 중국의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고토수복은 잃어버린 옛땅을 찾는것 뿐아니라 우리의 정통성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한국이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으면 중국도 고구려가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겠다'
    - 우다웨이 외교부부부장 2015년
    우리 민족이 저지역을 지배한 기간은 3300년 한족은 430년 북위와 원 720년
    저 지역은 한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문화역시 완전히 다릅니다
    동북공정은 역으로 조선족의 독립을 막기 위함이죠... 동북공정의 27개 연구 과제 중 고구려사 관련 연구 12개를 제외한 나머지 15개 과제는 이른바 '한·중 변경', 즉 중국과 통일 한반도의 접경지역인 간도에 대한 것입니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조선족의 독립을 촉구하기위해서라도 우리민족의 발원지이며 우리민족이 넘어가 살았던 그 지역의 정통성을 주장해야 맞다고 봅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3300년의 역사를 통채로 뺏길 순 없습니다 그 정통성은 우리가 가져 가야죠
    역사와 문화까지 뺏기게 되면 우리가 무슨 낮으로 저 땅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우려 하는건 북한은 중국에 넘어가고 남한은 일본에 결국 편입되는 겁니다 지금에야 말도 안되는 소리라 하겠지만 우리 민족이 단결하지 못하면 언젠간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 @WorldSexKing
      @WorldSexKing 5 лет назад +2

      첫 문단부터 웃겨서 댓글답니다.
      조선족들은 한국말 할 줄 아는 중국인일뿐입니다.
      이런 국뽕 감성은 자제하세요.

    • @DDqrodQQD
      @DDqrodQQD 5 лет назад +2

      @@WorldSexKing 스스로 비하하지 맙시다 안타까운 역사를 겪었을 뿐입니다
      저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 @윤경화-m2f
      @윤경화-m2f 5 лет назад +2

      님ᆢ
      감사합니다ㆍ

    • @skykim2777
      @skykim2777 5 лет назад +1

      조선족에게 물어보셨나요? 한국국적 준다면 중국국적 포기할꺼냐고 ?
      제가 물어본 사름들은 정말 다들 중국 국적 그대로 유지한답니다.
      그냥 한국말 하는 중국인 입니다. 먼 친척이지 조상이 같다고 모두 같은 나라가 된다는건 좀 아니죠.

    • @DDqrodQQD
      @DDqrodQQD 5 лет назад +3

      @@skykim2777 지금 같은 상황에선 당연하죠 지금 영국이 과거의 자신이 전세계를 지배했다면서 전세계가 우리땅이며 나는 대영제국민이다 라고 하면 돌아이 취급받을겁니다 이태리사람들이 로마제국은 우리의 영토다라고 하면서 유럽땅 내놓으라고 그러면 당연히 미친놈 취급 받겠죠
      또 누군가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면서 gdp가 높다면 인구삼투압으로 그 나라가 버티지 못할거라고도 합니다 실제 지금 중국과 국경을 접한 나라들은 전부 중국보다 못사는 나라죠 마찬거지로 북한은 남한보다 약 천분의 일 수준으로 못삽니다
      미국 남부 멕시코는 미국보다 gdp가 약 칠분의 일수준 미국이 카르텔을 진압하면서 동시에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려는 것도 결국은 높은 gdp의 영향으로 멕시코 사람들이 자꾸 미국으로 온다는 거죠 그들은 미국문화에 동화되지도 않고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떼를이루는 무리 그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저들의 국적이 어디일지 걱정해야 한다면 두려워 하는게 맞겠죠 천년제국 로마를 무너뜨린건 결국 말이통하지 않았던 게르만족 그들로 부터였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북한과 그리고 조선족까지도 말이통합니다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우리에게 한글이 남아있다는건 천운이죠 중국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말과 글을 잃어버리고 결국 한족에 동화되버렸죠
      우리가 북한과 통하게 되면 물론 당장 우리에겐 재앙이 일어날수도 있습니다 천분지일의 소득격차 저 장벽만 넘으면 천배를 벌수 있다면 그 러쉬를 막을 수나 있을까 하지만 이는 우리민족에겐 다시없는 기회일수도 있습니다
      영국을 보시면 그 미래가 명확해집니다 스스로 단절돼 과거의 위대한 영국만을 외치던 영국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패망의 길로 가고 있죠 백인남성 앵글로색슨 옥스포드 이들이 결국 무슨짓을 벌였습니까?
      노딜 브렉시트까지 가게되면 영국은 최악의 경우 북아일랜와 나뉘거나 스코틀랜드도 독립할수 있습니다 나라를 쪼개고 있죠
      한 나라에 국경이 생기는 겁니다 기가 막히는 노릇인거죠
      이처럼 나라를 쪼개는건 어리석은 지도자가 하는짓이지만 나라를 통합시키는건 현명한 지도자가 해야하는 일입니다 고구려도 결국
      소수민족의 결합이니 단일민족국가는 아니었죠
      조선족... 저들 중 대부분은 구한말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후손들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선 안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먼저 저분들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결국 대륙과 통하게 되면 저분들이 중국과 우리의 가교역할을 할테니까요
      18세기부터 21세기를 지배해온 서구패권 백인위주의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던 패권은 자기들 스스로 멍청하게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고토를 회복하자는게 아닙니다
      고이면 썩습니다 세상은 변하는데 경직된 과거의 생각조차 바꾸지 못하고 우리가 그 변화에 편승조차 못한다면 우리가 흥선대원군과 무엇이 다릅니까?
      살기 위해선 진화해야 합니다
      포루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구하기위해
      자기딸을 바쳤던 14세기 일본보다 더 유리한 고지에 설 길이 우리 민족에게도 있다면
      통하고 합하고 변하고 진화하게 되는 길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나는 그 길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봅니다
      결국 우리가 살길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 @disjfbdje18
    @disjfbdje18 5 лет назад

    주몽의 첫도읍지는 현재 요서 의무려산이라고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와있습니다

  • @DDqrodQQD
    @DDqrodQQD 5 лет назад

    간도협약(1909)과 조・중 변계 조약(1962)
    언제부터인지 그 시점을 명확하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백두산 정계비=간도 문제의 시작’이라는 식의 관점은 거의 공식화되어 있으며, 백두산 정계비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들은 ‘간도’가 되찾아야 할 우리 영토라는 점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 중 조선과 청의 경계를 나타내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는 문구와 관련되는데, 여기서 ‘토문(土門)’이라는 하천이 쑹화강(松花江: 송화강)의 지류이므로 ‘간도’가 되찾아야할 우리 영토라는 것이 해당 연구들의 주요 내용
    이와는 차별적으로, 강석화(1997)의 연구처럼 적어도 정계 당시인 1712년 즈음에는 조선 조정은 물론 청 측에서도 토문강과 두만강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이후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 증대·변경 지역 개발·조선인 이주 등으로 인해 토문강이 쑹화강의 지류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널리 알려지면서 간도 문제가 나타났다고 보는 주장도 존재
    문제는 전술한 어느 관점이라도 거의 모든 연구의 중심은 ‘간도’라고 할 수 있다는 점 정계비가 자리하고 있는 ‘백두산’ 자체, 부연하자면 정상부의 봉우리들과 ‘천지’의 귀속 여부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술이나 주장을 찾기가 어려우며, 정계비나 토문강의 위치, 간도와 관련된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간단하게 ‘천지’라는 명칭만 언급되고 있을 뿐
    이러한 일반적인 연구 경향과는 달리 이강원(2007)은 정계비, 목책, 토문강(두만강) 등의 위치를 고려할 때,백두산 천지가 조선의 영토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는사실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토문강이 쑹화강의 지류이건 두만강의 지류이건 간에 백두산 천지는 우리 소속이 아니며, 천지에서 두만강이 시작된다는 잘못된 전제와 현지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정계비 위치선정이 문제의 발단이라는 것이다
    ‘간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에 대해, 인터넷에 몇몇 누리꾼이 대동여지도를 언급하며 반박한 글이 있다. 이들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3단계 논법을 거친다
    1)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고지도 중 최고 작품이다.
    2)대동여지도에는 백두산 정계비의 울타리가 두만강에 연결돼 있다.
    3) 그러므로 조선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이다.
    1번과 2번은 옳다 하지만 3은 맞는가?
    정계비 표시 밑에는 강희임진정계(康熙壬辰定界)라고 적혀 있다. 청의 강희제 때 임진년 즉 1712년 정계를 했다는 표시다. 정계비에서 두만강 지류로 연결되는 석퇴(石堆), 목책(木柵)이라는 선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석퇴 즉 돌무더기라는 표시에는 돌무덤이 마치 발자국처럼 연결돼 있고, 목책이란 표시에는 나무 울타리가 연결돼 있다.
    이 부분까지는 숙종실록, 1882년 감계담판(국경회담) 이중하 감계사의 기록,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사, 북한 청진교원대의 1948년 조사와 일치한다. 현재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정계비와 토문강 사이에 돌무더기가 연결돼 있고, 목책이 연결됐다. 마치 위성사진을 통해 내려다보는 것처럼 대동여지도는 이 부분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이 지류는 두만강으로 흘러간다. 김정호는 감토봉(甘土峯)과 입모봉(笠帽峯) 사이에 이 지류를 분계강 상류(分界江 上流)라고 표기했다. 이 강은 계속 흘러들어가 두만강 본류와 합쳐진다. 대동여지도대로라면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있게 되고, 이 두 강이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이 강이 어디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영상사진을 통해 내려다보면 두만강의 지류는 정계비 근처에도 아예 닿지도 못한다. 백두산 동남쪽 밑에는 대연지봉이라는 산이 있다. 두만강은 대연지봉 동남쪽에서 첫 물줄기가 시작된다. 천지와 대연지봉 사이에는 토문강만 있을 뿐이다
    산길로 몇 십 리를 가야 두만강의 물줄기를 볼 수 있다. 토문강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석퇴와 목책이 토문강 지류와 연결돼 있지만, 이 강은 두만강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정계비는 천지 한가운데나 백두산 정상에 세웠어
    야 옳다. 그러나 그는 천지의 물이 지하로 흘러 ‘중천
    (中泉)’이 되고, 이 물이 분류(分流)하여 압록강과 토
    문강(두만강)으로 들어간다고 보아, 그 지점에 정계비
    를 세웠다. 압록강―백두산 천지―두만강이 연결되어
    있다는 고래의 관념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그 결과 백
    두산과 천지가 청에 속하여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출처: 백두산 부근 지도의 경계 표시 현황과 기원 탐색
    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542763

    • @DDqrodQQD
      @DDqrodQQD 5 лет назад

      이형석(1991) 또한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와 비문을 근거로 “실로 어이없게도 백두산 천지는 우리 국경 밖에위치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해당 문헌은 당시에는 아직 확실하게는 알려지지않았던 조·중 변계조약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고 있으며, 당시 중국 측의 지도를 통해 조·중 변계조약에 따른 중국과의 천지 분할 상황을 추정한 결과 북한 쪽의 면적이 더 넓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조약 내용 및 해당 조약의 체결과 관련한 북한의역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인정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백두산 정계비는 국경선 표석(터)으로서 가치를 상실하고 역사의 한 유적터로 남게 되었다. 실로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지 260여 년 만에 천지의 반쪽이나마 되찾아 우리의 땅으로 표기되어졌다.
      이형석 연구의 특이점 중 하나는 교과용 도서의 천지 부근 지도를 논의 전개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특히 남한의 교과용 도서에 실린 천지 부근 지도는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는 주장을 일부 사례들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정계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북방 지역의 개발 및 영토 의식 확대와 연계하여 간도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강석화(1997)는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가 갖고 있는 한계
      를 아쉬워하는 박래겸의 「북막일기(北幕日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목극등이 드디어 비를 세워 정계하였다. 이때 이
      후로 분수령 이북과 백두산 대택(白頭山 大澤)이 역
      시 호지(胡地)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앉아
      서 선춘령을 잃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강석화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도가 깊어졌다는 주장의 사례로 이와 같은 글을 제시하고 있다. 인용 글에 대해 “정계 당시의 실제 사정과 전혀 다르다.” 고 평하고 있지만, 이는생략 부분에 소개되어 있는 조선과 청의 관리들의 정계 당시 모습에 대한 언급이라고 판단된다. 정계비 건립 이후 분수령(정계비를 세운 곳) 이북과 대택(大澤: 천지)이호지(胡地: 청)에 속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정계 이후의 국경 상황에 대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종석은 조·중 변계 조약의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당시 회담에 임하는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중국 정부의 기본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백두산정계비를) 조선과 청나라가 세웠으며 간도 협약 때도 경계 획정의 기준점이 된 백두산 정계비를 기준으로 국경을 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백두산 정계비터가 천지 동남단의 백두산 기슭에 있기 때문에 천지 전체가 중국 소유라는 뜻이다
      1712년에 정계비를 처음 세울 때,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하거나 파악하지 못한 어떤 유리한 맥락에서 위치가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종석의 글은 백두산 정상부(천지를 둘러싼 외륜산) 및 천지의 소유권 결정에있어서, 정계비(터) 위치가 갖고 있는 물리적 속성이 적어도 이점(利點)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첫째, 백두산 천지 및 정상부경계의 혼란상은 간도 협약(1909) 훨씬 전인 1712년에세워진 정계비의 위치와 비문 내용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으며,둘째, 정계비의 위치 및 비문 내용 기준으로 할 때, 간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백두산 정상부 및 천지의 귀속 여부에 관해 우리에게 유리한 측면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계비의 위치가 갖는 불
      리함은 약 200년 후 간도 협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공인 또는 법적 유효성 관련 문제와는 별개로, 간도 협약 체결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천지를 포함한 백두산정상부가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중국(당시 청)에 귀속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다만, 이와 같은 사실이 간도 영유권 문제가 갖는 중요성에 밀려서 크게 쟁점화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과서를 통해 백두산 천지가 우리 것이라는 의식을 전달·확산해 왔음에도, 백두산 부근 경계, 특히 천지 동쪽 경계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60년대 북한과 중국 간에 체결된 조·중 변계 조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중 변계조약은 당시 인도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영토 분쟁만으로도 외교적 곤란해 처해 있었던 중국과, 6.25전쟁 당시 북한을 패전으로부터 구해 준 중국에게 적극적으로 간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곤란했던 북한 사이에 큰 논란 없이 합의된 조약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중국 중학생 역사교과서 지도를 보면 중국은 오히려 지금의 한반도를 수복해야할 고토로 표기 하고 있다 중국입장에선 한반도 전체가 수복해야할 고토라는 의미다
      1950년대 중국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회복대상 영토
      파미르...네팔...부탄...버마...태국...대만...팽호열도 그리고 한국
      백두산 부근의 경계 획정 문제는 1712년 처음 가시화된 이후 300여 년이 넘도록 진행 중이며, 지도상으로도조금씩 다른 몇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학생용 교과서의 천지 삽화나 사진 등을 통해 국민 모두 천지 전체가 우리것이라는 의식을 형성시켜왔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천지 동쪽 경계, 비룡폭포(장백폭포)의 포함 여부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리가 필요하다
      썩은 밀가루 짐승먹는음식등을 얻기 위해서 각종 철광석 희토류 북한의 지하자원과 수산자원 임산물등이 중국에 헐값에 넘어가는데 그걸보는 북한인들이 통곡을 하고 있다 분명한것은 북한이 중국을 믿지 않는다는 것
      북한 지역의 영토 및 국경 표시에 대한 문제가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북한을 국가로 볼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국제법과 우리 정부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앞서 언급한 국가의 자격 요건에서 영토는 정부의지배력이 주민들에게 미치는 범위라 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의 지배력은 현실적으로 북한 지역에 미치지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헌법은 국제법에서도 요
      구하지 않는 영토의 구체적인 경계를 성문화하여 현실과 맞지 않는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영토 관련 규정을 헌법에 성문화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국가의 역사적 배경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 @DDqrodQQD
      @DDqrodQQD 5 лет назад

      세계 각국의 헌법에서 영토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는 각국의 역사에 따라 다른 서로 다른 유형을 보인다.근대를 전후한 시기에 영토가 급격히 확장되었거나, 식민지의 독립으로 영토가 축소된 서구 열강들의 경우 대개 헌법에 영토와 관련한 조항들을 담지 않는다. 왜냐하면 향후 영토가 더욱 확장되거나 축소될 수 있는 가능성을 헌법을 통해 규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아시아의 독립국가나 동유럽의 체제 전환 국가들은 자신의 영토를 명문화된 규정을 통해 보존하고 대외적 불가침·불가양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나라 헌법 역시 이러한 유형의 국가들과 영토에 대한 헌법적 입장이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헌법 전문에서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성한 영토의일부분이다.”라고 하여 사실상 우리나라가 북한 지역에대해 취하고 있는 헌법적 영토 인식과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우리 정부는 한반도 전체를 우리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분단 이후 북한이 취한 행정적 조치와 그에 따른 영토의 변경을 인정할 수가 없는 입장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북한이 제3국과맺은 국제법의 경우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조·중 변계조약이 바로 이러한 문제 사례에 해당한다. 1962년 체결된 조·중변계조약이 과연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약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중국과 북한 모두 이 조약을 비공개적으로 체결하였고, 체결 후 UN에 등록하지도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그 내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불건전한 정치적담합의 산물임을 방증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영토 문제와 관련한 그간의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례를 보면 “현재의 평온 상태를 깨뜨리지말라”는 보수적 결론이 강조되고 있다. 즉, 대한민국이1948년 합법적인 정부 수립 이후부터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의 외교 관계 수립, 그리고 그 이후에도 백두산을 포함한 간도 지역에 대해 별다른 영토적 주장을 제기하지 않은 점에 대하여 중국의 영토 주권을 묵시
      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북한 지역의 영토 문제는 지리적·역사적 뿐만 아니라 국제법적으로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라는 점을 확인하였다.부연하자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부터 우리나라와 국제 사회의 입장이 서로 얽혀있고, 구체적인 조약의 실효성 유무에 대해 국제법과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례가 일관되지 않는다는 문제로 한 번 더 얽
      혀 있다. 또한,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지도나 교과서에서 다루는 것은 ‘여론’이나 ‘교육’이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논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분단이라는 현실적상황에 당면해 있으면서도 한반도 전체를 우리 영토로간주해야 하는 상황이, 현실 인식과 당위 사이의 간극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의 대상 지역인 백두산 부근의 지도상 국경선 표시 문제는 우리가 중국과 직접적 대치를 하고 있지 않은 현재는 물론, 통일 후에도 자칫 영토 관련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따라서, 교과용 도서를 포함한 국가 발행 지도가 우리의 영토 주권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반대로 불필요하게 다른 나라를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논의 전개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본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백두산 부근 경계 표시는 지리적인 관점뿐 아니라 역사적, 일반사회적(특히, 국제법과 국제 정치)인 관점에서도 함
      께 고민할 수 있는 스코프(scope)가 넓은 학습 주제라고 판단된다. 경계 표시의 지도상 정확성 논의와 함께 필요할 경우 학제적·융합적 접근이 적용가능한지에 대한교육적 검토를 제안하며, 이를 통해 ‘국가 경계’, ‘영토문제’라는 부담스러운 주제를 학교 교육에서도 유연하게 포용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DDqrodQQD
      @DDqrodQQD 5 лет назад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 중
      [신(臣)은 요동을 되찾지 못한 것이 국가에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동은, 화이(華夷)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은 요동을 지나지 않으면 중국에 도달할 수 없고, 선비, 거란은 요동을 얻지 않으면 그 적을 제어할 수 없으며, 몽고는 요동을 지나지 않으면 여진과 통할 수 없다. 진실로 삼가고 온순하여 무(武)가 없는 국가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화친하면 사신을 맞아들이는 큰 비용과 병정을 징발하는 부역에 한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다. 화친을 잃으면 사면이 적이니 병화가 없는 때가 없을 것이므로 한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다.
      이조 때는 대명이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과 심양의 사람들이 기내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차지할 수 없었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오히려 여러 오랑캐에 속했다 해도 이조(二祖)께서 이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어째서인가? 척박한 황무지로 이득이 없는 땅을 얻고 천하에 적을 늘리는 행동은 영명한 군주라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당 때에도 오히려 주, 진 때의 옛 일을 살펴 도읍을 관중에 정한 후에 위세를 얻어 천하를 제어하였다. 고로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바는 오로지 동서 이경의 우열뿐이었다.
      대명의 성조 문황제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나 강성한 몽고와 여진을 멀리서 제어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침내 대명에 귀속시켰다. 이후 중국의 주인은 이를 바꾸지 않았고 대명는 중국의 도읍이 되었다. 이러한즉,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으로 두 강을 경계로 삼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강역의 형태가 혼연히 천혜의 요새이니 요동을 얻는 것은 반대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이다. 어찌 유감으로 여기겠는가?
      그렇지만 진실로 나라가 부강하고 병사가 강성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고 한걸음이라도 중원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서로 요동을 얻고 동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경계를 넓혀 흑룡강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우측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영토라는 것은 이렇듯 강대국의 논리와 역사적 논리와 민족적 논리에 의해서 인간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그어진 선과 같다 언제든지 그 선은 그엇다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간도가 문제라면 백두산도 문제여야 한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백두산의 55%를 차지하고 있지 않는가?
      4300년 역사동안에 우리민족이 통치한 기간이 3300년 한족은 430년
      동이족인 북위 원 요 금이 720년간 지배한 땅이다 잠깐의 실효지배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은 우리 한반도를 수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 금 원 왕조와 명조초기에는 지금의 요동 요남 일대에 수만명을
      헤아리는 고려인들이 살고있었는데 요동지에 따르면 그들은 당시
      총인구의 10분의3이나 차지하였다 - 중국조선족력사상식
      조선사람들이 흙무더기 연못 이런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 이조 초기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 얘기를 들으면 토루하는거, 흙무더기를 쌓아놓고 하는 것은 그때 조선 사람들이 만들어서 봉수대로 썼을 거다 -전 창원대총장 노계현박사님
      봉수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민족이 간도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다는 뚜렷한 증거이며 조선시대 중반기까지 간도지대는 군사적 완충지대로서 지금의 중립지대적인 역할을 한것이며 당시 왜구의 극심한 침범과 관리의 가혹한 수탈 자연재혜등으로 우리민족이 적극적으로 이주했으며 1660년 청나라가 자국의 발상지라는 명분으로 봉금조치를 취한 이후에도 이주는 줄지 않았다
      1880년 청나라가 뒤늦게 봉금을 해제하지만 이미 이 지역의 조선인은 이 지역인구의 90%가 넘었으니...
      19세기 벼농사를 도입한것도 우리다
      [동북지구에서의 근대수전농사는 제일 먼저 압록강 이북 지구 통화 일대의 조선족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 중국조선족력사]
      [조선족 농민들은 수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악랄한 자연조건과 싸워야했다 그들은 인적없는 황막한 임지나 진펄을 갈아번져야 했고 수리관개공사를 진행하여야 했다 -중국조선족력사]
      1920년대 간도지역 논의 80~90%가 조선인이 개간한 논
      간도의 황무지를 정착하고 개간한것은 조선인
      이승훈의 오산학교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간도의 명동학교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
      북간도지역 계몽운동의 요람이자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소
      간도를 개척하고 적극적으로 이주했으며 민족의식을 배양 했고 지금까지도
      자주성과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뿌리깊은 영토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1880년대 청나라가 간도의 조선인들에 귀화를 요청했을때
      조선인들은 강력하게 반발 했습니다 간도지역에서 중국인들은 숫자가 얼마 없었기 때문에 영향력을 별로
      행사할 수 없었고 변발이라던가 강제책을 많이 썼지만 우리가 반발을 많이 하면서 조선땅의 연장이라고 생각을 했고 고대에는 본래 조선인들의 땅이었기 때문에 간민회라던가 독립운동의 기지역할을 했었던 것이죠

  • @정만주벌판
    @정만주벌판 3 года назад

    우리의 고대사를.....

  • @August924
    @August924 5 лет назад

    집안으로 여행가고 싶습니다. 혼자서도 갈수 있는곳일까요?

  • @shh3543
    @shh3543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주몽-> 추모, 졸본->홀본, 고구려->고려(국명을 고구려에서 고려 개칭) 이 모두 광개토대왕비에 나와있는 내용 입니다.
    일본에 곡학아세하는 강단사학자들이 내세우는 소설과 같은 무논리를 세상에 공개되어 있는 펙트와 증거를 통하여 우리 스스로 다시 찾아야 겠습니다.

  • @윤경화-m2f
    @윤경화-m2f 5 лет назад

    유튜브
    강상원 언어학 박사
    동영상을 보시면ᆢ
    다 증명이 됩니다ㆍ

  • @ieversky7
    @ieversky7 3 года назад

    .

  • @yeongheo3600
    @yeongheo3600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참나 저분도 근거도 없는 지식을 사실인 것 럼 말씀하십니다
    근거가 없는 지식은 아는 만끔 허세입니다.
    당나라에서 쌓앗다는 산 같은 토성이 근거가 남아 잇어야 하는 것 처럼요.
    한국 고대 역사는 다시 배우셔야겟습니다. 등등...
    참고해보세요
    ruclips.net/video/vTiE28fqpfQ/видео.html

  • @tundratiger9473
    @tundratiger9473 5 лет назад +1

    중국 역사에 고구려와 연관된 역사가 있나? 전한, 후한, 5호16국, 5대10국,
    금, 후금같은 나라이름은 있어도 고구려와 연관된 나라이름은 중국사 어디에도 없다.
    오직 한국의 역사에만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하는 고려라는 나라가 존재했었다.

    • @광개토호태왕-j6i
      @광개토호태왕-j6i 5 лет назад

      중한족이냐,중한서를 공부잘해라.중한서에 고대조선기록이 있고 중한서열전에 발해국을 고구려별종이라는 기록이 있고,대고려국의 국호는 고구려국계승서 고려국이라했고,고려국도경에 북부여 고구려국 계승을 한다고 국시로 나온다.또한 외국사로 보면 터어키사서
      고구려국을 무쿠리,고구리라고 칭했고
      이는 고구려한국을 칭한다.그리고 고려국이 신라국이후 나라로 고려국도경서도 나와있지만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나온다,고구려국이 있었으니 고려국이 계승하지.그리고 역사적 1차사료인 만주 호태왕비문서 북부여와 고구려국에 기록했다.그리고 중,내몽골북쪽에 고구려때성터 고려성터라는 곳이 있는데 그지역사람들이 고려성이라 한다고 한다.하니 엉터리같은 소리말고 역사를 바로알고 상호존중하는것이 좋고,도올선생처럼 중국학을 배울수도 있고 문화학술교류도 중국과많이하고 공자학과 동이한국의 선인사상 삼수문화도 공유하며 이웃나라로 서로를 존중했으면한다.

    • @User-bonjour2000
      @User-bonjour2000 4 года назад

      이미 중국인들도 우리 욕할때 가우리빵즈라고 말해요. 지들도 지네나라 갈라지기싫어서 동북공정한거 지네들도 알더라고요.

  • @이진규-q2b
    @이진규-q2b 5 лет назад +6

    도올 선생님.. 선생님은 고구려에 대한 말씀은 안하셨으면 합니다.. 전에도 선생님은 고구려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릅니다.. 고구려에 대해 시중 서점에 저자가 공부 많이 해서 근거가 있는 주장을 하는 책 몇 권만 읽어봐도 고구려의 첫 도읍이 그곳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식민사학에 기반한 주장을 별다른 고민없이 말씀하시는데 이는 선생님의 명성에 심대한 악영향을 주는 자충수일 뿐입니다.. 고구려를 말씀하시려면 공부 좋아하시니 고구려는 물론이고 고조선까지 심도있게 공부를 하시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고구려를 말씀하시려면 고조선도 공부를 하셔야 할 겁니다..고구려이전에 고조선이 있었고 이 둘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입니다..

    • @JYKei
      @JYKei 5 лет назад

      이진규
      왜 아닌지 유튭 채널 만드셔서 설명좀 하주세요
      저같이 역사 잘모르는 일반인들이 잘 알 수 있게요

    • @onnya4753
      @onnya4753 5 лет назад

      본 영상에서 도올은 고조선과 연관 말하고 있는데요? 놓치신것 같네요. 도읍과 비류수 위치는 실제와 다를수 있겠죠

    • @onnya4753
      @onnya4753 5 лет назад

      26:22 보시면 고구려는 고조선 기반위에 세워졌을거라는 언급 하고있습니다

    • @이진규-q2b
      @이진규-q2b 5 лет назад +4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은 지금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근방에 있었고 후에 바로 동쪽 옆의 국내성으로 옯겼다가 산상왕때 지금 조양시의 환도성으로 옮기고 동천왕때 지금 요양시로 옮깁니다.. 이게 고구려가 최고 동쪽으로 천도한 곳이죠.. 한반도로 들어온적도 없습니다.. 물론 남평양이라는 지명이 광개토태왕비에 보이는데 이가 지금 북한 평양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의 태왕이 주로 머물던 장소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이 요양의 평양성에서 광개토태왕이 고구려의 첫 도읍이 있던 북경근방을 다시 정벌해 지금의 북경 옆 조백신하를 경계로 그 서남쪽에 진출해 있던 백제와 대치합니다.. 이 조백신하가 바로 이 시기의 요하로 그 동쪽인 요동은 고구려 영토 서쪽인 요서는 백제의 영토가 되는 것이죠..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427년에 다시 고구려의 발상지인 이 요동으로 천도하는 겁니다.. 그 위치는 졸본, 국내성이 있던 자리는 아니고 그 동쪽 옆인 현 노룡현의 갈석산 근방의 평양입니다.. 이 평양이 수양제와 당태종이 정벌하려했던 고구려의 평양인 것이죠.. 물론 저도 다른 사람의 책에서 본 내용이니 그 시대를 직접 산게 아닌 이상 이게 전부 옳다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국사책보다는 근거가 더 명확하여 믿을만 하다는 것입니다.. 국사책의 내용은 조선, 명, 청나라 시대의 사서에 그런 내용이 있고 이를 일제때 확정한 것입니다.. 고조선, 고구려 당시와 멸망후 얼마안된 시점인 당나라 그후 송나라 시기의 책만 보아도 위의 내용과 상반된 내용이 많습니다.. 둘중에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것인데 당시의 것과 한참 후대의 것이 내용이 다르다면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요??

    • @광개토호태왕-j6i
      @광개토호태왕-j6i 5 лет назад

      @@이진규-q2b 이진규님 역사를 많이 알고있는데,잘못된부분이 있는거같다.대고구려초기의 졸본성위치는 대체로 맞는거같다.졸본부여서 북부여가 통합,고구려국건국하고 졸본지명이 몽골쪽과 가까운지명이고 북부여해모수임금이 동몽골 고구리출신이라면 북부여는 하북성,요서,만주일대이고 고구려국은 서부여가 북경 요서일대니 하북성쪽에 졸본성이 타당하다.그리고 유리태왕때 국내성인데 하북성근처로 보고,고구려초기에 산시성태원공격했다는기록,모본태왕때인데 고구려국은 다물,고대조선영토수복하자고 나왔다.그대도 알지만 고대조선은 삼조선이다.북부여가 진조선지역이고 그럼 고대조선영토수복은 수도왕검성과 번조선지역이다.일반적으로 번조선은 황하산동지역이고 모본태왕,태조태왕,미천태왕때 산시성태원공격,산시성서남쪽서안평공격,미천태왕때는 낙양동북쪽의 낙랑군6000명 포로잡아 산시성중간평양성으로 이동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기록.그리고 유리태왕 이후의 태왕이 산시성중간 환도산성으로 천도했고,동천태왕때 북위관구검과 전투서 초반이기다가 후반에 패전해 환도성동쪽 평양성으로 천도한다.지금 북위는 고구려국 이후에
      건국한 고구려국하국이고,북위수도는 낙양이고 고구려국과황하를 경계로 대치했고,또한 백제국 산동요서백제도 있는데 고구려국과 산동성서 황하를 경계했고 산동요서백제가 북위와 전투가 하남성서 일어났고 백제가 낙양점령해 백제위례성쌓았다는기록이 있으니,고구려국,백제,북위는 하남성황하를 경계로 대치했다는걸알수있다.하여 대고구려수도 평양성은 산시성중간에 있다.하여 고국원태왕때에 연나라와전투서패전해 천도하는데,평양성동쪽 황성천도한다.하여 황성은 어원으로 보면 선대임금도성이고 아마도 추모성태왕의 졸본성확률이 크다.하여 하북성쪽이 될수도있고,연나라가 몽골,내몽골쪽이니 산시성도성지를 두고 요하쪽으로 천도했을수도 있다.그리고고국원태왕후기에 연과의전투서 고구려영토를 수복해갔고 호태왕때는 고구려국사서 최대광대한영토를 소유하는데 호태왕담덕은 호방한인물이라 고국원태왕때 역사를 알고 연나라와 전투하고 하북성을 수복하고 국내성으로 환도했고 북경유주자사고구려태수는 그시기의 태수로 북경이 고구려영토로 역사기록이 말해주고있고 호태왕은 하북성국내성서 번조선영토수복하는데 초기고구려도성지 산시성수복과 서쪽으로 감숙성둔황지역까지 고구려영토로 했고 이는 그지역에 고구려국벽화가 있다.또한 북쪽으로 돌궐을 제후로 삼고 연나라는 안중에도없고 연은 후에 고구려인 고운이 북연을 세웠다.호태왕때 남쪽으로는 하남성,산동성,양자강상류까지 고구려영토로 했고,이를 뒷바침하는 역사적자료는 고구려천문관측지가 산시성,산동성서 나온다는사실과 산시성산동성서 고구려국지도층유물이 발굴됐는데 태왕이 주관하는 향로,청룡상,반가사의상 등 지도츠뮤물이다.또한 선조를 기리는 향로는 단군조선때 삼족기 형태와 문양이 대대로 전수한 대향로였다.하여 고구려국 도성지가 산시성쪽이다는 역사가 타당하다.그리고 서안평이 산시성서남쪽이고 안시성은 산시성서쪽,요동성은 산시성동남쪽에 있다.백암성은 황하바로위에 있고.고구려시대 요수는 황하였다.지금 요수는 거란요나라때 요수고 바로역사보면 대릉하쪽이다.고려국시대때도 고려국서경이 요양이고 요하는 고려하 였다.하여 거란은 고구려국이후의 나라니 지금 요수는 고구려시대 요수가 아니다.하여 고구려요수는 황하고 황하동북쪽이 요동땅이다.하여 태조태왕인가,고구려초기때 산시성태원공격하고 이후 산시성서남쪽 서안평공격하니 낙양동북쪽 낙랑군,현도,대방,요동군이 고구려영토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하여 고구려후기때도 수도평양성은 산시성중간이고,고구려국이 천도를 했지만 고유도성명과 위치는 변하지않는다.하여 추모성태왕때 하북성졸본성,우리태왕때 그근처국내성,그이후태왕때 산시성환도산성,동천태왕때 환도산성동쪽 평양성,고국원태왕때 평양성서 황성인데 졸본성같고 하북성또는 요하쪽 고려국서경자리,호태왕때 연나라공격해 하북성국내성천도,장수태왕때 북연을 병합하고 산시성중간 평양성천도했다.

  • @samwoonkim4357
    @samwoonkim4357 4 года назад +1

    주몽이 세운 첫 도읍지는 산성이 아니라네. 어떤 바보가 도읍지를 산에다 만들겠냐? 서울을 만드는 이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도읍을 산에다 만들었다 생각할 수 있는 니네들 머리가 이상한 거다.

    • @samwoonkim4357
      @samwoonkim4357 4 года назад

      도올의 머리가 진짜로 돌인 거를 알수 있지요. 수도는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들과 산물들의 집합과 유통이 용이한 곳에 세우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라네. 역사조작의 결과를 진실로 믿지말세나.

  • @양군사마
    @양군사마 5 лет назад

    홉승골은 몽고에 있는데,,,,압록강변에서..뭘하고 있는지.,,,이래서...InPUT을 의심하지 않는 학자들은 한계가 늘 있는거지.....신채호 한계가 같은분임.....ㅉㅉㅉ

  • @칸다께오
    @칸다께오 4 года назад

    나ㅁ의나라에 있는 고구려가 무슨상관이야 깩깩깩

  • @dooyongpark9029
    @dooyongpark9029 5 лет назад +1

    그냥 넘어가려다 안되겠다 한마디로 만주는 고구려땅 아니었다. 그렇니까 제발 환인시하고 집안시 가서 고구려 운운하지마라.

    • @onnya4753
      @onnya4753 5 лет назад

      모르면 그냥 넘어가. 역사를 발로배웠나

    • @dooyongpark9029
      @dooyongpark9029 5 лет назад

      @@onnya4753 사마천하고 삼국사기 제대로 읽으면 저런 애기하기 힘들다. 저건 너무 한반도 위주로 압축해놓은 이론이지 사료대로하면 저기에 국내성이 있을수가 없어.

    • @onnya4753
      @onnya4753 5 лет назад +1

      @@dooyongpark9029 역사책 안읽은 티난다. 만주에 고구려 없었으면 고구려는 한반도 안에만 있었단 소리냐? 소설 그만 써라.

    • @dooyongpark9029
      @dooyongpark9029 5 лет назад

      @@onnya4753 너는 요동이 지금 요동이라 생각하냐? 압록이 지금 압록인줄 아냐? 더 공부하고와라.

    • @onnya4753
      @onnya4753 5 лет назад

      @@dooyongpark9029 너가 처음 쓴 글과 다른 딴 소리 하지말고. "한마디로 만주는 고구려땅 아니었다." 너가 쓴 이 말 뜻이 뭐냐? 요동과 압록과 상관없이 만주지역은 변함없이 만주야. 거기 고구려가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