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송나라와 금나라 중간에 있다 는 외교문서 고려가 몽고에 군사원조 40만 고려사 원사 대륙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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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окт 2024
  • 고려사에 송나라가 금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고려한테 길을 빌려 달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송나라와 금나라에 사이에 고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내용은 고려는 한반도와 대륙에 걸쳐 있다는 것입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고려사에서 송 띠고 길을 띠고 금 으로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1128년 06월 16일 송 사신 양응성이 금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기를 청하다
    1128년 08월 18일 송 사신 양응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글을 다시 보내다
    1128년 08월 22일 송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주지 못하는 데에 유감을 표하다
    에서 외교문서로 내용이 길고 복잡해서 핵심 원문 알려드리겠습니다
    1128년 08월 18일송 사신 양응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글을 다시 보내다 에서
    우리나라는 금국(金國)과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어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제 귀국의 사절이 우리 땅을 경유하여 그곳으로 간다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불화가 생겨 발길을 미처 돌리기 전에 벌써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사절들이 우리 땅을 경유하여 저 나라로 간다면 저들도 반드시 우리 땅을 경유하여 귀국에 답례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동쪽으로 큰 바다를 접하고 있어 특히 수전(水戰)을 잘합니다. 그들은 답례의 사절을 보내는 것을 핑계하여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의 형세(形勢)를 상세히 알아내고 만일 전함(戰艦)을 준비하여 바다를 따라 남하해서 불의의 공격을 가한다면, 북쪽으로는 육전(陸戰)에, 남쪽으로는 해전을 치르느라 고통을 당할 것이며 위 아래로 적을 받아들여 반드시 큰 우환이 될 것이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에서 고려영토는 북쪽 금나라에 접해 있고 남쪽은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이 있다고 합니다,
    128년 08월 22일 송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주지 못하는 데에 유감을 표하다
    만약 귀국의 사절이 우리로부터 길을 빌렸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그 때를 맞추어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혹은 군사를 일으켜 위협하고 문책을 가하거나, 혹은 답례의 사절을 보내는 것을 핑계대고 통행을 요청할 것이니 〈우리나라는〉 요충에 위치해 있으면서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더불어 싸우기 어려우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하였으니 귀국에 화(禍)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현재 분하고 억울하여 주먹을 쥐게 할 뿐 아니라 뒷날 두고 두고 후회할 일이 될 것입니다 에서, 고려는 금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고려는 한반도와 중국 동부해안의 거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임을 알수 있습니다, 원사에는 고려가 몽고에 40만명 군사원조를 하였다고 합니다 원사 원문 내용입니다,
    원사 야율유가가 몽고군 등과 함께 고려로 도망한 함사를 포위하고 고려군과 함께 그를 정벌하다
    1218년
    무인년(1218)에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몽고군과 거란군 및 동하국(東夏國) 원수 호토(胡土)의 병사 100,000을 거느리고 함사(喊舎)를 포위하였다. 고려(高麗)가 병사 400,000을 원조하여 그를 이겼다. 함사가 스스로 목을 매어 사망
    송 사신 양응성이 금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기를 청하다
    1128년 06월 16일
    양응성(楊應誠) 등이 사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어록(語錄)을 왕에게 올려 아뢰기를,
    “옛날 주(周) 왕실에 재난이 많이 일어나자 어떤 사람이 진 문공(晋 文公)에게 말하기를 ‘제후의 마음을 얻는 데 왕에게 충성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제후가 그것을 믿을 것이고 또 크게 의로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 문공은 이미 주 왕실을 안정시키고 이어 패업(覇業)을 이루었으니, 이는 역사에 실려 영원히 빛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귀국은 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 중 가장 큰 나라로 불리며, 대대로 충순(忠順)함을 나타냈습니다. 서로 사절을 통하게 된 이후 우리나라에서 귀국을 대우할 때는 은혜로운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여 조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어려운 때를 만나 국가에 사고가 많더니, 뜻밖에 북쪽 오랑캐가 일을 꾸며 결국 〈흠종과 휘종〉 두 임금이 멀리 가 계시게 되어 상하가 근심과 걱정으로 조금도 편안할 겨를이 없습니다. 거듭 생각하건대, 귀국은 예를 지키며 의를 소중히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은혜로 대우한 지 여러 해가 되어 다른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제 위급한 때를 당하여 의리상 마땅히 허물을 꾸짖고 대의에 의지하여 황제에게 충성을 다 할 때입니다. 지금 황제가 처음으로 보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 국왕을 위문하시고 나아가서 뱃길을 빌려 두 임금을 모셔 오도록 부탁하였습니다.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던 날 이미 얼굴을 뵙고 일일이 말씀드렸고, 계속해서 관반소(館伴所)에 공문을 보내 거듭 알려 그 정성과 간절함이 지극하니 그 뜻을 모두 헤아리셨을 겁니다.
    귀국에서는 금(金)으로 통하는 도로가 험악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왕의 조상 때부터 금인(金人)들이 귀국 사신을 따라 조공을 바치러 입조(入朝)하였는데 그때에는 도로가 잘 통하여 다닐 수 없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국은 또 금이 이 길을 통하여 사신을 파견할까봐 걱정하지만, 금이 거란을 격파한 후로는 모두 하동(河東)과 산북(山北)을 통하여 사신을 보냈으니 절대로 이 길을 통하여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귀국에서 금이 이 일을 빌미로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한다면 이번에 양응성 등이 사신으로 갈 때 단지 무장을 하지 않은 군사 110인으로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먼저 가서 화친을 맺기만 하고 전투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귀국에서는 다만 뱃길로 인도하여 사신을 국경까지 이르게 해주십시오. 금에 〈우리가 간다는 것을〉 먼저 알려 가부(可否)를 묻고, 혹 인원수를 줄이라고 하면 모두 따를 것이니 이 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길 일은 없습니다.
    만일 귀국의 길을 통하여 두 황제를 모셔 오게 된다면 2백 년 동안 충순해 온 의리를 훼손시키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선대 황제께서 귀국을 우대하여 온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국의 공로에 대하여 예전의 배로 갚을 것이며, 사방의 모든 나라가 귀국의 영예로운 명성을 더욱더 우러러보고 높은 의리에 믿고 복종할 것이니 진실로 무궁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귀국의 중신(重臣)도 모두 협조하여 정성껏 받든 충성의 대가로 우리나라에서 표창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게 할 것입니다. 이는 한때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감히 속마음을 모두 드러낸 것이니 국왕께서는 중신들과 의논하여 이 일을 도와 성공하게 하십시오. 갑자기 일어난 오랑캐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한 오래 된 약속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빨리 결정하여 지체하기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송 사신 양응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글을 다시 보내다
    1128년 08월 18일
    당시 양응성(楊應誠) 등이 계속 오가며 〈요구를〉 그치지 않자, 왕이 다시 답문을 보내 이르기를,
    “이에 앞서 귀국에서 조서(詔書)를 보내 우리나라에게 여진(女眞)에 가서 〈귀국에〉 입조(入朝)하라고 알릴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진이 중국(中國)의 번성함을 엿보게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염려하여 감히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귀국 조정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방면으로 그들을 불러 타이르더니 금품과 비단까지 후하게 하사하였습니다. 저들은 이미 중국의 허실(虛實)을 알아내어 욕심을 갖고 먼 곳까지 말을 달려 깊이 쳐들어가 귀국의 수도를 소란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금국(金國)과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어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제 귀국의 사절이 우리 땅을 경유하여 그곳으로 간다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불화가 생겨 발길을 미처 돌리기 전에 벌써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사절들이 우리 땅을 경유하여 저 나라로 간다면 저들도 반드시 우리 땅을 경유하여 귀국에 답례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동쪽으로 큰 바다를 접하고 있어 특히 수전(水戰)을 잘합니다. 그들은 답례의 사절을 보내는 것을 핑계하여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의 형세(形勢)를 상세히 알아내고 만일 전함(戰艦)을 준비하여 바다를 따라 남하해서 불의의 공격을 가한다면, 북쪽으로는 육전(陸戰)에, 남쪽으로는 해전을 치르느라 고통을 당할 것이며 위 아래로 적을 받아들여 반드시 큰 우환이 될 것이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황제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이유를 천지가 환히 내다보고 있으며, 감히 꾸며낸 말이 아닙니다. 비록 많은 날 동안 오래 잡고 있어도 다시 다른 논의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날을 택하여 〈사신의 편에〉 회답의 표문(表文)을 부치려고 하였다. 양응성 등이 대답하며 말하기를, “귀국의 국왕과 신하들이 반드시 피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우리 의견을〉 따르지 않고 그저 우리 일행을 돌려보내려고만 하십니다. 이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부치는 표문을 받지 않고, 의례에 따라 베푸는 연회와 의복과 예물도 모두 거절하고 돌아갔다.
    외교문서

Комментарии • 76

  • @hanhan4980
    @hanhan4980  4 дня назад +1

    https:/네이버 소송. 베이징 고구려 만화책 전량 폐기
    /ruclips.net/video/JQOm_NEkCYQ/видео.html

  • @undaunted3202
    @undaunted3202 6 дней назад +32

    자~~ 이 문서에 대한 사학자들의 변명은 무엇이 였는지도 궁금하군요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7

      감사합니다

    • @On_horiz
      @On_horiz 6 дней назад +5

      그간 변명은 신뢰할 수 없다 였습니다 ㅋㅋ

  • @Ourhistory2023
    @Ourhistory2023 6 дней назад +15

    고리의 서북에는 거란이 북으로는 금나라가 있었는데 1125년 거란이 금나라에게 멸망당한 이후 고리의 접경지역은 유일하게 금나라 만 붙어 있다고 배웠을뿐 이러한 내용인 배우지 못함
    1125년 이후 금과 송은 남북으로 접해있다고 배웠지만 이러한 편지내용은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입니다
    불리한거는 입꾹 담고 있고 유리한거만 가르쳐주는 현실 ㅋ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3

      감사합니다 우리역사님 유튜브 덕분입니다

  • @three.empires
    @three.empires 6 дней назад +13

    금 ㅡ 고려 ㅡ 송
    고려의 영토가 대륙동부와 한반도에 걸쳐 있음을 증명하는 외교문서들을 알기쉽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hanhan4980
      @hanhan4980  5 дней назад +2

      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101보병-d7v
    @101보병-d7v 5 дней назад +6

    기록에 나온 대로면 우리 고려는 정말로 금과 송의 사이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송이 고려한테 길을 빌려달란 사신을 보낼 필요가 전혀 없죠

  • @김성태-i6b6j
    @김성태-i6b6j 5 дней назад +3

    이렇게 훌륭한 자료를 보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user-zh8e
    @user-zh8e 6 дней назад +12

    이제 정치권에서도 친일역사에 대한 역사 바로 잡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친일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2

      맞습니다

    • @yuma6976
      @yuma6976 День назад

      우리라도와 좌파틀이 제일싫어하는 건데요 중공을 섬겨야지 대들면 쓰나요 셰셰하면서사세요

  • @어쩔꼰대-s2c
    @어쩔꼰대-s2c 6 дней назад +8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화이팅

  • @스핀트로닉
    @스핀트로닉 6 дней назад +14

    길을 빌려주지 않으면 고려를 치면 될 것을... 왜 고려를 치지 못하였을까?. '풍신수길'은 명을 치러가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 했을 때 조선에서 거절함으로 조선을 침략했는데. 송은 고려를 칠 힘이 없거나 고려가 너무 강하였거나. 둘 중 하나였겠네요.

    • @mooyook2
      @mooyook2 6 дней назад +2

      빙고요~ !

    • @dufwjd
      @dufwjd 5 дней назад +2

      둘중 하나가 아니라 둘다인듯 합니다 송이 고려에 비해 약하고 고려가 강하여 송이 고려를 감히 공격할 엄두를 못내는 상황

  • @minsay7499
    @minsay7499 6 дней назад +11

    친구따라 강남간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이런 우리나라 속담이 왜 존재할까? 설마 강남이 현재 서울의 강남일까?😅😅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1

      맞습니다 고려 강화가 강남 남경입니다 고려 어화원에서 귤을 키워내요
      전(傳)에 이르기를
      파한집(破閑集) 권하(卷下)
      어제 한림원[金閨]을 나와 어화원(御花苑)에 이르러 높이가 1장(丈)이나 되는 귤나무를 보았는데, 맺힌 열매가 매우 많았다. 어화원 관리에게 물어보니, “남쪽 지방 사람이 바친 것인데, 날마다 소금물로 뿌리에
      2024. 8. 10. - '창왕'은 후대에 만들어진 왕호로, 휘인 '창(昌)'에다 '왕'을 붙인 것이다. 휘 때문에 피휘를 위해 수창궁이 '수령궁(壽寧宮)'으로 잠깐 개칭된 적
      壽寧宮을 구글에서 검색하면 자금성이 나오내요
      수영궁을 영수궁으로 ㅡ
      자금성이 1406년 수창궁과 차이 20년
      1384년 최영은 일찍이 이성림(李成林)·이자송(李子松)·염흥방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昌宮)을 지었다. 궁궐이 완성되어 최영 등이 하례하자 신우가 환관 이광(李匡)을 시켜 말하기를, “큰 궁궐을 5년이나 걸려 완성하였으니 무엇으로 경들에게 보답하겠는가 에서 한양 조선 궁궐 건축 20년전에 자금성에 궁궐을 5년이나 걸려 건축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 @정도령-h8z
    @정도령-h8z 5 дней назад +5

    만주와 반도, 장강(양자강) 남북에 걸쳐진 고려만이 금과 송사이의 고려와 귤이 재배되는 무주,강주 그리고 그 남쪽에 송이 설명되겠죠.

  • @happyhan608
    @happyhan608 День назад +1

    😊👍🎉❤

  • @user-zh8e
    @user-zh8e 6 дней назад +6

    빨리 고대사 역사 청문회가 방송을 통해 전국민에게 알려져야하는데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1

      맞습니다

    • @아넷-p7b
      @아넷-p7b 4 дня назад

      참역사를 모든 국민들이 올바르게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더러운 추잡한 식민사관의 거짓 역사 폐기처분하고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6 дней назад +8

    동녕부(쌍성총관부)의 삭제
    (대명여지도 중중기본)
    고려경계 기준점의 상실.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6 дней назад +9

    고려의 속주였던 康州의 삭제
    (대명여지도 중초본)
    고려경계 기준점의 하나

  • @user-hk8px4bt8r
    @user-hk8px4bt8r 6 дней назад +15

    예전 이 내용을 다른 유튜브에서 처음 보고 고려부터 역사 공부를 하기 시작 했음 공부하다 보니 우리 영토 관련해 잘 못되고 왜곡 된 내용이 많다는 걸 앎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4

      천리장성을 만리장성으로 보면 됩니다

    • @아넷-p7b
      @아넷-p7b 4 дня назад

      천리장성이 만리장성이군요 명나라 때에. 증개축했나 봅니다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6 дней назад +7

    출하점전투~ 내외몽골에 도착
    (대명여지도 중기본)

  • @jumun11
    @jumun11 5 дней назад

    감사합니다

  • @mooyook2
    @mooyook2 6 дней назад +3

    그렇죠 사서에 등장하는 이런 부분을 타겟으로해서 따져 묻고 주장해야지요.
    그냥 단순히 중국내에도 한국과 같은 지명이 있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백제,신라,고려,조선이 중국에 위치하고 자금성이 개경이라고 주장하기엔
    식민 사학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안 먹히죠.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6 дней назад +7

    나주가 호광성에 도착 (대명여지도 말중본)
    고려경계 기준점의 이동.

  • @윤현월-x9s
    @윤현월-x9s 5 дней назад +2

    선생이 그나마 개경의 위치를 비교적 잘 찾았네요. 강도도 그렇고... 제가볼 때 강도는 선생의 정보가 정확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산동성은 강화도가 아니였네요. 전 개경도 어느정도 찾았을 지도 모릅니다. 박연폭포도 찾았어요. 선생의 강도 근처에서 찾았습니다. 선생의 정보 추적은 나름대로 일관성도 있고 신뢰성도 있어요. 다만 몇가지 고려사 내용도 함정이 있을거라 보고 있으니 그러한 점만 유의하면 고려사 모든 비밀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보고 있습니다. 나는 개경을 찾는데 선생의 일관된 정보 속에서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큰 도움을 받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6 дней назад +9

    낙수와 낙양이 하남에 도착
    (대명여지도 중중기본,중중초본)
    황하가 大河에 도착 (중초본)
    장강이 大江에 도착. (대명여지도 중중기본)
    출발지의 삭제는 중중초본

  • @윤현월-x9s
    @윤현월-x9s 5 дней назад +2

    개경의 위치를 찾으면서 삼국사기도 고려사와 동시에 엄청난 세탁이나 왜곡이 함께 했을 가능성도 함께 찾았습니다. 그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시기의 정벌기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라는 결론도 어느 정도 내린 상태입니다. 어 그럼 책보고 선생도 생각보다 많이 틀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도 어느정도 깨달았습니다. 이글도 책보고 선생이 봤으면 좋겠네요. 방향성이 중요하지 약간씩 관점이 틀린것은 수정하면 될일이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고려사 삼국사기 왜곡된 것에 비하면 그러한 약간씩 틀리는 문제는 중요한 일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틀렸으면 틀렸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수정하면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면 될 일 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삼국사기 고려사 제대로 해석할 사람들 아무도 없어요. 제가 찾았다는 개경조차도 저 스스로도 그렇고 앞으로도 10번도 더 넘게 자체검증도 계속 할 겁니다.
    이 개경을 찾고 내린 나의 결론은 생각보다 고려사의 기록은 정확하다.

  • @JK-fi3zl
    @JK-fi3zl 6 дней назад +5

    ㅎㅎ 요 며칠전에 동영상을 하나 봤는데 역사학 교수 오순제씨가 가야와 일본신화를 설명하면서 중간에 자기는 한문도 모르고 일본말도 모르는데 그래도 문서들을 다 해석하고 기록했다 하더라고요.
    그 영상의 내용이 실제 일본말이나 한자로 나오는 문서에 대한 내용과 일치하는지는 나도 두 문자들을 몰라 확언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 우리 사학자들의 문제가 과거에 그들이 공부할땐 한자도 모르고 역사를 번역해서 놓은 싸이트 같은 것도 없어서 대충 한문으로 번역해서 얼렁뚱땅 만들어 놓은 역사 교과서를 달달달 외웠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일본 넘들이 왜곡한 역사로 공부를 하고 이걸 우리에게 전파 했으니 우리 일반인들은 얼마나 처참한 상황을 맞이 했겠습니까? 이제라도 제대로 된 역사가 기록이 번역돼서 나오고 일반인들도 진실을 공부를 하고 있으니 조만간 모든게 제대로 잡히리라 확신합니다.
    다만 바라건대 수익창출이 되는 유투브에만 집중하지 말고 위키백과나 구글등 만인이 보는 온라인 문서고에도 진실된 역사를 올려 전 세계가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알아 봐 줄 수 있게 할수 있음 좋겠습니다. 위키 문서는 우리 각자가 한글로 적어 넣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어 넣다보면 사람들이 구글 번역기를 통해서라도 진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으로 가짜 역사로 도배된 중국 문헌들은 쓰레기임이 밝혀지겠지요.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맞습니다

    • @carlysu37
      @carlysu37 5 дней назад

      이마니시 류, 미시나 쇼에이, 다카하시 도루, 나가 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오다 쇼고, 압록강에서 안산만까지라 고 한 쓰다 소키치(요사, 금사. 서압록하=물 수 변을 쓰는 록, 고려사는 푸를 청 변을 쓰는 푸를 록. 이들이 주장한것을 절대 불변 진리로 믿고 추종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넷-p7b
    @아넷-p7b 4 дня назад

    조작으로 얼룩지고 찢어진 우리의 역사를 하나하나 다시 복원시켜야 합니다

  • @곰발바닥-h6u
    @곰발바닥-h6u 6 дней назад +2

    서방 접경에서 위와 아래로 소소하게
    걸침.(당시의 분봉 관계의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
    전쟁을 허락해 달라는 의미로 해석

  • @야구인-d5y
    @야구인-d5y 5 дней назад +1

    송황제로 표기한건 송과 고려의 관계에 있어 왜곡된 부분이 없지 않은것 같은데.... 고려가 송의 상국이거늘 고러가 황제국이 아닌가?

  • @emd-ef4lm
    @emd-ef4lm 6 дней назад +5

    시대는 다르지만, 금나라도 신라니까, 신라시조의 모용씨는 백인인가요? 번역, 중국 바이두 백과사전> 慕容鲜卑是白种人吗? - 百度知道
    모용씨 키는? 慕容皝 191cm , 慕容恪 215cm , 慕容垂 188cm , 기타 생략 ...백인처럼 키 크네요
    모용씨 피부는 ? 백인처럼 하얗다 라고하여 白虏 라고 불렀다
    모용씨의 수염은 금발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금발 수염을 기른 ​​채 매우 백인처럼 보인다. 러시아인이네요

  • @applebite1
    @applebite1 5 дней назад +1

    고려가 대륙이었고 강성했음을 그리고 천자국 황제를 자처했음을 믿고 있는데. 송나라와의 외교문서에선 신하를 자청하고 상국을 대하는 모습이라 의아합니다. 고려사도 중원과의 관계부분이 나중에 왜곡된 것일까요? 고려의 땅이 황하와 양자강의 중하류를 모두 품고 있어 중원에 틀어박힌 역대 중원 왕조보다 인구수도 그렇고 농업 생산성과 경제에서 앞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윤현월-x9s
    @윤현월-x9s 6 дней назад +7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고려사의 97%는 중국대륙에서의 고려의 모습만 고려사에 남아 있습니다. 한반도라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3%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 그게 이 고려사의 수수께끼 같은 모습입니다. 거기에다 고려사 본문의 거짓된 역사도 7%정도 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게 송과 금나라 또는 거란과 관련되어 있는 기록들이다. 이게 지금까지 내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고려사의 모습입니다. 특히 고려사지 지리편에 나와 있거나 열전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하거나 참고해야 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 그 부분이 제일 많이 오염되었거나 중점적으로 역사 왜곡의 도구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고려사를 제대로 이해할려면 송사의 개략적인 역사 내용이라도 알고는 있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 고려사와 송사는 그 영토가 너무나 겹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EAST2MABBK
    @EAST2MABBK 6 дней назад +2

    내용에 송을 중국으로 해석해 놓은 것 같네요. 원문에 중국으로 써 있는것이 아니겠죠???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1

      고려사에서 보안주 어화원 검색해 보세요 ㅡ번역을 다르게

    • @carlysu37
      @carlysu37 5 дней назад

      진 한 수 당 명 요 금 명 청. 이런 나라는 있지만. “중원”을 차지한 나라들이죠. 중국은 없어요. 중공이 외교 수교하고서 “중국”이라고 불러 달라 했죠.

  • @jaehokims
    @jaehokims 5 дней назад +1

    금국 동쪽에 큰 바다가 있다는 말은 무슨 말? 그바다는 지금의 서해? 동해?

  • @jerome-e9k
    @jerome-e9k 5 дней назад

    40년 넘게 같은 내용으로 사기를 치네요.

  • @EAST2MABBK
    @EAST2MABBK 6 дней назад +2

    이 문서는 고려사나 송사에 있는것이 아니라 별도 문서(외교문서)로 남아 있는건가요?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4

      고려사에 있는 외교문서입니다

    • @김찰리-i5s
      @김찰리-i5s 6 дней назад +3

      보물로 지정된 고려사의 내용이죠. 식민사학자 놈들은 모른척 하는 내용들 입니다

  • @파란보리-p8t
    @파란보리-p8t 6 дней назад

    그때의 금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압록은 어디일까요? 복기대 교수는 지금의 요하로 보고 있는데요. 그런데 요하와 접하고 있다면 회수와 절강을 엿본다는 말은 설명이 안되네요.

    • @hanhan4980
      @hanhan4980  6 дней назад +2

      의견 감사합니다 압록위치입니다
      요하가 요수 이고 요수의 동쪽이 요동 ㅡ요동이 고려땅이라고 하면서 요동정벌은 어딜까요
      ruclips.net/video/edZ91DQMRnk/видео.html

  • @2f5lofbread57
    @2f5lofbread57 5 дней назад

    중국이라는단어 거슬 린다

    • @101보병-d7v
      @101보병-d7v 5 дней назад

      옛날에는 중앙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 중국이라고 했었다네요 지금처럼 국명을 가리키는 뜻이 아니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