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황현필 역사연구가 역사바로잡기 연구소장 많은 강의중 임진왜란중 들었슴다 세번이나 엉덩방아 찧으며 통곡했다고 기록이 있으니까 말씀하셨겠지요 이게 발단이였을까요 진린의 손자가 명나라 청나라에 누르하치에게 엄청 축소 되고 홍타이진가 명나라 끝날때 오랑캐 밑에서 살수없다 우리 할아버지가 목숨바쳐 싸우셨던 조선으로 가야지 해서 어디였더라 무튼 광동진씨랬어요 원래 광동진씨도 있고 무튼 기린다고 하드라구요 징비록인가 난중잡록인가 기억이 확실치 않아서 무튼 있어요 @@김희수-p1k
이순신은 결국 끝까지 자신을 시기하는 군주인 선조를 잘못만나서 평생동안 고생하다가 결국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강감찬은 대신 끝까지 자신을 총애하는 군주인 현종을 만난뒤로는 귀주대첩에서 승리해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음 이 두 명장들은 공통점이 많지만 강감찬도 이순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래도 나라를 지키려고 힘든싸움을 계속 할거임
노량해전은 당시 해전 상식을 뒤엎는 야간 해전이였습니다. 노량해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노량해전이 한 치 앞도 안보이는 심야에 벌어진 전투라는걸 간과하는데 심야 해전이라는건 당시로선 상식을 벗어난 전투였습니다. 당시에 선박은 레이더도 소나도 조명 시설 및 무선 통신 수단도도 없었기에 야간 항해 자체가 불가했습니다. 때문에 왜란 당시 거의 대부분의 해전은 낮에 벌어졌고 해가 지면 전투를 중단하고 일단 물러나는 것이 상식입니다. 피아 식별은 커녕 항해 자체도 어려운 야간에 조직적인 전술 구사는 불가능 했기에 야간에 해전을 한다는건 거의 미친 짓이였지요. 더우기 당시 선박간 의사소통은 깃발 신호를 이용했는데 심야에는 이런 신호 자체도 어려웠습니다. 한마디로 야간 해전이라는건 전술도 뭐도 없이 개싸움이 될 수 밖에 없지요. 따라서 상식적으로 야간에는 해전을 하지 않는 법이였습니다. 일본 수군은 이 상식을 역이용한 기동전을 시도했던 겁니다. 야간엔 배를 움직이지 않는다는 상식을 깨고 심야에 함대를 은밀히 이동시켜 공격 위치에 배치한 뒤 날이 밝을때 기습을 가함으로서 적의 허를 찌르려 했던 겁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격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선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그렇게 당했던거죠. 시마즈는 이 칠천량에서 거둔 성공 방식을 노량에서 한 번 더 써먹은 겁니다. 심야에 함대를 노량을 너머 순천 쪽으로 은밀히 이동시켜 날이 밝는데로 조명 연합 함대를 기습함으로서 칠천량과 같은 승리를 거두고자 했던거죠. 그러나 이번에 시마즈의 상대는 원균이 아니라 이순신이였습니다. 이순신은 순천을 구하러 오는 일본 수군이 칠천량때 처럼 심야 기동을 시도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고, 이에 이순신은 한 발 더 나가 심야 매복전이라는 상식을 깨는 대응을 했습니다. 예상되는 일본 수군의 이동로에 함대를 매복해서 기습을 가하면 일본 수군이 일단은 교전을 단념하고 남해 쪽으로 퇴각할 것으로 예측한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일본 수군 함대가 관음포로 퇴각할때 까지는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야간 매복에 놀란 일본 수군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야간 해전은 불가하다 판단하곤 일단 함대를 남해쪽으로 이동시키며 물러났습니다. 이에 조명 연합 함대는 퇴각하는 일본 수군 함대의 꽁무니를 쫓으며 이들을 남해 너머로 몰아냈습니다. 이대로면 새벽사이 일본 수군 함대는 일단 사천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기회를 노려야만 했고, 날이 밝기 전에 조명 연합군은 순천 앞바다로 돌아가 고니시가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망을 재구축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관음포에서 이순신도 예상 못한 돌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관음포에서 뱃길을 잘못 들어선 일본 함대가 관음포 만 지형으로 들어가 갖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던거죠. 캄캄한 야밤에 뱃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일본 수군 함대의 선두가 길을 잘못 든 겁니다. 이래서 야간 항해를 원래는 하지 않는 겁니다. 본의 아니게 일본 수군을 쫓아 관음포로 들어온 조명연합군 함대가 관음포의 출구를 막아버리니 일본수군은 꼼짝없이 만에 갖힌 상황이 되었고, 그러자 돌연 일본 수군은 뱃머릴 돌려 쫓아오던 조명연합 함대에 달려들었습니다. 어차피 더 물러날 곳도 없으니 이판사판으로 달려든겁니다. 그리고 이건 조명연합군이 허를 찔려버렸습니다. 진린, 등자룡, 이순신 등 지휘관들의 기함이 선두에 서서 함대를 이끌고 있었기에 이런 일본군의 역습에 선두에 있던 기함들이 바로 공격에 노출되어번 겁니다. 등자룡이 전사했고 진린의 전선도 일본군 전선에 둘러 쌓여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순신은 진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기함으로 전투에 임하다 눈먼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직접 북을 두드린 이유도 후위에 있는 전선들에게 서둘러 공세에 나서서 진린과 등자룡을 구하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였지요. 그만큼 이순신도 다급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갖혀버린 일본 수군 함대는 전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전술 구사는 불가능한 야간이였고 그냥 본능적으로 양측 전선들이 뒤섞여 난전이 벌어진데다가 적잖은 일본 수군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뭍에 올라 남해왜성으로 걸어가버렸습니다. 난전으로 만 입구가 막힌 상태에서 만 안쪽에 있던 일본 수군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니 이런 선택을 해버린거죠. 마침 남해 섬은 왜성이 들어서 있는 곳인지라 걸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었기에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겁니다.
노량전투의 주역은 명수군 진린이었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명수군에 작전 배속되어 주력 명수군을 길안내 역할봐 외곽 작전을 하는거였다. 조선수군은 순천의 고니시군을 압박하는 명수군 외곽에서 전초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마즈군은 외곽의 전초부대인 조선수군을 일거에 격파하고 이순신포함 다수의 지휘관이 사살당하고 다수의 함선이 나포당한 조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져 토킨다. 헌데 명수군이 개떼같이 출격하고 그 위세에 시마즈군은 공포에 질린다. 시마즈 기록에 명수군을 두려워했다고 되어있는데 얍삽한 한국 교수애들이 이순신을 두려워했다고 왜곡한다. 하지만 시마즈군은 분투해 혈전이 벌어지고 등자룡도 사살하고 진린도 죽다살아 튀나 일군도 오랜 전투로 지치고 화약도 소진되어 일단 퇴각한다. 명군과 일군은 승부가나지않는다. 헌데 죽다산 진린은 전의를 상실하고 작전을 포기하고 전면퇴각한다. 순천의 고니시군은 그 어떤 저항도 받지않고 유유히 거제로 퇴각한다. 일수군이 영수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게 노량의 팩트다. 시마즈군은 이 전투로 용맹함으로 유명세를 타고 그덕에 세끼가하라 전투에서도 살아남아 자자손손 잘먹고 잘산다. 도쿠가와도 노량의 전공을 인정해 시마즈가문은 멸문 위기에서 살아남는다.
복귀한 이순신은 미친 경영 능력을 발휘해 정유년 이듬해 조선 수군은 60척의 전선을 거느린 규모로 재건해냈지만 전성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력이였으며, 이것으로 300여척이 넘은 대규모 일본 수군을 견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음. 그렇기에 진린이 이끈 명군 300여척의 함대는 비록 조선 수군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남해의 일본 수군을 견제하는데 필수 전력이였지 없으니 만 못했다 할 바가 아님.
노량해전 당시 조선측 수군 전력은 판옥선 60척 설과 80척 설이 있는데, 대략 60척에서 80척 판옥선에 수군은 7천에서 9천 정도로 칠천량 해전 참패 수군 전멸 이후 李舜臣의 행정과 경영 능력으로 빠르게 재건 되지만 칠천량 해전 전력의 50% 정도 였습니다. 이에 비해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수군 도독(都督) 진린(陳璘) 장군의 戰力은 전선300척에 수군 1만 8천으로 비록 전투 능력은 조선 판옥선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무기 火箭(특히 수전에서 배를 불살라 버리는 火箭은 명나라의 주무기 였음)과 불량기포 불덩이를 날리는 포는 노량해전에서 일본군 전선과 수송선 200여척을 분멸(焚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만약에 명나라 수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순신이 거느린 판옥선 60척에서 80척 전력으로 고니시유키나카(小西行長) 왜교성 순천만을 봉쇄하거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300척과 노량에서 대적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순신과 싸운 장수는 시마즈 요시히로라고 저기 일본 남부 사츠마 지역의 제법 덩치가 있는 다이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같은 애송이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다이묘였다. 자꾸 고니시 가토같은 애송이를 무슨 뛰어난 장수인양 착각하는데 난 고쿠다카라는 명확한 근거를 들고 와서 고니시와 가토를 애송이로 칭하는 거다. 20만 석 따리면 다이묘 중에서도 하위권 다이묘다. 고쿠다카는 쌀 생산량이지만 이게 바로 병력 충원의 척도였다. 40석 당 1명. 시마즈 요시히로는 73만 석이나 되는 엄청난 근육질의 다이묘였다. 물론 나중에 가토는 20만 석에서 52만 석으로 몸집이 대폭 커지긴 하지만 그게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고니시의 20만석을 가토가 빼앗고 이것저것 더 붙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고쿠다카의 존재를 모르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강이라는 걸 모르지.
근데 이순신장군을 사살한 일본군은 누구일까?? 일본에서도 그 일본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아무레도 자기가 이순신을 사살했다는것도 몰랐을듯... 만약 모든것 알았다면 그 일본군은 특진을 했을거임.. 병사였다면 다이묘까지 특진 했을거고 귀족으로 신분상승 했을텐데
야간에 벌어진 전투였으니 제대로 조준하고 쏘았을리도 만무하고 대충 적선 실루엣을 보고 쏜 총탄 중 하나가 맞은거죠. 솔직히 말해 노량해전 당시 화승총(조총)은 일본군만 쓰던게 아니라 명군과 조선군도 운용하던 상황이라, 충무공에게 날아온 탄환이 일본군이 쏜 것이라고 특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피아 식별도 잘 안되는 야간에 대충 적 처럼 보이는 뭔가를 향해 난사를 하던 상황이였을테니.
1. 명량대첩은 위대한 승리인건 맞지만 일본군의 서해 진입을 좌절 시킬 정도의 큰 승리는 아니였다. 여전히 일본군은 300여척의 함대가 건재하게 남아 있었고, 울돌목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곧 고군산군도로 퇴각했으며, 일본수군은 서해로 진입해 전라도 해안을 약탈했다. 적군의 서해 진입을 막았다는 선조의 언급은 되려 명량 대첩의 전과를 과장한 것임. 2. 노량해전은 사로병진 작전을 알아야 전투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 전투임. 엄밀히 말하면 노량해전은 사로병진 작전의 마지막 전투였음. 그러나 국내 역사학자들은 사로병진을 말하길 꺼림. 명군이 거의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 작전이였기에 이걸 설명하면 명군은 싸움에 소극적이고 민폐만 끼쳤다는 국뽕 사관의 거짓말이 들통나기 때문. 명군은 도움도 못된 민폐집단에 머물러야하며, 일본군도 단지 히데요시가 죽어서가 아니라 이미 패색이 짙어져 더 버틸 수 없어서 달아난 것으로 설명해야함. 그래야 임진왜란이 조선이 승리한 전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정유재란때 그냥 왜군은 남해에서 농성이나 하며 힘겹게 버텼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설명하며 사로병진에 대해선 함구하곤 노량해전만 강조함. 3. 그러나 실제 역사는 좀더 참담했음. 명군은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각오로 10만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해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 수로군의 4개 군단을 결성해서 4개 방면으로 총공세를 감행했음. 이것이 사로병진 작전임. 그러나 동로군, 중로군은 모두 패배했음. 특히 중로군은 사천의 시마즈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주했음. 한편 이순신의 함대는 명 수군과 연합하여 수로군을 결성하고, 유정이 이끄는 서로군과 함께 순천의 고니시를 육해 양면에서 공격했음. 그러나 동로군과 중로군의 패퇴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로군과 수로군은 곧 사천이나 울산 방면의 일본군이 순천을 구하러 올 것에 대응하느라 순천 공세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음. 이것이 노량 해전 전까지의 전황임. 4. 명 장수들이 일본군에 뇌물을 받아 안싸웠다니 운운하는건 사실과 다름. 동로군과 중로군의 패배로 이동이 자유로워진 사천 및 울산 방면의 일본군이 순천 구원에 나설 것은 시간 문제였고, 이런 상황에서 소모적인 공성전을 지속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였음. 그들은 사로병진 작전 이전에 벌어졌던 울산성 전투에서 울산성을 지원하려는 일본군의 접근을 알고도 울산성 공세를 지속하다 낭패를 격은 경험이 있었음. 뇌물받고 병력 물려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 사실상 실패로 귀결된 사로병진 작전을 지속할지 이대로 물러나야할지를 두고 고민하던 똥줄타는 상황이였음.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역사 기록은 무시하고 국뽕과 인기에 사료 잡혀 명나라 육군과 수군이 별도움 없었다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는데 정유재란 당시 조선 정규군은 훈련도감에서 양성한 삼수군 3만과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거느린 판오선160척에 병력 2만이 전부였다. 임진왜란때 17만에 달하던 관군과 의병은 1593년과 1594년 기근과 전염병으로 대부분 해산되었고, 1597년 정유년에 재침한 일본군은 14만 이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고 이번에는 영나라도 신속하게 육군과 수군을 파병했는데, 육군은 10만 수군인 2만이었다. 만약 명나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 전멸 이후 3만이 전부인 육군으로 14만에 닿하는 일본군을 단독으로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울돌목 해전도 전석31척 격파하고 다음날 빠르게 퇴각하여 무안 영광 위도 고군산군도까지 물러났으며, 일본군은 다음날 이순신 함대를 추격했고 피난하고 있던 조선 백성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진행했다. 무안에서는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시체가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다고 강항의 강항록에 기록되어 있다. 영광 앞바다까지 진출 했던 일본 수군은 바다에서 조선 관리 강항을 사로잡고 겨울이 다가오자 다시 남해 순천만까지 퇴각한다. 일본군이 퇴각하자 이순신의 남진하여 목포 앞바다 보화도에 수군 본영을 세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해상으로 피난했다가 일본군에게 잡힌 피난민의 이야기를 듣고 괴로워서 더 들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수군 화포 천지현황도 대부분 근거리 15m이내에서 직사로 포를 쏴서 적선을 무력화 내지는 파괴했는데, 조선시대 화포의 성능을 모르는 국뽕 학자들은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화포를 쏘아서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를 방송에서 하고 있는데, 눈짐작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 사격하는 조선시대 화포는 명중율이 형편없었다. 더군다나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배 위 갑판에서 전선을 명중시키는 더더욱 어려웠다.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거북선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 밀집한 전선을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천지현황 화포로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군 전사가 대부분도 일본군 조총 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그 명단을 올렸다. 그런데 엉터리 사학자들은 조선의 화포가 사거리가 조총보다 길어서 100m밖에서 화포를 쐈다고 국뽕같은 주장을 한다. 재래식 화포는 사러리가 100m 넘어가면 멍중율이 0에 가깝다. 그리고 조선시대 화포는 화약량을 잘못 장약하면 포열이 파괴되어 오히려 아군이 피해를 입었고, 영화처럼 연속사격이 불가능했다. 일단 한번 사격하면 포열의 열기 때문에 재장전 할려면 열기를 식혀야 했고, 2번 이상 연속 사격은 어려웠다.
선조도 첫 승리부터 크게 칭찬하고 높이 평했지만 내부원흉인물과 세력에 의해 끝없이 비하하고 폄회되 모함되어 되어 제대로된 지원도 못받고 이순신과 의병들 역적되고 이순신은 이용용도때문에 죽다살아났지만 의병들은 다 죽였죠 그 원흉을 아는 것이 이순신 때문에 한국사람으로 살고 있는 자들의 숙제죠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셔서 오늘 영상을 보고는 눈물이 나오네요
잘 봤습니다
진린은 전투가 끝난후 이순신장군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먹고 엉덩방아찧으며 통곡했다죠. 장군님 살아있을땐 그렇게나 전쟁 끝나면 명나라로 데려가려고 샤바샤바할정도로 좋아했다고...
엉덩방아를 찧은 정도가 아니라 세번이나 쓰러지면서 이순신 장군 시신 곁으로 다가가 애도하며 슬퍼했다 합니다.
@@김희수-p1k 노량 해전 후반에 진린은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을 찾아갔으나 전사 소식을 듣고 두세 번씩이나 쓰러지며 온 천지가 떠나가라 크게 통곡하여 슬피 울었다고 하네요
사실상 절규에 가까운 대성 통곡이었죠
제가 황현필 역사연구가 역사바로잡기 연구소장 많은 강의중 임진왜란중 들었슴다 세번이나 엉덩방아 찧으며 통곡했다고 기록이 있으니까 말씀하셨겠지요 이게 발단이였을까요 진린의 손자가 명나라 청나라에 누르하치에게 엄청 축소 되고 홍타이진가 명나라 끝날때 오랑캐 밑에서 살수없다 우리 할아버지가 목숨바쳐 싸우셨던 조선으로 가야지 해서 어디였더라 무튼 광동진씨랬어요 원래 광동진씨도 있고 무튼 기린다고 하드라구요 징비록인가 난중잡록인가 기억이 확실치 않아서 무튼 있어요 @@김희수-p1k
정치라는게 참.. 일인자는 언제나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아랫사람을 결코 용납할 수 없으니.
지금 시대 사회생활도 비슷해요
잘하는 부하직원을 시기합니다
언제가 나보다더잘해 내 위로 승진할까봐
조선 자체가 쿠데타 왕조인데 용납할리가 없지 애초에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도 안 주던 자리고 줬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길게는 안 줬음
이순신 이야기는 뻔히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항상 다시 들을때마다 가슴이 벅찬다
이순신 ...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는 말외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순신은 결국 끝까지 자신을 시기하는 군주인 선조를 잘못만나서 평생동안 고생하다가 결국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강감찬은 대신 끝까지 자신을 총애하는 군주인 현종을 만난뒤로는 귀주대첩에서 승리해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음
이 두 명장들은 공통점이 많지만 강감찬도 이순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래도 나라를 지키려고 힘든싸움을 계속 할거임
고려와 조선은 다릅니다 많이 다름
인조는 김자점을 만나서...
노량해전은 당시 해전 상식을 뒤엎는 야간 해전이였습니다.
노량해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노량해전이 한 치 앞도 안보이는 심야에 벌어진 전투라는걸 간과하는데 심야 해전이라는건 당시로선 상식을 벗어난 전투였습니다.
당시에 선박은 레이더도 소나도 조명 시설 및 무선 통신 수단도도 없었기에 야간 항해 자체가 불가했습니다. 때문에 왜란 당시 거의 대부분의 해전은 낮에 벌어졌고 해가 지면 전투를 중단하고 일단 물러나는 것이 상식입니다. 피아 식별은 커녕 항해 자체도 어려운 야간에 조직적인 전술 구사는 불가능 했기에 야간에 해전을 한다는건 거의 미친 짓이였지요. 더우기 당시 선박간 의사소통은 깃발 신호를 이용했는데 심야에는 이런 신호 자체도 어려웠습니다. 한마디로 야간 해전이라는건 전술도 뭐도 없이 개싸움이 될 수 밖에 없지요. 따라서 상식적으로 야간에는 해전을 하지 않는 법이였습니다.
일본 수군은 이 상식을 역이용한 기동전을 시도했던 겁니다. 야간엔 배를 움직이지 않는다는 상식을 깨고 심야에 함대를 은밀히 이동시켜 공격 위치에 배치한 뒤 날이 밝을때 기습을 가함으로서 적의 허를 찌르려 했던 겁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격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선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그렇게 당했던거죠.
시마즈는 이 칠천량에서 거둔 성공 방식을 노량에서 한 번 더 써먹은 겁니다. 심야에 함대를 노량을 너머 순천 쪽으로 은밀히 이동시켜 날이 밝는데로 조명 연합 함대를 기습함으로서 칠천량과 같은 승리를 거두고자 했던거죠.
그러나 이번에 시마즈의 상대는 원균이 아니라 이순신이였습니다. 이순신은 순천을 구하러 오는 일본 수군이 칠천량때 처럼 심야 기동을 시도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고, 이에 이순신은 한 발 더 나가 심야 매복전이라는 상식을 깨는 대응을 했습니다. 예상되는 일본 수군의 이동로에 함대를 매복해서 기습을 가하면 일본 수군이 일단은 교전을 단념하고 남해 쪽으로 퇴각할 것으로 예측한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일본 수군 함대가 관음포로 퇴각할때 까지는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야간 매복에 놀란 일본 수군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야간 해전은 불가하다 판단하곤 일단 함대를 남해쪽으로 이동시키며 물러났습니다. 이에 조명 연합 함대는 퇴각하는 일본 수군 함대의 꽁무니를 쫓으며 이들을 남해 너머로 몰아냈습니다. 이대로면 새벽사이 일본 수군 함대는 일단 사천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기회를 노려야만 했고, 날이 밝기 전에 조명 연합군은 순천 앞바다로 돌아가 고니시가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망을 재구축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관음포에서 이순신도 예상 못한 돌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관음포에서 뱃길을 잘못 들어선 일본 함대가 관음포 만 지형으로 들어가 갖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던거죠. 캄캄한 야밤에 뱃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일본 수군 함대의 선두가 길을 잘못 든 겁니다. 이래서 야간 항해를 원래는 하지 않는 겁니다.
본의 아니게 일본 수군을 쫓아 관음포로 들어온 조명연합군 함대가 관음포의 출구를 막아버리니 일본수군은 꼼짝없이 만에 갖힌 상황이 되었고, 그러자 돌연 일본 수군은 뱃머릴 돌려 쫓아오던 조명연합 함대에 달려들었습니다. 어차피 더 물러날 곳도 없으니 이판사판으로 달려든겁니다. 그리고 이건 조명연합군이 허를 찔려버렸습니다. 진린, 등자룡, 이순신 등 지휘관들의 기함이 선두에 서서 함대를 이끌고 있었기에 이런 일본군의 역습에 선두에 있던 기함들이 바로 공격에 노출되어번 겁니다. 등자룡이 전사했고 진린의 전선도 일본군 전선에 둘러 쌓여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순신은 진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기함으로 전투에 임하다 눈먼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직접 북을 두드린 이유도 후위에 있는 전선들에게 서둘러 공세에 나서서 진린과 등자룡을 구하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였지요. 그만큼 이순신도 다급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갖혀버린 일본 수군 함대는 전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전술 구사는 불가능한 야간이였고 그냥 본능적으로 양측 전선들이 뒤섞여 난전이 벌어진데다가 적잖은 일본 수군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뭍에 올라 남해왜성으로 걸어가버렸습니다. 난전으로 만 입구가 막힌 상태에서 만 안쪽에 있던 일본 수군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니 이런 선택을 해버린거죠. 마침 남해 섬은 왜성이 들어서 있는 곳인지라 걸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었기에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겁니다.
와 고견 잘보았습니다ㅋ
대단합니다.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아시는지?참으로 궁금합니다.
관음포 전투시에는 이미 날이 밝아가는 시점입니다
오늘도 너무나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풍신수길도 풍신수길이지만 저 선조는 이름만 들어도 이제 혈압만 올라간다~
그래도 선조가 장비였으니 다행 아닙니까. 만력제 유비님~.
@@아들손-p2l 만력제는 관우
고려천자께서 나중에 식량도 지원했다더군
잘봤어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네요
이순신 장군이 살아남았다면 선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선조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되었기에 그냥 장렬히 전사하신 듯.
ㄹㅇ ㅋㅋㅋㅋ
@@너와나-h3b 내이름은 김근육 올해로 12수다 이런 얘기에요
잘보고갑니다
노량해전의 흐름이 한눈에 보이는 대단한 영상.
요즘 팩스토리 폼 너무좋아 뿌듯
이순신은 그야말로 이 삼대장을 무쌍시킨 셈
한창 위태위태한 상태에 벼랑에 몰린 채로
원균 - 선조 - 풍신수길(Feat. - 명국의 소인배 무리)등등 ㄷㄷㄷ
@@표펙크쿻-o6q ???: 어어 밀지마라
아아 이순신 장군님
목소리연기가 너무 재밌음 ㅋ
촉한의 충무처럼 사후에도 적을 대파한 충무공 이순신 ㅠㅜ
처음부터 정주행해서 여기까지 다시 봤습니다ㅎㅎ두 번 보니 더 새롭네요..^^
제일 존경하는 위인 이순신 스토리는 마지막까지 감동입니다ㅠ
긴 시간을 함께해 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노량전투의 주역은 명수군 진린이었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명수군에 작전 배속되어 주력 명수군을 길안내 역할봐 외곽 작전을 하는거였다.
조선수군은 순천의 고니시군을 압박하는 명수군 외곽에서 전초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마즈군은 외곽의 전초부대인 조선수군을 일거에 격파하고 이순신포함 다수의 지휘관이 사살당하고 다수의 함선이 나포당한 조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져 토킨다.
헌데 명수군이 개떼같이 출격하고 그 위세에 시마즈군은 공포에 질린다.
시마즈 기록에 명수군을 두려워했다고 되어있는데 얍삽한 한국 교수애들이 이순신을 두려워했다고 왜곡한다.
하지만 시마즈군은 분투해 혈전이 벌어지고 등자룡도 사살하고 진린도 죽다살아 튀나 일군도 오랜 전투로 지치고 화약도 소진되어 일단 퇴각한다.
명군과 일군은 승부가나지않는다.
헌데 죽다산 진린은 전의를 상실하고 작전을 포기하고 전면퇴각한다.
순천의 고니시군은 그 어떤 저항도 받지않고 유유히 거제로 퇴각한다.
일수군이 영수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게 노량의 팩트다.
시마즈군은 이 전투로 용맹함으로 유명세를 타고 그덕에 세끼가하라 전투에서도 살아남아 자자손손 잘먹고 잘산다.
도쿠가와도 노량의 전공을 인정해 시마즈가문은 멸문 위기에서 살아남는다.
이순신이 마지막에 붙은 얘들이 진땡인 얘들이었거든 사쓰마번 시마즈 요시히로 유명하지
마지막 시마즈는 진짜 수군이었는데 그걸 상대로도 압승하니 역시 장군님 ㅜㅜ나중에 근대일본제국해군의 근간이되는 사쓰마번인데
진심으로 이순신 존경한 진린
진짜 이순신 장군님이 살아서이겼다면 그리고 임진왜란에 목숨 바쳐 싸운 장군님들과 병사 그리고 수많은 의병들에게 공식이 돌아갔어요 했다 한양을 버리고 간 관료들이 공신이 되는 것이 아닌....
복귀한 이순신은 미친 경영 능력을 발휘해 정유년 이듬해 조선 수군은 60척의 전선을 거느린 규모로 재건해냈지만 전성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력이였으며, 이것으로 300여척이 넘은 대규모 일본 수군을 견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음. 그렇기에 진린이 이끈 명군 300여척의 함대는 비록 조선 수군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남해의 일본 수군을 견제하는데 필수 전력이였지 없으니 만 못했다 할 바가 아님.
노량해전 당시 조선측 수군 전력은 판옥선 60척 설과 80척 설이 있는데, 대략 60척에서 80척 판옥선에 수군은 7천에서 9천 정도로 칠천량 해전 참패 수군 전멸 이후 李舜臣의 행정과 경영 능력으로 빠르게 재건 되지만 칠천량 해전 전력의 50% 정도 였습니다. 이에 비해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수군 도독(都督) 진린(陳璘) 장군의 戰力은 전선300척에 수군 1만 8천으로 비록 전투 능력은 조선 판옥선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무기 火箭(특히 수전에서 배를 불살라 버리는 火箭은 명나라의 주무기 였음)과 불량기포 불덩이를 날리는 포는 노량해전에서 일본군 전선과 수송선 200여척을 분멸(焚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만약에 명나라 수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순신이 거느린 판옥선 60척에서 80척 전력으로 고니시유키나카(小西行長) 왜교성 순천만을 봉쇄하거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300척과 노량에서 대적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소인배 선조
왜 하늘은 이순신과 선조를 같은곳에서 태어나게 만들었는가
이순신이 포르투갈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전세계는 남극 제외 모두 포르투갈어를 쓰고 있을 것.
밸런스 패치ㅜㅜ
선조 밑에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유명해진 거지 선조 아니었으면 낙하산급 승진 속도 없어서 권한이 부족했을 거임
한민족의 원죄 때문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평생 고질병, 동료의 모함, 구데기처럼 득실 거리는 왜병, 암군의 질투로 고생 고생하고, 험한 전장에서 죽음 조차 편치 못하셨으니....
이순신장군께서는 전후 선조와의 갈등을 뻔히 예상하고 전쟁막판 전장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에 나 같은 운명이 또 있을까 차라리 일찍 죽는만 못하다~~ 장군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ㅠㅠ
아 .... 이순신 장군님 ..... ㅠ ㅠ ㅠ
@@타키수녀님 ㅋㅋㅋ
@@명박-오토바이
많이 본 왜구인데 여기에도? ㅋㅋㅋ
@@aa87740521 너는 나가라
@@aa87740521 반일하는 애들 많노
@@aa87740521 왜구가 뭔데 10덕아
연산군 선조 인조 다 암군!!! 명성왕후도 고종도 암군!!!
명성왕후는 숙종의 어머니입니다
'명성황후'가 올바른 표기입니다
고종은 무기만 잘 들여놨으면 좋을 뻔 했는데 다만 때를 잘못 만난 것일 뿐이다
@@HanWoong1015무기탓보단 인간자체가 무능한게 맞아요 마누라 민비의 치마폭에 머 했나요?
왕하고 싸우고. 원균아군. 돌격하라하면 안가드만 부하들이... 악조건...
웬지 어둠의 독립군 무타구치 렌야가 생각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선조와 원균이 그러한 존재처럼 느껴질 듯
렌야는 넘사벽임 원균은 해전 이후로 실종된 반면 렌야는 종전 후 자신의 잘못이 없다는 종이를 유가족한테 뿌리고 다녔음
아산에 거주하고있는 아재입니다
출근길 전철 고가기둥에서 항시보는
필사즉생 필생즉사
지금사는 세상도 이 마음으로 살고있음
현충사가있는 아산으로 많이 구경와주세요
적은 내부에있다
충무공 이순신께서 전사하실때 그 자리를 지킨사람이 무의공 이순신이라고 하더군요.
경상우수사 무의공 이순신 외에도 장남 이회(이순신 첫째 아들), 조카 이완(이희신 아들) 그리고 군관 장수 송희립과 (만호) 손문욱이 뒤를 이어 싸웠다네요
영웅은 자신의목숨을
하늘에들어올릴때를
아신듯하다
조선역사에 이순신장군님이 제일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역사하면 세종만 내 세우는데 이순신장군님이 아니면 한글이고 대한민국이고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때 왜 놈들한테 먹혔으면 일본어 중국어 러시어 영어 중에 쓰고 있을 겁니다.
이순신과 싸운 장수는 시마즈 요시히로라고 저기 일본 남부 사츠마 지역의 제법 덩치가 있는 다이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같은 애송이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다이묘였다.
자꾸 고니시 가토같은 애송이를 무슨 뛰어난 장수인양 착각하는데 난 고쿠다카라는 명확한 근거를 들고 와서 고니시와 가토를 애송이로 칭하는 거다. 20만 석 따리면 다이묘 중에서도 하위권 다이묘다. 고쿠다카는 쌀 생산량이지만 이게 바로 병력 충원의 척도였다. 40석 당 1명. 시마즈 요시히로는 73만 석이나 되는 엄청난 근육질의 다이묘였다. 물론 나중에 가토는 20만 석에서 52만 석으로 몸집이 대폭 커지긴 하지만 그게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고니시의 20만석을 가토가 빼앗고 이것저것 더 붙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고쿠다카의 존재를 모르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강이라는 걸 모르지.
선조
저런 10새~~~!!!! 🤬
근데 이순신장군을 사살한 일본군은
누구일까?? 일본에서도 그 일본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아무레도 자기가 이순신을 사살했다는것도 몰랐을듯... 만약 모든것 알았다면 그 일본군은 특진을 했을거임.. 병사였다면 다이묘까지 특진 했을거고
귀족으로 신분상승 했을텐데
야간에 벌어진 전투였으니 제대로 조준하고 쏘았을리도 만무하고 대충 적선 실루엣을 보고 쏜 총탄 중 하나가 맞은거죠.
솔직히 말해 노량해전 당시 화승총(조총)은 일본군만 쓰던게 아니라 명군과 조선군도 운용하던 상황이라, 충무공에게 날아온 탄환이 일본군이 쏜 것이라고 특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피아 식별도 잘 안되는 야간에 대충 적 처럼 보이는 뭔가를 향해 난사를 하던 상황이였을테니.
군왕이 신하의 전공과 인품에 질투심을 느꼈다.또한 아들인 광해군에 대한 시기와 질투,무능하고 속좁은 선조. 군왕의 깜이 아니었죠?
선조...
이순신이 끝까지 살아남았다면 진린이 명황제에게 청했던 대로 요동으로가서 후금을 멸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장군은 저 전투에서 살아남았더라도 선조에 의해 처형되었을겁니다
선조... 욕나옴ㅡㅡ
수고하셨습니다~ ~
영화 노량에서는 진린과 등자룡같은 중국 장수들 미화가 심했음. 중국 눈치보는건가 역사기록대로 묘사했으면 중국에서 가만있지않을것 같았나?
진린 생각도 이해감. 무슨 남의 나라 구원하러 왔으니. 명 장병들은 그럴만 해.
이 나라 역사서가 굉장히 이분법적이며 멋대로 선악을 고정해놓음, 그리고 다른 시점과 관점은 생각하지 않음. 인간군을 입체적으로 보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지.
그렇게 역사를 서술하는 나라가 어디있냐? 자기 나라 위주로 하지 그럼 남의 나라 위주로 하냐? 혼자서 공평한척 되게 웃기네 ㅋㅋ
@@아들손-p2l 맞음 광개토게이는 좋게 말하면서 이토는 나쁘게 말하니까
@@명박-오토바이고대하고 근현대도 구분못하는 수준이면 지능이 너무 낮아서 일상생활이 안되실듯ㅎㄷㄷ
Hs같은 답없는 인간들은 항상 응디뒤에 숨어있지
@@hsc9279 나가라
역사중에서 우리나라역사만큼 객관적인건 없음
근대사 부터는 아닐겁니다. 왜곡 덩어리 입니다.
이순신은 조선의 위인이 아니라 세계최고의 장군이다
ㅇㅈ 세계사에 장군들은 몰라서 그런지 이순신장군말고 무패에 신화를 기록한 장군 진짜 드물지요...
정저지와
@@jajfbeiqbdhrhfv ???: 이순신이 누군데 10덕아
@@명박-오토바이베충이네 에휴
@@명박-오토바이
??? 너는 조선족 누구인데 10덕아~
1. 명량대첩은 위대한 승리인건 맞지만 일본군의 서해 진입을 좌절 시킬 정도의 큰 승리는 아니였다. 여전히 일본군은 300여척의 함대가 건재하게 남아 있었고, 울돌목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곧 고군산군도로 퇴각했으며, 일본수군은 서해로 진입해 전라도 해안을 약탈했다. 적군의 서해 진입을 막았다는 선조의 언급은 되려 명량 대첩의 전과를 과장한 것임.
2. 노량해전은 사로병진 작전을 알아야 전투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 전투임. 엄밀히 말하면 노량해전은 사로병진 작전의 마지막 전투였음. 그러나 국내 역사학자들은 사로병진을 말하길 꺼림. 명군이 거의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 작전이였기에 이걸 설명하면 명군은 싸움에 소극적이고 민폐만 끼쳤다는 국뽕 사관의 거짓말이 들통나기 때문.
명군은 도움도 못된 민폐집단에 머물러야하며, 일본군도 단지 히데요시가 죽어서가 아니라 이미 패색이 짙어져 더 버틸 수 없어서 달아난 것으로 설명해야함. 그래야 임진왜란이 조선이 승리한 전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정유재란때 그냥 왜군은 남해에서 농성이나 하며 힘겹게 버텼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설명하며 사로병진에 대해선 함구하곤 노량해전만 강조함.
3. 그러나 실제 역사는 좀더 참담했음. 명군은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각오로 10만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해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 수로군의 4개 군단을 결성해서 4개 방면으로 총공세를 감행했음. 이것이 사로병진 작전임. 그러나 동로군, 중로군은 모두 패배했음. 특히 중로군은 사천의 시마즈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주했음. 한편 이순신의 함대는 명 수군과 연합하여 수로군을 결성하고, 유정이 이끄는 서로군과 함께 순천의 고니시를 육해 양면에서 공격했음. 그러나 동로군과 중로군의 패퇴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로군과 수로군은 곧 사천이나 울산 방면의 일본군이 순천을 구하러 올 것에 대응하느라 순천 공세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음. 이것이 노량 해전 전까지의 전황임.
4. 명 장수들이 일본군에 뇌물을 받아 안싸웠다니 운운하는건 사실과 다름. 동로군과 중로군의 패배로 이동이 자유로워진 사천 및 울산 방면의 일본군이 순천 구원에 나설 것은 시간 문제였고, 이런 상황에서 소모적인 공성전을 지속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였음. 그들은 사로병진 작전 이전에 벌어졌던 울산성 전투에서 울산성을 지원하려는 일본군의 접근을 알고도 울산성 공세를 지속하다 낭패를 격은 경험이 있었음. 뇌물받고 병력 물려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 사실상 실패로 귀결된 사로병진 작전을 지속할지 이대로 물러나야할지를 두고 고민하던 똥줄타는 상황이였음.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역사 기록은 무시하고 국뽕과 인기에 사료 잡혀 명나라 육군과 수군이 별도움 없었다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는데 정유재란 당시 조선 정규군은 훈련도감에서 양성한 삼수군 3만과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거느린 판오선160척에 병력 2만이 전부였다. 임진왜란때 17만에 달하던 관군과 의병은 1593년과 1594년 기근과 전염병으로 대부분 해산되었고, 1597년 정유년에 재침한 일본군은 14만 이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고 이번에는 영나라도 신속하게 육군과 수군을 파병했는데, 육군은 10만 수군인 2만이었다.
만약 명나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 전멸 이후 3만이 전부인 육군으로 14만에 닿하는 일본군을 단독으로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울돌목 해전도 전석31척 격파하고 다음날 빠르게 퇴각하여 무안 영광 위도 고군산군도까지 물러났으며, 일본군은 다음날 이순신 함대를 추격했고 피난하고 있던 조선 백성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진행했다. 무안에서는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시체가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다고 강항의 강항록에 기록되어 있다. 영광 앞바다까지 진출 했던 일본 수군은 바다에서 조선 관리 강항을 사로잡고 겨울이 다가오자 다시 남해 순천만까지 퇴각한다. 일본군이 퇴각하자 이순신의 남진하여 목포 앞바다 보화도에 수군 본영을 세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해상으로 피난했다가 일본군에게 잡힌 피난민의 이야기를 듣고 괴로워서 더 들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수군 화포 천지현황도 대부분 근거리 15m이내에서 직사로 포를 쏴서 적선을 무력화 내지는 파괴했는데, 조선시대 화포의 성능을 모르는 국뽕 학자들은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화포를 쏘아서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를 방송에서 하고 있는데, 눈짐작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 사격하는 조선시대 화포는 명중율이 형편없었다. 더군다나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배 위 갑판에서 전선을 명중시키는 더더욱 어려웠다.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거북선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 밀집한 전선을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천지현황 화포로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군 전사가 대부분도 일본군 조총 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그 명단을 올렸다. 그런데 엉터리 사학자들은 조선의 화포가 사거리가 조총보다 길어서 100m밖에서 화포를 쐈다고 국뽕같은 주장을 한다. 재래식 화포는 사러리가 100m 넘어가면 멍중율이 0에 가깝다. 그리고 조선시대 화포는 화약량을 잘못 장약하면 포열이 파괴되어 오히려 아군이 피해를 입었고, 영화처럼 연속사격이 불가능했다. 일단 한번 사격하면 포열의 열기 때문에 재장전 할려면 열기를 식혀야 했고, 2번 이상 연속 사격은 어려웠다.
지금이라도 선조와 인조묘는 사후 심판 목적으로 폭파 시켰으면 좋을텐데....
선조도 첫 승리부터 크게 칭찬하고 높이 평했지만 내부원흉인물과 세력에 의해 끝없이 비하하고 폄회되 모함되어 되어 제대로된 지원도 못받고 이순신과 의병들 역적되고 이순신은 이용용도때문에 죽다살아났지만 의병들은 다 죽였죠 그 원흉을 아는 것이 이순신 때문에 한국사람으로 살고 있는 자들의 숙제죠
선조가 이씨조선왕가의 찐따
어우 선조…🤬
그저 하(남자 중)성군
저정도면 일부러 죽은게 정설
@@Exclamationmarkss 그래도 멋지게 갔잖아 한잔해
자살설은 장군을 추모하기 보다는
폄하하는 것입니다.
장군도 성리학을 익힌 조선의 선비입지요.
그러기에 자살은 아니지요.
@@dudrak7575 아무리 그래도 일부러 죽은 거 맞는 것 같음. 살아 있었으면 본인이 선조를 죽이던가 선조에게 죽거나 둘 중 하나여야 되니.
이순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조와싸움 ㅋㅋ
선조가 이렇게까지 쓰레기였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한번 망할뻔한 상황에서
이순신같은 영웅은 군주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움;; 그리고 저당시 왕권이 떨어질만큼 떨어진때라 선조의 인간성이 바닥을치며 급졸렬해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조욕을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이 선조의 위치였으면 이순신은 불편한존재였음;;
스탈린도 그랬죠 그래서 게오르기주고프에게
억지누명을 씌울시도도했지만
그냥직위 해제하는 선에서그쳤다고합니다
이순신이 죽었다라...
재밌군요 훌륭한 전사가 사망하다니 그것도 갑작스럽게
공부나 하고서 댓글 달거라.
왜구 주제에 뭐가 재밋는데? ㅋㅋㅋ
@@aa87740521 왜구 이러노?
훠훠훠 여기 종간나시키가 있었네요 훠훠
훠훠훠 여기 종간나시키가 있었네요
@@명박-오토바이
너도 오H구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종간나시키냐? ㅋㅋㅋ
아님 중궈 ? ㅋㅋㅋㅋㅋㅋㅋ
망조전라디언 방계출신이연때문에...
저딴게왕이라니..
조선을 일본에 넘긴건 을사오적이 아니라 조선의 왕들과 양반 귀족놈들이다.
니가 말하는 을사오적도 양반 귀족놈들인데?
그러는 니 조상은 중궈인가? ㅋㅋㅋ
혹시 을사오적이 당신의 조상? ㅉㅉ
나그네별 같은 분탕충들 무시하셈
@@aa87740521 백성들 피 빨아먹던 양반귀족이 니 조상? ㅉㅉ
나그네별..hs: 김대중 대통령,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도 모르는 중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