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 조선에 이순신이 있음을 알게하다(1차출정-옥포.합포.적진포해전)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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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30 сен 2024
  • 태백광노가 되어주셔서 영화 《독립전쟁》 제작에 참여해주세요.
    / @hwang_history

Комментарии • 1,9 тыс.

  • @hwang_history
    @hwang_history  4 года назад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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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진포의 위치는 창원이 아니라 통영입니다.
    실수였습니다.
    앞으로는~~~~
    저로서도 처음 도전하는
    자세히 설명하는 이순신 강의이다보니 구사하는 단어들도 입에서 잘 안떨어지네요.
    이해바랍니다 꾸벅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17

      처음이신데 우리의 설민석 교수님 이후로 너무나도 잼있게 잘해주세요. 와, 진짜ㅋㅋㅎㅎ *:(1등^^):* 와오ㅋㅋㅋㅋㅎㅎㅎㅎ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7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일 전국시대(정확히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암튼) 당시 육지에서는 시즈카타케의(대충 떡발라 칠해놓은 뭐) 7본창의 명장이다. 정도수준의 (작은)별볼일 없는 소다이묘 였다 하지만 [{「 바로 그 - 오다 vs 모리 -의 대해전시 해적왕일가 구루지마가와 대적하여 바다에서는 천하의 대해적대장 출신인 구키 요시타카 이상급으로 대활약한 일본 히노모토 천하 최고의 해전장이였습니다. 」}]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4

      그리고 대임란당시 용인전투때 고작 4천명으로 (수장이 이일이였지만-그래도 이일이 무능무지하게 굴어서 그렇지 또 엄청난 명장이였었습니다.) 5만의 엄청난 대군을 섬멸, 아니 그보다도 아주 전멸시켜 버리고말죠.

    • @방구석아르센
      @방구석아르센 4 года назад +4

      에이 쌤~~ 저쪽 유튜버들 중에는 사실관계확인도 안하고 모르는걸 아는척하며 이상한 말장난으로 막말하는 인간..아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 금수놈들이 태반인데요 뭘 ㅎㅎ 쌤은 실수하신거 우리가 다 아니까 이런댓글 안올리셔도 되요ㅎㅎ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1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의 오다 노부나가와 다르게 서양을 상대로 쇄국하는듯 했지만 임란중 유럽에서의 상인들을 상대로 상당한 울나라 조선의 포로 인질이셨던 분들을 노예로 많이 팔아 넘겼었다고 합니다.

  • @md11park
    @md11park 4 года назад +204

    황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는 해군 장교 출신인데 이 강의 너무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입대후 교육중 나이 지긋한 유명한 이순신 전문 교수가 수십년전 강의 했던 내용보다 백배천배 훌륭합니다. 그당시 지금은 쓰지 않는 포구 이름과 지명만 나열해서 강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유튭 이 강의를 듣고 이젠 이순신 장군님의 전투를 상세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십 중반에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 이순신 장군의 첫 전투를 보면서 과연 내가 바다의 후예인가를 자책하고 또한 우리 나라 역사교육의 한계를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계속 훌륭한 역사 선생님 되어주시기를 응원합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서쪽하늘을벌겋케
      @서쪽하늘을벌겋케 Год назад +3

    • @kkb0412
      @kkb0412 Год назад +2

      😊ㆍ😅ㅔㆍ😅😊😅ㅔㆍ😅ㅣ😮아 ㆍ😅😅

    • @kkb0412
      @kkb0412 Год назад +2

      😮ㅣㅣㅣ😅😮😮😮ㅣ😅ㅏ😅ㅣㅣ😅ㅣㅣㅣ😮😮ㅣ😮ㅣㅣㅣ😅지금 ㅣ😅ㅏ😅ㅣㅣ😮😅아 😅ㅣㅣㅣㅣ😮ㅣㅣㅣ😅

  • @최병민-m6c
    @최병민-m6c 4 года назад +171

    난중일기를 지금까지 10번가까이 읽고
    충무공 전적지를 가족과 같이 둘러보았죠
    원균이 패한 칠천량도 가봤습니다
    광화문 지날때마다 ~~이순신장군님의 동상을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 @이은우-u1e
      @이은우-u1e 2 года назад

      우리나라의영원한충신
      이순신장군님 께서그많은
      왜군을물려쳤어도 정작본인은누려보지도못하고가신 장군님을생각하면은가슴저밑에 한스러움이아려와서 눈물이절로나네예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bong9c
    @bong9c 4 года назад +191

    와! 이런 명강의 어디가서 또 듣습니까! 가슴뜨겁게 순간 순간이 그려집니다.
    배한척 끌고 나타난 원균은 또 얼마나 한탄스러운지 눈물이 고여지더이다.
    마치 꼭 그자리에 같이 참전하셨던 분이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사를 역사답게 받아들이게 해주셔서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olsmbowman
    @olsmbowman 4 года назад +183

    명량 마지막 장면(전투 후에 식사하실때)에서 눈물이 그렇게 많이 나던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게 다 우리 조상님(이순신포함 해군들)들 덕분에 이렇게 살수 있다고 생각은 듭니다... 몇 번을 봐도 뭉클하고..

    • @조래균-e1x
      @조래균-e1x 4 года назад

      ㅣㅂㅂ77ㅍㄱㅂ7ㅂㅍㅍㅂㄱㅍㅂ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tjxpuck
    @tjxpuck 4 года назад +163

    리더의 자질이 저렇게 중요한거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실력없는 것들이 자리에만 연연하지.. 실력자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고 무능한 탐욕자는 자리에 앉기위해 무엇을 할지만 생각한다

  • @억강부약대동세상
    @억강부약대동세상 4 года назад +105

    명장 이순신에 대한 승리의 원인이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해 주시니 너무 좋습니다. 좋응 강의 너무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MiniJo0706
    @MiniJo0706 4 года назад +97

    가슴이 뜨거워지는 강의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막연하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수치를 바탕으로 상세 설명해 주시니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임진왜란 강의 잘 부탁드립니다!!

  • @이선미-t2s8t
    @이선미-t2s8t 4 года назад +38

    이순신의 덕수 이씨의 후손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단순히 왜란을 극복한 구국영웅으로만 알고만 있을 이순신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는 모습에 가슴 철렁하게 하며 다시보게 되네요. 덕수 이씨의 자랑스런 조상님,그리고 우리들의 영웅 !최고다 이순신을 되짚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고다 황현필!

    • @하지마라-u1k
      @하지마라-u1k 4 года назад +1

      덕수이씨 아님

    • @king-md7gz
      @king-md7gz 4 года назад +7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가문이 덕수이씨가문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노량해전까지 전라좌수영사람들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받들어 모시고 똘똘 뭉쳐서 조선을 지켜냈어요

    • @shw5670
      @shw5670 4 года назад +2

      난 이순신이 엄청 대단한 인물인 이유를 하나 더 알고있는데 궁금하신다면 답글ㄱ

    • @oxoxking
      @oxoxking 2 года назад +5

      오..만나서 반갑습니다.
      본인도 덕수이씨 26세손 충무공파 14대손입니다.
      후손 인구가 적은지라 온라인에서 만나기 거의 드문데.....
      아무튼 코시국 화이팅 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순향신
      @순향신 Год назад +2

      이율곡과 같은 덕수이씨 맞습니다
      집안어른인 이이가 이순신에게 두보의시를 천번 읽으라 지시 ᆢ
      두보의시는 전쟁시 나라잃은 서름이 닮긴 시

  • @바르도-s2r
    @바르도-s2r 4 года назад +104

    국가주도로 이순신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여 생가터나 유적지를 재정비하고 세계인들이 찾아올 축제도 하나 크게 만들고 했음 합니다 이것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겠죠
    친일파들이 안좋아하려나요?

    • @리듐이-r9z
      @리듐이-r9z 4 года назад +2

      친일파 후손들이 정권잡았는데 할 리가..

    • @그리워하다-s4c
      @그리워하다-s4c 4 года назад +13

      친일파후손이 정권 잡았다가 아니라 잡았었었지 촟불에 의해서 탄핵되고 지금은 감방에 있지.

    • @studyforbuying
      @studyforbuying 4 года назад +1

      안좋아하죠 치를떨껄요

    • @altare824
      @altare824 3 года назад +4

      먼저 이땅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토착 왜구 부터 도륙 하셔야 합니다.

    • @brabbit1149
      @brabbit1149 3 года назад

      이미 정비했어요 찾아보세요 이순신이 다녀간 흔적들 남아 기념하죠 서울 생가 ..아산 본관 그리고 여수 남해 통영 등등요 찾아보지도 않고 이런데서 그냥 살짝 관심갖지 나중에는 신경도 안쓸거같은데

  • @newestinfoserbia7455
    @newestinfoserbia7455 4 года назад +92

    아...... 온몸에 소름이!!!
    역사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가 선생님 강의 듣기 시작하며 급반성 모드에 들어간 1인입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전율을 느끼며 강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현무4-x4p
    @현무4-x4p 4 года назад +40

    옥포파왜병장.. 그 장계에 부하 장수와 병사들 하나하나, 노꾼들 하나하나의 전공과 노고를 담았다니,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사람을 존중하는 진정한 리더입니다. 그걸 강조해서 강의해 주시는 황현필 선생님 또한 같은 결입니다.

  • @beo2wulf4
    @beo2wulf4 4 года назад +142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도 지역의 전투상황을 보고한 실록 : 도내(道內)에 감사(監司)가 없으니 모든 적변(賊變)을 당연히 신이 아뢰어야 합니다.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자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은 뒤이어 동래(東萊)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道)의 주장(主將)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將卒)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산(梁山)의 가장(假將)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도 창고와 병기(兵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 @storyfour8761
      @storyfour8761 4 года назад +29

      이러고도 선거철만되면 우리가남이가? 한단말이야?

    • @DanielKLee-jd4zg
      @DanielKLee-jd4zg 4 года назад +23

      이런이런 이것이 평소엔 스스로가 평소엔 무뚝뚝하나 남자답다는 강한척하는 갱상도 남자들의 본모습인가?

    • @올빼미올빼미
      @올빼미올빼미 4 года назад +8

      ㅋ, ...저 김성일이 임난'직전 일본에 파견되어 풍신수길과 면대하고, 여러 지역의 제반사항등을 체크했던 사절단의 부사(2인자) 정사 황윤길(서인)은 귀국후 전쟁가능성을 크게 보고 선조에게 간곡히 알렸지만 동인이었던 그는 심지어 풍신수길이 '수상(쥐시키상)' 이라며 전쟁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박박 우겨서 결국 논쟁으로 끝나버리고 제대로된 대비없이 임진난이 터졌슴. ...이때 동인의 영수가 이산해이고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징비록'의 유성룡. 저 장계이후 의병을 지휘하다 전사한 것은 맞지만, 김성일도 유성룡 이산해도 미증유의 참화에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

    • @소도앙팡
      @소도앙팡 4 года назад

      @@storyfour8761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강성화-f2e
      @강성화-f2e 4 года назад

      @@storyfour8761
      원균이는 평택에서 났데요.
      그리고 본관은 원주라나?
      그런건데 걍 까대는건 좀...
      위키백과에 그리 써져있어요.
      원균(元均,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 ~ 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중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원성백파(原城伯派), 자는 평중(平仲)이다. 무인 가문으로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남원 양씨로 양성지의 후손 양희증(梁希曾)의 딸이다.
      ko.m.wikipedia.org/wiki/원균

  • @user-zk2qq8wt3f
    @user-zk2qq8wt3f 4 года назад +145

    현직 고등학교 체육교사입니다.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보고있습니다. 체육수업때 교실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틀어주곤합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thefool4078
      @thefool4078 2 года назад +10

      좋은스승님이시네요
      아이들에게물려줘야할것은바로이런것이지요.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user-wb5xy2fb1y
      @user-wb5xy2fb1y 2 года назад +4

      멋진 선생님입니다~!! 👍🏼

    • @user-zk2qq8wt3f
      @user-zk2qq8wt3f 2 года назад +5

      좋은 스승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 @miya0714
      @miya0714 20 дней назад +2

      우움 좋은 역사는 잊으면 반복이니까 좋은뎈 ㅋㅋ 큰데 체육시간 이라믄서요 😮 하라는 체육은 안하곶 😅

  • @jamesbong1341
    @jamesbong1341 4 года назад +514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강의 입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터지고 온몸이 근육이 움틀댔을 노꾼들의 고단함을 상상해 봅니다. 날뛰듯 두근 거렸던 병사들의 긴장과 두렴움과 승리후의 카타르시스를 짐작해 봅니다. 산같이 정중하라고 부하들을 타이르고 나서 혼자 빈방에 누웠을 장군의 그 밤을 생각해 봅니다. 나를 뜨겁게 만드는 그 이름. 이.순.신.

    • @berryyellow1198
      @berryyellow1198 4 года назад +33

      무한도전에서 조정경기하고나서 멤버들 디질라그러던데....
      노꾼들도 그것보다 힘들었으면 힘들었지,
      덜 하지는 않았을듯...

    • @honey7856
      @honey7856 4 года назад +23

      berry yellow 노질에 생사가 걸려있다고 생각하면서 노질했을터인데...예능이랑 비교불가죠..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15

      눈물 없이 못쳐가 보이는 그런분..

    • @camellia-tm4wj
      @camellia-tm4wj 2 года назад

      ㅣ1ㅣ11

    • @chanmosong8462
      @chanmosong8462 2 года назад +1

  • @시설관리황-q4y
    @시설관리황-q4y 4 года назад +34

    대한민국 군인과 모든 국민이 봐야 할 강의 같습니다. 가슴이 뭉쿨해집니다.이순신 장군님이 존경스럽습니다

  • @눌림목매수
    @눌림목매수 4 года назад +359

    여수 진남제는 지금은 여수 거북선축제로 이름을 바꿨고
    이순신장군께서 첫 출정을 한 5월4일에 전야제를 시작해서
    여수로 다시 돌아오신 5월8일까지 축제를 합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rustin5974
    @rustin5974 4 года назад +135

    판옥선 한척만 끌고 오는원균보고
    이순신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근데 그 판옥선에 무기한자루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충격 먹었을까?
    상상만해도 어질어질 하다 ㅋ

    • @SHK-g7p
      @SHK-g7p 4 года назад +20

      그런 원균이 조정에 올리는 장계는 공동으로 하자고 하는데 얼마나 싸가지 없는지..

    • @AWACS_area
      @AWACS_area 4 года назад +8

      원균장군은 술만 마시면 차마 입에담을수 없는 소리를 뱉어놓아서 이순신장군의 심기를 불편하게까지했죠.

    • @Kesap541
      @Kesap541 4 года назад +10

      70척중에 66척이나 자진 침수시키고
      4척이끌고 왔댘ㅋㅋㅋㅋㅋㅋㅋ

    • @jamisont1
      @jamisont1 3 года назад

      @@Kesap541 나두 저게 원균이 스스로 수군 자침시키고 나타나서.. 저런 쓰레기를 왜 단번에 목을 쳐버리지 않은건지 의아해했었는데 나중에 역사공부하니 쉽게 나오던 답이었슴.
      황현필이 원균까기위해 고의로 누락시킨건진 모르겠지만..
      애초 임진왜란터질때 선조가 명령한게 수군을 없애고 수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육지에서 싸우고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었슴.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5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해도의 주사(舟師)를 없애도록 명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해도(海道)007) 의 주사(舟師)를 없애고 장사(將士)들은 육지에 올라와 전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전라 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급히 아뢰기를,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므로 호남의 주사만은 온전하게 되었다.
      주사 = 수군임. 장사 = 장군+병사..
      원균도 개병신수준이지만 더 문제가 선조는 더씹개또라이 병신이었슴.

  • @제제-n6o
    @제제-n6o 4 года назад +283

    이순신은 자기의 공만 내세우기보다 병사들 하나하나 공을 인정해주고 기억해줘서 불리한 전세에도 병사들 사기가 오히려 오르고 이순신을 안따를 수가 없는거지 그나저나 원균은 지휘관 자격도 없으면서 겁만 먹고 도망다니면서 자기 욕심만 챙기려고 하니 임진왜란때 최고의 민폐인물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 @berryyellow1198
      @berryyellow1198 4 года назад +19

      이순신이 ×100%라면
      원균은 ×(-99)%임.

    • @shw5670
      @shw5670 4 года назад +22

      그 원균이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는거지 이순신 없었으면
      수군이고 육군이고 의병이고 나발이고 다 망했음 의병도
      수군의 쾌거가 있었기에 연계 되지 수군마저 육군 꼬라지였어봐
      해일 앞에 모래성에 불과하지 아무튼 이순신은 그냥 신의장수임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2

      ㅠㅠㅜㅜ......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7

      민폐, 나라 실질적으로 다갖다판 1등 공신들ㅋㅋㅋ 1.선조, 윤두수, 정철 밖에 등등 서인 대부분과 썩은 북인 2등공신 권율 3등 원균 (그리고 훗날 병자때는 인조와 김상헌, 그외 척화파들....) 이상..

    • @hen3329
      @hen3329 4 года назад +12

      당시 조선 수군의 노꾼들은 거의 천민이나 노비 마찬가지였는데 순신이 형이 공로 인정해주라고 선조에게 장계 올렸으나 신분체제 근간을 흔든다고 꼬투리 잡힘 군인은 열심히 싸웠고 뛰어난 지휘관을 갖추었으나 정치가 문제

  • @grace0879
    @grace0879 4 года назад +23

    아~~ 이순신 장군님... 생각만해도 눈물이 ... 하늘이 주신 최고의 구세주. 이순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 @JiJi-ro1hz
    @JiJi-ro1hz 4 года назад +89

    이거 볼려고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역시 실망하지않고 손에 땀을쥐며 시청 하였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 @역사를역사답게말하는
    @역사를역사답게말하는 3 года назад +14

    400년전에 일시집중타 , 순수 함포전이라. 온몸에 소름이 전율이 이건 강의 라기보다 한편의 감동적인 단편영화를 본느낌

  • @J레옹
    @J레옹 4 года назад +51

    오늘 영상은 우리나라 디지털 국보로 보관해야 할 거 같네요
    👍👍👍👍👍👍👍👍👍

  • @beomjo5503
    @beomjo5503 4 года назад +56

    와 여수사람인데 진남제에 저런 이야기가 있는줄은 처음알았네요. 그냥 이순신장군님을 기리는 거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알게 되어서 넘 좋네요ㅋㅋ

    • @일보전진
      @일보전진 2 года назад +1

      매년 5월 3일날 저녁부터 했었던 거 같은데...초딩때 가장행렬 많이 했었죠. 이순신 장군 역할 하는 중학생 형이 부러워서 쳐다보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네요.

  • @HSLEE-zr7ik
    @HSLEE-zr7ik 4 года назад +368

    저런 위인을 백원짜리에...
    오만권엔 심사임당을....
    지폐위인도 교체해야 한다

    • @node763
      @node763 4 года назад +6

      예전에는. 이순신장군의. 지폐가. 있긴했에요

    • @김가-z3q
      @김가-z3q 4 года назад +35

      친일파들이 싫어합니다
      김구를 왜 안했겠어요

    • @나다-k6t
      @나다-k6t 4 года назад +21

      이 나라 이 민족은 군인의 소중함 을 모릅니다.그저 선비 나부랭이나 핧아줄지 알지.

    • @Holics7
      @Holics7 4 года назад +8

      적은돈이 더 자주 쓰이니까 ...

    • @hnjuka5547
      @hnjuka5547 4 года назад +24

      그것도 새로 나오는 신권 동전은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엉망입니다.....ㅠㅠ
      정말 부끄럽습니다.
      토착왜구가 더 악랄합니다!!
      오백원짜리 학보다 더 천대받다니....

  • @Kim-po6jt
    @Kim-po6jt 4 года назад +24

    강의 듣고, 방송사 역사 저널 이순신 영상 보고 강의 다시 들으니 훨씬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눈물날만큼 대단한 승전이었네요. 인간 이순신의 감성적인 면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장군 이순신으로 보면 그의 기개가 엄청남을 느낍니다.
    열강해주신 황쌤의 열정에 무한 감사를 전합니다 ㅜ ㅜ

  • @AnsangMr
    @AnsangMr 4 года назад +16

    학교다닐때보다 한국사 공부를 더 많이 하는것 같습니다. 황쌤 강의에 장점은 영상을 다본 다음에도 생각이 난다는것입니다. 열정적으로 알려 주셔서 그런지 잔잔한 파도처럼 마음에 울리는거 같습니다.
    댓글 잘 안쓰는데 감사합니다 ㅎㅎ

  • @sangachristopheryong4496
    @sangachristopheryong4496 4 года назад +18

    선생님 덕분에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웅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왜 그토록 찬란한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시어 이토록 좋은 강의를 올려주시니 정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 @Sss-f1w
    @Sss-f1w 4 года назад +39

    명강의 잘보고 갑니다ㅎㅎ
    할머니 집이 고흥인데 흥양 고을과 사도포구 보니 뭔가 더 감정이입도 되고 더 집중도 되는 것 같네요.ㅎㅎ

  • @taylorlee5110
    @taylorlee5110 4 года назад +16

    이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룰 줄은 몰랐다.
    나름 이순신장군의 자료를 많이 봤다고 자부했는데... 이렇게 엊그제 일 처럼 생동감을 주는 강의를 보게 될 줄은 몰랐음.
    진심 감사드립니다.
    학창시절 역사과목이 제일 싫었는데, 이렇게 배웠으면,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 머리속에 각인되는 역사의 정신을 배웠을까 싶네요.

  • @쭈꾸아빠
    @쭈꾸아빠 4 года назад +37

    참고로 다른 서적에서 읽은 내용으로는 경상우수영의 TO가 판옥선 70여척이 넘었고, 나대용의 말로는 판옥선의 정원은 300명 이었다고 합니다. 판옥선이 50이건 70이건 경상우수영이 보유하여야할 수군수(판옥선만 있는것이 아니니...)는 기본적으로 2만명은 넘었어야 하는거죠.

    • @안강현-u2e
      @안강현-u2e 4 года назад +4

      그런데 원균은... ㅉㅉ

    • @Kesap541
      @Kesap541 3 года назад +1

      경상우수영 74척, 경상좌수영 80척
      박홍은 까놓고 80척함대정비자체로 안했다 들었고
      원균은 74척정도 건조후 전선을 모두 상룍전에 쓰려다 승산이 없으니
      70척을 자침....

  • @임지혜의있음
    @임지혜의있음 4 года назад +17

    재생. 정지. 몇번을 하면서 보는지
    모르겠네요. 가슴속에서 뭔가
    먹먹하고 뿌듯하고 감탄과 감격,
    특히 장군님이 휘하의 장수
    병졸.. 노꾼들까지.... 깊은 관심으로
    보살핀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
    감동의 파도가 쉴새없이 출렁이고
    눈시울이 붉어지니 자꾸 멈추게
    되어서요 😣😭🤧

  • @안강현-u2e
    @안강현-u2e 4 года назад +7

    좋은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부원경상도장'이라는 글이군요. 기존 임진왜란 관련 논의에서 가장 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조선 수군이 애초에 부산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가 침공한 왜선을 격파했다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일찍 왜란을 종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이제껏 제가 접한 모든 내용이 임진년 4월 13일에 왜군이 뭍에 상륙한 이후 전투부터 왜란을 묘사할 뿐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가 해상에서 왜선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지적하는 경우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꺼림칙해!'하는 막연한 느낌만 간직하고 있었지 이런 말을 꺼낼 엄두를 못 내고 있었죠. 몇 달 전에 우연히 유튜브 어느 채널에 달린 댓글에서 "경상좌수영이 해상에서 왜선을 격파했다면 '임진왜변'(을묘왜변이나 삼포왜란 수준)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고 말씀하셔서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죠. 그런데 이충무공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사실 수전의 중요성은 21세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겠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하고 해운대에 오성홍기를 꽂아도 인민해방군 전력으로는 대한해협을 넘어서 일본 본토 침공을 못 한다죠? 일본의 해상자위대 전력이 그만큼 막강하다는 말이죠. 이런 점이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하네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고전했던 이유를 전통적으로 조총을 갖고 있던 일본과 갖고 있지 않던 조선의 차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왔는데,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물론 그 당시로서 위력적인 신무기였음을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으나, 전쟁의 역사 특히 전근대 전쟁의 역사에서 신무기 한두 종류가 실전에 투입되었다는 이유로 승패가 갈린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더군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고전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오랜 평화에 젖어서 조선이 할 수 있었던 준비를 게을리했다는 점, 즉 조선이 보유한 잠재력을 현실에서 발현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이순신이 경상좌수사였다면? 조령, 죽령 등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고갯길을 방어하는 작전계획을 사전에 철저히 짜놓았다면? 임진왜란의 피해가 실제 역사보다 훨씬 줄었겠죠? 근데 왜 이렇게 못 했을까요? 원인은 결국 한 가지로 수렴합니다. 조선이 200년에 걸친 평화에 젖어서 굳이 그렇게까지 전란에 대비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점, 즉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사회'라는 단어 자체가 조선시대엔 있지도 않았던 용어라곤 하지만요. 쿠데타로 집권해서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조선의 군대를 국방에 최적화된 군대가 아니라 쿠데타 예방에 최적화된 군대로 변형시켜서 조선의 문약화를 부른 세조의 만행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 @윤설풍
    @윤설풍 4 года назад +62

    선생님 강의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것 같아 시간가는줄 모르고 보게 되네요. 이런 수준높은 강의를 듣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윤미애-q7d
    @윤미애-q7d 4 года назад +24

    모든 강의를 집중 해서 들었지만, 이번 강의는 더 집중 되는 강의 였습니다. 이순신장군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분이네요. 선생님 말씀에서도 그 당시 (해전)에 참전 하시는 듯 생생한 기운이 느껴지는 강의 였습니다. 한산 대첩이 기대 됩니다. 강의 감사 합니다.^^

  • @hojoonkim612
    @hojoonkim612 4 года назад +7

    존경하는 선생님...최근 조선과...성웅 이순신의 직관을 하고,,,나머지는 밭일을 하면서 듣고 있습니다....선생님의 강의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웁니다.....선생님의 방송액션이 너무 나 좋습니다....이 나라의 보배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응원하겟습니다....늘 감사합니다....o(__)o

  • @user-dw2pd2zp8r
    @user-dw2pd2zp8r 4 года назад +159

    원씨집안 놈들 저런 거 뻔히 알면서 뭐 왜곡됐다는 둥, 원균도 나름 공이 있다는 둥 그딴 소리 하고 책까지 냈냐? ㅉㅉㅉㅉ

    • @WriterNakwanjong
      @WriterNakwanjong 4 года назад +9

      실제 역사는 부정하고 지들 믿고 싶은대로 다시 써가며 자기 위로하는 짓이 일본놈들 하는 짓하고 똑같죠.

    • @이태양-m6j
      @이태양-m6j 4 года назад +1

      병사들이든 주민들이든 장사하는 사람이든 장수들이든
      모두200만명 이상이 무기 함선 거북선 소총 대포 화살,,, 버리고 폐물챙겨 산으로 도주, '일부 몸 팔고 신분상승 추정'
      전쟁 안 일어난다 왜곡보도정치분탕칠 준비시간,,,, 사라져 버려 수닭팔이 바로 쳐맞어 도륙 강간 살인 약탈 자행 원인제공,,,, 칠천냥, 부산포,,,,''결정타, 매판 사기꾼 정신병자들 득실~국가 에너지 소진 끝내 망함

  • @박헌터킬러
    @박헌터킬러 2 года назад +14

    선생님 정말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모든 국민들이 선생님 강의들으며 역사를 바로 알았으면 바래봅니다.

  • @니오주
    @니오주 4 года назад +43

    선생님 강의는 겉으로만 알고있는 역사를 수박 속 깊이까지 알려주시는거 같아 참 역사교육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나 응원합니다. ~~^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정민-m9q
    @정민-m9q 4 года назад +22

    이순신 장군편 넘 감동이네요.
    요즘 힘든 날들인데 샘의 강의가 많은 분들에게 힘이 될거 같아요~

  • @sss7660
    @sss7660 4 года назад +350

    옥포해전사상자
    일본군 사상자: 4,000명
    조선군: 부상 1명
    (아마 포탄이나 포 옮기다가 손가락 찧인게 아닐까?ㅎ)

    • @hwang_history
      @hwang_history  4 года назад +73

      빠트린 내용 다음시간에 언급하겠습니다^^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26

      심지어는 치열하고 불꽃 휘날려 튀는 전투중인데 말이죠.ㅋㅎ

    • @김정일-n3m
      @김정일-n3m 4 года назад +78

      원균.박홍 호루시키들이 환생하여 조국가족 괴롭히는자다.

    • @jh-yo8bj
      @jh-yo8bj 4 года назад +15

      아군피해 최소화 적의피해 최대화해서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했죠. 그리고 어느 전쟁이나
      장군같이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 안나면 더 좋지만 ...

    • @berryyellow1198
      @berryyellow1198 4 года назад +73

      ★조선측 피해는 이렇게 됐어야했다★
      부상 1명
      사망 1명(원균)

  • @김태영-h5r
    @김태영-h5r 4 года назад +8

    제가 참... 귀찮아서 댓글 이런 거 잘 안 다는 사람인데... 작년에 여수 여행 다녀왔는데 이런 사실들을 알고 갔었더라면 더더더 많이 생각하면서 다닐 수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이제 선생님 강의 들었으니까 여수 진남관에 다시 한 번 가보면서 이순신 장군님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런 좋은 강의 정말 항상 감사드립니다.^^

  • @시에스포
    @시에스포 4 года назад +91

    주말은 황쌤의 즐거운 강의와 함께!!!

    • @naegok05
      @naegok05 4 года назад +3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었던 독립군을 잡아들인 일본군 장교였던 백선엽이가 현충원에 안장되는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되나요 꼭 강의 부탁드립니다

  • @HoYoonLee
    @HoYoonLee 4 года назад +25

    소말리아 해적에서 빵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황현필 선생님 강의, 늦었지만 차근차근 보고있습니다. 전공과 전혀 관계는 없지만 너무 강의 재밌게 하시네요. ㅋㅋㅋㅋ

  • @younglee1564
    @younglee1564 4 года назад +38

    난세의 영웅중의 영웅, 있을 수 없는 드라마를 쓰셨네. 휴먼,액션, 판타지,스릴러를 망라한 전쟁 드라마.

  • @GHP-m9r
    @GHP-m9r 2 года назад +19

    이순신 장군님 만세 임진왜란 강의는 들을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 @탐나는애니몰
    @탐나는애니몰 4 года назад +131

    왜군들이 약탈할때 얼마나 생지옥 같았을까 .. 이순신 장군님이 노량해전때 한놈이라도 더 많은 왜군을 죽이고싶어했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네요

    • @thc5110
      @thc5110 4 года назад +18

      왜구들의 노략질 삼국시대이후 역사서에
      기록된것만 2000회
      우리선조들이 얼마나 고통받았을까요
      일본차타는 매국노 새끼들 지옥에나가라

  • @tvjukenongtv8197
    @tvjukenongtv8197 3 года назад +7

    여수 진남제 유래를 알고 계신 분 몇 안되는데 강의중에 정확하게 말씀하시네요 감사드리며 답례로 이웃하고 갑니다~ 자주 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nedkim8202
    @nedkim8202 4 года назад +50

    최고네요. 정말 가슴 뛰며 봤어요. 출정 갔다 돌아 오는 모습을 보는 여수 백성들의 눈물을 생각하니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ㅠ

  • @오명석-k9z
    @오명석-k9z 4 года назад +174

    그 양반 후손이
    미통당 원유철입니다
    그 밥에 그 나물
    어째 조상이나 후손이 얼굴 뻔뻔하조

    • @minch5025
      @minch5025 4 года назад +7

      평택 븅신같은 동네 왜 원균관련 사업하는지 모르것음 원균동생이 더 멋진분인데

    • @hen3329
      @hen3329 4 года назад +7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몰랐네 순신이형이 울겠다 원균기념관 세우면 칠천량 해전 꼭 자세히 서술해주길...

    • @토마손
      @토마손 4 года назад +10

      악질 친일파 홍종철의 손자
      더불어 민주당 원내 대표까지 한 홍영표도 있습니다

    • @hen3329
      @hen3329 4 года назад +5

      시뮬 반민특위 ㅅㅂ.. 어느 정권 들어와야 청산될까

    • @0019-i8p
      @0019-i8p 4 года назад +3

      @@토마손 / 그 홍영표 또 뽑아줘서 20대 국회의원됨 ㅋㅋㅋ,,,그냥 주딩이만 친일파 어쩌고 나불되면됨,,,,,,그러니까 개돼지들이라 하죠

  • @바보주전자
    @바보주전자 4 года назад +141

    아 원균은 진짜... 하...

    • @berryyellow1198
      @berryyellow1198 4 года назад +13

      원균은 옥포에서 죽었어야...

    • @khd5031
      @khd5031 4 года назад +7

      좆병신원균

    • @이선화-q6k
      @이선화-q6k 4 года назад +6

      듣다보면 야비한 원균시키 때문에 울화가 치미네요.
      이순신 장군님은 자신의 부하들을 아끼고, 고뇌와 슬픔이 느껴져 가슴이 아픕니다.

    • @박영찬-q7z
      @박영찬-q7z 4 года назад +1

      평상시 올바른 준비와 이름없는 백성과 군졸들 하나하나를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을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날조하며 시기 모함하는 원균과 박홍 무리들...그때를 생각하며 말로만 애국 애국 하며 실제는 사리사욕이 먼저인 오늘날의 원균과 박홍 무리들은 과연 어떤 집단이며 언론들일까 생각해본다...

    • @Cro-cop
      @Cro-cop 4 года назад +1

      @@_rninjun02 이순신 장군님의 후손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하네요.
      이순신 장군님의 이름에 먹칠할 수 없다고..

  • @윤형진-z7b
    @윤형진-z7b 4 года назад +43

    경상 좌우 수영이 제대로 대응했으면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작은 에피소드로 끝났을 겁니다
    수송선단만으로 구성된 일본함대가 오는걸 100척정도의 판옥선이 요격했으면 아마
    조선에선 이렇게 기록했겠죠
    제들 뭐하냐? 바보 아냐?

    • @zayoutube
      @zayoutube 4 года назад +1

      이순신의 승전이 대단하긴 하지만 대부분 전면전이 아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임진왜란의 큰 흐름은 바꿔놓기 어려웠을겁니다.

    • @hen3329
      @hen3329 4 года назад +2

      조선 군 체제상 경상도 수군이 왜수군이 건너올 때 비로 집결하기 어려웠었음 수군문제가 아니라 조선 방어체제가 대규모 침입을 막기엔 무리였죠 각도 본수영 밑에 소속수군들 소집에만 3-4일이 걸리고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기준으로 보면 25척의 판옥선을 보유했는데 이걸 또 각 수영으로 나누면 하나의 수영당 3-4척정도 보유했을꺼라 추측됌 자기지역위주로 방어하는 진관체제는 조선 수군은 하나의 군대가 아닌 연합군 같았음 순신이 형도 1차 출동때 진관체제때문에 경상도 바다로 출정을 고민하기도 했었음 대마도에서 건너오기 전에 요격했으려면 애초에 왜로 통신사 갔다 온 인간들이 정치 분탕질 안했으면 대비 했을텐데

    • @hikerfrantz5829
      @hikerfrantz5829 4 года назад +6

      애초에 이순신을 경상 우수영에 배치했다면 임진왜란은 일어나기도 전에 일본 선봉대가 전부 수장되며 끝났을 것이다. 경상 우수영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은 100여척의 판옥선이 있었다. 반면에 전라 좌수영에는 제대로된 함선조차 없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조정의 지원 1도 없이 모두 이순신이 사비 털고 백성들 도움 받아 만든거다.
      원균은 그 최강의 수군 전력을 가진 경상 우수영에 부임하고 함선 관리도 안해서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엔 100여척 대부분이 못쓰게 된 후였고, 그나마 원균은 일본이 처들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100여척의 판옥선을 모조리 불사르고 전라좌수영으로 도망왔다. 원균의 개ili새ili끼 스러움은 비단 이순신 탄핵이나 칠전량 뿐만아니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특출났던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영에 부임하여 100여척의 판옥선을 정비하고 추라고 더 함선을 건조하며 수군을 훈련시켰다면, 고니시와 가토의 20만 선봉대는 조선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뭐 혹자중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알아 보고 중용했네 하면서 실드치는데, 선조 이 개새끼는 류성룡의 성화에 못 이겨 아무것도 없는 전라 좌수영에 보내 그저 써주는 척만 한거지 중용한게 절대 아님. 자기가 아끼는 원균은 알짜배기 경상 우수영에 보내고. 선조 이 개ili씨lil발년이 싸지른 개lil새ili끼는 인조와 더불어 조선 역사에 있어 연산군보다 더 개 같은 씹ili쌔끼임.

    • @hen3329
      @hen3329 4 года назад +2

      hiker Frantz 경상우수영에 100척의 판옥선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판옥선 1척당 125-130명이 탑승합니다. 100척이라면 경상우수영만 1만 수군을 보유했겠죠. 그에 비추어볼때 삼도수군 총6개의 본영들을 모두 합치면 수군력이 5만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조선은 임진왜란 전까지 200년간 평화기를 누렸습니다. 수군은 병역 중에서도 가장 기피대상이었고 수군명부엔 있지도 않은 사람이 이름이 올라가 있는 등 병역기피, 비리가 상당했죠. 실제로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했을 때 병영 상태가 심각하게 엉망이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율곡이이의 10만양병설 채택이 되지 않은 것도 이만한 병력에 돈이 어마무지하게 들어가서인데 왜해적 경비하는 역할이 주임무인 수군이 5만이나 되는 전력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에서 전쟁초기에 보유한 전함인 판옥선이 24척이고 비전투용 상선과 협선을 합쳐야 85척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경상우수영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감안해도 딱 그정도일 겁니다. 원균이 전쟁때 경상우수영에서 데리고 나온 판옥선이 총3-4척입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서 끌어모은 함선이 24척이니 전라좌수영 휘하에 각 진영으로 나누면 한 진영단 3-4척정도로 추정되는데 원균은 경상우수영 직속 자기가 직접 지휘하는 함선들을 숫자와 비슷하죠. 그리고 원균은 경상우수영 부임한지 이틀인가만에 전쟁 났어요. 원균이 속이 좁고 질투가 많은 인간인건 사실임. 왜란당시 각종 보고서를 보면지휘관으로서 자질이 부족했긴 하다만 선조 정부가 더 ㅂㅅ임.

    • @hikerfrantz5829
      @hikerfrantz5829 4 года назад +3

      @@hen3329 경상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음으로 나라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는 챙겨줬을 것임. 오히려 전라도야 말로 수군이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었을것. 그리고 원균이 도망갈때 100여척의 함선을 불태웠다는건 기록에도 있는걸로 암.

  • @허상무-b8g
    @허상무-b8g 4 года назад +113

    내부의 적이 제일 무섭다더니 원균과 선조 때문에 피해 안봐도 되는것을 너무 많이 겪었어

  • @josephkim1909
    @josephkim1909 4 года назад +11

    눈에 그려지듯 해전이 펼쳐지는듯한 자세한 설명과 이순신 장군님이 그랬던것처럼 각 병졸들이 가졌을 감정까지 세세하게 집어주시는게 한편의 영화를 보는것같고 배우는것 또한 많았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gom1049
    @gom1049 4 года назад +142

    원균을 빠는 애들은 어떻게 원균을 빠는겨 ㅋㅋㅋㅋ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네

    • @khd5031
      @khd5031 4 года назад +45

      이순신을 까려면 원균을 추켜세워야 되니까요 토착왜구들이 주로 그지랄함 ㅋㅋㅋㅋㅋ

    • @왕파리-b3h
      @왕파리-b3h 4 года назад +39

      엣날에 이순신이 원균공을 가로채갔다 유언비어를 날린놈들이 누군가 했더니 원균후손들이구만 구족을 멸했어야하는데 원유철이같은 것들 안태어나게

    • @hararnoh2555
      @hararnoh2555 4 года назад +13

      원씨들이 단합했네요...

    • @북극곰-q7o
      @북극곰-q7o 4 года назад +14

      진짜 원균은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빨수가 있는거지 ㅋㅋㅋ 그냥 다짜고짜 후장빠는건가;; 그럴꺼면 이토 히로부미를 빨겠다 ㅋ 우리나라 ㅈ되게 한거는 같지만 이토는 확실히 위인이니깐

    • @KaraForeverWin
      @KaraForeverWin 4 года назад +14

      토왜들이 빠는거지...

  • @holdfast2120
    @holdfast2120 4 года назад +10

    너무 재밌게 홀린듯 잘 봤습니다. 물론 외침의 역사라는 것이 아픔이기도 하지만 불세출의 영웅이 발견된 역사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 두시간여 걸리는 여수 진남관, 이순신 광장 더 멀리 울돌목도 가봤는데 갈 때마다 느껴지는 숨결 같은게 있습니다. 강의 중에 그런 감정과 느낌을 갖게 되네요. 고등학교 때 역사선생님께서도 말씀 하셨던 바로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 전략이 근대 더 나아가서는 현대 함포전과 같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네요. 현대해전 또한 적을 먼저 발견하고 장거리 정밀 타격하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피해를 극대화 하는 것이 주된 전략인데, 이순신 장군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 갖은 정보와 척후를 바탕으로 그와 같은 발상을 하셨다는게 정말 대단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생생한 이야기를 통한 역사 전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kimyh8234
    @kimyh8234 4 года назад +47

    30분이 금방지나갔습니다 넷플릭스 영화한편보다 더 박진감 넘치네요 ㅠㅠ 이순신장군 영화도 새로 준비중이라던데 이보다 더 박진감넘칠수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miya0714
    @miya0714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역사를 역사답게 때부터 다른 유투버들처럼 좋아요 구걸없어도 꽂을수밖에 없는 강의 고맙습니다 😅 타의말고 자의 내뜻으로 좋네여 고로 좋아요 꽂습니다 말리지 마세요 ㄱㅅ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 성웅 거리 넘 멀고 가장 기본적으로 내집과 식구 가정을 지켜준거니까 ㅇㅇ 저도 거의 외계인설 먼미래의 일본식민지배당하고 있는 우리 구하기위해 과거바꾸러온 타임머신 시간여행자 설이 왜나왔지 오바가 아니고 그런것 같아 동조할 수밖에 없네요 마치 수학 1+1=2 설명이 필요없듯 이순신 왜이겼죠 이길수밖엦 없게 다 해놨기에 세계적으로 공포된 4대해전 들가고 세계가 인정해주닛가 부연설명이 필요없을듯 😮

  • @CSKang-fe1py
    @CSKang-fe1py 4 года назад +105

    원균 개갞끼
    진짜 노꾼이 진짜 대단한분들이다

    • @창녀줄리가청와대접수
      @창녀줄리가청와대접수 4 года назад +8

      노꾼하기 힘들어서 탈영하다 참수당한 사람 수가 전사자보다 많음.

    • @조계호-h1e
      @조계호-h1e 4 года назад

      ㅋㅋㅋㅋㅋㅋ이런저런ㅋㅋㅋ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jyoung._.o
      @jyoung._.o 4 года назад +12

      그 원균의 직계후손이 미래한국당 원유철 당대표죠..

    • @김정일-n3m
      @김정일-n3m 4 года назад +5

      원균.박홍.개객기

    • @berryyellow1198
      @berryyellow1198 4 года назад +5

      노꾼들은 진짜 1일 1닭백숙 먹이고싶네....

  • @hohwayi
    @hohwayi 4 года назад +15

    이순신장군님의 관련 동영상은 거의 다 찾아 보았지만 선생님의 강의 만큼 자세하고 재밌는 강의는 없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Gunjunin
    @Gunjunin 4 года назад +42

    밑에 국뽕이라고 까는 댓글이 많은데 나중에 까는 댓글이나 헛소리 하는걸 팩트로 조져주시기 바랍니다.

    • @naegok05
      @naegok05 4 года назад +3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독립군을 잡아들인 일본군 장교였던 백선엽이가 현충원에 안장되는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되나요 꼭 강의 부탁드립니다

    • @길상화-f7h
      @길상화-f7h 4 года назад +1

      @@teto7559 무슨 공?

  • @onej45
    @onej45 4 года назад +11

    그동안 이순산장군 드라마다큐를 많이 보았지만 이만큼 상세히 라이브하게 설명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열정강의 너무감사합니다.
    다른 영상들도 잘 보겠습니다.
    임진난처럼 엄중한 시기
    건강하시구요

  • @dkrkro
    @dkrkro 4 года назад +73

    원균모시는 묘도 있고 자랑스러워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이영상 보여주고싶다 ㅎㅎ

    • @Gahndolf
      @Gahndolf 4 года назад +3

      @@yhansookim7850 뭘 기념하는덴지 궁금하네요..

    • @Sunset-vz5hs
      @Sunset-vz5hs 4 года назад +3

      평택시에서 원균을 그렇게 빨아댐

    • @Sunset-vz5hs
      @Sunset-vz5hs 4 года назад +10

      @빙슨 원균이 평택시 출생이고 그 직계후손이 미통당 평택시의원 원유철ㅋㅋㅋ

    • @korea-gurye1
      @korea-gurye1 4 года назад +2

      등신 후손들일깨 뻔하지 않을까

    • @dkrkro
      @dkrkro 4 года назад

      @빙슨 배설장군은 능력도 있고 배12척을 살린 공도 잇었는데 전쟁의 공포가 너무 큰 나머지 명량해전 전에 도망간게 아쉬운듯

  • @ymj5321
    @ymj5321 4 года назад +33

    이순신 장군님께서 출전하셨던 해전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고 실감나게 설명해 주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지도를 사용해서 수군 이동 경로를 알려주신 것도 좋았고, 여러가지 기록과 수치 등 다양한 정보와 함께 알려주시니 정말 장군님의 위대함이 더 크게 느껴지고, 그 시절에 어떻게 전쟁을 치루었는 지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되네요.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하루하쿠-c4k
    @하루하쿠-c4k 4 года назад +73

    선생님같은 분이 계셔서 참 감사합니다. 역사를 역사답게^^

  • @chamsae76
    @chamsae76 4 года назад +18

    10:30 이 시끼 현령은 도망갔어!!! 에서 빵터짐..ㅋㅋ 하지만 웃프다..나쁜시끼ㅜㅜ

  • @moitoi2172
    @moitoi2172 4 года назад +103

    30분짜리 강의가 처음인것같은데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 @꽁꽁파파
    @꽁꽁파파 4 года назад +10

    이런 영상을 접할수 있다는게 영광입니다. 이순신장군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무슨 영화를 보는것처럼 박진감 넘치고 스릴있네요.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찬 감동인데 이렇게 재미까지 더해 주시니 더할나위 없이 감사드립니다.

  • @periuse65
    @periuse65 4 года назад +10

    와우.. 이렇게 재미나게 이순신장군 활약을 들은적이 없었던 이야기들을 황선생님 강의를 통해 알게되어 너무 흥분됩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해전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 @김동영-p7o
    @김동영-p7o 3 года назад +5

    원균은 도망친 죄로 참수 시켰어야 했는데

  • @koing8083
    @koing8083 4 года назад +28

    저는 지금 까지 이렇게 명쾌하고 확실한 역사 공부를 못했어요.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thomgreen6221
    @thomgreen6221 4 года назад +11

    너무 흥미진진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뭉클하네요. 감사합니다. 역사를 역사답게 알려주셔서.

  • @을지이도
    @을지이도 4 года назад +12

    시바 료타로는 소설 "료마는 간다"를 쓴 일본에서는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러일 전쟁 때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제독을
    이야기하면서 이순신에 대해서 몇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극찬을 합니다. 영국 넬슨 제독 이전에 세계 최고의 제독이라고...
    이순신 이전의 세계 해전사는 배로 이동해서 배 위에서 백병전을 했습니다. 전투 장소만 배지, 육지에서의 싸움과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백병전은 하지 않습니다. 함대를 포위해서 함포사격으로 작살을 냅니다. 적선이 지리멸렬할 때
    마무리로 돌격 명령을 내립니다. 튼튼한 조선의 판옥선이 들이받으면 일본 함선은 부서지고 적들은 바다에 빠집니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이순신이 근대해전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원균 같은 사람은 머리속에 그런 개념 자체가 없으니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우리 눈에도 한심함 그 자체죠... 차원이 다르다 라는 말이 이 보다 더 딱 맞는 표현이 있겠습니까?
    덤으로 우리 병사들은 손실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니 병사들이 이순신 장군을 믿고 명령대로 잘 싸웁니다.

    • @honey7856
      @honey7856 4 года назад

      을지이도 온나라의 지원을 받은 넬슨과 도고를 충무공과 비교는 어불성설이죠...나라의 지원은 커녕 죽일시기만 엿보는 조선의 조정과 싸운 충무공입니다..

    • @을지이도
      @을지이도 4 года назад

      @byung hern park 조선의 국방제도와 영국의 국방제도를 비교분석하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영국은 전 국민들에게서 세금을 거둬서 필요한 부대에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과 비슷합니다.
      조선은 자기 관할지역에서 직접 조달하는 방식입니다. 전라 좌수영의 관할지역은 5관 5포입니다.
      순천도호부(여수,순천),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 고흥군 등 5개 지역의 전권을 쥔 계엄하의 사령관보다
      강력합니다. 필요한 물자도 좌수사가 징발하거나 세금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즉 5관 전체가 좌수영의
      둔전과 같습니다. 병사 징발 권한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충무공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어떻게 전쟁 준비를 했겠습니까?

    • @bless2k12
      @bless2k12 2 года назад +1

      @@을지이도 전시가 되면 장군들은 나라에서 말 안해도 자기들 지역에서 멋대로 징발합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에요. 그것을 나라의 지원이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전쟁을 할 때 국가는 전국의 자원을 모아서 자원이 필요한 곳에 배분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의 지원이고 이순신은 그러한 것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호남을 지켜서 나라를 지원하는 입장이었습니다.

  • @changsuoh5996
    @changsuoh5996 4 года назад +6

    여수가 고향인 제 입장으로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 고향 여수여 가면 그 당시 거북선을 마들던
    선소라는 곳도 있습니다
    여수 여행가시는 분들도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 @jasonbourneman5845
    @jasonbourneman5845 4 года назад +24

    아 요즘같은 삶의 의미와 목표가 사라진 무기력한 시대에 차라리 저 시대로 돌아가서 이순신과 뜻 있게 싸우다 가고싶다

    • @김춘삼-t7e
      @김춘삼-t7e 4 года назад +1

      이거 진짜 ..저도그럼,.

  • @플로스-e7c
    @플로스-e7c 4 года назад +9

    황쌤님! 역사강의 귀에 쏙쏙 들어오게
    현장감 넘치고 지루함이 없이 섬세하고 잼있게 강의해주셔서
    신선감 ㆍ매력이 넘쳐서
    화이팅! 합니다^♡^

  • @깽짱너이
    @깽짱너이 4 года назад +49

    황쌤의 말씀에 동화되어 그때의 감정까지 느끼게되어 나도 모르게 온갖감정을 느끼며 순삭되었네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 @user-dn2uk6rj4g
    @user-dn2uk6rj4g 4 года назад +9

    명쾌하면서 깊이있는 강의에 시간이 가는줄 모르겠습니다~ 30분도 3분같이 느껴집니다~ 훌륭한 강의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 @최재민-m5y
    @최재민-m5y 4 года назад +118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 처음엔 몰랐는데 이젠 알겠습니다 역사적 사료들 수집과 그걸 강의해주시기 위해 공부하셨을 선생님의 열정과 노력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yoonhomo9708
    @yoonhomo9708 4 года назад +6

    임진왜란 강의 끝내시면 한번에 시청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더욱더 공부하고 싶어지는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 @chihyunson696
    @chihyunson696 4 года назад +222

    나는 원유철을 보면서 원균을 떠올린다.....

    • @dominic5131
      @dominic5131 4 года назад +41

      어떻게 알았어요? 거기 원균 출생지 출신 국회의원입니다 같은 원씨입니다 거기 사당도 있고요 ㅋㅋㅋ
      원균빠 대체 누굽니까 황선생님이 그러셨는데 ㅋㅋ
      집성촌이 있습니다 좀 크죠 그동네에선 방구좀 뀝니다. ㅋㅋ
      거기사람들은 원균이 자기 조상이라고 자랑합니다
      다들 머래 그러면서 신경도 안쓰죠..
      거기 후손들도 원균이랑 비슷합니다 아주 지랄같습니다 .. ㅋㅋ

    • @이순신장군-n6v
      @이순신장군-n6v 4 года назад +7

      판옥선도 빼앗겼음. 다 배꼈겠죠

    • @최원석-z3p
      @최원석-z3p 4 года назад +18

      원유철 조상 원균 맞아요.

    • @왕파리-b3h
      @왕파리-b3h 4 года назад +5

      우와맞네 맞어 ㅋㅋㅋㅋ

    • @honey7856
      @honey7856 4 года назад +2

      Chihyun Son 황선생님의 하트어택 심쿵 ㅎㅎㅎ

  • @cjtruxlxhljvt
    @cjtruxlxhljvt 4 года назад +42

    30분 순삭 실화냐ㄷㄷㄷ
    다음편은 과자까놓고 봐야지ㅋㅋㅋㅋ

  • @yesno9065
    @yesno9065 4 года назад +15

    손으로 만지는 듯 생생하게 이해가 되네요~ 이렇듯 헛소리 없이 담백하고 체계적인 왜란 브리핑은 드문 듯 합니다

  • @allyhwang4590
    @allyhwang4590 4 года назад +7

    영화만큼 실감나고 전투신이 상상이 가능할정도로 상세하게 자료 첨부해 주셔서 넘 재밌게 봤어요 . 감사합니다 😊

  • @honey7856
    @honey7856 4 года назад +29

    하....원균....다알고 있는내용이지만. 진짜 부관참시하고싶다..평택의 자랑 원유철이가 국민세금으로 원균기념관 건립하려고 한다는데...ㅎㅎㅎㅎ

    • @고구려-x1x
      @고구려-x1x 3 года назад +1

      만약 그런다 하면 평택시청에 항의해야 합니다

    • @큰형님-j3b
      @큰형님-j3b 3 года назад

      정말 쓰레기같은 현실은 충무공으로 추촌된 인물이 이순신만은 아닌 권율 .원균 ...그걸 근거로 원유철같은 쓰레기가 기념관? 무슨? 쓰레기 기념관....

  • @사용자-h2o
    @사용자-h2o 4 года назад +6

    광양 출신이라 예부터 전해내려온 이순신장군 이야기을 동네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는데...마루산성에 소풍도가고,이순신장군 마지막전투에 옆을 지킨 최측근이자 전우가 송씨인데 우리 조상님, 내가 그줄기에서 태어낫지 ㅋㅋ

    • @kimjonguk10
      @kimjonguk10 3 года назад

      송희립장군말씀이군요..^^

    • @박승호-g9i
      @박승호-g9i 3 года назад +1

      송희립장군은 고흥 동강면사람이고 지금도 그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 @김바다-c3z
    @김바다-c3z 4 года назад +70

    선생님 영상은 진짜 너무 좋네요 특히 임진왜란편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알려주시는분은 없는데 말이죠.
    이순신 장군님과 전라좌수영 👍👍👍👍

    • @korea-gurye1
      @korea-gurye1 4 года назад +4

      발로 뛰어서 공부하신분일듯 해요 매국노 역사학자들 처럼 책보고 공부한게 아닌

  • @yoonhomo9708
    @yoonhomo9708 4 года назад +5

    임진왜란 끝나면 한번에 들으려고 준비 중입니다. 선생님 응원합니다!!!

  • @korea-gurye1
    @korea-gurye1 4 года назад +149

    후손들이 돈이 많으니까 역사왜곡 하는거지 머 원균씨 후손이 미통당 이라며?

    • @honey7856
      @honey7856 4 года назад +27

      알파산님 그 후손놈이 원균기념관 국민세금으로 건립예정중 ㅋㅋㅋ

    • @김뺑올
      @김뺑올 4 года назад +10

      역시 씨 발 한심하다 한심해 원가

    • @nafer940
      @nafer940 4 года назад +4

      아 병신 삽질하는 인간아 그대가리로 정치운운하냐?그대가리로 그냥 밥이나처먹고 살아

    • @미겔-o2r
      @미겔-o2r 4 года назад +4

      원소 원술 원균 노답삼형제~

    • @hikerfrantz5829
      @hikerfrantz5829 4 года назад +10

      애초에 이순신을 경상 우수영에 배치했다면 임진왜란은 일어나기도 전에 일본 선봉대가 전부 수장되며 끝났을 것이다. 경상 우수영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은 100여척의 판옥선이 있었다. 반면에 전라 좌수영에는 제대로된 함선조차 없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조정의 지원 1도 없이 모두 이순신이 사비 털고 백성들 도움 받아 만든거다.
      원균은 그 최강의 수군 전력을 가진 경상 우수영에 부임하고 함선 관리도 안해서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엔 100여척 대부분이 못쓰게 된 후였고, 그나마 원균은 일본이 처들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100여척의 판옥선을 모조리 불사르고 전라좌수영으로 도망왔다. 원균의 개ili새ili끼 스러움은 비단 이순신 탄핵이나 칠전량 뿐만아니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특출났던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영에 부임하여 100여척의 판옥선을 정비하고 추라고 더 함선을 건조하며 수군을 훈련시켰다면, 고니시와 가토의 20만 선봉대는 조선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뭐 혹자중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알아 보고 중용했네 하면서 실드치는데, 선조 이 개새끼는 류성룡의 성화에 못 이겨 아무것도 없는 전라 좌수영에 보내 그저 써주는 척만 한거지 중용한게 절대 아님. 자기가 아끼는 원균은 알짜배기 경상 우수영에 보내고. 선조 이 개ili씨lil발년이 싸지른 개lil새ili끼는 인조와 더불어 조선 역사에 있어 연산군보다 더 개 같은 씹ili쌔끼임.

  • @sandjlee
    @sandjlee 3 года назад +23

    What an exhilarating presentation! To me, 황현필 선생 presentation / lecture is a lot better and easier to draw pictures in my brain than 설민석 선생. Thanks!

  • @루이-i1v
    @루이-i1v 4 года назад +10

    드라마 보다 더 실감나게 설명해주시네요. 강의 듣는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 @오막사리
    @오막사리 2 года назад +4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여전히 우리 속에 계십니다 장군의 기개를 아이들이 갖도록
    선생님 멈추지 말아 주세요 고맙습니다

  • @쿠쿠-l9j
    @쿠쿠-l9j 4 года назад +12

    30대 직장인입니다. 한 주의 스트레스를 주말 황선생님 영상보며 날려보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강의 항상 감사드립니다~!

  • @유진지-w2v
    @유진지-w2v 4 года назад +7

    가슴이 뜨거워지는 모든 강의 정말 감사드립니다 ! 전쟁강의가 이렇게 재밌다니요ㅜㅜ

  • @wonheelee4113
    @wonheelee4113 4 года назад +5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니 관민들이 나와서 울면서 맞이했다는 대목에서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나네요. 우리 조상님들이 얼마나 무섭고 감격스러웠을지 상상조차 어렵지만, 울지 않을 수 없었을것 같습니다.

  • @조용한손님-t8s
    @조용한손님-t8s 4 года назад +5

    세번 들었습니다.
    또 들을겁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강의. 늘 항상 감사합니다.

    • @oxoxking
      @oxoxking 2 года назад

      저도 오늘 세번째 듣고 있습니다. 절대 명강입니다..

  • @taejoon2002
    @taejoon2002 4 года назад +15

    황쌤 나빠요!!!
    왜 자꾸 오분짜리 영상 만드세요?
    10분으로 늘려주세요 황쌤
    담편언제 올라와요? 이러다가 목 빠지겠네요 책임지셔야 합니다 황쌤

  • @duck-younglee6573
    @duck-younglee6573 4 года назад +7

    감정선을 잘 살려줘서 책으로 읽기 힘든 부분들도 많이 읽히는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 @보노기
    @보노기 4 года назад +17

    공시 준비하면서 너무 간단하게 배웠었는데, 진짜 역사를 배우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2 года назад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 @ifnotnowwhen9995
    @ifnotnowwhen9995 4 года назад +6

    선생님의 강연이 실록에 의한 해석은 거의 국민 35%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남은 진정한 우리국민 27%정도어서 제 주변 1%라도 알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