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한의 해유록을 보면 일본의 상업이 화려하게 발전했고 출판업이 상당하여 많은 이들이 독서를 하며 심지어 '징비록'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하죠... 상업발전, 하층민이 문자를 쓸 기회, 네덜란드를 통한 난반학의 발전 등으로 지속적인 자극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맞물리어 메이지 유신에까지 이르렀던 것 같네요. 영상 잘 보았습니다!!
테라코야 이야기 재미있게 봤습니다. 일본 성공의 열쇠는 테라코야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실용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일반 서민들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도 정말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지배계층은 지배계층대로, 피지배계층은 파지배계층대로 준비가 되어 있던 나라인 것이지요. 영상 참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잘 만드시네요. 참고로 일본 유네스코 협회에서 1980년대부터 전세계 빈곤국가 어린이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 사업 이름이 "세카이 테라코야 운도오(世界寺子屋運動)" 입니다. 식자율이 70%나 되었군요. 구체적인 통계치를 찾아 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대단하네요. 전업 작가가 존재했고, 카와라반 같은 단편 요미우리가 일반서민에게 퍼져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
교육기관의 보급 이전에 보급된 교육기관이 대체 무엇을 가르치느냐가 더 중요하다라는게 포인트죠. 지금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피교육자 개개인의 전공해야 할 교과를 따르지 않고, 무조건 국영수 위주의 사교육에 집중 되어 있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회에 대해 피교육자가 생산할 바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시험을 잘 쳐서 남을 지배 하기 위해 시행하는 교육은 조선 시대 과거제도와 같이 생산적이지 못한 교육제도로 한 국가를 반드시 멸망으로 인도 합니다.
조선 나오는 사극에서 금속활자를 통하여 책을 제조한다는 애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일본 애들은 임란후에 책의 편집과 발간이 매우 활발히 책방에서 일어났다고 들었다. 일본의 상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중산층이 이렇게 수백년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나라처럼 625후 갑자기 중산층이 생긴 나라와는 뿌리가 다른 것 같다. 일본은 공산주의가 힘들것 같다. 중산층의 뿌리가 수백년이 되었군아. 우리나라처럼 중산층 뿌리가 얕은 나라는 조금만 잘못되도 중산층이 무너지고 공산국이 되기가 쉬울려고 하는 경향이 최근이 너무도 많다.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는 중앙집권체제와 맞물린 유교 사상입니다 중앙집권체제는 나라 체제를 갖추는데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반대로 시대흐름을 못따라갈 경우 도태되고 고립될수있습니다 조선은 유교사상이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사대부들은 무지한 일반 백성들을 대변해주면서 기득권으로서 정부의 언론역할을 해주었기때문에 모든 사회적 요소를 유교이념으로 판단하므로 이 유교원칙에 벋어나는 생각을 하는 세력이 생기면 바로 대역죄로 처벌하였는데 이게 조선 후기에는 세계돌아가는 정세에따른 개혁의 목소리조차 차단당할수밖에 없기에 애초에 근대화로가는 개혁은 불가능이라고 보시면될것같습니다 조선말기에 외세가 들어오고 외세가 영향력을 행사함에따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찌해볼려고 노력은하는데 이미 늦었죠 평소에는 생각없다가 죽을때되니 정신차리는꼴입니다 국뽕 다 버리고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사실상 일본에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봐도 틀린게 아닙니다
실생활에 알맞는 초등교육이나 소학교 교육역할을 할 곳이 이미 존재했기에 근대화가 가능했던거네요. 이씨조선때는 서당이 있었어도 언급한것처럼 천자문과 언문(한글), 유교경전이 주된 교육이라 상공업이나 실생활에 적합한 교육이 거의 전무했던탓에, 그래서 한국이 일본에 비해 100년 뒤인 1960년에 이르러야 문맹퇴치와 산수교육같은 국민실생활에 맞는 이루어진거네요.
근대화 당시 공교육확산을 오늘날이나 혹은 미래사회 시각으로 바라볼수만 없는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산업사회가 확대되면서 형성된 공교육 학교체제는 전국민을 획일적인 대량생산식 교육방식으로 공장노동자 양성에 특화된 측면이 있는데 여기에는 분명 학생 개개인의 인권과 개성을 완전 깡그리 무시했다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장문의 코멘트 잘 읽어보았습니다. 대부분 제 영상에서 나온 내용을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격이 되겠습니다만, 의문이 드시는 점에 아래와 같이 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Q.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이 얼마나 많았겠나? A.쵸오닌은 도시인 죠오카마치에 살던 서민층을 일컫는 말로 에도에만 50만명이, 오사카 교토정도의 대도시에도 10만 단위 이상의 쵸오닌이 살았습니다. 게다가 테라코야의 특이할 점은 1800년대에는 시골 농촌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점입니다. 메이지시대에 소학교가 세워지기 전 조사에서도 현대 일본의 소학교 갯수와 비슷할 정도로 많은 테라코야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19세기에는 이미 농촌에서도 빈곤층이 아닌 이상 읽고 쓰고 계산하는 기초지식에 더해 농업에 관한 교육을 받은 농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식자율은 19세기 최고수준이었죠. 일본인구의 많은수가 기초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Q.교육내용은 유학경전 수준이 아니지 않는가? A. 맞습니다. 테라코야의 교육은 9~12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며 지금의 초등교육 수준에 해당합니다. 성리학과 주자학은 번교라하는 무사계층을 위한 학교 등지에서 교육되어졌습니다. Q.테라코야에 입학하는 건 대학진학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A.앞서 말씀하신 "유교경전 배우는 고등수준은 아닐것"이라고 하신 대로, 대학 가는 것만큼 어려운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상에도 나오지만, 농촌가정에서도 조금의 여유가 있으면 보낼 수 있었습니다. Q.조선의 근대화 실패는 교육수준 탓이다? A.일본의 근대화 성공이유를 교육수준 단 하나로 단정지을 수 없듯이, 조선의 근대화 성공 실패도 하나의 이유로 단정지을 수 없겠죠. 에도시대는 지배계층은 지배계층대로, 서민층은 서민층대로 근대화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가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궁금하신 점이나 의문이 드는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저런 실용적인 교육이 일본 근대화에 성공했구나.... 하지만 도덕이나 인성 교육이 좀 모자란 감이 있는데.... 도덕 교육이 모자라서 기형적인 근대화와 밑도끝도 없는 폭주와 식민지들에 대한 폭압 정치를 낳은건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도 드네요. 또한 교육을 통한 관직진출이나 공직진출이 부재해서 일본의 정치적 무관심을 낳은건 아닌가 생각도 들고요.
도덕적 측면에서 해석해 주셨군요! 도덕교육이 전무했던 건 아니지만, 서민층을 위한 건 아니었죠. 에도시대에는 무사계층 중심으로 유교가 보급되어 존왕양이 사상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죠. 근대적 교육시스템에서 도덕 혹은 모랄 교육은 종교시설의 역할로 생각되어지기에 공립학교등에서는 도덕교육이 행해지지 않았죠. 종교와 과학을 완전히 분리시켜 세속주의적인 교육을 위해서 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근대이전 동아시아 교육시설은 해당 관점에서 교육시설보다 종교시설(수도원 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유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시설들이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테라코야가 세속적인 교육을 행한 나름 진보적인 사교육 시설이지 않았나 생각되어집니다. 한국도 일본도 종교관과 도덕관이 미묘하게 분리되어 있는 나라이기에 서구의 시선에서 굉장히 특이한 문화가 있는 나라죠. 종교=도덕이라 생각하는 문화권에서, 무교가 5할이 넘는 두 나라가 치안도 높고 국민성도 높다고 평가되는 점을 특이하게 생각한다죠. 시청과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에도시대의 번성을 근대화로 연결시키려는 것에 대해서 결정적인 맹점들을 지적한다면 1. 에도시대 겐로쿠시대를 지나면서 경제가 쇠퇴했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개항직전까지 겐로쿠시대적인 분위기였다라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근대화로 연결성을 논할수는 있스나 이미 겐로쿠시대가 끝난 18세기 후반부터 경제적으로도 쇠퇴하고 사회제도적 모순점이 폭팔하면서 민생은 어려웠다는 것이죠. 한국역시도 정조조가 끝나고 19세기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민생이 어려워젔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2. 일본이 그렇게 근대적 마인드가 자생했다면 왜 개항을 자발적으로 안하고 페리제독에 의한 강요로 했슬까요? 국제정세를 잘알고 현명하게 대처했다라고 평가한다면 페리제독 강요이전에 자발적으로 서구국가들과 개항을 했서야 합니다. 3. 단순히 상업의 융성을 가지고 근대적 준비라는 것을 논할수가 있슬까요? 진정으로 근대적 준비가 가능하려면 정치개혁 및 민권의식향상입니다. 에도시대 일반 백성의 민권의식수준이 얼마나 근대적일까요? 조선과 비교해서도. 그리고 명치유신이후에도 서구와 다른점으로 서구적 공화정치를 도입하지 않고 되려 전제군주제로 복귀했죠. 공화정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종 민생관련 근대적 개혁성향이 에도시대에 존재했나요? 신분제도 타파등. 제도적 개혁은 아니더라도 일반 민중들의 민도수준의 향상분위기가 얼마나 존재했나요? 조선의 경우 19세기 민란을 민생파탄의 어려움으로 들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과거와는 다르게 민중의식의 반봉건적 성향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과거같으면 억압받고 참았던 민중의식이 19세기 들어서 점차로 향상되어가는 일면을 들어낸 것입니다. 보통 19세기 순조조 이래로 세도정치운운하면서 정조조 번성기의 쇠퇴를 내세우는데 결코 객관적으로 쇠퇴한것이 아닌 민중의식성장으로 인한 봉건체제의 동요라는 과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정조조까지 별문제가 없었던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조때까지는 그나마 구 시스템이 작동이 원활했다는 것일뿐입니다.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일본의 식자률이 급격히 높아진시기는 메이지 시대 정부가 서양열강에 비해 뒤쳐진 근대화를 따라잡기 위해 일본국민들의 개몽교육의 일환으로 전국민에게 초등교육을 의무로 실시한 이후라고 알고있는데요..?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그 테라코야라는 시설이 정부가 운영하는 곳도 근대적인 교육시설도 아니다보니 기준이 제각각이라 산수를 포함해 문자연습등 기초 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곳도 있는가 하면 그냥 아이들을 맡기는 탁아소 수준도 있지 않았을까요? 개인적으로 에도시대 식자율이 7할이라는 것에는 납득하기 힘든게 그 당시 에도시대 서민들의 생활 수준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국민이 충분히 사용할만큼의 종이와 서예도구가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고 있다고 해도 하루먹고 하루사는 지방 소작농이 그정도 금전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는 또 의문입니다 일단 B급 무사님이 올리신 영상에는 메이지유신의 통계만이 올려져있는데 혹시 에도시대 말기의 자료가 있으시면 올려 주실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질문 감사합니다. 약간의 답변을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초등교육 이후에 식자율이 올랐다? 식자율은 에도시대때부터 높은편이며 이는 테라코야 덕분이었다는 건 일본사 연구가들중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은 없을듯 합니다. 제 영상에도 나오듯 메이지시대 문부성의 테라코야 조사는 에도시대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소학교령이 발표되기도 전입니다. 소학교령이후 자연스레 대체됩니다. 산수, 문자교육등 기본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시설이 테라코야에서 소학교로 완전히 대체되었음으로 추측됩니다. 한편 일제시대 조선에서는 소학교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라코야와 비슷한 어린이 교육시설이던 서당의 수는 크게 줄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테라코야의 교육내용이 소학교와는 크게 차이가 없으나 서당과는 차이가 있었기때문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즉, 테라코야는 근대적공공교육이 도입되기 전부터 기초교육시설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붓과 종이가 부족해서 안된다? 에도시대는 상업이 발전함과 동시에 인쇄출판산업이 크게 번성합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우키요에의 유행인데요. 우동한그릇 사먹을 돈이면 종이에 인쇄된 그림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에도시대엔 성지순례가이드북이나 우미요리같은 정보지도 서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우키요에나 민화에도 테라코야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도 있죠. 햐쿠쇼오라이百姓往来, 쇼바이오라이등 商売往来테라코야에서 사용된 교과서도 대량인쇄된 서적이었습니다. 3.농촌지역은 가난해서 테라코야 못간다? 농촌지역에도 테라코야가 있었으며 학동들은 대부분 형제가 많거나 소나 말등 가축이 있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부농층이란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에도 오사카 교토등 대도시 주변 농촌은 반농반상이 늘어나며 형제가 적은 학동도 늘어나며 이는 에도 후기로 가면 더욱 늘어납니다. 에도시대 백성들이 6공4민이라하여 높은 세율로 생활이 힘들었다고 하나 이는 쌀생산량에 대한 세금뿐이었기에 에도후기에는 상품작물이 퍼지면서 반농반상이 늘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에도시대 중에 제작된 테라코야 조사표는 존재하지 않거나 제가 얻을 수있는 범위에선 없었습니다. 막부에서 전혀 개입을 하지 않는 순수 사설 교육시설이기에 공식적인 등록 신고등의 절차도 없으니 기록도 없는 듯합니다 에도후기의 테라코야 수는 영상에 나온 통계가 가장 잘 나타내는 자료입니다. 문부성이 메이지4년에 생기고 소학교 도입전의 실태조사통계입니다. 에도시대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때의 조사이니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Samurai-B 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우동 한 그릇을 먹을 돈이면 종이에 인쇄된 그림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네요 에도 시대 당시 일본은 괄목한 만한 인쇄술과 두터운 거리 예술가들이 있었군요 그 당시 조선은 어떨까 자료를 찾아봤는데 18세기를 기준으로 한지 한 장에 800원 민화가 만원에 거래 되고 있더군요 후기에 들어서 나름 상공업이 활발해져 민화의 유통도 나름 활발해졌다 하나 목판으로 대량 인쇄가 가능한 우키요에에 비해서는 다소 가격이 비싼던 것 같습니다 식자율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있으나 덕분에 여러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알수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 식자율은 단지 히라가나만 외우면 올라갑니다.통신사의 기록 해유록에서 "이들이 글을 안다는 것은 한자가 아니라 자국의 언어를 안다는 것이다"라고 했듯이요.일본어는 영어,한국어와 달리 말하는것과 쓰는 히라가나가 일치해서 더욱 그러합니다.근대화는 지리적 이점으로 타국의 간섭없이 이룬거고요.일뽕도 적당히 해야지..
그런데 일본 지배계층 선비 사무라이가 아닌 계층중에서 저렇게 교육을 받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슬까요? 영상에서 부를 쌓은 평민들을 조닌이라는 계층이라고 하는데 조닌계층은 전체 일본인구중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이런 테라코야의 교육내용중에서 어려운 한학 유교경전수준은 아닌것이 분명하죠.그러니 이런 교육을 받았다고 고등수준의 한학 유학소양은 아닐것입니다.
저는 이 채널이 이제 추천되어서 영상 지금 봤네요. 영상 내용이 매우 좋아요. 구독하고 앞으로 계속 들릴께용!
북한은 민주화에 실패하고 대만은 민주화에성공한 이유네요
울나라는 당시 사회주의였고 일본은 그래도 자유민주주의인데다가 근대화된게 좀 있어서 그렇듯
이번 편 굉장히 인상적이게 봤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교육을 해야할지 더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네요!
시청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북한과다르게 한국이 교육열이 치열했음 심지어 일본이2위일정도로
조선은 금속활자는 있어도 출판사가 없다. 책을 대량으로 만들어도 읽을 사람이 없으니까.
신유한의 해유록을 보면 일본의 상업이 화려하게 발전했고 출판업이 상당하여 많은 이들이 독서를 하며 심지어 '징비록'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하죠... 상업발전, 하층민이 문자를 쓸 기회, 네덜란드를 통한 난반학의 발전 등으로 지속적인 자극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맞물리어 메이지 유신에까지 이르렀던 것 같네요. 영상 잘 보았습니다!!
영상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지 유신은 준비된 나라이기에 가능했던 개혁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애들 모아놓고 공자왈 맹자왈 가르쳤으니 밥먹어 먹을수 있겠냐...
테라코야 이야기 재미있게 봤습니다. 일본 성공의 열쇠는 테라코야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실용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일반 서민들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도 정말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지배계층은 지배계층대로, 피지배계층은 파지배계층대로 준비가 되어 있던 나라인 것이지요.
영상 참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잘 만드시네요. 참고로 일본 유네스코 협회에서 1980년대부터 전세계 빈곤국가 어린이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 사업 이름이 "세카이 테라코야 운도오(世界寺子屋運動)" 입니다.
식자율이 70%나 되었군요. 구체적인 통계치를 찾아 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대단하네요.
전업 작가가 존재했고, 카와라반 같은 단편 요미우리가 일반서민에게 퍼져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
영상 즐겁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자 체계도 복잡한 나라에서 식자율이 이렇게 높은게 놀라웠습니다~
오히려 현대일본은 한자를 못 읽고 쓰는 문제가 생기는 거를 걱정하고 있는데 말이죠😂
저도 잘보고 갑니다
시청 감사합니다😄
교육기관의 보급 이전에 보급된 교육기관이 대체 무엇을 가르치느냐가 더 중요하다라는게 포인트죠. 지금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피교육자 개개인의 전공해야 할 교과를 따르지 않고, 무조건 국영수 위주의 사교육에 집중 되어 있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회에 대해 피교육자가 생산할 바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시험을 잘 쳐서 남을 지배 하기 위해 시행하는 교육은 조선 시대 과거제도와 같이 생산적이지 못한 교육제도로 한 국가를 반드시 멸망으로 인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공부를 경쟁에 이용할 척도나 도구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기술직이 천시 받았죠... 신분제도 한 몫 했을거라 짐작 해 봅니다.
ㅋㅋㅋ
그떄 조선은 뭐했나 모르겟네요
일본은 당시에 정치인이 말 잘못하면 국민이 끌어내리는것이 잠깐 가능했고 조선은 김씨일가라 어려웠음
지배계급의 역량 차이?
조선 나오는 사극에서 금속활자를 통하여 책을 제조한다는 애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일본 애들은 임란후에 책의 편집과 발간이 매우 활발히 책방에서 일어났다고 들었다. 일본의 상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중산층이 이렇게 수백년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나라처럼 625후 갑자기 중산층이 생긴 나라와는 뿌리가 다른 것 같다. 일본은 공산주의가 힘들것 같다. 중산층의 뿌리가 수백년이 되었군아. 우리나라처럼 중산층 뿌리가 얕은 나라는 조금만 잘못되도 중산층이 무너지고 공산국이 되기가 쉬울려고 하는 경향이 최근이 너무도 많다.
그렇다면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것은 서민들의 교육수준이 낮아서 무식해서 근대화가 잘 되기 어려웠던것일까요?
무식했다기 보다는 서당에서 가르쳤던 것들은 시대가 요구하는것이 아니었다고 봐요....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는 중앙집권체제와 맞물린 유교 사상입니다 중앙집권체제는 나라 체제를 갖추는데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반대로 시대흐름을 못따라갈 경우 도태되고 고립될수있습니다 조선은 유교사상이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사대부들은 무지한 일반 백성들을 대변해주면서 기득권으로서 정부의 언론역할을 해주었기때문에 모든 사회적 요소를 유교이념으로 판단하므로 이 유교원칙에 벋어나는 생각을 하는 세력이 생기면 바로 대역죄로 처벌하였는데 이게 조선 후기에는 세계돌아가는 정세에따른 개혁의 목소리조차 차단당할수밖에 없기에 애초에 근대화로가는 개혁은 불가능이라고 보시면될것같습니다 조선말기에 외세가 들어오고 외세가 영향력을 행사함에따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찌해볼려고 노력은하는데 이미 늦었죠 평소에는 생각없다가 죽을때되니 정신차리는꼴입니다 국뽕 다 버리고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사실상 일본에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봐도 틀린게 아닙니다
그보단 국제정세에 맞는 외교의 부족했고 지배층의 부정부패가 심한게 문제라고 봅니다
유교
실생활에 알맞는 초등교육이나 소학교 교육역할을 할 곳이 이미 존재했기에 근대화가 가능했던거네요.
이씨조선때는 서당이 있었어도 언급한것처럼 천자문과 언문(한글), 유교경전이 주된 교육이라 상공업이나 실생활에 적합한 교육이 거의 전무했던탓에,
그래서 한국이 일본에 비해 100년 뒤인 1960년에 이르러야 문맹퇴치와 산수교육같은 국민실생활에 맞는 이루어진거네요.
공자왈 맹자왈....현대 우리나라 교육도 조선때와 다름이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문화적컨텐츠의 수출을 꿈꾸면서도 여전히 예체능을 무시하고 국영수 피상적 주입식교육에 열내는 상황이 아이러니해요.
실용적인 배움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깨닫고 갑니다. 영상 잘봤습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서열짓기를 위한 교육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교육이 되어야할텐데 말이죠...😔
조선노동당하고 중국국민당하고 비교하는거같아요
근대화 당시 공교육확산을 오늘날이나 혹은 미래사회 시각으로 바라볼수만 없는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산업사회가 확대되면서 형성된 공교육 학교체제는 전국민을 획일적인 대량생산식 교육방식으로 공장노동자 양성에 특화된 측면이 있는데 여기에는 분명 학생 개개인의 인권과 개성을 완전 깡그리 무시했다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장문의 코멘트 잘 읽어보았습니다. 대부분 제 영상에서 나온 내용을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격이 되겠습니다만, 의문이 드시는 점에 아래와 같이 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Q.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이 얼마나 많았겠나?
A.쵸오닌은 도시인 죠오카마치에 살던 서민층을 일컫는 말로 에도에만 50만명이, 오사카 교토정도의 대도시에도 10만 단위 이상의 쵸오닌이 살았습니다. 게다가 테라코야의 특이할 점은 1800년대에는 시골 농촌에까지 보급되었다는 점입니다. 메이지시대에 소학교가 세워지기 전 조사에서도 현대 일본의 소학교 갯수와 비슷할 정도로 많은 테라코야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19세기에는 이미 농촌에서도 빈곤층이 아닌 이상 읽고 쓰고 계산하는 기초지식에 더해 농업에 관한 교육을 받은 농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식자율은 19세기 최고수준이었죠. 일본인구의 많은수가 기초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Q.교육내용은 유학경전 수준이 아니지 않는가?
A. 맞습니다. 테라코야의 교육은 9~12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며 지금의 초등교육 수준에 해당합니다. 성리학과 주자학은 번교라하는 무사계층을 위한 학교 등지에서 교육되어졌습니다.
Q.테라코야에 입학하는 건 대학진학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A.앞서 말씀하신 "유교경전 배우는 고등수준은 아닐것"이라고 하신 대로, 대학 가는 것만큼 어려운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상에도 나오지만, 농촌가정에서도 조금의 여유가 있으면 보낼 수 있었습니다.
Q.조선의 근대화 실패는 교육수준 탓이다?
A.일본의 근대화 성공이유를 교육수준 단 하나로 단정지을 수 없듯이, 조선의 근대화 성공 실패도 하나의 이유로 단정지을 수 없겠죠. 에도시대는 지배계층은 지배계층대로, 서민층은 서민층대로 근대화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가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궁금하신 점이나 의문이 드는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저런 실용적인 교육이 일본 근대화에 성공했구나.... 하지만 도덕이나 인성 교육이 좀 모자란 감이 있는데.... 도덕 교육이 모자라서 기형적인 근대화와 밑도끝도 없는 폭주와 식민지들에 대한 폭압 정치를 낳은건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도 드네요. 또한 교육을 통한 관직진출이나 공직진출이 부재해서 일본의 정치적 무관심을 낳은건 아닌가 생각도 들고요.
도덕적 측면에서 해석해 주셨군요! 도덕교육이 전무했던 건 아니지만, 서민층을 위한 건 아니었죠. 에도시대에는 무사계층 중심으로 유교가 보급되어 존왕양이 사상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죠.
근대적 교육시스템에서 도덕 혹은 모랄 교육은 종교시설의 역할로 생각되어지기에 공립학교등에서는 도덕교육이 행해지지 않았죠. 종교와 과학을 완전히 분리시켜 세속주의적인 교육을 위해서 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근대이전 동아시아 교육시설은 해당 관점에서 교육시설보다 종교시설(수도원 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유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시설들이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테라코야가 세속적인 교육을 행한 나름 진보적인 사교육 시설이지 않았나 생각되어집니다.
한국도 일본도 종교관과 도덕관이 미묘하게 분리되어 있는 나라이기에 서구의 시선에서 굉장히 특이한 문화가 있는 나라죠. 종교=도덕이라 생각하는 문화권에서, 무교가 5할이 넘는 두 나라가 치안도 높고 국민성도 높다고 평가되는 점을 특이하게 생각한다죠.
시청과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Samurai-B 당시엔 도덕교육이 종교 분야쪽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군요. 하긴 옛날과 현대는 가치관도 사회관도 다르니까요. 정성스런 답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데라코야와 서당을 비교해보니 우리나라의 현재진행형인 문제점도 보이더군요. 대학과 공무원같은 관직에 집착하는 점. 우리도 실용적인 교육을 천시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読み書きそろばん
寺子屋の基本だ
에도시대의 번성을 근대화로 연결시키려는 것에 대해서 결정적인 맹점들을 지적한다면
1. 에도시대 겐로쿠시대를 지나면서 경제가 쇠퇴했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개항직전까지 겐로쿠시대적인 분위기였다라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근대화로 연결성을 논할수는 있스나 이미 겐로쿠시대가 끝난 18세기 후반부터 경제적으로도 쇠퇴하고 사회제도적 모순점이 폭팔하면서 민생은 어려웠다는 것이죠. 한국역시도 정조조가 끝나고 19세기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민생이 어려워젔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2. 일본이 그렇게 근대적 마인드가 자생했다면 왜 개항을 자발적으로 안하고 페리제독에 의한 강요로 했슬까요? 국제정세를 잘알고 현명하게 대처했다라고 평가한다면 페리제독 강요이전에 자발적으로 서구국가들과 개항을 했서야 합니다.
3. 단순히 상업의 융성을 가지고 근대적 준비라는 것을 논할수가 있슬까요? 진정으로 근대적 준비가 가능하려면 정치개혁 및 민권의식향상입니다.
에도시대 일반 백성의 민권의식수준이 얼마나 근대적일까요? 조선과 비교해서도. 그리고 명치유신이후에도 서구와 다른점으로 서구적 공화정치를 도입하지 않고 되려 전제군주제로 복귀했죠.
공화정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종 민생관련 근대적 개혁성향이 에도시대에 존재했나요? 신분제도 타파등.
제도적 개혁은 아니더라도 일반 민중들의 민도수준의 향상분위기가 얼마나 존재했나요? 조선의 경우 19세기 민란을 민생파탄의 어려움으로 들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과거와는 다르게 민중의식의 반봉건적 성향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과거같으면 억압받고 참았던 민중의식이 19세기 들어서 점차로 향상되어가는 일면을 들어낸 것입니다.
보통 19세기 순조조 이래로 세도정치운운하면서 정조조 번성기의 쇠퇴를 내세우는데 결코 객관적으로 쇠퇴한것이 아닌 민중의식성장으로 인한 봉건체제의 동요라는 과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정조조까지 별문제가 없었던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조때까지는 그나마 구 시스템이 작동이 원활했다는 것일뿐입니다.
조선왕조가 분명 말년운이 나빴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는데 어느왕조던 말년에 시스템이 혼란해지는 상황이 오는데 고려왕조도 신라왕조도 중국어느역대왕조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필이면 조선왕조의 말년이 제국주의 침략과 연관된 근대화시기에 맞물렸다라는 것이 지극히 불운일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고려왕조나 신라왕조도 이시기에 말년을 맞이했다면 같은 운명을 걸을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민생파탄등 막장상태수준을 따지면 신라왕조는 조선왕조말년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막장이었죠. 오죽했스면 지방호족들이 반독립상태를 선언했슬정도니. 그나마 신라말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정에 외세가 개입할 여지가 없고 동시대에 중국대륙또한 당에서 송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단계였다라는 것을 감안해서 조선왕조말년과 비교하면 외세개입이라는 불운을 격지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저당시 테라코야정도 교육을 받을정도를 상대적으로 지금식으로 따지면 일반 서민이 대학진학하는것보다 더 어려웠슬것이 분명합니다.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일본의 식자률이 급격히 높아진시기는
메이지 시대 정부가 서양열강에 비해 뒤쳐진 근대화를 따라잡기 위해
일본국민들의 개몽교육의 일환으로
전국민에게 초등교육을 의무로 실시한 이후라고 알고있는데요..?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그 테라코야라는 시설이
정부가 운영하는 곳도 근대적인 교육시설도 아니다보니
기준이 제각각이라
산수를 포함해 문자연습등 기초 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곳도
있는가 하면 그냥 아이들을 맡기는 탁아소 수준도 있지 않았을까요?
개인적으로 에도시대 식자율이 7할이라는 것에는 납득하기 힘든게
그 당시 에도시대 서민들의 생활 수준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국민이 충분히 사용할만큼의 종이와 서예도구가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고
있다고 해도 하루먹고 하루사는 지방 소작농이 그정도 금전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는 또 의문입니다
일단 B급 무사님이 올리신 영상에는
메이지유신의 통계만이 올려져있는데
혹시 에도시대 말기의 자료가 있으시면 올려 주실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질문 감사합니다. 약간의 답변을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초등교육 이후에 식자율이 올랐다?
식자율은 에도시대때부터 높은편이며 이는 테라코야 덕분이었다는 건 일본사 연구가들중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은 없을듯 합니다. 제 영상에도 나오듯 메이지시대 문부성의 테라코야 조사는 에도시대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소학교령이 발표되기도 전입니다. 소학교령이후 자연스레 대체됩니다. 산수, 문자교육등 기본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시설이 테라코야에서 소학교로 완전히 대체되었음으로 추측됩니다. 한편 일제시대 조선에서는 소학교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라코야와 비슷한 어린이 교육시설이던 서당의 수는 크게 줄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테라코야의 교육내용이 소학교와는 크게 차이가 없으나 서당과는 차이가 있었기때문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즉, 테라코야는 근대적공공교육이 도입되기 전부터 기초교육시설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붓과 종이가 부족해서 안된다?
에도시대는 상업이 발전함과 동시에 인쇄출판산업이 크게 번성합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우키요에의 유행인데요. 우동한그릇 사먹을 돈이면 종이에 인쇄된 그림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에도시대엔 성지순례가이드북이나 우미요리같은 정보지도 서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우키요에나 민화에도 테라코야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도 있죠. 햐쿠쇼오라이百姓往来, 쇼바이오라이등 商売往来테라코야에서 사용된 교과서도 대량인쇄된 서적이었습니다.
3.농촌지역은 가난해서 테라코야 못간다?
농촌지역에도 테라코야가 있었으며 학동들은 대부분 형제가 많거나 소나 말등 가축이 있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부농층이란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에도 오사카 교토등 대도시 주변 농촌은 반농반상이 늘어나며 형제가 적은 학동도 늘어나며 이는 에도 후기로 가면 더욱 늘어납니다. 에도시대 백성들이 6공4민이라하여 높은 세율로 생활이 힘들었다고 하나 이는 쌀생산량에 대한 세금뿐이었기에 에도후기에는 상품작물이 퍼지면서 반농반상이 늘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에도시대 중에 제작된 테라코야 조사표는 존재하지 않거나 제가 얻을 수있는 범위에선 없었습니다. 막부에서 전혀 개입을 하지 않는 순수 사설 교육시설이기에 공식적인 등록 신고등의 절차도 없으니 기록도 없는 듯합니다 에도후기의 테라코야 수는 영상에 나온 통계가 가장 잘 나타내는 자료입니다. 문부성이 메이지4년에 생기고 소학교 도입전의 실태조사통계입니다. 에도시대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때의 조사이니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Samurai-B 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우동 한 그릇을 먹을 돈이면
종이에 인쇄된 그림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네요
에도 시대 당시 일본은 괄목한 만한 인쇄술과 두터운 거리 예술가들이 있었군요
그 당시 조선은 어떨까 자료를 찾아봤는데
18세기를 기준으로 한지 한 장에 800원
민화가 만원에 거래 되고 있더군요
후기에 들어서 나름 상공업이 활발해져 민화의 유통도 나름 활발해졌다 하나 목판으로 대량 인쇄가 가능한 우키요에에 비해서는 다소 가격이 비싼던 것 같습니다
식자율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있으나 덕분에 여러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알수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치 종교 시스템이 2000년간 변화가 없어요 불교 기독교는 중요해요
일본 식자율은 단지 히라가나만 외우면 올라갑니다.통신사의 기록 해유록에서 "이들이 글을 안다는 것은 한자가 아니라 자국의 언어를 안다는 것이다"라고 했듯이요.일본어는 영어,한국어와 달리 말하는것과 쓰는 히라가나가 일치해서 더욱 그러합니다.근대화는 지리적 이점으로 타국의 간섭없이 이룬거고요.일뽕도 적당히 해야지..
저시대 헨타이가나에 구자체 초서체인데 현대일본어보다 더 어려운데 식자율 기준이 다른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일본 지배계층 선비 사무라이가 아닌 계층중에서 저렇게 교육을 받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슬까요? 영상에서 부를 쌓은 평민들을 조닌이라는 계층이라고 하는데 조닌계층은 전체 일본인구중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이런 테라코야의 교육내용중에서 어려운 한학 유교경전수준은 아닌것이 분명하죠.그러니 이런 교육을 받았다고 고등수준의 한학 유학소양은 아닐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