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n6231 소현세자가 이뻐서 청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을 장악하고 싶어서이죠. 몽골, 준가르제국(신장), 티벳(시장)등 청나라에 병합된 나라가 한 둘이 아닙니다. 조선이 티벳이나 사라진 준가르제국의 꼴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강한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법!
당시 청나라에서 광해군을 정말 마음이 어질고 유능한 군주라고 칭송하면서 광해군을 찾았지만 인조와 신하넘들은 광해군을 숨겼음..숨겨진 역사지만 광해군이 물러난 뒤 광해군 복위를 위한 민란이 수도없이 일어났었고 병자호란 때 군인들읏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청나라 기병들을 보자마자 전부다 도망쳐 버림..
@@civilize 인조실록 인조 2년의 기록에 따르면 이괄의 난으로 한양 궁궐이 쑥대밭이 된 후 좌의정 윤방이 아뢰기를, " (중략) 《광해일기(光海日記)》와 《시정기(時政記)》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는 10분의 1일도 못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북인의 주도하에 실록이 편찬되어 공정성이 훼손되었다며 서인 주도하에 다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합니다. 현종실록은 남인의 주도로 편찬되어 남인에 대해 불리하면 빼거나 일부러 잘못되게 기록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서인들이 주장해서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을 다시 만들 정도로 조선 당대에도 실록의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광해군일기는 이괄의 난으로 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기초 사료들인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산실되었습니다. 이는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가 40분의 1도 못된다"는 보고나 "검열 김광현이 시정기와 일기를 강화에 옮겨 두는 임무를 받은 뒤에 미처 실어 나르지 못하여 죄다 산실되었다."는 계사 및 "갑자년 변란 때 많은 문서들이 산일되었는데, 춘추관 서리 홍덕린이 광해군대 시정기 75권과 승정원일기 26권 등을 겨우 건져냈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당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찬수청을 설치하고 일기 편찬의 기초 사료들이 유실된 상황에서 사대부가에 소장하고 있는 일기, 장소, 조보, 야사 및 문집 등을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이처럼 다른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를 중심으로 편찬하지 못하고 사대부가의 개인 야사와 문집까지 동원해서 광해군일기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다른 실록처럼 무오류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허점과 함정이 많은 기록물입니다.
광해군이 재위시절 워낙 또라이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인조반정 초기에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다 하는데 설사 청나라에서 그와 핫라인이 있었다 한들 청나라가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광해군을 복위시킬 일도 없거니와 만에하나 그가 복귀했다고 해도 조선최초의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실드칠 인간이 없기로서니 똥오줌은 좀 구분합시다
유배 온 광해군의 백성생활기 영화화해도 될 듯. 아직 궁궐생활에 익숙해 왕실의 자부심을 놓치못하는 허당 끼 있는 광해군... 영문도 모른체 제주 관아로 파견되어 평생을 한 죄인의 수발드는 운명을 맞이하는 나인... 이제부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 나가야하는 광해군과, 왕이건 뭐건 영감이라 부르는 왈가닥 나인과의 티키타카 케미.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둘은 가까워지고 속깊은 이야기까지 꺼내게 되는데.. 한 때 최고권력을 누렸던 인물과 집안을 대신해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나가는 나인과의 감동적인 우정스토리. 주연 : 이병헌, 천우희
@@kmsg816 그 폐기된 억지 주장 다시 폐기될 운명입니다. 중국 청나라 공식 역사서 [만주실록]과 [만문노당]이 최근 완전히 번역되고, 17세기 서인과 북인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특히 광해군에 대해서 중도적인 스탠스였던 남인들의 저서와 일기 등이 발굴되고 번역 작업이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광해군 폭군론은 더이상 명분을 잃었습니다.
1에서 100까지 있을때 90까지는 광해군이 만들고 나머지 10을 인조가 만들어서 병자호란이 일어난거죠... 광해는 전혀 중립외교도 민생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자시절때는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선조의 각종 행동,그리고 본인의 출신 위치에 대한 컴플렉스가 너무 심해서 집권하고나선 연산군에 버금가는 폭군이었습니다...
@@박동민-h6b 광해군은 단 1도 상관이 없는데 뭔소리인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後金)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조선과 후금은 강화를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견제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박동민-h6b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하였다
@@박동민-h6b 전쟁의 전개 12월 2일 청나라 홍타이지(태종)는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청나라 군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여 한양 외곽에 이르렀다.
남한산성 항전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출병 요청에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명으로 가는데 그에게 밀지를 내림 가서 소극적으로 도와 주는 척 하다가 적당한때 청에 내통하라 함 이에 강홍립은 아예 투항 해버림. 그래서 광해군 재위기간 청은 조선 침략 안함. 인조 반정이후 투항한 강홍립에게 조선 침략 명함. 뭘 제대로 아는 광해군 이었음.
광해군이 제주유배를 4년 했다는건 저도 처음 들어봅니다..추사유배지는 유명하지만 광해유배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다수라고 봅니다..광해군유배지를 복원하여 한을 달래주는 것이 역사를 위해서도 제주도를 위해서도 좋을 듯합니다.광해군 유배지가 비석하나만 있다는 것은 제주도민의 치욕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사건 인조반정 선조와 함께 조선 최악의 임금으로 평가 받는 인조 광해군이 계속 집권 했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박복하여 성군을 잃은 것일까? 우리 역사는 유독 만일이란 가정을 많이 불러 일으킨다 그건 잘못된 길로 자주 들어섰다는 뜻인데 이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도 그 중 하나일듯 싶다
서인들의 농간에 옥좌에서 내려온 불운의 왕 임진왜란을 전장터에서 겪으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느끼고 청과의 전쟁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대북파와 서인세력의 권력 다툼에 사이에서 희생양 인목대비와 영창군의 패륜적 사건은 왕의 추종세력의 정적 제거 음모이지 광해군의 주도한 사건은 아닌것 같다
정말로 안타깝기 그지 없는 왕... 영창대군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그런 사이라지만 광해군 본인이 죽이고 싶어했을까, 이이첨 이 새끼는 그냥... 그리고, 반정을 광해군이 진압을 했다면? 반정이 있기 전 여러차례 반정의 조짐이 보인다는 보고를 수차례 받았는데 하... ㅠㅠㅠ 그리고 마지막 이괄이란 작자가 광해군의 편에 섰다면...
@@임순자-f8f ㅋㅋ 인조 찌라시 조성시대 가장 믿을수 있는게 사관들이 기록한거다 광해때 궁궐 몇개 만들 었는지 검색이나 해보세요 그 궁궐 만들때 얼마나 많은 인원 돈이 들어가는지도 영화 광해가.아주 광빠 많이 만들었네 명청 싸움에 강홍립 청나라 투항? 야 투항한 사람 대다수 죽었어 ㅋㅋ
광해준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야 말로 사악한걸로 치면 뭐 거의 조선왕조 원탑을 다툴 인간인데....자기 맏아들 죽이고 며느리 죽이고 장손자 죽이고, 나라는 오랑캐한테 아작나고 그 앞에 끌려가 대가리 조아리고...
진짜 영조의 임오화변도 비극이었지만 인조는 아들뿐 아니라 그냥 가정을 풍비박살 내버림 청황제가 양아들 삼고싶어할정도로 치세도 좋고 시야도 넓었을 소현세자였는데
그놈에 명에 대한 사대명분 때문에 조선을 두고두고 발목잡음 조선 부동의 원탑 무능의왕
@@hoon6231 맞는말!
따봉
@@hoon6231 투탑? 선조 인조
그만큼 힘없는 왕이기도 하죠 힘없는 왕 꼭뚜각시 조선이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지죠
@@hoon6231 소현세자가 이뻐서 청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을 장악하고 싶어서이죠. 몽골, 준가르제국(신장), 티벳(시장)등 청나라에 병합된 나라가 한 둘이 아닙니다. 조선이 티벳이나 사라진 준가르제국의 꼴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강한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법!
현재 광해군 묘지는 남양주시 사릉 근처 산에 있는데 입구가 막혀있어 멀직이 볼수 있고 안타까운건 주변이 응달진 외딴곳이랍니다 남양주 가볼일이 있다면 홍유릉 과 광해군 묘지는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자라면서 본것이 많고 전란을 겪으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과 국제 정세를 파악하여 실리적인 정책을 펼줄 아는
군주였는데 무식한 신하들의 아전인수격
인 꼴통들을 상대하다보니 혈압이 오른 것일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신하보다
똑똑한 군왕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 같네
동감합니다 조선은 인조반정이후로 왕은 바지왕이 되고 문벌귀족들의 노리개가 되어 결국 망했죠
그 당시 기득권 세도가들에게 당한거지요.. 명에게 사대해야 한다는 논리로...지금 수꼴들의 일본사대랑 비슷한거임
진보주의자 들 종북사대는
그래서 조선이 망한건가???
실리적으로 정책을 펴서 5개 궁궐공사를 동시에 했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죠.
객관적으로 볼때 광해군은 폭군도 아니고 반정으로 쫒겨나 군으로 강등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광해군은 개혁적 군주였으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정치적 희생자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놈의 명나라 사대주의 ㅋㅋㅋ지금 보니까 인조반정은 진짜 정신 나간 짓이었음.
@박준식 준식이 갑자기 급발진하노ㅋㅋㅋ
@@앙마민 실제로 광해군 재위 시절에 인구가
200만명 가량 늘어날 정도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아났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먹고 살기 편해지니
백성들이 광해군의 은덕을 잘 몰랐다가 물러난 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하더군요..그래서 광해군 복귀를 위한 민란도 많이 일아났음..
근데 왜 광해군따위한테 개혁가 프레임이 씌워진거임?
선좆 광해군 능양군 트리플 암군 라인업 때문에 딴 나라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100년동안 퇴보했는데
굳이 현대와 비교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 (?)이라고 생각되네요
조선 왕출신중에 북쪽끝에서 남쪽 끝까지 둘다 살아본 사람은 광해군밖에 없을듯...
광해군은 폭군이 아닙니다 역사가 왜곡됀겁니다 폭군은 인조이지요 인조 이 인간은 살인마입니다 오백년 역사에서 최고로 잔인한 놈이에요
골고루 내치만 잘했으면 쫒겨나지 않았을 왕인데...
북인에게 너무 의지한부분,
비선실세 김개시에게 농락당함
서인들이 시킨거겠지만요.
2:32
제주 유배 4년 즈음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ᆢ
유언에 따라 어머니 옆에 묻혔습니다
옳은 말씀
청나라가 왜 병자호란 때, 광해군을 다시 내세울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를 뭘까 생각해보면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니까 인조에게 대신 머리를 조아리게 하고 조공국으로 만들었던게 아닐까
당시 청나라에서 광해군을 정말 마음이 어질고 유능한 군주라고 칭송하면서 광해군을 찾았지만 인조와 신하넘들은 광해군을 숨겼음..숨겨진 역사지만
광해군이 물러난 뒤 광해군 복위를 위한 민란이 수도없이 일어났었고 병자호란 때 군인들읏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청나라 기병들을 보자마자 전부다 도망쳐 버림..
광해군 다시 내세우면 인조 주변의 인물들 포함 인조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겠죠..
솔직하게 인조 진짜 무능하고 멍창한인간있어지 사대부들에게 끌려 다니고 패악의 대명사 진짜 광해대왕이 쭉 왕위를 보존했다면 미래는 달라졌을수도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준으로 전해지니 인조반란이 정당하게 대우받는거지 현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차라리 광해왕이 더 현명하고 실용노선이다
@@운룡-g8x 응 아니야ㅋㅋ 인간 백정이 광해야
@@노미현-l6y 대웅아 이룸이 아깝다 우루사냐 ㅋㅋㅋ 니가 300년전 역사를 알어 대웅아 역사는 말이야 승자의 기록이야 그래서 항상 역사를 대할때는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단다 인생도 알긋지 형이 너에게 큰 깨우침을 주는 거야 ㅋㅋㅋㅋㅋ
@@운룡-g8x 네다음 역알못ㅋㅋㅋ
광해군에게 눈병이 있는 것조차 성격이 포악한 탓이라고 할 정도였죠...
광해군의 부인은 목메어 자살했고 세자와 세차빈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쩝쩝이 땜에 자결하신 우국지사분들이 훨신 많을뜻요!
@@김성곤-v8d 정상 심해지기 전에 약묵자.
쩝쩝이없는세상이 그립다
아.ㅅㅂ 쩝탱이 ㅅㄲ
그때는 권력가(집권세력)의 정보가 없어서 서민들이 속았다쳐도 현재도 분간 못하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무지랭이 서민들만 당했던 조선시대가 다시 시작된거 같아요
문재앙을 보니 인조가 되살아난거 같다
문재인은 반드시 하야해야하고 감옥에 가야된다
무지랭이들. ㅎㅎ
사학도들의 평가중에 조선조 가장 유능한 왕은 세종대왕 다음에 광해군이라는 설문조사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유능한 왕이었지요. 아쉬웠던 점은 병자호란때 광해군이 청과의 교류 통로가 있었다면 다시 왕으로 복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세자 시절 광해군이라면 ㅇㅈ 왕 되고 나서 광해군이라면 그 사학도라는 것들이 실록 한번 제대로 안읽어본 거임
@@civilize 인조실록 인조 2년의 기록에 따르면 이괄의 난으로 한양 궁궐이 쑥대밭이 된 후 좌의정 윤방이 아뢰기를,
" (중략) 《광해일기(光海日記)》와 《시정기(時政記)》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는 10분의 1일도 못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북인의 주도하에 실록이 편찬되어 공정성이 훼손되었다며 서인 주도하에 다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합니다. 현종실록은 남인의 주도로 편찬되어 남인에 대해 불리하면 빼거나 일부러 잘못되게 기록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서인들이 주장해서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을 다시 만들 정도로 조선 당대에도 실록의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광해군일기는 이괄의 난으로 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기초 사료들인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산실되었습니다. 이는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가 40분의 1도 못된다"는 보고나 "검열 김광현이 시정기와 일기를 강화에 옮겨 두는 임무를 받은 뒤에 미처 실어 나르지 못하여 죄다 산실되었다."는 계사 및 "갑자년 변란 때 많은 문서들이 산일되었는데, 춘추관 서리 홍덕린이 광해군대 시정기 75권과 승정원일기 26권 등을 겨우 건져냈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당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찬수청을 설치하고 일기 편찬의 기초 사료들이 유실된 상황에서 사대부가에 소장하고 있는 일기, 장소, 조보, 야사 및 문집 등을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이처럼 다른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를 중심으로 편찬하지 못하고 사대부가의 개인 야사와 문집까지 동원해서 광해군일기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다른 실록처럼 무오류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허점과 함정이 많은 기록물입니다.
젊은 사학도들의 식견을 보아하니 한국 사학계의 미래가 밝은 소식입니다^^
최근 연구결과 세종이야말로 조선5백년을 암흑기의 폐쇄국가로 만든 암군중의 암군이요 세계제일의 사이코패스 라는 게 거의 정설로 인정되는 추세 입니다 그가 만든 철통보안 폐쇄국가 시스템이 북한이 그대로 벤치마킹해서 오늘날 세계제일의 독재왕국으로 거듭나고 있는중입니다
광해군이 재위시절 워낙 또라이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인조반정 초기에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다 하는데 설사 청나라에서 그와 핫라인이 있었다 한들 청나라가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광해군을 복위시킬 일도 없거니와 만에하나 그가 복귀했다고 해도 조선최초의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실드칠 인간이 없기로서니 똥오줌은 좀 구분합시다
줄서기
선조가 아들을 시기하고 손자를 이뻐했으니
명분을 만든게지
우리나라처럼 유적지를 밀어서 건물올리는거는 유일할거다
제주도 광해군 유배지 복원 잘보존 해야 됩니다
직접 보고 온게 있어서 오랑케들에 대한 공포는 이해가 가기는 하는데, 너무 지나치게 대응한 감이 있어(심지어 금군까지 변방으로 보내 버려 난이 났을 때는 이를 진압할 군사 조차 없었다고 하니) 더더욱 안타까운 왕이죠.
사실 그날...훈련도감군이 한양에 있었어요. 근데 정예병들이 오합지졸인 반정군을 지켜보기만 했죠.
공과를 떠나서 한나라의 임금이었고
제주최초로 임금중 유일하게 제주땅을 밟고 살았는데 표지석 달랑 2개가 전부인게 아쉽다.
자료와 사료 등을 잘 모아서 스토리텔링 을 조화시키면 정말 훌룡한 제주의 역사 문화 컨텐츠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망한 나라 무능의 역사
지금의 후손도 개판인데
무슨 큰 의미가 잇냐
표지석 2개도 잘해준거 아냐?
기억도 하잖아
@@이준-s6u 그건 니생각이고 망한나라 슬픈역사도 역사이니라
니가 생각한대로면 경복궁 복원도 하지말아야하고 종묘도 없애야하고
조선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다 없애버려야하나? 너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을 신봉하는 놈이냐?
그러니까 광해군묘 제정비하고 시민들이 볼수있게좀 해주라
영상 감사히 잘봤습니다~
광해가 계속 임금으로 남았어야 했는데 ...
잘 보고 갑니다
유배 온 광해군의 백성생활기 영화화해도 될 듯.
아직 궁궐생활에 익숙해 왕실의 자부심을 놓치못하는 허당 끼 있는 광해군...
영문도 모른체 제주 관아로 파견되어 평생을 한 죄인의 수발드는 운명을 맞이하는 나인...
이제부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 나가야하는 광해군과, 왕이건 뭐건 영감이라 부르는 왈가닥 나인과의 티키타카 케미.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둘은 가까워지고 속깊은 이야기까지 꺼내게 되는데..
한 때 최고권력을 누렸던 인물과 집안을 대신해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나가는 나인과의 감동적인 우정스토리.
주연 : 이병헌, 천우희
오오~ 코믹 영화로 괜찮을듯 합니다.
천우희말고 한효주 붙여줘요 ㅋㅋㅋ
광해군의 역사는 재 편성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폐기된지 10년도된 광해군 미화역사관이 아직도 떠도는거보면
재편성필요하긴해~
@@kmsg816 그 폐기된 억지 주장 다시 폐기될 운명입니다. 중국 청나라 공식 역사서 [만주실록]과 [만문노당]이 최근 완전히 번역되고, 17세기 서인과 북인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특히 광해군에 대해서 중도적인 스탠스였던 남인들의 저서와 일기 등이 발굴되고 번역 작업이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광해군 폭군론은 더이상 명분을 잃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광해가 쿠테타를 진압하고 조선을 이끌었다면 정묘호란 병자호란같은 외침 없이 근대적 국가로 이끌었을 것!!역사는 반복되고 잘 합시다 우리
1에서 100까지 있을때 90까지는 광해군이 만들고 나머지 10을 인조가 만들어서 병자호란이 일어난거죠... 광해는 전혀 중립외교도 민생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자시절때는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선조의 각종 행동,그리고 본인의 출신 위치에 대한 컴플렉스가 너무 심해서 집권하고나선 연산군에 버금가는 폭군이었습니다...
@@박동민-h6b 광해군은 단 1도 상관이 없는데 뭔소리인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後金)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조선과 후금은 강화를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견제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박동민-h6b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하였다
@@박동민-h6b 전쟁의 전개
12월 2일 청나라 홍타이지(태종)는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청나라 군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여 한양 외곽에 이르렀다.
남한산성 항전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거다.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재조명했는데도 사학계가 내린 평가는 '광해군은 암군' 이었다.
광해군이그대로왕으로유지되었다면병자호란같은치욕적인전쟁도안겪었을것을
와 큰일이다 정말 광해군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런 말을 하시는건지??
광해군이외교에는아주능하셨죠!멸망해가는명나라와강해지는청나라를견주어봤을때조선에강대국이어떤영향을줄건지국제정세를잘살핀분이죠!
@@유서윤-g7n 개소리
광해군은 명나라의 출병 요청에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명으로 가는데 그에게 밀지를 내림 가서 소극적으로 도와 주는 척 하다가 적당한때 청에 내통하라 함 이에
강홍립은 아예 투항 해버림. 그래서 광해군 재위기간 청은 조선 침략 안함.
인조 반정이후 투항한 강홍립에게 조선
침략 명함. 뭘 제대로 아는 광해군 이었음.
@@donggeunihm1636 밀지 개소리 ㅋㅋ 참신하누
인조반정으로 인해 인조에게 죽은줄 알았는데. 유배가서 승하하셨군요!!
아무리 폐위된 왕이여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인조가 그래도 극진까지는 안 모셔도 잘 하셨다고 함!
@@Kor_Alvaro 암살은 들키지 않죠
@@Kor_Alvaro 문종은 세조에게 사살된게 안타깝네요...
아무리 폭군 폐주라해도 그 목숨만은 보장해주었습니다 왕실의 체면도 있구요 연산군도 반정군이 죽이진않고 유배를 보냈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광해군 재평가 시급하다
광해군의 후손들로
왕이 이어졌다면
조선의 후기 말기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ᆢ완전히
달라졌을텐데 ᆢ
퓨전역사극으로나마 함 만나봤으면ᆢ
제주 도청은 뭐한데??
광해가 그래도 최고의 왕 자질가졌지
똑똑하고 분별력 사교력 뛰어남
자식의 앞날을 망치는 무능하고 찌질이 애비 잘못만난 탓이죠
솔직히인조는 인조반정이 아니라 인조쿠데타라고 하자 ㄷㄷ
걍 묘호도 아까움 능양군이라 하죠
19년동안 혼자서 깊은곳에 유배생활햇다는게 엄청대단함
임금이 탄핵당하면 호위도못받음
사학한 서인들이 말아 먹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광해군이 제주유배를 4년 했다는건 저도 처음 들어봅니다..추사유배지는 유명하지만 광해유배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다수라고 봅니다..광해군유배지를 복원하여 한을 달래주는 것이 역사를 위해서도 제주도를 위해서도 좋을 듯합니다.광해군 유배지가 비석하나만 있다는 것은 제주도민의 치욕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사건 인조반정
선조와 함께 조선 최악의 임금으로 평가 받는 인조
광해군이 계속 집권 했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박복하여 성군을 잃은 것일까?
우리 역사는 유독 만일이란 가정을 많이 불러 일으킨다
그건 잘못된 길로 자주 들어섰다는 뜻인데 이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도 그 중 하나일듯 싶다
저는 늘 광임금
올해 저는 칠
유일하게 조선역사중 현명한 왕 이였는데.
광해랑 인조보면 현재의 정치와 닮아있다
나라를구한임금왕릉으로해야한다
병자호란 치욕적이다...
연산군도. 제주로오지. 않앗나?
광해군 묘나 연산군묘를 보다 더 성역화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분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 했었던 것도 그 당시의 권력층들의 책임이 매우 컸었다고 봅니다.
더러운세상 비극이다.
조선 천하바보는 인조 임금님 ㅎㅎ
인조왕도 대단하십니다
"인조"는 조선 4대악 왕중의 으뜸이죠..ㅎ 인조 땜시 조선민초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인간 같지 않은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는 건 조선의 수치라고 생각 합니다.
안타깝다..
서인들의 농간에 옥좌에서 내려온 불운의 왕
임진왜란을 전장터에서 겪으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느끼고 청과의 전쟁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대북파와 서인세력의 권력 다툼에 사이에서 희생양
인목대비와 영창군의 패륜적 사건은 왕의 추종세력의 정적 제거 음모이지 광해군의 주도한 사건은 아닌것 같다
불쌍타
역사 지우기가 문제다. 지금 광해군 흔적이 남아있으면 역사의 교욱의 장은 물론이요~ 관광자원화도 되고 일석이조 아닌가? 지금도 지난 대통령 지우기보다 보존하면 먼훗날 역사가 될터인데 아쉽네요~~
광해 임금은 지금 봐도 인조보단 더 휼륭했던 임금이다..
청태종은 병자호란때 인조 내리고 다시 광해군을 임금의 자리에 세웠어야지
보기 좋은 꼴은 아니지만..
광해군의 오점인 임해군 , 인목대비 ,영창대군 사건도... 광해보다는 실권자였던 이이첨이 주도한거 아닌가? 그리고 저당시 중립외교는 조선 관료들 입장에서는 이해가갔음 ㅋㅋㅋ 군신유의 조공하는 관계인데 , 부모를 배신하는격이라 ㅋㅋㅋ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교는 감성이 실리면 망하는거임,,, 이성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시켜야하는데....
선조자식중에 유일하게 정상이었는데 들들 볶아 괴롭혀서 안 미친게 다행이다싶을 정도...
인조는 반대로 자식들은 의외로 멀쩡했는데...
조선역사 후세에 1위,2위를 다투는 욕먹는 임금 둘이네요.
인조는 왕의 자질부족 ! 차라리 광해가 왕 다웠다. 역사는 돌고돌고 지금도 ..
양주???
광해군을 임금신분으로 회복해 드려야할 때가 된것 아님니까?
나도아직 제주도 못가밨는데.. 유배를 제주도로 부럽다 ㅋㅋㅋㅋ
ㅣ
근대 궁금한게 만약에 인조가 왕이 아니였다면 세종대왕은 탄생 안했을꺼고 한글이 아닌 중국문자 쓰고 있지 않았나여
그냥 나비효과 궁금해서리
뭔소리하냐 바보야 세종대왕 200년뒤에 인조가 태어났는데 아니 역대조선왕의 중간서사의 순서를 헷갈리는것도 아니고 조선초 이성계-태종-세종-세조로 이어지는 서사를 몰라서 뜬금없이 병자호란과 인조랑 헷갈려..?
질기고 질긴 광해 목숨줄
광해군이 어렸을때 그렇게 똑똑했다고 전해지던데 말년이 참...
인조같은놈이 임금이 된것이 화가날정도임 광해군이 안쫒겨났어야한데 넘 안타까움
광해군 정도면 성군이지
백성들한테 전방위적, 직접적으로 폐해를 끼친정도는 연산 이상인데ㅋㅋ 연산도 전후 궁궐을 복붙하며 백성들 토목공사에 동원하진않았다ㅋㅋㅋ
광해군이ᆢ끝까지
수모를 견뎌 나간 것은
일말의 기대심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을텐데ᆢ
실제 복위운동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있었다면ᆢ왜 ᆢ유폐된
광해군을 찾지못했을까ᆢ
광해군 복위운동 4차례 이상 있었습니다.
@역덕후-z1y 그랬었군요 ᆢ감사합니다~
선조, 인조 !! 와우 욕 나오는것들 .
나두 제주도로 유배가고 싶다
ㅇㅇ
궁녀에게 놀아나서 반정 당한 광해군 근데 역시나 그 궁년도 토사구팽 당해서 반정에 성공한 양반넘들이 죽였다고 하던데
맞아요.
김개시라는궁녀지요ㅉㅉ
광해나 연산이나 실패하지 않으면 연산은 연종이 되었을 거고 광해는 광조가 됬을거다
인조보다는 낫지
광해 는,훌륭한,임금 입니다, 지금 이라도, 名禮를 回復을 바람니다.
역사공부좀 제대로하고와라 개인능력치는 심지어 인조보다도 못한게 광해다ㅋㅋㅋ 인조는 머리쳐박고 절하며 개쪽은 당했어도 조정 장악력은 유지했는데 광해는 그조차도 못하고 간신들한테 휘둘렸다ㅋㅋ
조선 최악의 암군은 중종도 철종도 명종도 순조도 아닌 광해를 꼽아야지ㅋㅋㅋ
@@kmsg816 역사 공부를 더 깊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광해군보다 국익과 백성들을 위해 절치부심 노력했던 조선 임금 몇명 안됩니다. 외교 부문은 조선 어떤 임금과도 비교 불가 수준이구요.
?
예나 지금이나... ㅎ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서...
좋은 업적은 생각지도 않고 나쁜 짓만 잡아꺼내서~ 그렇게 청렴결백한 관리나 공무원들이.. 과연 남을 욕하고 끌어내릴 정도로 정당한 행동을 한 것들이 과연 있을까...?ㅎ
정말로 안타깝기 그지 없는 왕... 영창대군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그런 사이라지만 광해군 본인이 죽이고 싶어했을까, 이이첨 이 새끼는 그냥... 그리고, 반정을 광해군이 진압을 했다면? 반정이 있기 전 여러차례 반정의 조짐이 보인다는 보고를 수차례 받았는데 하... ㅠㅠㅠ 그리고 마지막 이괄이란 작자가 광해군의 편에 섰다면...
역사는 가정이 없음...광해가 의외로 잘한게 맞음. 그러나 광해가 인조 쿠데타 방어에 성공했다면 사람간 인과관계는 달라졌을 것이고 여기 글을 올리는 대부분 사람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 거의 노비자손이라 잘살았을거임ㅋㅋ
인조왕보다광해왕이왕답지
원래 제주도는 죽으라고 보내는 귀양 코스인데.... 광해군에게 대한민국 정부 훈장을 줘야 합니다.
조선은 광해군 물러난 뒤로 이미 망한 나라다. 영정조 시대 어쩌구 하는 건 그냥 거짓말이고....
광해군을 몰아내고 겨 우인조같은 무능한 왕을 앉히나
비굴하게 사는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것이
자세히 쫌 역사르로공부하면 인조만큼이나 암군인 광해군이었음
니가 역사를 알어? 푸웁 어디서 어설픈 친일파들이 말한 역사관을 들이대
@@운룡-g8x 응역사알아
@@free-tw9bi 무식하면 욕먹는다 유근아
@@운룡-g8x 광해가 암군이지 성군이냐?이무식아
암군 폭군 혼군.. 그게 광해군 이야
광해군 제주 유배 생활 햇나요..
말만 유배이지 지금의 제주시에서 감금생활하다 돌아가심
초주지계 피해자 광해군
"못살겠다 광해군! 우윳'빌'깔 인조" -사대부
=> 못살겠다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 하지만 19대는 인재 그 자체
광해를 보면 박대통령이 생각나는 건 ....너무나 닮은 점이 많다 당시나 지금이나 여야가 모두 정치적으로 외면 했던 측면도 있고 ...위급할 당시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는 ㅜㅜ
??? ㅋㅋㅋ 뭔 개소리야
@@rlaqudrjs12 😅👍👍👍
@@rlaqudrjs12
니가 개소리 ㅋㅋ
503말입니까? 어떻게 그게 연결이 되지????? 창의력이 뛰어나시네
비엉신 비교할걸 비교해라
꾸네뇬이 순실대통 만드느라
개판였지 뭔 개소리래
여기 댓글 장난 없네? 정말 광해군에 대해 제대류 알고 그러는건가요?? ㅋㅋㅋ 고종때 경북긍 재건 한다고 국고 고갈 되었는데 광해군땐 그 규모만한 토목 공사를 동시에 두개진행, 국사책에 나오는 대동법?? 광해군은 대동법 반대론자임
나는 그 역사도 인조가 꾸민거라고 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사기 잘 당하게 생겼다
@@조성빈-k7p 고맙다
ㅋ대동법은 백성들이 바라던것
찌지리 인조 선조 고종이
나라 말아먹음 인조의괴략임
@@임순자-f8f ㅋㅋ 인조 찌라시 조성시대 가장 믿을수 있는게 사관들이 기록한거다 광해때 궁궐 몇개 만들 었는지 검색이나 해보세요 그 궁궐 만들때 얼마나 많은 인원 돈이 들어가는지도 영화 광해가.아주 광빠 많이 만들었네 명청 싸움에 강홍립 청나라 투항? 야 투항한 사람 대다수 죽었어 ㅋㅋ
정치만 잘했어도 ᆢ안타까운 왕.
인조가 역대급이거지 광해군이 성군이다 이런건 아닌것 같은데... 그저 선조가 노답이라 광해군 인조 까지 개판이 였던것 같기도 하고
잘 한것도 있겠지만 오죽하면 반정했겠엉
폐위돼서 나가리 왕도 왕이란다 ㅋ ㅋ
왕 팔아서 제주도 관광 살리려는게
티가 나는 구나
돈아비야 돈아비야 걷어드린 금.은 은 어디에 두고 그 길을걷는가
귀양가서 나름은 잘 먹고 살았내!
저 척박한 땅에서?
귀양 뜻을 모르나?
@@환환국
추사 선생이 마누라 에게 보낸 편지 기억 안나?
제주에서 뭘 먹었는지?
귀향이겠지
@@강인하-c5v
여기서는 귀양
어쨌던 의로운 인간은 아니였나봅니다. 신상필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