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초기 건국지 대방고지帶方故地 위치 와 마한지역,남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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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2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15

  • @gn.l3762
    @gn.l3762 2 года назад +1

    수고하십니다.ㅡ 저의 의견은 요서백제는 하북성 보정시가 중심지로 이곳이 漢城으로 추정됩니다. 베이징 일대가 낙랑군이고 그 남쪽 영정하(고대 대수)쪽과 그이남이 대방으로 보입니다. 이곳의 대방을 학계에서는 황해도로 보고 재령을 漢城이라 하고 있습니다.ㅡ 마한백제는 송파구 풍납토성이 한산으로 요서에 소서노가 내려와 송양에 자리잡고 가칭 비류국을 형성(세운게 아님 때문에 가칭)했으나 온조가 마한의 한산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했는데 먼저 비류가 죽고 소서노마저 죽자 그신민들이 온조를 모셔가 요서백제가 시작된것입니다.ㅡ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2 года назад

      좋은 의견입니다 백제의 건국지역에 대해서 관심갖고 생각하는 분이 있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요녕성 지역이 백제건국지인 마한고지라 생각합니다 역사교과서는 백제건국은 경기도지역에서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거짓말이고 역사왜곡입니다 역사학계가 역사교과서에 역사왜곡하는 것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L K M 님처럼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면 해방후 80년동안 역사학계가 거짓말을 못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 지금의 왜곡된 역사을 만들고 있습니다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L K M 님의 의견에 감사합니다

    • @gn.l3762
      @gn.l3762 2 года назад

      @@우리역사를찾아서 선생님의 의견은 어느 사서에 기반한 건가요.ㅡ 현재 그곳이 요서인건 맞지만 고대의 요서는 최소 난하 서쪽으로 아는데요. 저는 난하 서쪽의 조백하 서쪽이 고대의 요서이며 그쪽에 요서백제가 있었고 후에 최치원열전에 보이듯 이곳 요서를 기반으로 백제는 유연제노를 점령하고 오월을 침범했다고 추정할수 있다고 봅니다.ㅡ 현재 재야사학 시민사학의 주장들은 정말이지 백가쟁명이네요. 하루속히 통일된 주장을 내야 강단사학의 잘못을 바로 잡을수있을텐데요.

  • @실크로드다시보기
    @실크로드다시보기 2 года назад

    수고많으십니다. 적극 지지합니다. 단
    사료는 오랜시간 가감.변형되었으므로 전적인 신뢰보다는 지형학 및 복합적으로 봐야합니다.
    대방은 띠.대. 이므로
    태행산맥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또 공손. 지명이 태행산맥 위에 있어요. 그치만 이곳은 현토 같으네요.
    기원전의 공손도는 산동 근처에서 주된 활동을 보입니다. 산양군.창읍군 등.
    또 방이란 땅이 넓음을 의미하므로,
    태산을 중심으로 둥근 허리띠 모양의 광대한 영역
    같습니다~ 낙랑아래라고 하니 확실하네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2 года назад

      아무생각없이 대방고지을 정하는것은 안 됩니다 이런 장난하려면 구독취소하고 시청하지마세요 역사학계의 역사왜곡에는 말하지도 못하면서 여기서 장난해요 구독취소하고 시청하지마세요

  • @gn.l3762
    @gn.l3762 2 года назад +1

    말갈이라는 명칭은 6세기 이후에 비로소 쓰기 시작한 용어입니다.ㅡ 삼국사기에만 고구려 초기. 백제 초기에 말갈이 보이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라 봅니다. 말갈은 읍루(우루)에서 물길이 나오고 물길에서 말갈이 나왔기 때문에 6세기 이후에 처음 보이는 용어입니다. 삼국사기 외에는 북제서 563년에 처음 보이는 이유입니다.ㅡ 강원도 지방의 濊와 고대 압록수 중류 지금의 서요하 중류지역의 양맥숙신(광개토 태왕릉비문의 오부맥)을 말갈로 해석한듯 합니다.ㅡ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2 года назад

      안녕하세요 말갈이란 말은 예,예맥이란 말과 비슷하다고 하고 촌뜨기,시골사람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말갈이란 말이 온조왕때부터 등장하고 그 이후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말갈이전에 숙신,읍루,물길이라 사용한 것을 압니다 삼국사기에 온조왕때부터 말갈이 등장하고 있어서 이 말갈을 읍루라고 보고 있습니다 생각에 차이가 날수 있습니다
      저의 방송을 관심을 가지고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gn.l3762
      @gn.l3762 2 года назад

      @@우리역사를찾아서 선생님의 의견대로 말갈이 읍루라 해도 그 읍루가 고구려를 뛰어넘어 온조의 요서백제까지 온다는건 불가능하다고 보는데요.ㅡ 그리고 읍루이전의 숙신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숙신은 본래 하북성 북동지역입니다. 저는 이 숙신이 고대에는 조선이라보며 한사군이 요서.요동에서 한반도 북부로 둔갑되었듯이 숙신도 연해주쪽으로 둔갑되었다고 봅니다. 논리는 서로 틀릴수 있고 이렇게 논하다 보면 서로의 의견이 좁혀질 것이라 봅니다. 선생님의 우리고대사를 찾으려는 노고에 감사드리며 응원합니다. ㅡ

  • @정론득
    @정론득 2 года назад

    유튜버 책보고에서는 대방 임둔은 지금의 장안에서 태원으로 가는 곳에 있다고 합니다. 낙양에서 태산까지의 중간지역은 한나라때는 습지였고 호수가 바다처럼 넓어서 사람들이 살지 못하던 지역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를 잘못 비정하여 현재의 중국상태로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데 원나라때까지 중국인들은 북경에서 현재의 무한까지 서쪽이 주무대였고 동쪽은 고려가 지배했어요. 홍건적이 어떻게 요하를 건너고 고려의 개성을 침략했다고 보나요? 홍건적은 중국에서 고려까지 오기 어렵지 않나요? 지금의 요하는 농지지만 고려까지는 습지였기때문에 북경을 지나 현재의 심양을 거쳐 고려로 들어오는 길은 산길인데 어떻게 홍건적이 올 수 있나요? 홍건적은 평지에살던 사람들이라 산지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최영장군이 싸운 고우라는 지역은 현재의 난징북쪽입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2 года назад

      역사을 과대포장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나 고려사 지리지등 보고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생각없이 남의 말한다고 믿는것도 잘못입니다 삼국사기,고려사을 읽고 지도을 보고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지리지 내용을 토대로 만든 것이지 그냥 만든게 아닙니다 쓸데없는 얘기는 책보고님에게 하세요 이상한 댓글 달지 마시기 바랍니다

    • @정론득
      @정론득 2 года назад

      @@우리역사를찾아서 물론 그런 사고를 가질 수 있지만 고려말기에 한반도로 줄어든것은 맞습니다. 다만 고려초기에 윤관이 17만 대군을 일으킨것은 고려말 인구수를 보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인구입니다.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려고 할때 5만도 간신히 징발했습니다. 고려초기의 사료도 많이 없어졌다고 보고있으며 오히려 중국측에서 숨기는 것이 많습니다. 몽고군이 남송을 정벌하려고 할때 양양을 무려 6년간 공격했습니다. 이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오히려 중국측이 주장하는 합비로 가서 남송수도 임안을 공격하는 것이 낫지않나요? 더구나 낙양에서 합비까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습니다. 심한 국뽕은 자제하겠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보면 이해 안되는 지명들이 많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한다면 그게 바로 사대주의자인고 식민사학입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개발에 따른 유적파괴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의 진실을 찾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적은 삼국사기라는 훌륭한 사서가 있는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천문학을 믿습니다.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비정을 믿습니다. 적어도 천문학은 거짓을 말하지는 않거든요.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정론득책보고.고대사의 위치를 찾아서.문사등은 삼국사기를 통째로 중원대륙에 옮겨서 해석하고 있어요. 너무 허구의 기록에 현혹되어 있네요.ㅡ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정론득책보고와 요동.요서에 대해 논한적이 있는데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얼버무리던데요.ㅡ 산서성 진중시 태행산맥 남쪽의 서쪽이 遼州이며 이곳을 기점으로 요동 요서가 나뉘는것에 대해 여기의 요주는 2세기경 처음 생긴 지명으로 僚라 불렸고 이후 遼로 불리다 수.당시기 遼州가 되었고 명.청시기 까지 사용한 지명이라 했는데.ㅡ 기원전 4세기 소진은 연나라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하여 이미 6백년전에 요동이란 말이 쓰였다 했더니 고려가 어떻고 얼버무리던데.ㅡ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정론득윤관의 여진 정벌군17만은 고려의 전 병력을 최대로 징집해 모은 것이고.ㅡ 이성계의 5만은 당시 고려의 정예군으로 나머지 장성들은 농사도 지어야 하고 더 중요한건 이성계가 요동 정벌에 나섯다는 소문이 왜구들에게 알려지면 다시 왜구들이 때거리로 몰려 올것에 대비해 남쪽의 군사들을 동원 하지 못했을 것이란 겁니다. 이당시 왜구들 중국 동지나 해안에 때거리로 몰려다녔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