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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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여진정벌과 금나라 건국
숙종(肅宗) 9년 2월 임간이 여진군과 전투해 패배하다
숙종(肅宗) 9년 2월 을축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尹瓘)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고,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 그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출정시켰다.
숙종(肅宗) 9년 3월 정축 윤관(尹瓘)이 여진(女眞)과 싸워 30여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우리 군대의 사상자(死傷)와 실종자도 과반이 넘었다.
숙종(肅宗) 9년 6월 갑인 동북면병마도통(東北面兵馬都統)이 아뢰기를, “여진(女眞)이 스스로 성책[場寨]을 허물고, 공형(公兄)・지조(之助) 등 68인이 관문을 두들기며 화친하기를 애걸합니다.”라고 하였다.
1104년 12월 윤관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별무반을 설치하다
1106년 1월 여진 정벌에 대비하여 도병마사가 군법을 엄격히 적용하라고 건의하다
예종(睿宗) 원년 3월 동여진 지훈이 대대로 조공할 것을 약속하다
예종(睿宗) 원년 11월 계사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숭인문(崇仁門) 밖에서 신기군(神騎軍)과 신보군(神步軍)을 사열하였다.
1107년 10월 예종(睿宗) 2년(1107) 10월 임인 윤관(尹瓘)을 원수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여진(女眞)을 정벌하게 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1일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출발하여 여진정벌에 나섰다.
예종(睿宗) 2년 12월 병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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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의 대동강은 북한 대동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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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선종(宣宗) 4년 8월 왕이 서경에 가다 선종(宣宗) 4년 10월 정해 왕이 관풍정(觀風亭)과 구제궁(九梯宮)을 두루 돌아보고 그 길로 영명사(永明寺)에 행차하여 행향(行香)하였으며, 용선(龍船)을 타고 대동강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예종(睿宗) 11년 여름 4월 갑자 초하루 서경(西京)에 도착하여 대동강(大同江)에 띄워놓은 배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어가(御駕)를 호종한 제왕(諸王)·재추(宰樞)·시신(侍臣) 및 서경유수(西京留守)와 분사(分司)의 3품 이상 관리들이 잔치에 참석하였다. 바람은 맑고 날씨가 화창하니 왕이 기뻐하며 시신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인종(仁宗) 10년 4월 병술 왕이 대동강에서 용주(龍舟)를 타고 뱃놀이를 했는데, 〈예종의〉 제사가 든 달이라서 악기를 ...
고려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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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원년 겨울 10월 병오 초하루 참지정사(叅知政事)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검교상서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 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소부감(少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임명하여, 병사 30만 명을 통솔하여 통주(通州)에 진을 치고 거란(契丹)에 대비하였다.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
로마에 콜로세움이 있다면 고려에는 격구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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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콜로세움은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인데 로마의 정치인들은 여기서 백성들에게 검투경기,전차경기을 보여주고 무료로 빵을 나눠어주었다 고려시대때도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격구장이 있었다 고려시대때 격구장을 구정(毬庭)이라 불렀는데 구정에서 격구도 즐기고 원로들이나 백성,승려들에게 음식대접을 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고려의 격구장인 구정(毬庭) 에서 왕이 제사을 지내고 격구경기을 벌여 백성들에게 볼 거리을 제공하고 음식을 베풀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불러서 잔치을 열고 선물을 주었는데 중간에 풍악이 울리고 무희가 춤을 추면서 백성에게 볼 거리을 제공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국가원로들에게도 잔치을 베풀고 불교행사도 격구장에서 했습니다 격구장이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면 그 규모가 지금의 운동장처럼 클 것...
서머타임은 유럽보다도 먼저 고려,조선시대때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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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의 환웅은 새토템의 조이족이다 홍산문화는 동이 조이족 문화로 우리 조상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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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 오광의 난 왕후장상 王侯將相 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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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 정몽주는 죽어서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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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가 (何如歌) 此亦何如 차역하여 ​彼亦何如 피역하여 ​城隍堂後垣 성황당후원 ​頹落亦何如 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 아배약차위 ​不死亦何如 불사역하여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얽혀서 백년을 누리시세 단심가 (丹心歌) ​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也歟 (영유개리여지)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고조선은 중국 하나라때 식신으로 불렀고 주나라때 숙신,조선으로 불렀다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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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五帝本紀의 제순조帝舜條 “(우 임금은) 남으로는 북발, 서로는 융적 강족, 북으로는 산융과 발 ,식신 등을 위무했다.”(卷1 五帝本紀 舜) 우(禹) 죽서기년에 “순임금 25년 식신(息愼)이 와서 활과 화살을 바쳤다. 라는 기록이 있다 후한 때 대학자 정현(鄭玄)은 “식신(息愼)은 숙신으로 동북방 오랑캐”라고 해설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직신(稷愼)은 숙신(王會解篇)”이라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紂)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숙신(肅愼)이 와서 석노(石砮)와 고시(楛矢)를 바쳤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周)나라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초유(招誘)하였는데, 주공(周公)이 이들을 정벌함으로서 동이(東夷)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강왕...
후한서 동이열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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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1. 서(序)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그 의미는)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夷)는)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도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였다.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을 우이(嵎夷)에 살도록 명(命)하면서 ‘양곡(暘...
한서지리지 하 연나라 지역에 기록된 고조선 범금8조와 고조선백성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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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과 고죽국은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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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승패를 가른 매소성전투는 어디서 벌어졌나 신라 칠중성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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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 건국지 대방고지帶方故地 위치 와 마한지역,남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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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
신라초기 지린성과요녕성의 신라영토 중국에서는 신라왕을 낙랑군공 신라왕,계림주자사 신라왕으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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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13대 미추왕(재위262년- 284년)때부터 김씨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22대 지증왕 4년 (503년)까지 나라 이름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사라,사로,신라등으로 불렀다 지증왕 4년에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고 ,임금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국왕으로 정했다 중국의 북사北史 ,북제서北齊書,수서,구당서舊唐書 등에는 신라의 진평왕이나 진흥왕을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봉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 중 (북사) (신라열전)에는 그 땅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한나라때 낙랑땅으로서 사라라고도 했다라고 나온다 당나라 현종이 성덕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다 ( 713년 10월(음) ) 〔당나라 현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표기장군(驃騎將軍) 특진(特進)행좌위위대장군(行左威衛...
살수대첩의 살수는 청천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살이 센강을 살수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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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초기 시조 온조왕때 하북성의 백제영토 북쪽 말갈(오환 ) 동쪽 낙랑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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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송악군(한주,광주)고려의 해주,양주(남경,한양군),한강,니하,왕봉하,포주(보주,의주) 위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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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신라의 경계는 대동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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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의 중심지는 산동성이 아니고 고조선이 있던 하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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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기상,날씨,눈,비,황사,구름,천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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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 ,고조선,부여,동호,고구려,백제,신라,전연,후연,거란,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계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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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지역에서 한국어,일본어,몽골어,퉁구스어가 나왔다 요하문명은 동이족문명이고 고조선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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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충렬왕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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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부와 자비령 위치 ,서경,윤관9성,강동 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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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의 역사왜곡 중단하라 (국회앞에서 1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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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의 한성은 요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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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세진박-z1t
    @세진박-z1t 14 дней назад

    산둥반도 무싸사당 화상석

  • @youngsamsong9993
    @youngsamsong9993 Месяц назад

    식신, 숙신, 직신, 주신은 일반적으로 여진족 국가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라 한인 출신이고, 조선과 고구려는 사실 우리와 관계가 없어요.

  • @돈까스-j8h
    @돈까스-j8h Месяц назад

    불여지국은..기원전 7c경 터어키 고르디우스 지역에서 나라가 망하고 탈출한 프리기아 세력.. 동북아시아로 와서 불례구야..불리지국..불여지국.. 제나라 환공한테 쫓겨서 북쪽으로 이주해서는 "고리"국..(코리반트).. 그래서 한국지명에 리..례. 글자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 그렇다고 부여를 불여지국과 동일하게 보는건 반대함. 부라는 글자는 이미 기원전2천년경..도산회의때 "부루 친림" 등..이미 있었슴..부상나무 부자도 같고..

  • @국강상
    @국강상 3 месяца назад

    중국에서 손성자성을 위만 왕검성으로 추측하는 근거 제시 좀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3 месяца назад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는 험독이란 곳을 고조선의 옛 수도로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 학자들은 랴오허의 서쪽에 자리한 타이안현 지역이 있고 이 곳에 손성자성이 있으므로 이 곳을 험독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저의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사람-h7y
    @그사람-h7y 4 месяца назад

    "김부식도 삼국통일이란는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하야시 다이스케는 저서 조선사에서 삼국통일로 규정했다. 그 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 통일이란 이름으로 정의했다.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배제하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재검토>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그사람-h7y
    @그사람-h7y 4 месяца назад

    신문왕대(681~692)에 신라는 한강 이북 지역을 거의 방치 그 후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 받아... 그 뒤 헌덕왕대(809~825)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동강 남쪽 연안을 신라의 영토로 확정시켰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평양은 대동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영토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후대인의 손길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신라의 금석문에, 신라는 자신을 당의 번(藩), 번국(藩國), 제후(諸侯), 諸侯之外守者라 자처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 하대에 만들어진 승려들의 분문들에서는 有唐新羅國, 大唐新羅國이라 하여 스스로를 당의 속국이라고 인식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재검토 참조>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그사람-h7y
    @그사람-h7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당나라의 발해 공격에 신라가 참전한 대가로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당나라의 현종 황제는 볼모로 장안에 와있던 김사란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했다. 신라에서는 발해를 치는대신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보장한다는 당나라 현종 황제의 밀약을 믿고 김윤중과 김윤문 등 4명의 장군들에게 발해의 남쪽 경계를 치도록 했으나 군사의 절반이 사망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신라가 참전한 대가로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받았다."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4 месяца назад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대동강이 나오는데 서경의 대동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려 서경은 요녕성 요양시에 해당하고 서경의대동강에서 고려왕들이 뱃놀이을 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영토는 호로하에서 철관성까지 였다고 합니다 호로하는 요양시을 흐르는 태자하을 말하고 철관성은 요녕성 개원과 철령사이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라는 발해와의 전쟁에서 패해서 요녕성 해성시 부근 길림지역과 상경용천부지역등 많은 영토을 발해에게 빼앗겼습니다 발해에게 빼앗긴 영토을 되찾기 위해서 발해의 남쪽을 공격한 것 같습니다 당나라가 약속한 대동강이남이란 요양시 북쪽을 흐르는 태자하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역사에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사람-h7y
    @그사람-h7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문무왕이 당 고종에게 올리 사죄 표문(表文)> "아무개(문무왕)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고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某頓首頓首死罪死罪 九月 彗星七出北方 9월, 혜성(불길한 징조)이 북방에 일곱 번 나타났다. 王 獲罪大朝 遂遣級飡原川 奈麻邊山 及所留兵船 郞將鉗耳大侯 萊州司馬王藝 本烈州長史王益 熊州都督府司馬?軍 曾山司馬法聰 軍士一百七十人 上表乞罪曰 임금은 ... 당 조정(큰 조정)에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 급찬 원천(原川)과 나마 변산(邊山) 및 붙잡아 두었던 당의 병선(兵船) 낭장(郞將) 겸이대후,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軍), 증산(曾山) 사마 법총(法聰)과 병사 1백7십 명을 돌려보내고,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臣某死罪謹言 昔臣危急 事若倒懸 遠蒙拯救 得免屠滅 粉身?骨 未足上報鴻恩 碎首灰塵 何能仰酬慈造 “신(臣) 아무개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뢰나이다. 전일에 신의 위급한 처지가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았을 때 멀리서 황제 폐하의 구원을 입어 도멸(짐승처럼 찢어 죽임을 당하여 도살되어 멸망)을 면하게 되었사옵니다. 몸과 뼈가 부수어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엔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황제 폐하의 자애로운 은덕을 갚을 수 있겠나이까? 然深讐百濟 逼近臣蕃 告引天兵 滅臣雪恥 그러나 깊은 원수인 백제는 신의 변방을 침범하여 핍박하고, 하늘의 군대(황제 폐하의 군대)를 이끌어 신을 멸하여 치욕을 갚으려 하므로 臣懼破滅 自欲求存 신은 파멸의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枉被凶逆之名 遂入難赦之罪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짓게 되었나이다. 臣恐事意未申 先從刑戮 生爲逆命之臣 死爲背恩之鬼 신이 미처 사정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받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령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려워 謹錄事狀 冒死奏聞 伏願少垂神聽 炤審元由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잠시라도 신령스런 귀를 기울여주시어 근본되는 이유를 밝게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臣前代已來 朝貢不絶 近爲百濟 再虧職貢 신은 전대(태종무열왕 김춘추) 이래로 조공을 끊이지 않다가 근래에 백제 때문에 거듭 조공을 빠뜨려서 遂使聖朝出言 命將討臣之罪 드디어 성스러운 황제 폐하의 조정에서 말이 나게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토벌하게 하셨나니 死有餘刑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褒斜之林 未足作臣之械 죽어도 받아야 할 형벌이 남음이 있어, 남산(南山)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며, 포야(褒斜, 중국 종남산의 골짜기)의 숲도 신을 벌할 손발을 붙들어 매는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池宗社 屠裂臣身 事聽勅裁 甘心受戮 종묘와 사직을 헐어 연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황제 폐하께서) 이 사정에 귀를 기울여 판단해주신다면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육시하다(戮屍--: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목을 베는 형벌을 가하다}을 받겠나이다. 臣?轝在側 泥首未乾 泣血待朝 伏聽刑命 신의 관과 상여가 곁에 있고 머리를 진흙땅에 대고 죄를 빌다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형벌을 엎드려 청하나이다. 伏惟 皇帝陛下 明同日月 容光?蒙曲炤 德合乾坤 動植咸被亭毒 好生之德 遠被昆蟲 惡殺之仁 爰流翔泳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아서 얼굴의 광채를 온 세상 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해 동식물이 다 그 은덕으로 살아가며 살리시기를 좋아하시는 덕은 멀리 벌레에까지 미치고 죽이기 싫어하시는 어짐은 새와 물고기에까지 흐르나니 ?降服捨之宥 賜全腰領之恩 雖死之年 猶生之日 만일 석방의 용서를 내리시어 허리와 머리를 보전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산 것과 다름이 없겠나이다. 非所希冀 敢陳所懷 不勝伏劒之志 謹遣原川等 拜表謝罪 伏聽勅旨 바라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히 마음 속의 품은 바를 아뢰오니,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죄를 빌고 칙지를 엎드려 들으려 하나이다. 某頓首頓首 死罪死罪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고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 銅三萬三千分 針四百枚 牛黃百二十分 金百二十分 四十升布六匹 三十升布六十匹 이와 동시에 은 3만3천5백 푼, 구리 3만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20 푼, 금 1백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是歲 ?貴人飢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문무왕 12년 - 문무왕이 당 고종에 올린 사죄 표문(表文)>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그사람-h7y
    @그사람-h7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매소성 전투 (2)> "672년 이근행은 20만 명이 아닌 자신의 말갈족 병사 3만 명을 지휘해 한반도에 왔다. 신라군이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을 패주시킨 게 아니라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이근행 부대가 철수했다. 675년 당나라의 신라원정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에서 매소성 전투는 벌어졌다.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의 수십만 대군을 패배시켰다면, 그 주역은 한국의 대영웅으로 대대손손 길이 찬양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영웅이 누구인가?" <한나절에 읽는 발해의 역사 (공)저: 이윤섭, 이선영 참조>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그사람-h7y
    @그사람-h7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매소성 전투 (1)> "당나라 군사가 말갈과 더불어 공격하니 신라가 크게 패하여 장군 효천(曉川)과 의문(義文) 등이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군이 당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다 (672년 08월(음))>, 672년 8월 신라군이 당군과 싸워 크게 패하였으며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은 4만 명으로 알려졌다. 신라는 사죄문과 금, 은, 구리, 바늘, 우황, 포목 등 막대한 진공품을 바쳤다. 이 해에 신라는 곡식이 귀하고 기근이 들었다." <석문전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그사람-h7y
    @그사람-h7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기벌포 전투 (2)>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676년 11월(음))... 그런데 구당서 권제83과 신당서 권제111의 열전 설인귀 전에는 사뭇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설인귀가 674~676년에 중국 남부의 상주(象州)에 유배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인귀는 670년 토번(吐蕃)과의 대비천전투에서 패배 후 제명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그사람-h7y
    @그사람-h7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기벌포 전투 (1)> "신라 측 주장인 시득의 관등이 8등인 사찬이기 때문에 신라군의 규모가 크지 않았음... 또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뒤 크고 작은 전투가 22회나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력 부대 사이의 전투라고 고기 어려운 전황...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2) - 매경프리미엄 참조>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그사람-h7y
    @그사람-h7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라군이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 3만 명에게 전멸 당하자 신라의 문무왕이 막대한 조공을 바치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싹싹 빌어서 신라의 백성들이 굶주렸으며 설인귀는 커녕 매소성, 기벌포 전투 때는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서 당나라 군이 모두 철수한 상태였습니다. 김부식이가 구라친 것입니다."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5 месяцев назад

      좋은 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삼국사기을 믿는 사람입니다 저의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seanhello2
    @seanhello2 5 месяцев назад

    일제 반도사관. 신라 백제, 고구려는 모두 현재 중국땅

  • @humfreybogat9699
    @humfreybogat969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음... 마이크부터 새로 사세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돈이 없습니다 볼륨을 최대로 하시면 됩니다 자원봉사로 하니 양해바랍니다

  • @박종두-g5r
    @박종두-g5r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누가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이내로 축소 이야기하나

  • @광개토태왕-h5f
    @광개토태왕-h5f 8 месяцев назад

    한혁은 고조선의 부단제 번한(차이나동해안지역을 다스린 부단제)이 다스린 번조선의 제후를 의미한다

  • @박경옥-f9s
    @박경옥-f9s 9 месяцев назад

    네 영상 잘 시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hanbaedal
    @hanbaedal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산동지역은 고조선(번조선)의 땅이었슴을 증명하는 자료라 여겨집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저의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산동성의 무씨사당은 단군신화의 내용인 것 같습니다 산동성은 동이족들이 활동한 지역이고 산동성에서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이 여러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조선의 영토가 산동성까지 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 @타미드LOG
    @타미드LOG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라왕을 낙랑군공으로 봉한 것은 신라가 [북]진한에서 기원했기때문입니다. 요서의 낙랑조선이 동천하여 요동에서 진국으로 발전했고, 진국의 전기주도세력은 [북]진한이였는데 이 [북]진한에서 최씨낙랑국과 경상도 진한세력으로 나뉘어지게 되지요. 진한이 평양에 남아있는 낙랑인을 아잔이라면서 남아 있는 우리라고 칭하지요. 그래서 낙랑국과 경상도 진한은 같은 북진한을 이루던 세력이였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별칭이 낙랑으로 칭하게 된 것입니다. 낙랑군공으로 봉한 것은 중국이 요서의 낙랑군과 최씨낙랑국을 낙랑조선에서 함께 기인했기에 그렇게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반갑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조선상 역계경이 위만조선의 왕과 의견대립으로 동쪽 진국으로 갖다고 합니다 그것은 대릉하을 건너서 진국으로 간 것입니다 신라의 초기위치도 지린성에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요동에 있던 한나라 낙랑군이 망하자 낙랑인들이 신라로 망명하여 함께 산 것은 낙랑인들과 신라인들은 같은 세력이고 신라도 낙랑가까이 있음을 말한다 저의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잡초-k7j
    @잡초-k7j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역사조작 사기꾼들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맞는 말씀입니다 역사교과서가 왜곡됐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바로잡고 역사학계는 퇴출시켜야 합니다 저의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pae4451
    @pae4451 11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라초기 김알지. 박혁거세도 중국남쪽 양가강 근처에 있는거로 알고 있는데..요

  • @김백준-b7y
    @김백준-b7y Год назад

    원래 요동과 요서는 황하 북쪽지방을 이르던 명칭이었으나, 중원을 제패한 국가들마다 저네들의 기준을 두고 요동요서를 구분하다 보니, 현재에 까지 요동과 요서의 지역비정이 왈가왈부되고 있는 것 입니다.

  • @김백준-b7y
    @김백준-b7y Год назад

    의무려산의 위치가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의무려산은 하북성에 존재하였으며. 현재 요령성의 의무려산은 이동한 지명이 라고 합니다.

  • @함철수-h4u
    @함철수-h4u Год назад

    암 걸렸쑤!!? 목소리가 왜 그러우?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듣기싫으면 시청하지마세요 댁을 위한 방송이 아니니 보지마시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듣기 싫으면 듣지 마시요 댓글달면 삭제하고 댓글 숨기기 할 것이요 노망났나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Год назад

    상서 미자편에, 기자가 미자 한테 한 말 "천독강재황은방 天毒降災荒殷邦" 에서 천독 이 은나라가 섬기던 종주국의 천자를 가리킨 말임. 이 천독이 산해경 "유국명왈조선천독기인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 에서의 천독과 같은 것임. "나라가 있으니 이름하여 조선이고, 천독이 거기 사람이다" 천독이 바로 고조선국의 임금의 호칭. 천독 = 단군 = 환웅 = 치우. 치우기 에 제사를 지내는게 둑제 纛祭. 다시말해 둑 纛 = 치우기 蚩尤旗. 둑纛 자를 살펴보면, 毒+縣 독을 매달았다는 소리. 다시말해 毒 = 치우. 원래 독毒 은 치우를 말한것인데, 시간이 흘러서 원래뜻은 잊혀지고 Poison 이란 뜻으로 바뀐것. 발해에서 왕을 가독부可毒夫 라고 부름. 가는 크다는 접두사, 부은 애비 라는 접미사. 그러나 가독부 는 큰 독 애비. 큰 도깨비. 다시말해 도깨비는 원래 신격화된 지도자를 부르는 말인데, 시대가 바뀌면서 귀신이란 뜻으로 바뀐것. 毒 독 자는 오기임. 원래 획이 하나 더 있씀. 主 + 毋 가 아니고 圭 + 毋 였는데 원래 뜻이 바뀌면서 획수도 바뀐것. 圭 는 임금이 손에 들고 있는 홀 / 규 이고, 毋 는 임금이 쓰는 관임. 중국 역사책에 고조선의 왕이 홀 / 규 를 신하들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정확히 나옴.

  • @celerygirl1684
    @celerygirl1684 Год назад

    흥미로운 역사를 알려주시고 공부하시는 열정이 멋져 즐겨 듣고있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부족한 방송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원봉사한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 @pae4451
    @pae4451 Год назад

    정정 해주세요 서경은 북경으로 책보고님 영상에서 서경전도라고 지도를 공개 했더라구요. 요양시 지도랑 북경 지도 비교해보니 요양시가 아니고 북경이 서경 같은대여. 고구려 국내성도 북경 근처 잔아요.요동성도 현재 산서성에 있었고.., 왕건과 궁예 견휜이 자중을 벌인장소가 중국대륙인데.. 겨우 만주를 서경으로 삼는다는게...유투버 책보고 영상 보면 중국대륙 영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고려 영토 나오던군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서경은 요녕성 요양입니다 책보고님 것을 보고 와서 나한테 뭐라하면 안 됩니다 아무근거 없이 황당한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東夷는 九夷이고 九黎의 후예 입니다. 구이는 하나라 동서남북에 분포한다.하여 四夷라고도 했으며 그 중심세력들이 동북방과 동방에 분포하여 東夷라고 칭한겁니다.ㅡ 중심 세력은 요동군.고죽군.달지군.아래.ㅡ 구려군.낙랑군.청구군.서군.등등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북에는 람국군. 몽고리군. 서에는 서융군. 남에는 남월(남만)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11 месяцев назад

      맞는 말씀입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于夷 萊夷는 청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우이였는데 제나라에 밀린 이후 東萊땅에 자리 잡자 래이 라고 한거임.ㅡ 배달국 청구시대 그리고 조선의 청구군때 우이 그리고 래이 라고함 지금의 산동성 북동 일대임. ㅡ 지도가 많이 잘못되어 있어요. 유주 영주는 산서성 태원 좌우이며 후에 燕나라의 계성이 이 일대로 지금도 태원 서북에는 燕京山이 있으며 汾水의 시작 지점 이고. 본래 태원은 더 남쪽에 있던 지명입니다. 그 북쪽에 藍國이 있어고 주나라 이후 鮮虞(朝鮮ㆍ虞舜의 경계 지점.즉 산서성 지역)라 했으며 산서성 동남부와 하북성 석가장시 북쪽으로 옮겨가며 中山國(태행산맥 중부일대)을 형성한 고조선의 최전방 夷國입니다. 기원전 298년대 중산국이 조나라에 멸망하자. 전국의 7국과 조선의 辰番과 직접 맞서게 된것입니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조선의 서쪽 영토는 알타이산맥이고 西戎도 조선의 九夷의 하나였으며 南蠻도 조선의 영토였으나 초나라가 자립하고 그남쪽으로 남월이 자리하여 초나라는 주나라 제후국으로 들어가고 남월은 월남 지금의 베트남이 계승하게 된것이죠.ㅡ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Год назад

    선비족 은 이름 그대로 고조(선 비)왕의 백성들 이란 소리다. 선비족 모용은 의 비석이 "조선건국 고죽위군" 으로 시작되는 이유고, 모용황 은 스스로를 "조선왕" 이라고 칭한 연유다. 선비족는 고조선이 한무제 한테 멸망당한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지역에서 홀현이 나타난 민족인데, 그들이 고조선의 후예가 아니라고 우기는게 오히려 미친거다.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Год назад

    거란비사 에 보면, 위만 이 은나라를 속여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고조선을 은나라 로 불렀다는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말해 거란비사 를 쓴 사람은, 고조선을 은나라의 연장, 또는 후예 라고 봤다는 소리다.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Год назад

    명 태조 주원장 도, 고조선 의 단군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가 화령 과 조선 중에 이름을 정해달라고 했을때, 조선으로 정해줬고, 고조선이 단군이 다스렸고 수천년이 흘렀다는걸 시로 써서 줬다. 이건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다시말해, 명나라때 대다수의 배운사람들은 고조선과 단군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Год назад

    은나라땐, 뭐라고 불렀나? 그리고, 은나라 는 고조선의 제후국 이었다. 그런데 중원에 진출해서 세력이 커졌다고, 고조선을 우습게 보고 까불었지. 은나라가 망할때, 미자와 기자 (기자조선 할때 그 기자) 의 대화가, 상서 미자편 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자가 "천독강재황은방" 이라고 했다. 천독이 재앙을 내려서 은나라가 황폐해진다는 소리인데, 여기서 천독 = 치우 = 환웅 = 단군 이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고조선의 중심지는 하북성 연산산맥 북쪽의 조백하 상류 동쪽지류에 1천여년간 있다가 적봉시 영성현에 있어고 전국시대 직전에 요령성 요양으로 왔다가 해모수가 쿠데타로 웅심산 즉 개마산 지금의 장백산 서쪽 기슭 장백현의 압록강변에 난변의 명칭으로 도읍했어고 동명왕 고두막한이 환인현에 졸본성을 쌓아 이도 했을때까지 즉 요양부터 졸본까지의 시대가 대부여이고 이후 동명왕 손녀의 남편 고추모가 고구려로 국명을 바꾸었는데 이는 소서노와 나라를 둘로 갈랐기 때문입니다.ㅡ 지나사엔 고조선을 숙신이라 하다가 춘추시대엔 산융 전국시대 이후 동호라고 불렀습니다.ㅡ 이후 흉노가 등장하고 선비가 등장하죠.ㅡ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조선은 조선 三韓으로 분권을 했으며 전권력은 辰王인 辰韓이 馬韓은 부권력으로 단군왕검의 고향으로 지켜주고 번한도 부권력으로 청구국의 왕통 치우의 후손으로 군권을 대리로 회대지방의 제후들과 속국 虞舜 이후 夏禹등을 감시 했던것입니다.ㅡ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조선삼한은 九夷의 아홉 제후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배달국 九黎를 계승한것입니다. 배달국은 句麗시대 그리고 靑邱시대로 구려시대는 현요하 중상류이며 청구시대는 산동 태산 북동쪽입니다.ㅡ 아홉제후는 句麗. 樂浪.靑邱.商邱. 徐國.ㅇ ㅇ .蒙古里.藍國.西戎이며 여러 州가 있어는데 이를 64민이라 했다고 보입니다. 실제 주는 백개일수도 있고 더많을 수도 있는데 이를 64민이라 했던것이죠.ㅡ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Год назад

      백악산 아사달이 지금의 조양시 임. 조양에 서쪽은 산에 막혀있고, 동쪽으로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그 강을 동쪽으로 건너자 마자 흰 바위산이 막고 있씀. 그 산이 바로 백악산임. (현재 이름이 백악산이란 소리는 아니고). 조양에서 동쪽으로 바라볼때, 해와 달이 그 흰바위산 위로 떠오르는걸 그린게 고조선 문양 임.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백악산은 白鹿山 이라고도 했고 白狼山으로 불렸습니다. 지금의 적봉시 영성현의 고대 지명이 鹿山이며 별칭 扶餘입니다. 지금의 당산시 동북쪽 칠로도산맥. 치라투산맥이 백랑산입니다. 이곳은 요동의 백랑산이죠.ㅡ 조양은 고대에 지금의 베이징시 북서쪽의 장자커우시. 즉 장가구시가 조양입니다 그 지명이 당나라이후 먼저 사서에서 이후 요나라가 생기면서 이곳 조양으로 옮겨진것 입니다..ㅡ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본 평양이 현 요양으로 신인 왕검이 熊氏王의 비왕으로서 대행 통치한 곳임. 唐나라 堯가 청구국을 멸하자 달지국 熊씨왕이 구원군을 이끌고 가다 복병에 걸려 전사하였으므로 청구국 유민들이 신인왕검에게 몰려와서 단군으로 추존해주고 아사달(요동군)로 옮겨 조선을 개국하자 평양은 별칭 장당경 (당나라때문에 감춰진 서울)이라 함.ㅡ 백아강은 신인 왕검의 고향으로 달지국 熊氏의 도성으로 마한의 비왕이 통치하므로 별칭 평양이며 지금의 평양임.ㅡ 험독은 고죽군의 郡都로 청구국이 망하고 치우의 후손들이 청구국을 통치하다 堯임금에게 망하고 이곳에서 단군왕검의 비왕으로서 번한이 되니 이곳을 별칭 평양이라함. 지금의 베이징시.

  • @ILovekorea365
    @ILovekorea365 Год назад

    단군조선 영토가 너무 작습니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단군 조선 초기 하나라때 까지 영토는 서쪽으로 알타이산맥 까지이고 남쪽으로 양자강 이남의 복건지역 이남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재야사학계도 증산도 사서에 나와 있는 영역도 많이 축소 되어 있네요.!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은나라는 본래 商邱郡으로 조선의 제후국으로 태고에 商奄으로 불렸는데 엄은 奄瀆忽을 말하는 것으로 춘추시대 노나라 땅이 그곳입니다.ㅡ 商은 商邱의 약자로 상구는 하나라에도 관계가 깊어 하나라의 많은 영역을 세력권에 넣으므로서 자립의 토대를 마련하고 하나라를 멸하면서 강대해졌던 것입니다. 탕지산(태행산맥 남단)에서 새로이 시작된 붉박(안향현 은허)의 상나라는 때문에 초대主를 天乙을 成湯이라고 한 것입니다.ㅡ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때문에 은나라가 생기면서 조선의 동쪽 영토는 많이 쪼고라 들었는데 산동의 엄독.靑邱(靑州라고 불림, 于夷라고 불리다 제나라에 밀리어 東萊로 옮겨가 萊夷라 불림) 산동과 하북의 연결지점 索度 탕지의 북쪽 지금의 석가장 북쪽 令支에 은나라와 국경을 하게 되어 주나라 이후 주나라가 강대해 지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ㅡ

  • @김순근-l3l
    @김순근-l3l Год назад

    단군조선에 옛 우리민족에 나라역사를 반듯이 되찾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교육해야합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맞는 말씀입니다 단군신화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역사학계와 많은 시민들은 단군신화는 꾸며진 이야기고 없던 일이라 합니다 고조선이 있던 하북성지역에 요하문명이 발견됐는데도 역사학계는 우리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국사책을 왜곡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 @김석주-p8n
    @김석주-p8n Год назад

    가짜 역사. 천벌이 내릴겁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저의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언자-c9z
    @예언자-c9z Год назад

    단군 조선 강역이 너무 좁음.

  • @이영민-b1c
    @이영민-b1c Год назад

    단군 , 탕그리 .. 유목민족 연합수장 .. 칸국 한국 주센 조선 맥이족 맥시코 한계레 항가리 .. 단군 직위를 가진 분이 49명 5000년 이라고 하던데 .. 서해가 원래는 평야 지대 였다고 하던데 .. !! 평야지대가 물속에 잠기면서 .. 묘자리 쓰던 산 .. 한반도 라고 하던데 ..!! 호랑이 예족 불꽃 왕관 장식. 전사 .. 곰 맥이족 .. 사숨뿔장식 .제사장 .. 전사 부족 하고 제사장 부족이 연합 하면 .. 예맥족 (호랑이 + 곰) 전사들은 뿔꽃 장식 사용하고 .. 제사장 들은 사숨뿔 장식을 사용하고 .. 붉은색은 전사 .. 흰 색은 제사장.. 황색은 농사꾼 ..

  • @yonghanmo9178
    @yonghanmo9178 Год назад

    회수하여 다시 올려야 할 듯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안녕하세요. 선생님 고죽국이 번조선이고 소위 기자조선입니다. 지금의 베이징이 그곳이며 고죽군은 후에 낙랑군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 @TV-DOCJON
      @TV-DOCJON Год назад

      근거는요? 우기기만 마시고 젭알 근거좀 써주쇼. 없으면 환빵~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그남쪽의 영정하는 고대 帶水이며 그남쪽일대가 대방군이고 보정시가 漢城입니다. 고구려 검모잠이 안승을 모시고 당나라에 항거한 성이 황해도 재령에 있는 한성이 아니고 보정시에 한성이 있었던 것이며 이곳이 요서백제의 도성 한성백제입니다. 백제는 소서노가 고주몽과 헤어진후 이곳 위만조선의 땅이었던 패대의 땅으로 남하해 가칭 비류국을 세워지만 비류가 일찍죽고 소서노 마저 죽자 지금의 풍납토성 고대 한산 위례성에서 백제를 개국한 온조를 비류국의 신민들이 모셔와 한성에서 요서 백제를 연것입니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TV-DOCJON고죽국은 요서에 있던 나라입니다. 지금의 당산시에 있어다고 되어 있죠. 그런데 이곳은 요동지역이며 따라서 고죽국은 요서지역인 지금의 베이징시 라는 겁니다.ㅡ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수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구려가 渤碣 즉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을 점령하여 왔다. 즉 현재의 연산산맥 동쪽의 갈석산 일대가 요동이라는 얘기이네요.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TV-DOCJON수경주에 만리장성은 요수를 끊고 갈석산에서 시작한다.ㅡ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의 깃점이다. 라고해 낙랑군에 갈석산이 있어다고 하네요. 그런데 북한 평안도의 낙랑군에는 갈석산이 없습니다.ㅡ 따라서 하북성 진황도시는 요동이므로 낙랑군이 될수 없어요. 낙랑군은 고죽국이 먼후에 낙랑군이 되는곳이니 당연히 요서에 있어야 하고 그래서 베이징이 낙랑군이며 태고 고죽국이라는 겁니다.ㅡ 만리장성이 토성에서 명나라때 벽돌로 개축되면서 산해관까지 연장되었어요. 그런데 현재의 갈석산에 연결된 흔적이 없고 연산산맥에서 산해관까지 연결 된것입니다. 때문에 산맥에 연결된 장성의 산은 연산산맥이며 고북구시입니다. 이곳의 산이 고대의 갈석산이며 그서쪽 조백하가 고대의 요수라는걸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TV-DOCJON장수왕때 옮겨간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고 평원왕때 옮겨간 장안은 요양 북쪽의 장안으로 모두 평양성 안에 있던 지명 입니다.ㅡ 수.당시기 고구려 평양성을 젊령하러 온 수.당의 수군은 왜 비사성 지금의 요동반도 끝의 대흑산성으로 왔을 까요.ㅡ 래호아도 이곳으로 착륙해 진군중 고구려 수비병들과 마주쳐 승리하고 곧장 평양성에 다달았다고 했으니 평양성이 지금의 요양이라는걸 말하고 있는것 아닐까요.!

  • @Tanghuru888
    @Tanghuru888 Год назад

    삼국/고려는 대륙 본토에서 해안까지 있었습니다. 중국대륙에 남아 있는 지명확인하면 다나옵니다

  • @hermit2055
    @hermit2055 Год назад

    우리는 원래 소국이 아니라 대국이었다. 중국땅 절반이 우리 선조들이 살았고, 중원이 주무대 였다. 고조선, 삼한,발해, 고려땅이 중원대륙에 위치했는데, 사대식민사학자들이 왜곡, 조작하였다. 이 사실을 확인해보니, 진실이고 진리였다. 진정 원통하고 분하였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을 척결하고 우리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각자의 의무입니다, 매국 강단사학이 이해가 안되었는데, 결국 국민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꼴통은 절대 안 변합니다. 고난속에서 우리는 깨어나고 있습니다. 천상에 변화가 일어났어요. 홍익인간의 구현입니다.

  • @kelakamo766
    @kelakamo766 Год назад

    뭐냐

  • @junggoowoo4298
    @junggoowoo4298 Год назад

    오디오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문제점 하나는 음량이 너무 낮은 것이고, 둘째는 음질이 나쁩니다. 말씀하시는 중간 중간에 '퍽 퍽'하는 소리는 보통 마이크를 너무 가까이 사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근본적으로 마이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크 특성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마이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음량이 낮은 것은 아마도 제작된 A/V 신호를 스트리밍하는 과정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관계하는 기술자에게 도움을 받도록 하십시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안녕하세요 마이크을 너무 가까이 사용했고 저렴한 마이크도 문제인것 같습니다 부족한 환경에서 하다보니 그렇습니다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gn.l3762
    @gn.l3762 Год назад

    한서지리지에 지금의 산서성 중부의 태원은 고대 산서성 남부 하동지방 지금의 원청시에 있던걸 옮겨놓은 것이라 합니다.ㅡ 그럼 지금의 태원엔 고대 춘추전국시기 계성이 있었는데 하북성 베이징쪽으로 옮긴것이 분명하며 이에따라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조백하(혹은 난하)에서 현 요하로 옮겼으며 고대 압록수는 지금의 요하에서 현 압록강으로 옮겼다는 얘기가 됩니다. 더불어 요서.요동에 있었던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북부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맞는 말씀입니다 초기 연나라는 산시성의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다 춘추전국시기에 하북성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주나라 무왕때 숙신,연,박이 우리의 북쪽 땅이라 했는데 이 때 연나라는 산시성에 있었고 주나라 선왕때도 연나라는 산시성에 위치했고 북쪽에 주나라 제후국인 한국이 있었고 한국 북쪽에는 산융과맥족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king-je6ul
    @king-je6ul Год назад

    👍

  • @전성용-o6w
    @전성용-o6w Год назад

    왜케 목소리가 피죽도 못먹은 사람같징?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앞으로 목소리을 크게 해서 방송하겠습니다 저의 방송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전성용-o6w
      @전성용-o6w Год назад

      @@우리역사를찾아서 ㅎㅎ 응원하겠습니다. 화이팅 하셔요

    • @user-wj3mq3pv4l
      @user-wj3mq3pv4l Год назад

      대륙신라는 양자강 유역에서 큰 세력을 떨친 국가입니다.

    • @yonghanmo9178
      @yonghanmo9178 Год назад

      상태가 매우 안좋아 보이네요. 세상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보며 골고루 먹고 운동도 필요해 보입니다.

  • @실크로드다시보기
    @실크로드다시보기 Год назад

    수고많으십니다. 적극 지지합니다. 단 사료는 오랜시간 가감.변형되었으므로 전적인 신뢰보다는 지형학 및 복합적으로 봐야합니다. 대방은 띠.대. 이므로 태행산맥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또 공손. 지명이 태행산맥 위에 있어요. 그치만 이곳은 현토 같으네요. 기원전의 공손도는 산동 근처에서 주된 활동을 보입니다. 산양군.창읍군 등. 또 방이란 땅이 넓음을 의미하므로, 태산을 중심으로 둥근 허리띠 모양의 광대한 영역 같습니다~ 낙랑아래라고 하니 확실하네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Год назад

      아무생각없이 대방고지을 정하는것은 안 됩니다 이런 장난하려면 구독취소하고 시청하지마세요 역사학계의 역사왜곡에는 말하지도 못하면서 여기서 장난해요 구독취소하고 시청하지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