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초기 건국지 대방고지帶方故地 위치 와 마한지역,남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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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5 дек 2024
  •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성제(成帝)홍가(鴻嘉)3년(B.C.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그 후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高句麗)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신하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온조는 한수(漢水) 유역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살았는데요. 뒤에 미추홀에 있던 사람들이 위례성에 합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류와 온조는 동남쪽으로 내려가서 요하를 건너 요동반도 일대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요하의 동남쪽은 무주공산이었지요. 고구려는 요하의 서쪽 대릉하 유역에서 이제 막 건국된 소국이었고, 말갈은 요하의 동쪽, 만주의 북쪽에 있었으니까요.
    (요사(遼史))에 따르면 동경 요양부에 포하, 청하와 함께 패수(浿水)가 있는데요. 동경 요양부는 지금의 요양(遼陽)이지요. 요양 남쪽의 해성시 부근을 흐르는 어니하(淤泥河)라는 하천(강)이 있습니다. 니하(泥河) 또는 헌우락(軒芋濼)이라고 하는데요. 예전에 패수로 불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태자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비류와 온조가 건넜다는 패수는 태자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서기전 5년에 온조왕이 도읍을 옮긴 사실을 전하면서 백제의 국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고 하는데요. 여기의 패하/패수를 태자하로 보면 백제가 요동반도 일대에 도읍한 사실과 부합합니다. 패하, 패수, 패강(浿江)은 다 같은 말이지요. 서쪽의 대해(大海)는 요동만 일대의 바다가 될 겁니다.
    백제가 요동반도에 정착했다면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강(漢江)일 수 없습니다. 북방계의 종족들은 정착지 주변의 큰 하천(강)을 “아리/어리수”라고 불렀는데요. 鴨水(압수), 鴨綠水(압록수), 洌水(열수), 閼川(알천)은 이두식 표기이고, 漢水(한수)는 한자식 표기입니다. 漢(한)에는 크다(大)는 뜻이 있으니까요. “아리/어리수”가 여러 곳에 있었던 만큼 漢水(한수)나 漢江(한강)이라는 이름의 하천(강)도 여러 곳에 있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백제의 한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삼국사기)에 “서기 19년에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하와 대수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수를 한강으로, 패하/패수를 대동강으로 보면 이 기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데요. 한강의 동북 마을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간다고 해서 대동강 부근이 텅 빌 이유가 있을까요? 한강과 대동강 사이의 거리를 감안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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