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부와 자비령 위치 ,서경,윤관9성,강동 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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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4 сен 2024
  •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등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세운 임연(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킨 뒤,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西海島)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원의 세조(世祖)는 이듬해 자비령을 경계로 삼아 그 이북 지방은 모두 원나라의 소유로 한 뒤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탄으로 동녕부총관을 삼았다. 이에 원종은 원의 연경(燕京)까지 직접 가 동녕부 반환을 주장하였으나 관철되지 않고 오히려 1275년(충렬왕 1) 동녕부총관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끊임없는 반환 요청에 따라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 지역을 돌려받게 되었으며 고려 영토에 있던 동녕부는 요동(遼東)으로 옮겨졌다. 이후 공민왕대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를 활용하여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대규모의 동녕부공격이 실행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녕부 [東寧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동녕부 자비령은 고려사를 근거로 현재 황해도 서흥군 서북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는 자비령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명시하지 않았고,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근거로 사용됐다. 반면 대명일통지는 “평양성 동쪽 160리에 있다”고 자비령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고, 원 시기 경계로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평양성은 427년 고구려장수왕이 천도한 곳으로, 현재 중국 요녕성 요양시 일대이다. 요양시 동쪽으로 160리, 약 80km 떨어진 곳은 본계시로, 그러나 현재 본계시에서 자비령이란 지명은 찾을 수 없다. 현장 답사를 통해 경계로 삼을만한 지리조건을갖춘 곳을 찾아본 결과, 본계시 사산령촌이 자비령으로 확인됐다. 자비령은원과 동녕부의 경계로, 고려 서북 경계 중 일부이다. 자비령을 바탕으로고려 서북 경계 일부를 살펴 본 결과 관문산-제형산-천산산맥으로 추정할수 있었다. 이전 논문에서 고려 서북 경계 일부로 추측한 길림합달령과 연결해 본다면 고려 서북 경계는 길림합달령-관문산-제형산-천산산맥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고려사 북계
    북계(北界)는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소유하였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唐)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함께 협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병합하였다. 효공왕 9년(905)에 궁예(弓裔)가 철원(鐵圓)을 근거지로 삼아 후고려왕(後高麗王)이라 자칭하며 나누어서 패서(浿西) 13진(鎭)을 정하였다. 성종 14년(995)에 전국을 나누어 10도(道)를 만들 때에 서경(西京)의 소관(所管)으로 하여 패서도(浿西道)라 하였다. 뒤에 북계(北界)라 불렀다. 숙종 7년(1102)에 또 서북면(西北面)이라 불렀고, 뒤에 황주(黃州)·안악(安岳)·철화(鐵和)·장명진(長命鎭)을 내속(來屬)시켰다. 우왕 14년(1388)에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소속시켰다. 관할하는 경(京)이 1개,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개, 방어군(防禦郡)이 25개, 진(鎭)이 12개, 현(縣)이 10개이다. 〈고려〉중엽 이후로 설치한 부(府)가 2개, 군(郡)이 1개이다.
    여기서 서해도가 나오는데 지금의 서해안이 아니고 요양시의 서쪽으로
    태자하의 서북쪽 지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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