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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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4 сен 2024
  • 현종(顯宗) 원년 겨울 10월 병오 초하루 참지정사(叅知政事)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검교상서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 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소부감(少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임명하여, 병사 30만 명을 통솔하여 통주(通州)에 진을 치고 거란(契丹)에 대비하였다.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문종(文宗)원년(1047) 2월에 위위시(衛尉寺)에서 아뢰어 요청하기를,
    “정해진 제도(定制)에 의거하여 노수전(弩手箭) 60,000개와 차노전(車弩箭) 30,000개를 서북로병마소(西北路兵馬所)로 보내십시오.”
    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
    문종(文宗) 34년 12월 동번(東蕃)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최석(崔奭)과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廉漢)을 병마사(兵馬使)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삼아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는데, 사로잡거나 목을 벤 것이 431급이었다.
    1107년(예종 2) 12월 1일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출발하여 여진정벌에 나섰다.
    홍건적이 개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모병했다. 복주에 있던 공민왕은 그해 음력 12월경에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 음력 1월,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

Комментарии • 2

  • @humfreybogat9699
    @humfreybogat969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음... 마이크부터 새로 사세요

    • @우리역사를찾아서
      @우리역사를찾아서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돈이 없습니다 볼륨을 최대로 하시면 됩니다 자원봉사로 하니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