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사람들이 객관적이고 냉정한 관찰자보다는 분노에 가득 차고 화난 관찰자를 통해서 현상들을 보는 것 같아요. 이렇게 첫 관찰자부터가 화난 상태이니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람들의 여론도 점점 험악해지고요.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대어 계속해서 분노와 혐오가 확산되는 것 같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여론이 형성되고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옳게 생각했을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빼먹은 것 같습니다. 또한 요즘 세상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이타적 현상으로 귀결되는 소위 경제의 낙수효과가 극소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죠...... 비록 저는 이 영상만을 보고 이 댓글을 쓰지만, 결국 여러모로 스미스가 살던 18세기보다 더 험악한 세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정보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독점이 줄어들었지만 과도한 양에 의해 압도당하는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구글서칭을 해보면 검색결과는 수백 수천 수만 .. 이지만 거기서도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개만 살펴보는것 역시 압도적인 양에 의해 압도당한것이죠 그렇다면 현대 정보사회에서는 의미있는 정보를 추려내는 능력이 대두되는데 이 능력을 기르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능력인으로 살아가는 필요조건입니다
이기적인게 나쁜게 아니라 어리석으면서 이기적인게 나쁜것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이기심을 부리다가 소탐대실을 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들을 보면 이해득실의 가치판단이 어리석다할 정도로 협소하고 멀리 보지 못해 문제를 일으키죠...
제가 예전에 했던 고민과 아담스미스의 생각이 너무나 비슷해서 놀랐어요.......예전에 집 앞마당에서 싸우는 고양이들에게 비비탄 권총을 우연히 겨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근데 저는 이유도 없이 망설여서 내가 왜 망설인것일까?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난 그 고양이들을 증오하는데 왜 방아쇠를 당기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하게되더군요. 그리고 왜 인간이 살아있는 타 대상에게 해코지하는 것에 주저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하게되었어요. 고민 끝에 인간의 자의식으로 인해 해코지 당할 타대상으로 부터 이입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는데 그러니까 제 마음은 사실 그 고양이들을 동감했다는 것이죠. 이 영상을 통해 전 확신을 얻은 것 같습니다.
보이지않는 손- 사익추구가 공익에 기여한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아담스미스입니다. 국부론을 경제학서로 보는 경향들이 있지만 저는 국부론을 정말 현실적인 철학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도덕감정론의 냉정한 관찰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와 비슷한거 같기도 하네요.
소셜네트워크가 냉정한 관찰자라고 보기에는 부작용인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빠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관찰할 시간도 주지 않고 판단을 종용 당하기 때문이죠. 결국 관찰은 주관의 영역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셜 네트워크 여론은 성급한 판단을 부추겨 '야만으로 회기'하는 아주 적절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인간이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의 최소 기준은 그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 하는 인간들이 모인 사회. 각자 개인 모두가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는 무엇이 나을지 불보듯 뻔하죠. 그런 차원에서 서구의 개인주의적 철학(개인 스스로 책임지는)과 동양의 집단주의적 철학(개인이 스스로 3자화 되 이타적으로 살아가는)은 역사를 통해 어느쪽이 옳았는지 이미 판가름 났죠. 동양의 이타주의? 를 맹목적으로 배격하자는건 아니지만 시비지심 없는 그저 어려서 배운대로 어린이 마음같은 이타심은 오히려 개인을 그리고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정치 뉴스를 봐도 좌익향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무책임 합니다. 저는 그것을 좌익 근본 이념이나 철학 자체가 개인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국가가 모든걸 책임 져줄테니 국민 여러분은 아무 걱정 마세요가 되버리는거죠. 에휴.
같은걸 두고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흄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본능 중 이기심과 동정심에 주목했지만 회의주의로 빠진 흄과 반대로 낙관론을 가지고 시장경제 속의 보이지않는 손을 주장했습니다. [도덕감정론]이 강조하는 공감과 [국부론] 이 강조하는 이기심과 자기 이익은 서로 모순. 이기적 개인과 사회적 복리의 조화와 모순 문제를 학자들은 ‘애덤 스미스 문제’라 부른다. 이 문제는 어쩌면 앞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난문(難問)일지도 모른다. 다만 스미스의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은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의 다른 두 측면을 각기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기심, 또는 개인적 욕망을 완전히 제거한 이타심이 제대로, 혹은 얼마나 기능을 할수 있을까?" 하는게 요즘 제 의문입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란 개인의 욕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SNS 에 의한 타인의 시선은 도덕적 견제의 힘이 되지만, 때로는 개인을 억압하기도 하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도, 군중심리에 쏠려 패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SNS 는 도구일 뿐인 것 같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요즘엔 도덕, 법, 시장이 해야할 기능을 (때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지만) SNS 를 매개로한 군중이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건 한걸음 진보인지, 퇴보인지, 아니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제도의 부작용인지 애매할때도 많습니다.
여론의 한계, 혹은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 것 같아 몇 자 적습니다. 여론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여 만들어 진다는 것인데, 즉 상상의 냉정한 관찰자가 타인, 혹은 자신에 빙의하여 어떤 일어난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바탕으로 공감하느냐, 마느냐로 동감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여기서의 가정을 보면 그 가정 자체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의 냉정한 관찰자~ 그것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냉정한 관찰자이지 타인이 생각하는 냉정한 관찰자는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 감성, 경험,인지, 인식 등 모든 것이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냉정한 관찰자란 있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역지사지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이 말은 결국 여론도 그냥 많은 사람들의 느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론으로 많은 사람을 현혹하는 현 언론들에 침을 뱉으며, 또한 현혹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글 올립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게 개인의 이기적 동기를 인정하면 사회적으로 이타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논리적으로 말하면 사회의 이타적이지 못한, 이기적 결과들은 각 개인의 출발이 이타적 동기였다는 말씀???(물론 이타적 동기가 이타적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겠지만...통찰력없는 어리석은 권력자의 이타적 동기가 반드시 이타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유럽 속담이 떠오르는군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영상에서는 이기적 동기거 이타적 결과로 이어진다. 즉 이기적 동기는 이타적 결과의 충분조건이라는 것이지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결론은 섣부른 감이 있네요. 실제로 애덤스미스의 이기적 동기는 이타적 결과뿐만아니라 많은 이기적 결과를 낳았고, 그것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회질서를 공감만으론안되서 경제력과 법을 동시에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나온것이 국부론입니다 법관련은 쓰다가 포기 실례로 법이 많은 프랑스보다 간소한법이 있는 영국에서 살인이 덜일어나는건 의존하지않는 경제적독립이라고 본것이지요 요즘 lh사태를 보더라도 인간은 홉스식 법이 있어야합니다 따라서 사회질서에 대한 공감만으로 스미스가설명했다는건 일부분만 맞는이야기지요
1쓰려고했던말들이 이미 댓글중에 있네요ㅋㅋ 내면의 관찰자가 초자아! 2저는 이기심이 이타심에 포섭될수있다는 주장이 이기심이라는 악에 면죄부를 주는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못합니다 우선 강하게 이기심을 비판한 후에 아주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 좋은부분도 있다 라고 해야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쁜것을 나쁜것이라 부르지 못하게되어 홍길동이 된 심정입니다. 쓰다보니 악을통해서 선을 이룬다는 주장도 똑같네요...악은 악일뿐이지 뭔... 변신론은 변악론인것 같기도합니다 섞어서 흐리지좀마!
9:51 아담 스미스는 어리석은 사람이 돈을 추구하면 그게 사회를 발전 시킬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 말을 후회할지도 모를 거 같은데요. 돈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과거 물질 경제에서는 어느정도 효용이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정보 경제에서는 너무나 큰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요(예를 들면 유튜브 안의 그 수많은 혐오와 가짜들(당연히 5분 뚝딱 철학은 제외한)).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라진 듯한 모습이죠.
그런데 냉철한 관찰자를 자기 자신의 양심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양심 또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규범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결국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크게 바라본다면, 반드시 신경증적인 증상을 유발하지 않고도 양심을 따르며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더.
@@nollbo 그에 관해 몇가지 제 생각을 말하자면. 맑스의 공산주의사상의 인간 보편의 도덕과 선의 요구가 그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그 공산주의가 수천만명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맑스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팩트죠. 그에 반해 스미스의 사상은 인간의 자연 습성을 그저 관찰하고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됩니다. 시장이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연 습성이다. 중력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중력이라고 이름 붙여줬기 때문이지 우리가 중력을 만든 게 아니듯이 시장도 모여서 교환하려는 인간의 습성을 보고 시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자유시장경제체제 자본주의가 인간사회의 번영과 발전을 일으킨다는 것 20세기를 비약적으로 인간 번영의 길로 이끈 자본주의가 그것을 증명하죠. 만약 공산주의가 옳았다면 소련은 망하지 않았겠죠. 인간에 대한 기본 이해도 없이 아무렇게나 써재낀 자본론과 인간의 깊은 이해를 가진 국부론의 차이는 단순하게 바라봐도 누가 더 나은 사상인지는 판단할 수 있다고 바라봐집니다. 맞습니다 그 사상만 놓고 본다면 둘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관점이 다른 걸 인정한다면... 제 관점은 골백번 생각해도 맑스는 빡대가리가 맞습니다.
국지적 악행들도 결국 더 큰 범위와 장기간에서 보면 최선의 결과를 낳는데 일부를 이룬다는 관점이 굉장히 위험하게 이용될 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되어요. 오늘날 기후 위기나 극우의 득세 인종차별 등을 보아도, 매 현재의 부정의와 악행을 적극적으로 척결하려는 노력들은 헛된 것도 아니고 그러한 노력과 희생들이 쌓여 더 나은 세계가 귀결된 것인데, 마치 이런 국지적 악행들을 그냥 내버려 둬도 섭리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거라는 안일주의, 낙관주의로도 들리구요.. 인종 차별을 하는 집단이 있고 그것에 맞서 싸우는 집단이 있고 그 결과 좀 더 평등한 세계가 되었다고 칠 때 그 결과는 부정의를 척결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인데 섭리 같은 것으로 원인을 돌릴 수는 없을 듯해요. 그리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세계도 이대로 가도 계속될 지 의문스러운데 특권층은 그 모든 부정의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본주의는 해답을 줄 것이라고 결국에는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과 유사한 논리같아요. 그리고 스미스의 냉정한 관찰자도 의심스러운 것이 자기 검열의 역할을 하는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것에 불과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영상 잘 보았습니다.
@@nunkal00 그렇군요 네 저는 영상만 보고 나름대로 판단한지라 스미스의 저작을 읽어보지 못해서 잘 못 생각한 부분이 있나봅니다. 그런데 사익을 추구하되 무제약적 이기심을 경계한다면 분명 이기심에 대한 일종의 브레이크를 만들어 놓은 건데 오늘의 시장 논리를 보면 그런 배려적 존중적 관념이 잘 작동하지 않는 거 같아요. 아마도 그건 사람들이 국부론만 너무 열심히 읽고 도덕감정론은 잘 읽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
@@saem6486 시장 논리에서 배려적 존중적 관념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법과 원칙 하에 시장 논리를 펼치면 됩니다. 배려적 존중적 관념 자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그냥 내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추구하면 공적으로 이롭습니다. 국부론에서 법과 사회제도에 관해 논한 부분이 있지요. 생각하셨던 불법이라던지 악행이라던지 무제약적 이기심 같은 것들은 대부분 법의 미비한 부분이나 사회제도의 문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nunkal00 그렇군요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여하간 모두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득이 발생한다는 것이겠군요 그러나 시장의 작동만으로는 경제활동의 자유는 극대화 하되 부의 분배 등에서 사회적 불평등이나 부정의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법과 제도를 통해 제약을 걸고 평등을 보완하는 것이구요. 경제적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 맞지만, 그러나 그것이 경제 정의라는 가치와는 독립적인 것이겠지요. 그러한 가치는 법을 통해 고려하고 보완하고. 여하간 그런 것을 "순수하게" 경제적 논리에서만 본다면 고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구요.
@@saem6486 왜 자꾸 어렵게 생각하시려는지 잘 모르겠네요. 부의 분배는 오로지 개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물론 일부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한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법치와 자유경제체제하에서 누군가 부유하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부를 위해 노력했던 결과이고 그 반대는 노력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법은 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부의 분배에 관여하거나 사회적 불평등 같은 이상한 말에 관여하는 것이 더 사회에 해롭습니다.
정치도 저런 아담스미스적인 이기적인 마음들이 좋은정치를 할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정치가 썩은이유가 저런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무시하고 도덕적인 잣대에 너무 집중해요. 인간은 누구나 다 똑같은데요. 차라리 모두가 이기적으로 정확히 자기 이익에 맞게 뽑게 만들어야지. 국가를 위해 집단을 위해 한 정파를 위해 보수를 위해 진보를 위해 등등으로 이익을 남에게 위임하니 집값이 올라도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 우리 대통령님이. 노력하고 계신다고 !! 하는 개솔이가 줄고 더 좋은 정치가 나올거 같습니다.
마르크스가 왜 욕먹는지 궁금하세요? 맑스가 욕먹는건 세가지 이유가있습니다. 첫번째 케인즈, 프리드먼 하이에크 미헬스 모두가 지적했듯이 당연히 아무리 읽어도 현실과 맞지 않으니 욕을 먹는겁니다. 지금도 이윤율 경향저하와 노동가치론, 소득최저생계비설 같은거 믿으시나요? 이것들이 맞는다면 어째서 같은 노동을 탄생한 떡국은 저 마다 가격이 다르고,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이 0에 해당하는 비참한 삶을 영위하지 않고, 그놈의 자본의 유기적구성도가 증대됨으로 자본의 이윤이 저하되지않는걸까요? 왜 노동의 생산성은 증대되는걸까요? 학문은 누구 고전 믿고 따르는 훈구학도 종교도 아닙니다. 거의 200년된 한계혁명이전의 자본론을 무슨 성서마냥 따르는 경제학자가 없는건 당연한것이고 그의 실수가 욕을 불러오는건 당연한겁니다. 두번째로 무엇보다 그의 실수는 실제로 수천만을 죽이는데 일조했으니까요. 그의 실수를 받아먹은것들이 무럭무럭 자라 소련 북한 중국 등을 낳았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19~20세기 사회주의류의 운동들의 기원은 모두 맑스에 기원을 두고있죠. 맑스가 말한 유토피아의 주체를 누구로 해야하나에 따라서 부류가 달라진거 뿐입니다. 민족이냐 국가냐, 당이냐,군이냐,농민이냐, 조합이냐,생디카냐 하는걸로 갈라진거 뿐이에요. 그리고 이것들의 공통점은 너나없이 사람을 무더기로 죽였다는거죠. 셋 맑스자신이 인격적으로 파탄난 사람이라는거에요. 맑스는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팔아먹고 부르주아 흉내를 낸 사람이거든요. 물론 맑스가 공이 아예 없고 의미없는 인물인건 아닙니다 다만 맑스가 의미가 있는건 당시 고전학파와 독일 관념주의 의견을 합쳐 산업혁명초기 비참한 노동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것. 그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무슨 신줏단지같은게 아니에요 추신) 자본론이니 국부론이니 하는 고전을 읽는것보단 맨큐의 경제학이나 이준구의 경제학 원론을 읽는게 훨 세상보는데는 도움이 될겁니다.
@@njhok5360 그건 ㅇㅈ합니다. 제말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꽤 정확하게 지적했다는건 인정해줘야한다는 겁니다. 지금 자본주의는 여러 세계적인 공황동안 변신을 거듭해왔으니까요. 노동가치론은 솔직히 마르크스도 정확한 서술을 안해서요. 그리고 마르크스는 솔직히 철학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서용
@@김일성-d4c 어 자본론 저술시기라보면 동시기라 하기는 어렵지만 맑스생전으로 보면 더 정확하게 짚은 한계학파가 존재하죠. 그리고 이 한계주의를 바탕으로 케인스 프리드먼 마셜등이 쏟아져 나와 오늘날 정상과학의 기반이 된거고요. (맑스의 말 중 임금생존비설은 당시에도 깨졌습니다. 맑스 말년에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올라버렸거든요.) 베버가 말했듯이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잔재를 청산해나가고 과거의 학자는 욕을 먹습니다. 맑스도 그 예외는 될수없습니다. 오늘 날 맑스의 의미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자본주의 문제를 잘 '지적했다'가 아니라 그 당시 산업혁명 초창기의 문제점을 고전학파의 논리를 이용해 '지적하려고 노력하였다'가 맞을겁니다. 그리고 이 노력은 나름 그의 적대자에게도 존중받는 점입니다 (노동가치설을 애매하게 주장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요. 노동가치설이 없으면 자본가가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수탈했다는 맑스의 논리는 성립될수가 없어요. 맑스의 이론은 상품이 노동가치와 자본재를 통해 매겨지는데 그 노동가치에서 자본과 노동투입을 통해 들어간 생산비용을 제외한 그 나머지 잉여분을 노동자가 오로지 가져야하는데 "걸레짜듯 쥐어짜도 가치하나 못내놓는" 자본가가 수탈한다 거든요? 그런데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면 뭔수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맞다해요? 님은 마르크스 이론을 옹호하시려면 무조건 노동가치설은 맞다하셔야해요)
요즘은 사람들이 객관적이고 냉정한 관찰자보다는 분노에 가득 차고 화난 관찰자를 통해서 현상들을 보는 것 같아요. 이렇게 첫 관찰자부터가 화난 상태이니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람들의 여론도 점점 험악해지고요.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대어 계속해서 분노와 혐오가 확산되는 것 같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여론이 형성되고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옳게 생각했을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빼먹은 것 같습니다. 또한 요즘 세상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이타적 현상으로 귀결되는 소위 경제의 낙수효과가 극소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죠...... 비록 저는 이 영상만을 보고 이 댓글을 쓰지만, 결국 여러모로 스미스가 살던 18세기보다 더 험악한 세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맞는말씀이십니다. 나쁜일이 고쳐져야한다는 것은 알지만 요즘 너무 쉽게,자주 분노하는 분위기..
맞다고 생각함
스마트폰 영향으로 정보의 양은 이제 다 높은데
심리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물져..
혐오의 시대에 휩쓸리지말고 자기만의 배를 만들어 잘견디길 바랍니다 다들
요즘 사람들이 회가 많이 나있긴 하죠..
정보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독점이 줄어들었지만 과도한 양에 의해 압도당하는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구글서칭을 해보면 검색결과는 수백 수천 수만 .. 이지만
거기서도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개만 살펴보는것 역시 압도적인 양에 의해 압도당한것이죠
그렇다면 현대 정보사회에서는 의미있는 정보를 추려내는 능력이 대두되는데 이 능력을 기르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능력인으로 살아가는 필요조건입니다
이기적인게 나쁜게 아니라 어리석으면서 이기적인게 나쁜것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이기심을 부리다가 소탐대실을 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들을 보면 이해득실의 가치판단이 어리석다할 정도로 협소하고 멀리 보지 못해 문제를 일으키죠...
제가 예전에 했던 고민과 아담스미스의 생각이 너무나 비슷해서 놀랐어요.......예전에 집 앞마당에서 싸우는 고양이들에게 비비탄 권총을 우연히 겨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근데 저는 이유도 없이 망설여서 내가 왜 망설인것일까?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난 그 고양이들을 증오하는데 왜 방아쇠를 당기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하게되더군요. 그리고 왜 인간이 살아있는 타 대상에게 해코지하는 것에 주저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하게되었어요. 고민 끝에 인간의 자의식으로 인해 해코지 당할 타대상으로 부터 이입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는데 그러니까 제 마음은 사실 그 고양이들을 동감했다는 것이죠. 이 영상을 통해 전 확신을 얻은 것 같습니다.
보이지않는 손- 사익추구가 공익에 기여한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아담스미스입니다. 국부론을 경제학서로 보는 경향들이 있지만 저는 국부론을 정말 현실적인 철학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도덕감정론의 냉정한 관찰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와 비슷한거 같기도 하네요.
극공 냉정한 관찰자=초자아
요즘 영상은 웃음포인트도 많고 전보다 더 대중성을 띄게 된 것 같아요 ㅋㅋㅋㅋ 예전 영상도 쉽고 재밌다 생각했지만 더 발전됐네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ㅎㅎ
이기심은 인생이라는 차의 엔진이고 이타심은 브레이크가 아닐까요?
언제나 훌륭한 영상에 너무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소셜네트워크가 냉정한 관찰자라고 보기에는 부작용인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빠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관찰할 시간도 주지 않고 판단을 종용 당하기 때문이죠. 결국 관찰은 주관의 영역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셜 네트워크 여론은 성급한 판단을 부추겨 '야만으로 회기'하는 아주 적절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철학자이기도 했네요
오늘도 잘 듣고갑니다 좋은 영상 항상 감사합니다
초등학생인데 여기서 많은 뜻을 배워가는것 같아요. 앞으로도 영상 많이 올려주세요.
멋있다 나도 초등학생때 이런 거에 관심있었다면 인생이 바꼈을듯...
멋져요.
초등학생분이..? ㄷㄷ
크게 되실 분이네요 ㅎㅎ
역시 5분뚝딱선생님의 말씀은 귀에 쏙쏙 들어오고 너무 재밌어요~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살아가기
내면의 냉정한 관찰자는 슈퍼에고와 같은 것일까요?
이기적동기와 이타적 결과의 조화~★
김필영 박사님 건강하세요~
굉장히 멋있는 비디오 였어요. 제2의 심판이 중요하죠. 우리가 우리의 기준을 정해야죠.
얼마나 더 경제가 발전해야 모든사람이 행복해질수 있는걸까 이미 최고로 선한세상이라면 철학은 무엇을위해 필요한걸까
성장(국부론)과 분배(도덕감정론)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도 재밌었습니다. 낙수효과 얘기가 여기서부터 출발된건가요? 가난한 사람도 이기적인 행위의 결과로 물질적인 혜택은 받는 사회가 되긴했지만 안타깝게도 정서적 빈곤은 채워주진 못한거같습니다. 다음 영상도 기대할게요
감상 전 좋아요 !
아니 스미스요원의 보이지 않는 손 뭐옄ㅋㅋㅋㅋ
예전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편집이 왜케 재밌어졌나요?
1:34 보이지 않는 손(물리) 이런 개그 너무 좋네요 ㅋㅋ
ㅎㅎㅎ 시작부터 웃겼음 정마당 ㅋㅋ
안녕하세요 ^^
어리석은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이기심이나 이타심이나 그냥 섞여 사는 세상 그냥 살면 되는 거군요. 행복은 각자 챙겨야 될것 같군요.
영상 고맙습니다.
좋아해요 👍
그 인간이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의 최소 기준은 그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 하는 인간들이 모인 사회. 각자 개인 모두가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는 무엇이 나을지 불보듯 뻔하죠. 그런 차원에서 서구의 개인주의적 철학(개인 스스로 책임지는)과 동양의 집단주의적 철학(개인이 스스로 3자화 되 이타적으로 살아가는)은 역사를 통해 어느쪽이 옳았는지 이미 판가름 났죠. 동양의 이타주의? 를 맹목적으로 배격하자는건 아니지만 시비지심 없는 그저 어려서 배운대로 어린이 마음같은 이타심은 오히려 개인을 그리고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정치 뉴스를 봐도 좌익향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무책임 합니다. 저는 그것을 좌익 근본 이념이나 철학 자체가 개인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국가가 모든걸 책임 져줄테니 국민 여러분은 아무 걱정 마세요가 되버리는거죠. 에휴.
오호 제목부터 밑장 빼기! ㅎㅎ영상 고맙습니다 :)
같은걸 두고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흄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본능 중 이기심과 동정심에 주목했지만 회의주의로 빠진 흄과 반대로 낙관론을 가지고 시장경제 속의 보이지않는 손을 주장했습니다. [도덕감정론]이 강조하는 공감과 [국부론] 이 강조하는 이기심과 자기 이익은 서로 모순. 이기적 개인과 사회적 복리의 조화와 모순 문제를 학자들은 ‘애덤 스미스 문제’라 부른다.
이 문제는 어쩌면 앞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난문(難問)일지도 모른다. 다만 스미스의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은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의 다른 두 측면을 각기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기심, 또는 개인적 욕망을 완전히 제거한 이타심이 제대로, 혹은 얼마나 기능을 할수 있을까?" 하는게 요즘 제 의문입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란 개인의 욕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SNS 에 의한 타인의 시선은 도덕적 견제의 힘이 되지만, 때로는 개인을 억압하기도 하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도, 군중심리에 쏠려 패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SNS 는 도구일 뿐인 것 같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요즘엔 도덕, 법, 시장이 해야할 기능을 (때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지만) SNS 를 매개로한 군중이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건 한걸음 진보인지, 퇴보인지, 아니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제도의 부작용인지 애매할때도 많습니다.
참 쉽게 설명하심
눈이 저걸 언제 다 하냐 하면은
손은 거기 놔둬라 한답니다.
저의 어머님께서 하신 말
설명란은 어디에 있는거지요?? 더 참고해보고 싶은데요
요즘은 이런생각을 합니다 악이존재함으로 인해 역으로 선이 존재할수 있다는건 맞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걸까 다른 방법은 없었던걸까 라구요
뉴라이트가 버린 도덕성과 양심.....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물신주의자다.
여론의 한계, 혹은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 것 같아 몇 자 적습니다.
여론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여 만들어 진다는 것인데,
즉 상상의 냉정한 관찰자가 타인, 혹은 자신에 빙의하여 어떤 일어난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바탕으로 공감하느냐,
마느냐로 동감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여기서의 가정을 보면 그 가정 자체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의 냉정한 관찰자~ 그것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냉정한 관찰자이지 타인이 생각하는 냉정한 관찰자는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 감성, 경험,인지, 인식 등 모든 것이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냉정한 관찰자란 있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역지사지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이 말은 결국 여론도 그냥 많은 사람들의 느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론으로 많은 사람을 현혹하는 현 언론들에 침을 뱉으며,
또한 현혹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글 올립니다.
맞어요 여론이란게 뭔가요 정말. 인터넷 여론 따로, 실제로 대면해서 만나는 여론 따로, 그안에서도 일하면서 만나는 여론, 친분관계에서 만나는 여론, 미디에서 만나는 여론도 티비 뉴스에서 보는 여론 따로, 신문에서 보는 여론 따로. 각각의 여론이 따로 있어요.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게 개인의 이기적 동기를 인정하면 사회적으로 이타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논리적으로 말하면 사회의 이타적이지 못한, 이기적 결과들은 각 개인의 출발이 이타적 동기였다는 말씀???(물론 이타적 동기가 이타적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겠지만...통찰력없는 어리석은 권력자의 이타적 동기가 반드시 이타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유럽 속담이 떠오르는군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영상에서는 이기적 동기거 이타적 결과로 이어진다. 즉 이기적 동기는 이타적 결과의 충분조건이라는 것이지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결론은 섣부른 감이 있네요.
실제로 애덤스미스의 이기적 동기는 이타적 결과뿐만아니라 많은 이기적 결과를 낳았고, 그것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혹시 대학교 교수님이신가요? 강의가 참 재미있고 유익하네요
2:00 왜 신이 백인인가요?
국부론에선 이기주의? 도덕감정론에선 이타주의? 한마디로 개인들 모두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면 된다는 결론 아닐까요.
박사님 동감이 sympathy로 되어있는데 그 반대의 동정심은 empathy로 번역할수 있나요?
반대 아닌가요? 엠파씨가 공감
이기적 동기가 이타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은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 아닌가 하네요
사회질서를 공감만으론안되서
경제력과 법을 동시에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나온것이 국부론입니다
법관련은 쓰다가 포기
실례로 법이 많은 프랑스보다
간소한법이 있는 영국에서 살인이 덜일어나는건
의존하지않는 경제적독립이라고
본것이지요
요즘 lh사태를 보더라도
인간은 홉스식 법이 있어야합니다
따라서 사회질서에 대한
공감만으로 스미스가설명했다는건
일부분만 맞는이야기지요
감사합니다 잘보고있습니다~
공감합니다.
선생님이 애덤 스미스에 대해 분석한 자료에 공감하고 동감합니다.
여론이 어떤세력에의해 조작된다면 심각한문제 아닐까요?
헤겔 존버 한달 차
ㅋㅋㅋㅋㅋㅋㅋㅋok ok
헤겔은 가장 공격받기 쉬운 이론을 만들어냄. 역사철학의 시조
ㅎㅎㅎ
"잘 먹겠습니다"
1쓰려고했던말들이 이미 댓글중에 있네요ㅋㅋ
내면의 관찰자가 초자아!
2저는 이기심이 이타심에 포섭될수있다는 주장이 이기심이라는 악에 면죄부를 주는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못합니다
우선 강하게 이기심을 비판한 후에 아주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 좋은부분도 있다 라고 해야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쁜것을 나쁜것이라 부르지 못하게되어 홍길동이 된 심정입니다.
쓰다보니 악을통해서 선을 이룬다는 주장도 똑같네요...악은 악일뿐이지 뭔...
변신론은 변악론인것 같기도합니다
섞어서 흐리지좀마!
감사합니다.
마이크 좋아요~
9:51 아담 스미스는 어리석은 사람이 돈을 추구하면 그게 사회를 발전 시킬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 말을 후회할지도 모를 거 같은데요. 돈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과거 물질 경제에서는 어느정도 효용이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정보 경제에서는 너무나 큰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요(예를 들면 유튜브 안의 그 수많은 혐오와 가짜들(당연히 5분 뚝딱 철학은 제외한)).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라진 듯한 모습이죠.
선생님은 어떻게 직장과 학업을 병행할수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철학과 야간대학원이라도 찾는데 잘없네요..
(관련학과는, 동국대 특수대학원 불교학과 뿐)
개도국같이 인프라가 부실하고 세이의 법칙이 작동해 물건 찍으면 팔리는 경우라면 낙수효과가 먹히겠쥬ㅎㅎ
허나 현실은 선진국의 독재 지원, 정치 부패, 민족 간 이권 난립, 차별적 산업구조 등의 문제로 저 낙수효과조차 기대지 못하는 게 대부분..
무야~호
근데 아담스미스 말대로라면 너무 현명해도 안좋을 것 같아요. 2심 판결 법관님이 너무 엄하시면 살아가는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몸안에 선생님이 살고있는 기분이라고 해야되나 별 짓 없었는데 죄책감이 들면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냉철한 관찰자를 자기 자신의 양심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양심 또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규범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결국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크게 바라본다면, 반드시 신경증적인 증상을 유발하지 않고도 양심을 따르며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더.
왠지 교수님 수업하실 때 피피티 재밌게 만드실듯요 ㅋㅋ
지금 소위 PC라는 것이 유행하는데 과연 그 끝이 어찌될까요
이타석행위=어린이노동, 식민제국주의, 18시간 노동, 하루종일 일해도 빵하나 못사먹는 임금, 화학물질에 시달려 20대 초반에 죽는 사람들, 강제구휼소,... 참 이타적인 행위들이야. 아 마르크스 마렵다.
이분 재밌으시네 ㅋㅋㅋ 애덤스미스적인 이기적인 마음이 노동을 더 유연하고 좋게 만든거임.
인간의 욕구를 이해못하고 관리가 그 모든것을 할수 있다는 맑스 사상이 낳은 사상이. 지금의 북한 중국 러시아라는 괴물을 만든거지.
아담스미스를 읽어보시고 저런 말을 하세요. 아담스미스는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리고 법치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또 정치인들을 경멸했지요. 법과 제도의 문제를 인간이기심의 문제로 삼지마세요. 맑스같은 빡대가리랑 비교하는게 너무 한심하네요.
@@nunkal00 시원하노 진짜 맑스 빡대갈 ㅅㅋ 그 빡대갈 ㅅㅋ 덕에 남북이 갈라지고 지금의 중국이 탄생함.
역사상 가장 제일 개거품인 학자. 아니 제 일 ㅈ ㅂ ㅅ 쓰레기가 막스 ㅋㅋㅋㅋ
스미스, 마르크스 모두 위대한 사상가들인데 초딩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로보트가 더 세다고 우기는 것도 아니고 참 ㅋㅋㅋ
@@nollbo 그에 관해 몇가지 제 생각을 말하자면. 맑스의 공산주의사상의 인간 보편의 도덕과 선의 요구가 그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그 공산주의가 수천만명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맑스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팩트죠. 그에 반해 스미스의 사상은 인간의 자연 습성을 그저 관찰하고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됩니다. 시장이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연 습성이다. 중력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중력이라고 이름 붙여줬기 때문이지 우리가 중력을 만든 게 아니듯이 시장도 모여서 교환하려는 인간의 습성을 보고 시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자유시장경제체제 자본주의가 인간사회의 번영과 발전을 일으킨다는 것 20세기를 비약적으로 인간 번영의 길로 이끈 자본주의가 그것을 증명하죠. 만약 공산주의가 옳았다면 소련은 망하지 않았겠죠.
인간에 대한 기본 이해도 없이 아무렇게나 써재낀 자본론과 인간의 깊은 이해를 가진 국부론의 차이는 단순하게 바라봐도 누가 더 나은 사상인지는 판단할 수 있다고 바라봐집니다. 맞습니다 그 사상만 놓고 본다면 둘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관점이 다른 걸 인정한다면... 제 관점은 골백번 생각해도 맑스는 빡대가리가 맞습니다.
국지적 악행들도 결국 더 큰 범위와 장기간에서 보면 최선의 결과를 낳는데 일부를 이룬다는 관점이 굉장히 위험하게 이용될 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되어요. 오늘날 기후 위기나 극우의 득세 인종차별 등을 보아도, 매 현재의 부정의와 악행을 적극적으로 척결하려는 노력들은 헛된 것도 아니고 그러한 노력과 희생들이 쌓여 더 나은 세계가 귀결된 것인데, 마치 이런 국지적 악행들을 그냥 내버려 둬도 섭리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거라는 안일주의, 낙관주의로도 들리구요.. 인종 차별을 하는 집단이 있고 그것에 맞서 싸우는 집단이 있고 그 결과 좀 더 평등한 세계가 되었다고 칠 때 그 결과는 부정의를 척결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인데 섭리 같은 것으로 원인을 돌릴 수는 없을 듯해요. 그리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세계도 이대로 가도 계속될 지 의문스러운데 특권층은 그 모든 부정의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본주의는 해답을 줄 것이라고 결국에는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과 유사한 논리같아요.
그리고 스미스의 냉정한 관찰자도 의심스러운 것이 자기 검열의 역할을 하는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것에 불과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영상 잘 보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스미스의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무제약적인 이기심을 스미스는 단한번도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법을 지키는 것을 두고 시장에서 개인들끼리 개인들의 이익을 위한 자유로운 경쟁을 하는 것이 가장 이롭다는 것입니다.
@@nunkal00 그렇군요 네 저는 영상만 보고 나름대로 판단한지라 스미스의 저작을 읽어보지 못해서 잘 못 생각한 부분이 있나봅니다. 그런데 사익을 추구하되 무제약적 이기심을 경계한다면 분명 이기심에 대한 일종의 브레이크를 만들어 놓은 건데 오늘의 시장 논리를 보면 그런 배려적 존중적 관념이 잘 작동하지 않는 거 같아요. 아마도 그건 사람들이 국부론만 너무 열심히 읽고 도덕감정론은 잘 읽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
@@saem6486 시장 논리에서 배려적 존중적 관념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법과 원칙 하에 시장 논리를 펼치면 됩니다. 배려적 존중적 관념 자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그냥 내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추구하면 공적으로 이롭습니다. 국부론에서 법과 사회제도에 관해 논한 부분이 있지요. 생각하셨던 불법이라던지 악행이라던지 무제약적 이기심 같은 것들은 대부분 법의 미비한 부분이나 사회제도의 문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nunkal00 그렇군요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여하간 모두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득이 발생한다는 것이겠군요 그러나 시장의 작동만으로는 경제활동의 자유는 극대화 하되 부의 분배 등에서 사회적 불평등이나 부정의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법과 제도를 통해 제약을 걸고 평등을 보완하는 것이구요. 경제적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 맞지만, 그러나 그것이 경제 정의라는 가치와는 독립적인 것이겠지요. 그러한 가치는 법을 통해 고려하고 보완하고. 여하간 그런 것을 "순수하게" 경제적 논리에서만 본다면 고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구요.
@@saem6486 왜 자꾸 어렵게 생각하시려는지 잘 모르겠네요. 부의 분배는 오로지 개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물론 일부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한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법치와 자유경제체제하에서 누군가 부유하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부를 위해 노력했던 결과이고 그 반대는 노력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법은 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부의 분배에 관여하거나 사회적 불평등 같은 이상한 말에 관여하는 것이 더 사회에 해롭습니다.
ㅍㅎㅎㅎ 이번엔 메트릭스가 ㅋㅋㅋ
정치도 저런 아담스미스적인 이기적인 마음들이 좋은정치를 할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정치가 썩은이유가 저런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무시하고 도덕적인 잣대에 너무 집중해요. 인간은 누구나 다 똑같은데요. 차라리 모두가 이기적으로 정확히 자기 이익에 맞게 뽑게 만들어야지. 국가를 위해 집단을 위해 한 정파를 위해 보수를 위해 진보를 위해 등등으로 이익을 남에게 위임하니
집값이 올라도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 우리 대통령님이. 노력하고 계신다고 !! 하는 개솔이가 줄고 더 좋은 정치가 나올거 같습니다.
스미스는.급이.성인급이고.맑스는.애들급이네요.?
필요악
인간의 자정능력을 믿는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되고, 인간의 자정능력을 믿지 못하면 전체주의자가 되지요.
♥
?? : “손은 눈보다 빠르다.”
7:07 우리나라가 국뽕을 할수 밖에 없는 이유.
상상속의 관찰자는 냉정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건 엿장수맘대로 만들기 나름이다. 기껏 만든 관찰자가 악마일 수도 있는거다. 조두순이 상상해서 만든 냉정한 관찰자는 조두순이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모범시민이지만, 판사의 편파적인 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다고 판단한다.
싸패, 쏘패는 비정상...
마르크스가ㅡ자신이ㅡ노력한 가치를ㅡ정확히ㅡ돈으로ㅡ산정할수ㅡ있다고ㅡ자본론을ㅡ썻죠ㅡ더도덜도말고ㅡ노력한ㅡ만큼ㅡ어설퍼도ㅡ가치산정할ㅡ단초는ㅡ제공하죠ㅡ여기서부터ㅡ보이지ㅡ않는손ㅡㅡ가치산정을ㅡ들어가야ㅡ인식론의ㅡ오류를 벗어날수ㅡ있는 ㅡ질량처럼ㅡ경제적 상품의ㅡ가치는ㅡ불변하므로
ㅂㅇ
보이지ㅡ않는ㅡ손을ㅡ찾는게ㅡ인문학과ㅡ경제학ㅡ제일ㅡ과제라고ㅡ생각합니다 ㅡ엉터리ㅡ철학자ㅡ마르크스의ㅡ가치론은ㅡ경제학의ㅡ또는ㅡ철학의ㅡ데카르트적ㅡ전환이라고ㅡ생각됩니다ㅡ분배ㅡ목적이ㅡ이기적이라도ㅡ모든ㅡ노동은ㅡ선하고ㅡ결과인ㅡ돈은ㅡ일원까지ㅡ계산하고ㅡ자신의ㅡ노동은ㅡ촌각을ㅡ다투며ㅡ고통을ㅡ감내합니다
자린고비 남편의 돈에는 이타적 감정이 전혀 없어보인다.
^^
초중고 정부교육과정에서 국부론을 너무 겉핥기식으로 알려쥬며 자본주의를 왜곡 합니다.
한국의 부동산을 보면 애덤스미스가 통곡할듯 합니다
요즘 초중고 교육과정 보면 깜짝 놀랍겁니다 ㅋㅋㅋ 특히나 선생들 좌파교육이 얼마나 심각한지. 국사만 보더라도 반일은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나쁜것이 아니다!!
맑스가 왜 쓰레기 취급을 받는지 참
맑스 욕하는 사람치고 자본론 읽어본 사람은 본적 없음
이름값 달달하실듯ㅋㅋ 국부론은 읽어보셨는지?
@@nunkal00 읽어봤는데요
마르크스가 왜 욕먹는지 궁금하세요?
맑스가 욕먹는건 세가지 이유가있습니다. 첫번째 케인즈, 프리드먼 하이에크 미헬스 모두가 지적했듯이 당연히 아무리 읽어도 현실과 맞지 않으니 욕을 먹는겁니다. 지금도 이윤율 경향저하와 노동가치론, 소득최저생계비설 같은거 믿으시나요?
이것들이 맞는다면 어째서 같은 노동을 탄생한 떡국은 저 마다 가격이 다르고,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이 0에 해당하는 비참한 삶을 영위하지 않고, 그놈의 자본의 유기적구성도가 증대됨으로 자본의 이윤이 저하되지않는걸까요? 왜 노동의 생산성은 증대되는걸까요?
학문은 누구 고전 믿고 따르는 훈구학도 종교도 아닙니다. 거의 200년된 한계혁명이전의 자본론을 무슨 성서마냥 따르는 경제학자가 없는건 당연한것이고 그의 실수가 욕을 불러오는건 당연한겁니다.
두번째로 무엇보다 그의 실수는 실제로 수천만을 죽이는데 일조했으니까요.
그의 실수를 받아먹은것들이 무럭무럭 자라 소련 북한 중국 등을 낳았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19~20세기 사회주의류의 운동들의 기원은 모두 맑스에 기원을 두고있죠.
맑스가 말한 유토피아의 주체를 누구로 해야하나에 따라서 부류가 달라진거 뿐입니다.
민족이냐 국가냐, 당이냐,군이냐,농민이냐, 조합이냐,생디카냐 하는걸로 갈라진거 뿐이에요. 그리고 이것들의 공통점은 너나없이 사람을 무더기로 죽였다는거죠.
셋 맑스자신이 인격적으로 파탄난 사람이라는거에요. 맑스는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팔아먹고 부르주아 흉내를 낸 사람이거든요.
물론 맑스가 공이 아예 없고 의미없는 인물인건 아닙니다 다만 맑스가 의미가 있는건 당시 고전학파와 독일 관념주의 의견을 합쳐 산업혁명초기 비참한 노동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것. 그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무슨 신줏단지같은게 아니에요
추신)
자본론이니 국부론이니 하는 고전을 읽는것보단 맨큐의 경제학이나 이준구의 경제학 원론을 읽는게 훨 세상보는데는 도움이 될겁니다.
@@njhok5360 그건 ㅇㅈ합니다. 제말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꽤 정확하게 지적했다는건 인정해줘야한다는 겁니다.
지금 자본주의는 여러 세계적인 공황동안 변신을 거듭해왔으니까요.
노동가치론은 솔직히 마르크스도 정확한 서술을 안해서요.
그리고 마르크스는 솔직히 철학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서용
@@김일성-d4c 어 자본론 저술시기라보면 동시기라 하기는 어렵지만 맑스생전으로 보면 더 정확하게 짚은 한계학파가 존재하죠. 그리고 이 한계주의를 바탕으로 케인스 프리드먼 마셜등이 쏟아져 나와 오늘날 정상과학의 기반이 된거고요.
(맑스의 말 중 임금생존비설은 당시에도 깨졌습니다. 맑스 말년에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올라버렸거든요.)
베버가 말했듯이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잔재를 청산해나가고 과거의 학자는 욕을 먹습니다. 맑스도 그 예외는 될수없습니다.
오늘 날 맑스의 의미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자본주의 문제를 잘 '지적했다'가 아니라 그 당시 산업혁명 초창기의 문제점을 고전학파의 논리를 이용해 '지적하려고 노력하였다'가 맞을겁니다.
그리고 이 노력은 나름 그의 적대자에게도 존중받는 점입니다
(노동가치설을 애매하게 주장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요. 노동가치설이 없으면 자본가가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수탈했다는 맑스의 논리는 성립될수가 없어요. 맑스의 이론은 상품이 노동가치와 자본재를 통해 매겨지는데 그 노동가치에서 자본과 노동투입을 통해 들어간 생산비용을 제외한 그 나머지 잉여분을 노동자가 오로지 가져야하는데 "걸레짜듯 쥐어짜도 가치하나 못내놓는" 자본가가 수탈한다 거든요? 그런데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면 뭔수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맞다해요? 님은 마르크스 이론을 옹호하시려면 무조건 노동가치설은 맞다하셔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