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는 은과 서주시대까지는 산동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작게는 제나라, 넓게는 공자의 노나라도 포함됩니다. 공자가 가장 존경한다는 주공이 노나라를 분봉해서 받았고 제나라는 강상이 분봉받은 땅이죠. 그러다가 중국의 중원이 확장되면서 동이는 만주와 한반도 왜까지 포함되는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중국 학자 부사년은 이하동서설을 통해 중국에는 2개의 문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왕조를 건국한 화하족의 문명이고 나머지 하나는 상왕조를 건국한 동이족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주체를 2개로 쪼갰습니다. 하지만 화하족은 상왕조가 건국된 이후에 형성된 종족으로 산서성 남부 지역의 하족을 품은 중원 동부 지역의 동이족이 원류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원 동부 지역 사람인 순임금이 동이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왕조의 영토는 중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500년 넘게 상왕조는 중화였고, 상왕조의 영토 밖 사람들은 이족이라 기록되었습니다. 노예제 국가였던 상왕조가 동쪽 동이와 많은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은 갑골문에 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왕조를 거쳐 중국의 전국시대 사람인 맹자마저도 이족과 어울리는 제자에게 이족으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다는 충고를 하였는 사실이 사서인 맹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맹자는 이족과 구분하여 동북방 맥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기장 농사를 짓고 세금을 적게 걷는다고... 맹자가 기록한 맥이 요하문명을 창출한 예맥족입니다. 맹자 이후 진한시기에 사방의 이족이 화하족에 동화되면서 한족이 형성되었고, 예맥이 동이라는 기록은 모두 한족이 형성된 이후에 남겨진 기록들이지 화하족이 남긴 기록이 아닙니다. 한족이 형성되어 중국본토에 더이상 동이라 칭할 대상이 없자 그 대상이 예맥족 등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것이 화이사상입니다. 중국인이 되면 화의 일원이 되는거고 중국인이 아니면 모두 이라는...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의 경계는 [고조선 패수]입니다. [고조선 패수]는 대요수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합니다. [민족사학]과 [강단사학]은 고대사의 이론체계부터 틀렸습니다. 7권의 저서로 중국이 왜곡한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바로잡았습니다. 요하문명 자체가 단군조선문명입니다.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저를 응원해 주십시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하상주는 승계되지 못한 석기 청동기 고대사를 뒤섞은 소설이고, 철기 역사시대는 전국시대부터 시작됩니다. 진한이 통합한 동이는 산동성 등 서해 서부 해안에 국한되지요. 그후엔 발해만 연안과 서해 동부, 즉 한반도인을 동이로 불렀습니다. 통합되지 않은 동쪽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시대에 따라 지칭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동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임금의 하족이 중화였을 때는 순임금마저 동이였고 주문왕마저 서이였으니까요. 중화가 누구냐에 따라 동이의 대상이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만 중화의 힘이 강해질수록 동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업신여김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자와 그의 후손인 공빈은 동방의 예의지국인 군자국, 대인국에서 살고싶다고 하였죠.. 공자는 화하는 주나라가 쇠퇴한 이후 문화와 예법이 사라졌으나 동이는 그 에법이 살아있다고 하였어요.. 연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대인국(북부여)의 사신을 보고 공빈은 대인의 기품이 있다고 말하였죠.. 중국 역대 최고의 성인중 한명이었던 공자가 흠모하였던 나라가 군자국(진조선, 단군조선)이었습니다
동이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조금 길더라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대부여,진조선,진한)을 이어받은 나라였고 동일 지역에 있었으므로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만주의 북부여도 조선이라 본것이다... 발해만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유민들을 모아 쇠퇴해가는 북부여를 대신하여 동명국을 세워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고두막한이 한사군을 몰아내어 얼마못가 한사군은 한나라와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된다... 낙랑 지역에 살던 조선유민들은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최씨의 낙랑국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단군 해우루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갈 것을 요구한다... 고두막한은 자신을 북부여가 멸망시킨 진조선(대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며 무력에 의한 시위와 더불어 단군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해우루가 얼마후에 죽고 동생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고두막한은 동명국을 동명부여, 홀본부여라 칭하고 단군을 계승한다...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미혼으로 임신을 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한반도 남부로 가서 박혁거세를 낳고 혁거세는 사로 6촌의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어린나이에 신라의 왕이 된다... 혁거세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천제 단군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기인한 것이며 박혁거세의 왕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또는 대부족장의 호칭인 가한(거서간)이라고 칭하게 된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고주몽과 재혼한다... 고주몽은 정략결혼으로 아들이 없는 고무서의 홀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며 어렵지 않게 나라를 세우게 되고 자신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홀본부여의 정통성을 버리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세운다 (사생아인 고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리(고죽)국의 가한이었던 고모수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인 고주몽은 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으며 단군조선, 진조선, 대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한 홀본부여는 고무서 단군에서 끊어지게 되고 소서노는 홀본부여의 정통을 잇고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가 살다가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우게 된다... 후에 백제는 홀본부여를 이은 남부여를 칭한다... 백제의 왕들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 기록이 있다... 5호16국 혼란기에 백제는 요서지역을 경략하여 차지하게 되는데 그곳이 자신들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요서지역 패대의 땅은 지금의 난하 서쪽 중국의 수도권지역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두고자 홀본부여를 지우고 북부여를 잇고자 하였다...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홀본부여가 망하게 되자 신라 혁거세의 손자 3대왕 유리는 가한, 차차웅의 칭호를 버리고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을 왕호로 삼는다...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예맥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가 되었으나 홀본부여와 북부여라는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역사적 혼란이 발생한다... 훗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역사에 무지한 인간이므로 이런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부식은 동명성왕 고두막한과 고구려 고주몽을 동일 인물인 것으로 왜곡하였다... 신라는 고조선 유민이 나라를 세우고 천제 단군(밝은임금)의 제후국인 가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임금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시기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원군을 청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속국, 제후국으로 삼고 왜를 물리쳤다... 내물왕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받들어 가한(마립간)의 칭호를 다시 사용한다... 내물왕 이후 신라는 1백년 이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간섭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내부적으로 골품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으로 김씨 왕위세습을 유지한다... 그후 고구려가 왕권분쟁으로 쇠퇴함에 따라 신라는 지증왕에 이르러 마립간 칭호를 버리고 '왕'을 칭한다... ... 이로서 만주와 발해만, 한반도의 동이가 세운 국가와 구성원들은 모두 예맥족이 정통이었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과 북부여, 홀본부여 등 만주, 한반도의 수십개 크고 작은 열국들은 모두 예맥이 지배층이요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후 중국 사료에는 동쪽의 이민족을 모두 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예맥이다
대강 이야기 들어보니, 동이를 이스턴 바바리안이라고 부르는건, 욕같은 뜻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것 같은데, 단어의 논리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난 고대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통상, 집단 비하는 그 집단이 우리에게 적대적이면서 동시에 우리보다 우월하던가, 또는 적어도 우리와 거의 대등한 수준인 경우에 발생한다. 예컨데, 대한민국의 국력이 북한과 크게 차이 안나던 70년대 북한은 정말 위협의 존재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반공사상도 매우 투철했다. 이때 빨갱이는 극혐의 단어로 쓰였다. 어디 성폭행이라도 하면, '그놈 그거. 양반인줄 알았는데, 빨갱이였구만,, ' 이런 식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러다 90년대가 넘어가면서, 경제력이 넘사벽으로 벌어지게되자 북한은 그냥 가난한 병신이라는 생각이 대중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오히려 빨갱이라는 단어는 혐오의 뜻으로 사용되진 않는다. 반대로, 80년대에 짱깨 라는 단어는 ... 중국인을 희화하 하는 단어였지, 혐오의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이 넘어서 중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현재에는 짱깨가 혐오의 뜻도 포함되고 있다. 예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일것이다. 동이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중국 중심지역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시기에는 욕처럼 쓰였고 위협이 안되었을 시기에는 욕으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생각해보면, 이스턴 바바리안이라는게 적절한 비유라고 볼수도 있다. 왜냐하면 서양인에게 바바리안이라는 단어는 문명이 낮다는 뜻도 있지만, 바바리안 (고트족, 훈족, 게르만족 등)에게 멸망한 고대 로마제국을 연상케하기도 한다. 로마가 비하한 바바리안도, 사실 자신들을 멸망시킬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걸 알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본다. 특정시기에 동이는 중화와 패권을 놓고 싸울만했으니, 중화 입장에선 동이를 극혐했던 경우가 있었던거라면 이스턴 바바리안은 그렇게 틀린 번역이 아니라고 본다. * 별도로 중화가 동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쓴 적은 없을거라 본다. 개인차원에서 동이를 숭배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중국 자체가 동이를 숭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문명을 보면, 대부분 자신들의 조상들을 숭배하고 우러러보는게 일반적이다. 이것도 ,,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권력 정당성을 유지하기위해 '아따 우리 조상이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지라. 그러니까 그 대단하신 분의 후손인 나를 우러르고, 내가 하라는대로 좀 해' 이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죽은 사람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가져간 경우는 현대까지도 비일비재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권력의 중심에 있지도 못했지만, 노무현이 죽고나서야,,, 그 후광을 통해 지지율을 빨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세력을 숭배하는 경우는, 아직까지 나는 본 기억이 없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못살던 시절에도, 미국같은 선진국을 빨아본 시기는 없다. 그들의 잘 정비된 인프라, 정치제도, 금권력, 모든걸 부러워하면서도, 대한민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님 짱짱맨이라고 말한적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미국같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경우는 수두룩했을 것이다. 공자? 맹자? 뭐 그런 양반들이 동이가 부럽다라고 한것도 그런 경우일것이다.
중화문명에서 동이가 동쪽의 오랑캐(물론 오랑캐도 타민족 명인 우량카이를 음차한 것이라서 그들에겐 실례죠 실제로 우량카이족은 현재도 실제 하니깐) 라고 한 이유는 화이사상에서 온 구분이고 역사상 중국뿐 아니라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 그리스등 고대에 중심 문명권이 된 곳에선 주변 민족을 蠻족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표현 방식이고 또한 문헌상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민족이 고대 동쪽오랑캐라고 한 것은 중국의 고 문헌에 나온 것이며 고대사에서 기록된 문헌으로 기록된 것을 따라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과거 게르마니아 켈트 로르드을 바바리안이라고 한다고 해도 중유럽이나 북유럽인들인 문화적으로 열등감을 가지진 않습니다. 중국의 화이사상에 대한해서 비판한다면 당연하지만 고대 얘맥이나 숙신 말갈들이 오랑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화이사상이 아닌 오로시 한민족으로 연구한다고 해도 예 맥족의 음차는 중국어 한자어로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서융, 북적, 동이, 남만은 고대 동아시아의 중화권에서 바라본 이민족 말하며 그들 스스로 어떻게 불렸는지 기록이 없다고 한다면 문헌으로 오래된 기록을 근거로 하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스스로 오랑캐가 아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고대 문헌의 기록이 없어지진 않으니...
[민족사학]이 대륙삼국본토설을 주장하면 이해가 되십니까?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의 얘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상반된 두 이론이 공존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륙삼국본토설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의 핵심은 '단군조선과 계승국인 북부여의 중심지는 송화강 유역이고, 그 남쪽에 고구려가 다시 그 남쪽에 백제와 신라가 태동한 후삼한이 위치한다'입니다. '단군조선(전삼한)은 영토가 거대했던 선진 문명이었지만 동만주와 한반도로 축소되었고, 고려서경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었다'입니다. 따라서 [민족사학]과 [강단사학]은 고려서경과 삼한에 관해서는 큰 차이가 없었고, 단군조선의 중심지를 두고 [동만주사관]과 [반도사관]으로 나누어졌을 뿐입니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오늘은 큰 오류가 담긴 영상이었습니다. 후한 시기부터 동이의 의미는 동쪽 오랑캐가 맞습니다. 설문해자를 근거로 동이의 의미가 달랐다고 하셨는데 맞는 얘기이지만 시대별로 동이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셨습니다. 크게 3가지의 의미의 동이가 있습니다. 1.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인 상왕조를 건국한 [하왕조의 동이족] 2. 상왕조를 건국한 [하왕조의 동이족]과 적대 관계였던 산동반도 및 안휘성 일대의 이족 3. 후한 이후 중국 본토 동쪽에 위치한 대만, 필리핀, 일본 열도, 한반도 및 만주 사람들을 통칭하는 동이 고구려는 중국의 동이전에 반발하여 자신들은 동이가 아니고 신라가 동이라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겼고, 일본도 자신들은 동이가 아니고 동북쪽 아이누족이 동이라 기록했습니다. 제발 동이족과 한민족이 동족이라는 가짜 역사는 퍼뜨리지 마십시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jipark_2373예의가 없으신 분이네요. 인신공격성 말언은 자제해 주십시오. 후한 시기 이후 동아 지역에 필리핀과 대만 오키나와 일본 열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중국의 정사서에 의하면 동이 중 으뜸은 오나라를 시조로 인식한 왜입니다. 혹시 왜가 거주하던 곳이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 일본 열도, 한반도 남부 지역인 것을 부정하셔서 이런 반응을 보이시나요? 아니면 만주족의 뿌리인 읍루도 동이에 포함되는 걸 부정하시는 건가요? 후한 시기 이후의 동이는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중국본토 동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통칭하는 일반명사입니다. [민족사학] 진영이 하도 가짜 역사로 중국인과 한국인을 동일시하는 논리를 펴놔서 동북아고대사정립 5에 이에 관한 논지를 폈습니다. 기회가 있으시면 읽어봐 주십시오. 진짜 역사를 밝히는데 일조해 주십시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우리는 저사람을 저이라고 부른다. 그사람을 그이라고 한다. 또는 저사람을 저자(저놈)이라고 한다. 그자(그놈)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동이는 그냥 동쪽(땅)의 사람들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역사적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많다. 이는 그냥 음차문자였을 뿐이다. 신라도 신의나라 즉 신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새로운 나라가 아니였던 것이다. 신라의 신도 그냥 음차문자였을 뿐이다. 모든 것을 표의문자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오류를 범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중국을 포함한 조선과 일본 몽골의 역사까지도 남송 명과 조선 청나라 시대에 유생들에 의해 아주 광범위한 역사 조작과 왜곡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고 세상을 평정하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중국의 거의 모든 사서들은 유학자들에 의해 재간행되었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우리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도 60년동안이나 쓰여지면서 광범위한 한국의 고대사가 왜곡되었다. 조선시대에 한국의 천문 지리 역서 등 고대한국의 서책들이 조선의 혁명세력(유생)들에 의해 이러한 고대 서책들을 신고하고 반납하지 않는 자들은 역모죄에 해당한다는 포고령까지 반포되면서 수거되어 불에 타 없어졌다. 명나라의 역사는 청나라에 의해서 95년동안이나 쓰여졌다. 아마도 동아시아 역사는 유생들이 본격적으로 집권하기 시작한 남송 시기 이후부터 본격적인 역사조작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중국의 고대 역사들은 원본은 거의 불에 태워지거나 사라졌고 송대 이후에 재간행된 역사서들만 거의 대부분 남아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와 현대에 와서 일부 먹물들에 의해 이런 경향은 더 짙이지고 있다. 동아시아의 고대 핵심적인 역사는 고대 조선은 물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고대 한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송대 이후부터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동아시아 고대 역사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그 이전의 원본 역사서들이 일본의 황궁 서고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최근 우리는 알게 되었고, 그 필사본의 일부도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진실을 밝히는 역사 복원이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아주 힘든 일이 될 것이다.
한국어의 '이'가 사람이란 뜻인데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쓰는 민족이 한국인 이외에 어디가 있나요.. 중국인의 관점에서 동이를 오랑캐로 본 시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사료에도 동이를 중국 동쪽의 이민족으로 기록하고 있을뿐이죠.. 오랑캐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고대로부터 '이'는 사람이란 의미의 한국어이고 중국 동쪽의 농경민 예맥족을 동이라고 했죠.. 우리 사료에도 당연히 우리 스스로를 동이라 칭하고 예맥의 후손이라 했어요.. 억지스런 주장은 하지말기 바랍니다
@@jipark_2373동이의 이 서융의 융 남만의 만 북적의 적 전부 다 오랑캐라는 뜻의 한자인데 동이의 '이'만 한자가 아닌 순우리말이다? 뭘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니들은 도대체 동이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임?그냥 중국에서 부르던 사방의 오랑캐 중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일 뿐인데
오랑캐는 옳은칸 오른카이로 판단됨 오른 손은 항상 왼쪽으로 향하고 천기를 받는 순방향으로 시계의 반대방향을 오른 방향이라 하고 왼 손은 항상 오른 쪽을 향하고 천기의 역방향 지기의 순방향으로 시계방향을 완방향이라 하며 남자는 순방향 시계 반대방향 여자는 역방향 시계방향이 천기 순리의 원칙이다.
오랑케는 조선시대에나 등장하는 명과 조선사이의 올량합으로 대표되는 부족들을 의미하고 이들은 명과 조선사이에서 골치아픈 존재로, 그 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로 선진유학이 아닌 주자학중심의 소중화 유교집단의 언어이다. 이를 파자하면 큰대, 활궁의 의미가 중심이며 처음에는 멸시의 의미가 없었지만 정치체계가 종교교조주의 언어로 획일화 되는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똑같다. 바바리언은 원래 로마인관점에서 언어가 이해되지않고 단순히 그 음성이 bar~bar~ 로 들리는 북방 타족을 뜻이며 전쟁을 통해 멸시의 언어로 쓰인것은 언어의 역사성에 비추어 당연한 것이다. 분명한것은 하화족이 한자를 최초로 만든집단이 아니라는것이며 내가궁금한것은 동북아시아인들이 아프리카이후 홍산이후 한반도와 일본으로 인류가 이동하며 어떤 이유로 이동이발생했으로 어떤 문화와 기술을 전파했냐는 것이다. 기후 환경 전쟁과 무역이 당연히 그 중심이 되는데 전쟁으로 변화된 언어의 사회성때문에 역사연구를 방해한다는것이 안타깝다.
어딜 가든 한국의 역사학계가 원문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게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남
초월번역 지리죠 ㅎㅎㅎ 내용이 뭔가 이상해서 원문 찾아보면 말도안되는 지역이 막 나오고 한자도 다르고 ㅎㅎㅎ
일제 36년 이란 시간이
나라의 정신을 이토록 왜곡시키고
망쳐놓고 우리끼리 싸움을 붙여놨는데.
지금 정신 차려야 된다.
나라를 잃었던 36년간 모든것을 도둑질 당했던것이다....
동이는 은과 서주시대까지는 산동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작게는 제나라, 넓게는 공자의 노나라도 포함됩니다. 공자가 가장 존경한다는 주공이 노나라를 분봉해서 받았고 제나라는 강상이 분봉받은 땅이죠. 그러다가 중국의 중원이 확장되면서 동이는 만주와 한반도 왜까지 포함되는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궁금한 게 그 당시 산동 반도에 살던 사람과 한족은 다른 종족인가요? 풍속이 꽤 다른 것 같던데요.
@@choichoimj 비유하자면 고구려와 말갈 정도 아닐까요
@@choichoimj 산동반도 일대에 살던 이족이 서쪽 화하족에 융합되었습니다.
따라서 산동반도 일대에 살던 두 번째로 동이족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한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공자도 동이족을 흠모했습니다.예가 동이에서 나온다했습니다.유교는 동이족이 가진 예를 집대성한것 아닐까 생각듭니다.
중국 학자 부사년은 이하동서설을 통해 중국에는 2개의 문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왕조를 건국한 화하족의 문명이고 나머지 하나는 상왕조를 건국한 동이족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주체를 2개로 쪼갰습니다.
하지만 화하족은 상왕조가 건국된 이후에 형성된 종족으로 산서성 남부 지역의 하족을 품은 중원 동부 지역의 동이족이 원류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원 동부 지역 사람인 순임금이 동이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왕조의 영토는 중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500년 넘게 상왕조는 중화였고, 상왕조의 영토 밖 사람들은 이족이라 기록되었습니다.
노예제 국가였던 상왕조가 동쪽 동이와 많은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은 갑골문에 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왕조를 거쳐 중국의 전국시대 사람인 맹자마저도 이족과 어울리는 제자에게 이족으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다는 충고를 하였는 사실이 사서인 맹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맹자는 이족과 구분하여 동북방 맥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기장 농사를 짓고 세금을 적게 걷는다고...
맹자가 기록한 맥이 요하문명을 창출한 예맥족입니다.
맹자 이후 진한시기에 사방의 이족이 화하족에 동화되면서 한족이 형성되었고, 예맥이 동이라는 기록은 모두 한족이 형성된 이후에 남겨진 기록들이지 화하족이 남긴 기록이 아닙니다.
한족이 형성되어 중국본토에 더이상 동이라 칭할 대상이 없자 그 대상이 예맥족 등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것이 화이사상입니다.
중국인이 되면 화의 일원이 되는거고 중국인이 아니면 모두 이라는...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의 경계는 [고조선 패수]입니다.
[고조선 패수]는 대요수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합니다.
[민족사학]과 [강단사학]은 고대사의 이론체계부터 틀렸습니다.
7권의 저서로 중국이 왜곡한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바로잡았습니다.
요하문명 자체가 단군조선문명입니다.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저를 응원해 주십시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존경합니다.
이기백은 대표적 식민사학잔데 ...
이기백은 이병도의 후예로 식민사학자일 따름이죠.
동이는 동쪽에 큰 활을 가진 민족이란 뜻입니다.오랑케하고는 전혀 상관없어요
설문해자만 봐도 夷는 좋은 뜻으로 가득차있죠...
감사합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하상주는 승계되지 못한 석기 청동기 고대사를 뒤섞은 소설이고, 철기 역사시대는 전국시대부터 시작됩니다. 진한이 통합한 동이는 산동성 등 서해 서부 해안에 국한되지요. 그후엔 발해만 연안과 서해 동부, 즉 한반도인을 동이로 불렀습니다. 통합되지 않은 동쪽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시대에 따라 지칭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나라에는 역적놈들이 참 많음.
선진시대 동이와
한 이후의 동이가 같은 개념일까?
夷는 이민족 요새로치면 요 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진제국 한제국 시대에 대체로 북동 동 남동쪽에 사는 외국인을 당대에 표기한 한자인 것 같습니다 .
3개월전에 올라온 영상이네요 좋은 영상 여러개 잘보았습니다. 근대 역사관은 학교에서 배운대로 말씀하시네요 책보고님 유툽 동영상 좀 보시고 역사의 시야를 좀 더 넓히시면 정말 좋은 영상이 될듯 합니다
나침반의 방위 와 고대 사서의 방위는 차이가 있어요
중국 사서의 동쪽 = 나침반 동남쪽, 한국 고려사에서 개성의 동쪽 = 나침반 동남쪽의 경주 동경
동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임금의 하족이 중화였을 때는 순임금마저 동이였고 주문왕마저 서이였으니까요.
중화가 누구냐에 따라 동이의 대상이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만 중화의 힘이 강해질수록 동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업신여김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자와 그의 후손인 공빈은 동방의 예의지국인 군자국, 대인국에서 살고싶다고 하였죠.. 공자는 화하는 주나라가 쇠퇴한 이후 문화와 예법이 사라졌으나 동이는 그 에법이 살아있다고 하였어요.. 연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대인국(북부여)의 사신을 보고 공빈은 대인의 기품이 있다고 말하였죠.. 중국 역대 최고의 성인중 한명이었던 공자가 흠모하였던 나라가 군자국(진조선, 단군조선)이었습니다
다 필요없고 이를 파자해보면 활궁에 큰대자임
동이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조금 길더라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대부여,진조선,진한)을 이어받은 나라였고 동일 지역에 있었으므로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만주의 북부여도 조선이라 본것이다... 발해만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유민들을 모아 쇠퇴해가는 북부여를 대신하여 동명국을 세워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고두막한이 한사군을 몰아내어 얼마못가 한사군은 한나라와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된다... 낙랑 지역에 살던 조선유민들은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최씨의 낙랑국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단군 해우루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갈 것을 요구한다... 고두막한은 자신을 북부여가 멸망시킨 진조선(대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며 무력에 의한 시위와 더불어 단군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해우루가 얼마후에 죽고 동생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고두막한은 동명국을 동명부여, 홀본부여라 칭하고 단군을 계승한다...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미혼으로 임신을 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한반도 남부로 가서 박혁거세를 낳고 혁거세는 사로 6촌의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어린나이에 신라의 왕이 된다... 혁거세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천제 단군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기인한 것이며 박혁거세의 왕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또는 대부족장의 호칭인 가한(거서간)이라고 칭하게 된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고주몽과 재혼한다... 고주몽은 정략결혼으로 아들이 없는 고무서의 홀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며 어렵지 않게 나라를 세우게 되고 자신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홀본부여의 정통성을 버리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세운다 (사생아인 고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리(고죽)국의 가한이었던 고모수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인 고주몽은 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으며 단군조선, 진조선, 대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한 홀본부여는 고무서 단군에서 끊어지게 되고 소서노는 홀본부여의 정통을 잇고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가 살다가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우게 된다... 후에 백제는 홀본부여를 이은 남부여를 칭한다... 백제의 왕들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 기록이 있다... 5호16국 혼란기에 백제는 요서지역을 경략하여 차지하게 되는데 그곳이 자신들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요서지역 패대의 땅은 지금의 난하 서쪽 중국의 수도권지역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두고자 홀본부여를 지우고 북부여를 잇고자 하였다...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홀본부여가 망하게 되자 신라 혁거세의 손자 3대왕 유리는 가한, 차차웅의 칭호를 버리고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을 왕호로 삼는다...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예맥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가 되었으나 홀본부여와 북부여라는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역사적 혼란이 발생한다... 훗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역사에 무지한 인간이므로 이런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부식은 동명성왕 고두막한과 고구려 고주몽을 동일 인물인 것으로 왜곡하였다... 신라는 고조선 유민이 나라를 세우고 천제 단군(밝은임금)의 제후국인 가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임금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시기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원군을 청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속국, 제후국으로 삼고 왜를 물리쳤다... 내물왕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받들어 가한(마립간)의 칭호를 다시 사용한다... 내물왕 이후 신라는 1백년 이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간섭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내부적으로 골품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으로 김씨 왕위세습을 유지한다... 그후 고구려가 왕권분쟁으로 쇠퇴함에 따라 신라는 지증왕에 이르러 마립간 칭호를 버리고 '왕'을 칭한다... ... 이로서 만주와 발해만, 한반도의 동이가 세운 국가와 구성원들은 모두 예맥족이 정통이었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과 북부여, 홀본부여 등 만주, 한반도의 수십개 크고 작은 열국들은 모두 예맥이 지배층이요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후 중국 사료에는 동쪽의 이민족을 모두 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예맥이다
이 는 사람이라는 뜻의 일반명사 고,
세계의 많은 나라의 민족명이 원래는 그냥 사람 이라는 일반명사에서 따온거죠.
또한, 우리 에서 리 도 사람 이란 뜻. 이=리
우리들이 사는 곳이 이곳, 여기 . 이=여=리=려 . 구이, 구리, 구려, 고려 가 다 같은소리 라는거죠.
벽속의 빈틈님 제 소견으로는 댓글창을 아예 닫아 버리시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댓글 상태 보고 오해 받으실것 같네요.
😊👍🏻
대강 이야기 들어보니, 동이를 이스턴 바바리안이라고 부르는건, 욕같은 뜻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것 같은데,
단어의 논리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난 고대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통상, 집단 비하는 그 집단이 우리에게 적대적이면서
동시에 우리보다 우월하던가, 또는 적어도 우리와 거의 대등한 수준인 경우에 발생한다.
예컨데, 대한민국의 국력이 북한과 크게 차이 안나던 70년대 북한은 정말 위협의 존재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반공사상도 매우 투철했다.
이때 빨갱이는 극혐의 단어로 쓰였다. 어디 성폭행이라도 하면, '그놈 그거. 양반인줄 알았는데, 빨갱이였구만,, ' 이런 식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러다 90년대가 넘어가면서, 경제력이 넘사벽으로 벌어지게되자
북한은 그냥 가난한 병신이라는 생각이 대중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오히려 빨갱이라는 단어는 혐오의 뜻으로 사용되진 않는다.
반대로, 80년대에 짱깨 라는 단어는 ... 중국인을 희화하 하는 단어였지, 혐오의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이 넘어서 중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현재에는 짱깨가 혐오의 뜻도 포함되고 있다.
예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일것이다.
동이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중국 중심지역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시기에는 욕처럼 쓰였고
위협이 안되었을 시기에는 욕으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생각해보면, 이스턴 바바리안이라는게 적절한 비유라고 볼수도 있다.
왜냐하면 서양인에게 바바리안이라는 단어는 문명이 낮다는 뜻도 있지만,
바바리안 (고트족, 훈족, 게르만족 등)에게 멸망한 고대 로마제국을 연상케하기도 한다.
로마가 비하한 바바리안도, 사실 자신들을 멸망시킬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걸 알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본다.
특정시기에 동이는 중화와 패권을 놓고 싸울만했으니, 중화 입장에선 동이를 극혐했던 경우가 있었던거라면
이스턴 바바리안은 그렇게 틀린 번역이 아니라고 본다.
* 별도로 중화가 동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쓴 적은 없을거라 본다.
개인차원에서 동이를 숭배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중국 자체가 동이를 숭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문명을 보면, 대부분 자신들의 조상들을 숭배하고 우러러보는게 일반적이다.
이것도 ,,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권력 정당성을 유지하기위해
'아따 우리 조상이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지라. 그러니까 그 대단하신 분의 후손인 나를 우러르고, 내가 하라는대로 좀 해' 이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죽은 사람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가져간 경우는 현대까지도 비일비재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권력의 중심에 있지도 못했지만, 노무현이 죽고나서야,,, 그 후광을 통해 지지율을 빨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세력을 숭배하는 경우는, 아직까지 나는 본 기억이 없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못살던 시절에도, 미국같은 선진국을 빨아본 시기는 없다.
그들의 잘 정비된 인프라, 정치제도, 금권력, 모든걸 부러워하면서도, 대한민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님 짱짱맨이라고 말한적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미국같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경우는 수두룩했을 것이다.
공자? 맹자? 뭐 그런 양반들이 동이가 부럽다라고 한것도 그런 경우일것이다.
5:59
모두 서쪽으로 쫘악 이동시키면
딱맞는
지도가
되겠네요
내용이 역사 자료에 근거한 정확하고 풍부한 설명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이"라는 말은 대인이라는 뜻
夷(이) 부수 大 (큰대, 3획)
모양자 大(클 대) + 弓(활 궁)
1. 동방 민족
2. 동방(東方)의 종족(種族)
3. 잘못
4. 상하다(傷--), 다치다
5. 멸하다(滅--), 죽이다
6. 평평하다(平平--) 평탄하다(平坦--)
7. 깎다, (풀을)베다
8. 온화하다(溫和--), 안온하다(安穩--: 조용하고 편안하다)
9. 오만하다(傲慢--: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하다)
10. 크다.
11. 기뻐하다, 유쾌하다(愉快--: 즐겁고 상쾌하다)
중국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대부분 고조선의 후예들의 싸움터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 있는 중국인(한족이라 우기는 사람)들은 주변국가들의 혼혈아 아닌가요? 중국이 오랑케라 하는 주변국가들이 전부 자신들의 조상들인데 제사를 지내면 사방에다 해야 하지 않나요??
중화문명에서 동이가 동쪽의 오랑캐(물론 오랑캐도 타민족 명인 우량카이를 음차한 것이라서 그들에겐 실례죠 실제로 우량카이족은 현재도 실제 하니깐) 라고 한 이유는 화이사상에서 온 구분이고 역사상 중국뿐 아니라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 그리스등 고대에 중심 문명권이 된 곳에선 주변 민족을 蠻족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표현 방식이고 또한 문헌상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민족이 고대 동쪽오랑캐라고 한 것은 중국의 고 문헌에 나온 것이며 고대사에서 기록된 문헌으로 기록된 것을 따라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과거 게르마니아 켈트 로르드을 바바리안이라고 한다고 해도 중유럽이나 북유럽인들인 문화적으로 열등감을 가지진 않습니다.
중국의 화이사상에 대한해서 비판한다면 당연하지만 고대 얘맥이나 숙신 말갈들이 오랑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화이사상이 아닌 오로시 한민족으로 연구한다고 해도 예 맥족의 음차는 중국어 한자어로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서융, 북적, 동이, 남만은 고대 동아시아의 중화권에서 바라본 이민족 말하며 그들 스스로 어떻게 불렸는지 기록이 없다고 한다면 문헌으로 오래된 기록을 근거로 하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스스로 오랑캐가 아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고대 문헌의 기록이 없어지진 않으니...
화하족의 열등의식의 발로.
한국도 오랑캐였구나 ㅋㅋㅋㅋ ㅊㅋㅊㅋ 중국과 통일하자 한국도 중국 바치자. 중화 인민 만세! ㅋㅋㅋㅋㅋㅋ
[민족사학]이 대륙삼국본토설을 주장하면 이해가 되십니까?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의 얘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상반된 두 이론이 공존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륙삼국본토설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의 핵심은 '단군조선과 계승국인 북부여의 중심지는 송화강 유역이고, 그 남쪽에 고구려가 다시 그 남쪽에 백제와 신라가 태동한 후삼한이 위치한다'입니다.
'단군조선(전삼한)은 영토가 거대했던 선진 문명이었지만 동만주와 한반도로 축소되었고, 고려서경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었다'입니다.
따라서 [민족사학]과 [강단사학]은 고려서경과 삼한에 관해서는 큰 차이가 없었고, 단군조선의 중심지를 두고 [동만주사관]과 [반도사관]으로 나누어졌을 뿐입니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오늘은 큰 오류가 담긴 영상이었습니다.
후한 시기부터 동이의 의미는 동쪽 오랑캐가 맞습니다.
설문해자를 근거로 동이의 의미가 달랐다고 하셨는데 맞는 얘기이지만 시대별로 동이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셨습니다.
크게 3가지의 의미의 동이가 있습니다.
1.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인 상왕조를 건국한 [하왕조의 동이족]
2. 상왕조를 건국한 [하왕조의 동이족]과 적대 관계였던 산동반도 및 안휘성 일대의 이족
3. 후한 이후 중국 본토 동쪽에 위치한 대만, 필리핀, 일본 열도, 한반도 및 만주 사람들을 통칭하는 동이
고구려는 중국의 동이전에 반발하여 자신들은 동이가 아니고 신라가 동이라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겼고, 일본도 자신들은 동이가 아니고 동북쪽 아이누족이 동이라 기록했습니다.
제발 동이족과 한민족이 동족이라는 가짜 역사는 퍼뜨리지 마십시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필리핀, 대만이 동이?? 더위 먹으셨나요 정신차리시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수천년전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고 밝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킨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중국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동쪽에서 온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그들보다 소수의 세력이었으므로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동이였지만 화하족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왕조를 이루며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며 동일 문화권을 형성한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우게 된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된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된다(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다시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에 멸망당하게 된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진한,대부여) 멸망후 정치적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게 된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된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게 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한무제때부터 변질되었다고 판단했는데 조금더 늦은 후한대군요..
영상에서 동이를 민족개념보다는 정치체로 보아 꾸준히 국가와 연결시켰는데,,, 흠....
내용이 너무 길어져 압축하다 보니 논리에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jipark_2373예의가 없으신 분이네요. 인신공격성 말언은 자제해 주십시오.
후한 시기 이후 동아 지역에 필리핀과 대만 오키나와 일본 열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중국의 정사서에 의하면 동이 중 으뜸은 오나라를 시조로 인식한 왜입니다.
혹시 왜가 거주하던 곳이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 일본 열도, 한반도 남부 지역인 것을 부정하셔서 이런 반응을 보이시나요?
아니면 만주족의 뿌리인 읍루도 동이에 포함되는 걸 부정하시는 건가요?
후한 시기 이후의 동이는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중국본토 동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통칭하는 일반명사입니다.
[민족사학] 진영이 하도 가짜 역사로 중국인과 한국인을 동일시하는 논리를 펴놔서 동북아고대사정립 5에 이에 관한 논지를 폈습니다.
기회가 있으시면 읽어봐 주십시오.
진짜 역사를 밝히는데 일조해 주십시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sukjukim7103 필리핀, 대만이 중국의 동쪽에 위치해 있나요... 정신차리라고 말한건 정상적인 말입니다
우리는 저사람을 저이라고 부른다. 그사람을 그이라고 한다. 또는 저사람을 저자(저놈)이라고 한다. 그자(그놈)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동이는 그냥 동쪽(땅)의 사람들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역사적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많다. 이는 그냥 음차문자였을 뿐이다. 신라도 신의나라 즉 신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새로운 나라가 아니였던 것이다. 신라의 신도 그냥 음차문자였을 뿐이다. 모든 것을 표의문자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오류를 범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중국을 포함한 조선과 일본 몽골의 역사까지도 남송 명과 조선 청나라 시대에 유생들에 의해 아주 광범위한 역사 조작과 왜곡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고 세상을 평정하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중국의 거의 모든 사서들은 유학자들에 의해 재간행되었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우리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도 60년동안이나 쓰여지면서 광범위한 한국의 고대사가 왜곡되었다. 조선시대에 한국의 천문 지리 역서 등 고대한국의 서책들이 조선의 혁명세력(유생)들에 의해 이러한 고대 서책들을 신고하고 반납하지 않는 자들은 역모죄에 해당한다는 포고령까지 반포되면서 수거되어 불에 타 없어졌다. 명나라의 역사는 청나라에 의해서 95년동안이나 쓰여졌다. 아마도 동아시아 역사는 유생들이 본격적으로 집권하기 시작한 남송 시기 이후부터 본격적인 역사조작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중국의 고대 역사들은 원본은 거의 불에 태워지거나 사라졌고 송대 이후에 재간행된 역사서들만 거의 대부분 남아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와 현대에 와서 일부 먹물들에 의해 이런 경향은 더 짙이지고 있다. 동아시아의 고대 핵심적인 역사는 고대 조선은 물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고대 한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송대 이후부터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동아시아 고대 역사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그 이전의 원본 역사서들이 일본의 황궁 서고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최근 우리는 알게 되었고, 그 필사본의 일부도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진실을 밝히는 역사 복원이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아주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갱단 사학자는 참 우둔합니다.
동이는 오랑캐가 맞구요. 우리는 동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동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요. 현대에 잘못된 경향입니다.
결론 : 우리를 우리가 동이라 부르는 ㅄ같은 일을 그만좀 하자.
옳으신 얘기. 너무나도 상식적인 얘기도 통하지 않을만큼 역사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현대라기보다는 구한말부터...
속칭 [민족사학]이 동이, 즉 동쪽 오랑캐라는 보통명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역사적 열등감으로 가짜 역사를 투척한 것이 씨앗이 된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아고대사는 가짜다]의 저자 김석주 드림
한국어의 '이'가 사람이란 뜻인데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쓰는 민족이 한국인 이외에 어디가 있나요.. 중국인의 관점에서 동이를 오랑캐로 본 시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사료에도 동이를 중국 동쪽의 이민족으로 기록하고 있을뿐이죠.. 오랑캐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고대로부터 '이'는 사람이란 의미의 한국어이고 중국 동쪽의 농경민 예맥족을 동이라고 했죠.. 우리 사료에도 당연히 우리 스스로를 동이라 칭하고 예맥의 후손이라 했어요.. 억지스런 주장은 하지말기 바랍니다
@@jipark_2373 동이는 동녘 동 오랑캐 이 인데 뭔 개소리세요
@@jipark_2373동이의 이 서융의 융 남만의 만 북적의 적 전부 다 오랑캐라는 뜻의 한자인데 동이의 '이'만 한자가 아닌 순우리말이다? 뭘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니들은 도대체 동이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임?그냥 중국에서 부르던 사방의 오랑캐 중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일 뿐인데
동이는 동쪽의 큰활을 든 사람이
아니라
동쪽의 활을 든 갓 쓴 사람이 맞음
동쪽의 큰활은 일본대궁이고
갓 쓴 사람의 활은
대한의 각궁
큰 대 가 아닌
갓 머리 아래 사람 갓 쓴 사람이 큰 대
오랑캐는
옳은칸 오른카이로 판단됨
오른 손은
항상 왼쪽으로 향하고
천기를 받는 순방향으로
시계의 반대방향을 오른 방향이라 하고
왼 손은
항상 오른 쪽을 향하고
천기의 역방향 지기의 순방향으로
시계방향을 완방향이라 하며
남자는 순방향 시계 반대방향
여자는 역방향 시계방향이
천기 순리의 원칙이다.
제발 고대사를 한반도에 가두지마라
너도 식민사학자 맞지?
지도를 검증해서 싣던지
차라리 표기하지 마라
오랑케는 조선시대에나 등장하는 명과 조선사이의 올량합으로 대표되는 부족들을 의미하고 이들은 명과 조선사이에서 골치아픈 존재로, 그 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로 선진유학이 아닌 주자학중심의 소중화 유교집단의 언어이다. 이를 파자하면 큰대, 활궁의 의미가 중심이며 처음에는 멸시의 의미가 없었지만 정치체계가 종교교조주의 언어로 획일화 되는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똑같다. 바바리언은 원래 로마인관점에서 언어가 이해되지않고 단순히 그 음성이 bar~bar~ 로 들리는 북방 타족을 뜻이며 전쟁을 통해 멸시의 언어로 쓰인것은 언어의 역사성에 비추어 당연한 것이다. 분명한것은 하화족이 한자를 최초로 만든집단이 아니라는것이며 내가궁금한것은 동북아시아인들이 아프리카이후 홍산이후 한반도와 일본으로 인류가 이동하며 어떤 이유로 이동이발생했으로 어떤 문화와 기술을 전파했냐는 것이다. 기후 환경 전쟁과 무역이 당연히 그 중심이 되는데 전쟁으로 변화된 언어의 사회성때문에 역사연구를 방해한다는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