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 왕조의 개국설은 조선 초기 부터 구전으로 돌아 에 기록된게 후기 라고 합니다. 정여립도 정도령설을 믿었을 가능성이 크고 선조도 정통성이 없어 역모 컴플렉스에 시달려 정여립을 의심하였다고 봅니다. 조선 왕조에서 왜 정씨 왕비가 없을까요?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분도 있지만 조선은 무속, 예언을 굳게 믿은 왕조입니다. 대선 후보 중에도 정주영, 정동영이 있었는데 아직도 정도령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종시 행정수도도 계룡산 천도의 효시라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정여립 사건이 조선 중, 후기에서 매우 중요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문제적 시대 상황을 직면했고 어떻게 보면 정여립의 방향으로 조선이 나아갔어야 됐는데 조선은 그러지 않았음. 만약 정여립의 사상으로 조선이 나아갔다면 조선이 16세기에 벌써 근대적 성향의 국가로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됐을 수도 있음. 하지만 아직 당시 전세계에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라서 정여립의 이런 개념 자체는 이미 세계 자체에 없던 개념이라 국제적으로 봐도 시대를 너무 빠르게 앞서간 사람이었음.. 정여립이 조금만 더 늦게 조선 후기때 등장했다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너무 빠르게 등장했음.
조선후기에 태어났어도 크게 변함은 없었을듯. 왕이 아니였고 하나의 신하였기에 혼자서 할수있는게 없었을거고 그나마 후기에 영조,정조같은 왕이있었으니 근대화가 빠르게 되었을수도 있었겠지만 간신같은 맹자왈공자왈만 외치는 신하들로인해 뒤통수당해서 죽임을 당했을수도있음. 조선은 역시 망하길잘함. 나라가 발전하기엔 너무 백성이든 신하든 겁쟁이고 변화를 두려워함.
당대에 혁명가가 아니었을까 싶음. 아무리 서인이나 선조가 간악하다고 할지라도 없는 사실을 뒤집어씌울 인물들은 아니겠죠. 순순히 붙잡히지않고 자결한걸로 봐서는 역모는 맞는거같습니다. 정여립이 조금만 더살아있었더라면 왜란을 막고 왕까지도 되었을 인물은 확실합니다. 역모가성공했다면. 그래서 전 개인적으로 이순신보다 대단한 인물로 평가합니다
@@shanestory3879 막았죠. 임ㅈ빈왜란이 이 순신 혼자서 막은 것이 아니랍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 처절하게 당한 줄 모르시군요. 허균의 사건만 봐도 알텐데..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 서자들과 백성들이 나몰라라 하는 것을 유성룡이 선조를 꼬셨죠. 일단. 전쟁에 나서는 서자들에게는 관직을 가질 기회를 주고,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면케 해준다는 조건으로 전쟁에 나서게 해라. 그래서 서자들이 앞장 서 나섰고, 전국 각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었죠.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공을 세운 서자들에게 준 관직을 다시 파면시키고 원이치 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전쟁 피해복구를 위한 세금을 엄청 뜯었어요. 거기에 양반들 피해복구하는데에 무료로 사용케 하엿구요. 그래서 서자들 대표 7인이 반란을 일으켰답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천재였던 허균과 잘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역모죄를 넣어 사형시켰죠. 선조 초기 시절에 허균은 장원 급제하였고. 그런데 서산대사와 사명당과도 절친으로 지냈고, 나중에는 불교 승려로 나갈 생각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이전에 외교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에 당시 천주교가 막 들어왓을 때에 외국인 신부에게 부탁해서 성경도 가지고 들어왔으며, 북경에 모여 있던 전세계 각국의 희귀한 서적들을 수백권 사서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항상 서자들도 실력이 있으면 등용시켜야 한다며 글재주 잇고 똑똑한 서자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책을 편집하게 하는 등 인사등용의 아주 좋은 본보기를 실천하기도 하엿죠. 여하튼. 이 당시 생소한 노비 제도 부분적 철폐 와 신분 차별 타파및 상. 공업을 키워야 하고, 북쪽의 여진.말갈. 일본과의 외교 를 통한 국력 강화. 하다못해 남녀 평등까지 부르짖었던 정여립과 허균 같은 이들을 제대로 등용시켰으면 이 성계가 말아먹은 대제국 고려의 부흥을 넘어 임진왜란은 물론. 차후에 청나라로부터 침입 당할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율곡이 주장한 십만 양병설은 국력강화라기보다 명에 사대하여 북쪽의 오랑캐인 여진,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밤 양병설을 주장한 것이었고. 당시 조정에서는 과거 우리의 한 형제인 여진,말갈이 쳐들어 올 일은 없을 것이라며 .. 헛소리들 하고 있었죠. 그런데, 정여립,허균 같은 이들은 여진,말갈.일본과 수교를 통한 다각적 외교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죠.
근데, 선조가 어느 한세력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선조가 그렇게 유능한 왕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중종이나, 숙종의 예를 보면 사화나, 환국 정치가 대표적인 건데.. 이는 뿌리뽑는 것과 달리 정치 세력간 균형 유지 차원이죠. 실제로 이를 통해서 숙종이 왕권을 강화하기도 했고... 근데 정여립과 그 기축옥사는 정말 기록을 보면 볼수록, 선조와 서인이 동인 사림들을 증오하다 못해, 혐오한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보로 학살극에 가까웠습니다. 천명 단위면.. 이건 뭐 그 뿌리를 뽑겠단는 거겠죠.. 조선 후기 서인이 주류로 지속된 시발점이 된것이기도 하구요.. 연구가 더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무능한 선조와, 정여립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에 대한 반감.. 서인의 야욕의 콜라보가 일종의 공명현상을 일으킨 참극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직도 동인 서인 남인 북인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야기 하는데 이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은 전국의 지역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양에 살던 양반들(선비)들을 이야기 하는것으로 한양에 사는 집의 위치가 한양의 남쪽에 많이 살던 남인 북쪽에 살면 북인 한양의 서쪽에 살면 서인 동쪽이면 동인을 말하는 것이다 동인이면 경상도 서인이면 전라도나 충청도 또는 황해도가 아니라는 이야기 이다
사적으로 무력 집단을 만들어서 운용했다는 것 자체가 선조와 조정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이죠. 대동계는 곧 정여립의 사병이라는 뜻이죠. 정여립이 생전에 생각이 파격적이고 언행이 거침없었고, 말싸움에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정여립에 대한 인식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질투와 원한을 가졌을 법 합니다. 재수없다, 건방지다, 지 혼자 잘났다, 경의를 표할 법하지만 한편으로 반감을 표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등지고, 상대편 붕당으로 갈만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않고 과감히 행동하는 점 때문에 그가 정말 파격하는 사람이었다는 게 실감됩니다. 그리고 이건 대동계의 구성원으로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천막론하고, 계원을 모아서 활쏘기를 하며 중소 규모 왜적을 격퇴할만큼 무력을 갖추었고, 말싸움에서도 이길 사람이 없었으며 언행이 거침없어 스승조차도 거리낌없이 비판할 수 있는데 국왕이라고 갈아치우지 못할까요? 당시 왕과 신료들의 이런 우려와 근심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대동계가 더 커지기 전에 선수쳐서 정여립을 제거하고, 비대해진 동인을 조정에서 절제하려고 햇던 거겠죠. 어차피 정여립의 평소 언행과 실제 대동계의 이미지 때문에 역적으로 몰아세워 죽일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정여립의 언행과 그 사상도 문제지만 역시나 가장 현실적인 우려는 그의 무력일 겁니다. 정말 대동계로 왜적을 격퇴했다면 그 왜적의 규모가 어떻든 보통 무력이 아니었을 겁니다. 1580년대 왜적이면 일본은 이미 조총으로 무장하고 전국시대를 통일해서 전투력이 성성할 때라서 소규모라고 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죠. 게다가 80년대에 쳐들어온 건 나름 탐색전이었을 테니 무시 못할 접전이었습니다. 그런 왜적을 관군도 못 당해내서 대동계(사병)에 원조를 요청했다는 건 관군이 제구실 못하고 특정 개인의 사병 집단에 의존했다는 뜻이죠. 이건 유사시에 내란 진압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죠. 실제로 임진년에 속수무책 무너진 걸 보면 동학민란 같은 사태를 수백년 앞서서 당하는 꼴이니 조선이 최소한 엄청난 국력 소모를 겪었을 겁니다. 이 사실이 선조에게 위협적이고 못마땅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스승이고 뭐고 거침없이 비판하는데다 귀천 가리지 않고 계를 구성해서 활쏘기하고 다니는 무력 집단인데 그 계주가 말도 잘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여든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인망도 있고,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은 삼남 지역 중 호남 영남에서 존경한다면 이건 왕과 다를 바 없는 셈입니다. 선조 입장에서는 죽이지 않으면 가뜩이나 조선 최초 서자 출신 왕이라는 컴플렉스가 있던 선조니 더더욱 왕위 보존이 어려워지죠.
정여립이 손죽도를 점령한 왜구를 격파했다는건 사실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죽도 사건은 당시 녹도만호 이대원이 출전하여 왜군에게 몰살당해 이대원도 전사한 사건이고 이때 왜구가 완도까지 침공해 조정에서 한성부에 있던 신립까지 동원해 내려보냈으나 그땐 이미 왜구는 약탈후 퇴각해 조선관군은 뒷북만쳤던 사건인데 그 어디에도 공식기록에 대동계가 참가했다거나 전공을 세운 기록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죠
그건 아님. 조선은 중세국가 고려보다 더 중세적으로 간 나라임. 그때 서양에선 문예부흥과 종교개햑이 시작되었고 지리상의 발견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음. 무역을 통한 부국강병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옆의 일본만 해도 해상을 통해 유럽과 직접 교역이 시작되었었음. 한국은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한 중앙집권적 왕조국가가 출발하였던 것이고.. 확고한 신분제와 함께..
@@로갓-i8w 그러니까 다른 나라 역사에선 보기 힘든 중앙집권을 해 낸 나라가 조선임. 이순신이 체포 압송되는 모습은 다른 나라역사에선 불가능한 모습임. 지금과 같은 법치의 시대에도 군 지휘관을 자신의 부하들이 지켜보는 병영에서 비무장의 민간인이 체포하려고 하지는 않음.
@@아치양-r3t 조선은 중종-인종-명종라인이 무너트리기 시작했으나 선조가 호흡기는 붙였으나 임란으로 외상까지 입은었고 여기에 광해군-인조라인으로 외상은 더 커짐. 그나마 현종-숙종이 외상을 처치했으나 팔다리가 짤렸고 영ㆍ정조가 그래도 살릴수는 있었으나 정조의 급사및 정조의 극단적인 성리학 중심 소중국화로 다시 심박수가 내려감. 이때 효명세자가 AED를 가져와 살릴려고 했는데 급사했고 순조가 스스로 호흡기를 때버리면서 철종이 발버둥 쳐도 의미가 없는 나라가 됨. 사실상 멸망.
천하공물론이라는 말이 인상 깊긴 하지만 요즘 나온 드라마처럼 실제로 신분해방 운동가인지는 추측하기가 어렵네요. 일단 율곡 이이 생전에는 자기를 품어줬다며 그렇게 존경을 표하며 따르다가 그가 죽자마자 바로 이이 뒷담 까면서 서인 전향해서 율곡 문하 제자들 전부 적으로 돌린 것도 그렇고, 인간됨이나 정치 감각은 부족했던거 같습니다.
선조를 나쁘게 그리는 식민사관은 참 문제가 많음, 선조는 포악하다고 알려진 자들을 오히려 좋게 보고 공을 생각해 풀어주기까지 한 사람으로 인자한 면이 많은 사람임, 당시 10%의 세율을 유지하는게 백성을 배불리 먹이겠다는 민본을 실천한 조선의 철학 이였는데 그로인해 상비군을 운용할 처지가 못되어 일본군의 전면침략시 대처를 못한면이 있으나 오히려 그런 세율을 유지한 조선이 그런 대규모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았으니 보통 국가는 아니라고 평가 하는게 냉정한 평가가 아닐까 싶네요, 일본은 80% 세율로 백성을 굶기고 군사를 운용 했으나 결과는 불행이죠, 일본은 침략 전쟁에 실패해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았음 이쁘게 포장질 오지게 해서 그렇지, 세율 10%인 나라와 80% 착취하는 나라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데 식민사관 때문에 사람들은 일본은 성공 조선은 실패라는 왜곡된 공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음.. 일본과 한국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임. 마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과 아메리카 인디언과 같다고나 할까? 한국 역사에서 아무도 이걸 지적하지 않지만 조선은 아직 고려 보다 더 중세적인 사회였고 일본은 서구유럽과 궤를 같이하는 근세국가였음. 운이 좋게도 이순신이라는 한 예외적인 천재가 출현해서 나라의 멸망은 막았지만... 일본이 한국 보다 훨씬 앞선 사회라는 건 전시에 잡혀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귀한을 거부하고 일본에 그냥 남아서 산 것만 봐도 알 수 있음. 그때 이미 일본은 조선과 같은 신분제가 없었고 뭐든지 기술만 있으면 그 기술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회였음. 도자기를 만드는 건 엄청난 재주였고 그 재주로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나 명성도 얻을 수 있는 사회였음. 일을 해 주면 품삯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였기도 했고..
권율 이순신 의병이 많은 일을 했겠지만 조선이 편대한 중앙군과 명군이 없었다면 의병만으로는 이길 수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의병은 어디까지나 중앙군을 돕는 형태라고 봐야 합니다. 군이 조직되고 움직이고 모든 관여를 한게 조정이기 때문에 조정의 공이 없다고 하는것은 잘못된 시각이죠
임진란이 일어나기 전에 비변사에서는 이순신을 불러들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선조는 백의종군을 시켜 기회를 줬습니다. 사간원들은 전라좌수사 라는 높은직에 이순신 같은 하급 관료가 가면 안된다고 했으나 선조가 인재가 많지 않다고 좌수사로 임명을 강행 했죠, 그를 시기한 것은 높으신 양반들 사간원 같은 자들이지 선조는 아닌거 같음
확실한 건 선조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원하는 목적을 무자비하게 달성했죠. 조작이란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철저하게...
정씨 왕조의 개국설은 조선 초기 부터 구전으로 돌아 에 기록된게 후기 라고 합니다. 정여립도 정도령설을 믿었을 가능성이 크고 선조도 정통성이 없어 역모 컴플렉스에 시달려 정여립을 의심하였다고 봅니다. 조선 왕조에서 왜 정씨 왕비가 없을까요?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분도 있지만 조선은 무속, 예언을 굳게 믿은 왕조입니다. 대선 후보 중에도 정주영, 정동영이 있었는데 아직도 정도령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종시 행정수도도 계룡산 천도의 효시라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정철 학살자
정철의 집안도 인종의 처가라 문정왕후가 박살낸 집안인데 서인이라 동인을 학살하기 위해 이 사건을 지휘했다는 점, 이 문제로 동인이 북인과 남인과 갈라지고 강경파 북인은 이산해, 온건파 남인은 유성룡임. 이순신도 당연히 남인..
@@yhansookim7850 정철은 정몽주의 후손 연일 정씨로 누나가 인종의 후궁입니다. 을사사화때 아버지와 형이 죽는 참극을 당합니다. 정철은 유배지에서 1594년 술병으로 죽고 인조때 복권됩니다. 결국 선조에게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선조랑 누구랑 다퉜을때는 무조건 선조가 잘못한거임
정답
딩동뎅
ㅋ,ㅋ,ㅋ,.....맞는 말인데..... 선조가 임해군과 다투었을 때는 둘 다 잘못한 것임.
순신이 형님껀만봐도 수긍합니다.
차승원은 정여립이였다가 정여립을 죽이죠 배우로서 대단한 배우입니다.
정여립 사건이 조선 중, 후기에서 매우 중요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문제적 시대 상황을 직면했고 어떻게 보면 정여립의 방향으로 조선이 나아갔어야 됐는데 조선은 그러지 않았음.
만약 정여립의 사상으로 조선이 나아갔다면 조선이 16세기에 벌써 근대적 성향의 국가로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됐을 수도 있음.
하지만 아직 당시 전세계에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라서 정여립의 이런 개념 자체는 이미 세계 자체에 없던 개념이라 국제적으로 봐도 시대를 너무 빠르게 앞서간 사람이었음..
정여립이 조금만 더 늦게 조선 후기때 등장했다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너무 빠르게 등장했음.
조선후기에 태어났어도 크게 변함은 없었을듯. 왕이 아니였고 하나의 신하였기에 혼자서 할수있는게 없었을거고 그나마 후기에 영조,정조같은 왕이있었으니 근대화가 빠르게 되었을수도 있었겠지만 간신같은 맹자왈공자왈만 외치는 신하들로인해 뒤통수당해서 죽임을 당했을수도있음.
조선은 역시 망하길잘함. 나라가 발전하기엔 너무 백성이든 신하든 겁쟁이고 변화를 두려워함.
재평가 받아야 한다
찌질 선조라면 충분히 조작 모함하고도 남았을 놈이죠
없는 이야기는 아니였을거 같고
당시 외부 세력 개입없이 저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거 자체부터 조선시대에 있을법한 인물은 아닌듯 ㅋㅋㅋ 대단함
선조는 어쩌면 이씨조선 왕족들의 아이덴티티가 가장 잘 나타난 찌질이가 아닐까?
그래도 고종에 비하면 .....
사병까지 부리다시피 했으니 그의심많은 런조에게 찍힌거지!
당대에 혁명가가 아니었을까 싶음. 아무리 서인이나 선조가 간악하다고 할지라도 없는 사실을 뒤집어씌울 인물들은 아니겠죠. 순순히 붙잡히지않고 자결한걸로 봐서는 역모는 맞는거같습니다. 정여립이 조금만 더살아있었더라면 왜란을 막고 왕까지도 되었을 인물은 확실합니다. 역모가성공했다면. 그래서 전 개인적으로 이순신보다 대단한 인물로 평가합니다
왜란을 막아요? 물론 전쟁의 과정이 바뀔수는 있었겠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는 도요토미니까요.
@@shanestory3879 막았죠. 임ㅈ빈왜란이 이 순신 혼자서 막은 것이 아니랍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 처절하게 당한 줄 모르시군요. 허균의 사건만 봐도 알텐데..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 서자들과 백성들이 나몰라라 하는 것을 유성룡이 선조를 꼬셨죠.
일단. 전쟁에 나서는 서자들에게는 관직을 가질 기회를 주고,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면케 해준다는 조건으로 전쟁에 나서게 해라.
그래서 서자들이 앞장 서 나섰고, 전국 각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었죠.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공을 세운 서자들에게 준 관직을 다시 파면시키고 원이치 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전쟁 피해복구를 위한 세금을 엄청 뜯었어요. 거기에 양반들 피해복구하는데에 무료로 사용케 하엿구요.
그래서 서자들 대표 7인이 반란을 일으켰답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천재였던 허균과 잘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역모죄를 넣어 사형시켰죠.
선조 초기 시절에 허균은 장원 급제하였고. 그런데 서산대사와 사명당과도 절친으로 지냈고,
나중에는 불교 승려로 나갈 생각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이전에 외교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에
당시 천주교가 막 들어왓을 때에 외국인 신부에게 부탁해서 성경도 가지고 들어왔으며,
북경에 모여 있던 전세계 각국의 희귀한 서적들을 수백권 사서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항상 서자들도 실력이 있으면 등용시켜야 한다며 글재주 잇고 똑똑한 서자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책을 편집하게 하는 등
인사등용의 아주 좋은 본보기를 실천하기도 하엿죠.
여하튼. 이 당시 생소한 노비 제도 부분적 철폐 와 신분 차별 타파및 상. 공업을 키워야 하고,
북쪽의 여진.말갈. 일본과의 외교 를 통한 국력 강화.
하다못해 남녀 평등까지 부르짖었던 정여립과 허균 같은 이들을 제대로 등용시켰으면
이 성계가 말아먹은 대제국 고려의 부흥을 넘어 임진왜란은 물론. 차후에 청나라로부터 침입 당할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율곡이 주장한 십만 양병설은 국력강화라기보다 명에 사대하여 북쪽의 오랑캐인 여진,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밤 양병설을 주장한 것이었고.
당시 조정에서는 과거 우리의 한 형제인 여진,말갈이 쳐들어 올 일은 없을 것이라며 .. 헛소리들 하고 있었죠.
그런데, 정여립,허균 같은 이들은 여진,말갈.일본과 수교를 통한 다각적 외교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죠.
역시 하성군은 왕자격이 없죠
하성군을 양자로 생각한 것은 명종 부부이니 그들을 원망하세요. 순회세자가 일찍 죽고 명종이 게이 성향이 있어 아들을 많이 낳지 않은 것도 원인입니다.
실록에는 정여립이 무고하다는 증거가 널린데다,
대동계의 존재 자체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여립의 난은 기록이 많지않고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뭐라 단정할순 없음. 선조가 동인과 서인중 한쪽이 너무 권력이 커지려하면 동인과 서인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는것임
송익필 각색 서인 연출 선조 총감독
선조가 죽일놈이지 그런놈이 왕이였다니
근데, 선조가 어느 한세력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선조가 그렇게 유능한 왕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중종이나, 숙종의 예를 보면 사화나, 환국 정치가 대표적인 건데.. 이는 뿌리뽑는 것과 달리 정치 세력간 균형 유지 차원이죠. 실제로 이를 통해서 숙종이 왕권을 강화하기도 했고...
근데 정여립과 그 기축옥사는 정말 기록을 보면 볼수록, 선조와 서인이 동인 사림들을 증오하다 못해, 혐오한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보로 학살극에 가까웠습니다. 천명 단위면.. 이건 뭐 그 뿌리를 뽑겠단는 거겠죠.. 조선 후기 서인이 주류로 지속된 시발점이 된것이기도 하구요..
연구가 더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무능한 선조와, 정여립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에 대한 반감.. 서인의 야욕의 콜라보가 일종의 공명현상을 일으킨 참극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대를 앞질러 태어났던가?
정여립 사건에 연루된 정언신
그 정언신이 투옥되자 그와 관련이 있는 모든 이들도 위험했다.
그 인물 중에 이순신 장군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정언신을 면회가려자
주변에서 말렸으나
죽음도 불사하고 갔다는 설이 있다.
나도 불의를 보면 미친듯이 못참는데
동래의 피가 진하긴 하구나
아직도 동인 서인 남인 북인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야기 하는데 이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은 전국의 지역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양에 살던 양반들(선비)들을 이야기 하는것으로 한양에 사는 집의 위치가 한양의 남쪽에 많이 살던 남인 북쪽에
살면 북인 한양의 서쪽에 살면 서인 동쪽이면 동인을 말하는 것이다 동인이면 경상도 서인이면 전라도나 충청도 또는 황해도가
아니라는 이야기 이다
아버지 께 정여립 을 엽쭙고 하니 아버지 께서 대노 하시며 정여립 이야기를 허지 마라고 하신게 기억이 나요. 제가 본관이 동래 정씨. 라서요.
사적으로 무력 집단을 만들어서 운용했다는 것 자체가 선조와 조정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이죠. 대동계는 곧 정여립의 사병이라는 뜻이죠.
정여립이 생전에 생각이 파격적이고 언행이 거침없었고, 말싸움에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정여립에 대한 인식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질투와 원한을 가졌을 법 합니다. 재수없다, 건방지다, 지 혼자 잘났다, 경의를 표할 법하지만 한편으로 반감을 표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등지고, 상대편 붕당으로 갈만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않고 과감히 행동하는 점 때문에 그가 정말 파격하는 사람이었다는 게 실감됩니다. 그리고 이건 대동계의 구성원으로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천막론하고, 계원을 모아서 활쏘기를 하며 중소 규모 왜적을 격퇴할만큼 무력을 갖추었고, 말싸움에서도 이길 사람이 없었으며 언행이 거침없어 스승조차도 거리낌없이 비판할 수 있는데 국왕이라고 갈아치우지 못할까요? 당시 왕과 신료들의 이런 우려와 근심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대동계가 더 커지기 전에 선수쳐서 정여립을 제거하고, 비대해진 동인을 조정에서 절제하려고 햇던 거겠죠. 어차피 정여립의 평소 언행과 실제 대동계의 이미지 때문에 역적으로 몰아세워 죽일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정여립의 언행과 그 사상도 문제지만 역시나 가장 현실적인 우려는 그의 무력일 겁니다. 정말 대동계로 왜적을 격퇴했다면 그 왜적의 규모가 어떻든 보통 무력이 아니었을 겁니다. 1580년대 왜적이면 일본은 이미 조총으로 무장하고 전국시대를 통일해서 전투력이 성성할 때라서 소규모라고 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죠. 게다가 80년대에 쳐들어온 건 나름 탐색전이었을 테니 무시 못할 접전이었습니다. 그런 왜적을 관군도 못 당해내서 대동계(사병)에 원조를 요청했다는 건 관군이 제구실 못하고 특정 개인의 사병 집단에 의존했다는 뜻이죠. 이건 유사시에 내란 진압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죠. 실제로 임진년에 속수무책 무너진 걸 보면 동학민란 같은 사태를 수백년 앞서서 당하는 꼴이니 조선이 최소한 엄청난 국력 소모를 겪었을 겁니다. 이 사실이 선조에게 위협적이고 못마땅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스승이고 뭐고 거침없이 비판하는데다 귀천 가리지 않고 계를 구성해서 활쏘기하고 다니는 무력 집단인데 그 계주가 말도 잘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여든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인망도 있고,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은 삼남 지역 중 호남 영남에서 존경한다면 이건 왕과 다를 바 없는 셈입니다. 선조 입장에서는 죽이지 않으면 가뜩이나 조선 최초 서자 출신 왕이라는 컴플렉스가 있던 선조니 더더욱 왕위 보존이 어려워지죠.
정여립이 손죽도를 점령한 왜구를 격파했다는건 사실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죽도 사건은 당시 녹도만호 이대원이 출전하여 왜군에게 몰살당해 이대원도 전사한 사건이고 이때 왜구가 완도까지 침공해 조정에서 한성부에 있던 신립까지 동원해 내려보냈으나 그땐 이미 왜구는 약탈후 퇴각해 조선관군은 뒷북만쳤던 사건인데 그 어디에도 공식기록에 대동계가 참가했다거나 전공을 세운 기록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죠
당시 기준으로보면 왕권에 대항 가능한 위험한 사상을 가진 무력집단 이었던거 같네요
그렇게 임진년에 왜병들에 대항할수있는 군대를 확실한 물증이나 명분없이 없앤 암군 선조~
절대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 혈안이 된 암군이 집권중인 치세에 누가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유언비어만 퍼져도 바로 표적이 되는 세상이기에 후자(희생자)의 경우였다면 정여립 입장에선 정말로 기분 ㅈ같았을 듯.
어머 ㅈ은 좋은거에요~ ㅈ 말고~아앙~ ♥
아... 정감록...
조선은 선조를 시작으로 무너지기 시작 한거다..
건국 초기엔 그시대에 다른 국가에선 보기힘든 혁신적인 나라였음
그건 아님. 조선은 중세국가 고려보다 더 중세적으로 간 나라임. 그때 서양에선 문예부흥과 종교개햑이 시작되었고 지리상의 발견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음. 무역을 통한 부국강병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옆의 일본만 해도 해상을 통해 유럽과 직접 교역이 시작되었었음. 한국은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한 중앙집권적 왕조국가가 출발하였던 것이고.. 확고한 신분제와 함께..
@@operationsavekorea627"중세"는 중앙집권적 왕조 국가를 뜻하지 않는다.
@@로갓-i8w 그러니까 다른 나라 역사에선 보기 힘든 중앙집권을 해 낸 나라가 조선임. 이순신이 체포 압송되는 모습은 다른 나라역사에선 불가능한 모습임. 지금과 같은 법치의 시대에도 군 지휘관을 자신의 부하들이 지켜보는 병영에서 비무장의 민간인이 체포하려고 하지는 않음.
@@operationsavekorea627 애초에 조선은 근세 왕권국가로 보는 경우가 많음. 중세로 볼 수가없음.
@@아치양-r3t 조선은 중종-인종-명종라인이 무너트리기 시작했으나 선조가 호흡기는 붙였으나 임란으로 외상까지 입은었고 여기에 광해군-인조라인으로 외상은 더 커짐. 그나마 현종-숙종이 외상을 처치했으나 팔다리가 짤렸고 영ㆍ정조가 그래도 살릴수는 있었으나 정조의 급사및 정조의 극단적인 성리학 중심 소중국화로 다시 심박수가 내려감. 이때 효명세자가 AED를 가져와 살릴려고 했는데 급사했고 순조가 스스로 호흡기를 때버리면서 철종이 발버둥 쳐도 의미가 없는 나라가 됨. 사실상 멸망.
찌질선조의 자작극
정감록의 정도령,
정여립
천하공물론이라는 말이 인상 깊긴 하지만 요즘 나온 드라마처럼 실제로 신분해방 운동가인지는 추측하기가 어렵네요. 일단 율곡 이이 생전에는 자기를 품어줬다며 그렇게 존경을 표하며 따르다가 그가 죽자마자 바로 이이 뒷담 까면서 서인 전향해서 율곡 문하 제자들 전부 적으로 돌린 것도 그렇고, 인간됨이나 정치 감각은 부족했던거 같습니다.
아무리 변명해도 하성군은 무능하고 사악함
원래 정치에서 특출나면 공격 받아 없어짐
혁명이 성공하였으면 좋았었을것
정철과 선조의 환장할 콜라보이긴하죠. 저건
선조 무덤을 파묘하고싶다
동구릉에 가면 목릉이라고 있어요. 의인왕후, 인목왕후 사이에 있습니다. 왕비 2명을 같이 묻은 것도 요상한 취미지요. 의인왕후는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서인을 배신한것이. 반역이다
정여립이 흉폭했다는건 조작된거 겠지만 당시 왕정시기로 봤을때 왕권을 부정하는 사상이면 역모는 맞지.
정여립은 제가 보기엔 무슨 사회혁명가 보다는 단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T네 T야
5공시절 선조가 세종대왕을 이기고 여론 조사에서 1위 참 재미있는 시절이죠 유명한 사극을 집필한 작가도 선조를 위대한 임금이라고
그때 80년대에 김대중이 선조를 재평가 하다보니 일시적으로 선조의 인기가 올라가던때가 있었지요.
아오핵대중또너야
@@성이름-c4e9x경상도 교과서에 나와 있는대로 씨부리네.
선조를 나쁘게 그리는 식민사관은 참 문제가 많음, 선조는 포악하다고 알려진 자들을 오히려 좋게 보고 공을 생각해 풀어주기까지 한 사람으로 인자한 면이 많은 사람임, 당시 10%의 세율을 유지하는게 백성을 배불리 먹이겠다는 민본을 실천한 조선의 철학 이였는데 그로인해 상비군을 운용할 처지가 못되어 일본군의 전면침략시 대처를 못한면이 있으나 오히려 그런 세율을 유지한 조선이 그런 대규모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았으니 보통 국가는 아니라고 평가 하는게 냉정한 평가가 아닐까 싶네요, 일본은 80% 세율로 백성을 굶기고 군사를 운용 했으나 결과는 불행이죠, 일본은 침략 전쟁에 실패해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았음 이쁘게 포장질 오지게 해서 그렇지, 세율 10%인 나라와 80% 착취하는 나라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데 식민사관 때문에 사람들은 일본은 성공 조선은 실패라는 왜곡된 공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음.. 일본과 한국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임. 마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과 아메리카 인디언과 같다고나 할까? 한국 역사에서 아무도 이걸 지적하지 않지만 조선은 아직 고려 보다 더 중세적인 사회였고 일본은 서구유럽과 궤를 같이하는 근세국가였음. 운이 좋게도 이순신이라는 한 예외적인 천재가 출현해서 나라의 멸망은 막았지만...
일본이 한국 보다 훨씬 앞선 사회라는 건 전시에 잡혀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귀한을 거부하고 일본에 그냥 남아서 산 것만 봐도 알 수 있음. 그때 이미 일본은 조선과 같은 신분제가 없었고 뭐든지 기술만 있으면 그 기술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회였음. 도자기를 만드는 건 엄청난 재주였고 그 재주로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나 명성도 얻을 수 있는 사회였음.
일을 해 주면 품삯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였기도 했고..
일본은 성공해서 실패한 조선을 지배한게 맞는데 왜요?
이순신, 권율, 의병들 아니였음 패망했을 나라를 쓸데없이 중앙정부공으로 돌리진 맙시다ㅡㅡ
권율 이순신 의병이 많은 일을 했겠지만 조선이 편대한 중앙군과 명군이 없었다면 의병만으로는 이길 수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의병은 어디까지나 중앙군을 돕는 형태라고 봐야 합니다. 군이 조직되고 움직이고 모든 관여를 한게 조정이기 때문에 조정의 공이 없다고 하는것은 잘못된 시각이죠
임진란이 일어나기 전에 비변사에서는 이순신을 불러들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선조는 백의종군을 시켜 기회를 줬습니다. 사간원들은 전라좌수사 라는 높은직에 이순신 같은 하급 관료가 가면 안된다고 했으나 선조가 인재가 많지 않다고 좌수사로 임명을 강행 했죠, 그를 시기한 것은 높으신 양반들 사간원 같은 자들이지 선조는 아닌거 같음
원래 전라도는 태조 왕건때부터 이미 배역의 땅으로 지정된 곳이었음. 진짜 역적이었을 확률을 따진다는것 자체가 모순임
정철 이인간은 안끼는데가 없음 ㅋㅋ
역모사건은 아님 정여립은 역모할 마음이 없었씀
선조 = 최고의
영웅판독및분쇄기
사병이 문제임. 개인이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사병이 있다? 역모임. 그냥.
공화가 아니라 공산주의자였네
먼 개소리여 ㅅㄲㅇ
그런 기준이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복지정책은 다 공산주의네..서, 북유럽을 공산주의라고 보는 시각이 친미 친일 극우파의 시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