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율려에서 나온 이야기 입니다. 소리로서 교화를 한다는 것은! 애초에 사람의 언어는 소리에서 나오고 단순히 음운의 변화 뿐만아니라 소리의 고저로서도 의사를 통했습니다. 현재 중국에에도 살아잇는 성조가 바로 이것인데요. 즉, 군왕이 소리를 다스리는것은 것 말로 소통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는 소리의 음률에서 수학적 비의 즉, 배음의 관계를 발견합니다. 모든것을 수학적 해석으로 이해할수 잇다는 피타고라스에게 음악은 곧 계시이죠! 동일한 원리는 이미 주나라에서 어느정도 이해 했고 이러한 귀에 평온히 울리는 음악이나 인간의 감각을 일깨우는 음악을 통해 제왕은 일종의 프로파간다 매체로서 음악을 이용했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수준 높은 제왕이라면 우섭고 엄혹한 형율로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음악 같은 고급 매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 또한 한 나라의 음악은 단지 지배자의 통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배자의 치세를 나타내는 척도로서도 쓰입니다. 맹자를 읽어보면 음악과 그것을 통한 왕과 백성의 관계가 나타나는데 좋은 음악을 둥가둥가 한다고 좋은 왕일 수는 없다면서 예를 드는데 어떤 나라의 백성은 "왕의 음악은 이리좋은데 어째서 다스리는것은 이꼴인 것이냐."라면서 왕에게 야유하지만 또 다른 나라의 백성은 "왕이 저리도 힘차게 음악을 연주하시니 기력이 정정하신가 보다!"라면서 왕의 음악에 찬사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즉, 왕이 잘 다스리면 왕의 음악도 백성에게 잘 먹히지만 왕이 지랄 맞으면 왕의 음악까지도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진나라에서 전국을 통일 한후 가장먼저 착수한 것이 바로 도량형의 통일 입니다. 이것은 소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중국은 두드리면 소리나는 통관을 통해 물건의 무게를 소리로서 관측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량형 통일을 위해서는 이 소리의 통일은 우선적이죠. 또한 소리의 통일-도량형의 통일은 자연스러 말의 통일 과도 연관 됩니다. 오늘날에서 한자 배우시면 아시겠지만 도무지 납득 못할 글자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난무하죠! 과거 말은 비슷하더라도 일곱나라 이상으로 쪼개져 살던 과거의 중국은 오죽이나 하겠습니까? 이 국민 통합 즉, 왕권신장의 원리를 이해하신 조선시대 왕이 계셨습니다. 바로 세종이죠! 세종은 여러사업을 하시는 틈틈히 도량형 개혁에도 힘을 쓰셨고 특히 음악을 공부하시면서 궁중에서 쓰는 음악인 아악의 개량과 전범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악에 쓰는 악기들의 소리의 중심 되는 편경의 소리 표준을 구하기 위해서 그 계량단위를 정하는데 바로 이것이 황종률(좁살보다 조금 큰 곡식인 기장의 늘어놓은 길이를 기준으로 길이의 표준을 삼는 것)의 확립 입니다. 이러한 음악적 지식과 소리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야심찬 계호기의 성가가 바로 한글 입니다. 소리를 이해하고 그 소리를 표기하는데 가장 적확한 글자를 이루어 내는 것. 즉, 과거에 소리로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상은 조선 세종대에 한글로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에서 실체화 됩니다. 세종은 그 만큼이나 성리학적 도학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고 그 화신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렇듯 음율을 정비하고 음악을 줄을 세우는 일은 통치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잇고 나라의 음악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바로 왕권 강화 입니다. 이에 관련 되에 신라 3보란게 있는데 마치 일본의 3종신기나 고조선으 천부인 3개와 같은 왕권의 심볼리즘을 이릅니다. 하나가 인도의 아육왕(아쇼카왕)이 신라에 보냈다는 철로서 이룩한 장육존상(높이 1장 6자:즉, 4.8m의 불상)과 주위 아홉나라의 무릎을 꿇린다던 황룡사 9층 석탑, 그리고 만파식적과 관련있는 하늘로부터 받았다던 혁대인 천사옥대가 있습니다. 이중 천사옥대는 옥대의 마디가 용이로 되어잇다는 왕자의 말에 하나를 떼어다가 못에 던져보니 용이되어 승천하였다는 기사가 정하는 신물, 또한 만파식적은 문무왕이 죽어 소원대로 호국룔이 되엇는데 그의 비원에 의해 동해에 솟아난 움직이는 바위 위에 낮에는 나뉘고 밤에는 합하는(반대의 경우도 있음)대나무를 가져다가 용의 충고에 따라 피리를 만든 신물인 것입니다. 이같은 배후지식을 깔고보면 만파식적은 신라의 비보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왕의 비보이고 신라의 잘되고 못되는 운명이 왕의 손에 달렸다는 상징적 물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음악시간에 배운 삼현(거문고,가야금,향비파),삼죽(소금,중금,대금)은 신라를 대표하는 악기 이기도 합니다. 만파식적은 이중 대금이죠!
악기로 적을 물리쳤다는 것에 대해 당시 상황을 나름 상상을 해봤습니다. ^^ 피리 소리가 밤에는 제법 커서 각 군영에 잘 들렸겠지요. 그리고 음악이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 당시 사람들이 임박사님 말씀처럼 처량한 음률을 듣는다면 당시의 충격(감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 아닐까 합니다. 대나무로 악기를 크게 만들면 기본적으로 소리가 저음이 납니다. 그리고 저음은 더 멀리 갑니다. 낮보다 밤에 더 멀리 가고요. 저음 악기가 호소력도 더 있지요. 당시 피리를 더 크게 개량했든지, 외국에서(아마 남방 쪽이겠지요. 대나무는 서식지가 남방쪽이니까요.) 막 수입(?) 되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악기 제질에 대한 것입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있어서 악기로 만들기에 아주 그만입니다. 그중에서 꼭 쌍골대를 사용합니다. 소리가 단단하고 힘이있거든요. 이것이 나중에 철학적인,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화합이라든가... 교수님의 不二에 대한 의견에도 공감이 갑니다.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가야의 우륵이 가야 연맹체를 단합시키기 위해 모음곡을 만들었듯이 대금도 그런식으로 활용하지 않았나 짐작을 해봅니다. 두서없이 횡설수설해서 죄송합니다. ^^ PS. 병을 치료하고 홍수, 가뭄을 막았다는 것은 우연히 그런 일이 있었거나 뒤에 살을 붙혔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어야만 민심이 움직였으니까요.
만파식적!
김인호 교수님 반갑습니다 ㅁ 자주 출현해 주세요^^
독특한 소재의 방송 재미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가 감사핮니다!!!!
음악 전공자 입니다. 문화가 융성할 정도로 국력이 신장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세종의 치.음 은 각 지역의 음악을 수집하고 표준을 정함으로 음악으로 전국의 음악을 보급 항상 혼합한 것 같습니다.
와~ 만파식적하면 왕권강화라고 그저 외운기억만 나는데 이런 새로운 해석이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지막에 "그거는 쫌" 에서 끊어버리시면 다음화까지 어떻게 기다립니까 뒷말이 너무 궁금해지네요
그럴듯한
설명인데요
재미있어요~~
뭔가 커다란 은유법인데(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메타포가 한가득)..그걸 추정해야함..
고려 성종 때 문벌귀족이 형성 될 때 거란과의 전쟁이 미친 영향을 알고 싶습니다
화면이랑 음질이 엄청 좋아진거 같아요
중국악기는 훈 입니다.
아마도 율려에서 나온 이야기 입니다. 소리로서 교화를 한다는 것은!
애초에 사람의 언어는 소리에서 나오고 단순히 음운의 변화 뿐만아니라 소리의 고저로서도 의사를 통했습니다.
현재 중국에에도 살아잇는 성조가 바로 이것인데요.
즉, 군왕이 소리를 다스리는것은 것 말로 소통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는 소리의 음률에서 수학적 비의 즉, 배음의 관계를 발견합니다.
모든것을 수학적 해석으로 이해할수 잇다는 피타고라스에게 음악은 곧 계시이죠!
동일한 원리는 이미 주나라에서 어느정도 이해 했고 이러한 귀에 평온히 울리는 음악이나 인간의 감각을 일깨우는 음악을
통해 제왕은 일종의 프로파간다 매체로서 음악을 이용했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수준 높은 제왕이라면 우섭고 엄혹한 형율로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음악 같은 고급 매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
또한 한 나라의 음악은 단지 지배자의 통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배자의 치세를 나타내는 척도로서도 쓰입니다.
맹자를 읽어보면 음악과 그것을 통한 왕과 백성의 관계가 나타나는데 좋은 음악을 둥가둥가 한다고 좋은 왕일 수는 없다면서
예를 드는데 어떤 나라의 백성은 "왕의 음악은 이리좋은데 어째서 다스리는것은 이꼴인 것이냐."라면서 왕에게 야유하지만
또 다른 나라의 백성은 "왕이 저리도 힘차게 음악을 연주하시니 기력이 정정하신가 보다!"라면서 왕의 음악에 찬사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즉, 왕이 잘 다스리면 왕의 음악도 백성에게 잘 먹히지만 왕이 지랄 맞으면 왕의 음악까지도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진나라에서 전국을 통일 한후 가장먼저 착수한 것이 바로 도량형의 통일 입니다.
이것은 소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중국은 두드리면 소리나는 통관을 통해 물건의 무게를 소리로서 관측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량형 통일을 위해서는 이 소리의 통일은 우선적이죠.
또한 소리의 통일-도량형의 통일은 자연스러 말의 통일 과도 연관 됩니다.
오늘날에서 한자 배우시면 아시겠지만 도무지 납득 못할 글자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난무하죠!
과거 말은 비슷하더라도 일곱나라 이상으로 쪼개져 살던 과거의 중국은 오죽이나 하겠습니까?
이 국민 통합 즉, 왕권신장의 원리를 이해하신 조선시대 왕이 계셨습니다.
바로 세종이죠!
세종은 여러사업을 하시는 틈틈히 도량형 개혁에도 힘을 쓰셨고 특히 음악을 공부하시면서 궁중에서 쓰는 음악인
아악의 개량과 전범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악에 쓰는 악기들의 소리의 중심 되는 편경의 소리 표준을
구하기 위해서 그 계량단위를 정하는데 바로 이것이 황종률(좁살보다 조금 큰 곡식인 기장의 늘어놓은 길이를 기준으로
길이의 표준을 삼는 것)의 확립 입니다.
이러한 음악적 지식과 소리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야심찬 계호기의 성가가 바로 한글 입니다.
소리를 이해하고 그 소리를 표기하는데 가장 적확한 글자를 이루어 내는 것.
즉, 과거에 소리로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상은 조선 세종대에 한글로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에서 실체화 됩니다.
세종은 그 만큼이나 성리학적 도학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고 그 화신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렇듯 음율을 정비하고 음악을 줄을 세우는 일은 통치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잇고 나라의 음악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바로 왕권 강화 입니다.
이에 관련 되에 신라 3보란게 있는데 마치 일본의 3종신기나 고조선으 천부인 3개와 같은 왕권의 심볼리즘을 이릅니다.
하나가 인도의 아육왕(아쇼카왕)이 신라에 보냈다는 철로서 이룩한 장육존상(높이 1장 6자:즉, 4.8m의 불상)과
주위 아홉나라의 무릎을 꿇린다던 황룡사 9층 석탑, 그리고 만파식적과 관련있는 하늘로부터 받았다던 혁대인 천사옥대가
있습니다.
이중 천사옥대는 옥대의 마디가 용이로 되어잇다는 왕자의 말에 하나를 떼어다가 못에 던져보니 용이되어 승천하였다는
기사가 정하는 신물, 또한 만파식적은 문무왕이 죽어 소원대로 호국룔이 되엇는데 그의 비원에 의해 동해에 솟아난
움직이는 바위 위에 낮에는 나뉘고 밤에는 합하는(반대의 경우도 있음)대나무를 가져다가 용의 충고에 따라 피리를 만든
신물인 것입니다.
이같은 배후지식을 깔고보면 만파식적은 신라의 비보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왕의 비보이고
신라의 잘되고 못되는 운명이 왕의 손에 달렸다는 상징적 물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음악시간에 배운 삼현(거문고,가야금,향비파),삼죽(소금,중금,대금)은 신라를 대표하는 악기 이기도 합니다.
만파식적은 이중 대금이죠!
현대적인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음악(기준음)을 이용해서 도량형의 기준을 정했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음악으로 세상을 통치한 것이 맞는것 같습니다. 피타고라스가 음을 연구하고 화음체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한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합니다.
혹시 기회가 되시면 목화의 보급 전중후로 의복과 침구의 변화를 알 수 있을까요? 왕이나 귀족은 충분히 따뜻하게 겨울을 보냈겠지만 서민들은 어떻게 겨울을 버텼을지 궁금해서 여쭙니다.
PLFK 봏은 질문 감사합니다 그런 면직물과 솜이 등장했다 이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쪽 사료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인문채널휴 네 답변 감사드립니다. 사료가 없다니 아쉽네요.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이 잇네요. 고대사 정영호 교수님을 갠적으로 뵙는데 연구실이 석주선박물관 건물 엿답니다. 한국 고대 복식사의 대가 이셧으니 함 알아 보시길!
@@happyhan608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사태가 진정되면 아이들하고 가봐야 겠네요.
@@SKPEBL 😊👍
아! 그렇다면 만파식적은 삼국통일 후 새로히 율령을 반포하여 사회통합을 꽤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는 건가요?
악기로 적을 물리쳤다는 것에 대해 당시 상황을 나름 상상을 해봤습니다. ^^
피리 소리가 밤에는 제법 커서 각 군영에 잘 들렸겠지요.
그리고 음악이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 당시 사람들이 임박사님 말씀처럼
처량한 음률을 듣는다면 당시의 충격(감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 아닐까 합니다.
대나무로 악기를 크게 만들면 기본적으로 소리가 저음이 납니다.
그리고 저음은 더 멀리 갑니다. 낮보다 밤에 더 멀리 가고요. 저음 악기가 호소력도 더 있지요.
당시 피리를 더 크게 개량했든지, 외국에서(아마 남방 쪽이겠지요. 대나무는 서식지가 남방쪽이니까요.) 막 수입(?) 되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악기 제질에 대한 것입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있어서 악기로 만들기에 아주 그만입니다.
그중에서 꼭 쌍골대를 사용합니다. 소리가 단단하고 힘이있거든요.
이것이 나중에 철학적인,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화합이라든가...
교수님의 不二에 대한 의견에도 공감이 갑니다.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가야의 우륵이 가야 연맹체를 단합시키기 위해 모음곡을 만들었듯이 대금도 그런식으로 활용하지 않았나 짐작을 해봅니다.
두서없이 횡설수설해서 죄송합니다. ^^
PS. 병을 치료하고 홍수, 가뭄을 막았다는 것은 우연히 그런 일이 있었거나 뒤에 살을 붙혔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어야만 민심이 움직였으니까요.
k과객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수년전 옥션에 만파식적이 나왓죠. 물론 가품으로 ㅡㅡㅡ.
오 룰러가 자 혹은 통치자 뜻이 두가지란건 듣고나니 좀 무섭네요 ㅋㅋ 좋은거 배워갑니다
너무 짧다구요! 한시간씩 올리시라구요 ㅋㅋ
ruclips.net/video/GNn0fJALgUQ/видео.html&feature=emb_title 음악 이야기가 나와서 링크 하나 올립니다.일본의 악보 인지요록에 수록된 신라릉왕이라는 아악 노래의 복원 연주 영상 이라네요.
만파식적이라해서 저는 무슨 산적같은 고기인줄;;
임용한 박사님 킹덤 속 조선사회 다뤄주시면 재밌는 컨텐츠가 될 수 있을거 같습니다. 고증이나 사회상 컨텐츠요
만파식적 초등학교 교과서 보고 처음알았는데 그때는 진짜 피리 부르면 왜구가 도망가는줄 알았었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