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urairomance 대하드라마는 거의 전국시대 아니면 막부 말기까지 보여주는게 대부분이었던거 같은데 최근들어 메이지 ~ 다이쇼 시대상을 보여주는 대하드라마나 아침드라마가 종종 보여서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아침드라마가 10분정도로 짧으니까 오히려 한편만 더 하다가 두세시간 훌쩍 지나가버리더군요.
부와 권력이 분리된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배층은 가난했고, 피지배층은 지배층 급여 시스템과 가신단 구조의 헛점을 파고 들어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고요. 나중에는 요시와라 등에서 볼 수 있는 피지배층의 문화에 지배층이 동화되기도 하는, 참 얄미울 정도로 특이한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eliyahaverial 한국같은 경우엔 어느시대에서든 국가가 강력한 규제정책을 펼쳤고 예외로 두는것을 특혜로서 소수의 상인집단에게 부여했기 때문에 통제가 가능했음 조선시대 상인집단(만상, 송상, 경상 등)들도 국가의 특혜와 예외를 통해서만 장사가 가능했고 선을 넘을땐 강력한 제재를 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볼때 결이 좀 다름 지금도 한국은 포지티브 규제 국가, 즉 일단 전부 규제로 막아둔 뒤 나중에 하나하나 규제를 해금하는 정책이라면 일본은 네거티브 규제 국가 즉 일단 전부 풀어둔 뒤 문제생기면 하나하나 보완책으로 막는 정책이고. 뭐가 다르냐고 할수 있지만 포지티브 규제 정책은 국가가 규제의 해금 범위, 대상을 통제할수 있다는거고 그 과정에서 특정 대상에게 특혜를 줄수 있다는거지. 다시말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라는거.
메이지유신과 폐번치현에 따른 구채권채무 관계의 변화와 오사카 상인들의 흥망이라니 참 귀하고 알찬 지식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길고도 끔찍한 여름 형님의 지방군 군축현황은 좀 어떠신가요? 저는 주6일 헬스장 출근이라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이요법에 실패했는지 지방군웅들의 발호가 도무지 수그러들지 않아 새삼 절망하고 있습니다ㅠㅠ 그냥 날씬해지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건강한 퉁퉁보로 살아야 할까봐요. 형님은 건강한 여름 보내고 계신지요?
에도시대 각 번들이 재정적자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많은 책에서 지적하는 것이죠. 그런데 막상 당시 각 번들이 어디에 돈을 쓰느라 그렇게 막대한 부채가 쌓여 갔는지 설명하는 책은 아직 못 봤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각 번의 재정적자 원인에 대해 다뤄주실 수 있을까요?
보신(막부가 시키는 토목사업이나 접대 업무 등), 지배층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유지비용, 가신단 녹봉이나 번내 자잘한 사업 혹은 참근교대 및 에도의 다이묘야시키 유지비 등의 관리 비용 등의 고정지출 +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세입 = 만성적인 적자..
에도 막부에 대하여 다이묘들이 지고 있던 막중한 의무가 참근교대이다. 이에 대해서는 흔히 막부가 다이묘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강제한 책략이라는 시각이 여전하다. 분명 다이묘의 에도 생활은 번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막부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은 곡해이다. 참근교대는 군역 발동의 한 형태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막부가 직접 장악한 상비군은 적었다. 그래서 항상 다이묘를 절반씩 에도에 주재시켜서 수도 방위를 맡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막부가 각종 토목 공사를 다이묘들에게 부담지운 것도 다이묘의 경제력 삭감을 목적으로 했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보청역도 군역의 일종이다. 전국 시대 말기 이후 전쟁은 더 이상 맹장의 일대일 승부가 아니었다. 성을 쌓고 길을 내고 제방을 만들고 땅굴坑을 파는 등 갖은 토목 공사도 중요한 전쟁 행위였다. 그것이 평시에는 도시 건설 등에 동원된 것이다. 에도시대를 생각한다, pp.98-99
참근교대는 본래 목적과 관계 없는 부가 가치와 수 많은 나비효과를 낳았죠..에도에 체류한 번 마다의 사무라이 수 자체가 파악이 안됩니다. 한 번도 집계된 적이 없죠. 번의 기밀 사항이라 오픈하지 않았습니다. 에도 인구 100만, 200만 설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사무라이 인구에 대한 통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추정만 하는거죠. 제 영상 중에 농민이 구입해 간 다이묘 저택 분변량으로 체류 인원수와 말의 수를 추정한 내용이 있습니다. 즉, 병력 규모가 파악이 안되는데 에도 방어를 위해 상주시켰다는건 좀 논리가 약하다고 봅니다. 가장 큰 목적은 매 월 에도성에 등판시켜 끊임없이 주종 관계를 확인시키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에도 방어를 위해서 토카이도 등 주요 가도 요소요소에 친번, 후다이, 하타모토 영지를 배치한게 오히려 에도 방어를 위한 적극적 액션이겠죠. 1만 석 미만의 하타모토 중 원격지에 영지가 있는 일부는 참근교대를 해야 했습니다. (코오타이 요리아이). 비슷한 이유죠. 반대로 에도가 아니라 에도성 방어적인 측면은 고려되어 있습니다. 에도성 주요 출입구 인근에 배치된 다이묘 저택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죠. 주요 출입구인 사쿠라다문 바로 인근에 이이 나오스케 저택을 비롯, 에도성 주변을 둘러싼 다이묘 저택이 친번이나 후다이로 둘러싸여진 걸 알 수 있습니다. 뭐... 막상 보신전쟁 터지자 대부분 배신때렸지만... 지금의 도쿠가와 당주는 모리, 시마즈와 친하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ㅋ
조금 더 나아가, 살아 남은 오사카 상인들의 생존전략을 알고 싶기도 합니다. 분명 시류의 흐름을 알았을테고, 자금 융통을 거절하고 채권 회수에 적극적인 뭔가 액션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일본 상인 가문의 자료가 의외로 별로 없다고 합니다. 미츠비시의 자료가 교과서 처럼 인용될 뿐이라고... 미츠비시 사관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 더 찾아봐야겠어요.
도바 후시미 전투 후에 오사카 거상들이 신정부에 많은 자금을 바쳤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감격해서 신정부 수도를 오사카로 정하자고 주장했다가 철회한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각종 기업들과 금융 기관을 세우고 주식과 채권 형태로 사족과 화족들의 여유자금을 자본으로 전환해서 해피엔딩..
교과서에서 보기로는 신정부도 각 번으로부터 이양받은 채권으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엄청난 금이 유입되면서 해결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이러한 혼란기에 각 번에 엄청난 자금을 융통했던 민간 상인들도 엄청난 손해를 보았을 거라 쉬이 예상이 되었는데 몰랐던 사실 배우고 갑니다요
항상 재미있는 영상 감사합니다! 그런데, 에도시대 상인과 다이묘의 재정문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이묘들은 농민이 아니라 상인에게는 세금을 안 걷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4공6민 등 농민에게 쌀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상인 같은 다른 직업에도 세금을 걷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같아서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농민에게 거둔 형태의 정확한 세금(年貢, 넨구) 개념은 얎었습니다. 상인의 소득 파악이 안되기 때문에, 지금의 소득세나 법인세, 부가세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세금을 아예 거두지 않았다는건 아닙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상인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세금제도를 운영했습니다. 1. 고요오킨(御用金) 채권과 비슷한 느낌으로 상인에게 자발적, 비정기적으로 받은 돈. 이자를 주고 빌리는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강제 명령이었고 시대가 지나면서 안갚아도 되는.돈으로 탈바꿈. 1761년부터 20회 시행. 2. 운죠오킨(運上金) 일종의 영업세로, 상공인이 매년 정해진 세울에 따라 세금을 납부. 개별 상공인의 정확한 수익은 파악 안됨. 3. 묘오가킨(冥加金) 특정 상업 분야(예를 들면 여관업 등)의 독점권(카부나카마(株仲間))을 인정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지불하는 상납금. 지불하는 자가 액수를 정함.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돈도 매년 상납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운죠오킨과 차이가 옅어집니다. 지금까지는 막부 이야기이고, 각 번에서도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농민(百姓, 햐쿠쇼오)이 피지배 계층의 80% 정도였기 때문에, 세금=농민의 이미지가 강한거죠.
조선이 일본에 먹힌 이유가 상업과 공업을 천시한 탓이지요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국되었다고 하나 일본은 공업적 상업적 준비(예를 들면 이미 미국에 개항되기 전에 쌀을 가지고 선물거래가 이루어진, 오늘날의 증권시장과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는)가 된 상태에서 개국이 되었고 조선은 뭐... 에휴 그나마 상공업이 막발달한 그 상태에서 대원군이 경복궁 만든다고 마구 돈을 찍어내는 통에...(일본 식민지배 혹은 친일파 면죄부 주자는 발언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왜 일본에 먹히게 될 지경까지 되었나 반성해야 한다는)
시류가 많이 달라지긴 한 듯 합니다.. 한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이야기 꺼내면 죽일 놈 취급 당하고 민족의 역적(?) 이런 낙인이 찍혔죠. 요샌 왜놈들 탓하기 전에 조선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망했는지 되짚어보자는 분들이 주변에 정말 많이 보여요. 성역이 깨지는 느낌입니다. 이에 비견되는 놀라운 통계가 있습니다. 최근 조사 결과 20대 이하의 연령층에서는 반일감정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합니다. 소위 젊은 세대는 일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죠. 대신 중공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합니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면 부모세대 입닥치라 하고 한미일 군사 동맹을 꼭 완성해 주면 좋겠습니다. 3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데 끊임없는 반일선동과 교육에 3국 모두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중국은 국가 전략이 한미일 국가 이익과 전략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적은 되도, 동맹은 될 수 없죠. 젊은세대의 인식이 정답입니다. 젊은 세대들 파이팅 !
유신 이후에는 몰수된 막부 직할령과, 하타모토 영지 등이 현(県) 또는 부(府)로 편입되었습니다. 번(藩)은 번대로 남아있고요. 현, 부, 번이 잠깐이지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모두 막부 직할령이었죠. 봉행소가 존재했고, 중심지역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은 "부(府)"로 칭했습니다. 나가사키는 나중에 현으로 바뀌었죠. 현재 오사카 부, 교토 부로 불리는 이유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보신전쟁에서 패배한 번 영지가 몰수되면서 쪼끄만 새로운 번을 만들어 그쪽으로 내몰기도 했고요. 아이즈번이 해체되고 토나미번이 새로 생기며 구 아이즈번 사무러이는 10분의 1 정도 되는 규모의 토나미번으로 쫒겨갑니다. 그리고 폐번치현... 번은 완전히 사라지죠.
에도시대 초기에는 그런 혼란이 있었습니다. 전국시대 말기와 겹치는 시대이기 때문이죠. 전국시대 전투병 출신들이 농민이 많잖아요. 토호들과 농민의 전투 본능이 남아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계층에 관계 없이 여차하면 서로 칼 휘두르는 일이 잦았습니다. 봉공인(하인)에 대한 사적 처벌권도 있어서 과실을 저질렀을 때 죽일 수도 있었고요. 에도의 양아치, 카부키모노가 활개치고 다닌 시기를 보면 계층에 관계 없이 칼 차고 다니며 사건이 일어납니다. 막부가 서민계층이 칼 두자루 차고 다니지 못하게 정리하는데 1백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결국 한자루는 차고 다녀도 되는 걸로 마무리 됐죠. 상대도 와키자시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토요미 히데요시, 시바타 카츠이에, 호소카와 가문에서 실시했던 칼 사냥도 다 실패했고요. 에도시대의 중흥은 170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입니다. 제 영상 중에 에도시대 살인사건 관련 영상이 몇 가지 있는데요. 서민에게 칼맞아 죽는 사무라이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잇키는 통계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에도시대 260년 역사 동안 3200번 정도 발생했죠. 1년에 펑균 13건이 채 안되죠. 250개가 넘는 번에서 1년 평균 13건이라... 의미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이도 3대 대기근 기간동안에 집중되어 있었고요. 연간 10회가 안되는 해가 대부분입니다. 즉 잇키는 빈번하지 않았습니다. 에도시대 지배구조 상 농민이 나약한 존재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닌구미(5인조)를 최소 기반으로 무라의 촌장(쇼오야, 키모이리)은 전국시대 토호 무사 계층이 눌러 앉은 경우가 많아 농민과 영주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부농이 생기면서 소작농이 늘어났고, 가난을 면치 못하는 자가 많기는 했지만, 영주의 폭거에 쵸오산, 카케오치로 불리는 집단 이탈 행동을 하기도 했고, 이런 일이 쌓이면 영지몰수의 떡밥이 되기 때문에 영주가 쥐어 짜는 것도 "살지도 죽지도 못할 만큼" 정도를 잘 유지해야 본인도 살 수 있었습니다. 마비키에 대한 통계가 있을리는 없지만, 식량난에 허덕이던 사람과, 헤아즈미,.불륜 등으로 애당초 애가 생겨서는 안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진 낙태의 일종으로 보는게 합당합니다. 농가와 쵸닌은 가난 또는 불륜으로, 무가 사회에서는 예비품 아들인 헤야즈미, 얏카이모노에게 시집 온 여자가 임신했을 때 피임 기술이 앖던 시절, 결국 태어난 이후에 죽이는 끔찍한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겁니다. 가난은 마비키 원인의 한 이유일 뿐입니다.
누가그래요 ㅋㅋ 조선후기 되면 부농,상인이 증가하면서 양반신분을 사서, 지방에서 관리에게 뇌물주고 자리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기존의 양반층이 위기를 느끼고, 지방에서 구양반과 신양반끼리 싸우고, 국가사회문제로까지 번지고, 신분제가 와해되는 지경에까지 다다르는데. 대체 어느 지구의 조선시대를 생각하시는지.
2015년에 방영되었던 NHK아침드라마 「あさが来た」에 메이지 유신과 폐번치현으로 위기에 닥친 오사카 거상들의 몰락과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는 가문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제 영상에 언급된 카시마야에 시집간 여성 사업가의 이야기인가 보네요. 드라마에서는 카노야.로 나오는거 같던데.. 맞겠죠?? 지금부터 시청 들어갑니다..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아침드라마라 그런가 한 편이 10분 정도 분량이네요. 150회가 넘는 분량이라 시간이 걸리지만, 흐름을 타고 25화까지 훌쩍 클리어 했습니다. 지금 카노야에 시집 온 아사짱이 오사카 쿠라야시키 찾아다니며 돈 받으러 다니고 있네요.
@@samurairomance 대하드라마는 거의 전국시대 아니면 막부 말기까지 보여주는게 대부분이었던거 같은데 최근들어 메이지 ~ 다이쇼 시대상을 보여주는 대하드라마나 아침드라마가 종종 보여서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아침드라마가 10분정도로 짧으니까 오히려 한편만 더 하다가 두세시간 훌쩍 지나가버리더군요.
17세기에 종이증권을 통용시킬정도라면 당시 일본의 신용경제가 상당히 고도화된 수준에 이르렀다는걸 짐작할수있음
한국도 조선후기때 지역별 상인집단(의주 만상, 개성 송상 등)이 운영하는 객주나 여각에서 발행한 어음이 있긴 했음 근데 이건 신용이 보증되고 채무불이행시(?) 처벌이 가능했던 타 상인집단과의 거래나 고위층간의 거래에 쓰여서 뭐..나중에는 민간에서도 쓰였지만 대개 장리라고 하는 고리대 어음으로나 쓰였고ㅋㅋ
@@invitebyte3278화폐경제가 고도화되면 먼저 비효율적인 노예제가 사라져야하고 그 다음엔 부르주아혁명이 있어야하는데 조선에서는 이 두개가 부재하였음 사적유물론상 조선은 화폐경제를 제대로 운동시키지못한 미개국으로 봐야함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신분제가 뒤집어질까봐 상업을 어떻게 해서든 가능한한 최대한 억압했는데 그래도 그 와중에도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더 앞서간 면이 있네요.
부와 권력이 분리된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배층은 가난했고, 피지배층은 지배층 급여 시스템과 가신단 구조의 헛점을 파고 들어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고요. 나중에는 요시와라 등에서 볼 수 있는 피지배층의 문화에 지배층이 동화되기도 하는, 참 얄미울 정도로 특이한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eliyahaverial 한국같은 경우엔 어느시대에서든 국가가 강력한 규제정책을 펼쳤고 예외로 두는것을 특혜로서 소수의 상인집단에게 부여했기 때문에 통제가 가능했음 조선시대 상인집단(만상, 송상, 경상 등)들도 국가의 특혜와 예외를 통해서만 장사가 가능했고 선을 넘을땐 강력한 제재를 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볼때 결이 좀 다름
지금도 한국은 포지티브 규제 국가, 즉 일단 전부 규제로 막아둔 뒤 나중에 하나하나 규제를 해금하는 정책이라면 일본은 네거티브 규제 국가 즉 일단 전부 풀어둔 뒤 문제생기면 하나하나 보완책으로 막는 정책이고. 뭐가 다르냐고 할수 있지만 포지티브 규제 정책은 국가가 규제의 해금 범위, 대상을 통제할수 있다는거고 그 과정에서 특정 대상에게 특혜를 줄수 있다는거지. 다시말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라는거.
진정한 귀한 내용의 일본문화와 역사라고 생각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노력 많이 합니다. 감사합니다.
내용 너무 좋네요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로망스님, 항상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제대로 된 지식과 관점이 깊어진 기분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짧게 라도 자주 올려 주시니 좋네요
간만에 오셨네요.항상 응원 감사드립니다. 8월부터는 월 3회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흥미진진하네요
다이묘빚때문에 상인계층도 같이 몰락했네요 상인도 재산몰수때문에 어쩔수없이 다이묘랑죠닌같은 중앙고위관료들이랑 결탁할수밖에 없을것같아요
메이지유신과 폐번치현에 따른 구채권채무 관계의 변화와 오사카 상인들의 흥망이라니 참 귀하고 알찬 지식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길고도 끔찍한 여름 형님의 지방군 군축현황은 좀 어떠신가요? 저는 주6일 헬스장 출근이라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이요법에 실패했는지 지방군웅들의 발호가 도무지 수그러들지 않아 새삼 절망하고 있습니다ㅠㅠ 그냥 날씬해지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건강한 퉁퉁보로 살아야 할까봐요. 형님은 건강한 여름 보내고 계신지요?
95만 대군이.100만 대군으로 성장했습니다....
와... 막 나온 영상을 접하다니 감격
감격. 감사드립니다.
빚이 참 무서워
이 영상은 최고의 가치가 있다
리얼 역사이고 리얼 사회상이다
대마도ㆍ고토열도 지역에서 시마토쿠라고 상품권을 사서 쓴적이 있는데 그 느낌이군요. 그 지역 과 사용기한이 있었음.
뭔가 지역화폐 겸, 지방채 같은 느낌이죠. 번 자체로 보면 국채일 수도 있갰고요.
일본 근대사의 세밀한 정보 감사합니다 ❤❤❤
재미있게 보셨다니 좋습니다.
에도시대 각 번들이 재정적자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많은 책에서 지적하는 것이죠. 그런데 막상 당시 각 번들이 어디에 돈을 쓰느라 그렇게 막대한 부채가 쌓여 갔는지 설명하는 책은 아직 못 봤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각 번의 재정적자 원인에 대해 다뤄주실 수 있을까요?
보신(막부가 시키는 토목사업이나 접대 업무 등), 지배층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유지비용, 가신단 녹봉이나 번내 자잘한 사업 혹은 참근교대 및 에도의 다이묘야시키 유지비 등의 관리 비용 등의 고정지출 +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세입 = 만성적인 적자..
ruclips.net/video/FueES9k2Z3c/видео.htmlsi=HGlthyU0x4s6CllO 과거 영상인데요.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에도 막부에 대하여 다이묘들이 지고 있던 막중한 의무가 참근교대이다. 이에 대해서는 흔히 막부가 다이묘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강제한 책략이라는 시각이 여전하다. 분명 다이묘의 에도 생활은 번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막부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은 곡해이다. 참근교대는 군역 발동의 한 형태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막부가 직접 장악한 상비군은 적었다. 그래서 항상 다이묘를 절반씩 에도에 주재시켜서 수도 방위를 맡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막부가 각종 토목 공사를 다이묘들에게 부담지운 것도 다이묘의 경제력 삭감을 목적으로 했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보청역도 군역의 일종이다. 전국 시대 말기 이후 전쟁은 더 이상 맹장의 일대일 승부가 아니었다. 성을 쌓고 길을 내고 제방을 만들고 땅굴坑을 파는 등 갖은 토목 공사도 중요한 전쟁 행위였다. 그것이 평시에는 도시 건설 등에 동원된 것이다.
에도시대를 생각한다, pp.98-99
참근교대는 본래 목적과 관계 없는 부가 가치와 수 많은 나비효과를 낳았죠..에도에 체류한 번 마다의 사무라이 수 자체가 파악이 안됩니다. 한 번도 집계된 적이 없죠. 번의 기밀 사항이라 오픈하지 않았습니다. 에도 인구 100만, 200만 설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사무라이 인구에 대한 통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추정만 하는거죠.
제 영상 중에 농민이 구입해 간 다이묘 저택 분변량으로 체류 인원수와 말의 수를 추정한 내용이 있습니다. 즉, 병력 규모가 파악이 안되는데 에도 방어를 위해 상주시켰다는건 좀 논리가 약하다고 봅니다.
가장 큰 목적은 매 월 에도성에 등판시켜 끊임없이 주종 관계를 확인시키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에도 방어를 위해서 토카이도 등 주요 가도 요소요소에 친번, 후다이, 하타모토 영지를 배치한게 오히려 에도 방어를 위한 적극적 액션이겠죠.
1만 석 미만의 하타모토 중 원격지에 영지가 있는 일부는 참근교대를 해야 했습니다. (코오타이 요리아이). 비슷한 이유죠.
반대로 에도가 아니라 에도성 방어적인 측면은 고려되어 있습니다. 에도성 주요 출입구 인근에 배치된 다이묘 저택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죠. 주요 출입구인 사쿠라다문 바로 인근에 이이 나오스케 저택을 비롯, 에도성 주변을 둘러싼 다이묘 저택이 친번이나 후다이로 둘러싸여진 걸 알 수 있습니다.
뭐... 막상 보신전쟁 터지자 대부분 배신때렸지만...
지금의 도쿠가와 당주는 모리, 시마즈와 친하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ㅋ
시대가 점점 막부말과 메이지로 가는군요. 조금 있으면 일본 재벌이나 증권시장 같은 것도 나오는지 궁금하네요.
증권은 제가 전혀 몰라서요. 지금은 주식도 안합니다..날릴대로 날려먹어서..ㅎ
@@samurairomance
선물거래는 조금 다루신듯ㅎㅎ
아.... 이런 문제가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몰랐는데, 상세하게 짚어주시니 너무 감사드립니다. 확실히 체제가 완전히 바뀌다보니 과거 번정에 쓰이던 채권채무를 신정부가 다 끌어안기도 쉽지는 않았겠군요
조금 더 나아가, 살아 남은 오사카 상인들의 생존전략을 알고 싶기도 합니다. 분명 시류의 흐름을 알았을테고, 자금 융통을 거절하고 채권 회수에 적극적인 뭔가 액션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일본 상인 가문의 자료가 의외로 별로 없다고 합니다. 미츠비시의 자료가 교과서 처럼 인용될 뿐이라고... 미츠비시 사관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 더 찾아봐야겠어요.
도바 후시미 전투 후에 오사카 거상들이 신정부에 많은 자금을 바쳤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감격해서 신정부 수도를 오사카로 정하자고 주장했다가 철회한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각종 기업들과 금융 기관을 세우고 주식과 채권 형태로 사족과 화족들의 여유자금을 자본으로 전환해서 해피엔딩..
역사는 돌고 돈다고 우리나라 국채나 일본 국채 미국 국채도 저런식으로 될꺼 같네요
교과서에서 보기로는 신정부도 각 번으로부터 이양받은 채권으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엄청난 금이 유입되면서 해결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이러한 혼란기에 각 번에 엄청난 자금을 융통했던 민간 상인들도 엄청난 손해를 보았을 거라 쉬이 예상이 되었는데 몰랐던 사실 배우고 갑니다요
일본사의 발전을 보면, 뭔가가 "일어나야 될 때 일어났다"는 절묘한 타이밍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게 받아들여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해결 방식으로 큰 난관을 넘어가기도 하고요.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청에게 이겼다는 것보다,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었던 청의 체력과 경제규모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번들 각자가 채권을 발행하는거 보면 요새 이음같은 지방화폐 생각도 나네요.
오사카 4사단 전설이 나올 만했네요
높으신 분들을 믿지 않는다는...
오사카 4사단 전설은 뭔가요 ???
당시 조선과 비교 하면서 보니 흥미롭습니다
나도 저때 막부쪽에 돈 대주다가 그만 😂😂😂😂
아하 그래서 폐번치현을 순순히 받아들였네요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 지배층과 북한채무를 어찌 처리할지 폐번치현 정책을 잘 연구해야함
항상 재미있는 영상 감사합니다! 그런데, 에도시대 상인과 다이묘의 재정문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이묘들은 농민이 아니라 상인에게는 세금을 안 걷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4공6민 등 농민에게 쌀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상인 같은 다른 직업에도 세금을 걷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같아서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농민에게 거둔 형태의 정확한 세금(年貢, 넨구) 개념은 얎었습니다. 상인의 소득 파악이 안되기 때문에, 지금의 소득세나 법인세, 부가세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세금을 아예 거두지 않았다는건 아닙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상인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세금제도를 운영했습니다.
1. 고요오킨(御用金)
채권과 비슷한 느낌으로 상인에게 자발적, 비정기적으로 받은 돈. 이자를 주고 빌리는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강제 명령이었고 시대가 지나면서 안갚아도 되는.돈으로 탈바꿈. 1761년부터 20회 시행.
2. 운죠오킨(運上金)
일종의 영업세로, 상공인이 매년 정해진 세울에 따라 세금을 납부. 개별 상공인의 정확한 수익은 파악 안됨.
3. 묘오가킨(冥加金)
특정 상업 분야(예를 들면 여관업 등)의 독점권(카부나카마(株仲間))을 인정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지불하는 상납금. 지불하는 자가 액수를 정함.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돈도 매년 상납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운죠오킨과 차이가 옅어집니다.
지금까지는 막부 이야기이고, 각 번에서도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농민(百姓, 햐쿠쇼오)이 피지배 계층의 80% 정도였기 때문에, 세금=농민의 이미지가 강한거죠.
조선이 일본에 먹힌 이유가 상업과 공업을 천시한 탓이지요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국되었다고 하나 일본은 공업적 상업적 준비(예를 들면 이미 미국에 개항되기 전에 쌀을 가지고 선물거래가 이루어진, 오늘날의 증권시장과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는)가 된 상태에서 개국이 되었고 조선은 뭐... 에휴 그나마 상공업이 막발달한 그 상태에서 대원군이 경복궁 만든다고 마구 돈을 찍어내는 통에...(일본 식민지배 혹은 친일파 면죄부 주자는 발언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왜 일본에 먹히게 될 지경까지 되었나 반성해야 한다는)
저도 친일파입니다. 이제 면죄부 좀 주세요..
@@samurairomance 친일파가 아니라 지일파 이시겠지요 일본을 알자!
시류가 많이 달라지긴 한 듯 합니다.. 한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이야기 꺼내면 죽일 놈 취급 당하고 민족의 역적(?) 이런 낙인이 찍혔죠.
요샌 왜놈들 탓하기 전에 조선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망했는지 되짚어보자는 분들이 주변에 정말 많이 보여요. 성역이 깨지는 느낌입니다.
이에 비견되는 놀라운 통계가 있습니다. 최근 조사 결과 20대 이하의 연령층에서는 반일감정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합니다.
소위 젊은 세대는 일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죠. 대신 중공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합니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면 부모세대 입닥치라 하고 한미일 군사 동맹을 꼭 완성해 주면 좋겠습니다. 3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데 끊임없는 반일선동과 교육에 3국 모두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중국은 국가 전략이 한미일 국가 이익과 전략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적은 되도, 동맹은 될 수 없죠. 젊은세대의 인식이 정답입니다.
젊은 세대들 파이팅 !
@@samurairomance 해방 직후 친일파들이 모여서 결성한 정당이 민주당.
여배우 이지아 친일파 할아버지도 민주당 의원.
도요다 다이쥬 가 독도 니폰에 넘겨준 장본인.
영상 잘봤습니다
서민을 마음대로 사무라이가 죽여댔다는걸 믿는 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한...일본사 잘 모르는 저조차도 안믿어서 그런가.
근데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번이 생겼었나 보네요?
유신 이후에는 몰수된 막부 직할령과, 하타모토 영지 등이 현(県) 또는 부(府)로 편입되었습니다. 번(藩)은 번대로 남아있고요. 현, 부, 번이 잠깐이지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모두 막부 직할령이었죠. 봉행소가 존재했고, 중심지역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은 "부(府)"로 칭했습니다. 나가사키는 나중에 현으로 바뀌었죠. 현재 오사카 부, 교토 부로 불리는 이유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보신전쟁에서 패배한 번 영지가 몰수되면서 쪼끄만 새로운 번을 만들어 그쪽으로 내몰기도 했고요. 아이즈번이 해체되고 토나미번이 새로 생기며 구 아이즈번 사무러이는 10분의 1 정도 되는 규모의 토나미번으로 쫒겨갑니다. 그리고 폐번치현... 번은 완전히 사라지죠.
관련 영상을 만든지 몇년 되었는데 아직도 댓글로 도발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수 많은 문건에 나와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한 개만 나열해 보라고 하면 댓글은 거기서 끝납니다.
@@samurairomance판적봉환이다 폐번치현이다 정도는 들어본적이라도 있어서 유신 이후엔 번이 안생긴걸로 생각했거든요.그래서 의외였던
@@samurairomance 애초에 그렇게 막죽였음 진작에 대규모로 뭐가 터졌을텐데...
에도시대 초기에는 그런 혼란이 있었습니다. 전국시대 말기와 겹치는 시대이기 때문이죠. 전국시대 전투병 출신들이 농민이 많잖아요. 토호들과 농민의 전투 본능이 남아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계층에 관계 없이 여차하면 서로 칼 휘두르는 일이 잦았습니다.
봉공인(하인)에 대한 사적 처벌권도 있어서 과실을 저질렀을 때 죽일 수도 있었고요.
에도의 양아치, 카부키모노가 활개치고 다닌 시기를 보면 계층에 관계 없이 칼 차고 다니며 사건이 일어납니다.
막부가 서민계층이 칼 두자루 차고 다니지 못하게 정리하는데 1백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결국 한자루는 차고 다녀도 되는 걸로 마무리 됐죠. 상대도 와키자시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토요미 히데요시, 시바타 카츠이에, 호소카와 가문에서 실시했던 칼 사냥도 다 실패했고요.
에도시대의 중흥은 170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입니다. 제 영상 중에 에도시대 살인사건 관련 영상이 몇 가지 있는데요. 서민에게 칼맞아 죽는 사무라이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평화로운 에도시대에도 참근교대제로
지방농민을 가혹할 정도로 쥐어짜서
에도에 경제력을 집중시켰기에
전근대의 맬서스 함정의 제약을 넘어 상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영국도 인클로저 운동으로 불평등의 확대& 부의 집중이 산업혁명으로 향하는기반들 중 하나였죠;)
전쟁도 안하는 에도시대에 마비키(유아살해)나 잇키(농민봉기)가 괜히 빈발했던게 아님...
잇키는 통계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에도시대 260년 역사 동안 3200번 정도 발생했죠. 1년에 펑균 13건이 채 안되죠. 250개가 넘는 번에서 1년 평균 13건이라... 의미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이도 3대 대기근 기간동안에 집중되어 있었고요. 연간 10회가 안되는 해가 대부분입니다.
즉 잇키는 빈번하지 않았습니다.
에도시대 지배구조 상 농민이 나약한 존재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닌구미(5인조)를 최소 기반으로 무라의 촌장(쇼오야, 키모이리)은 전국시대 토호 무사 계층이 눌러 앉은 경우가 많아 농민과 영주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부농이 생기면서 소작농이 늘어났고, 가난을 면치 못하는 자가 많기는 했지만, 영주의 폭거에 쵸오산, 카케오치로 불리는 집단 이탈 행동을 하기도 했고, 이런 일이 쌓이면 영지몰수의 떡밥이 되기 때문에 영주가 쥐어 짜는 것도 "살지도 죽지도 못할 만큼" 정도를 잘 유지해야 본인도 살 수 있었습니다.
마비키에 대한 통계가 있을리는 없지만, 식량난에 허덕이던 사람과, 헤아즈미,.불륜 등으로 애당초 애가 생겨서는 안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진 낙태의 일종으로 보는게 합당합니다. 농가와 쵸닌은 가난 또는 불륜으로, 무가 사회에서는 예비품 아들인 헤야즈미, 얏카이모노에게 시집 온 여자가 임신했을 때 피임 기술이 앖던 시절, 결국 태어난 이후에 죽이는 끔찍한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겁니다. 가난은 마비키 원인의 한 이유일 뿐입니다.
@@samurairomance "살지도 죽지도 못할 만큼 쥐어짠다"는 단어부터가
전근대보다는 중세의 모습 아닌가요?
동시기 조선의 평균적인 농민 살림살이랑 비교하면 제도적인 차이가 너무 크죠
동시대 조선 농민의 평균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을 의미하고, 제도적 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를 의미하는지요?
44초 전 ㅎㅎ
1등 하트 드립니다.
:)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길만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었던 조선과 비교되네요 돈을 왜 빌립니까 누가 돈 많다는 소문이 돌면 잡아다가 없는 죄 뒤집어씌우고 주리틀고 멍석말이하고 감옥에 몇일 가둬두면 돈이 그냥 나오는데
누가그래요 ㅋㅋ 조선후기 되면 부농,상인이 증가하면서 양반신분을 사서, 지방에서 관리에게 뇌물주고 자리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기존의 양반층이 위기를 느끼고, 지방에서 구양반과 신양반끼리 싸우고, 국가사회문제로까지 번지고, 신분제가 와해되는 지경에까지 다다르는데.
대체 어느 지구의 조선시대를 생각하시는지.
조선 거상은 주로 어떤 것을 통해 부를 축적했나요?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귀족문화 또한 없던 시대인지라.... 궁금해 지네요.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