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군주 정조 - 나는 모든것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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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4 сен 2024
  • 역사야 놀자 에서는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 개혁 군주 정조의 일대기를 알아보자 )
    경기도 화성에 있는 융릉과 건릉의 입구에 들어가면 재실과 역사문화관이 보이며, 역사문화관에는 정조와 효의황후 건릉, 초장지인 최초의 건릉과 관련 부장품, 사도세자 현륭원의 조성과정, 장조와 헌경황후 융릉의 설명, 정조의 가계도가 있으며, 바닥에는 정조의 현륭원 거둥길이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1752년 9월 22일 아버지 사도세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의해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영조는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죠.
    정조의 태실은 현재 경기도 고양 서삼릉에 있으며, 태어나서 강원도 영월 계족산에 조성하였으나, 1929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옮기게 됩니다.
    정조는 경희궁의 숭정전에서 조선 22대 왕에 즉위하였으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정정당당하게 선포하며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화성 현륭원에 참배하러 오갈 때 잠시 머물렀던 서울 동작구 한강에 있는 용양봉저정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 소유로 이름을 용봉정이라 하였고, 오락시설 등이 있었으나, 광복 이후 정부에서 소유하면서 이 시설물을 철거하였으며, 1972년 서울 유형문화제 제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건물 하나만 남아있으며, 안에 들어가면 노량주교도섭도인 용양봉저정 모습과 정선의 동작진 그림이 있으며, 1795년 정조의 화성행행인 반차도가 있으며, 1,700여 명의 인물과 800필의 말을 담은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지휘하에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쟁쟁한 화원들의 공동작품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조운을 돕는 관청인 주교사의 표석이 보입니다.
    정조는 즉위하자 창덕궁의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기구로 삼았습니다. 규장각에 수만 권의 책을 갖추어 두고, 젊은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여 정조 시대의 문예 부흥과 개혁정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융릉과 건릉의 입구에 있는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 들어가면 천연기념물인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가 있습니다. 비자나무와 비슷하게 생겨서 개비자란 이름이 붙여 졌으며, 건물은 아름다웠습니다. 보시죠!
    융릉과 건릉으로 가는 길이 소나무로 되어 있어 아름답습니다.
    건릉은 정조의 능으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9년 왕세손에 책봉되어, 1775년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았고, 다음 해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에 있는 동안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파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였고, 또한 규장각을 두어 학문 진흥에,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수원 화성을 건축하는 등의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세상을 떠난 후 묘호를 정종이라 하였다가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를 정조로 바뀌게 됩니다.
    효의황후 김씨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여, 정조의 후궁 소생인 왕세자 순조를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올렸습니다
    정조가 승하하자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현륭원, 현재의 융릉 근처 동쪽에 건릉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여 건릉에 합장하려고 할 때 건릉의 능자리가 길지가 아니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정조가 생전 능자리로 염두에 두었던 여러 곳 가운데 수원향교 옛터인 현재 건릉에 합장하여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곳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1년과 2012년 이곳에서 왕릉 규모의 봉분 구역과 담장 시설, 그리고 왕릉 부장품에 적합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정조가 처음 묻힌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사도세자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되어,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으나 아버지 영조와의 불화로 병을 얻었고, 노론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등 문제가 거듭된 끝에 1762년 왕세자의 신분에서 폐위되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습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무덤을 만들고 이름을 수은묘라 하였으나, 정조 즉위 후에는 수은묘를 높여 영우원이라 하였습니다.
    1789년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재의 자리에 새로 조성하고 이름을 현륭원으로 되었고, 1815년 헌경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현륭원에 합장하였고, 1899년 원을 능으로 높여 지금의 융릉이 되었습니다.
    비각에는 현륭원 표석은 1789년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원의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고 세운 표석과
    융릉 표석은 1899년 사도세자를 장조의 황제로 추존한 후 이듬해에 현륭원 표석 옆에 새로 세운 표석입니다.
    곤신지로 1789년 현륭원이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이듬해에 조성한 원형의 연못입니다.
    정조의 가계도이며 .......
    정조가 사랑했던 의빈 성씨 묘가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있으며,
    아들인 문효세자인 효창원이 지금의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1944년 이곳으로 왔으며, 의령원은 사도세자의 큰아들인 의소세손이며 3살로 세상을 떠나, 정조가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조가 창경궁 영춘헌에서 1800년 6월 28일 여름에 승하하였고, 더욱 아쉬운 것은 이후 권력이 소수의 외척 가문에 집중되는 19세기 세도정치가 이어져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개혁 군주 정조의 흔적을 찾아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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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4

  • @독립문옆젊은학생
    @독립문옆젊은학생 Год назад +1

    책으로 본 역사를 직접 현장의 사진으로 보니 새롭네요. 잘 보았습니다.

  • @kimjsk01
    @kimjsk01 Год назад

    정조가 개혁을 해서 일반 백성들의 삶이 더 좋아졌나요? 그런 이야기는 별로 못들어서요. 안동 김씨 키워 준 기초를 닦았다는 것만 기억나네요. 차라리 영조는 일반 백성들을 많이 케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 @park-history
    @park-history Год назад +2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