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백난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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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5 сен 2024
  • 백난아(白蘭兒, 1923년 5월 16일 ~ 1992년)는 제주도 출신의 가수이다.
    본명은 오금숙(吳金淑)이다.
    1923년 5월 16일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1927년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데뷔 연도와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신빙성은 떨어진다.
    서울양재고등여숙을 졸업하고, 1940년 태평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한 콩쿠르 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다. 같은 해, 선배가수 백년설에게 ‘ 백난아’라는 예명을 받고, 오동동 극단을 취입하였다.
    〈오동동 극단〉이 히트되자 그녀는 계속 〈갈매기 쌍쌍〉, 〈망향초 사랑〉, 〈땅버들 물버들〉,
    〈도라지 낭랑〉, 〈아리랑 낭랑〉, 〈찔레꽃〉, 〈흥아의 봄〉 등을 취입하였다.
    대한민국이 일본에게서 해방될 직전까지 태평레코드에 전속으로 있으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해방 직후에는 ‘파라다이스 쇼단’을 운영하며 대한민국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고,
    1949년부터는 럭키레코드 전속으로 〈금박댕기〉, 〈낭랑 18세〉, 고려레코드에서 〈인도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곧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그녀는 전쟁 중 연예인들의 아지트였던 대구로 피난하였다.
    그 곳에서 여러 연예인들과 활동하며 한때는 군예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전쟁 후에는 태평레코드와 서라벌레코드에서 활동하며, 〈멕시코 나이트〉, 〈고랑포 아낙네〉 등을 취입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활발히 신곡 취입을 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하였다.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리면서, 그녀는 원로가수 대접을 받으며 방송출연을 활발히 하였는데
    특히 〈가요무대〉에서 자주 출현하였다.
    그러던 중, 1992년 대장암이 발병했고, 평소 지병이던 심장병이 겹쳐 결국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백난아 / 찔레꽃
    김영일 작사 / 김교성 작곡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의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삼년 전에 같이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그리운 시절아
    2.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그대와
    연분홍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1941 년 5 월, 태평 레코드사에서는 이 '찔레꽃'을 내고
    OK 레코드사에서는 고운봉의 '선창'을 발표했는데
    별로 반응이 신통치 못했던 것이, 해방과 더불어 양사(兩社)의
    이 두 노래가 약속이나 한 듯 각광(脚光)을 받아
    히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서 핍박과 서러움에
    눈물짓던 실향민들에게 찔레꽃 피는 고향을 노래한
    백난아의 '찔레꽃'은 더 없는 향수를 자극하여 공감을 느끼게 하여
    너도 나도 이 노래를 열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찔레꽃]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백난아가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첫 발표 시기는 1941년 5월이라는 설도 있다.
    김영일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곡으로,
    한국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찔레꽃을 소재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렸다.
    처음 백난아가 이 노래를 발표했을 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광복과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가사가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어 '국민가요'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 중 3절에는 "북간도"라는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북방의 이국에서 "남쪽나라 내 고향"과 "못 잊을 동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연이 소박하게 담겨 있는데다,
    푸근하고 따뜻한 백난아의 창법과 잘 어우려져 한국적 정서와 망향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전문 프로그램인《가요무대》가 2005년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를 조사해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발표된 곡이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계속 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북조선에서 공연을 가졌던 김연자의 증언에 따르면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과 함께 김정일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2007년 백난아의 고향인 제주도에 찔레꽃 노래 공원과 노래비가 세워졌다.
    몇 해 전, 한국방송윤리위원회의 오인(誤認)으로
    월북작가의 작품으로 낙인 찍힌 바 있었으나
    작사자 김영일씨의 항변으로 오인(誤認) 사실이 밝혀져
    금지곡(禁止曲)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대사)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풍운이 휘몰아치던날
    우린 그 어느때보다 슬픈 별아래 살아야 했다
    절망의 황혼 우린 허수아비였다 슬픈 앵무새였다
    광란의 전쟁앞에 바쳐진 슬픈 제물이었다
    정거장마다 목이 메여 미친듯 남의 군가를 부르며
    남의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충혈한 눈동자가
    그 절망의 황혼을 보고 있었다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기는 근로보국대의 하룻날
    어린 소년들은 점심을 굶었고 고갯마루를 오르는 목탄차는
    일제의 마지막 숨결인양 허덕였지
    까까머리에 국민복 을씨년스런 몸빼차림으로
    한톨의 배급쌀을 타려고 왼종일 이른바 나라비를 섰고
    처녀들은 정신대에 뽑혀 갈까봐 시집을 서둘렀지
    못견디게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산천은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우린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는데...
    (1)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언덕 위의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삼년전에 같이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그리운 시절아
    (2)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그대와
    연분홍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잊을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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