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교법문】 깨달음으로 가는 두 가지 길: 해오와 증오, 그리고 사리불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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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5 фев 2025
- 혹자는 말하였습니다.
보조국사의 『절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깨침의 모양을 밝히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해오니 성품과 모양을 밝게 밝히는 것이요, 둘째는 증오니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해오에서의 ‘해’라 함은 지해, 즉 알음알이 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의 성품 모양을 알긴 알았는데 분별심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아는 그것을 해오라고 합니다. 이 해오에 있어서는 번뇌망상과 사랑분별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증오라 하는 것은 실지로 자성을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해서 참으로 체득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몇 구절이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백이면 백 해오를 그저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라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취산스님의 전자책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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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보조국사의 『절요』란 『화엄론절요』를 줄인 말입니다. 이것은 화엄학자 이통현 거사가 『화엄경』을 40권으로 정리한 『신화엄경론』을 다시 3권으로 요약하고 정리한 글입니다.
그런데 정말 『절요』에 이런 말이 나올까요? 이것은 오히려 『정원신역화엄경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해오에 있습니다.
해오란 곧 부처의 법문을 듣고 경전을 보고서 실상을 아는 지혜를 열어 법신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해란 삼승의 의심을 풀었다는 것이고, 오란 부처의 성품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법화경』 「제바품」에서는 말하였습니다.
“무량한 중생이 법을 듣고서 해오를 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경전을 보고서 부처의 성품을 이해했다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에 딱 맞는 사례가 바로 사리불이 깨달음을 얻는 경우입니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석가모니 부처께서는 말하였습니다.
“모든 부처들이 세상에 나와서 무량한 방편으로 각가지 인연에 비유를 들어 중생을 위해 모든 법을 연설하는데, 이 법은 모두 일승법이기에 모든 중생이 부처를 따라서 법을 듣고서 구경에 모두 일체종지를 얻는다.”
사리불은 이 「방편품」에서 부처의 일승법문을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에 다시 석가모니 부처께서는 사리불에게 장차 부처를 이루게 될 거라는 수기를 하였습니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미래세에 무량한 불가사의 겁을 지나면서 무수한 부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바른 법을 받들어 간직하고 보살이 닦는 도를 구족한다면 마땅히 부처를 짓게 되리라. 그리하여 화광여래라고 불리게 되리라.”
이것은 곧 일승법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법실상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견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천태 지자대사는 ‘해오수기’라고 하였습니다.
『법화현의』에서는 말하였습니다.
“마치 법화의 삼주설법으로 성문을 끊고 모두가 하나의 실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혹자는 ‘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해오이고, 알음알이로 아는 것이 해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간격입니까? 그 간격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를 살피지 않고 허다한 자들이 이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해오는 머리로 불법을 이해하는 것이고 증오는 실참실구하여 깨닫는 것이라고 모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불교의 풍속도입니다.
이 해오는 오히려 오직 뛰어난 상근기만이 얻는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사리불만이 곧장 해오를 하고 수기를 얻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오를 그저 범부 수행자가 이해하는 것쯤으로 폄하를 한다면 참으로 멀고도 아득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해오라고 하고 무엇을 증오라고 할까요?
『종경록』에서는 말하였습니다.
“깨달음으로 인하여 닦는 것은 곧 해오이고 닦음으로 인하여 깨닫는 것이 곧 증오이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바로 일승법을 깨닫고, 성품을 보고, 반야의 지혜를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리불은 저 아라한 가운데 상근기이기에 곧장 알아듣고 깨달은 것입니다. 이전에 사리불은 일승법을 닦지도 않았습니다. 달마의 무심 육조의 돈교법을 따라 수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처가 설하는 일승법을 듣고서 곧장 일승법의 문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법실상을 보는 눈이 곧장 열린 것입니다.
‘닦아서 깨닫는다’는 것은 곧 돈교법을 듣고 그것을 닦아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내지는 삼승법을 따라서 점차로 닦아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육조대사께서 돈교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서 그대로 실행으로 옮겨 몸소 닦아서 마침내 일승법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증오입니다. 수행을 통해 저 일승법의 깨달음을 증득했다는 것입니다. 오란 성품을 깨닫는 것을 말하지 저 일체종지를 성취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경각에서 성취하는 것은 견성이 아니라 일체종지를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서 닦는다’는 것은 성품을 깨닫고 나서 다시 일체종지를 닦는 것을 말합니다.
해오를 다시 보겠습니다.
해오의 원인이 되는 것은 법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처가 설하는 일승법을 들었다는 것이고, 조사와 선사가 가리켜 보인 화두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 백천의 공안은 모두 해오를 여는 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마디를 듣고서 곧장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현칙스님이 청봉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저 자신입니까?”
“병정동자가 와서 불을 구하는구나.”
나중에 법안스님을 뵈었습니다.
법안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오는가?”
“청봉에서 왔습니다.”
“청봉스님은 무슨 말씀을 하던가?”
그리하여 앞 얘기를 그대로 하였습니다.
법안스님이 말했습니다.
“상좌는 어떻게 알았는가?”
“병정은 불에 속합니다. 그런데 다시 불을 구함은 마치 자기를 가지고 자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법안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알아서야 어떻게 얻겠는가?”
“저는 이렇습니다만 화상께서는 어떻습니까?”
“그대가 나에게 물으면 내가 말하겠다.”
“무엇이 저 자신입니까?”
법안스님이 말했습니다.
“병정동자가 와서 불을 구하는구나.”
이에 곧장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해오입니까? 증오입니까? 닦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결국은 해오를 한 것입니다.
(1부)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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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산스님과 함께 초심으로 돌아가기: 카카오톡 ID: taoind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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