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의 수상한 최후와 고구려 왕실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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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211

  • @김명기-i4u
    @김명기-i4u Год назад +61

    유리와 비류, 온조등 소년들의 싸움이 아니라 예소야와 소서노의 왕좌의 게임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소야는 고구려 2대세력인 송양과 사돈관계를 맺어 세력을 강화해 유리를 왕좌에 올린듯 합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7

      예씨 부인이 개입했을 것이라고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좋은 인사이트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약 유리가 정말 주몽의 친자라면, 말씀하신 대로 어머니들의 치열한 대립이 펼쳐졌을 것 같습니다.
      이미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던 소서노를 상대하려면 예씨 부인 또한 상당한 세력이 필요했을 텐데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아볼 수가 없으니 계속 궁금할 따름입니다.

    • @seahawk7893
      @seahawk7893 Год назад

      고구려 2대세력이 송양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왜 조센 유튜버들은 아무 근거가 없는 뇌피셜로 역사를 논하는지 이해가 안가는군요

  • @김지훈-f1p1s
    @김지훈-f1p1s Год назад +14

    소서노 집단이 백제까지 이주한 과정도 미스테리하죠.
    소서노를 따라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 이주했을텐데 그러면 식량과 농기구 등 막대한 물자를 수송해야했을테고, 행렬 규모도 수천에서 수만은 되었을 겁니다. 이 정도의 집단이 움직이려면 육로로 움직였을 텐데 그 머나먼 백제땅까지 대체 어떻게 갔을지? 그리고 이주과정에서 대방군, 낙랑군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 @ghjuymoon2817
      @ghjuymoon2817 2 месяца назад +1

      그래서 대륙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설이 더욱더 힘이 실리는듯 합니다 실제로 산둥사람들과 우리의 말의 어순이 같다고 합니다

    • @pus6646
      @pus6646 2 месяца назад

      @@ghjuymoon2817 백제랑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일부 유민들이 가서 정착한거 같은데요.

  • @pccloud5544
    @pccloud5544 Год назад +29

    어쩐지 이상하긴 했습니다. 그 옛날에 친자식을 어떻게 알아봤을지도 의문이고 또 친자식이 나타났다고 해서 부인이랑 딴아들들이 곱게 양보하고 물러났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좋은 얘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6

      저도 그와 같은 의문에서 시작해서 오래도록 이 주제를 고민해왔습니다. 관련해서 여러 설들이 있으며, 심지어 주몽은 중국 장수에 의해 처형 당했다는 이야기까지도 가설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진실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발굴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잘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쪼록 저희 채널의 영상이 재미와 유익함을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 @yeeunjo8929
      @yeeunjo8929 Год назад

      스키타이.사카.석가 = 색족
      주몽이 스키타이 계열 이었고
      유리역시 아버지 주몽의
      유전자 발현이 강하게 나타난
      인물 이었다면
      기존 황인과 뚜렷한 구분이 되었을것 .
      신라 성골역시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
      지배계층 자녀의 군사조직 화랑이
      얼굴에 백칠을 하고
      뚜렷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화장을 하는등
      백인특징이 약해지는
      혼혈 후손들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
      신라말기
      혼혈 황인.진골 세상 이었던
      시대에 뜬금없이 나타난
      성골 궁예
      어려서 부터 죽을위험 속에서
      불교에 귀의 했다가 출가 하면서
      급속도로 세력확장
      뭐라 설명할수 없는일엔
      피부색 .골품제가 분명
      영향이 있었을거 봅니다

  • @serendipity0923
    @serendipity0923 Год назад +13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사실 그냥 역사를 직관적으로만 보던 이과생인데 이런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것이 재미있네요. 좋은 영상 감사함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영상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게 봐 주실 수 있는 영상들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곰곰고고곰
    @곰곰고고곰 Год назад +41

    사실 고구려는 시작부터 끊임없는 내전의 연속이였죠 결국 나라 망하는거도 내분이였으며 장수왕시절 3국을 통일 하지못한 이유도 평양성 귀족들과 국내성 귀족들의 내전이였죠 결국 내전없이 왕권을 강화시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게 어찌보면 고대왕국시절 왕권이 제일 중요했다는 반면교사일지 모르겠네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8

      그런데 내전이 잦았기 때문에 군사력이 더 강했던 것도 있습니다. 고구려도 평양과 국내성 세력 및 기타 요동 세력 등의 반 군벌 형태의 세력들이 많았고, 그들의 내분이 잦았던 만큼 그들 각자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도 마찬가지로 호족 세력들이 강했고요.
      반대로 내전의 가능성을 아예 말살해 버린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던 조선은 지방 세력이 전혀 군사력을 지니지 못하게 됨으로써 군사적으로 현저한 약화를 보이며 나약해졌지요.

    • @user-ss6tp1sq5g
      @user-ss6tp1sq5g Год назад +8

      신라가 내전이 앖었다고?? 비담의 난 칠숙 품석의 난 등등 내분 엄청 심했는데?

    • @펨코유저
      @펨코유저 Год назад +9

      신라는 타국에 비해 내분이 없었음
      비담도 그 반증임 타국이면 전쟁을 못하는 여성국왕은 말이 안되지

    • @부산시민-p2s
      @부산시민-p2s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신라는 삼국통일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엇다.
      멸망에 즘해서 외세 당을 끌어들여
      백제 병합을 운돟게 햇을뿐..... 당이 물러간것도 토번의 대대적 강침력으로 당이 물러가 운좋게 살아 남앗을뿐 .....삼국통일로 과대포장은 마라.

    • @Aqljaegkmskag
      @Aqljaegkmskag 7 месяцев назад +3

      ​@@Hmentary 군사력을 올리자니 쿠데타나 내전이 걱정이고 그렇다고 문치를 하면서 군사력 약화시키려니 외부의 적들에게 당하고 어렵네요

  • @LML-ggg
    @LML-ggg Год назад +18

    유리가 친자가 아니고 주몽을 죽이고 찬탈했을거라는 가설을 들어본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고구려 태조왕이 해씨왕족을 몰아내고 고씨왕족을 세운것은 아닐까라는 가설을 들어본 적이 있긴 했는데 유리찬탈설도 듣고 역사멘터리님의 가설도 같이 보니 흥미롭네요. 조예가 친자가 아닌 친척의 아들 중에 하나인 조방을 아들로 삼아 물려준 역사의 예를 보면 역사멘터리님의 가설도 일리있다 생각합니다. 근데 그 가설대로면 주몽은 후손을 남기지 못한게 되겠네요;;
    추가로 송양-유리의 관계가 다음대인 송옥구-대무신왕으로 이어지는걸 보면 주몽 사후의 대권다툼에서 유리-송양이 소서노일파를 확실히 이긴건 맞는 것 같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6

      맞습니다. 유리가 주몽의 친자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결국 승자는 유리와 송양의 연합이었고, 그게 고구려 초기의 핵심 권력 그룹이 된 것 같습니다.

    • @Sffeen788
      @Sffeen788 4 месяца назад

      후손은 백제 왕족들이될 것 같습니다

  • @idenia1
    @idenia1 Год назад +13

    주몽의 최후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기록이 있어요. 영상에서 언급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언급된 구삼국사 내용과 고려시대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보연 주몽이 승하후 장사시낼때 시신이 없어서 주몽이 사용하던 물건중 하나인 옥채찍을 놓고 장례를 치뤘다는 기록이 확실히 있습니다.
    더구나 같은 시기 중국 한서 왕망 열전에는 중국에서 고구려 후 추를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주몽을 추모로 부르니 추. 즉 주몽에게 뭔일이 있었기에 시신없이 장사를 지내지 않았나 하는 내용을 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물론 중국사서와 우리사서의 주몽 사망시기가 일치하지 않다보니 한서에 언급된 고구려 후 추라는 인물이 주몽, 유리, 혹은 고구려 장군 추 아니면 주몽과 유리 사이에 존재한 기록없는 왕이었다등 설들이 몇몇 존재하지만..
    중요한건 고려시대에 작성된 기록물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초대왕이 승하했는데 시신없이 장사 지냈다는것도 사실 정말 흔치않는 내용이라서.. 관련 내용 한번 다루면 재미있고 좋을것 같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4

      옥채찍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은 영상이 길어질 것 같아서 소개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고구려 후 추 처형 기록 및 옥채찍 건을 묶어서 후속 영상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사실 참 재미있는 역사적 소재이긴 합니다만, 사실을 재구성하기에 충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여러 추측과 가설이 난무한 상황이라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그런 추측과 가설들에 대해 알아보는 게 또 역사를 보는 재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 @킹세종-u3f
    @킹세종-u3f Год назад +11

    유전자의 힘은 무서운게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붕어빵 처럼 닮는 경우가 꽤 많죠 그러니 딱히 유전자 검사 없이도 주몽의 신체적 특징이나 외모를 유리가 매우 닮아서 주몽의 친자라고 확신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6

      사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면서 가장 놀랄 때가 자식이 자신을 너무 닮은 모습을 보이거나 자신과 너무 비슷한 행동을 할 때라고 하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유리가 주몽과 너무 닮아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친자라고 믿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 @seakim7298
      @seakim7298 2 месяца назад

      근데 닮는 아들도 있고 안 닮는 아들도 있어서..

  • @Laughinggas-l5w
    @Laughinggas-l5w 2 месяца назад

    굿🎉

  • @yd3254
    @yd3254 Год назад

    상당히 설득력 있는 논리네요. 잘 들었습니다. 구독 꾸욱~1 따봉 적립!

  • @apartment_in_Deagu
    @apartment_in_Deagu 3 месяца назад +1

    새로운 내용은 없네요

  • @최지훈-y4l
    @최지훈-y4l Год назад +5

    유리왕은 주몽의 고씨가 아니라 해씨를 칭함.
    그리고 태조왕때 해씨를 몰아낸 제3세력이 해씨를 부정하고자 주몽의 고씨를 다시 가져와서 정통성을 확보하려 함.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말씀하신 내용이 고구려 왕가의 성씨 변경 근거로 많이 언급되는 설 중 하나입니다. 그 가능성은 사실 나름 상당한 편이라고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청화수님팬
    @청화수님팬 Год назад +2

    초딩때였나 중딩 때였나 처음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읽으면서도 그 어린 나이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확실히 베일에 쌓여 있는 숨은 역사가 많았을 혼란의 고구려 초기 같아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삼국의 초기 역사가 모두 그런 것 같습니다.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고 베일에 가려진 부분들이 많죠.
      차차 하나씩 영상으로 소개하면서 그 미스테리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 @권태환-r8h
    @권태환-r8h Год назад +11

    고구려 태왕이 흥미로운게 6대왕이 태조라고 명명된것부터 고국천왕부터 이어진 천왕계 계보까지 학교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신기한 부분이 많네요.
    다른 사서에는 주몽이 노사나 병사한게 아니라 전투에서 죽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걸 보면 어쩌면 유리계와 백제 이주세력간의 내전이 있던게 아닌가 싶어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3

      아무래도 태조대왕 시기에 쿠데타를 통한 대대적인 지배층 교체가 있었고, 그 이후 끼워맞추기 식으로 역사가 어느 정도 조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심증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사서의 기록을 의심할 수는 없기에 보다 명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추가적으로 발견되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측 사서에 따라 주몽은 처형 당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 등 여러 모로 주몽의 최후는 여러 가능성을 남기는 미지의 이슈 같습니다.

  • @kmj6418
    @kmj6418 Год назад +9

    유리가 진짜 아들 아니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 영상이 가장 그럴듯한 가설 같네요. 단순히 따져봐도 얘기하신대로 유리가 주몽 죽였으면 주몽 부하들이 유리를 따르지 않았겠죠.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영상에서도 말씀드렸듯 제 생각에도 주몽의 개국공신들이 유리를 섬겼다는 게 주몽과 유리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핵심 쟁점 같습니다.
      적어도 주몽과 유리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같은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user-te7cj9fofdsfgcd
      @user-te7cj9fofdsfgcd Год назад

      세조때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 @gasiorowicz4899
    @gasiorowicz4899 Год назад +3

    박혁거세의 최후도 심상치 않습니다. 한번 다뤄주실수 있으신가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그렇지 않아도 저도 박혁거세의 최후에 대해 관심이 많아 자료를 수집하고 대본 작성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현재 작성이 완료되어 편집을 기다리는 영상들 이후 순서로 박혁거세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 @길냥시급식구셔틀동
      @길냥시급식구셔틀동 Год назад

      거세당해서 ㄷ짐

  • @Grhbale
    @Grhbale Год назад +7

    저도 유리가 주몽을 밀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게 만약 그랬다면 부여에서부터 함께해서 나라까지 같이 세운 오이 마리 협보 3명 모두가 유리를 따랐을것같지는 않아요 다만 말씀하신대로 소서노파가 정말 순순히 물러났을까는 의심이 들죠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저도 소서노 일가의 반응이 가장 궁금합니다. 백제 건국 과정에서 알 수 있듯 그들 또한 야심 많은 이들이었고, 모자 간의 갈등이나 형제 간의 대립도 추정되는 상황인지라 결코 쉽게 양보할 캐릭터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유리의 권력 장악이 너무 급속도로, 그리고 압도적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어떻게 손 써볼 방도가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gwarosada
    @gwarosada Год назад +3

    제일 신빙성있는게 주몽부터 모본왕까지는 같은 혈통인데 태조왕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주몽과 유리는 혈통이다르고 태조왕과 같다며 부여태후세력이 그러한것 같습니다.
    모본왕을 갑자기 폭군으로 만든것도 그렇고 태조왕의 제위시기나 수명을 봤을땐 태조왕시기를 연구하면 고구려 혈통을 이해할 수 있을듯 합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저도 고구려 왕실 역사에 있어 가장 호기심을 갖고 보는 인물이 태조입니다. 그 시기를 둘러싼 고구려 왕실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료가 발굴된다면 고구려 초기 역사 및 전체 역사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뭔가 수상한 냄새를 가장 진하게 풍기는 시기가 태조대왕 제위 기간이고, 그 이전과 이후가 정합적으로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니까요.

  • @이제원-o6j
    @이제원-o6j Год назад +3

    잘못 아신듯 하네요
    오이 마리는 유리의 새수도에 가지도 안았고
    협보는 자기세력 이끌고 고구려 떠나가는데 무슨 유리에게
    충성을 했다고 하시는지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오이 마리는 유리의 명령을 받고 양맥 정벌 및 한나라 침공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그들은 유리왕대까지 활약하다 은퇴하고, 딱히 유리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협보는 유리 치세 초기에 최고위 관직인 대보를 역임했고요. 다만 협보는 유리왕 22년 사냥 좀 적당히 하라고 직언했다가 강등 당하는 모욕을 겪은 뒤 남쪽으로 떠납니다만, 그 역시 무려 22년 동안 유리를 섬겼고 그 밑에서 최고직이었습니다.

  • @dsking1301
    @dsking1301 2 месяца назад +2

    가설은 가정일뿐 역사가 그렇다면 그렇게 믿어야죠. 사실은 당사자들만 알겠죠.

  • @albbano917
    @albbano917 Год назад

    마한세력은 소서노일가랑 충돌없이 백제 개국하게 그냥 뒀나요? 아니면 많은 세력다툼끝에 세운건지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마한 세력도 그렇고, 남쪽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거치게 될 여러 세력들이 소서노 집단을 그냥 통과시켜줬는지 아직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현재 정설이 없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 @albbano917
      @albbano917 Год назад

      @@Hmentary 아하 그내용은 배운적도없고 들은적도 없었는데 미스테리였군요 감사합니다

    • @dri13829
      @dri13829 Год назад

      @@albbano917
      애초에 온조의 남하 과정을 보면 마한 지역에 바로 정착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큼.
      마한 지역에서 출토 되는 백제 영역에서만 출토 되는 표지 유물만 봐도 온조 당시에 사람들이 아는 경기도 일대로 왔을 수가 없음.

  • @ung64
    @ung64 3 месяца назад +1

    후대의 추측과는 달리 대반전으로 부러진 칼이 딱 맞는 유리가 친아들이었다면ㅎㅎ

  • @jei1264
    @jei1264 Год назад +2

    우리나라 상고사에대해 제대로 알려진게 솔직히 없음 남아있는 역사서가 삼국사기 정도라 어쩔수없긴한데 삼국사기도 비교해서 분석해야할 부분도 많이 있기도 하고 온조왕이 백제를 세웠다지만 비류왕자가 실제로 밀려난 왕이였는지 온조이후에 비류왕이 나오는것도 있고 사반왕이후 고이왕이 갑자기 나오는데 성씨가 다르게 나오는것도 있고 아직 우리나라 상고사 연구는 많이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어느 나라나 고대사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 연구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나 우리는 사료 부족이 심각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실록이 있기에 상세하게 연구가 가능한데 그 반의 반 정도 되는 기록이라도 삼국이나 고려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 @likephoenix659
    @likephoenix659 Год назад +3

    재밌는 이론이네요. 유리가 주몽이 아들이 아니라 같은 씨족이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대충 스토리를 만들어 내 보면 부여에서 탈출한 소서노 일가가 졸본에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새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상황으로 졸본 세력은
    상당히 불안했고 해씨 일족에서 방계 취급을 받던 주몽을 끌어들여 그 방어를 취하다가
    이제 안정화가 어느정도 되자 소서노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국정을
    장악해 나가자 주몽이 원래 가문인 해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유리를 필두로 한 세력이
    내려와 해씨의 국가를 이어 나갔다. 이런 느낌 아닐까요? 오히려 유리가 주몽의 조카였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 지는 거 같긴 하네요. 부여의 해씨는 주몽의 형에서->유리의 형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게 되는 거고 주몽이 아이가 없었거나 혹은 아이가 있어도 해씨본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리를 양자로 들였다. 이런 내용의 소설 써도 재밌을 듯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사실 저도 가설을 소개한 것일 뿐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사료의 기록을 믿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만,
      역사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는 하나의 모티브가 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나와도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김정현-m1f
      @김정현-m1f Год назад

      가족 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높죠. 고추모와 해유리인데요

    • @하루하루-p9m
      @하루하루-p9m Год назад +1

      ​@@김정현-m1f원래 해추모인데 태조대왕때 이후 시조를 고씨로 바꿨다는 설도 있더라구요

  • @문성철-r4g
    @문성철-r4g 3 месяца назад

    박창화의 고구려사략의 기록을 어찌 보시나요?

  • @홀드온
    @홀드온 Год назад +2

    유리가 아들이 아니고
    다른 부여계 세력이라면 결국
    주몽이 다른 자식이 없었어야
    가능한 일이겠죠
    결국 유리는 다른 주몽의 자식들을
    모두 죽여야 했을거고
    그랬다면 개국공신들도 유리를 버렸으리라 봅니다
    결국 주몽과 유리 서로 부모 자식이라는 뭔가 증거 및 유대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DNA검사 만이 정확하지만 말이죠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사실 유리가 주몽의 친자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또 사서에는 어쨌든 친자라고 나오기 때문에 현재 공식적으로는 친자임을 가정하고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 @vivivi3865
    @vivivi3865 Год назад +6

    흥미롭게 봤습니다. 이런 가설도 소개해 주시는군요. 조만간 민족 근원 차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고려 영토에 대한 학설들도 자세하게 정리하셔서 꼭 소개해주길 믿습니다. 아래는 해당 학설에 대한 수많은 근거들 중 극히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고려의 영토는 요하(서북계)~선춘령(동북계)입니다. 당시 사료에 따르면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흑수, 달고, 철륵, 탐부, 환어라 등을 지배하는 대국이었고 발해의 지배층과 유민을 받아들여 영토의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고려사의 기록은 성종 때부터 시작된 고려거란전쟁 이후 현종의 치세를 기점으로 보주를 제외한 강동8주 영역을 확보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과 불내국, 흑수국, 철리국까지 복속시켰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이자 고려 최전성기의 군주 문종 시대에 와서는 간접지배하는 동북 영토의 판도가 절정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영토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관련 연구자들에 의한 최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10년 안에 교과서 속 고려 영토가 통째로 바뀔 전망입니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요하)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高句麗) 때보다 확장된 것이다. 고려가 다스리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極矣)를 이루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이고,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사실 저는 고려 영토에 대한 학설이 고구려 왕가에서 벌어졌던 계승 과정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가치를 어디에 더 두느냐의 차이이겠지요.
      저에게는 두 가지 주제 모두 역사적으로 접근해 볼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닙니다만, 민족사학을 자처하는 분들께는 영토 문제가 가장 중요한 탐구 대상이다 보니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제가 의무적으로 고려 영토에 대한 영상을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해당 주제는 최근 유사역사학을 전파하는 유튜버 분들께서 워낙 많이 다루고, 또 그에 대한 반박도 워낙 많이 올라오면서 치열한 논쟁이 오가는 데 반해
      사실 다수의 역사 좋아하는 분들께는 큰 관심을 유발하지 못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굳이 영상을 제작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울러 대륙 고려설 등에 대한 비판 영상을 올린다고 해 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의미도 없다는 생각에 굳이 헛수고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많은 분께서 대륙 삼국설과 대륙 고려설이 얼마나 근거가 부실한지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만, 그걸 옳다고 주장하시는 분들께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으니 굳이 제 작은 목소리까지 그 위에 하나 더 얹어야 하나 싶은 심정입니다.
      어쨌든 말씀하신 내용을 보자면,
      선춘령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인 주관은 현재의 다수설과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굉장히 자신이 없는지라 공식적으로는 저도 다수설을 소개하는 편입니다.
      말씀하신 '관련 연구자'들이 어느 분들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선생님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저 또한 고려의 동북방 영토는 "일시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팽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용하셨던 기록 및 사료들을 보자면,
      『고려사』의 지리지 서문 같은 경우 '선춘령'에 대해 상당히 후대인 조선 문종대의 해석을 담고 있으며, 저 역시 그 해석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 심증을 품고는 있습니다만, 설령 그것이 맞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게 제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또한
      『고려도경』은 오히려 대륙 고려설을 아예 송두리째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기록입니다.
      유사역사학 쪽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 딱 두어 줄만 인용해서 언급하는 게 유행이던데
      전문을 보면,
      그리고 두 가지의 애매한 오역을 바로잡으면
      오히려 고려 대륙설을 철저히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굉장히 많은 수수께끼를 던지는 문구를 인용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 문구에 대해서는 현재 이렇다 할 정설이 없어서
      1.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2.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보입니다.
      저 역시 『삼국유사』의 해당 문구에 대해서는 굉장히 조심스럽고 아직 저 나름의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바쁜 시기라서 요즘은 미리 제작해 둔 대본과 녹음본들을 편집자님께 보내 드려 놓고, 편집자님 일정에 맞춰 하나씩 영상이 제작되면 업로드만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10월 초까지는 그렇게 비축분으로 영상 업로드가 될 것 같습니다.
      10월 중순이 되면 시간 여유가 좀 생길 것 같은데,
      그때 말씀하셨던 내용 중 『고려사』 지리지의 선춘령과 『고려도경』에 대한 영상을 준비해서 업로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내용과 형식이 제가 기존에 제작했던 영상들과는 많이 다를 것 같기에
      따로 편집자님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 그냥 제가 필요한 정보들만 파워포인트로 정리해서 화면 녹화해서 제작하는 방식으로 영상 업로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민족사학을 자처하는 분이나 이른바 민족종교를 믿으면서 해당 종교에서 가르치는 우리 역사를 언급하는 분과는 일체의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오랜 경험상 그건 시간 낭비이자 학술적 토론이 아닌 종교적 신념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vivivi3865님이시라면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하신 내용으로 영상을 준비해 볼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고려와 조선의 동북방 영토가(서북방은 아닙니다. 서북방 쪽에 대해서는 확장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고 보는 중입니다.) 일시적인 팽창이 몇 차례 일어났다고 보는 입장일 뿐더러
      조선 말기가 되면서 조선이 더욱 쇠락해지기 전까지는 뚜렷하게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오가며 간도 지방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이고,
      그것은 현재 이른바 정설이라고 알려진 설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륙 고려설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사실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나 마찬가지겠지요.
      어쨌든 즐거운 마음으로 생각 정리하고 영상 준비해 보겠습니다. 10월 중으로는 가급적 말씀하신 내용을 대상으로 한 영상 업로드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vivivi3865
      @vivivi3865 Год назад +1

      @@Hmentary 음, 우선 다소 불편하실 수 있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영상 제작에 긍정적인 뉘앙스로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 저 또한 기존 학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들과는 말을 섞지 않거나 섞더라도 마음을 내려놓고 기계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정도입니다만 주인장님과는 몇 번의 전례와 본 영상의 취지로 보아 유의미한 대화가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 번 댓글을 게시해 봤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매우 민감한 주제인 만큼 관련 영상을 제작하시려거든 그것이 신랄한 비판이 됐든 설득력 있는 가설의 소개가 됐든, 먼저 자세히 연구하시고 알아보신 후에 만들어질 수준 높은 영상이길 바랍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단 저는 대륙고려설을 지지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많은 시간 사료와 논문을 검토해 본 결과 기존 사학계가 제시하는 고려의 영토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앞으로 새로운 내용이 드러난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제가 정리한 고려의 국경은 서북계 요하, 동북계 선춘령입니다. 고려가 중국 내륙에까지 있었다는 소위 대륙고려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먼저 이를 명확히 구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제가 고려사 지리지, 고려도경, 삼국유사의 기록을 "묶어서" 제시해드린 것은 고려 서북계에 대하여 교차되는 기록들을 스스로 직접 확인해 보시라는 의미였습니다. 어떤 학파, 학설과는 무관하게 그저 순수하게 읽고 생각해 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해당 기사들은 주장에 대한 극히 일부의 근거입니다. 대화를 통해 의문나는 부분들이 나올 때마다 계속해서 사료를 제시해 보겠사오니, 생산적인 토론과 함께 깊은 생각을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 @polalis1102
    @polalis1102 Год назад +1

    뭐가 됐든 유리 이놈이 적폐네 왕으로써도 무능했다고 들었는데 협보는 고구려의 개국공신이고 자기한테 입 바른 소리 좀 했다고 내쫓은것도 그렇고 맘에 안드는 놈임

  • @만류귀종-h1d
    @만류귀종-h1d Год назад +2

    딱하나 자기 어릴때랑 붕어빵 처럼 생겼으면 유전자 검사도 필요없이
    그냥 아들로 인정했을수도 있을거
    같음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 였을 수도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하긴 딱 봐도 아버지 붕어빵인 아들들이 워낙 많은데 유전자의 위대함으로 인해 그 어떤 증거도 필요 없이 아들로 인정 받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계환김-w1t
    @계환김-w1t Год назад +1

    서동 김알지 도쿠가와 처럼 정국이 어지러운 시국에 힘있는자가 자신이 권력을 취하고 숨겨진 자식 행세 하는것도 역사에 많이 있음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맞습니다. 심지어 요즘에도 재력가나 유력 정치인의 숨겨진 자식 행세하는 사람이 은근 되기도 하지요.

  • @에스카노르-i8j
    @에스카노르-i8j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지금와서 보기에 대고구려 세운 주몽이지만.
    주몽때만 해도 작은 도시 몇개 합친 세력정도 시절이였음.
    왕이라고 하기 어려운게 주몽임.

  • @heyday183
    @heyday183 Год назад +1

    이 부분 청화수 유툽 보면 잘 해석되어 나왔는데 궁금하시면 한번씩 보시길 ㅎ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검색해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정보 주셔서 고맙습니다.

  • @geonyounghong4983
    @geonyounghong4983 Год назад

    중국기록에서는 주몽이 목이잘렸다는 기록이있는데
    술에취했을때 부족장중 하나가 목을잘랐다던데
    그것도 궁금하네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고구려 후 추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게 주몽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변방을 지키던 유력자의 목을 베었다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주몽의 죽음이 여러 모로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의 주인공이 주몽 아닌가 하는 의문은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 @RedOne-r5c
    @RedOne-r5c Год назад

    민중왕 모본왕이 해씨인데 태조왕이 다시 고씨로 돌아온거 보면 태조왕 이후로 고씨계열이 성립되어서 태조라는 이름이 붙고 동명왕을 시조로 한것을 보면 고씨인 태조왕 이후 왕들의 의지가 반영된게 아닐까 싶어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그래서 태조대왕 시기의 고구려사가 얼른 더 자세하게 밝혀졌으면 합니다. 우리 고대사에 있어 가장 신비로운 시기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 @k.2046
    @k.2046 Год назад

    장자상속이라는건 당시로는 당연한 일은 아니었음 부자상속이 확립된건 광개토때가 다 되어서고 이전에는 형제상속이었음 형사취수제가 그래서 나온거지.
    일단 유리는 확실하지 않은 자식이었음 근데 이건 사실 중요하지 않음.
    일단 해씨인 이유는 주몽이 개국때 고씨로 성씨개명을 했었을 뿐임 그러니까 원래 성씨는 해씨였을거고 유리가 해씨를 버리고 고씨로 바꿀 이유는 없으며 고구려의 특성상 바꾸어야했을 순 있는데 그걸 뛰어넘는 상황이 있었겠지. 그러니까 성으로 친아들이니 아니니 하는건 무의미함. 게다가 불확식한 출신을 뛰어넘는 이유가 있었던건 분명함.
    일단 소서노와 두 아들에게 더 큰 이유가 있을거임. 오히려 이쪽 두 아들들이 친자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음 소서노는 해당 지역의 가장 강력한 호족의 사람이며 주몽 재위 중에도 계속 강하게 군림했음 그럼에도 태자로 삼지 않으려고 했던건 비류, 온조가 주몽의 친자가 아니었던 이유였을거임
    그래서 친아들이라 주장하는 유리를 굳이 믿어줬을거임 게다가 아마 유리가 고구려를 찾아오면서 소서노의 호족을 누를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데려왔을 가능성이 높음. 그러니까 주몽도 소서노의 세력을 팽해버리고 바로 유리 손을 들어줬겠지.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말씀하신 내용이 제 생각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사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니 그저 그럴 것이라고 추정 중입니다.

    • @k.2046
      @k.2046 Год назад

      @@Hmentary 가설이죠. 그리고 하신말씀은 꽤 신뢰있는 가설이기도 하구요. 이런 얘기 하는건 항상 재밌는거 같아요. 영상 재밌게 잘 봤습니당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재미있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영상을 자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rahe8481
    @rahe8481 Год назад +1

    개인적인 의견으로 개국공신들이 유리를 따랐다고 주몽 유리가 협력적 관계였을거다 라는건 좀 근거가 빈약한듯 유리가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줬다면 못따를거도 없다고 봐서.. 물론 역만없이고 진실은 빈약한 사료뒤에 있는거지만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개국공신들 중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유리를 섬겼다는 점이 제게는 나름 의미를 지닌 지점으로 보입니다만, 그들 모두 유리와의 협상을 통해 유리를 섬기게 되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할 수 있으니 현재로서는 어느 게 정답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이제원-o6j
      @이제원-o6j Год назад

      ​@@Hmentary
      개국 공신과 유리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못했는데 잘못아신듯
      오이 마리는 유리를 따라 새 수도에 가지도 안았고
      협보는 지기세력 이끌고 고구려를 떠났는데요

    • @심요섭-r5u
      @심요섭-r5u Год назад

      ​@@이제원-o6j 오이와 마리는 유리왕대에 명을받아 전쟁읏ㄴ 수행하였고
      협보가 떠난건 유리왕 22년대 일입니다 22년동안 유리왕아래에 있다떠난거입니다

    • @이제원-o6j
      @이제원-o6j Год назад

      @@심요섭-r5u
      오이 마리는 죽을때 까지
      국내성에 들어가지 안았고
      협보가 고구려를 떠났다는것은
      이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 @심요섭-r5u
      @심요섭-r5u Год назад

      ​@@이제원-o6j 유리22년뒤라는건 고주몽 죽고 22년동안 유리아래있었단이야기밈 22년뒤에문제로 나간거임
      오이와마리가 졸본을 담당했을 가능성 있고 일단 유리왕이 그둘을 신뢰했으니 전쟁에 나서라고 명령했던거고 문제가잇었으면 유리왕 명령을 들었겠음?

  • @길냥시급식구셔틀동
    @길냥시급식구셔틀동 Год назад +1

    난 그 옛날 백제랑 왜가 서로 동맹을 굳건하게 이어나간게 신기함

  • @하루하루-p9m
    @하루하루-p9m Год назад

    전 동의하기가 어려운게요
    유리가 아들이 아니라면 병에걸려 어차피 죽는데 유리의 협박은 통하지않을것이고
    아들이여야만이 병자임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요
    아들이 아니라면
    결과적으로 주몽이 얻는게 전혀없다는것입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일단 주몽이 병에 걸렸다는 확실한 정황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주몽의 병을 가정하고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친아들조차 정적이 될 수 있는 게 정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조는 소현세자를, 영조는 사도세자를 적대시했고, 충렬왕도 충선왕과 대립했지요.
      반대로 친아들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정치적 우군이자 계승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을 존중해서 유리가 주몽의 친자였다고 전제하기는 합니다만, 친자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는 것이지요.

  • @신재성-e3z
    @신재성-e3z Год назад

    이건 저의소견입니다만 백제의근초고왕시절에 고구려건국과 주몽과소서노세력과
    분열은 근초고왕이 왕위계승이전에백제의위례성서거에 기록이되어있다고 언급이된적이있었다고합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말씀하신 기록은 제가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 찾아보고 더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정보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 @김종민-n4q
    @김종민-n4q 4 месяца назад +1

    유리와 연합? 근데 왜 주몽의 시신을 못찾아 주몽의 시신없이 장례를 지낸거죠? 유리는 친자식이 절대 아님. 유리는 쿠데타로 집권. 그과정에서 유리의 시신 소실. 주몽의 가신도 일부 살해, 일부 배신 유리에 붙음.

    • @영훈-s8s
      @영훈-s8s 3 месяца назад

      왕망한테 죽음

  • @The.only_1
    @The.only_1 3 месяца назад

    영상좀주세요

  • @yoonsehyeon
    @yoonsehyeon 3 месяца назад

    유리가 아들은 맞는거같은데 말그대로 비류 송양세력과 손잡고 태조왕 이전까지 장악한듯 태조왕부터는 연나부 절노부 + 부여에서온 세력과 계루부 연합으로 바뀌고

  • @제프리원
    @제프리원 Год назад

    과거를 모르는 현재의 사람들은 여러증거가 아닌 그저 쓰여진 글 하나로 추측하는게 전부고 해석이 다 다를 수 있죠
    이게 진실이다, 이게 증거다로 과거를 결정짓는 것보다 이 영상처럼 여러 시각으로 보는 것도 괜찮죠
    이럴것이다! 라는게 역사지 이거다! 라는건 역사가 아닌 주장일 뿐이니깐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전말이 확실하게 사서에 기록되지 않는 이상에는 결국 추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여러 해석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학설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까닭에 특히나 고대사 연구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 주시고 짚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rionalmessi642
    @rionalmessi642 Год назад +4

    온조는 동명성왕인 주몽의 사당이 아니라 부여의 왕이였던 동명왕의 사당을 지은거라던데..?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말씀하신 내용에 따른 설도 있습니다.
      다만 '동명왕' 혹은 '동명성왕'의 기록이 부여의 시조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혼재되어 기록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둘중 어느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고구려에서 자신들의 뿌리인 부여의 건국신화를 모티브로 하여 자신들의 건국신화를 만들었을 것이고, 백제에서도 마찬가지로 부여를 뿌리로 하기에 부여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도 생각합니다만,
      온조가 세운 사당은 주몽을 기리는 것이라는 설도 있어서 해당 영상에서는 그 설을 인용했습니다.

    • @하루하루-p9m
      @하루하루-p9m Год назад +1

      ​@@Hmentary잘못된설 같습니다
      부여시조 동명왕이 맞는거같습니다
      성씨도 부여씨잖아요

  • @dj_kim2556
    @dj_kim2556 Год назад

    쇼츠 유튜브채널인 뉴욕세끼님이랑 목소리가 똑같아서 같은분인줄 ㄷㄷ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저와 목소리가 같은 분이 계시다니 신기하네요. 한번 그 채널 찾아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jinthree4016
    @jinthree4016 3 месяца назад

    페니실린이 있기전 시대와 후는 엄청난 차이
    하물며 조선말에도 등창 및 치통으로 고통받다가 죽는데.. 5세기를 논한다면 5개월만에
    사망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 @phk-k7d
    @phk-k7d Год назад

    소서노-비류-온조가 졸본 토착세력이었다면 웬수같은 부여를 국성으로 삼았다는게 좀 이상한것같습니다.

  • @seraph2007
    @seraph2007 3 месяца назад

    다 좋은데 범죄자 얼굴은 모자이크 추천드립니다

  • @초이-p6k
    @초이-p6k Год назад

    광계토태왕비문을. 믿는거밖에 저 시절이 다 끝나고 탄생한 군주니 태조왕이 진짜 역성혁명으로 이루었다면 태왕비문에 추모 주몽은 없을것이다. 태조왕을 전설적으로 적었겠지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저도 태조왕 관련해서는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조대왕이라고 칭할 정도로 의미를 부여했던 왕이고, 여러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는 왕입니다만, 진정한 역성혁명이었다면 이전 대 왕들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도 있었겠지요.
      아마 혈연적으로 계통이 달랐지만, 한 가문으로 간주할 수 있는 집단 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고, 기존 왕들이든 태조왕이든 주몽을 시조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했기에 태조대왕도 주몽을 시조로 인정하고 그를 기점으로 하여 고구려 왕통을 계승했다는 의식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추모가 언급되어 있겠지요.

  • @lamusa33709
    @lamusa33709 Год назад

    😮😮

  • @Sancho25
    @Sancho25 Год назад

    왜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진 해씨일까요.. 태조대왕부터 고씨이고 초기 고구려 역사는 너무 아리쏭하네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저도 고구려 역사 중 가장 궁금한 시기가 바로 해씨 고구려 왕들의 시기입니다. 언젠가는 내막을 상세히 밝히는 연구 결과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 @we.not.socrates
    @we.not.socrates Год назад

    건국 시기보면 럭키 야만인들의 힘쎈 럭키 부족장 뽑기 정도가 아니엿을까요?

  • @user-nt7gn9ml9g
    @user-nt7gn9ml9g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렇다면 고주몽은 고...자인가?
    유리도 친자식이 아니고 소서노의 자식들도 친자식이 아니고... 불쌍한 시조 할배요....

  • @user-patyokt
    @user-patyokt Год назад +2

    저는 유리는 이방원같이 초반에 소서노일가의 자식인 비류 온조가 왕위를 먹을거 같으니
    세력을 규합해서 왕권을 차지한것 같아요.
    다만 소서노 일가는 신덕왕후나 이방석이랑 다르게 위협을 감지하고 이주해서 새왕조를 세운거구요.
    주몽이 빨리죽은거는
    자식의 왕좌의 게임을 눈앞에서 보는데
    아버지입장에선 속이타죠. 결국 이 여파로 빨리 죽은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 @최강갑부
    @최강갑부 3 месяца назад

    우리가 아는 부자지간의 애틋한 정과 계승이 아니라 피비린내나는 권력싸움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잔혹동화 보는느낌 ㅋㅋ

  • @여차저차-o1r
    @여차저차-o1r Год назад +1

    새로운 드라마가 필요하다..ㅋㅋㅋㅋ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주몽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드라마가 나온다면 최근 트렌드에 맞는 세련된 사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장군들이 "공격하라!"만 외치던 고루한 느낌의 사극이 아니라 넷플릭스 등에서 인기를 끌었던 과거 소재 드라마들 같은 분위기의 새로운 주몽 역사 드라마가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 @달하-q1v
      @달하-q1v Год назад

      과연 그만한 역사의식을 가진 작가가 방송가에 있을까요
      단연코 없다고봅니다
      재벌돈에 관심있는 작가만이 작가임네 고개들고 다니죠
      많이 아쉽네요
      '소서노와 동행하지않은 고추모의 측근들을보니 유리의 쿠데타는 아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 @user-te7cj9fofdsfgcd
    @user-te7cj9fofdsfgcd Год назад

    그 밑에 있던 인물이 꼭 따르리라는 법도
    없을 거 같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개국 공신들이 유리를 넘겼다는 게 중요한 근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만, 확정된 팩트에 대한 입증 근거라고까지 자신 있게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직까지는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런저런 추정을 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user-te7cj9fofdsfgcd
      @user-te7cj9fofdsfgcd Год назад

      @@Hmentary 멋지십니다

  • @seungwoonchoi7373
    @seungwoonchoi7373 Год назад +1

    핵심은 누가 더 '적통'으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느냐?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은 철저히 주몽의 관점에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네요.
    영상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해모수 > 주몽 > 유리로 내려오는 혈통이 맞다는 가정하에, '해'씨 + 정표(부러진 칼)로 주몽은 유리가 그의 적자라는 것에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주몽과 함께했던 개국공신들이 유리를 인정하고 따르게 만듬.
    반대로 소서노 일가의 자식들인 비류&온조는 주몽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자인지 우태의 자손인지 100% 확신할 수 없죠.
    저는 이 대목에서 원나라 칭기즈칸이 첫째아들을 '주치' 즉 손님이란 이름으로 지은게 떠올랐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보아 결국 책봉은 왕 주몽의 권한이고,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세운겁니다.
    세력기반이 없던 유리에게 유력가문인 송양집안과 혼사를 맺어서 세력을 강화시켜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삼국지에서도 조조가 조비,조식을 싸움붙일때 세력이 약했던 조식을 최씨가문과의 혼사로 힘을 실어주었죠.
    이후 유리의 세력기반이 공고해졌을때 책봉한 걸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말씀하셨듯이 유리는 왕권을 더 강화할 목적으로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겨버렸죠.
    *이후 소서노 일가는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지방호족세력으로 남는 것보다 남쪽으로 더 멀리 내려가서 창업군주가 되는 걸 선택했다고 보여집니다.
    유리 입장에서도 말릴 이유가 없는 것이 자신의 정적/견제세력이 사라지는 것이고, 또 소서노 일가와의 무력충돌은 내전으로 결국 국력이 약해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말씀하신 내용에 대부분 동감합니다.
      그 관계의 형태를 막론하고 결국 주몽과 유리는 같은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서로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였는지, 혹은 정말 유리가 주몽의 친자였으므로 계승의 형태로 엮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저도 주몽과 유리가 같은 편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리가 주몽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설에 대해서 저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만, 어느 게 정답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니 그저 여러 추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제2의낭만
    @제2의낭만 Год назад +1

    사실 고구려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내분입니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3아들들이 궐력 싸움을 하고 결국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킬수 있었지만 내분이 일어나 장수왕은 백제 정벌은 포기하고 반란을 세력을 몰아내려고 수도로 갔죠 그래서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백제를 멸망시키고 가야 신라를 점령해 삼국을 통일했겠지요 하지만 고구려는 내분만 아니였어도 엄청나게 강해지고 잘하면 중국까지 점령할수 있겠지요 그리고 광개토 태왕님도 후연을 멸망시킬수 있었는데 백제가 왜를 끌어드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해서 광개토 태왕님이 진압하로 갔죠 그래서 그걸 노린 후연의 모횽이가 고구려를 공격해 성을 빼아았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중요한 상황이 내분때메 기회를 노쳤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강대한 나라 였지만 단 내분으로 멸망한거지 다른 나라에게 무력으로 멸망한게 아닙니다. 그러니 무력으로 멸망했다라고 오해 하지 마세요

  • @seoungheonlee4110
    @seoungheonlee4110 Год назад +2

    역사에 관심 많은분들은 유리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는거와 유리에게 잔인하게 죽었다는거에 한표를 주는편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사실 굉장히 자주 제기되었던 설이긴 합니다. 유리에 의해 주몽이 살해되고, 유리가 정권을 탈취했다는 걸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 @Onyul5551
      @Onyul5551 Год назад

      @@Hmentary 고주몽 제위기간도 그렇고, 갑작스러운게 많아 제가 생각했을때도 주몽은 아마 죽음에있어도 목이잘려죽거나, 잔인하게 살해된거 같습니다,

  • @부르니부름
    @부르니부름 3 месяца назад

    애매한거 말고 유물이나 좀 재현 잘해서 보여 줬으면 철갑바지 같은거 좀 투구에다 소뿔운 전부 달아가지고 바이킹이냐는 소리나 듣지 말고 땡땡이 무늬는 언제 나오는 건지

  • @khj7926
    @khj7926 Год назад

    별 의미 없어보이는데. 결국에 유리가 주몽의 친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점만 던지고 나머지는 역사기록과 다를 바가 없음ㅋ

  • @조세현-s3d
    @조세현-s3d Год назад +4

    유리는 해씨고 주몽은 고씨다? 누가 그럼? 주몽 아버지는 해모수인데?

  • @각시탈-d2z
    @각시탈-d2z Год назад +4

    그게 아니고, 유리의 할아버지인 해모수의 성씨를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이어받아서 해씨인거임. 옛날은 이메일이나 이런 연락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기때문에. 아들의 존재에대해서는 알고있었으나 마땅히 연락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소서노가 유리가 오자마자 행동해서 역모하다 발각되서 싸우다 남쪽으로 도망간거고, 주몽 사후에도 개국공신들은 유리를 지켜서 왕좌를 지킨거임.

    • @dri13829
      @dri13829 Год назад +1

      애초에 해모수와 부여라는 두 개의 엄청난 정통성을 버리고 주몽이 고씨를 새로 사용할 이유가 단 1도 없음.

    • @길냥시급식구셔틀동
      @길냥시급식구셔틀동 Год назад

      오피셜임???? 뇌피셜이면 뇌피셜이라 써놓으셈

  • @요반페
    @요반페 3 месяца назад

    주군의 아들이 아닌데 그대로 섬기는게 말이 되

  • @arang94
    @arang94 Год назад +1

    과거 해씨가 고씨입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해씨와 고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로 확정된 이론은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원래 해씨였던 주몽이 고구려 건국과 함께 고씨로 바꾸었으나 다음 대인 유리부터는 다시 해씨를 사용했고, 태조대왕 이후부터 고씨를 왕가의 성으로 확정했다는 것까지는 대체로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역사에 있어 해씨 성을 지닌 왕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 중이니 머잖아 보다 확실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말티즈-z4h
    @말티즈-z4h Год назад

    좀 사극 제대로좀 만들어봤으면 고대시대 답게 의복도 어두운색이거나 단색으로 맞추고 좀! 고대시대때 화려한 의복이 말이됨? 그당시 기술로 절대 알록달록 꽃무늬 옷 절대 못만듦 원 이후에 실크로드 발달되서 서로 기술 공유하면서 의복이며 문화가 발달된거지 이건 뭐 한국사극은 왕이나 귀족은 무조건 알록달록 옷에 치장된 갑옷 장난하냐 신삼국좀 본 받아라 고대시대 답게 옷들도 단무늬에 어둡고 갑옷도 단순히 실용적인 철갑으로 고증 잘해놨드만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제가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 드라마 볼 때 가장 부러워하는 지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고증을 제대로 하고,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사극은 그게 부족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K 드라마의 발전에 맞춰 우리나라의 사극도 차차 개선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더 사실적인 묘사가 담긴 사극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 @최승원-g8i
    @최승원-g8i Год назад

    아니면 유리가 사실 주몽의 "사생아"여서,
    유리가 주몽한테 찾아가서 "●●●씨가 제 어머니인데요" 라고 말하니까,
    주몽이 '●●●면... 몇일 신세졌던 그집의 여식...?' 하면서 유리가 본인 자식이란걸 알아차릴걸수도 있잖아요?
    이런경우면 주몽과 유리 사이에 둘만이 아는 사실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사칭하기도 힘들고요
    근데 후대 고구려 왕실 입장에선 본인들이 정실도 아니고 사생아 출신의 핏줄이라고 기록하면 위신에 악영향을 주니까
    애첩이 아니라 결혼했던 배우자를 두고 온걸로 각색했을수도 있지 않나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열려 있는 상태이므로 모든 추정이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주몽이 부여에서 연애 한 번 못해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사생아가 존재했을 가능성 또한 있겠지요.
      다만 사서에는 예씨 부인의 존재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주몽이 부여에 두고 왔던 본처라 하니 그에 기반해서 추정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최승원-g8i
      @최승원-g8i Год назад

      @@Hmentary
      근데 보통 이럴땐 전근대 시절엔 가족들 대동하고 돌아다니는게 국룰이잖아요.
      (중국 사례로,
      유방은 팽성대전 진행될때 가족들 대동하고 패현으로 데리고 왔었는데, 한군이 여기서 대패해버려가지고 유방 가족들이 초군 타깃이 됨,
      유비도 그 긴 떠돌이 생활동안 부인을 추가로 들였던 적은 있어도 원래 있던 부인들은 버리고 튀진 않았음,
      이성계도 부인이랑 자식들 데리고 쌍성부에서 고려로 이주함,)
      문제는 동명왕이"같이 갑시다" 니, "곧 데리러 오겠다" 같은것도 아니고,
      무슨 신화마냥 "나중에 낳은 지식한테 증표 쥐어줘서 졸본으로 보내줘, 그럼 안녕~" 시전하고 런했다는거죠
      유화부인이야 공식적으론 부여왕(금와왕인지 해모수인지는 불명)의 아내(왕비)이니, 부여에서도 함부로 못하니까 데려오지 않아도 안전했어요 (실제로 졸본부여 건국 이후 13년더 생존한게 이를 반증합니다)
      근데 부인 예씨는...

    • @최승원-g8i
      @최승원-g8i Год назад

      @@Hmentary
      까놓고 위서에서도 주몽의 차라고만 표기했지 이름은 전혀 안나오고요...
      성이나 이름이 실전된 사람한테 야사에서 임의로 이름과 성을 붙이는 경우도 많잖아요
      (대표적인 예시로 고당전쟁 시기 안시성 성주,
      이사람의 이름은 불명인데 야사에선 양만춘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음)
      근데 동명성왕 정실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정보가 없다싶이 하니 좀 의심되기도 하고요...

  • @zse260
    @zse260 Год назад

    아무리 생각해도 유리왕은 주몽의 친자가 아니지 않을지.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저도 유리가 주몽의 친자가 아닐 것이라는 쪽에 심증을 더 두고 있습니다만, 일단 사서 기록에는 아들이라고 하니 공식적으로는 그걸 따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 @zse260
      @zse260 3 месяца назад

      @@Hmentary사서기록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가 없는이상 사실로 봐야겠죠 ㅋㅋ

  • @yongrogi
    @yongrogi Год назад

    유리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었다기 보다는 주몽의 아들은 맞으나 비류쪽 세력이 소서노쪽 세력에서 왕이 되는 걸 경계해서 유리쪽 세력과 손잡았을 수도 있을거 같아요 그 과정에서 주몽은 외척 세력이 강해지는걸 경계하고자 그걸 묵인했고 그 과정에서 소서노쪽 세력은 힘에 밀려서 남쪽으로 이주했을거 같아요 주몽은 피를 보기를 원치 않았을거고 그 과정에서 온전하게 세력을 보전하면서 남쪽으로 이주하지 않았을까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말씀하신 내용도 많은 분께서 신빙성 있다고 여기시는 추정입니다. 유리가 주몽의 친자는 맞았을 것이라고 보는 분도 많고, 또 실제로 사서의 기록에는 친자라고 나와 있으니 문헌학적으로는 타당한 의견입니다.
      아무래도 소서노와 그 아들들이 거의 온전하게 세력을 유지한 채로 이주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려면 힘의 우열이 분명하게 드러났어야 하고 유리 쪽이 훨씬 더 강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yoshitsune1184
    @yoshitsune1184 3 месяца назад

    요동,현토,낙랑은 지도에 절대로 표시를 안 하네.

  • @thankyou9481
    @thankyou9481 Год назад +2

    근데 고주몽 당시 고구려는 이제 왕이 된 미약한 세력인데 굳이 왕위를 빼앗을 이유가 있음?? 그냥 옆에 나라 세우면 되지 좀 이상함.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당시에 그렇게 좁은 지역을 점령한 세력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만, 그들이 확장을 꾀하는 경우 결국 주변 세력을 흡수하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먹히게 되니까요.
      그래서 주몽도 비류국을 합병하는 등 주변 세력을 흡수했던 것이고, 유리도 처음부터 왕국을 건설하는 모험을 하자니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춰진 고구려를 물려받는 게 훨씬 수월한 길이었을 겁니다.
      밀려난 비류나 온조 입장에서야 선택지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 국가를 건설하는 모험을 했지만, 경쟁에서 이긴 유리에게는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 @블러드검사놈
    @블러드검사놈 Год назад

    막장드라마였으면ㅋㅋ 유리가 가짜가와서 내가유리요해도되지않음ㅋ?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유리가 친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꽤 높다는 분석들도 있어서 정말로 가짜 아들이지만 진짜 아들로 인정받았을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하지요.

  • @asadaea
    @asadaea Год назад

    주몽x 추모o 제발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고구려의 기록에 따르면 '추모'라고 표현하는 게 옳기는 합니다만, 대중적으로 이미 '주몽'이라는 표기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 및 유튜버들이 이를 따라 '주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를 따랐습니다만, 사실 보다 원의를 잘 살릴 수 있는 명칭은 말씀하신 대로 '추모'가 맞습니다.

    • @길냥시급식구셔틀동
      @길냥시급식구셔틀동 Год назад

      추모는 중국식발음이라던데 그냥 주몽으로 합시다

    • @asadaea
      @asadaea Год назад

      @@길냥시급식구셔틀동 이건 또 뭔 헛소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asadaea
      @asadaea Год назад

      @@길냥시급식구셔틀동 주몽에 몽자가 무지몽매 할떄 그 어두울 몽인건 알고있음?? 일방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나온 이름인데
      말같은 소릴 떠드셈 좀 고구려인이 직접남긴 기록에는 주몽이란 글자 그 어디에도 없고
      전부 추모임

  • @최호준-f5f
    @최호준-f5f Год назад

    주몽은 씨 없는 수박이었던 듯.

  • @요반페
    @요반페 3 месяца назад

    김부식이나 장수왕이 혈통가지고 거짓말할일이 없잖아 환부역조를 왜하겟어

  • @또또네-n6l
    @또또네-n6l Год назад +1

    주몽이 유리에게 양위한지 반년도 안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볼 때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보는것이 합리적일듯 싶습니다.

  • @핸들-w7t
    @핸들-w7t Год назад

    비류와 온조는 우태의 아들이죠 주몽의 아들은 유리고요. 우태는 졸본부여의왕이라고하죠 소서노는 우태의 부인이었고요. 백제가 고구려후예가 아닌 부여의 후예이죠

  • @yeeunjo8929
    @yeeunjo8929 Год назад

    소서노는 유리와 혼인하고
    권력을 유지
    비류.온조는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고리) 의 제후국으로
    고구려의 지근거리 영지로 시작함

    • @dri13829
      @dri13829 Год назад

      애초에 그 당시 고구려는 부여의 속국 상태에서도 못 벗어난 상황이었음.
      대소왕 전사를 시켰음에도 고구려는 아직 부여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음.

    • @길냥시급식구셔틀동
      @길냥시급식구셔틀동 Год назад

      머 c8 ㅋㅋㅋㅋ 콩가루 집안이냐 ㅋㅋㅋㅋ

    • @yeeunjo8929
      @yeeunjo8929 Год назад

      @@길냥시급식구셔틀동 요즘 시각으로 보면 이상하지

  • @산도크
    @산도크 Год назад

    이 영상대로 생각해보면 주몽은 후손도 없이 죽은건가
    .ㅋ0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주몽의 아들은 유리, 그리고 해석에 따라 비류와 온조가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만, 제기된 의문에 따르면 주몽의 친자는 아예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 @younunam959
    @younunam959 Год назад

    애초에 삼국사기는 신라출신 김부식이 작성했고 고구려 멸망 500년 후에 쓰인 책입니다. 고구려가 실제로 건국이 900년에 이르러 멸망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동명성왕의 진실과 이름도 제대로 알수 없는 추모(주몽: 중국식발음을 한국 음차로 후대에 표현)왕이 정확히 언제 왕이 되었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 @길냥시급식구셔틀동
      @길냥시급식구셔틀동 Год назад

      그렇게따제면 세계역사서 다 믿을 수 없는거임 승자에 의해 역사는 쓰여지는거니까 그냥 줏닥치고 그런갑다하셈 고구려를 부정하는건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의하는 반역행위임

  • @애쉬크레이지
    @애쉬크레이지 3 месяца назад

    보통 아들이면 얼굴 보면 알음 자기랑 너무 닮았거든

  • @bkjjjjkkjjjjbbb
    @bkjjjjkkjjjjbbb Год назад

    주퐁...

  • @영훈-s8s
    @영훈-s8s 3 месяца назад

    주몽은 왕망한테 죽음 시체없는 장례식이 된거임

  • @이지은몽글
    @이지은몽글 Год назад

    협보 주몽 죽고 배신하지 않았나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협보가 유리를 떠난 건 유리가 즉위한 이후 22년 뒤입니다. 유리에게 사냥 좀 적당히 하라고 직언하다가 강등 당하는 수모를 겪고, 유리를 떠납니다.
      하지만 주몽 사후 바로 배신한 게 아니라 22년 동안 유리와 함께했습니다.

  • @독연-x7f
    @독연-x7f 4 месяца назад +1

    진짜?? 어떻게 증명하면 되는데?? 넌 한국인 맞냐? 진짜냐? 증명해봐라~

  • @seahawk7893
    @seahawk7893 Год назад

    아무래도 우리 한민족의 모체가 되는 마한 진한 변한이 아닌 북방에 이웃한 이민족 국가였으니 우리 한민족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차이가 있음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디테일한 차이를 제외하고 보자면 한반도 토착 거주민과 북방에서 이주해 온 세력의 융합으로 인해 구성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고조선 이후 부여와 고구려 등은 북방 쪽에 거주했고, 삼한은 남방에 자리했으므로 초창기의 민족 구성은 조금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요.
      따라서 고구려와 삼한은 당시로서는 서로 이질적인 감정을 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큰 카테고리에서 보자면 한민족을 구성하는 두 축이었으므로 고구려를 이민족 국가로 간주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 @seahawk7893
      @seahawk7893 Год назад

      @@Hmentary 고구려에서 내려온 백제왕실과 백성들간에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민족인건 분명하죠. 그리고 이주해온 사람들이 한반도 중남부에 정착을 해서 우리 한민족의 모태가 되는 삼한과 결합해서 탄생한게 우리 민족인데 고구려 부여 이런거까지 다 하나로 퉁치는거는 역사적으로 양심이 없는 행동이죠.

  • @luwei5762
    @luwei5762 Год назад

    일리있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일리 있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쪼록 계속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Godbogeam
    @Godbogeam Год назад

    한국사는 국뽕이 넘섞여잇음

  • @yckim4901
    @yckim4901 Год назад

    역사서에는 안나오지만. 주몽도 바보가 아니고 유리도 바보가 아니니 도망가서 소서노와 혼인하고 세력을 얻어서 나라를 세웠는데 자기 정실부인이랑 아들을 딱 데려오면 바로 연맹이 깨지고 망할것이니 자신의 권력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린것이고. 도망올때 함께 온 여러 신하들을 이용해 지속적인 연락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때 가 되었을때 불러들인것이겠지요.

  • @mjK-q5g
    @mjK-q5g 2 месяца назад

    내몽골에 고려성 있는거 모름? 부여 고구리 건국위치는 거기 아님 지도를 치우던가

  • @문성철-r4g
    @문성철-r4g 5 месяцев назад

    한반도에 백제가 존재했다는것은 검증된 사안 인가요?

  • @jay_austere
    @jay_austere Год назад

    김기흥 교수 논문은 보고 만든 영상인지 모르겠네요. 차단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4

      김기흥 교수님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꼭 그 분 논문을 보고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차단하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저도 제 생각을 담은 영상을 올리는 건 제 자유입니다.

  • @ABCDEyebbi
    @ABCDEyebbi Год назад

    와씨 역사에선 if를 설정하면 안된다니깐

  • @균형-m6f
    @균형-m6f 3 месяца назад

    자기랑 얼굴도 닮았는데 남기고간 물건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고대사회에서도 자기 아들이 맞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요반페미
    @요반페미 Год назад

    에이 어느왕이 자기아들아닌데 왕위를 물려줘요 환부역조를 광개토왕이 했다고? 말도안되지 뭐가 아쉬워서 고주몽과 유리는 아들관계요 그것을 부정하는 사료가 없는한

  • @in-mk4vh
    @in-mk4vh Год назад +1

    협보가 쫒겨났다는말도 있는데. 본인말이 다 맞다는식으로 하는영상은 아니라고봅니다,차단하고 두번다시 안봤으면합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나중에 협보가 유리에게 직언하다가 심기를 거슬러 쫓겨난 것은 맞습니다.
      2. 제 말이 다 맞다는 식으로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대단한 오해를 하신 다음에 차단 운운하시는 데 당황스럽습니다만, 차단하시는 거야 본인 자유니까 원하시는 대로 하시는 수밖에요.

    • @rahe8481
      @rahe8481 Год назад

      ㅋㅋㅋㅋㅋㅋㅋ 개웃기네

    • @user-ef1mx1xf8l
      @user-ef1mx1xf8l 3 месяца назад

      상태 안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