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소헌왕후의 행동 01:41 심온의 재조사를 명하지 않은 세종 03:05 세종이 품은 여인의 수 06:58 세종의 여성 편력이 심해진 이유 08:40 소헌왕후의 리더십이 드러난 사건 12:02 소헌왕후를 대한 세종의 태도 14:32 며느리 순빈 봉씨의 스캔들 18:35 소헌왕후의 근심이 된 임영대군 21:15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에 앓아누운 소헌왕후
심온이 대역죄인으로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 최고 명문 집안이었던 소헌왕후 집안은 세종 때에는 등용되지도 못 하다가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해서 심온을 신원복관시키고나서야 등용되었죠. 심온의 장남 심준은 이미 죽었고 차남 심회가 영의정, 삼남 심결은 영중추부사에 오르는 등 청송 심씨 집안은 다시 부활하게 되죠
소헌왕후의 일대기가 참 눈물나게 안타깝네요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갖었을지 ... 내몸으로 난 자식들을 잃으면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지 .... 참 마음이 아픕니다.... 소헌왕후같은 반려자를 만난 세종 ...은 .. 소헌왕후를 반려자 이상으로 생각하신건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옆에서 든든하게 보필해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니 자기 일과 업적에 집중하고 성과를 이뤄낼 수도 있는거죠,,,, 그게 보통 주로 안주인들, 어머니, 아내의 역할이구요 하지만 그런 부녀자들의 희생과 공은 잘 조명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왔죠 역사적으로. 바깥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만 공이고 업적인게 아니에요. 사실 다 가정 내에서 든든하게 받춰주고 오롯이 희생하는 누군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게 근간이고 토대가 되는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서 만든 글자가 한글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글자보다 달콤하고 아름답게 사랑을 표현할수있는거 같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글자보다 아프고 악랄하게 표현가능해서 마음의 상처도 더 깊게 줄수있다는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소통할때 최고의 글자임은 변하지않는거같네요
하긴…차기 왕비가 될 세자빈이 주술에 손을 댄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논란이 되고…중세유럽 같은 경우는 파문 당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긴한데…할아버지 상과 세자가 16살이 되서 초야를 치르는 법도때문에 후계자 잉태가 미루어져서 불안한 나머지 실수를 한 것이고 로열페밀리 그것도 후계자 내외가 이혼을 하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니 일단 기회를 주고 예의주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았을껀데…어차피 측실을 두는 경우가 있어도 후계자 변경되는 문제를 생각하면 정실에서 후계자를 보는 게 낫겠지…심각한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적장자와 그의 직계후손이 1순위이니…
애초에 나라의 질서 자체가 남자들 중심이었고 왕실이고 사대부고 간에 여인들의 소리없는 희생 위에서 업적을 이루고 군림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였는데 뭘 어쩌겠냐.... 그리고 그놈의 유교니, 왕권이니 지키기 급급해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겠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이 있어도 세종은 평천하는 했으나 가정을 다스리고 내 사람을 돌보는 일은소홀 할 수 밖에 없었던거지... 소헌왕후의 희생과 노고가 없었으면 이정도 성군이 될 수 있었을까 싶다. 세종의 큰 위상 뒤엔, 그 토대가 되어준 아내 소헌왕후의 공이 크다. 소헌왕후는 정말 그릇이 큰 조선의 국모이고 멋진 여성 리더라 생각한다 그걸 알고있으니 세종대왕도 비롯 후궁은 많이 뒀으나 왕으로선 아내를 극진히 대했겠지
그래도 소헌 왕후와도 금슬이 좋았다고 했죠 그래서 8남 2녀를 낳았고, *정소 공주 & 문종 & 정의 공주 & 세조 & 안평 대군 & 임영 대군 & 광평 대군 & 금성 대군 & 평원 대군 & 영응 대군* 을 낳았다고 전해지고, 소헌 왕후의 친정이 망할때도, 소헌 왕후의 폐위를 막았던게 세종이었다고 전해지죠 만일, 소헌 왕후가 손자 단종이 왕이 되고 난 뒤에도 살아 있다면??
@@enjoypanda그러나 문종은 첫째 부인 휘빈 김씨 & 두번째 부인 순빈 봉씨와도 사이가 안 좋았대요 그래서 휘빈 김씨는 주술하다 걸려 쫓겨났고, 순빈 봉씨는 동성애에 걸려 쫓겨 났고요 그래서 문종의 후궁들 중에서 권씨가 세번째 부인이 되었죠 원래는 문종의 맘에 든 사람이 있었으나, 세종이 권씨를 세자빈으로 둔 이유가 아이를 이미 2명을 낳은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그 세자빈 권씨가 아들 단종을 낳고 사망했고요
열녀전列女傳이 맞습니다. 여기서 열녀列女는 '(모범이 될 만한 혹은 그렇지 않은) 여러(列) 여성들(女)'이라는 뜻이지요. 이 책은 전근대시대 여성 교육에 있어 기본 교과서와 같이 널리 읽혔던 중국 책으로, 고유명사입니다. 烈女傳이라고 하면 정절을 지킨 (특정) 열녀에 대한 전이라는 뜻으로 보통명사인데다, 이 경우엔 남편을 따라 죽거나 수절하라고 가르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列女가 맞게 쓴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왕 치고 후궁 안들인 왕이 잇나? 서양이고 동양이고 간에 후궁 엄청 많던데 여성 편력이라고 까기엔 왕이면 나라가 자기거라고 생각하는데 궁녀 도 다 왕 여자고 연산군처럼 전국 여자 기생 다 모집하는 정도 아니면 심한건 아닌거 같음 그래도 처신은 잘한거 같은데 후궁 많으면 문제가 본부인은 개무시하고 후궁만 총애하고 본부인은 자식도 없고 후궁 자식이 왕되고 이러면 분란이 생기는데 세종은 여자는 많앗어도 본부인을 제일 사랑하고 대우해주고 세자도 본부인 자식으로 세워서 왕비 권위도 잇으니 후궁들도 왕비한테 순종하고 평화롭게 지낸거 같음 조선 다른 왕비들 보면 행복하게 사랑 받고 산 왕비가 거의 없고 후궁이 사랑 받고 세자도 후궁한테서 보고 왕비들은 불행한 경우가 대다수인데 세종이 저정도면 저 시대 왕 치고는 처신 잘하고 본부인한테 잘한거 같은데
세종이 여성편력이 있다기 보다 정치적으로 내명부를 이용한거죠. 태종 사 후 아무리 처가를 몰락 시켰다 하더라도 왕자를 8이나 낳은 왕비의 세를 누르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왕비를 견제하기 위해 많은 후궁이 들이고 궁궐 안 수족이 될 궁녀들을 승은을 준것이겠죠. 세자빈이 계속 바뀐 이유도 마찬가지로 외척의 발호를 맊기 위함이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라 왕권강화가 중요했거든요. 여러므로 세종은 빈틈 없는 왕이였으나...그렇게 무너진 내명부로 단종은 외톨이가 된 채 왕이 되었고 결국 계유정난이 일어난거죠
혜빈 양씨는 저랑 같은 청주 양씨 집안인데 어린 단종을 키워주고 보호 해준 후궁입니다만 나중에 교사형을 받고 사망합니다 그리고 양정이라고 혜빈 양씨와 먼 친척 되는 분이 있는데 이 놈이 혜빈 양씨 죽이라고 상소 올렸고 나중에 세조와 대신들이 연회 하던 날 실언해서 참수 당합니다
소헌왕후는 태조대왕 이성계와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함께 얼마나 시아버지 태종 이방원을 많이 미워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아버지를 잃게 만든 분이 시아버지이며 그 마음을 아는 사람은 시할아버지이신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시어머니인 원경왕후밖에 없다는 것을 세종대왕님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최고의 왕이시지만 아내와 아들 및 딸들에게 어떤 아버지라는 존재였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세종이 후궁을 많이 두었던 것은 궁녀들을 불쌍히 여긴 것과 동시에 왕실의 번영을 위해서였다고 함.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왕도 백성을 위한 문자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음. 문자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대항력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지도층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리는 일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세력이 다 반대하는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남다른 애민정신이 있었다는 것임. 후궁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듯. 워낙 학문에 빠져있던터라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여색을 탐한 게 아나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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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1 심온의 재조사를 명하지 않은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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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8 세종의 여성 편력이 심해진 이유
08:40 소헌왕후의 리더십이 드러난 사건
12:02 소헌왕후를 대한 세종의 태도
14:32 며느리 순빈 봉씨의 스캔들
18:35 소헌왕후의 근심이 된 임영대군
21:15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에 앓아누운 소헌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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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IF는 없더라도 세조가 꼼짝 못하던 사람 4명이 아버지 세종, 어머니 소헌왕후, 형 문종, 부인 정희왕후 라던데 소헌왕후가 계유정난 까지 살아있었다면 그 피바람은 없었을거라는게 정설임 ㅇㅇ
정설이죠. 일단 대왕대비(정확한 표현은 아닐 듯...문종의 비가 아닌, 그 위 세종의 왕비셨으니..)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을 것이기에 수양대군이 시비를 걸 명분이 아예 사라지는 거였죠.
글구, 시아머니 원경 왕후가 며느리인 소헌 왕후에게 동질감 느꼈을 지도........,
왜냐면 원경 왕후는 이미 남편 태종에게 친정 망했고, 그게 또 며느리 소헌 왕후 역시 같은 일 겪게 되니까......,
ㅇㅈ 이씨집안 치가 떨릴거같은데 ㅋㅋㅋ
힘든일은 함께 나누어도 좋은 것은 혼자서 독점하려는 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임.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을 잘만나야 성공하는 건 똑같네요
소헌왕후가 든든하게 안 받쳐줬다면 세종의 일이 두배 세배로 늘어나서 지금같은 역사적 업적이 훨씬 줄었을 지도 모르는듯
옛날이라해도 이렇게참고살일이있나?
심온이 대역죄인으로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 최고 명문 집안이었던 소헌왕후 집안은 세종 때에는 등용되지도 못 하다가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해서 심온을 신원복관시키고나서야 등용되었죠. 심온의 장남 심준은 이미 죽었고 차남 심회가 영의정, 삼남 심결은 영중추부사에 오르는 등 청송 심씨 집안은 다시 부활하게 되죠
네 안효공파 후손입니다^^ 정보감사드려요
참 한 인간으로서 짠할 뿐이다. 그 한도 고통도 다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정작 본인은 하나의 빛,하나의 바람이 되었구나.
소헌왕후 아버지 심온은
모함으로
가족을 위해 누명을 스스로
인정한 분입니다
소헌왕후의 일대기가 참 눈물나게 안타깝네요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갖었을지 ... 내몸으로 난 자식들을 잃으면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지 .... 참 마음이 아픕니다.... 소헌왕후같은 반려자를 만난 세종 ...은 .. 소헌왕후를 반려자 이상으로 생각하신건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원래 외부평 좋은 정작 자기한테 가장 가까운 사람한텐 못하죠..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듯
옆에서 든든하게 보필해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니
자기 일과 업적에 집중하고 성과를 이뤄낼 수도 있는거죠,,,,
그게 보통 주로 안주인들, 어머니, 아내의 역할이구요
하지만 그런 부녀자들의 희생과 공은 잘 조명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왔죠 역사적으로.
바깥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만 공이고 업적인게 아니에요.
사실 다 가정 내에서 든든하게 받춰주고 오롯이 희생하는 누군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게 근간이고 토대가 되는겁니다..
아버지 이방원, 큰 형인 양녕대군의 기질이 있는데 아니면 그게 더 웃기는게지. 국왕으로서의 세종과 남자로서의 세종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얘기.
한글창제 하나로 모든 과가 퉁
@@arrkaize 전세계 언어중에 창제원리가 기록되고 만든사람이 특정되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합니다 . 전인류사상 유일한업적입니다
세종대왕이 저쪽으로도 대왕이였군요 ...
@@arrkaize 한글창제 뿐 아니라 남긴 성과가 어마무시 합니다.
ㅎㅎ 그거 하나로 모든걸 덮었네
그래도 소헌왕후가 단종즉위후 5년정도만 더살았어도 ㅠㅠ
엄니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신데 수양이 감히 찬탈 못했죠
마음대로되기도하고안되기도하는인생사앞에순응하고살아가야하나봅니다
소헌왕후랑 문종 둘 다 오래 살았으면 그야말로 최강이었을텐데ㅜㅜ
소헌왕후가 아니라 딘종의 모 양원권씨 현덕왕후가 더 오래 살았어야 하는거 아닌가?
소헌왕후는 단종의 할머니과 현덕왕후가 딘종의 어머니 인데?
소헌왕후 말고도 문종 비인 헌덕왕후가 단종 낳을 때 안죽고 대비로 있었으면 역사가 완전히 달라졌을엔데...조선의 쇠락은 사실상 세조가 만들었다 봐도 무방합디다
소헌왕후가 위인이었네..
세종 아버지 이방원, 세종 아들 세조...
소헌왕후 살아계실때 좀 잘해주시지들..ㅜㅜ
그 한이 어찌나 깊을지 안타깝내요
후궁들도 짬을 보고 덤빈다고 아들만 5명을 넘게 낳은 왕비한테 깍듯이해야지ㅋㅋㅋㅋ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서 만든 글자가 한글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글자보다 달콤하고 아름답게 사랑을 표현할수있는거 같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글자보다 아프고 악랄하게 표현가능해서 마음의 상처도 더 깊게 줄수있다는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소통할때 최고의 글자임은 변하지않는거같네요
두번째 며느리가 저 지경일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첫번째 며느리 휘빈을 잘 타일러서 데리고 있을 걸 그랬군
하긴…차기 왕비가 될 세자빈이 주술에 손을 댄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논란이 되고…중세유럽 같은 경우는 파문 당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긴한데…할아버지 상과 세자가 16살이 되서 초야를 치르는 법도때문에 후계자 잉태가 미루어져서 불안한 나머지 실수를 한 것이고 로열페밀리 그것도 후계자 내외가 이혼을 하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니 일단 기회를 주고 예의주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았을껀데…어차피 측실을 두는 경우가 있어도 후계자 변경되는 문제를 생각하면 정실에서 후계자를 보는 게 낫겠지…심각한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적장자와 그의 직계후손이 1순위이니…
그거 후회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세번째 며느리였던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다 결국 사망했죠
첫번 째 휘빈 데리고간게 제일 베스트였을 듯. 그럼 단종 사태도 없었을 것같음. 역사의 만약은 없지만 😢
문제는 세자인 문종이 자기 부인 첫번째 부인세자빈 휘빈 김씨에게도, 두번째 부인 순빈 봉씨에게도 관심이 없던게 문제였죠
결국 휘빈 김씨도 주술하다가 걸려서 쫓겨난것.......,
@@user-ce2dh7cn3d그쵸
현덕왕후 권씨가 그나마 첫째 딸과 경혜공주와 단종을 낳았는데,
님 말씀대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다가 산욕열로 사망했었죠
만일 살아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
지금의 도덕 가치로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한 인간을 한 두 가지만으로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은 피카소 그림 같다.
옳은 말씀이세요!
나찌 히틀러도 전쟁에 이겼으면 영웅으로 칭송 받았을거임 모든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쓰여짐
위인들 치고 좋은 남편이 없다거나 이런 문제 보다는, 시대적인 한계로 이해하는 게 더 좋을듯.
세종도 자기 왕후를 굳게 신뢰하고 존경하긴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위인들치고 좋은남편 거의 없음 ㅋㅋㅋㅋㅋ
좋은 남편이죠. 숙종을 보소.
세종 정도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왕정 국가들의 왕중에서 따져봐도
최고의 남편 상위 1%안에 들만한 남편이었음
정조는 좋은 남편아닌가요?
애초에 나라의 질서 자체가 남자들 중심이었고
왕실이고 사대부고 간에 여인들의 소리없는 희생 위에서 업적을 이루고
군림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였는데 뭘 어쩌겠냐....
그리고 그놈의 유교니, 왕권이니 지키기 급급해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겠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이 있어도
세종은 평천하는 했으나 가정을 다스리고 내 사람을 돌보는 일은소홀 할 수 밖에 없었던거지...
소헌왕후의 희생과 노고가 없었으면 이정도 성군이 될 수 있었을까 싶다.
세종의 큰 위상 뒤엔, 그 토대가 되어준 아내 소헌왕후의 공이 크다.
소헌왕후는 정말 그릇이 큰 조선의 국모이고 멋진 여성 리더라 생각한다
그걸 알고있으니 세종대왕도 비롯 후궁은 많이 뒀으나 왕으로선 아내를 극진히 대했겠지
자식 여럿낳고 좋은일 생긴 임금은 어떤 나라에도 없다
형이나 동생이나 여성에 대해서는 똑같네요
태종, 세종, 문종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성군이었으나 남편으로써는 완전 꽝이듯...
그래도 소헌 왕후와도 금슬이 좋았다고 했죠
그래서 8남 2녀를 낳았고,
*정소 공주 & 문종 & 정의 공주 & 세조 & 안평 대군 & 임영 대군 & 광평 대군 & 금성 대군 & 평원 대군 & 영응 대군* 을 낳았다고 전해지고, 소헌 왕후의 친정이 망할때도, 소헌 왕후의 폐위를 막았던게 세종이었다고 전해지죠
만일, 소헌 왕후가 손자 단종이 왕이 되고 난 뒤에도 살아 있다면??
정력왕이네요
임금이 후손을 많이 낳아야지 나라가 안정되지
조선 말기로 갈 수록 자손이 마르더라
@@울랄라-l6f조선 태종이 세종보다 더했죠 원경왕후와의 4남 4녀 이지만, 실제론
*정순 공주 & 경정 공주 & 경안 공주 & 양녕대군 & 효령대군 & 세종 & 정선 공주 & 성녕대군 & 양녕대군 위 아들 셋* 으로 7남 4녀를 뒀대요
@@별의고양이-b4r 살아있었다면 세조가 친
모가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조카 왕위 찬
탈하는 것도 모자라 죽이고 자기 친동생들도
죽이지 못했죠
세종대왕을 문과 먹물로만 보는 양반들이 많은데 세종은 기본적으로 장군집안인 이성계의 손자임 ㅋ 아이러니하게도 세종의 문과적인 성향은 아버지 이방원으로부터 온 거임. 그래도 세종은 전쟁도 불사할 정도로 호전적이었고 여성편력도 꽤나 있었음
눈에 들어와서 자빠뜨린게 아니고 색이 동해서
옆에 있는 아무한테나 푼것일테지 ㆍ
자기 여자에게 사랑을 안 주다보니 김씨나 봉씨 같은 여인네가 생기는 거야
외로운데 어쩌겠어
남자들아 네 여자를 외롭게 하지 마라
참다가 아버지가 죽으니 이제야 본심이 나온거지 에라이 ㅋㅋㅋ
지 아빠가 지 형 여자문제로 세자 폐위시키는거 보교 무서워서 참은거. 남자로선 최악 오브 최악
그래도 소헌 왕후가 무사했던게, 이미 소헌왕후가 세종 사이에서 자녀들인 *정소 공주 & 문종 & 정의 공주 & 세조* 를 낳았고, 게다가 왕비가 된 해에서 또 다른 아들인 *안평대군* 을 낳았기때문이었죠
그 애비(태종)그 형(양녕)
누굴본듯 여자를 좋아
하는건 가족 내력이지
세종대왕이 수많은 후궁들 들여 자식들
도 낳았지만 그건 왕실에 자손들을 번창
해야하는 임금의 큰 책무였습니다 그래
도 세종대왕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식(10명)을 낳을만큼 소헌왕후
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걸 핑계로 하기엔 상궁도 건들고 보통 임금들도 관계를 안하던 여인들도 그냥 성욕이
왕성하신듯 ㅋㅋ
근데 자기 아들 이었던 세조는 여색은 별로 밝히지 않은게 아이러니 술은 그렇게 좋아 했다는데 세종이나 문종은 여자를 제법 밝히거나 그랬는데 🤔
@@enjoypanda진짜....오죽하면 신하들이 세조에게 후궁 좀 들이라고 할 정도였죠;;;정희왕후 입장에선 조았겠지만
@@enjoypanda그러나 문종은 첫째 부인 휘빈 김씨 & 두번째 부인 순빈 봉씨와도 사이가 안 좋았대요
그래서 휘빈 김씨는 주술하다 걸려 쫓겨났고, 순빈 봉씨는 동성애에 걸려 쫓겨 났고요
그래서 문종의 후궁들 중에서 권씨가 세번째 부인이 되었죠
원래는 문종의 맘에 든 사람이 있었으나, 세종이 권씨를 세자빈으로 둔 이유가 아이를 이미 2명을 낳은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그 세자빈 권씨가 아들 단종을 낳고 사망했고요
암튼! 최후결과는 죄없이 비운의 희생양이 된 단종님과 누이 경혜공주 그리고 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 사육신분들인것 같습니다.
효령대군은 안그랫눈데😡
양녕대군과 다르지 않는 세종😵
세종..아버지 3년상 후 드러나는 본색,
그래서~~~피는 못속인다는거지
세종대왕이 자신의 정적(?)들을 벌 주기 보다는 오히려 가혹하게 부려먹었듯이(최대 피해자: 황희), 소헌왕후도 연적(?)들을 부려먹었다 함.ㅋㅋㅋ
저 집구석 피는 못 속임 ~
애비나 아들들이나
웃긴게 세조는 세종이랑 문종과는 다르게 후궁이 역대왕들에 비해 적은게 아이러니~실록보면 정궁인 정희왕후만 아꼈고
당시엔 자손을 남기는 것도 왕의 중요한 임무중 하나였으니까요. 지금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일은 아니지 싶네요.
태종 할아버지가 있어야 손주들이 정신 바짝 차릴껀데
후궁이 한트럭인데 고고하고 우아한 마음가짐 가지는게 이상한거지
남편으로는 세조 수양대군이 더 나은듯
수양대군 얘기는 꺼내지도 마 ;ㅋ
15:30의 '열녀전'이라는 한자가 틀렸네요. 列女傳이 아니고 烈女傳이 맞습니다.
열녀전列女傳이 맞습니다. 여기서 열녀列女는 '(모범이 될 만한 혹은 그렇지 않은) 여러(列) 여성들(女)'이라는 뜻이지요. 이 책은 전근대시대 여성 교육에 있어 기본 교과서와 같이 널리 읽혔던 중국 책으로, 고유명사입니다. 烈女傳이라고 하면 정절을 지킨 (특정) 열녀에 대한 전이라는 뜻으로 보통명사인데다, 이 경우엔 남편을 따라 죽거나 수절하라고 가르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列女가 맞게 쓴 것입니다.
저 시대때는 왕이 자손을 많이 남기는 걸 의무로 생각. 영아 사망률도 높아 더 그랬음.
난 저러고 못살듯 합니다만
세종이 왕후와의 사이에 아들이 많아서 속궁합이 맞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세종은 그냥 성욕 식욕이 뛰어났구만. 그래서 문종이 여자를 멀리했나
세종...성병으로 죽었을껄요 ㅋㅋㅋ
세종은 일도 열심히 하고 놀때도 열심히? 놀았던게 성종이랑 비슷하네요
인물을 지금 시대의 시각으로 보면 안된다는 대표적 인물이 세종이지
그 아버지에 그자식
세종은 낮이고 밤이고 엄청 바빴겠네요.
정력도 식탐도 일욕심도 다 엄청나네
세종은 대단하고 멋진 상남자.
국정을 처리하고 공부를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어떻게 음양지덕 까지도 적극적이셨을까,
그 고추에 그고추가 난거야~ 콩 심은데 콩 난거지~ 근데 콩이 머리가 너무너무 좋은 콩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왕비는 비구니 수도승 같은 마인드로 살았겠지요.
그게 현실판 지옥 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현자라도
아랫도리는 따라 움직이죠.
세종이 성욕구가 해소 되니
열정적으로 나랏일 할수 있었겠지요.
왕치고는 후궁 몇명은 기본 입니다.
그런데 옛날 왕 치고 후궁 안들인 왕이 잇나? 서양이고 동양이고 간에 후궁 엄청 많던데 여성 편력이라고 까기엔 왕이면 나라가 자기거라고 생각하는데 궁녀 도 다 왕 여자고 연산군처럼 전국 여자 기생 다 모집하는 정도 아니면 심한건 아닌거 같음
그래도 처신은 잘한거 같은데 후궁 많으면 문제가 본부인은 개무시하고 후궁만 총애하고 본부인은 자식도 없고 후궁 자식이 왕되고 이러면 분란이 생기는데 세종은 여자는 많앗어도 본부인을 제일 사랑하고 대우해주고 세자도 본부인 자식으로 세워서 왕비 권위도 잇으니 후궁들도 왕비한테 순종하고 평화롭게 지낸거 같음
조선 다른 왕비들 보면 행복하게 사랑 받고 산 왕비가 거의 없고 후궁이 사랑 받고 세자도 후궁한테서 보고 왕비들은 불행한 경우가 대다수인데
세종이 저정도면 저 시대 왕 치고는 처신 잘하고 본부인한테 잘한거 같은데
일도 열심히 하고 놀때도? 열심이었던 성군
세종도 사람인데
흠이 좀 있는게 오히려 정상이지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섹으로 풀었다라고 보는게 맞을 듯
또한 아버지의 여자 좋아하는 피도 필요하고...
스트레스는 운동이나 술 등으로 풀어야 하는데 여자로 푸는 사람도 존재함...ㅎ
세종대왕님은 내가 한글을 쓰고 있게 해줬으니까 인정
참 사랑이 넘치는 대왕님 존경합니다
좀더 오래사시징.. 남편이랑 같이 뭍히고싶지 않으셨을텐데...😢
성군이라고 칭송 받는 세종.. 다시 봐야.
피는 못 속이나.. 추접하다.
소현황후가 아깝고 아깝도다.
세종에게 소현황후는 아내가 아니라 정치적 파트너인 것인가?..
세자빈들이 이상행동 한게 자기가 나중에 중전이 되면 자기집안이 원경왕후 소현왕후 집안처럼 역적 집안되서 풍비박산 날까봐 어떻게든 폐비될려고 발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 집안이 박살난걸 자기 부모가 다 두눈으로 가봤을텐데
세종대왕, 소헌왕후 😊
그아버지에 그아들~~~
세종자식. 22명. 신기하네요. 18명아들. 4명 딸
다섯째 광평대군을 기리는 글들을 보면, 평소 좋아하는 생선을 드시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
세종이 여성편력이 있다기 보다 정치적으로 내명부를 이용한거죠.
태종 사 후 아무리 처가를 몰락 시켰다 하더라도 왕자를 8이나 낳은 왕비의 세를 누르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왕비를 견제하기 위해 많은 후궁이 들이고 궁궐 안 수족이 될 궁녀들을 승은을 준것이겠죠.
세자빈이 계속 바뀐 이유도 마찬가지로 외척의 발호를 맊기 위함이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라 왕권강화가 중요했거든요.
여러므로 세종은 빈틈 없는 왕이였으나...그렇게 무너진 내명부로 단종은 외톨이가 된 채 왕이 되었고 결국 계유정난이 일어난거죠
결론적으론 그렇게 되었네요. 좋은글 잘 감사해요
그래도 그 시절에는 애들이 워낙 다 죽으니 많이 낳아야되눈 명분은 있었죠
조선시대 왕비 중 연산군 비 신씨나 소헌왕후는 인품 좋고 처복도 세종이나 연산군이 더 좋았네 반면 소헌왕후랑 연산군 정비 신씨는 남편복이 없었던 것 같다
혜빈 양씨는 저랑 같은 청주 양씨 집안인데 어린 단종을 키워주고 보호 해준 후궁입니다만 나중에 교사형을 받고 사망합니다 그리고 양정이라고 혜빈 양씨와 먼 친척 되는 분이 있는데 이 놈이 혜빈 양씨 죽이라고 상소 올렸고 나중에 세조와 대신들이 연회 하던 날 실언해서 참수 당합니다
외유내강 소헌왕후❤
세종대왕 바람둥이
위대한중전마마시네요
세종 교배 졸라 좋아했네 왕족이니까 칭송받는거지 평민이었으면 걍 변태지
교배가 아니라 교미겠지
@@waigaioege820아니 세종대왕님께 이런 망발을ᆢ
솔직히 소헌왕후가 내조의 왕후지.❤그래서 세종도 이일저일 잘해나갈수 있었던이유.
바람기의 D NA 피는 못속임~
숙종처럼 특정 궁녀 1인에게 빠지는것보다 여러 궁녀들을 사랑하시는게 중전한테는 낫지.
본인 건강엔 안 좋겠지만.
진행이 답답하다.
보다가 나가게 된다.
소헌왕후는 태조대왕 이성계와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함께 얼마나 시아버지 태종 이방원을 많이 미워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아버지를 잃게 만든 분이 시아버지이며 그 마음을 아는 사람은 시할아버지이신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시어머니인 원경왕후밖에 없다는 것을 세종대왕님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최고의 왕이시지만 아내와 아들 및 딸들에게 어떤 아버지라는 존재였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왕이 한 명의 여자와
살기는 힘들었겠죠.
눈 앞에 널렸는데.
그 아버지의 그 아들들이지.. 태종이 후궁10명이나두고 그 난리였고.. 양령이나 세종대왕이나 마찮가지였지 않을까? 둘째 효령은 불교에 귀의했으니 그렇지만..
아니 종합병원 세종대왕은 편력이 어디서 생긴거여?? 허 참........ 아니 그래서 몸이 더 안좋아 졌나??
세종이 후궁을 많이 두었던 것은 궁녀들을 불쌍히 여긴 것과 동시에 왕실의 번영을 위해서였다고 함.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왕도 백성을 위한 문자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음.
문자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대항력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지도층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리는 일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세력이 다 반대하는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남다른 애민정신이 있었다는 것임.
후궁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듯.
워낙 학문에 빠져있던터라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여색을 탐한 게 아나라고 함.
한만 쌓다 가셨네...
세종의 후궁이 많다 하여 흠이되는 시대도 아니고 잘못한것도 아닌데 꼭 잘못한거 처럼 묘사를 하네요
세종이 후궁이 많았다는건 왕실의 후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인데
지금의 일부 일처제의 시각으로 나쁜 넘으로 만드네
차기 SBS 대하 사극 드라마 "정자왕 세종"
ㅡ
세종이
ㅡ똑똑 했네
ㅡ여인 경호부대를 만들었네
천재들이 성욕이 더 심한건왜지?
원경왕후와 태종이 만약 좋았다면...조선시대의 여인상은 고려때의 자유분방한 여성과 다르지 않았을거로 생각됩니다. 유교사상은 고려때도 있었으니까요 ....
두사람의 관계와 유교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유교를 공고히 한 왕은 성종이라고 알고있어요. 성종이후로 여성의 인권을 점점 내려갔습니다.
@@kimberley-p4f 네 동의합니다. 다만 그게 조금씩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고려때와 조선은 정말 다르죠...조선초기에는 여성인권과 남녀간의 로맨스도 꽤나 자유롭습니다. 예전 부부간의 절절한 로맨스가 편지를 통해서 시간여행을 해왔죠
세종 사랑 안했네
그건 아님 암만 후궁을 많이 들였어도 소헌왕후한테서 제일 많은 자식을 봤는데.. ? 소헌왕후랑 세종 사이에서 본 자식만 10명임 영상에도 세종이 소헌왕후를 상당히 아꼈다고 나오는데..
소헌이 세종을
후대를 많이 남겨 왕실을 유지시키는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네
태종은 동생들도 죽여 처갓집도 망하게해 며느리친정까지..
어제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472년만에 망하는걸 482년이라고 잘못 방송하셨네요. 자축인묘진사오... 말은 12 간지에서 7번째인데 8번째라고 잘못 세셨습니다.
아버지 닮았네.... 피는 안 바뀌나봄😢
세종: 난 아버지 반만 이뤘도다
싸나이 이도!
기적적으로 최고의왕과 왕비가 만난거였네..
역쉬 피는 어디 안가는구만
왕권 강화는 무슨
동물적인 본능이지
중전들만 화병나겠넹
세종이 자식,며느리 복은 진짜없었네..
세종대왕님은 자식농사가 힘드셨네
성군? 동물에 왕국이내 ㅋ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권력에 정점에 가려면, 돈과 권력있는 세력이 필요한데. 그 세력을 통해 위에 올라가면, 나중에는 그 세력이 잘못한게 있다면 본인에게 타격이 오니, 그 세력을 처리해야한다.
아들 9에 딸 2을 낳아 비의 대접 톡톡히 받고 타의 추종을 불허했구만 왠 질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