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경복궁을 지을때 풍수 일화이고 석상과 연관이 있어 이야기 몇가지를 적을까 합니다 당시 광화문 방향을 두고 왕의 책사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갈렸었는데요 정도전은 군주가 남향을 보고 정치를 하는데 어찌 대문을 삐딱하게 둘 수 있냐며 당연히 정남향으로 광화문을 두게 하자 하였고 무학대사는 한강 건너 관악산의 화기가 너무 강해 광화문을 정남향으로 두게되면 그 화기가 광화문을 통해 궁안에 그대로 전해질것이라며 광화문을 동쪽으로 조금 틀고자 했었습니다(관악산을 북쪽에서 바라보면 봉우리들이 삐쭉삐쭉 산 전체가 불이 치솟는 형상을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기는 흐르는 물(한강)을 건널 수 없다는 교과서 적인 논리를 폈고 무학대사는 관악산의 화기는 현재도 강하게 전해지고 있다고 충고 했었죠 결국 이성계는 반듯한 터에 대문을 비딱하게 두면 담장까지 다 비틀어지기 때문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정도전이 풍수에 출중한 인물이긴 했지만 무학대사는 당대 최고의 풍수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무학대사가 어떤 비극을 예견 했던것일까요.. 이후 무학대사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고 어떠한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이후 경복궁 안에는 크고 작은 화재가 났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죠 이렇게 잦은 화재로 빠른 진화를 위해 전각들 앞에는 물을 담아 놓은 구조물을 설치 해 놓기도 했답니다 또 남쪽에 숭례문 현판에도 관악산의 불의 기운을 대비 해 풍수비보 장치를 해 두었는데요 바로 마치 불이 크게 타오르는 형상을 한 높을 숭崇 자를 현판에 넣은 것입니다 이는 불은 불로써 맞서겠다 라는 뜻으로 숭례문에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 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숭례문 현판을 태종 이방원, 왕의 필체를 새겨 넣었다는것도 아주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판 히스토리를 잠시 이어가자면 성곽의 사대문 중 흥인지문(동대문)만 네글자인 이유가 있습니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북악산(현무) 인왕산(우백호) 남산(주작)에 비해 매우 낮고 작아 그 약한 용의 기운을 더욱 듬뿍 받고자 용이 승천하는 형상인 갈 지之 자를 흥인에 추가 해 흥인지문 이라고 짓게 된것이랍니다 이러한 이유로 흥인지문은 상시적으로 대문을 열어두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앞에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주 특이하게도 사대문 중 숭례문의 현판만 세로로 세워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는 높을 숭崇 자의 불의 기운과 함께 현판을 세움으로써 관악산에서 불어오는 화기를 문전에서 눌러 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그로 부터 100년 후 무학대사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찾아 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초기 전각 999칸 중 단 몇칸만 남겨둔채 싹 다 불타버리게 됩니다.. 이후 창덕궁을 지어 긴 세월 사용하다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다시 복원하게 되었죠 이때 탄생한것이 바로 관악산의 그 엄청난 화기와 맞서게 될 거대한 해태상 두마리~ 해치 라고도 부르죠 녀석들이 광화문 양 옆으로 딱 포지션을 잡게 됩니다! 해태는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줄 알고 또 불을 다스린다는 상상속 동물인데요 광화문 앞 해태상을 관찰 해 보면 온몸이 태극 문양에 두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고 이빨을 들어내 꼬리가 치켜 세워져 있는데요 또 정면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관악산 방향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상대적으로 다소곳하게 앉은 자세는 해태를 긴장 시킬 상대는 없다 는 뜻으로 해석 해도 될것 같습니다 해태상은 한반도에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주변국들의 해태상을 보면 정말 섬짓하고 오래 보기 힘들 정도로 괴기한 형상을 하고 있죠 당시 선조들이 최대한 무섭게 표현 한것이 지금의 이런 귀여운 모습이라니 우리 선조님들 백의 민족 답습니다ㅎ 그리고 해태의 옆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공격성을 그대로 반영시키기 위함입니다 정면으로 두면 얼굴만 보이게 되니까요 해태가 다소 귀엽게 보이지만 부분 부분 살펴보면 화가 많이 나 있다는것을 알수 있어요 마치 여기는 못지나간다 듯~ 자세히 보면 목에 방울도 달려 있답니다 저지선이 뚫렸을때 방울을 울려서 알리란 뜻으로요ㅎ 안타깝게도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전각들이 다시 허물어 지긴 했지만 불에 휩쓸리진 않았습니다 이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되찾으면서 경복궁을 지금까지 조금씩 재복원하고 있답니다 경복궁은 원래 전각들이 미로처럼 빼곡하게 들어서야 정상인데 경복궁에 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궁이 좀 휑 하죠? 복원이 느린 이유는 전각에 사용 할 금강송 이란 나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둘래가 엄청난 대들보 같은 경우는 수백년은 자라야 하고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베어서 말리는데만 3년 이상 기다려야 사용이 가능합니다 말리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하면 무게에 변형이 오고 또 수분 때문에 두배이상 무거워서 작업에 상당한 고충이 따르죠 중장비를 사용하면 편하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문화재 복원은 과거 작업 형태에 깊은 의 를 두고 거의 모든 작업을 수 작업으로 이어가고 있답니다 기술자들이 부족한것도 현실이구요 과거 일제가 경복궁을 허물고 그 금강송 자제들을 일본에 실어 가서 고위급 인물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일부 친일파들의 집에 쓰이기도 했구요 이 나무의 질이 상당 합니다 천년고도 경주 불국사에도 다 금강송이 쓰였답니다 이야기가 자꾸 옆으로 새네요.. 광화문 복원때 일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광화문 복원이 한창일때 광화문 앞 도로도 같이 정비를 해야 했기에 해태상을 도로 정비가 끝날때 까지만 이동 시키자는 책임자의 의견이 나왔었습니다 이때 풍수지사들은 해태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과거의 비극이 절대 되풀이 되면 안된다 하여 해태상을 치우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길것이라며 반대 했었다고 하죠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은 답을 찾지 못하고 해태상을 문화재 보관 창고로 이동시키고 맙니다 불안했던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요.. 기억하십니까? 2008년 2월 11일... 전 국민을 눈물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든 충격적인 그날... 세계 주요 외신들도 앞다퉈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는 뉴스를 긴급 타전 시켰고 심지어 북한 주민들 까지 비통한 심정으로 뉴스를 접했다고 전해지는 그날의 새벽.. 대한민국의 국보 제 1호 숭례문이 완전히 전소하게 됩니다....... 임진왜란과 6.25 한국전쟁을 겪고도 무려 600년 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던 숭례문을 단 몇시간 만에 잃게 됩니다...ㅜ 이날 뉴스 실시간 상황을 보면서 정말 소름 끼쳤던건 소방대가 긴급 투입되 화재를 조기 진화 시킨듯 보였지만 진화 작업 두시간째.. 갑자기 숭례문 현판이 떨어져 나갑니다 이때부터 마치 기다렸다는듯 불씨가 살아나더니 더 큰 화마가 되어 숭례문을 완전히 집어 삼켜 버립니다.. 궁지에 몰린데서 현판의 힘으로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을 숭례문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코끝이 찡 합니다..... 왜 숭례문이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경복궁 최전선인 정남향에 숭례문이 있고 불의 기운은 木 즉 나무를 만나면 불이 쉽게 붙는다는 것입니다(화기가 강해 저절로 불이 붙는것이 아니라 그게 인간이든 자연재해든 어떠한 형태로든지 불로써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당시 경복궁은 광화문 전체를 시크릿 막을 쳐 놓고 복원 중이였기 때문에 화를 면했고 대신 남쪽에 숭례문이 관악산이 내뿜는 화기에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버린것이죠.. 과연 우연일까요? 이후 정부의 대처를 보시죠~ 문화재청에서는 부랴부랴 해태상을 데리고 와 복원중인 광화문 양쪽 담장안에 넣고 철망을 쳐서 남쪽을 바라 보게 하고 광화문 복원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실화이고 영상과 관련된 비보 풍수에 관해 두서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끝으로.. 과거 우리 민족들의 삶은 산을 기준으로 어느 산의 기운을 받고 살아 갈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마을이 형성이 되었고 또 그 속에서 초가집을 지어도 대문 방향을 어디로 둬야 하는지 또 잘때 머리는 어디로 두고 자야 하는지 등 보편적으로 풍수을 적용 시키며 생활 해 온 민족 입니다 특히 조상들의 묏자리, 묘지터에 신경을 아주 많이 썼구요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풍수를 미신처럼 여겨 그 정신이 많이 훼손 되어 온것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알고보면, 보이지않는 세상을 아는 사람들만이, 왜 저런일이 생기는지 압니다. 자연적으로 보이지않는 힘이 만든 형상은 반드시 만들어진 의도가 내포되있습니다. 즉 누군가가 칼을 만들엇다면, 그 칼엔 칼성품이 내재되있죠. 마찬가지로 자연 형상, 산 , 지형도 동일합니다. 산속, 지형속 등엔 그러한 성질 기운이 내재됩니다. 어느 마을 동네서 산사태가 크게 일어낫는데, 그 전날부터 산사태 나기전인데, 산에서 우는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산사태가 낫다구 뉴스에 나왓죠. 이는 아는 사람 마음으로 속을보면, 그 산도 정신 마음이 있엇는데, 무너지기전에 고통스레 신음소릴하고, 그 경고를 한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호랑이 성짉갖구잇는 지형이 노한것이죠. 누가 믿을가요. 이런일이 드믄드믄 있지요 .지자자 知子知 不知子不知 이랄뿐
우리동네네요 ㅎ지금은 동네 입구에 코끼리동상 두개나 세워져 있고 속도제한도 걸려 있어요 사고 안나요 그후
뭐호랑이가화가나다고무서워😮😮
그 동네가 어딘가요?
@@김수영-u4g 부산 기장
음 걍 과속해서 인듯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경복궁을 지을때 풍수 일화이고 석상과 연관이 있어 이야기 몇가지를 적을까 합니다
당시 광화문 방향을 두고 왕의 책사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갈렸었는데요
정도전은 군주가 남향을 보고 정치를 하는데 어찌 대문을 삐딱하게 둘 수 있냐며 당연히 정남향으로 광화문을 두게 하자 하였고
무학대사는 한강 건너 관악산의 화기가 너무 강해 광화문을 정남향으로 두게되면 그 화기가 광화문을 통해 궁안에 그대로 전해질것이라며 광화문을 동쪽으로 조금 틀고자 했었습니다(관악산을 북쪽에서 바라보면 봉우리들이 삐쭉삐쭉 산 전체가 불이 치솟는 형상을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기는 흐르는 물(한강)을 건널 수 없다는 교과서 적인 논리를 폈고
무학대사는 관악산의 화기는 현재도 강하게 전해지고 있다고 충고 했었죠
결국 이성계는 반듯한 터에 대문을 비딱하게 두면 담장까지 다 비틀어지기 때문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정도전이 풍수에 출중한 인물이긴 했지만 무학대사는 당대 최고의 풍수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무학대사가 어떤 비극을 예견 했던것일까요.. 이후 무학대사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고 어떠한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이후 경복궁 안에는 크고 작은 화재가 났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죠
이렇게 잦은 화재로 빠른 진화를 위해 전각들 앞에는 물을 담아 놓은 구조물을 설치 해 놓기도 했답니다
또 남쪽에 숭례문 현판에도 관악산의 불의 기운을 대비 해 풍수비보 장치를 해 두었는데요
바로 마치 불이 크게 타오르는 형상을 한 높을 숭崇 자를 현판에 넣은 것입니다
이는 불은 불로써 맞서겠다 라는 뜻으로 숭례문에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 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숭례문 현판을 태종 이방원, 왕의 필체를 새겨 넣었다는것도 아주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판 히스토리를 잠시 이어가자면 성곽의 사대문 중 흥인지문(동대문)만 네글자인 이유가 있습니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북악산(현무) 인왕산(우백호) 남산(주작)에 비해 매우 낮고 작아 그 약한 용의 기운을 더욱 듬뿍 받고자 용이 승천하는 형상인 갈 지之 자를 흥인에 추가 해 흥인지문 이라고 짓게 된것이랍니다
이러한 이유로 흥인지문은 상시적으로 대문을 열어두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앞에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주 특이하게도 사대문 중 숭례문의 현판만 세로로 세워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는 높을 숭崇 자의 불의 기운과 함께 현판을 세움으로써 관악산에서 불어오는 화기를 문전에서 눌러 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그로 부터 100년 후 무학대사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찾아 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초기 전각 999칸 중 단 몇칸만 남겨둔채 싹 다 불타버리게 됩니다..
이후 창덕궁을 지어 긴 세월 사용하다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다시 복원하게 되었죠
이때 탄생한것이 바로 관악산의 그 엄청난 화기와 맞서게 될 거대한 해태상 두마리~ 해치 라고도 부르죠
녀석들이 광화문 양 옆으로 딱 포지션을 잡게 됩니다!
해태는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줄 알고 또 불을 다스린다는 상상속 동물인데요
광화문 앞 해태상을 관찰 해 보면 온몸이 태극 문양에 두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고 이빨을 들어내 꼬리가 치켜 세워져 있는데요
또 정면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관악산 방향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상대적으로 다소곳하게 앉은 자세는 해태를 긴장 시킬 상대는 없다 는 뜻으로 해석 해도 될것 같습니다
해태상은 한반도에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주변국들의 해태상을 보면 정말 섬짓하고 오래 보기 힘들 정도로 괴기한 형상을 하고 있죠 당시 선조들이 최대한 무섭게 표현 한것이 지금의 이런 귀여운 모습이라니 우리 선조님들 백의 민족 답습니다ㅎ
그리고 해태의 옆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공격성을 그대로 반영시키기 위함입니다 정면으로 두면 얼굴만 보이게 되니까요 해태가 다소 귀엽게 보이지만 부분 부분 살펴보면 화가 많이 나 있다는것을 알수 있어요 마치 여기는 못지나간다 듯~
자세히 보면 목에 방울도 달려 있답니다 저지선이 뚫렸을때 방울을 울려서 알리란 뜻으로요ㅎ
안타깝게도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전각들이 다시 허물어 지긴 했지만 불에 휩쓸리진 않았습니다
이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되찾으면서 경복궁을 지금까지 조금씩 재복원하고 있답니다 경복궁은 원래 전각들이 미로처럼 빼곡하게 들어서야 정상인데 경복궁에 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궁이 좀 휑 하죠?
복원이 느린 이유는 전각에 사용 할 금강송 이란 나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둘래가 엄청난 대들보 같은 경우는 수백년은 자라야 하고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베어서 말리는데만 3년 이상 기다려야 사용이 가능합니다 말리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하면 무게에 변형이 오고 또 수분 때문에 두배이상 무거워서 작업에 상당한 고충이 따르죠 중장비를 사용하면 편하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문화재 복원은 과거 작업 형태에 깊은 의 를 두고 거의 모든 작업을 수 작업으로 이어가고 있답니다 기술자들이 부족한것도 현실이구요
과거 일제가 경복궁을 허물고 그 금강송 자제들을 일본에 실어 가서 고위급 인물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일부 친일파들의 집에 쓰이기도 했구요 이 나무의 질이 상당 합니다 천년고도 경주 불국사에도 다 금강송이 쓰였답니다 이야기가 자꾸 옆으로 새네요..
광화문 복원때 일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광화문 복원이 한창일때 광화문 앞 도로도 같이 정비를 해야 했기에 해태상을 도로 정비가 끝날때 까지만 이동 시키자는 책임자의 의견이 나왔었습니다
이때 풍수지사들은 해태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과거의 비극이 절대 되풀이 되면 안된다 하여 해태상을 치우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길것이라며 반대 했었다고 하죠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은 답을 찾지 못하고 해태상을 문화재 보관 창고로 이동시키고 맙니다
불안했던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요..
기억하십니까? 2008년 2월 11일...
전 국민을 눈물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든 충격적인 그날...
세계 주요 외신들도 앞다퉈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는 뉴스를 긴급 타전 시켰고 심지어 북한 주민들 까지 비통한 심정으로 뉴스를 접했다고 전해지는 그날의 새벽..
대한민국의 국보 제 1호 숭례문이 완전히 전소하게 됩니다.......
임진왜란과 6.25 한국전쟁을 겪고도 무려 600년 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던 숭례문을 단 몇시간 만에 잃게 됩니다...ㅜ
이날 뉴스 실시간 상황을 보면서 정말 소름 끼쳤던건 소방대가 긴급 투입되 화재를 조기 진화 시킨듯 보였지만 진화 작업 두시간째..
갑자기 숭례문 현판이 떨어져 나갑니다
이때부터 마치 기다렸다는듯 불씨가 살아나더니 더 큰 화마가 되어 숭례문을 완전히 집어 삼켜 버립니다..
궁지에 몰린데서 현판의 힘으로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을 숭례문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코끝이 찡 합니다.....
왜 숭례문이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경복궁 최전선인 정남향에 숭례문이 있고 불의 기운은 木 즉 나무를 만나면 불이 쉽게 붙는다는 것입니다(화기가 강해 저절로 불이 붙는것이 아니라 그게 인간이든 자연재해든 어떠한 형태로든지 불로써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당시 경복궁은 광화문 전체를 시크릿 막을 쳐 놓고 복원 중이였기 때문에 화를 면했고 대신 남쪽에 숭례문이 관악산이 내뿜는 화기에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버린것이죠..
과연 우연일까요? 이후 정부의 대처를 보시죠~
문화재청에서는 부랴부랴 해태상을 데리고 와 복원중인 광화문 양쪽 담장안에 넣고 철망을 쳐서 남쪽을 바라 보게 하고 광화문 복원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실화이고 영상과 관련된 비보 풍수에 관해 두서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끝으로..
과거 우리 민족들의 삶은 산을 기준으로 어느 산의 기운을 받고 살아 갈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마을이 형성이 되었고 또 그 속에서 초가집을 지어도 대문 방향을 어디로 둬야 하는지 또 잘때 머리는 어디로 두고 자야 하는지 등 보편적으로 풍수을 적용 시키며 생활 해 온 민족 입니다 특히 조상들의 묏자리, 묘지터에 신경을 아주 많이 썼구요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풍수를 미신처럼 여겨 그 정신이 많이 훼손 되어 온것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상세하고 정확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내용을 젊은 세대가 알아야 하는데 효과적으로 알릴 방법이 멊네요
해태를 보관창고로 옮기고나서 바로 숭례문이 불탄건가요?
@@gkstlagkrns 네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전소 됐습니다
3:44 @@csL-f8o
내용은 맞으나 방향설정의 논쟁은 광화문이 아니고 숭례문이었씀 현재의 방향데로 하면 조선의 장남들은 기를펴지 못하고 차남이 득세한다는 무학의 말씀었씀
@@초현-q8y 장남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건 좌청룡 낙산의 기운이 약해서 입니다 그래서 동대문에 여러 풍수적인 요소를 넣은것이구요
다행히도 조선의 역대 왕들을 보면 음기가 매우 강한 우백호 인왕산에 기운을 덜 받아 폭군은 비교적 적게 생긴걸로 보입니다만..
쟐 보앗습니다😊
알고보면, 보이지않는 세상을 아는 사람들만이, 왜 저런일이 생기는지 압니다. 자연적으로 보이지않는 힘이 만든 형상은 반드시 만들어진 의도가 내포되있습니다.
즉 누군가가 칼을 만들엇다면, 그 칼엔 칼성품이 내재되있죠. 마찬가지로 자연 형상, 산 , 지형도 동일합니다. 산속, 지형속 등엔 그러한 성질 기운이 내재됩니다. 어느 마을 동네서 산사태가 크게 일어낫는데, 그 전날부터 산사태 나기전인데, 산에서 우는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산사태가 낫다구 뉴스에 나왓죠. 이는 아는 사람 마음으로 속을보면, 그 산도 정신 마음이 있엇는데, 무너지기전에 고통스레 신음소릴하고, 그 경고를 한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호랑이 성짉갖구잇는 지형이 노한것이죠. 누가 믿을가요. 이런일이 드믄드믄 있지요 .지자자 知子知 不知子不知 이랄뿐
이야기속으로에서도 나왔다
대곡 잘알죠
석산 공장도 보이고
사고 난다는 곳 특 : 과속 카메라 생기면 사고안남
곶감이 최고.......
ㄹㅇ 어릴때 진짜 이거 보고 ㄷㄷ떨었는데
아니 근데 이제보니 영상은 안무섭네
다행입니다
이야기 속으로에도 나온 에피소드
갓끼리ㅋㅋ
👍👍👍👍👍
호랑이 산! ㄷㄷ
호랑이는 코끼리한테 고양이지
참 할말이 없네 진짜..신기하다..안타깝구..
코끼리가짱이지
동물의 왕국만봐도 코끼리가 이깁니다.
사자가 더쌤 😤🤩
진주 대곡 가정리 중촌
체급은무시못함. 근데 왜 만수의왕이지
인간의 계략 범인 못잡았수
저게 벌써 30여년전 mbc 이야기속으로 에서 나온 이야기들...
이휘재는 저때도 시골 사람 따라하면서 비꼬고 재수없게 굴었네
왜 한을 품게하나?울산도 만만치않음.이용하려 머리쓰니,한이 맺히지.
곶감
말도안도는소리
무슨산때문일까
연쇄살인마짓같은데
심장마비가 살인자짓임? 먼개소리노
그러수 있죠
비과학적 설명되는일수있죠
시리얼 먹으면 됨.
최면... 일종의 암시라고 하죠 어떤 사람이 뭘 암시하면 그렇게 되는 현상 입니다. 심리적 압박이 가장 큰 이유
마을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암시 라고요?? 개인의 문제면 그럴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지요
30명이나죽어나갔는데뭔암시.
어줍잖은 암시 전문가 납셨네
ㅋㅋㅋㅋㅋ 방구석에만잇지 말고 좀 나가라
원한,기도,저주 같은 눈에 안 보이는 힘은 존재함 암시도 저중 일부
어흥!
팩트는 지금 나오는 노인들지금도 살아있는지?
저게 언제적 영상인데 대부분 돌아거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