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당시 백제의 나이 세는 법을 물어보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무령왕릉지석을 보면 계묘년(523) 5월에 62세로 돌아가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523-62=461년 출생입니다. 일본서기와 같습니다. 무령왕은 삼국시대에 보기 드물게 생몰연도가 달까지 명확한 왕입니다. 또 형제관계도 명확하여 무녀독남 외아들입니다. 무령왕은 어머니도 명확하여 이름이 귤희입니다. 삼국사기 또한 무령왕은 동성왕의 제2자라 하여 부자관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남제왕이란 말은 사마왕의 동생이란 말이 아니라 거울을 받는 계체천황의 이름입니다. 마치 동성왕이 말다왕(모대왕), 무령왕이 사마왕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나 같습니다. 그는 곤지의 막내아들이라서 태어날 때부터 남동생왕, 즉 남제왕이란 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왜왕으로 책봉하여 보내는 외교문서인 청동거울에 왜왕으로 가는 사람의 이름인 고유명사를 적어야지 '내 동생이오' 라고 적으면 누구에게 주는 거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참고로 일본서기를 보면 무령왕의 어머니가 귤희(해씨 또는 진씨)인데 (동성왕과 남제왕의 어머니는 한원으로 갈성씨) 왜국에 가서는 자식을 낳지 않아 무령왕은 동생이 없습니다. 제 책 , 39장 '계체천황의 자립위왕'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마지막이고 앞으로는 오류에 대하여 여기서 일일이 수정해드리지 않을 것이니 제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개로왕은 전체백제를 대표하는 진왕은 아니었읍니다. 부여씨인, 한성백제영역의 왕이자, 여곤의 형이었을 뿐이지요. 그리고 11명장군책봉은 개로왕의 신하들에대한 책봉이 아니고 광개토왕의 남진으로 왜국으로 천도한 응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목지국의 진왕이 진왕의 공립전통에 따라 내려오다가 "안강천황"이 죽고 왕위가 공립되지 못하고 왕위쟁탈전으로 혼란만 계속되자 일시적으로 안정화시키기위해 한성백제, 개로왕의 도움으로 남송(?)에 의뢰하여 관작을 수여한것입니다. 그당시 한성백제왕이 왜국의 목지국진왕보다 우위에서 왜국에 명령하고 콘트롤하는 위치에 있지는 못했읍니다. 아닌게 아니라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왜국에서 돌아와 독립된 한성백제왕이 없어지고 동성왕때부터 동성왕이 야마토왜까지 아우르는 전체 백제, 즉 목지국진왕이 되고 왜국은 분국, 또는 담로 또는 백제의 지방정부로 떨어지게 된것이죠. 그래서 목지국의 진왕으로 왕후(개로왕비)를 세우고 공립된 왜왕무(곤지)가 남송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소개에 한성백제까지 포함하는 7국도독이라고 주장한것입니다. 곤지가 진왕의 전통에따라 공립되어 한성백제까지를 포함하는 진왕으로 생각하였기때문이지요.
본인이 보기에 개로왕이 전체백제 목지국진왕으로 공립되기가 힘든것은 그가 전체백제에서 그당시 경기도/황해도 일부를 차지했던 전통적인 왕비국인 한성백제의 왕권만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실력으로 반도의 남반부 모든지역을 정복하여 더 크게 백제에서 최강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거나 동남부의 강력한 신라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였다면 상황은 달라질수 있겠지만 원래 왕비국인 한성백제의 왕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진왕으로 공립되기는 힘들었다고 봅니다. 목지국진왕을 배출하고 있었던곳(그당시 왜국 오사카부근)에서 최강자로써 두각을 나타내고 왕권을 차지하였다면 공립받을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왕비국인 한성백제왕권으로는 안됩니다.
전축분에 대한 궁금증 바로 해결되네요 교수님 폼 미쳤다🎉
삼국사기를 몇번 읽으면
교수님 해석의 반에 반이라도
따라갈수 있을까요
역사책 외에도 여러 분야의 책을 다양하게 읽으시면 그런 것들이 역사책 보시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TV-kz2xm 감사합니다~~~
무령왕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461년인데 지석에는 462년으로 적혀 있다고합니다. 무슨 차이로 이렇게 되었을까요?
6세기 당시 백제의 나이 세는 법을 물어보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무령왕릉지석을 보면 계묘년(523) 5월에 62세로 돌아가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523-62=461년 출생입니다. 일본서기와 같습니다. 무령왕은 삼국시대에 보기 드물게 생몰연도가 달까지 명확한 왕입니다. 또 형제관계도 명확하여 무녀독남 외아들입니다. 무령왕은 어머니도 명확하여 이름이 귤희입니다. 삼국사기 또한 무령왕은 동성왕의 제2자라 하여 부자관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고이왕이 초고왕시대때 태어났고, 비류왕이 고이왕시대때 태어났다는 말인가요?
삼한사의 재조명 3, 236쪽을 보면 백제왕들의 추정 생몰연대가 다 나옵니다. 고이왕: 210~286, 비류왕: 270~344.
세계사가 아니고 국사학자라면 삼국사기가 교과서가 되어야한다
고이왕이 개루왕의 아들.비류왕이 구수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근거는 있습니까?
백제본기에서 제2자는 부자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연도를 따져보아도 생물학적으로 안 맞습니다. 온조왕에서 개루왕은 해씨, 초고왕과 구수왕은 모르고, 고이왕계는 우씨, 비류왕계는 근초고왕부터 구이신왕까지 해씨, 비유왕과 개로왕은 목지국 진왕계인 여씨, 문주와 삼근왕은 신라 왕성인 모씨, 동성왕부터 다시 여씨입니다.
감사합니다~~~
스다하찌만
동경거울에
사마왕이
동생 남제왕의
장수를 기원하며
보낸 동경거울에
오시사카궁이라
기록되어 있읍니다
日十大王年
日은 하늘
十은 동서남북을 가르키는 황극
천황 무령
즉 사마왕이됨니다
남제왕이란 말은 사마왕의 동생이란 말이 아니라 거울을 받는 계체천황의 이름입니다. 마치 동성왕이 말다왕(모대왕), 무령왕이 사마왕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나 같습니다. 그는 곤지의 막내아들이라서 태어날 때부터 남동생왕, 즉 남제왕이란 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왜왕으로 책봉하여 보내는 외교문서인 청동거울에 왜왕으로 가는 사람의 이름인 고유명사를 적어야지 '내 동생이오' 라고 적으면 누구에게 주는 거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참고로 일본서기를 보면 무령왕의 어머니가 귤희(해씨 또는 진씨)인데 (동성왕과 남제왕의 어머니는 한원으로 갈성씨) 왜국에 가서는 자식을 낳지 않아 무령왕은 동생이 없습니다. 제 책 , 39장 '계체천황의 자립위왕'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마지막이고 앞으로는 오류에 대하여 여기서 일일이 수정해드리지 않을 것이니 제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
삼한사의 재조명1 2 3 교보문고에서
구입하여 정독하고 있읍니다
자상하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순천 해룡성고택 남평문씨 종택입니다
해룡성이 백제담로성 으로 추정
열공중입니다
11명 장군 책봉 의뢰자가 한성백제 개로대왕 이고 곤지는461년 백제에서 형수 개로왕비를 황후로 맞이 했기에 목지국 진왕으로 공립될수 있는 요건은 되었읍니다만
개로왕이 자기부인을 보낼정도면 동생나라이지만 상당히 예우 한것인데 좌현왕은 권력서열 2위 아닌가요 백제의 담로국이란 뜻은 담로국 수장은 백제 아닌가요?
개로왕은 전체백제를 대표하는 진왕은 아니었읍니다. 부여씨인, 한성백제영역의 왕이자, 여곤의 형이었을 뿐이지요. 그리고 11명장군책봉은 개로왕의 신하들에대한 책봉이 아니고 광개토왕의 남진으로 왜국으로 천도한 응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목지국의 진왕이 진왕의 공립전통에 따라 내려오다가 "안강천황"이 죽고 왕위가 공립되지 못하고 왕위쟁탈전으로 혼란만 계속되자 일시적으로 안정화시키기위해 한성백제, 개로왕의 도움으로 남송(?)에 의뢰하여 관작을 수여한것입니다.
그당시 한성백제왕이 왜국의 목지국진왕보다 우위에서 왜국에 명령하고 콘트롤하는 위치에 있지는 못했읍니다. 아닌게 아니라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왜국에서 돌아와 독립된 한성백제왕이 없어지고 동성왕때부터 동성왕이 야마토왜까지 아우르는 전체 백제, 즉 목지국진왕이 되고 왜국은 분국, 또는 담로 또는 백제의 지방정부로 떨어지게 된것이죠.
그래서 목지국의 진왕으로 왕후(개로왕비)를 세우고 공립된 왜왕무(곤지)가 남송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소개에 한성백제까지 포함하는 7국도독이라고 주장한것입니다. 곤지가 진왕의 전통에따라 공립되어 한성백제까지를 포함하는 진왕으로 생각하였기때문이지요.
본인이 보기에 개로왕이 전체백제 목지국진왕으로 공립되기가 힘든것은 그가 전체백제에서 그당시 경기도/황해도 일부를 차지했던 전통적인 왕비국인 한성백제의 왕권만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실력으로 반도의 남반부 모든지역을 정복하여 더 크게 백제에서 최강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거나 동남부의 강력한 신라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였다면 상황은 달라질수 있겠지만 원래 왕비국인 한성백제의 왕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진왕으로 공립되기는 힘들었다고 봅니다. 목지국진왕을 배출하고 있었던곳(그당시 왜국 오사카부근)에서 최강자로써 두각을 나타내고 왕권을 차지하였다면 공립받을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왕비국인 한성백제왕권으로는 안됩니다.
식민사학자들은 여적죄로 다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