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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 역사 TV
Южная Корея
Добавлен 5 мар 2020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삼한사의 재조명 (1,2,3)
98. 양서 백제조의 백제왕 須
양서 백제조에 4세기 후반 백제왕 수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왕에게는 3가지 이름이 있는데 명과 휘와 왕호입니다. 이 중에 수는 명입니다. 이 백제왕 수는 근구수왕의 시기와 겹치는데 근구수왕의 명은 모르지만 휘가 수입니다. 명을 피하기 위해 휘를 쓰므로 명과 휘가 같은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백제왕 수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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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백제왕 여구 책봉기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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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진의 진서에 나오는 함안2년(372년)의 백제사 최초의 책봉 기록에 대한 논의입니다. 2) 삼국사기의 백제사 최초의 책봉 기록은 416년 전지왕으로 약 반세기 후입니다. 3) 260년 고이왕의 좌평제를 기반으로 하는 체제정비가 3세기 중반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중국사서 어디에 나오는지는 나중에 미추이사금의 즉위를 할 때 설명합니다. 4) 96번과 97번의 2회로 나누어 녹화하였습니다. 34. 근초고왕의 성씨 ruclips.net/video/Yo_cd0VGjpM/видео.html
93 동성왕의 출생연도 추정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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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동성왕의 출생연도 추적의 두번째 동영상입니다. 앞의 동영상에 이어집니다. 음향은 좋아졌으나 동영상 품질이 낮아 다음 녹화부터는 카메라를 바꿔볼 생각입니다. 삼한사의 재조명 3, 236쪽, 8.10. 백제본기 각 왕들의 생몰연도 추정. *해씨왕통* 근초고왕: 300~375 근구수왕: 325~384 침류왕: 345~385 진사왕: 348~392 아신왕: 365~405 전지왕: 385~420 구이신왕: 410~427 *부여씨왕통* 비유왕: 390~455 개로왕: 413~475 문주왕: 435~477 삼근왕: 464~478 ......
92 동성왕의 출생연도 추정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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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동성왕과 무령왕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동성왕의 출생연도를 추적합니다. 녹화분이 너무 길어 92와 93으로 나누었습니다. 유송에 의한 458년 11장군 책봉기록의 서열 3위 정로장군 이름에 대하여 글자가 '여훈'과 '여휘'의 2가지가 있는데 여훈(餘暈)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휘는 이전 4세기 후반에 그런 이름을 가진 자신들의 왕이 있었기 때문에 피해서 작명했을 것입니다.
91 일본서기 인용법 (전라도 천년사의 일본서기 인용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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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천년사의 일본서기 인용방식을 놓고 많은 논란이 발생했는데 이는 전라도 천년사 집필진의 잘못입니다. 일본서기는 한국고대사 연구의 필수적인 시료로서 어떻게 인용하느냐가 관건인데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인용하시면 아무 문제가 안 생깁니다.
90 신묘년조 해석의 유효성 판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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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에 대하여 수 많은 판독과 해석이 있는데 어느 것이 믿을만한지 유효성을 가리는 방법입니다. 3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이 관문을 통과하면 그 해석은 주의 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89. 5세기 이전 일본서기 기년 찾는 법(3) 백제사 유일의 여왕, 팔수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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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신왕의 어머니인 팔수왕비 기록을 통해 일본서기 기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롤 보면 목(협,리)만치는 404년 5월 출생으로, 420년에 구이신왕이 즉위할 때는 16세, 475년 겨울에 백제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문주왕의 웅진천도를 도울 때는 71세였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번역본에 따라 大倭 목만치라고 했는데 다른 일본서기에는 大倭라는 구절이 없다고 합니다. 즉 이 大倭라는 구절은 8세기에는 없었다가 훗날 누군가에 의하여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88. 5세기 이전 일본서기 기년 찾는 법(2) 신공49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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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천년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일본서기 기록인 신공황후 49년도를 삼국사기에서 찾는 법입니다. 전라도 천년사 나오기전에 여러번 다루었지만 중요하다고 보여 다시 다룹니다. 일본서기를 읽으려면 5세기 이전 기록의 사건 연도를 정확히 아는 것이 선결조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삼국사기 읽는 법도 알게 됩니다.
87. 4말5초 백제본기의 왜국기록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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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고대사의 핵심은 백제-왜 관계입니다. 그러면 백제본기에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출현하는 왜국 기록 5개를 이해하는 것이 5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 관계 연구의 시작입니다.
86 월지국과 목지국(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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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중반에 한반도 남부의 최대 세력자였던 진왕이 거쳐하며 통치했다는 소국이 삼국지는 마한의 월지국이고 후한서는 목지국입니다. 85. 월지국과 목지국(1) 1. 월지국 또는 목지국이 중요한 이유 2. 삼국지의 월지국과 후한서의 목지국 86. 월지국과 목지국(2) 3. 삼국지 동이전의 81개 삼한소국명 4. 삼국지 동이전의 정확성 검증 5.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건국서문 6. 삼국지에서 비류의 미추홀 찾기 7. 목지국사 집필계획
81. 11 기리영 분쟁(246년) (2)신분고국과 伯濟國의 비교, 백제의 담로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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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11 기리영 분쟁(246년) (2)신분고국과 伯濟國의 비교, 백제의 담로제 5
이 작자 빨갱이네
이 작자 가짜보수, 매국노네.... 미친 ㅅ ㄲ~ 일제시대에대해 비판적이고 그후 일제부역자들을 처벌하지 못(안)해서 윤석열같은 동네양아치수준의 이성을 가진자가 자가쿠데타를 일으킨것을 비판하면 빨갱이냐 ㅁ ㅊ ㄴ아... 이사람아 ~ 김상님의 애국애족적이고 정의와 진실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정확한 역사를 추구하는 학자분을 그런식의 ㅆㄱㅈ없는 말도 안되는 엉터리로 매도하지 말거라. 네 정체가 의심된다. 그렇게 윤석열 조폭골목대장을 옹호하는 숭일매국노거든 이 동영상을 보지 말거라.. 네 정신상태가 20세기 초반에 머문 자같다.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보거라.
100%동의하고 공감합니다. 근원적으로 과거역사의 찌꺼기들을 청소하지 않아서 현재, 윤써결병란이 나타났다는 말씀 정확합니다. 그런 찌거기문화가 여러 범죄에서 피해자보다 가해자(피의자)의 인권이 존중되는 우수꽝스러운 문화도 낳았읍니다. 그래서 어떤 범죄라도 그 범죄에대한 벌이 가볍고 당하는 피해자만 억울합니다. 매스컴에 가해자 얼굴은 가려주며 피해자 얼굴은 가려주지도 않지요. 정치선진국은 그 반대입니다. 그렇게 가해자의 인권이 보호되니 자가쿠데타도 하고 실패하더라도 또 할려고 하고 온갖 악이 판치는것이지요. 사악한 살인을 저질러도 사형당하기는 커녕 장기때려봤자 20년입니다. 사회의 찌꺼기들은 일종의 가해자로써 청소(적당한 벌주기)를 하지않고 내버려두면 가해자세상으로 어떤 죄(예: 자가쿠데타)든지 죄를 거리낌없이 저지르게 되며 그 권리가 보장및 보호되는 가해자천국 피해자 지옥의 현 "대한민국"사회와같은 사회가 된다.
2.준왕이 단군왕검의 제사를 이었다는 문헌적근거가 무엇인가요
준왕이 위만세력에 밀려 한의 땅으로 천도했다는 한서와 삼국지 기록입니다. 천도하면서 건국자의 제사를 가져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조선에서 밀려나 한의 땅으로 갔으니 이때부터는 조선왕이 아니라 한왕인데, 한이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이 된 후에도 준왕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에 시조 제사를 모시는 것은 대부분의 나라에 공통됩니다. 고구려는 너무나 당연하니 생략하고, 신라도 한강유역에서 경주로 내려갈 때 시조인 혁거세의 제사를 가져가고, 백제도 천도하며 동명왕의 제사를 가져갑니다. 백제의 건국이 아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지요. 이주민인 위만이 고조선 건국자인 단군왕검의 제사를 모실 가능성 보다는, 위만에게 밀려난 준왕이 제사를 가져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본기가 평양으로 천도하며 이곳이 본래 선인왕검의 땅이었다고 한 것은 그곳이 준왕이 천도했던 곳으로 당시 낙랑국의 수도, 즉 대동강 평양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앞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 시리즈를 하며 고구려의 평양 천도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하였지만 고조선과 낙랑조선사(낙랑군+낙랑국)를 별도로 녹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드립니다 1.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문헌적근거는 무엇인가요
1-1 고고학적근거는 무엇인가요
이 녹화에서는 여구왕 책봉기록을 논하는데 이보다는 245년에 있었던 위나라와의 전쟁 이후 247의 동천왕 평양 천도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1. 전쟁 후에 압록강에서 더 안전한 후방으로 천도하지 전방으로 천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수도가 될 수 있는 대도시는 2세기 이후 고구려영토였던 대동강의 평양 뿐입니다. 2. 245년 이후 위나라가 동북아 자유무역항 역할을 했던 대동강 평양을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자 바로 주변에 영향이 옵니다. 전쟁 다음 해인 246년에 현 황해도의 기리영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위나라가 대동강의 낙랑국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안을 목지국으로부터 찾다 발생한 사건입니다. 전쟁 후 고구려가 위나라를 못 오게 하고 신 수도의 성을 쌓고 있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3. 위나라가 기리영 전투에서는 어찌어찌하여 목지국(백제)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세력이 점차 약해지다 258년에 고이왕의 도움으로 나갈에 의하여 대방군이 통치하던 그 자리에 대방국이 건국됩니다. 이로서 황해도에서도 위나라의 세력이 완전히 물러납니다. 4. 286년에 책계왕이 즉위하자 고구려의 압력을 받던 대방국이 구원을 청합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 수도가 바로 부근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대동강 평양에 도읍을 하면 수도의 안전을 위해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5. 300년에 고구려 통치하에 명목만 남은 평안남도의 낙랑국 왕실과 황해도의 대방국 왕실이 신라에 귀복하고 사라진 것은 당연한 절차입니다. 5. 대략 BC 90년 경에 건국된 낙랑국 왕실이 약 4백 년 만에 신라에 귀복하고 사라지는 4세기 초는 고구려가 황해도 북쪽에 장수산성을 쌓고 남평양을 건설할 때인데 하는데 이는 3세기 중반에 대동강 평양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간만에 재개하셨네요 훌륭한 강의 감사드립니다
놀랍습니다. 저는 여지껏 諱는 군주의 名이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名과 諱가 별개였다는 개념은 처음 듣습니다. 양자가 판이한 무령왕(여융-사마)같은 경우는 마치 오늘날 '영어 이름'같은, 국제용 이름 정도로 이해했었는데 이렇게도 볼 수 있는거였네요. 한가지가 궁금합니다. 중국 사서에서 타국의 왕들에 대해서는 모두 名을 썼고, 그에 따라 백제왕들은 모두 名을 썼다고 하셨는데, 왜5왕에 대해서는 왜 諱를 쓴 것인가요?
왜5왕의 이름이 명이 아니라 휘라고 보는 이유를 몇 개만 들어보겠습니다. 1) 만일 명이라면 성을 물어서 함께 쓰는 것이 보통인데 성을 쓰지 않았습니다. 2) 사후에 반정천황의 왕호를 받은 왜왕 진의 경우, 왕이 되기 전 이름은 아지사주 혹은 아지왕입니다. '아'는 높임 접두어이므로 결국 휘는 '지,' 즉 '진'입니다. 그런데 아신왕의 '아신'이 휘이므로, 아지왕의 '지' 즉 '진'도 휘라고 보았습니다. 3) 왜 왕세자 흥이 우현왕 여기로서, 성이 '여,' 명이 '기'입니다. 하지만 여기라 하지 않고 '흥'이라고 하였으므로 휘라고 보았습니다. 4) 왜왕 무가 좌현왕 여곤으로서, 성이 '여,' 명이 '곤'입니다. 하지만 여곤이라 하지 않고 '무'라고 하였으므로 휘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왜5왕에 대해서는 성도 묻지 않고, 명이 아니라, 휘를 기록했는지가 의문인데, 왕이 된 다음에 새로 쓰기 시작한 이름이 아니었는가 추측됩니다. 왜국 사신이 남조국가에 갈 때 만일 왕의 이름을 묻거든 뭐라 답하라는 지침은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불확실하여 앞으로 더 연구해볼 주제입니다.
화이팅입니다. 교수님
교수님~ 귀중한 강의 감사드려요. 질문1) 개로왕과 여곤(웅략)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나요? 질문2)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을 어느 천황으로 기록하고 있나요? (이 질문이 성립하나요?) 질문3) 모씨 왕족은 연(황룡국)의 이주왕족으로 보나요?
1) 개로왕 여경의 동생이 여곤인데, 문주왕이 백제 왕력이 들어오며 문주왕의 동생으로 바뀐 것으로 봅니다. 여곤이 문주왕보다 약 20살 많습니다. 2) 개로왕은 목지국 진왕이 아닙니다. 80년 왜국 천도기 중 15대에서 21대까지 7명만 진왕입니다. 목지국 정부의 백제 천도 이후인 22대 청령천황부터는 백제의 왜국 총독 같은 지위입니다. 3) 모씨는 너무 길어서 우선은 제 책을 보십시오. 나중에 경주 황남동 고분군 할 때 자세히 할 것입니다.
@@TV-kz2xm 질문4) 교수님, 그러면 여기도 개로왕, 여곤과 같이 친형제입니까? 질문5) 개로왕 시기, 개로왕이 통치한 백제와 흥, 무 시기의 왜는 어떤 관계입니까? 흥, 무가 진왕이라면 개로왕은 호태왕비문에 기록된 백잔의 후예에 속하는 것입니까?
장착하는 외부 마이크를 사용해야 할 듯. 소리가 작아서요.
외부 마이크를 주문하였습니다. 관심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댓글을 지정해주셨는데 본의 아니게 없어져 버려 죄송스럽습니다. 댓글이 사라져버린 이유는, 어제 저의 역사채널이 유튜브 자체 검열에 강제삭제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아이디와 채널 모두가 삭제당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ㅡㅡ; 그저께 채널을 만든 이유와 목적 등을 "사설" 동영상으로 올렸는데, 유튜브의 AI 검열에 걸려 삭제됐습니다. 백제의 역사기록을 삭제한 신라에 대해 쓴소리 좀 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숙 중이며 모두가 건전하게 시청할 수 있게 다시 만들어 새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우선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서기 247 년 당시 요수가 지금의 어느 물길입니까?
좀 헷갈리네요. 목지국이 웅진에서 광개토왕에게 패배하여 열도로 천도 했는데, 북상하여 위례백제를 흡수하고 또 문주왕때 웅진(고구려 령)으로 천도하고 이거 가능한 일 일런지 의문 입니다.
396~397년 응신이 천도한 후에, 인덕이 399~400년에 신라/임나(가야) 땅에 가득찬 피난민을 이끌고 건너갑니다. 그리고 천도하지 않고 남은 목지국 세력(여신=상좌평, 여비=비유왕 등)이 404년과 407년에 고구려와 전투 후 위례백제를 접수하니 이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부여씨 출현입니다. 하지만 475년에 다시 장수왕에게 패하여 웅진으로 내려오고, 개로왕 사후 목지국 부여씨 왕통이 단절되자 477년에 곤지가 왜국 관료들을 거느리고 오사카에서 웅진으로 천도합니다. 그래서 477년 이후에 일본서기 웅략조에서 이전의 고관들이 대부분 사라지는 것입니다. "문주왕때 웅진(고구려 령)으로 천도하고" => 웅진은 이전 목지국의 수도로 목지국 령입니다. 웅진으로 천도했지만 내란이 벌어져 패하고 곤지 시신만 왜국으로 실려가고 나머지 세력은 부여씨의 근거지였던 영산강유역으로 후퇴합니다(부여씨와 목씨와 사씨가 영산강유역 옹관묘 집단입니다.). 그래서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의 지위와 이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17번 ~ 21번 동영상 함평 신덕 장고분 주인 추적). 이후 동성왕-무령왕-성왕-... 등 의자왕까지 왜국에서 돌아온 목지국 왕통이 죽 이어지는 것이 한일고대사의 핵심입니다.
@@TV-kz2xm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너무 왜곡이 심해 평소 수수께끼같은 삼국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실마리를 찾게된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어 기대가 됩니다. 물론 여러가지 동의할 수 없거나 의문이 해소가 안돼는 설명도 있습니다 만 오늘이 선생님 영상 처음이고 앞으로 많은 영상 보면서 추가로 이해 안돼거나 궁금한 사항 질문드리도록 하겠습니다.
@@JP-tf2ze삼한사의 재조명 읽어보세요 동영상 보시면 그러실수있어요 단편적인면을 강의식으로 동영상을 찍으시는데 우리가 알고있는 통설을 꿰뚫는 새로운 개념을 일러주시는 분이십니다 삼국사기 읽는법이 가장 중요하며 이분의 핵심 내용은 진왕제에 있습니다 모두 너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모든 의문이 싹 풀리실겁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조의 평양.왕검지댁 위치를 대동강 평양? 지금의 북조선 평양시라고 단정한다는 얘긴가? 그것은 명백한 식민사관.동북공정 지리 논리 맹종입니다.
우선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무엇과 비슷하니 틀렸다는 말은 과거 윤내현 교수님 주장이 북한 학자와 비슷하니 틀렸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어느 것과 비슷하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합리적인 설명이냐가 문제입니다. 동영상에서 247년에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이 현재의 평양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수도가 폐허가 되면 더 안전한 후방으로 천도가 상식입니다. 또 대동강의 평양이 아니면 전쟁 다음 해인 246년에 위나라가 국제자유무역항으로서 대동강의 낙랑국을 대신할 장소를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동천왕조의 평양이 다른 곳이라면 어디이며,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를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247년의 평양을 선인왕검의 택지라고 하였으므로 준왕의 천도지가 어디인지도 함께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TV-kz2xm 우선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서기 247 년 당시 요수가 지금의 어느 물길입니까? 답을 듣고 동천왕의 평양성이 어디인지 추정하겠습니다.
영상을 보다 보니 너무 어렵습니다. 계속 책을 잘 봐야 한다는 말씀만 되풀이 하시구 .. 어떻게 하면 사료를 잘 읽을 수 있는지 힌트라도 주시면 안될까요? 선생님 쓰신 책을 보면 좀 알 수 있을까요? 늦깎이라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가물가물 하지만 뭔가 깊은 진실을 전하시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이 하나 생각나 말씀 드립니다. 백제왕 여구가 동진한테서 낙랑태수를 봉작 받았기 때문에 양직공도에 백제 목지국을 낙랑이라 한 것은 아닐까요?
"백제왕 여구가 동진한테서 낙랑태수를 봉작 받았기 때문에 양직공도에 백제 목지국을 낙랑이라 한 것은 아닐까요?" => 진말인 4세기 초에 고구려가 요동의 낙랑을 차지했다는 양직공도의 기록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요동의 낙랑군을 요서로 밀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양직공도에 목지국을 낙랑이라고 한 일이 없습니다. 이후 낙랑군은 전연의 통치 하에 있다가 전연이 멸망하자 목지국(백제)의 통치 하에 들어오게 되고, 이를 국제적으로 확인한 것이 372년에 동진이 진왕 여구에게 낙랑태수직을 준 것입니다. 이곳 동영상의 내용은 대부분 제 책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TV-kz2xm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kimjeonghuun8665 이 교수님은 굉장히 오래전 부터 역사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부터 사람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어떤 통설을 따르며 어떤 새로운 의견을 내놓는지 오랜기간 지켜보시며 그분들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 삼국사기에는 왜 의문점이 많은지에 대해 정확히 일러주시는 분 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짧은 동영상에 담아서 전부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저도 책을 다 읽고나서 동영상을 보니 전체가 이해가 되는것이지 동영상 자체는 사실 흥미를 일으켜주시는 자극제이며 이미 역사에 대해 일반인 이상으로 관심있으신 분들은 무릎을탁 치고 가실겁니다
198년 백제건국때 고구려 발기세력 연노부 3만과 구태부여 3만이 합쳐져서 강력한 병권을 가진 국가가 처음으로 대백제가 탄생하고 이때부터 왜와 마한(대륙 래이마한)이 복속하였다고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비류왕때 부터 서하태수로 풍야부를 임명합니다 서하는 산서성 대동시에모용수황제가 점령한 고조선지역 이기도 하고 후연의 관할이기도 합니다 근초고왕은 택도없는소리 한성십제소속 아닌가요! 서하를 대나라 탁발씨들이 점령하면서 동성왕때 세차려 이곳 서하에서 전쟁이 벌어 짐니다 비유왕은 물론이고 구태백제때 부터 대륙에 소국이 래이마한의 관할하에 있었읍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근에 문화인류학 콘텐츠를 주제로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의 채널에서 다양한 주제를 쉽게 풀어내고 시청자와 소통하는 방식에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채널은 아직 구독자가 잘 늘지 않고 있어서,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채널을 한 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유익한 콘텐츠 감사합니다 :)
☘ 습수/열수/산수 중에 산수가 조선수로 조선의 명칭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조선수는 무경총요에 나오는 조선하로 무경총요에 그 위치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조선하는 현재의 조하입니다. 따라서 열수는 현재의 백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습수가 현재 없습니다. 왜냐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흠정고금도서집성/방여휘편/산천전]에 보면은 "진나라 영가 3년(309)에 말라버린 소요수가 또 양평현을 지나 대량수로 들어갔다. 사마선 왕이 요동을 평정하고 공손연을 이 강가에서 참수하였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요수가 <기주협우갈석도>에 대요수인 현재의 백하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기주협우갈석도에는 현재의 조하가 나오지 않는데, 기주협우갈석도를 그릴 당시에는 작은 지류라고 생각되어 생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와 관련된 상세한 분석을 제 블로그에 글로 써놓았으니 김상선생님이 와서 한번 참고삼아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유튜브 아이콘 따라가시면 블로그를 찾으실 수 있습니다. 링크거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고조선에 대한 정의가 안되어있네요
좋은 질문입니다. 고조선이 BC 2세기 초에 요서의 위만조선과 대동강의 준왕조선으로 분리되는데 앞으로 할 예정입니다. 위만조선은 낙랑국으로, 준왕조선은 마한으로 이어지다, 낙랑국은 고구려에, 마한은 백제(목지국)에 흡수됩니다. 단군의 사당은 고조선-> 준왕조선->마한으로 이어집니다.
그쪽에 바다가 있는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바다였던 지역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융기또는 퇴적했다는 증거를 수집할수 있으면 100% 확실한 것으로 될듯합니다. 울산반구대암각화가 그려진 바위가까운곳도 2천년이전의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지금은 다 육지로 변한곳이 아닌가... 바다였던곳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육지로 크게 변했읍니다.
서라벌국(신라)이 5대 파사이사금 때 경주까지 내려온 후 먼저 온 석씨를 정복하고 더 이상 남하하지 않은 이유가 바다에 막혀서 임이 확실합니다. 파사이사금이란 시호는 서역(아주 먼 곳)에서 온 신라왕이라는 뜻인데, 이런 시호를 받은 또 한 사람이 343년에 북쪽에서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내려온 17대 파사매금(내물이사금)입니다. 둘이 왕궁인 월성을 쌓은 것도 같습니다. 초축(파사이사금)과 재축(파사매금)인데 현재 남아있는 재축 자리에서 최근에 더 오래된 건물자리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초축의 흔적입니다.
경주에 바다가 있었냐는 의문 거의 풀려갑니다 이번에 경주 월성 근처에서 3세기때 만들어진 마을 유적이 나왔는데 굴껍데기와 조개껍데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경주 앞에 분명 바다 또는 바다라 생각되는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김해평야가 과거 바다였고 이름도 김해바다로 불리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나 아직 김해바다 지도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경주 남쪽 지명은 6세기부터 등장하여 5세기 이전에 바다일 수 밖에 없고, 이는 신라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라가 동해안의 포항 부근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은 2세기 중반 아달라이사금 때입니다. 그 이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바다는 모두 김해바다입니다. 4세기까지 바다였다가, 5세기에 경주와 부산 사이 바다가 점차 메워져, 6세기에 모두 육지로 전환되어 신라의 기마군단이 활동하게 되자, 해상군단 위주의 국가였던 가야가 멸망하였습니다. 5세기 초에 광개토왕의 군대가 임나가야(신라본기의 왜)까지 온 적을 보면 당시에도 이미 상당부분 메워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4세기까지는 왜(가야)가 우세하였고, 5세기에 왜(가야)와 신라가 비슷해지다가, 6세기에 신라 우세로 바뀐 것입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도 일치하여, 1~3세기 전반에 두 지역 유물수준이 비슷, 3세기후반~4세기에 가야지역 유물이 우세, 5세기에 둘이 비슷해지다 후반에 역전이 발생하고, 6세기에 신라지역 유물수준이 확연히 우세합니다.
@@TV-kz2xm 삼한사의 재조명 1-2권은 여러번 정독하고있어서 교수님의 말씀 너무나 잘알고있습니다 꼭 3권도 읽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언제가 교수님의 주장들이 역사의 통설이 되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11:00 웅략 22년 7월조 기사가 좀 잘못 됐는데 아마 일본서기 편찬할 때의 오류인가 봅니다. 단파국(丹波國)에 여사군(餘社郡)은 없고 같은 발음인 여사군(与謝郡)은 단파국의 옆에 있는 단고국(丹後國)에 있습니다. 근데 관천(管川)은 한자가 통천(筒川)이고 단고국에 있는 与謝郡의 촌락입니다. 즉 丹後國, 与謝郡, 筒川이 맞는 것이죠. 고대일본의 행정구역인 오기칠도는 xx국, xx군, xx촌의 이름과 숫자까지 알 수 있는데, 오기칠도가 5세기에도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군요. 13:50 웅략조에 469년 하리마국(播磨)의 아야시노 오마로(文石小麻呂), 474년 이세국(伊勢)의 아사케노 이라쓰코(朝日郎)를 군사적으로 토벌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아마 이 때의 군사들을 썼을 겁니다. 여기에도 오기칠도가 쓰였다는 걸 알 수 있구요, 오마로,이라쓰코는 숙녜(스쿠네)와 같이 작위로 보여집니다.
요즘 예전에 방송했던 역사스페셜의 삼국 초기시대에 관한 것을 집중적으로 보고있습니다. 1600년이나 지났음에도 김해 가야인의 수많은 인골이 출토됐습니다. 근데 그 이빨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딱딱한 것을 먹어서 이빨들이 상했다고 진단하더군요. 아.. 이게 우리 사학계의 수준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풍납토성 방송분 등 다른 걸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그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건강한 이빨도 부식되기 마련인데 딱딱한 걸 먹어서 그렇게 이빨이 상했다라고요? 기절초풍하지요. 그 당시 사람들은요, 단지 문화수준만 낮다 뿐이지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뭐 삼한시대에 할 얘기야 정말 끝도 없이 할 수 있지만,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만 말하겠습니다. 20세기 사학은 한반도에 말갈인이 남하한 걸 밝혔다면, 21세기 사학은 한반도 남부는 야요이인이 선주민인 것을 밝히고 그걸 인정해야 할 시기라는 겁니다. 이걸 21세기에도 못하면 백년은 또 지나고 다음 세대들이 해야 합니다. 풍납토성 방송분을 보면서, 아 오랜 시간에 걸쳐 야요이인들이 만든 것이라는 걸 딱 느꼈습니다. 그리고 거긴 바로 한왕, 진왕이 살고 통치하던 목지국이란 것도요. 저는 선생님께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이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은 날조되었다고요. 온조니 비류니 북에서 남하하여 내려온 건 통일신라 혹은 고려 초기에 날조해 만든 것이고, 진실은 야요이인의 목지국사 그 자체라는 것을요. 그들이 북에서 내려왔다면 북방유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딴건 없고 죄다 초기백제식이라는 유물뿐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걸 기본으로 삼고 글을 쓸 겁니다. 진실을 밝힐 그 날까지.. 김연자가 부른 이 노래가 모든 걸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꼭 김연자가 불러야 합니다. ruclips.net/video/MxfQ3zigAvA/видео.html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리까지 해주시고 더 이해하기 쉽네요 교수님 책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제에 이어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위씨조선이 멸망한 때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라고 합니다. 이 때 위씨집단을 포함한 많은 조선유민들이 남하해 기씨집단(한왕)의 韓으로 흡수 내지 무력으로 찬탈해 辰왕을 칭했다고 한 것이 어제의 설명이었습니다. 준왕부터 시작해 위씨집단의 진왕 찬탈까지 약 100여년의 간격인데, 한왕 시기 100여년이 초기 삼한시대, 진왕 시기 100여년이 후기 삼한시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근데 우거왕 시대(BC 140~130 전후)에 辰의 역계경이 무리를 이끌고 남하해 경상도에 辰을 형성, 그곳의 토착민(선주민)인 반도왜인(야요이인)과 함께 흩어져 삽니다. 이 때 목지국의 韓왕(기씨집단)이 "동쪽에 땅을 떼어주었다"고 삼국지 한전에 나옵니다. 즉 한왕으로선 북방 고조선에 대한 방어를 위해 이들의 의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다 BC~AD로 넘어가는 시기에 수로왕(AD 42~199?)이 나옵니다. 수로왕의 전설을 보면, 뇌질청예(수로왕)는 얼굴은 어머니를 닮아 희고 길쭉하고, 동생인 뇌질주일은 아버지를 닮아 얼굴이 둥굴고 붉었다 합니다. 즉 전자는 야요이인의 전형이고 후자는 조몬인의 전형인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들이 야요이인과 조몬인의 결합으로 자생적으로 왕이 나온 부족이고, 다른 나머지 경남의 부족국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경북에서 辰의 무리들이 내려와 이들을 흡수 내지 무력으로 찬탈한 것이 3세기 삼국지 한전에 보이는 변진으로 보입니다. 이 때 특히 구야국은 구야韓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감시자 역할을 하는 구야진지렴을 두었습니다. PS) 원이름은 狗邪國인데 훗날 狗를 피해 가야로 바꿨다고 본다. 알 탄생설화와 키 9척 등은 모두 미화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런 것들은 버려야 한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산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반도왜인(야요이인)들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 중에 어젯밤에 삼한사의 재조명1 칠지도의 설명에 이어 읽었더니 마침 월주신라 장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보게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춘추시대 吳나 越의 백성들이 바다 건너 온게 아닌가 싶었지요. 역시 제 생각이 맞았더군요. 그럼 다시 숲을 보자면, BC 194 준왕이 내려와 한왕이라 칭할 때 중국사서에는 "한땅에 내려가 그 땅을 접수하고 한왕이라 칭했다"고 하는걸 봐서 이미 한반도 남부에는 韓이라는 정치집단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한은 반도왜인이 그 정치집단이라는 건 지난번에 설명드린 바이고, 그 영역은 우리가 알고있는 마한입니다. BC 194 한나라 여후 때 연왕 노관 흉노로 망명, 위만집단 기씨조선 찬탈, 준왕집단 남하(예족 1차 남하) BC 193(?) 준왕집단 목지국 접수, 韓왕 칭왕 (3대 후) BC 108 한무제 때 위씨조선 1차 공격했으나 실패(육5만+수7천 軍), 2차 공격 성공(내분), 위씨조선 멸망(86년 만에), 위씨집단 남하(예족 2차 남하) BC 107~106(?) 위씨집단의 공격으로 준왕집단 멸망, 위씨집단의 목지국 계승=辰왕 자처 그럼 辰은 뭔가? 삼국지 한전에 위씨조선 우거왕(위만의 손자) 때 재상 역계경이 동쪽 辰으로 망명했다고 하는걸 봐서, 원래 진은 고조선의 동쪽 즉 옥저(함경도)에 위치했다고 봐야 합니다. 근데 모세처럼 역계경이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주, 후에 변진한이라 불리는 경상도에 온 것으로 추정되고, 이때 이곳에는 선주민인 반도왜인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섞여 살다가 더이상 내려가지 않은 곳이 왜와 접경한다는 독로국입니다. 즉 한반도 남부엔 韓이 훨씬 먼저 있었고 그 후에 辰이 내려온 것입니다. 기씨집단(한왕)이 약 100여년 동안 韓을 다스렸고, 그 후 위씨집단(진왕)이 약 100여년 삼한을 다스리는 와중에 (한성)백제와 신라가 들어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왕과 진왕은 역사적으로 분리해서 말해야 합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교수님의 역사강의는 너무 흥미진진해요. 감사합니다.
저도 꼭 구매해서 볼게요! 늘 감사합니다
곤지가 일본에 도왜했을때 '기이.....'는 부사로 '이윽고'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곤지 도왜후 얼마되지 않아 5아들을 두었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웅략이 동성왕을 백제왕으로 보낼 때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동성왕이 443년생이면 나이 30살이 넘은 때입니다.
"머리를..." 은 웅략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없고 일본서기 집필진이 만든 구절입니다. 곤지가 백제에서 왜국으로 간 것이 아니고, 본래 왜국(목지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461년에 제1인자이던 우현왕 여기가 유송에 사신을 보내 왜왕 책봉을 받아 공립을 대신하려 하자 제2인자이던 곤지가 놀라 백제로 간 것입니다. 5명의 아들 이야기는 무령왕이 탄생할 때 곤지의 상태를 언급한 것인데 415년 생으로 46세이던 곤지가 왕비를 데리러 백제로 가기 전에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해석해야 합리적입니다. 46살 이전에 5명의 아들을 둘 가능성과 46살 이후에 5명의 아들을 둘 가능성을 중에 어느 쪽이 높겠습니까? 동성왕이 백제로 천도하고 즉위하여 두 백제를 통합할 때 36살이었습니다.
@@TV-kz2xm 곤지 415년 출생으로 보는것은 웅략 = 곤지 로 보시는 것에 근거한 것인데, 글쎄요.. 비유왕 구이신 개로왕 내지 곤지가 모두 형제뻘이 되어 버리는 것이 되는 ...
@@jorbajung6109 ruclips.net/video/yUgbfYoJ7-Q/видео.html
"곤지 415년 출생으로 보는것은 웅략 = 곤지 로 보시는 것에 근거한 것인데, 글쎄요.." => 10.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탄생 배경 ruclips.net/video/yUgbfYoJ7-Q/видео.html
"비유왕 구이신 개로왕 내지 곤지가 모두 형제뻘이 되어 버리는 것이 되는 ..." => 89. 5세기 이전 일본서기 기년 찾는 법(3) 백제사 유일의 여왕, 팔수왕비 ruclips.net/video/Xl_TwDtDlUM/видео.html
영상 잘 봤습니다. 도서 2종 구매하겠습니다. 영상 중에 교수님께서 블로그를 통해 자료가 게재되었다고 하셨는데, 혹시 블로그 주소를 알 수 있을런지요?
blog.naver.com/roh_mp3
제가 작년 처음으로 선생님의 유튜브를 본게 이거였네요. 오늘 다시 보니 정말 명강의 싶니다! 전방후원분에 대해 알고싶어서 찾아 왔었습니다.
1:10 삼한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에 한반도 남부의 언어 중 신라어는 향가가 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한 것들입니다. 風只 吹留如久爲都 郞前希 吹莫遣 바람이 불려구 해도 낭군 앞에 불지않고 浪只 打ㅁ如久爲都 郞前ㅁ 打莫遣 물결이 칠려구 해도 낭군 앞에 치지않고 早早 敀良來良 更逢叱那 抱遣見遣 빨랑빨랑 돌아와라 다시 만나 안겨보고 此好 너무좋아 郞耶 執音乎手乙 忍麽 等尸理良奴 낭군아 잡힌 손을 차마 물리라노(물리라고 하니)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비밀히 집 놔두고 薯童房乙 서동에게 夜矣夘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겨가요 紫布岩乎邊希 자줏빛 베람 끝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잡힌 손, 어미소 풀어놓고 吾肸不喩慚肸伊賜等 나를 안 부끄러이 여기시면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꽃을 꺾어드림요 東京明期月良 서라벌 밝은 달아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러서 누워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 어찌 넷이라나 二兮隐吾下於叱古 둘은 내것이고 二兮隐誰支下焉古 둘은 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隐 본래 내것이요마는 奪叱良乙何如為理古 빼앗긴걸 어이 할꼬 고구려는 당연히 말갈어(고한국어)를 썼고, 백제(辰, 韓)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즉 원래는 왕족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반도일본어(고일본어)를 썼는데 백제의 왕통이 말갈인으로 바뀌면서 그땐 왕족은 말갈어, 백성은 여전히 반도일본어를 썼을 거라고 봅니다. 이들이 대거 열도로 이주함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 나오는 왜선 100척이 그 전후부터 열도로 이주하는 단계라는걸 보여준다고 봅니다. 이 말갈계 백제의 왕족들이 열도로 건너가 왜왕이 되면, 왕족은 고한국어, 열도의 백성들은 고일본어를 썼다는건 당연하구요, 이게 일본 전국시대(조선 중기)까지도 계속 됩니다. 그 증거로, 지방의 다이묘들은 천황을 직접 못 만나고 중간에 천황의 신하(고위 귀족)만 만나 소통했습니다. 마치 왜 여왕 비미호를 못 만나고 그 남동생을 통해 소통한 것과 같습니다.
일본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으로 공주에 있던 진왕응신(부여계)이 오사카부근으로 피난 천도하면서 제대로 역사가 시작되고 부여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다시 반도로 돌아왔어도 계속 부여계왕이 반도백제의 지방정부노릇을 하다가 반도백제가 망했어도 열도는 지금까지 부여계혈통을 이은 왕이라고 보면 됩니다. 신라초기기록에 나오는 "왜선 100척"기록은 신라남쪽(부산지역)에 있었던 임나가야를 "왜"로 부르는 말일뿐 열도의 구주지역에서 건너온 열도왜인들이 아닙니다. 이 임나가야가 적극적으로 열도의 구주로 진출하여 구주에 여러 분국들을 거느리고 "신공왕후", 비미호 라는 사람도 부산기장여자입니다. 그래서 "기장족희"라고 합니다. 김상님의 저서 1,2,3을 보시고 제대로 이해하여야 진실된 역사를 압니다. 말갈계는 일본에 진출한적이 없읍니다. 말갈계는 고이왕때 한성백제를 장악하고 근초고왕떄 최성기를 이루고 구이신왕을 끝으로 끝나며 비유왕서부터는 부여계입니다. 말갈계백제는 한강유역인 경기도 황해도지역에서만 활약했을뿐 충청이남으로 내려간적이 없읍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삼한사의 재조명1 중간까지 읽었습니다. 칠지도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구글 검색해보니 칠지도의 명문을 한일 역사학계 전부 오역을 하더군요. 약 1600년 전인가요? 아마도 칠지도를 만든 이들이 기절초풍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본 칠지도에 대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1. 일본서기 신공황후조에 칠지도, 칠자경과 여러가지 보물들의 존재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원래 천황가에서 말하는 삼종신기(칼, 거울, 옥)가 되는 물건들입니다. 원평합전 때 삼종신기 중 칼만 유실됐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 칠지도이고, 나머지 칠자경과 곡옥만 천황가에서 쓰고있는 것이지요. 2. 그럼 칠지도의 명문 중 중요한 뒷면을 해석하겠습니다.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게 아니라,,,ㅡㅡ;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マ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之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은 대대로 기생성음하니 왜왕이다. 뜻을 받들어 후세에 그것을 전하라. 기생성음은 한마디로 "지극히 존귀한"의 뜻이고, 그것이란 "백제왕이 곧 왜왕이니 이 칼이 그 증표"라는 뜻입니다. 아마 七子鏡의 명문도 이런 뜻일 것입니다. 3. 백제는 辰(韓)이고 그 왕족과 백성은 반도왜인(야요이인)인데 열도로 이주하여 왜왕이 되는 과정의 역사가 결사팔대로 추측됩니다. 4. 어떤 불순한 무리들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일본서기를 만든 걸로 추측됩니다. 5.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사실기록의 첨가, 삭제 등 상당히 의심이 갑니다.
천황을 섬기다니.....이해가 안되네요....
김상님의 저서를 읽지 않으셨군요. 천황을 섬기는게 전혀 아닙니다. 님은 잘못알아 추측하고 조작된 역사를 믿는듯합니다. 본인이 볼떄는 김상님의 역사추적과 서술이 가장 합리적이고 진실된 역사에 접근했다고 봅니다. 김상님의 삼국초중기역사서술은 현 토잔왜들인 소위 강단사학자들이 추앙하는 조작된 임나일본부설을 기본으로 하는 식민친일사대적인 역사서술이 아닙니다.
선입견은 물론이고 무슨 내용을 말씀하시는지 저희 맥락을 이해못하신거같네요 ㅋㅋㅋ
소중한 강의 감사합니다
4. 그럼 삼한 70여개 국의 존재를 삼국사기는 왜 삭제시켰는가? 답은 뻔하죠. 민족통일기에 말갈이 주류인데 거기에 왜인이 껴선 안되기 때문에 삭제시킨 겁니다. 삼한시대의 진왕의 존재는 무엇인가? 진왕은 중국의 황제와 같은 존재로 역시 고대중국의 봉건제와 비슷한 국가시스템을 썼습니다. 진왕에게 있어 백제와 신라는 무엇인가? 북방에서 말갈인들이 내려와 의탁하고 땅을 받은 것이 백제와 신라입니다. 대신 해마다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풍경은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백제는 원래 일개 狗多羅국이었지만 힘을 길러 진(한)을 멸망시키고 백제를 이어받았으나 왜인들은 여전히 이 백제를 쿠다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삼서의 존재가 있는데 이 책들은 어디에 있는가? 정창원에 잘 모셔져 있습니다.
3. 중국 사서에 보이는 한예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을 中華라고 하듯이 韓을 中과 같이 지역적인 개념으로 썼고 예는 華夏와 같이 종족의 개념으로 쓴 것입니다. 두번째는, 韓은 가라 즉 반도 왜인(야요이인)의 대명사로 썼고, 예는 예족으로 종족의 개념으로 쓴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건 한과 예는 같은 개념도 아닐 뿐더러 韓은 한반도 남부에 사는 왜인이고 예는 한반도 북부에 사는 예족인 것입니다. 이 예족이 곧 말갈인이고 더 북방의 맥족과 합쳐져 고구려는 예맥인의 나라입니다. 즉 중국 사서의 사관이 이 한예를 쓴 이유가 곧 한반도 전체 다시 말해 남부인과 북부인을 포괄해서 쓴 단어였던 것입니다. 근데 한반도 남부의 辰 혹은 韓이 있는데 고조선의 준왕 집단이 내려와 한왕을 칭했다고 합니다. 그 거처는 목지국으로 지금의 충북 청주 혹은 한강 근방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한씨의 본이 청주이기 때문에 그리 추측한 것이고, 이게 아니라면 한강 근방에 목지국이 있는데 이곳으로 배타고 준왕 집단이 쳐들어온 걸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비류온조 집단이 임진강 근처 우휴모탁국에 있다가 남쪽으로 사냥간다는 이유로 그리 머지않은 목지국의 마한을 멸했다고 하는 삼국사기 온조기가 이해가 가지만, 충북 혹은 전북에 위치한 목지국이라 함은 너무 멀어 말이 안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보면 충북 청주는 아니고 한강 근방에 목지국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훗날 삼국이 그렇게 한강을 차지할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2. 근데 한반도 남부와 규슈는 빙하기까지는 연결돼 있었고, 당시는 고아시아인이라는 인종이 원주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도 알 수 있는게, 1만년 전의 열도에는 조몬인이 있었고 이 조몬인은 한반도 남부 해안가에도 살고 있었다고 고고학 유물로 증명되었습니다. 즉 한반도와 열도의 고아시아인은 바로 조몬인이고 이들이 열도는 물론 한반도의 원주민들인 것입니다. 근데 어디인가에서 야요이인들이 나타나 이들과 동화된 것이 삼한인들로 보여집니다. 다시 말해 조몬인이 한반도 남부의 원주민이고 야요이인이 선주민으로 삼한시대까지 번영하다 북에서 말갈인들이 내려와 지금의 한국인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야요이인은 소위 말하는 반도 왜인들이고 이들은 고일본어를 썼을 것이고, 말갈인은 당연히 고한국어를 썼겠지요. 광개토왕 비문에 보이는 사방이 온통 왜인 천지다 하는 것이 바로 이들 선주민을 말함이고, 백제와 신라의 왕족은 말갈어 즉 고한국어를 썼지만 대다수의 백성들은 고일본어를 썼던 야요이인인 것입니다. 이 시각을 가지고 삼한시대와 초기 삼국시대를 봐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1. 삼국지 한전에는 삼한 70여개 국이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삼국과 가야의 기록 조금만 있을 뿐입니다. 근데 고조선의 강역은 요서, 요동, 평안도를 아우르지만 한강 이남은 辰이라는 정체불명의 정치집단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진이 후의 韓과 동일한 집단으로 보이는데, 뜻은 나라 한이요, 일본어 독음은 가라입니다. 근데 BC~AD 당시의 왜는 한자가 아직 널리 퍼지기 전의 시대이고 극소수 귀족집단 만이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의 정치집단을 가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말인 즉슨 교역하며 한이라고 소개하면 당연히 그들 말로 칸이라고 불렀을 텐데 가라라고 하는 독특한 말로 불렀던 것이지요. 이건 분명 당사자 즉 한반도 남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말로 자신들의 정치집단의 이름을 한자 韓을 이용하여 가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즉 韓은 반도 왜인들 즉 한반도 남부의 선주민들이 곧 삼한의 주민이라는 뜻이고 이들은 일본 사학계에서 말하는 야요이인들인 것입니다.
선생님, 삼한사의 재조명 1,2,3권 구해서 지금 1권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역시 제가 생각했던 거랑 맞아서 재미있게 읽고 있지요. 근데 이 역사의 숨은 비밀이 너무 민감한 내용이라 공개적으로 쓰기엔 쉽지 않습니다.
historywriter@hanmail.net 으로 메일 주시지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덕에 진정한 역사에 눈이 틔였습니다 항상 소중한 강의 감사합니다 책도 잘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교수님...감사합니다
중국의교수가 강릉단오에 왔다가 강릉 단양 한양 한강 태백산 등의 지명이 중국에 있는지명과 같고. 치우천왕. 곰숭배. 묘족비석글등. 여러가지 풍습이.중국묘족의 풍속과 비슷하여. 강원도. 경상도 동해안으로 신라땅까지. 중국교수가 주장한 이 내용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혹시 위군군사가. 묘족과는. 관계가 없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 중국식 지명("강릉 단양 한양 한강 태백산")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 모든 관직과 풍습을 중국식으로 고치며 함께 고친 것이라서 우리 고유의 지명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삼국사기가 지금처럼 된 것도 그 원본이 통일신라시기에 손을 보았기 때문으로(원본의 2/3 이상을 삭제함)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지명은 동북3성에만 있고 북경 남쪽으로는 거의 없습니다. 묘족은 고구려 유민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고구려후예라면 고구려에 걸맞는 기록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245년에 내려와 변한지역을 정복하고 새로운 지배층이 된 위군은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이들이 체격이 크고 법률이 엄격하고 도포 폭이 넓다고 하고 있는데 묘족이 아니라 내몽골출신 오환선비계 유목민족 군단입니다.
지금껏 본 역사 강의 중 가장 논리적입니다.
전라도 천년사는 전라도의 열등감이 만들어낸 날조일 뿐입니다 수천년동안 주체적 세력 없이 그저 변방에서 지배당하기만 했던 지역이라 그 열등감이 만들어낸 촌극이 바로 "전라도 천년사"인겁니다
역사연구에서 일반인은 결과만 보면 되자만 연구자는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합니다. 제가 발간한 4권의 책이 모두 과정을 보는 책입니다. 어떤 주장이든 학설로 올라서서 장기간 충분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통설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고고학적으로 뒷받침 되면 통설이 되는 것이 빨라지는 것이고, 고고학과 모순되면 통설까지 못 가고 학설에 머물게 됩니다. 칠지도를 예로 들면, 과거에 五자로 판독되던 것이 十자로 판독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五, 七, 千 같은 숫자는 시간이 지나면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가고 중심만 남으므로 十자로 판독된다는 것은 상식이므로, 이전의 五자가 정확한 판독이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과거의 五자가 이번에 四자나 八 등으로 판독되었다면 四자나 八자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주장이 학설로 올라가려면 기본적으로 6하원칙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1)왜5왕은 일본서기에 안 나오므로, (2)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의 주인들이라고 주장한다고 칩시다. 이 주장이 학설이 되려면 일본서기에 안 나온다는 것을 증명해야 되는데 제 책을 보시면 일본서기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도 정확히 다 나옵니다. 왜 처음에는 임나만 나와 5국이다가, 5세기의 특정시기에 가야가 추가되어 6국이 되는지도 삼국사기를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가정이 틀렸습니다. 두번째로 누가(지위와 이름을 죽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정확한 연도의 흐름으로 달까지 쓰면 더 좋습니다), 어디서(장소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의 설명이 당시 상황에 맞추어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 동영상(17, 18, 19, 20번)을 보시면,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의 지위와 이름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거기에 묻히게 되는 과정이 6하원칙에 의해 기술됩니다. 그래야 주장을 넘어서 학설의 단계로 진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