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전라도 천년사 3 일본서기 신공49년조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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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2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23

  • @TV-kz2xm
    @TV-kz2xm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일본서기 해석의 핵심은 5세기 중반 이전의 사건 연도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주해 일본서기는 5세기 중반 이전 사건 연도 읽는 것을 포기했는데, 그러니 일본서기 기록이 타 문헌 및 고고학 사료와 거의 안 맞고 가장 많은 해석이 "조작이다" 입니다. 제 책 부록을 보면 일본서기 및 가야까지 포함해서 연표가 나와 있습니다. 제 책을 보면 일본서기 기록의 연도는 물론이고 달까지 맞습니다.

  • @문창훈-w5e
    @문창훈-w5e Год назад +2

    우리 한국사의 정통이
    목지국 진왕의 왕통에 있음이 다시한번 공감됨니다
    일본서기를 잘못 해독한
    전라도 천년사와
    동북아 역사재단 관찬사서에 의해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통이 왜곡됨에
    심적으로 굉장히 부당함에
    울분을 느끼고 있읍니다
    김선생의 일본서기 해독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우리나라 국사가 바로
    잡혀지기를 소망합니다

  • @heejookang4290
    @heejookang4290 Год назад

    선생님 혹시 일본서기 신공기상의 월석간지를 맞춰 보셨는지요? 궁금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년간지 월간지 일간지가 다기록있고 다른분들이 비정한 여러 서기년도와 월간지가 잘맞지않았던 것으로 알고있읍니다

    • @TV-kz2xm
      @TV-kz2xm  Год назад +2

      일본서기에서 눈을 흐리는 기년 조작용 자료(예: 백제왕력, 비미호 조공기록, 월석간지)는 모두 버리고 조작 불가능한 사건만 보아야 정확한 연도를 찾습니다. 신공 49년조 찾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제 책 뒤에 삼국+가야+왜국 연표가 있습니다. 5세기 이전 일본서기 전체 연도를 복원해두었습니다. 복원하면 기본적으로 5세기 이전 일본서기 전체 기록이 한중사료와 일치합니다.

    • @heejookang4290
      @heejookang4290 Год назад

      선생님 답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석간지를 조작했다면 일본서기가 목적으로한 그해에 마추어 조작을 했을것인데, 그해,1갑자,2갑자를 내려도 맞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5갑자 내리면 놀라울 정도로 맞는다는 유투브를 본적이 있읍니다. 일본서기필자들이 년간지를 마추어 기사를 배치하면서 월석간지는 미쳐 손을 못대고 원사료를 그대로 인용 한것은 아닐런지요?

    • @TV-kz2xm
      @TV-kz2xm  Год назад

      ​@@heejookang4290 "5갑자 내리면 놀라울 정도로 맞는다는 유투브를 본적이 있읍니다.- heejookang4290"
      제 책을 읽어보시기 않았군요. 갑자를 따지면 제 책 부록에 있는 연표 못 만듭니다. 당연히 한중사서와 전체가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일본서기 연표를 만들 때는 편견을 지우기 위하여 우선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도를 모두 지우고 시작해야 합니다. 어느 방법이건 5세기 이전(6세기 이후는 +-3년 이내로 정확) 일본서기 전체 연표를 만들 수 있고 한중사서와 전체가 일치하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누가 만일 일본서기 기년을 복원했다고 하면 5세기 이전 전체 연표를 달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확인하면 됩니다.

    • @heejookang4290
      @heejookang4290 Год назад

      답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서 꼭읽어보도록 하겠읍니다,일본서기 기사들의 월일간지를 실제 달력에 다시 맞추어 재배열 해보면 흥미롭지않을까 하는 좁은소견에 선생님을 성가시게 한것 같네요, 책을읽고 궁금한점 있으면 문의 드리겠읍니다
      감사합니다

    • @heejookang4290
      @heejookang4290 Год назад +1

      참고로 제가본 유투브에서 신공기 임나 삼한관련 기사의 사건 인물등이 계체기의 그것들과 유사하거나 중복되는 많고 신공기 월일간지가 계체시기에 거의 일치하니 계체기 일부기사를 붙여넣기 한것같다는 내용입니다
      성가시게해서 거듭죄송합니다.

  • @TV-vx6vl
    @TV-vx6vl Год назад

    비류백제에서 목지국으로변화된 부분에 있어 사료로 확인이 가능한지요?

    • @TV-kz2xm
      @TV-kz2xm  Год назад

      삼한사의 재조명 3, 1.1 '후한서와 삼국지로 보는 미추홀의 위치'를 보십시오.

  • @scale7007
    @scale7007 Год назад

    초기 삼국의 비밀을 풀려면 먼저 백제를 알아야 하듯이 삼한의 비밀을 풀려면 마한을 알아야 합니다. 근데 삼한에 대한 사료는 진수의 삼국지를 주로 참고해야 하지만 이게 너무 간략하게 나와있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1. 준왕이 목지국에서 스스로 韓왕이라 칭함.
    2. 목지국을 기점으로 주변으로 세력확대(韓나라), 그외(경상도)는 辰.
    3. 충남, 충북, 전북, 경기, 전남(불확실)에서 경북으로 진출하고 韓에 신속했다 하여 辰韓이라 함.(삼국지)
    3-1. 이때 진한과의 구별을 위해 마한이라 함.
    3-2. 이 무렵 전후로 준왕의 후손은 마한인에게 멸족되고 그 마한인은 마한왕(혹은 辰왕)이 됨.(후한서)
    4. 경남은 진출하지 않음. 그래서 당시 변한이 아닌 변진이라 함.
    5. 후에 경남으로 진출하여 비로소 변한이라 함.
    위만한테 쫓겨난 준왕 집단이 배 타고 천안 지역으로 와보니 이 辰이라는 남방은 신석기를 사용하는 부족연맹체 읍락국들로서 왕이 없고 각 부족장들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신석기를 사용하니 당연히 왕이 없는 사회였던 것이죠.
    추가: 당시 어느 부족국에서 칭왕하면 다른데서 연합하여 서로 전쟁이 났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마치 왜 전에 나오는 왜국대란과 같은 상황인거죠. 그래서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고 쓴 것으로 해석됩니다.(삼국지)
    여기서 배 타고 왔다는 부분에서, 이 배는 돛단배를 일컬는데 작은 크기는 옛날의 고기잡이 배처럼 5명 정도 승선할 수 있었지만 보통 크기의 돛단배는 고려, 조선의 조운선처럼 길이 약 20미터, 너비 7미터의 큰 배로 추정됩니다. 이보다 더 큰 건 군선인데 이 당시에는 적어도 조운선의 크기였을 겁니다. 이 정도의 배는 50명 정도 승선할 수 있는데 준왕 집단이 2000명이라고 하면 2000명÷50명=40척 입니다. 초기 신라 때 왜선 100척이 쳐들어왔다고 하니 준왕 집단은 최소 40척이고 100척까지도 생각해볼 만 합니다. 그렇다면 50명×100척=5000명이 됩니다.
    청동기와 철기로 무장한 약 오천의 병력을 이끌고 준왕은 천안 앞바다에 상륙했을 겁니다. 와서 보니 왠걸, 나라를 잃어 상심한 준왕은 다시 용기를 얻었겠지요. 곧 천안에 있던 신석기 부족을 접수하고 주변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돛단배는 생각보다 속도가 빠른 배로서 연안항해에는 제격이고, 야요이인들이 집단으로 열도로 건너갈 때도 이런 배를 이용했던 겁니다.
    추가: 약 이삼천의 무장병력으로도 충분히 안주할 수 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충남을 시작으로 어디를 먼저랄거 없이 동으로 충북, 북으로 경기, 남으로 전북을 접수하면서 각 읍락들에 이름을 붙이면서 행정구역을 만들었습니다. (뭐가 됐든) 조공을 받기 위해서죠. 이 때 각 읍락국들의 수는 대략 한 지방 당 10개 정도로 충남, 충북, 경기, 전북, 전남에 각 10개국이고 나머지는 황해도로 잡으면 대충 맞습니다. 그래서 마한 54개국이고, 후에 "신미국이 20여국의 맹주"라 함은 전라남북도 20여국과 맞아 떨어지죠. 사실 전남은 불확실하긴 한데, 준왕 집단이 전남만 빼고 세력을 넓혔을 리가 만무하니 전남도 마한에 포함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후에 일본서기에 나오는 침미다례를 여기서 풀어볼까 합니다.
    수정: 글을 다 쓴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히미코와 침미다례의 자료를 찾아보니 연도가 맞지 않더군요. 위에 상술한 건 폐기합니다(다 지웠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침미다례의 도륙사건은 히미코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침미다례의 뜻도 수정하겠지만 침미다례가 신미다리라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1) 신운신국(臣雲新국)이 마한 또는 백제로부터 독립하여 신미국(新彌국)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280년 전후로 이 때는 마한 같음.
    2) 282년 쯤에 신미국은 주변 20여 소국들과 같이 중국에 사신을 보냅니다.(진서)
    3) 369년 백제(근초고왕)에 의해 도륙당합니다.
    결론: 신미다리(新彌多離)는 이 신미국과 여러 x離국을 말함으로 수정합니다. 일본서기 편찬할 때 신미다리가 침미다례라고 오기된 건 발음때문인 거 같습니다.
    이는 진수 역시 많이 실수합니다. 사실 진수가 집에서 술 먹고 좀 취한 상태에서 삼국지를 쓴거 같습니다. 횡설수설은 덤이고 글자의 오기가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신지에게는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불예(濆臣離兒不例), 구야진지렴(拘邪秦支廉)의 칭호를 더한다 했는데, 여기서 분신리아불예, 이건 정말 못 봐줄 정도입니다. 분명 이건 신분고국의 그 신분인데 분신으로 잘못 적었고 리아불례는 듣보잡 오기이고 안야축지x로 축지 다음에 모 글자가 와야 하는데 빠뜨렸지요. 견지보, 축지x, 진지렴의 뜻은 설명이 없는건 덤이구요, 이전에 벌써 목지국을 월지국이라 하질 않나, 고비리국을 점비리국이라 하질 않나, 건마국의 순서를 끝에서 두번째로 하는 등 이건 정말 제갈량이 오래 살아 이걸 봤었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겁니다..
    암튼 마한은 큰 읍락국이 만여 가이고 작은 읍락국이 수천가로 총 10여만 호라고 하면서 그 수장을 신지(臣智)와 읍차(邑借)라고 합니다. 근데 진변한은 수천~수백가의 훨씬 작은 규모인데도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가 신지와 읍차 사이에 더 있습니다. 이것도 진수가 실수한 듯 한데, 규모가 큰 마한을 설명하면서 규모가 작은 진변한에 험측, 번예, 살해를 끼워넣으면 독자가 알아서 읽겠지.. 마한에도 험측, 번예, 살해가 있다고 알아서 이해하겠지 하면서 안 쓴 것입니다..
    그럼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의 뜻은 무엇이냐면, 이건 진수가 설명해줬지만 마한, 진변한의 문맥상 대부분의 독자는 이해를 못 합니다. 왜냐면 진수는 자기 스타일로 글을 썼기 때문이죠. 각 마한 전과 진변한 전에 보면 신지의 뜻과 하는 일이 적혀있습니다. 한자 臣智를 아주 절묘하게 지었는데 이는 나머지 오는 험측, 번예, 살해, 읍차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 이것들은 준왕 집단이 마한에 처음 행정구역을 만들면서 같이 만든 당시 사회의 책임자들의 역할이자 직책명입니다.
    신지는 외교권을 주는 대신 신하로서 충성을 받았습니다. 아마 맹약을 맺고 인질을 잡는 식으로 했겠죠. 그래서 臣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신지들은 최고수장인 만큼 아는게 많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특히 농사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서 智자를 써 신지(臣智)라고 지었습니다.
    험측(險側)은 檢x의 오기로 보여지는데, 왜 전에 "시장을 감독하면서 이를 모두 두려워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즉 돈과 철 매매 등과 관계되는 모든 건 이 검x가 하는 역할이자 직책입니다. 側과 비슷한 한자가 뭐가 있을까요?
    번예(樊濊)는 풍속과 예절을 주관하는 역할이자 직책인데, 이 또한 x禮의 오기로 보입니다. 아마 나이 많은 어르신이 맡았겠지요.
    살해(殺奚)는 죄인과 노예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치안을 주관하는 역할이자 직책입니다.
    읍차(邑借)는 읍에 대한 전반적인 것과 제사와 장례를 주관하는 역할이자 직책으로 작은 읍락국에는 이 읍차가 長입니다. 제정일치 사회였으니까요. 차는 남해 차차웅의 그 차와 통합니다.
    추가: 신지는 대통령, 험측은 검찰총장, 번예는 교육부장관, 살해는 경찰총장, 읍차는 총리라고 보면 대충 맞습니다.
    진수는 이중 험측, 번예, 살해를 마한 전에 생략하면서 당연히 이해하면서 읽겠지 했던 것이지만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혹은 (술 취해) 실수로 누락시켰거나요.. 암튼 위에 설명한 것을 가지고 마, 진변한 전을 읽으면 진수가 쓰는 스타일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꼭 순서대로 쓰면서 설명도 순서대로 했으니까요.
    삼국지 마, 진변한 전의 서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남의 유튜브에 민폐를 끼치는거 같아 죄송합니다.

    • @TV-kz2xm
      @TV-kz2xm  Год назад

      정성스런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다 답변하면 좋겠지만 공간의 제약상 몇 개만 답하고자 합니다. 나머지도 제 책에 다 나오므로 제 책을 보시기 보시기 바랍니다. 백제(목지국)와 말갈(한강변에 있던 삼국사기의 백제)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광개토왕전쟁 중에 해씨의 말갈이 망하고 부여씨의 목지국으로 왕권이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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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준왕이 목지국에서 스스로 韓왕이라 칭함."
      => 준왕에서 시작하는 한이 약 백여년 후 대동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내려온 후 AD 9년에 요서에서 바다를 건너온 부여인들이 세운 목지국에게 망했습니다.
      "위만한테 쫓겨난 준왕 집단이 배 타고 천안 지역으로 와보니 이 辰이라는 남방은 신석기를 사용하는 부족연맹체 읍락국들로서 왕이 없고 각 부족장들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신석기를 사용하니 당연히 왕이 없는 사회였던 것이죠."
      => 이렇게 보면 당시를 기록한 사서와 하나도 안 맞기 때문에 사서를 모두 고쳐야 합니다. 준왕은 요동만에서 배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진국은 요동에서 남하하는데 당시 로마 이상 가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사회였습니다. 여기는 한왕체제가 진왕체제로 바뀌기 직전의 장면이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별도로 녹화를 해서 설명할 생각입니다.
      "신지는 외교권을 주는 대신 신하로서 충성을 받았습니다. .... 그래서 臣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신지들은 최고수장인 만큼 아는게 많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 그래서 智자를 써 신지(臣智)라고 지었습니다.
      => 臣智는 중국어는 신지이나 우리말은 염지, 음지, 또는 엄지로 읽습니다. 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臣智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염이라(또는 염지라)읽는다. 염(음, 엄)은 대장이라는 말입니다. 聖音은 음(臣)들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씁니다. 엄지손가락=대장손가락. 지는 우리말에서 경칭(높임말)입니다. 곤지의 지, 아지왕(일본서기)의 지 등은 다 Sir에 해당하는 높임말입니다. 이왕 쓰는 것이니 좋은 글자인 智를 선택한 것 뿐입니다.
      비류가 세운 미추국(목지국)은 준왕에서 시작하는 마한을 멸망시키고(삼국시대에 마한이 3번 멸망하는데 첫 번째 멸망입니다) 한왕체제 대신에 국가가 여러 소국으로 구성된 진왕체제를 수립하는데 진왕은 세자가 되면 저절로 다음 왕이 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음(臣)들이 공동으로 왕을 세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진왕뿐만 아니라 힘 좀 쓴다는 큰 소국들은 다 그랬는데 이것이 당시 삼한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나오는 봄에 친선 사신을 교환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공립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삼국사기가 목지국의 진왕제 위에 서 있어서 이것만 이해하면 5세기 이전 삼국사기가 다 보입니다.
      "1) 신운신국(臣雲新국)이 마한 또는 백제로부터 독립하여 신미국(新彌국)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280년 전후로 이 때는 마한 같음. 2) 282년 쯤에 신미국은 주변 20여 소국들과 같이 중국에 사신을 보냅니다.(진서) 3) 369년 백제(근초고왕)에 의해 도륙당합니다."
      => 1)신운신국(臣雲新국)은 마한의 북쪽 끝(경기)에, 신미국(新彌국)은 마한의 남쪽 끝(전남)에 있던 백제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2)신미국의 신미는 국가명이 아니라 지역명인데(지역에 國자 붙이므로 사실은 구분이 어려움) 이 지역은 당시 백제의 왕비족, 즉 마한왕이었기 때문에 외교가 가능하였습니다. 3)말갈의 근초고추장은 백제 영토인 경기도 남부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백제 허락 없이 못 내려가지요.

    • @scale7007
      @scale7007 Год назад +1

      선생님, 제가 쓴 댓글에 답글은 안 다셔도 됩니다.^^; 선생님의 견해는 이곳 동영상들을 봐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제 생각은 이렇다" 하는 것 뿐이지요. 즉 기존 학계의 통설과 사료에다 제 생각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선생님의 견해와는 완전 다를 수밖에요. 그냥 재미삼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국명-k1h
      @이국명-k1h Год назад +1

      신석기?
      ㅎㅎㅎ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시대가 BC1500년 이전으로 넘어가는데 너무 하시네.

    • @jookbaeg8508
      @jookbaeg8508 5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국명-k1h 그니까요. 토왜가 소설을 쓰는듯

  • @김기주-g3c
    @김기주-g3c Год назад

    이친구 국사학자 맞어?
    완전히 지 추측으로 우리상고사를 농락하고 있네
    역사는 지방법으로 해석해야한다며 추즉 짐작으로 일관하고 있네

    • @jookbaeg8508
      @jookbaeg8508 5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하나하나 지적해봐 니도 책쓰고 유투브찍어보고 얘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