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백제왕 여구 책봉기록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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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2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9

  • @scale7007
    @scale7007 Месяц назад

    선생님께서 저의 댓글을 지정해주셨는데 본의 아니게 없어져 버려 죄송스럽습니다.
    댓글이 사라져버린 이유는, 어제 저의 역사채널이 유튜브 자체 검열에 강제삭제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아이디와 채널 모두가 삭제당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ㅡㅡ;
    그저께 채널을 만든 이유와 목적 등을 "사설" 동영상으로 올렸는데, 유튜브의 AI 검열에 걸려 삭제됐습니다.
    백제의 역사기록을 삭제한 신라에 대해 쓴소리 좀 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숙 중이며 모두가 건전하게 시청할 수 있게 다시 만들어 새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kimjeonghuun8665
    @kimjeonghuun8665 Месяц назад

    영상을 보다 보니 너무 어렵습니다. 계속 책을 잘 봐야 한다는 말씀만 되풀이 하시구 .. 어떻게 하면 사료를 잘 읽을 수 있는지 힌트라도 주시면 안될까요? 선생님 쓰신 책을 보면 좀 알 수 있을까요? 늦깎이라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가물가물 하지만 뭔가 깊은 진실을 전하시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이 하나 생각나 말씀 드립니다. 백제왕 여구가 동진한테서 낙랑태수를 봉작 받았기 때문에 양직공도에 백제 목지국을 낙랑이라 한 것은 아닐까요?

    • @TV-kz2xm
      @TV-kz2xm  Месяц назад +3

      "백제왕 여구가 동진한테서 낙랑태수를 봉작 받았기 때문에 양직공도에 백제 목지국을 낙랑이라 한 것은 아닐까요?"
      => 진말인 4세기 초에 고구려가 요동의 낙랑을 차지했다는 양직공도의 기록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요동의 낙랑군을 요서로 밀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양직공도에 목지국을 낙랑이라고 한 일이 없습니다.
      이후 낙랑군은 전연의 통치 하에 있다가 전연이 멸망하자 목지국(백제)의 통치 하에 들어오게 되고, 이를 국제적으로 확인한 것이 372년에 동진이 진왕 여구에게 낙랑태수직을 준 것입니다.
      이곳 동영상의 내용은 대부분 제 책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 @kimjeonghuun8665
      @kimjeonghuun8665 Месяц назад

      @@TV-kz2xm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무명-z8l
      @무명-z8l Месяц назад

      @@kimjeonghuun8665 이
      교수님은 굉장히 오래전 부터 역사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부터 사람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어떤 통설을 따르며 어떤 새로운 의견을 내놓는지 오랜기간 지켜보시며 그분들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 삼국사기에는 왜 의문점이 많은지에 대해 정확히 일러주시는 분 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짧은 동영상에 담아서 전부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저도 책을 다 읽고나서 동영상을 보니 전체가 이해가 되는것이지 동영상 자체는 사실 흥미를 일으켜주시는 자극제이며 이미 역사에 대해 일반인 이상으로 관심있으신 분들은 무릎을탁 치고 가실겁니다

  • @JP-tf2ze
    @JP-tf2ze Месяц назад

    좀 헷갈리네요. 목지국이 웅진에서 광개토왕에게 패배하여 열도로 천도 했는데, 북상하여 위례백제를 흡수하고 또 문주왕때 웅진(고구려 령)으로 천도하고 이거 가능한 일 일런지 의문 입니다.

    • @TV-kz2xm
      @TV-kz2xm  Месяц назад +3

      396~397년 응신이 천도한 후에, 인덕이 399~400년에 신라/임나(가야) 땅에 가득찬 피난민을 이끌고 건너갑니다. 그리고 천도하지 않고 남은 목지국 세력(여신=상좌평, 여비=비유왕 등)이 404년과 407년에 고구려와 전투 후 위례백제를 접수하니 이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부여씨 출현입니다.
      하지만 475년에 다시 장수왕에게 패하여 웅진으로 내려오고, 개로왕 사후 목지국 부여씨 왕통이 단절되자 477년에 곤지가 왜국 관료들을 거느리고 오사카에서 웅진으로 천도합니다. 그래서 477년 이후에 일본서기 웅략조에서 이전의 고관들이 대부분 사라지는 것입니다.
      "문주왕때 웅진(고구려 령)으로 천도하고" => 웅진은 이전 목지국의 수도로 목지국 령입니다.
      웅진으로 천도했지만 내란이 벌어져 패하고 곤지 시신만 왜국으로 실려가고 나머지 세력은 부여씨의 근거지였던 영산강유역으로 후퇴합니다(부여씨와 목씨와 사씨가 영산강유역 옹관묘 집단입니다.). 그래서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의 지위와 이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17번 ~ 21번 동영상 함평 신덕 장고분 주인 추적). 이후 동성왕-무령왕-성왕-... 등 의자왕까지 왜국에서 돌아온 목지국 왕통이 죽 이어지는 것이 한일고대사의 핵심입니다.

    • @JP-tf2ze
      @JP-tf2ze Месяц назад

      @@TV-kz2xm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너무 왜곡이 심해 평소 수수께끼같은 삼국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실마리를 찾게된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어 기대가 됩니다. 물론 여러가지 동의할 수 없거나 의문이 해소가 안돼는 설명도 있습니다 만 오늘이 선생님 영상 처음이고 앞으로 많은 영상 보면서 추가로 이해 안돼거나 궁금한 사항 질문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무명-z8l
      @무명-z8l Месяц назад

      @@JP-tf2ze삼한사의 재조명 읽어보세요 동영상 보시면 그러실수있어요 단편적인면을 강의식으로 동영상을 찍으시는데 우리가 알고있는 통설을 꿰뚫는 새로운 개념을 일러주시는 분이십니다 삼국사기 읽는법이 가장 중요하며 이분의 핵심 내용은 진왕제에 있습니다 모두 너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모든 의문이 싹 풀리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