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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ono1 그럼 사료에 적힌 전쟁기록은 모두 허구라는 말인가? 아무런 근거없이 생각없는 발언을 내뱉는 것은 위인에게 무례라고 생각한다. 네가 이순신은 영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를 제시하라. 하는 행이 마치 근거도 없이 자신을 강간했다며 신고하는 페미니스틀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여진다.
@@jhl7680 넬슨은 서양문화가 발달하다보니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이순신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다는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넬슨은 모든 병력이나 장비가 우수한 상황에서 승리를 이뤄냈지만 이순신은 열악한 상황에서 전승했다는 것이 넘사벽의 수준입니다. 오죽하면 일본의 유명한 해군전략가나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찌르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일본의 해군제독도 스스로를 넬슨보다 위라고 비교하지만 이순신에게는 한참 아래라는 표현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솔직히 전세계가 인정하는것도 아니고 그당시 일본인들과한반도에 살던 조선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폭력적인 불법 테러리스트라는 인식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독립군들이 민가를 약탈한 사례도 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중국 도적떼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
솔직히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로 많이들 있다보니 것참.... 그 당시 이념이 나쁘다는게 아님. 김일성이가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고 지금에 흘러 실패한 정책이니... 독립운동가들을 화폐에 사용하기에는 좀... 그리고 따지고보면 대한민국은 조선을 잇는 나라는 아니지요. 한반도에서 태어나서는 안될 나라가 미국에 의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가 탄생한거.
정보와 정찰을 극도로 중시했음.. 정찰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인다 한들 유리할떄만 움직이면서 추격하기는 어려우나 퇴각 하기 쉬운 장소를 택했으며.. 시도때도 없이 별동대를 구성해서 긴장감을 높이고..... 움직일때는 항상 함정을 파놓고 움직였으니 추격조차 쉽게 하지못함.....
내가 명량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2척으로 133척을 상대했다는데 그게 진짜일까 의심하는 자칭 전문가 라는 사람들이 있더라만 전투는 울돌목에서만 벌어진것이 아니고 해남 땅끝가기전 어란진에 주둔한 왜군을 진도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이 30리 떨어진 울돌목으로 유인하였던 것이다. 제발 실제로 해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을 답사해보고 아는체해라. 어란진과 마주보고 있는 진도 벽파진의 넓은 바다에는 군선 133척이 아니라 1천척도 들어설수 있는 넓은바다이다. 이 넓은 바다에서의 전투는 12척의 군선으로는 도저히 불가할 것으로본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 좁은 곳으로 끌어들여 앞에 오는 놈만 상대하면 뒤에 늘어선 왜선은 좌우로 포위공격을 못하고 앞장선 전투선이 깨지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볼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두들기는 사이 남해바다에서 올라오던 밀물이 썰물로 바뀌면서 부서지고 깨진 배들이 이젠 자기네들 배쪽으로 덮쳐들면서 자기들끼리 궤멸된 것이다. 이는 애초 이순신 장군이 물때를 바뀌는 시각을 알고 있었고 해전 당일 아침에 어란진에서 울돌목까지 유인해 오는시간이 4시간 걸렸다. 울돌목에서 2시간동안 작살내니 오후 2시쯤 조류가 썰물로 바뀌어 이제는 일본군 쪽으로 배들이 밀려가면서 좌충우돌 아수라장이 된것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날은 음력 9월16일이고 이날은 조류가 가장 빠른 날이다.이 날짜를 디데이로 정한것도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전투날짜인것을 추측하게 된다. 이날에 조류가 바뀌는 시각은 아침에 밀물이 시작하여 오후 2시쯤 만조가 되어 40분정도 소강상태를 유지하다 3시쯤 썰물로 바뀐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조수가 바뀌는 시각과 일치함을 내가 확인했다. 이번 명량대첩 축제때 울돌목을 내려다보는 망금산에 올라 저멀리 어란진에서 왜군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작전을 짰을지 상상해보라. 망금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섬이 피섬이다. 일본군의 피로 물들였다는 섬인데 묘하게도 그 섬 바위색이 붉은색이다. 망금산은 적의 동태를 살피는 뜻으로 망보는 산 혹은 망루가 있는 산 이라는 뜻이다.
@@aixingi0r016 세발달린 갈고리를 던져 베를 전복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답니다. 조선수군의 배는 일본의 안택선보다 훨씬 컸으므로 울돌목 거센물살에서 뱃머리나 꽁무니에 쇠갈고리를 던져 걸면 중심을 잃어 뒤집어 졌답니다. 이것이 와전되고 부풀려져서 바다밑에 쇠사슬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4백년전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의 기술로 만든 강철 와이어도 해남과 진도 바다밑에 와이어를 설치한다해도 사리때 거센 물살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터져버립니다. 쇠사슬의 진실이 항상 궁금했었는데 6년전에 해남 진도간 송전선로 건설을 하다 장비고장으로 와이어가 바다에 빠졌는데 거센물살을 버티지 못하고 와이어가 터져버리는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걸 본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5명도 안될겁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활을 쏴보시면 아십니다. 올림픽에 나오는 양궁은 활시위를 얼굴에 바작 붙여 쏘는데 국궁은 그렇게 까진 하지 않더라도 화살을 날리려면 활시위를 가슴에 붙여 어깨라인까지 수평이 되게 끌어 당겨야 합니다. 영화에서 처럼 저렇게 할 경우 화약의 불붙은 심지가 활시위에 불을 올겨 붙어 활 시위가 끊어지거나 방해가 되어 화살을 발사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위 같은 방법으로 발 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화살을 발사할 때 사수가 화살을 걸치고 활을 당긴 상태에서 곁에 부사수가 있어 화약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거의 현장의 전투에서 쓰이기에는 불가능한 방법이라 봅니다.
내용 잘 봤습니다. 예전에 난중일기를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몇회 받았는지는 모르나 그 후유증으로 얼마나 고문이 심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밤에 잠을 자는데 온 몸이 젖을 정도의 땀을 흘리고 고통스러워 깨어난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병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규모나 횟수가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으나 스님들의 언월도 사용과 한 병사가 낫을 미친듯이 휘두르며 싸웠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영화인지라 다큐처럼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촛첨은 숫적으로 열세인 배와 군사로 적을 상대하는 장군의 고뇌에 있다라고 봅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내 손에 조선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 승리하기 전에는 결코 죽거나 패배할 수 없다"
@@강인호-o1f 여기서 베트남 장군이 왜나와? 그리고 베트남 장군이면 뭐가 문제인가? 베트남 전쟁이 왜 났는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통킹만 사건이라고 아냐? 미국은 선이고 베트남은 악이냐? 역사적 사실을 알고 말하고 왜 가만히 있는 베트남을 디스하냐? 베트남 비하 발언이니 베트남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해라.
이순신이 안휘한테 실제 한말입니다. "안휘야 네가 정녕 군법에 죽고 싶은게냐!!! 여기서 도망쳐 육지로 간다고 살 수 있수 있을것 같으냐!!!" 안휘한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정여립의 5촌조카라는 이유로 군 간부 요직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인데 이순신이 거제현령으로 직접 골라서 추대하고 자기 옆에 가장 신뢰하는 수하로 데려온 인물인데 명량전투 시작직후 초요기를 올렸는데 2각이 넘게 흐르는 동안 아무도 안오고 모든 부하에게 배신감이 들어있던 상태에서 그나마 2각의 시간이 지나고 이순신 함선이 쉽게 점령이 안되니까 안휘가 제일 먼저 왔다가 뻗쳐 있던 열을 안휘한테 다 쏟아낸 말임 ㅋㅋㅋ 그리고 가장 믿는 수하였는데 초요기로 1자진 명령 내렸는데 30분 가까이 뒤에서 구경만 했으니 ㅋㅋ 그래도 안휘가 오고 나서 그다음 다른 함선들이 오면서 본격적으로 8시간이 넘는 명량해전이 시작됨
사실 한산도해전은 대첩으로 하는데 그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의 명량해전은 왜 대첩으로 안 하는지 의문. 한산도대첩이 임진년 전쟁의 양상을 바꾼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데 명량해전도 정유년의 일본군 전략을 끊어 버린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에 명량해전도 대첩으로 하여야 하지 않을까.
감독 인터뷰에서도 명량에서의 갑옷고증 오류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영상미를 뽑아내기위한 선택이였다네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전투중에 주인공이 헬멧을 안쓴다거나, 서양 영화에서 플레이트갑옷을 일반적으로 착용하거나.. 하는 것들도 이해하고 넘어가듯이.. 그정도는 넘어가도 되지않을까 싶네요 ㅋㅋ
왜군이 활보다 조총을 더 많이 사용한 이유는 왜군이 사용하는 활이 반궁인데 반궁자체가 크기만 할뿐 사거리도 짧고 크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반궁은 해군이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주로 육군이 사용했는데 육군에서도 조선에서 사용하던 활에 비해 사거리와 위력에서 많이 떨어진다고 하여 반궁보다는 점점 조총의 사용량을 늘렸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사용하던 활은 각궁으로 왜군이 사용하던 활과는 완전히 다른 활입니다. 특히 조선에서 쓰는 활은 편전(애기살)을 통아와 함께 사용했던 반면 왜군의 반궁은 그냥 긴 화살을 사용하여서 활용도면에서는 조선에서 쓰던 각궁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편전과 통아를 사용한 각궁은 사거리가 350~400m정도로 길고 화살길이도 일반 화살의 반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에 반해 반궁은 긴 화살을 사용하다 보니 정확도도 떨어지고 사거리는 60~80m정도로 차이가 많이났습니다. 참고로 각궁으로는 왜군이 쏜 화살을 다시 재활용할 수 있지만 왜군은 조선군이 쏜 화살을 재활용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앞에서도 설명 했듯이 편전(애기살)은 통아가 없으면 사용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왜군의 입장에선 크기도 크고 사용에도 불편하며 위력이 떨어지고 사거리 짧은 반궁을 구지 사용할 필요를 못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활보다는 조총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뭔가 모르고 영상을 만드셨네요. 왜군도 임진왜란당시 판옥선에 호되게 당했기에 휴전기간중에 세키부네의 크기를 한층 키웠습니다. 물론, 판옥선에 비하면 작지만 그렇다고 사다리를 걸친다음 기어올라야 할 정도로 크기 차이가 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선조실록에도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칠천량에서의 패배 이후 선조가 김응남에게 왜군의 군선이 전보다 커졌다는게 맞냐고 묻자 김응남이 그렇다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발, 이런거 만드실때 문헌 참고좀 하세요
고증오류를 지적하는 영상에 지적을 하자면 ... 신기전을 화살에 걸어서 사용할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나 영상에 나온 활로쏘는 신기전같이 생긴 무기는 신기전이 아닐수 있습니다. 실제 조선 수준은 화살에 화약통을 장착해 적 배에서 화약이 터지는 형태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쉽게 말해 신기전처럼 생겼지만 화약통을 단 화살일 가능성이 높다는것이죠 ~ 이는 고증이 잘됬다고 봐야합니다.
제가 읽었던 책에서도 이순신장군은 일본군에 유리한 백병전은 한번도 하지 않았고 주로 우리나라가 가진 장점인 화포를 사용해(멀리서 포를쏘는)전투를 했기때문에 그많은 전투에서도 사상자가 거의 없을정도로 적었다고 알고 있는데 영화 명량을 보면서 아무리 영화적재미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저렇게 고증을 무시하고 왜곡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음
누군가를 명량에 갖다놓으면 절대 아무도 싸우지 않겠지만 마냥 불가능하진 않았던 것이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이길만한 현실적 요소가 꽤 있었죠 판옥선의 갑빠력과 선회력 일본의 약한 화기의 화력.. 물론 안위 배가 털리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걸 보면 선장의 배 운용스킬이 엄청나지 않으면 택도 없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지만
@@gategall맞습니다 사실 판옥선과 왜군 주력 세키부내의 체급차이를 놓고보면 판옥선자체는 요새나 다름 없죠 그런 판옥선에서 화포를 달고 포격하면 왠만한 세키부내는 다 박살나기엔 충분합니다 특히 13척이 일제히 포격했다면 더더욱 그러했구요 하지만 대장선 혼자서 버티고 선다면 아무리 판옥선이 대선이라 할지라도 밀려오는 왜 수군에 버티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판단됩니다 그 용기와 인내 결단력은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이 권율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부산포 공격을 주저한 이유가 시야가 넓고 탁트인 부산앞바다는 풍랑이 심해 판옥선의 기동성이 떨어지죠 반면 일본의 세키부네는 기동이 빨라서 판옥선을 포위한후 백병전을 할수있어서 유리하죠 이순신은 대포 공격후 배충돌로 일본 함선을 격침시키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명량해전때 판옥선 13척뿐만 아니라 소형선 30척도 같이 출전햇습니다. 일본 수군또한 133척이 좁은 해협으로 동시출격한게 아니라 부대단위로 나눠서 순차적으로 진격했으며 그래서 명량해전때 일본수군의 선두에 섰던 배 30척정도가 침몰되는거죠 세상에 어떤 멍청한 장수가 대포를 쏘는 적군을 향해 좁은 해협으로 133척을 동시에 밀어 넣겟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이후 왜선들이 포위공격 하는 것을 염려하여 진도에서 목포까지 퇴각하죠 칠천량때 배 12척을 가지고 전라도쪽으로 먼저 피신했던 배설 장군은 이후,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재임용되자 탈영하였다가 1년후 참수당하죠 경상우수사였던 배설이 12척의 배를 보존시켰으며 원균이 전사하고 이순신이 면직중이라 자기가 통제사가 될꺼라 생각했을수도 있음;; 명량해전때 판옥선 기준으로 13척이었는데, 1년후 노량해전때 60척으로 는것으로보아 칠천량때 상당수의 함선들이 피신했다가 복귀한거로 추측됨
당시 일본배는 첨저선이라 합니다. 현대의 군함처럼 빨리 가기위해 바닥을 뾰족하게 하였죠, 반면에 조선군은 평저선입니다. 님 말씀대로 일본배가 빠르게 가기위해 첨저선으로 제작한 이유는 중국,한국, 멀리는 필리핀가지 가서 해적질을 하고 빨리 도망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조선군처럼 무거운 나무로 배를 제작하는게 하니라 속도를 내기 위해 그리고 일본에서 흔한 가벼운 목재를 선택하여 대부분의 배를 제작하였죠 그런데 나무가 가볍고 견고하지 못한 까닭에 배에 화포를 놓고 쏘면 화포의 발포충격을 이기지 못해 배가 부숴지기가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나온 방법이 발사 시 충격을 줄이기 위해 돗에 다가 밧줄을 걸어 화포를 매달아 정면으로 쏘는 방법을 했는데 별로 효과적이진 않았던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피드나 화포의 무게 때문에 화포를 배에다 설치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예 화포를 설치할 수 없는 목재로 지어진 배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명량을 남한산성처럼 좀 더 현실적인 전투 고증을 기반으로 캐릭터 묘사를 살리면서 담백하게 만들었다면 훌륭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명량은 위대한 승리고 남한산성은 치욕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랬기에 명량은 국뽕영화로 평가절하되게 만들어졌고 남한산성은 보기드문 명작이 되었다 매우 유감인 부분이다 다만 흥행으로보자면 명량의 선택이 더 옳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6:21 항구 도시에 살아본 사람은 알꺼다. 상당히 큰 어선도 사람 혼자서 지긋이 밀고 있으면 몇초 지나면서 서서히 움직인다는 것을. 물에 떠있는 배는 군함같은 철선이 아닌 이상 웬만한 것은 남자 셋이 밀면 그냥 밀린다. 그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안밀어 봐서 그렇지. 줄로 당기는 것도 줄로 지탱하고, 배를 젓고 있잖아. 이런것은 실험 해보고 아니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 단순히 생각만 가지고 썰을 풀다니, 회사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의심만 하는 사람들 진짜 극혐이다. 반증을 해야지, 근거도 없이 왜 반박을 하냐.
@@김동욱-i5b / 원 댓글러가 말하는건,, 고증되지 않는 부분 첨가+ 픽션첨가를 하면,,,,,드라마,영화로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은,,,그게 진실로 받아 들인다는 것인듯 뿌리깊은나무+육룡이나르샤를 보고 역사를 배운 사람은,,,무휼+이방지가 실존 인물로 알고있고,,,이방지는 뿌나에서는 젊은데,,육룡에서 왜그리 늙었냐?라고 할 정도니까요 하다못해 세종대왕은 한글을 집대성후 반포했지,,,,한글을 창제한게 아닌데,,,세종 대왕이 한글을 창제햇다고 믿는 사람이 대다수 잖아요,
성인3명이 대나무로 배를 지탱하는거는 불가능하다고 하신점은 아무래도 잘못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제가 예전에 타던 해경선 (300톤급)경우는 홋줄을 성인 혼자서 당기면 배가 당겨집니다. 그렇다고 그냥 땡겨지는거는 아니고 힘을 주고 매달리듯이 하면 천천히 움직이죠.. 아무래도 성인 3명이서 배와 암초가 부딪치는거를 막는거는 쬐끔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몇명이 추가로 함께 한다면 아무래도 가능하지 않을 까 싶네요.. 파도가 심한 경우가 아니라는 전제지만요...
현재 영상에서도 정리하신것처럼 영화에서 연출오류라고 지적하신 여러부분을 적용하면 그당시 실제 명량 현실에선 더 안좋은 상황에서 왜군들을 맞이하고 이겼다라는 결론이 됩니다. 만약에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패배했다면, 그날로 명량에서 올라와 조선 조정을 치고 조선은 정복이 되었을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명량에서 왜군을 그 말도 안된다는 소수로 대량을 막았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진실이며 역사적 결과입니다. 그 말도안되는걸 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두정갑을 입었느냐 찰갑을 입었느냐는 시비를 가릴 방법이 없습니다. 두정갑은 조선 중기에 도입이 시작된 갑옷이였고 임란 무렵에는 여전히 찰갑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동래성 해자 유적에서도 찰갑이 발견되었고 서애 류성룡의 갑옷도 찰갑입니다. 찰갑이 거의 사라지고 두정갑이 대세가 되는건 조선 후기의 일입니다. 임란이라면 조선군은 찰갑과 두정갑이 모두 사용되던 시기니 영화에서 이순신이 찰갑을 입던 두정갑을 입던 어느 쪽도 잘못 고증 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화 명량에서 재현한 찰갑은 실제 찰갑과는 거리가 있는 고증 오류입니다. 실제 찰갑들은 찰(미늘)을 저런 식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찰들간에 서로 일부분 겹치는 형태로 연결됩니다.
@@agm1144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1. 부산, 동래 함락이후 일본군이 서울로 가는 가도를 따라 북상했고 조선군은 남은 병력을 모아 소산역, 작원관, 상주에서 몇 번의 저지를 시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2.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본군은 식인귀와 동일하게 취급되어 환영이 아니라 모두 산으로 도망쳐 숨었다. 점령을 완료한 일본군이 안죽일테니 돌아오라고 포고문을 붙여야했을 정도 3. 민심 회유를 위해 일본군은 조선에서 약탈한 군량미 일부를 점령지 주민들에 나누어 줬다. 조선은 환곡제도를 운영해서 흉년에 대비해 상당량의 식량을 비축해두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게 다 일본군에게 노획되었던 것. 그것으로 잠시 조선 민중들에게 환영받았다. 양반 통치 불만이 아니라 난리통에 먹을거 준다니 환영한거 뿐. 그나마 일본식 세금제도를 도입해 조선 민중들로선 한번도 경험못한 살인적 징세가 강행되었고 엄청난 세금에 놀란 조선 민중들은 분기탱천하여 의병, 조선관군에 가담해서 그 민심 회유책도 결국 실패했다. 4. 조선은 왜구의 난동 경험을 근거로 1-2만 정도의 침공군을 예상하고 작전 계획도 세워둔건데 10만에 달하는 침공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모든 작전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그때문에 초기 대응이 완벽히 실패하면서 모든 대응이 꼬여버렸다. 다급히 전국에서 병력을 있는데로 소집했지만 그 병력들이 집결하는 시간보다 일본군이 한양으로 들이 닥치는 시간이 더 빨랐다. 전라도에서 5만의 병력이 소집되고 황해, 강원 평안도의 1만 군대가 집결했지만 이들이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한양에 일본군이 들이 닥쳐 서,어이없이 한양까지 빼았겼다. 5. 14만의 병력과 물자를 나르는 일을 하느라 일본 수군은 개전후 3주가 넘도록 이렇다할 활동을 못했고 부산과 거제도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병력 수송이 일단락 되니 조금식 서쪽으로 이동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제도 옥포의 해안을 장악하고 노략질을 일삼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 함대와 조우했다. 처음으로 조선 수군과 맞붙은 그들은 그들의 장기인 등선 백병전을 시도 했으나 조선 수군은 크고 높은 판옥선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격과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등선을 시도하던 일본 수군은 무기력하게 쓸려나가며 참패했다. 6.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대포'를 경시하고 다수의 철포를 운용하는 걸 선호했다. 해전도 배를 부딪힌뒤 적선에 올라 백병전을 하는 방식으로 했기에 대포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선 수군과 맞붙을때 까지는. 가볍고 날쎄게 만든 일본 함선들은 조선군의 대포에 종이배 마냥 찢겨 나가버렸고 그들이 퍼부은 총탄은 판옥선의 두꺼운 선체를 뚫지 못했다. 7. 조선 수군은 신형함인 귀선(a.k.a 거북선)을 출동시켜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군의 등선 시도 자체를 원천 봉쇄하도록 지붕을 덮어버린 거북선은 일본 수군 함대 한 가운데로 돌격해 들어와서 사방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거북선은 등선에 대한 우려가 없었기에 마음놓고 일본 수군 함선에 바싹 다가가선 각종 대포를 직사 사격으로 퍼부었고, 등선 시도를 위해 갑판에 모여있던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거북선 대포에서 날아온 철환과 조란환에 갈갈이 찢껴저 나갔다. 거북선 돌격으로 큰 성공을 거둔 조선 수군은 이후 200년간 거북선을 돌격선을 계속 사용했다.
@@hiroono1 8. 해전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일본 수군은 해전은 포기하고 해안 방어로 전술을 바꾸었다. 바다를 내어주어도 해안을 장악 못하면 그 효과가 제한되는 점을 노렸다. 해전에선 이길 자신이 없었지만 해안에서 지상전을 한다면 여전히 이길 자신이 있었던 일본군이였다.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들을 해안에 배치하고 참호를 파고 망루를 세워 조선 수군이 정박할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바다를 이용한 보급망을 포기한 선택이였다. 이로 인해 평양, 함경도, 서울 지역의 일본군은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보급이 불가능해졌고 이들은 점차 심각한 보급란을 격으며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듬해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일본군이 남해안 거점을 제외한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전면 퇴각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존심 때문에 한사코 이걸 외면, 부정하며 조선 수군의 승리의 의미를 축소 날조하고 있지만, 조선 수군의 승리가 일본 침략에 숨통을 끊어버렸다는 것이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그 임진장초나 고산공실록 기록을 보면 울돌목은 물살이 너무 쎄서 운행이 불가능해서 울돌목이 아닌 우수영 앞바다에 임하도 포구의 좁은길목에서 맞서 싸웠다고 하더군요 임하도는 그나마 울돌목 보다는 물살도 약하고 수심도 깊고 좁은 길목이라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왜선들은 병목현상이 일어나기 딱 좋은곳이기도 하구요 그점을 이용 해서 초반에는 대장선 단독으로 버텼다고 봅니다. 근데 나머지 장선들이 겁을 먹고 올 생각을 안하고 있자 슬슬 빡이 친 이순신은 초요기를 세워서 장선들을 불렀었고 이에 맨처음 온 장선이 안위의 함선이었던 겁니다. 그다음으로 온 장선이 김응함이었구요 안위는 그렇다 쳐도 김응함은 중군장으로 대장을 호위 해야할 입장에 있었는데 오지를 않았으니 당장에 쳐죽이고 싶었지만 상황이 급박해서 그냥 공을 세우게 해준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백병전을 벌인건 대장선이 아닌 안위의 함선이었고 이 안위의 함선이 왜선 3척에 둘러쌓였을때 대장선이 좌침 선회로 가까이 붙어 0거리 포격으로 안위를 구해낸거라고 합니다.
1. 명량은 지리적 이점을 사용해서 싸웠다고 하나, 울돌목은 우수영 바로 앞 바다이므로, 이순신 장군은 본진에서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주민들이 전투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죠) 2. 명량의 시작은 대장선이 돌격!하므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 한 척을 무려 2시간동안 일본군은 박살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동안 이순신 장군도 단 한척의 일본군도 박살내지 못합니다.) 즉 이순신 장군은 그냥 버티기에 돌입한 것입니다. 3. 형세가 대장선 위주로 일본군이 집중 공격을 하자, 위기를 느낀 이순신 장군이 초요기를 불러 판옥선 전부를 앞으로 불러 드립니다. 4. 이때 앞으로 돌진한 안위의 전선이 바로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순간을 이순신장군이 난중일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5. 안위의 전선을 지키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진을 깨고 포탄으로 일본군을 부셔서 안위를 구출합니다. 6. 물살의 흐름이 바뀌고 조선 수군은 전체 돌격을 하고 울돌목 밖까지 일본군을 몰아냅니다. 7. 전투가 끝난 후 울돌목 물살을 등에 지고 진을 유지할 수가 없기에 이순신 장군도 후퇴합니다.
물위에 떠 있기에 남자셋이 밀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더 모인다면 가능은 합니다. 그리고 어선들이 토잉하는 영상도 물위에 떠 있는 물체이기에 멀리서 멀리서(강조) 줄을 걸어 열심히 노를 젓는다면 가능은 합니다. 다만 영화이고 고증이 안맞다 하더라도 한반도를 지킨 영웅임에는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
명량해전을 패배했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의 논리가 해전이 끝나고 조선수군이 고군산도까지 후퇴했다 이거더만. 그 논리대로라면 미드웨이 해전도 일본군의 승리겠네. 미드웨이 해전도 미 해군이 일 해군 항모를 격침시킨 후 전장에서 전함으로 구성된 일 해군 본함의 추격을 피해 후퇴했는데
명량은 성과나 재미에 비해 고증은 많이 아쉽지요. 저도 영화보고 왜 이순신장군과 휘하 장수들이 두정갑을 입지 않고 찰갑을 입고 있지? 하고 의아했네요.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조선후기 의전용 갑옷인 두석린갑을 입고 있어 뜨악했었는데..... 대신 타 장수들은 제대로 두정갑을 입고 있죠.
@@Ronaldo7and10Messi-goat 불멸의 경우는 군관급은 첨주형 투구를 장수급은 간주형 투구로 차별화를 한거 같고.. 실제 장수들은 대부분 간주형투구를 착용했는데... 드라마와 달리 상당히 두정갑과 찰떡입니다. 당상관급이상은 말씀대로 무늬나 표기가 있어 위엄도 있어보이구요. 게다가 두정갑은 의전용인 두석린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정도로 방호력에서는 동아시아 갑옷 발달의 끝판왕이라고 할 정도로 월등한 성능을 보여줍니다. 유지나 보수도 이전 찰갑에 비해 훨씬 수훨했고요.
사실저도 명량이라는 영화보고 대실망 했습니다. 특히 울둘목에서 싸우는 전투기법이 완전 엉터리 내용때문이죠. 제가 아는 대충의 내용은 울돌목이 시간에따라 물살이 바뀌기때문에 그시간대에 이점을 이용해서 가장좁은 울돌목에 육지와 진도섬사이에 쇠사슬을 걸어서 왜적선들이 지나갈때 쇠사슬을감아 팽팽해진 쇠사슬로인해 왜선들이 쇠사슬에 걸려 아군쪽으로 진격못하고 선봉장을 뒤따르던 뒤왜선들이 강한 물살에 전진하던 배를 세우지못하고 뒤로 후퇴못하고 앞배들을 들이박고 정신없을때 꼼짝없이 갖힌 왜선들을 향해 아군의 배12척이 포쏘기좋게 옆으로 길게 서로붙어서 함포를 막 쏘아 적선들을 격침시켜서 이긴전술이라고 대충알고 있는데 영화를보니 완전 엉터리내용이었고 이영화를 외국이나 일본인들이 봤다는게 참 대실망이었죠. 지금도 진도대교 아래에는 그당시 쇠사슬을걸었던 고리가 있다고하기도 하고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말도 있는데 진도주민들은 알고 있더군요.이전술때문에 이순신장군을 높게 평가하는건데 진짜 외국사람들 이영화보고 영화 명량내용이 사실로 알까 걱정됩니다. 배13척으로 330척을 이기기 위해선 이전법을 이순신장군이 터득했고 진도가 가장 접합한 장소라고 결론내린거 같습니다.
@@jhoon_ho_kbm 글쎄요. 적은 숫자의 배로 그많은적선을 물리쳤다는것은 제가올린 글내용 되로가 아니면 대적이 힘들지 않을까요. 난중일기에 없다면 안적었을수도 있고요. 사실 진도 주민들은 구전으로 그렇게 알고 있답니다. 진도대교아래에 얼마전만해도 쇠사슬을걸었던 쇠고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진도사람들은 얘기합니다.
지난 영상이지만 영화와 사실을 비교하는 영상들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런면에서 좋은 컨텐츠 입니다. *거북선은 없었으나, 판옥선의 현측을 보강하였다는 설은 있답니다. *세키부네도 조금의 개량을 거쳤다고 하더군요. *어민들의 활동은 뒤편의 위장병과 실전에 투입한 마하수 3부자나 동과나 전투 물자를 나르는 등의 향민들의 도움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주력 총통은 지자 총통과 현자 총통이라지요! *신기전보다는 발화탄이라고 한다더군요. *왜군의 활은 장궁인데 사정거리나 명중률이 낫다지요! *조선의 장수나 병졸은 수륙군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임받는 곳이 근무지 입지요. 장군도 수륙을 번갈아 근무하셨지요. 군졸들도 수륙을 가리지 않았던 예가 장군이 쓴 임진장초 중 육군에서 수군을 빼가는 일을 못하도록 청하는 장계로 알 수 있답니다.
역사는 동화가 아니다 역사를 미화하거나 조롱하고 풍자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비극은 언제고 반드시 반복된다 History is not a fairy tale. Tragedy always repeats at any time unless you stop glorifying, mocking, and satirizing history.
듣기로 이순신 장군의 철릭(군복) 영정을 보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복색을 따른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홍색의 철릭으로만 나오죠. 그런데 아직도 공식 그림에서 잘목된 복색을 하신 모습을 봐야 한다는 점이 상당히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랜드 마크가 되어 바꿀래야 바꿀 수도 없는 광화문 앞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참 아린 부분이 있네요.
예전 설민석 선생님 강의에서 당시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를때 대부분 육지전이었고 수상전은 한두차례로 극히 일부였으며 왜구들은 정규군이 아니었고 임진왜란은 16세기 최강의 수군과 16세기 최강의 육군이 붙은 전쟁이라 설명했는데 여기서 일본 수군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다르네요?
설민석 선생님이 그렇게 설명한것은 해전이라고 하면 함대함 결전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영상에도 그렇고 설민석 선생님이 명량 후기로 찍은 영상에도 나오다시피 당시 일본 수군은 대부분 노략질이 기본이여서 상대방 배를 부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다가가 등선육박전술 하는게 보통 이였습니다. 물론 해전이라고 해도 불가피한 경우엔 저런 전투도 벌어질 수 있긴하지만 원거리 무기인 포가 있는데 굳이 그 포를 다 맞아가면서 적의 배에 갖다 붙힐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말하셨다시피 당시 일본은 수전보다 육전에 능했고 배 또한 전투선보다는 수송선 느낌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본 수군은 수군이라고 보기 어렵다는거죠. 애초에 히데요시 계획만 봐도 수전은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근데 선조를 붙잡는다는 첫번째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이미 북상해있는 선두병력에게 보급을 해야하는데 육로는 답이 없어서 수로를 택했는데 그걸 이순신이 다 막은거죠. 이순신하고 싸우자니 함대함 싸움으로는 어차피 답이 없으니 등선육박전술로 싸우려하는데 조선 수군에 배 한번 못 붙여보고 다 깨져버리니깐 지들이 잘하는거 해보지도 못하고 진거구요.
전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들었던 부분이.. 사격준비! 하면 활을 당기고 있는데.. 활을 한번이라도 쏴본적 있다면.. 활을 당기고있는게 저리힘든데.. 저건 불가능하죠 ㅠ 서양의 영화보면.. 사격준비!하면.. 활을 시위에 걸고 대기하는 장면이있는데.. 서양영화가 더 고증에 맞는것같아요 ㅠ
임진왜란 최고의 구국공신임진왜란의진실과사실임진왜란승리의주역은경장정걸장군민족의영웅호걸활동상황을보라선조대왕재조명해야역사왜곡너무심해국민이모르는한국사세계사에최고의명장경장정걸장군이시다선조대왕재조명해야선조대왕이순신장군도경장정걸장군눈부신활약으로조선을구하고백성을구하고전쟁을승전했다고조선신록호남신록에나오는세계적인영웅호걸이바로경장정걸장군전조선과백성이존경하고숭배했다정영공으로불러
이순신 장군 작품 관련 영상 안내
역대 이순신 작품 베스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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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출연 프리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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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 개봉전 흥미로운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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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와 비교는 잘하셨는데, 영상 말미에 세계4대 해전에 한산도대첩이 포함된다는 건 낭설입니다 각 나라마다 배우는 해전사가 다릅니다. 한산도대첩이 미해군, 자위대 해군에서 배운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영상에도 포함되어 있어 굉장히 아쉽네요.
@@몰랑-h1m 영국 해군 사관학교에서 세계4대해전에 한산도대첩이 들어가있습니다
영화에서 거북선이 나올수 없다는것이 맞이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새로운 거북선을 재작 중이였고 말씀하신것처럼 기존거북선이아니라 새로건조하는 거북선이였기에 충분히 가능한이야기고 또 어떤 학계에서는 출정하지 않았던 거북선이 한척 남아있어 투입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hiroono1 그럼 사료에 적힌 전쟁기록은 모두 허구라는 말인가? 아무런 근거없이 생각없는 발언을 내뱉는 것은 위인에게 무례라고 생각한다. 네가 이순신은 영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를 제시하라. 하는 행이 마치 근거도 없이 자신을 강간했다며 신고하는 페미니스틀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여진다.
위대한 장군 이순신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그는 세계사에 유래없는 완벽한 지장이었다.
그누구도 이순신은 못이긴다.
이순신도 대단하지만 노젓는사람들없었으면 이길수 없었음 운전 존나잘함;;티웍 개쩌는거
외국에서 히어로로 그려질 정도로 장군님을 아는 외국사람들은 존경한다 하죠
딱 하나 있음 넬슨이라고
@@jhl7680 넬슨은 서양문화가 발달하다보니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이순신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다는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넬슨은 모든 병력이나 장비가 우수한 상황에서 승리를 이뤄냈지만 이순신은 열악한 상황에서 전승했다는 것이 넘사벽의 수준입니다.
오죽하면 일본의 유명한 해군전략가나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찌르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일본의 해군제독도
스스로를 넬슨보다 위라고 비교하지만 이순신에게는 한참 아래라는 표현을 할 정도였습니다.
화폐 인물 바꿔야 합니다.
독립운동가가 한 명도 없다는게 말이 안 됩니다.
그게 솔직히 전세계가 인정하는것도 아니고 그당시 일본인들과한반도에 살던 조선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폭력적인 불법 테러리스트라는 인식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독립군들이 민가를 약탈한 사례도 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중국 도적떼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
이순신 5천원 이승만 천원 해야됨
솔직히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로 많이들 있다보니 것참.... 그 당시 이념이 나쁘다는게 아님. 김일성이가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고 지금에 흘러 실패한 정책이니... 독립운동가들을 화폐에 사용하기에는 좀... 그리고 따지고보면 대한민국은 조선을 잇는 나라는 아니지요. 한반도에서 태어나서는 안될 나라가 미국에 의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가 탄생한거.
@@닥눈삼 이승만이 잘한 짓도 있지만 그 만큼 못한 짓이 더 많아서 그건좀..
이승만?ㅎㅎㅎ
김구선생님을 넣어야죠
정보와 정찰을 극도로 중시했음.. 정찰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인다 한들 유리할떄만 움직이면서 추격하기는 어려우나 퇴각 하기 쉬운 장소를 택했으며.. 시도때도 없이 별동대를 구성해서 긴장감을 높이고..... 움직일때는 항상 함정을 파놓고 움직였으니 추격조차 쉽게 하지못함.....
반대로 그 누구 원씨는 정찰도 안하고
내가 명량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2척으로 133척을 상대했다는데 그게 진짜일까 의심하는 자칭 전문가 라는 사람들이 있더라만 전투는 울돌목에서만 벌어진것이 아니고 해남 땅끝가기전 어란진에 주둔한 왜군을 진도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이 30리 떨어진 울돌목으로 유인하였던 것이다.
제발 실제로 해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을 답사해보고 아는체해라.
어란진과 마주보고 있는 진도 벽파진의 넓은 바다에는 군선 133척이 아니라 1천척도 들어설수 있는 넓은바다이다.
이 넓은 바다에서의 전투는 12척의 군선으로는 도저히 불가할 것으로본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 좁은 곳으로 끌어들여 앞에 오는 놈만 상대하면 뒤에 늘어선 왜선은 좌우로 포위공격을 못하고 앞장선 전투선이 깨지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볼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두들기는 사이 남해바다에서 올라오던 밀물이 썰물로 바뀌면서 부서지고 깨진 배들이 이젠 자기네들 배쪽으로 덮쳐들면서 자기들끼리 궤멸된 것이다.
이는 애초 이순신 장군이 물때를 바뀌는 시각을 알고 있었고 해전 당일 아침에 어란진에서 울돌목까지 유인해 오는시간이 4시간 걸렸다.
울돌목에서 2시간동안 작살내니 오후 2시쯤 조류가 썰물로 바뀌어 이제는 일본군 쪽으로 배들이 밀려가면서 좌충우돌 아수라장이 된것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날은 음력 9월16일이고 이날은 조류가 가장 빠른 날이다.이 날짜를 디데이로 정한것도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전투날짜인것을 추측하게 된다.
이날에 조류가 바뀌는 시각은 아침에 밀물이 시작하여 오후 2시쯤 만조가 되어 40분정도 소강상태를 유지하다 3시쯤 썰물로 바뀐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조수가 바뀌는 시각과 일치함을 내가 확인했다.
이번 명량대첩 축제때 울돌목을 내려다보는 망금산에 올라 저멀리 어란진에서 왜군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작전을 짰을지 상상해보라.
망금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섬이 피섬이다.
일본군의 피로 물들였다는 섬인데 묘하게도 그 섬 바위색이 붉은색이다.
망금산은 적의 동태를 살피는 뜻으로 망보는 산 혹은 망루가 있는 산 이라는 뜻이다.
@@aixingi0r016 역사적으로 고증된것이므로 학계에서는 정설 로 받아들입니다.
그옛날 못난 민초들이 배걸이을 해서 정부미을 노획했다고 민초가 아닌 해적의 일이라 숨기느라 ...
누가이거 3줄요약좀..
@@aixingi0r016 세발달린 갈고리를 던져 베를 전복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답니다.
조선수군의 배는 일본의 안택선보다 훨씬 컸으므로 울돌목 거센물살에서 뱃머리나 꽁무니에 쇠갈고리를 던져 걸면 중심을 잃어 뒤집어 졌답니다.
이것이 와전되고 부풀려져서 바다밑에 쇠사슬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4백년전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의 기술로 만든 강철 와이어도 해남과 진도 바다밑에 와이어를 설치한다해도 사리때 거센 물살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터져버립니다.
쇠사슬의 진실이 항상 궁금했었는데 6년전에 해남 진도간 송전선로 건설을 하다 장비고장으로 와이어가 바다에 빠졌는데 거센물살을 버티지 못하고 와이어가 터져버리는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걸 본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5명도 안될겁니다.
이야 이건 뭐 제갈량 동남풍 주유 화공은 세발의 피라 보겠네요 이순신장군님 정말 대단하신겁니다.
이긴 이유가 숙련된 정예 노잡이들덕분임 운전실력이 엄청남;; 그걸 지휘하는 방법을 아는건 이순신과 그곁에있던 장수들뿐...
6:15 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해군을 나온 입장으로서 500톤급 함정이 사람 5명정도로 밀리는걸 봤으니깐요 그에 비해 정확하진 모르겠지만 판옥선은 만재 배수량이 약140톤인걸 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Pcc 탔던 해군 출신으로 그당시 함미 6호줄 당겼었는데 현문위치 뒤로 가야 하는 상황일때 성인남자 20명이 채 안되는 인원으로 호줄 당기니깐 함미가 움직인 것을 여러번 봤었죠. 님 말씀 처럼 충분히 가능하다 봅니다.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hiroono1 이순신이랑 고질라랑 뭔 상관입니까?
@@hiroono1이순신 장군님 영상만 보면 이놈 댓글 항상 있네;; 나불거리지 말고 발 닦고 잠이나 자
@@재영강-j6o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는 것도 고질라도 모두 함께 픽션이다.
예전에 인터뷰 봤는데 영화적 긴장간과 요소들을 위해 고증과 다른부분이 많다고 했었오요^^
어쩜 이리 잘 만들었을까요 인생 최고의 영홥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그런데 명량은 이길가능성이 정말 절박하다말할정도로 말도안되는 상황이지만,
"이순신"장군님아니면 절대 이런일은 절대 일어날수없는... 그런 절대적인 명량대첩!!!
노잡이들의 엄청난 숙련도덕분에 이길 수 있었죠
8:30 에 나온거는 소신기전 같습니다 다만 영화에선 다르게 폭발하는게 아니라 화재를 발생하는걸로 알고있습니다 발사방법는 소신기전같은건 화차에 넣고 썻지만 영화에서 처럼 활로 쐈다고 합니다
활을 쏴보시면 아십니다. 올림픽에 나오는 양궁은 활시위를 얼굴에 바작 붙여 쏘는데 국궁은 그렇게 까진 하지 않더라도 화살을 날리려면 활시위를 가슴에 붙여 어깨라인까지 수평이 되게 끌어 당겨야 합니다. 영화에서 처럼 저렇게 할 경우 화약의 불붙은 심지가 활시위에 불을 올겨 붙어 활 시위가 끊어지거나 방해가 되어 화살을 발사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위 같은 방법으로 발 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화살을 발사할 때 사수가 화살을 걸치고 활을 당긴 상태에서 곁에 부사수가 있어 화약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거의 현장의 전투에서 쓰이기에는 불가능한 방법이라 봅니다.
마지막 멘토가 감음에 전율을 느낍니다.민족의 영웅
내용 잘 봤습니다. 예전에 난중일기를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몇회 받았는지는 모르나 그 후유증으로 얼마나 고문이 심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밤에 잠을 자는데 온 몸이 젖을 정도의 땀을 흘리고 고통스러워 깨어난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병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규모나 횟수가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으나 스님들의 언월도 사용과 한 병사가 낫을 미친듯이 휘두르며 싸웠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영화인지라 다큐처럼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촛첨은 숫적으로 열세인 배와 군사로 적을 상대하는 장군의 고뇌에 있다라고 봅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내 손에 조선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 승리하기 전에는 결코 죽거나 패배할 수 없다"
국뽕과 신파를 분단위로 떡칠을 해놨는데 잘 만든건 좀..
@@강인호-o1f 표현을 좀 거시기 하게 하네. 영화이니 어느 정도 감안해서 봐야지. 그리고 난중일기 읽어는 봤는가? 공부좀 하고 댓글 달길......
@@hopeomega5957 난중일기 읽은 사람이 영화니까 다 넘어가라고 함? ㅋㅋㅋㅋㅋㅋ 아무리 각색이라고 감안해줘도 쓰레기인데요 ㅠㅠ 막말로 이순신이 아니라 어디 베트남 장군 얘기였으면 아저씨가 저걸 봤겠어?
@@hopeomega5957 참고로 이 영화 고증 자문들이 다 때려치우고 나갔다는거^^ 역사 전문가들이 댁보다 난중일기를 덜 읽어봤을까? 조금의 각색도 용납하지 못하는 융통성 없는 인간들이라서 나갔을까?
@@강인호-o1f 여기서 베트남 장군이 왜나와? 그리고 베트남 장군이면 뭐가 문제인가? 베트남 전쟁이 왜 났는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통킹만 사건이라고 아냐? 미국은 선이고 베트남은 악이냐? 역사적 사실을 알고 말하고 왜 가만히 있는 베트남을 디스하냐? 베트남 비하 발언이니 베트남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해라.
사람 혼자서 덤프트럭을 끄는 경우도 있는데 물위에 고정되지 않은 140~150톤 정도의 목선을 남자3명이 굵은 대나무를 이용해서 바위에 부딪치지 않도록 미는것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 소형배가 견인하는 것도 가능
명량뿐만아니라 이순신장군님의 23전 그어떤해전에도 백병전은없었을겁니다.조선수군에유리한 긴사거리를 활용한 포격전을 가장 전술적으로 잘 사용하신게 이순신장군입니다.일본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가장효율적으로 차단한것도 이순신장군님입니다
짚단에 불을 붙여던져 나룻배같은 일본배를 태워버리는게 주방법이었다고하는구요.
백병전에 대한 기록은 있다고 합니다 그 전투가 노량해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기가 꺽여 도망치는 왜군들을 한명도 살리고 싶지않은 수군들의 사기에 힘입어 전투 후반부에 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판옥선 자체가 왜선보다 높아서 부딛쳐도 서로 칼질할 일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고 함
이순신이 안휘한테 실제 한말입니다.
"안휘야 네가 정녕 군법에 죽고 싶은게냐!!! 여기서 도망쳐 육지로 간다고 살 수 있수 있을것 같으냐!!!"
안휘한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정여립의 5촌조카라는 이유로 군 간부 요직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인데 이순신이 거제현령으로 직접 골라서 추대하고 자기 옆에 가장 신뢰하는 수하로 데려온 인물인데 명량전투 시작직후 초요기를 올렸는데 2각이 넘게 흐르는 동안 아무도 안오고 모든 부하에게 배신감이 들어있던 상태에서 그나마 2각의 시간이 지나고 이순신 함선이 쉽게 점령이 안되니까 안휘가 제일 먼저 왔다가 뻗쳐 있던 열을 안휘한테 다 쏟아낸 말임 ㅋㅋㅋ
그리고 가장 믿는 수하였는데 초요기로 1자진 명령 내렸는데 30분 가까이 뒤에서 구경만 했으니 ㅋㅋ 그래도 안휘가 오고 나서 그다음 다른 함선들이 오면서 본격적으로 8시간이 넘는 명량해전이 시작됨
노량에서 백병전 치열 했다
조선은 이순신을 버렸지만 이순신은 조선을
버리지 않았다.
08:47 동의합니다.
다만 사진에 나온건 산화신기전으로 2단로켓이자 다탄두로켓인데요...
왼쪽그림은 중신기전이네요...
중, 대, 산화신기전만 자체폭발력이 있고
소신기전은 없지만..
영화상에 나온것은 중신기전마냥 터지니 등장부터가 고증오류가 맞습니다....
영화적 각색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대완구에 비격진천뢰를 넣고 쏘는데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선 그걸 그냥 불붙여 수류탄처럼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주산성에서 발사대가 없다면 실제로 그렇게도 사용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응용을 잘하니까요
오리 이원익 대감이 이순신의 사돈이었는데 이순신을 선조로부터 살려주는데 큰 힘을 보탯다고 하던데요..정탁이라..
딴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대나무로 지탱하는거 자는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5인승 보트를 운영중이지만 합사 1호 로 밑걸름시 보트가 지탱이 됩니다 고로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됩니다
판옥선이 만재배수량부터 2,300톤은 넘어갈텐데 가능할수가 없죠
세키부네도 만재배수량이 수십톤 가랑입니다.
선조때 판옥선은 명종때 발명한 판옥선 보다도 규모가 더컷어요,,,, 탑승인원만 160명정도 인 큰배에 대포, 각종 무기, 물, 등등이 잇는데,,,,,, 몇명이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웃기는 상상력일뿐입니다
대장선 승선인원 200여명에 천/지자총통이 수십문.. 만재배수량이 300톤임.. 대나무로 밀어내기가 가능할리가..
명량해전 당시 12척의 함선 뒤에 수십 혹은 수백척의 어선을 배치하였다고 합니다. (왜군에서 보았을때 함선의 수가 많은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 부분도 확인 부탁드립니다^^
민간 피난선들이 배치된거 맞습니다.
강제징발보다는 이순신장군의 복귀에 민간에서 자원하여 돕기위해 모여들었죠
여러기록에서 민간의 여선들이 자원하여 모여들었고 이순신장군이 고마워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대장선 혼자 반시진(한시간)이상 버틴것도 팩트
사실 한산도해전은 대첩으로 하는데 그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의 명량해전은 왜 대첩으로 안 하는지 의문. 한산도대첩이 임진년 전쟁의 양상을 바꾼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데 명량해전도 정유년의 일본군 전략을 끊어 버린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에 명량해전도 대첩으로 하여야 하지 않을까.
진짜 내가 일본장수였어도 상대가 이순신이라는걸
알았으면 싸우기도 전에 속으로 불안했을듯
이러면 안되지만 일본해군이 안쓰러울 정도
이순신만 물고빨지말고 엘리트 정예 노잡이들 칭찬좀해주세요 운전실력이 엄청남 수십명이 하나가되는게 쉬운줄아나...
당시 싸울때 정보가 부족하던시대라 적장이누구인지 이름도 제대로몰랏다고하네 그래서 김시민을 모쿠소 시마즈요시히로를 심안돈 이런식으로 알던시대예요 이런듯 정보가부족해서. 싸울때 누구싸우는지 자체를 모를꺼예요 서로
@@이제동-f7q 그렇습니다.
울돌목 거센 물살에서 요리조리 치고 빠지고 급선회 급정지 급돌격을 자유자재로 했을 키잡이와 격군들의 기술이 놀라울 뿐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장군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일본국민이되어 살아가고 있지않을까 하는 끔찍한생각을 하네요
@@팔자려니 그건아님,명나라는 뭐 병풍이냐 ㅋㅋㅋㅋ
대나무로 배를 미는 장면은 한쪽에서는 노를 잡아 지탱하고 한쪽에서는 노를 더 세게 저어 남자3명의 힘뿐만이 아닌 여러 힘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 인터뷰에서도 명량에서의 갑옷고증 오류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영상미를 뽑아내기위한 선택이였다네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전투중에 주인공이 헬멧을 안쓴다거나, 서양 영화에서 플레이트갑옷을 일반적으로 착용하거나.. 하는 것들도 이해하고 넘어가듯이.. 그정도는 넘어가도 되지않을까 싶네요 ㅋㅋ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세계 전대미문 불가사의 전투중에 최고 명싸움인 (노량과 함께) 명량 영화나 불멸의 이순신에서 다 추측해서 가설들을 쓰는등의 해서 장면들은 만들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식들의 방식으로 싸웠었는지 어떠한 상상도 못가고, 않가는것 같네요.ㅠㅜ
이 형님 조만간 떡상하신다. 믿고 있어요 !!
사실고증이냐 영화상의 흥미냐를 떠나서 이순신장군님은 위대하셨다 자랑스러운 영웅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왜군이 활보다 조총을 더 많이 사용한 이유는 왜군이 사용하는 활이 반궁인데 반궁자체가 크기만 할뿐 사거리도 짧고 크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반궁은 해군이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주로 육군이 사용했는데 육군에서도 조선에서 사용하던 활에 비해 사거리와 위력에서 많이 떨어진다고 하여 반궁보다는 점점 조총의 사용량을 늘렸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사용하던 활은 각궁으로 왜군이 사용하던 활과는 완전히 다른 활입니다. 특히 조선에서 쓰는 활은 편전(애기살)을 통아와 함께 사용했던 반면 왜군의 반궁은 그냥 긴 화살을 사용하여서 활용도면에서는 조선에서 쓰던 각궁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편전과 통아를 사용한 각궁은 사거리가 350~400m정도로 길고 화살길이도 일반 화살의 반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에 반해 반궁은 긴 화살을 사용하다 보니 정확도도 떨어지고 사거리는 60~80m정도로 차이가 많이났습니다. 참고로 각궁으로는 왜군이 쏜 화살을 다시 재활용할 수 있지만 왜군은 조선군이 쏜 화살을 재활용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앞에서도 설명 했듯이 편전(애기살)은 통아가 없으면 사용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왜군의 입장에선 크기도 크고 사용에도 불편하며 위력이 떨어지고 사거리 짧은 반궁을 구지 사용할 필요를 못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활보다는 조총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조선군도 총 씀 ㅋㅋ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ㆍ
잘 보고갑니다^^
오히려 현재 영화나 평가가 과소평가 된것임이 사실일겁니다
실제처럼 영화 제작했으면 너무 시시해서 영화가 재미없을듯ㅋㅋㅋㅋ
이 채널 떡상 머지 않았다 ㅋㅋㅋㅋ
뭔가 모르고 영상을 만드셨네요.
왜군도 임진왜란당시 판옥선에 호되게 당했기에
휴전기간중에 세키부네의 크기를 한층 키웠습니다.
물론, 판옥선에 비하면 작지만
그렇다고 사다리를 걸친다음 기어올라야 할 정도로 크기 차이가 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선조실록에도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칠천량에서의 패배 이후 선조가 김응남에게 왜군의 군선이 전보다 커졌다는게 맞냐고 묻자
김응남이 그렇다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발, 이런거 만드실때 문헌 참고좀 하세요
나무위키 찾아보라는 사람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요
@@간다드래곤볼 놀랍게도 나무위키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좋은 영상 선정과 멋진 멋진 편집으로 편하게 감상합니다^~^
이런 피드백들이 모이고 이를 감독이 잘 반영하여 연출한것이 한산 같습니다.
여전히 소소한 오류들은 있었습니다만...
명량은 솔직히 영화를 볼때 알고있던 전투방법과 너무 달라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산에서 제일 큰 오류는 조총으로 조준 사격을 한다는 것. 조총은 명중률 구려서 불가능함.
고증오류를 지적하는 영상에 지적을 하자면 ...
신기전을 화살에 걸어서 사용할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나 영상에 나온 활로쏘는 신기전같이 생긴 무기는 신기전이 아닐수 있습니다.
실제 조선 수준은 화살에 화약통을 장착해 적 배에서 화약이 터지는 형태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쉽게 말해 신기전처럼 생겼지만 화약통을 단 화살일 가능성이 높다는것이죠 ~ 이는 고증이 잘됬다고 봐야합니다.
제가 읽었던 책에서도 이순신장군은 일본군에 유리한 백병전은 한번도 하지 않았고 주로 우리나라가 가진 장점인 화포를 사용해(멀리서 포를쏘는)전투를 했기때문에 그많은 전투에서도 사상자가 거의 없을정도로 적었다고 알고 있는데 영화 명량을 보면서 아무리 영화적재미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저렇게 고증을 무시하고 왜곡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음
? 백병전 하셨어요
이순신 쪽의 백병전은 모르겠는데 안휘 쪽에 배에 백병전이 일어났다함.
그 때 안휘배에 붙여서 안휘에게 다가가 그 얘기 했다 기억함. 이 점은 불멸의 이순신과 비슷함.
@@성이름-s5w5j 그런가요? 조금더 알아보고 싶네요. 난중일기등 개인적으로 이순신장군에 대한 책들을 읽는다고 읽었는데 오래전 이어서 제가 잘못 알고 있었을까요?
@@장제제-v6t 죄송합니다 제가 찾아보니 백병전 하신 기록이 없네요^^ 앞으로 찾아보고 댓글 쓰겠습니다
@@성이름-s5w5j 그래그래 ㅋㅋㅋ 어휴 모지리가 정신차린 모지리라 다행
여러분들이 이순신이 12척으로 싸운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실제론 13척이였습니다 꼭 알아두셨으면 해욥
김무진님정확한정보감사합니다
@@김혜원-l9e 네, 감사합니다
13척이긴한대 김억추의1척은 1마장이나 뒤에 떨어져 관망만했죠
우애됏든 이순신장군님 대단하시옵나이다 전장에서 이기지 못 해쓰면 저희는 우애됐을지 모르나이다
진도 출신입니다.
어렿을때 진도대교가 생기기전 녹진쪽으론 등대가 있었고 등대밑으로 갯바위쪽으로 쇠고리가 박혀있는걸봤네요
나중에 성인이 돼서 그냥들은내용인데 그 쇠고리가 드라마이순신에 명량해전 해남우수영과
진도녹진쪽 쇠사슬을 연결해서 했다 이렇게들었네요
또하나. 명량 영화를 보면 판옥선으로 세키부네와 아타케부네(안택선)을 들이받아 쳐부수는 충파 전술이 나오는데,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충파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데체 12척인가요? 13척인가요?
판옥선은 12척이었는데 어선을 하나 빌려서 13척이었답니다. 저도 역사시간에 ㅎㅎ^^
어선이 아니라 김억추가 1대 끌고옵니다.
실제 명랑에선 맨뒤에서 지켜만 봄
3:28 거북선인데 거북서로 오타나셨네요^^ 영상 잘 봤습니당~!
난중일기 읽어볼께요-!
명량해전 관련된기록만 많았더라면 세계4대해전은 아무것도아니었겠죠? 아무것도가진게없는체 12척의배로일어나 300여척을 이겼으니까요
역사적 고증 잘된 영상인거같네요..
추천영상!!
명량대첩은 전무후무 하다
주작이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이기기힘든 전투인데
그에 현실이라니....
이순신 만세
이순신장군의 전략은 백전백승 으로 지구탄생후 이순신장군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음 유명한나폴레옹의 승률도 45프로밖에안되는데
항상 불리한 조건에서 100 프로 이긴다는건 대단한전략가임
@@오민석-d8k 이순신이 무슨전투에서 진게 있는지 본인 지식은 얼마나 깊은지 이야기해보시죠
누군가를 명량에 갖다놓으면 절대 아무도 싸우지 않겠지만 마냥 불가능하진 않았던 것이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이길만한 현실적 요소가 꽤 있었죠 판옥선의 갑빠력과 선회력 일본의 약한 화기의 화력.. 물론 안위 배가 털리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걸 보면 선장의 배 운용스킬이 엄청나지 않으면 택도 없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지만
@@gategall맞습니다
사실 판옥선과 왜군 주력 세키부내의 체급차이를 놓고보면
판옥선자체는 요새나 다름 없죠
그런 판옥선에서 화포를 달고 포격하면
왠만한 세키부내는 다 박살나기엔 충분합니다
특히 13척이 일제히 포격했다면 더더욱 그러했구요
하지만 대장선 혼자서 버티고 선다면
아무리 판옥선이 대선이라 할지라도
밀려오는 왜 수군에 버티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판단됩니다
그 용기와 인내 결단력은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이 권율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부산포 공격을 주저한 이유가 시야가 넓고 탁트인 부산앞바다는 풍랑이 심해 판옥선의 기동성이 떨어지죠
반면 일본의 세키부네는 기동이 빨라서 판옥선을 포위한후 백병전을 할수있어서 유리하죠
이순신은 대포 공격후 배충돌로 일본 함선을 격침시키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명량해전때 판옥선 13척뿐만 아니라 소형선 30척도 같이 출전햇습니다.
일본 수군또한 133척이 좁은 해협으로 동시출격한게 아니라 부대단위로 나눠서 순차적으로 진격했으며
그래서 명량해전때 일본수군의 선두에 섰던 배 30척정도가 침몰되는거죠
세상에 어떤 멍청한 장수가 대포를 쏘는 적군을 향해 좁은 해협으로 133척을 동시에 밀어 넣겟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이후 왜선들이 포위공격 하는 것을 염려하여 진도에서 목포까지 퇴각하죠
칠천량때 배 12척을 가지고 전라도쪽으로 먼저 피신했던 배설 장군은 이후,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재임용되자 탈영하였다가 1년후 참수당하죠
경상우수사였던 배설이 12척의 배를 보존시켰으며 원균이 전사하고 이순신이 면직중이라 자기가 통제사가 될꺼라 생각했을수도 있음;;
명량해전때 판옥선 기준으로 13척이었는데, 1년후 노량해전때 60척으로 는것으로보아 칠천량때 상당수의 함선들이 피신했다가 복귀한거로 추측됨
일본배는 거의 해적선이라 빠르게
움직여야하니 대포가 없죠~
승리의 원인중 크게작용한거는
대포라고 봅니다
물론 이순신장군 통솔력도 크다고 봅니다~
당시 일본배는 첨저선이라 합니다. 현대의 군함처럼 빨리 가기위해 바닥을 뾰족하게 하였죠, 반면에 조선군은 평저선입니다.
님 말씀대로 일본배가 빠르게 가기위해 첨저선으로 제작한 이유는 중국,한국, 멀리는 필리핀가지 가서 해적질을 하고 빨리 도망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조선군처럼 무거운 나무로 배를 제작하는게 하니라 속도를 내기 위해 그리고 일본에서 흔한 가벼운 목재를 선택하여 대부분의 배를 제작하였죠
그런데 나무가 가볍고 견고하지 못한 까닭에 배에 화포를 놓고 쏘면 화포의 발포충격을 이기지 못해 배가 부숴지기가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나온 방법이 발사 시 충격을 줄이기 위해 돗에 다가 밧줄을 걸어 화포를 매달아 정면으로 쏘는 방법을 했는데 별로 효과적이진 않았던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피드나 화포의 무게 때문에 화포를 배에다 설치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예 화포를 설치할 수 없는 목재로 지어진 배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격전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
그 왜선의 특징과 왜군의 전투방식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포격전 전략을 세운 이순신장군의 지략은 대단하죠
@잘해보자 대포가 주요한 원인이엇다면 원균이 칠전량해전에서 대승해야맞는거지 이순신 장군이엇기에 가능한거입니다 정신나간양반아
역시 오래된 역사 이다 보니 정확한 사실은 알수 없군요...ㅠㅠㅜ
영화보다 더 판타지였던 실제 명량 ㄷㄷㄷㄷ
완벽이라는 자체가 어울리는 최고의 위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명량보단 드라마 불멸의이순신이 더 고증에 가까운듯 하네요
명량해전 당시 영화에서 처럼 백병전을 벌인 배는 대장선이 아닌 안위 제독의 배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그런 글이 나오나요??
@@김우르르쾅-t5m 난중일기에 나와요 '안위의 배에 적병력이 올라탔고 안위의 병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tgjun09 올라탔다는 표현이 아니고 적들에 둘러싸였는데 개미떼와 같았다 입니다. 갑판에 왜군 난입했으면 안위선 승조원들은 다 죽었습니다. 원균이 뻘짓할때 판옥선 한척에 나무베던 왜군 20여명이 올라탔는데 120명 넘는 판옥선 승무원들이 전사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익사했습니다.
원균이라는 작자가 칠천량해전에서 다 해쳐먹어서 12척으로 전투했는데
이긴것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그 고친것 까지 포함해서 13척 정도 입니다
명량을 남한산성처럼 좀 더 현실적인 전투 고증을 기반으로 캐릭터 묘사를 살리면서 담백하게 만들었다면 훌륭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명량은 위대한 승리고 남한산성은 치욕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랬기에 명량은 국뽕영화로 평가절하되게 만들어졌고 남한산성은 보기드문 명작이 되었다 매우 유감인 부분이다 다만 흥행으로보자면 명량의 선택이 더 옳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남한산성은 우리에게 좀 안좋은 역사...
남한산성도 사실 마지막 전투장면은 실화에선 없었던 장면임.
6:21 항구 도시에 살아본 사람은 알꺼다. 상당히 큰 어선도 사람 혼자서 지긋이 밀고 있으면 몇초 지나면서 서서히 움직인다는 것을. 물에 떠있는 배는 군함같은 철선이 아닌 이상 웬만한 것은 남자 셋이 밀면 그냥 밀린다. 그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안밀어 봐서 그렇지. 줄로 당기는 것도 줄로 지탱하고, 배를 젓고 있잖아. 이런것은 실험 해보고 아니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 단순히 생각만 가지고 썰을 풀다니, 회사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의심만 하는 사람들 진짜 극혐이다. 반증을 해야지, 근거도 없이 왜 반박을 하냐.
설명란 링크 어디있나요-?
명량은 솔직히 재미를 위해 각색한게 많죠 그걸 뭐라하면 안되는겁니다... 그냥 요즘 sf 스릴러 이런 영화가 나오는마당에 이순신장군의 일화를 그린 영화를 만든거 자체를 감사해야한다고봅니다 저는
오히려 명량해전 현실이 더 판타지같은거같아욬ㅋㅋㅋㅋㅋㅋㅋㅋ
저기요....
반대로 생각하는것 같은데요?
영화는 오히려 실전보다 더 축소되어 그려진 것입니다.
저도 반대인데요;; 실화를 판타지로 만들어버리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냥 판타지로 기억해버립니다..그럼 위인의 업적을 축소 시켜버리는 결과가 나오죠
그냥 SF물임 역사적 고증도 없는 저런걸 어린아이들이 그냥 믿을까봐 걱정됨
@@김동욱-i5b / 원 댓글러가 말하는건,, 고증되지 않는 부분 첨가+ 픽션첨가를 하면,,,,,드라마,영화로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은,,,그게 진실로 받아 들인다는 것인듯
뿌리깊은나무+육룡이나르샤를 보고 역사를 배운 사람은,,,무휼+이방지가 실존 인물로 알고있고,,,이방지는 뿌나에서는 젊은데,,육룡에서 왜그리 늙었냐?라고 할 정도니까요
하다못해 세종대왕은 한글을 집대성후 반포했지,,,,한글을 창제한게 아닌데,,,세종 대왕이 한글을 창제햇다고 믿는 사람이 대다수 잖아요,
매우 참신한 채널 점점 느네요 구독 조회수가 ㅋㅋㅋ
제가 알기론 활로쏘는 신기전이 최무선에의해 개발되었고 그것이 발전되어 세종때 신기전으로 발전시킨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쉽게 활로스는 신기전의 이름은 생각이 안나네요 임진외란때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주화 일겁니다
최초의 수류탄+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도 임진왜란쯤에 있엇죠
최무선이 개발한건 포에 작은 미사일처럼 생긴 발사체를 쏘아보내는 무기였습니다. 장군전을 축소한 형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가 오히려 더 말도 안되는 판타지였지..
영화에서는 치고박기라도 했지... 실제는 그냥 건드리지도 못하고 지근지근 밟혔음
심지어 300척이 넘는 vs13척이었는디 ㅋㅋㅋㅋㅋ
"안위야 네 너를 엄히......."는 실제 안위에게 한이야기 입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안위에게 했다고 나옵니다.
사정거리 50미터짜리 조총쓰는 스나이퍼 나올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음. 거기다 물살이 센 명량 바다위 배에 타고있는 스나이퍼를 활로 명중시키는 안위. 드라마틱하게 하려고 지어냈다지만 사실 이런 말도안되는 어거지가 오히려 반감. 실제 역사가 훨씬 드라마틱함.
확실한건 이순신은 대단하다는점
04:21 사실 조선에서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참수는 안합니다. 고위관직이 참수까지 당했다는건 다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여기 유튜브 주인장은 그냥 "빼액 기록이 이런데 이게 팩트아님?" 하는 새대가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장군옆ㄴ에서 왕 업퍼지죠`
못들엇내 그러지마시게 장군
장군
아무소리고안들엇내
소신기전이 아니라 화재용으로 화약통을 달아 불화살 대용으로 쓴게 있다고 다른 유튜브에 나와있네요.
ruclips.net/video/CPSMyeg0CFA/видео.html
3분경에 보면 일본에서 발견된 고화에도 묘사되어있는 무기네요.
성인3명이 대나무로 배를 지탱하는거는 불가능하다고 하신점은 아무래도 잘못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제가 예전에 타던 해경선 (300톤급)경우는 홋줄을 성인 혼자서 당기면 배가 당겨집니다. 그렇다고 그냥 땡겨지는거는 아니고
힘을 주고 매달리듯이 하면 천천히 움직이죠.. 아무래도 성인 3명이서 배와 암초가 부딪치는거를 막는거는 쬐끔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몇명이 추가로 함께 한다면 아무래도 가능하지 않을 까 싶네요.. 파도가 심한 경우가 아니라는 전제지만요...
진짜요?
현재 영상에서도 정리하신것처럼 영화에서 연출오류라고 지적하신 여러부분을 적용하면 그당시 실제 명량 현실에선 더 안좋은 상황에서 왜군들을 맞이하고 이겼다라는 결론이 됩니다. 만약에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패배했다면, 그날로 명량에서 올라와 조선 조정을 치고 조선은 정복이 되었을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명량에서 왜군을 그 말도 안된다는 소수로 대량을 막았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진실이며 역사적 결과입니다. 그 말도안되는걸 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두정갑을 입었느냐 찰갑을 입었느냐는 시비를 가릴 방법이 없습니다. 두정갑은 조선 중기에 도입이 시작된 갑옷이였고 임란 무렵에는 여전히 찰갑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동래성 해자 유적에서도 찰갑이 발견되었고 서애 류성룡의 갑옷도 찰갑입니다. 찰갑이 거의 사라지고 두정갑이 대세가 되는건 조선 후기의 일입니다. 임란이라면 조선군은 찰갑과 두정갑이 모두 사용되던 시기니 영화에서 이순신이 찰갑을 입던 두정갑을 입던 어느 쪽도 잘못 고증 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화 명량에서 재현한 찰갑은 실제 찰갑과는 거리가 있는 고증 오류입니다. 실제 찰갑들은 찰(미늘)을 저런 식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찰들간에 서로 일부분 겹치는 형태로 연결됩니다.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hiroono1 역사적 사실과 공상속 괴수를 비교하는 바보가 '검증' 타령하는 꼴을 다 보네. ㅋ
@@agm1144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일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하자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달아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인 선조는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하는 선조를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무리였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돼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드디어 수군을 다시 세워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거뒀다. 단,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이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 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쿠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못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에게 강등됐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따른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에 따른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의 전투의 개요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1. 부산, 동래 함락이후 일본군이 서울로 가는 가도를 따라 북상했고 조선군은 남은 병력을 모아 소산역, 작원관, 상주에서 몇 번의 저지를 시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2.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본군은 식인귀와 동일하게 취급되어 환영이 아니라 모두 산으로 도망쳐 숨었다. 점령을 완료한 일본군이 안죽일테니 돌아오라고 포고문을 붙여야했을 정도
3. 민심 회유를 위해 일본군은 조선에서 약탈한 군량미 일부를 점령지 주민들에 나누어 줬다. 조선은 환곡제도를 운영해서 흉년에 대비해 상당량의 식량을 비축해두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게 다 일본군에게 노획되었던 것. 그것으로 잠시 조선 민중들에게 환영받았다. 양반 통치 불만이 아니라 난리통에 먹을거 준다니 환영한거 뿐. 그나마 일본식 세금제도를 도입해 조선 민중들로선 한번도 경험못한 살인적 징세가 강행되었고 엄청난 세금에 놀란 조선 민중들은 분기탱천하여 의병, 조선관군에 가담해서 그 민심 회유책도 결국 실패했다.
4. 조선은 왜구의 난동 경험을 근거로 1-2만 정도의 침공군을 예상하고 작전 계획도 세워둔건데 10만에 달하는 침공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모든 작전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그때문에 초기 대응이 완벽히 실패하면서 모든 대응이 꼬여버렸다. 다급히 전국에서 병력을 있는데로 소집했지만 그 병력들이 집결하는 시간보다 일본군이 한양으로 들이 닥치는 시간이 더 빨랐다. 전라도에서 5만의 병력이 소집되고 황해, 강원 평안도의 1만 군대가 집결했지만 이들이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한양에 일본군이 들이 닥쳐 서,어이없이 한양까지 빼았겼다.
5. 14만의 병력과 물자를 나르는 일을 하느라 일본 수군은 개전후 3주가 넘도록 이렇다할 활동을 못했고 부산과 거제도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병력 수송이 일단락 되니 조금식 서쪽으로 이동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제도 옥포의 해안을 장악하고 노략질을 일삼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 함대와 조우했다. 처음으로 조선 수군과 맞붙은 그들은 그들의 장기인 등선 백병전을 시도 했으나 조선 수군은 크고 높은 판옥선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격과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등선을 시도하던 일본 수군은 무기력하게 쓸려나가며 참패했다.
6.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대포'를 경시하고 다수의 철포를 운용하는 걸 선호했다. 해전도 배를 부딪힌뒤 적선에 올라 백병전을 하는 방식으로 했기에 대포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선 수군과 맞붙을때 까지는. 가볍고 날쎄게 만든 일본 함선들은 조선군의 대포에 종이배 마냥 찢겨 나가버렸고 그들이 퍼부은 총탄은 판옥선의 두꺼운 선체를 뚫지 못했다.
7. 조선 수군은 신형함인 귀선(a.k.a 거북선)을 출동시켜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군의 등선 시도 자체를 원천 봉쇄하도록 지붕을 덮어버린 거북선은 일본 수군 함대 한 가운데로 돌격해 들어와서 사방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거북선은 등선에 대한 우려가 없었기에 마음놓고 일본 수군 함선에 바싹 다가가선 각종 대포를 직사 사격으로 퍼부었고, 등선 시도를 위해 갑판에 모여있던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거북선 대포에서 날아온 철환과 조란환에 갈갈이 찢껴저 나갔다. 거북선 돌격으로 큰 성공을 거둔 조선 수군은 이후 200년간 거북선을 돌격선을 계속 사용했다.
@@hiroono1
8. 해전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일본 수군은 해전은 포기하고 해안 방어로 전술을 바꾸었다. 바다를 내어주어도 해안을 장악 못하면 그 효과가 제한되는 점을 노렸다. 해전에선 이길 자신이 없었지만 해안에서 지상전을 한다면 여전히 이길 자신이 있었던 일본군이였다.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들을 해안에 배치하고 참호를 파고 망루를 세워 조선 수군이 정박할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바다를 이용한 보급망을 포기한 선택이였다. 이로 인해 평양, 함경도, 서울 지역의 일본군은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보급이 불가능해졌고 이들은 점차 심각한 보급란을 격으며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듬해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일본군이 남해안 거점을 제외한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전면 퇴각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존심 때문에 한사코 이걸 외면, 부정하며 조선 수군의 승리의 의미를 축소 날조하고 있지만, 조선 수군의 승리가 일본 침략에 숨통을 끊어버렸다는 것이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그 임진장초나 고산공실록 기록을 보면 울돌목은 물살이 너무 쎄서 운행이 불가능해서 울돌목이 아닌 우수영 앞바다에 임하도 포구의 좁은길목에서 맞서 싸웠다고 하더군요
임하도는 그나마 울돌목 보다는 물살도 약하고 수심도 깊고 좁은 길목이라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왜선들은 병목현상이 일어나기 딱 좋은곳이기도 하구요
그점을 이용 해서 초반에는 대장선 단독으로 버텼다고 봅니다. 근데 나머지 장선들이 겁을 먹고 올 생각을 안하고 있자 슬슬 빡이 친 이순신은 초요기를 세워서 장선들을 불렀었고 이에 맨처음 온 장선이 안위의 함선이었던 겁니다.
그다음으로 온 장선이 김응함이었구요
안위는 그렇다 쳐도 김응함은 중군장으로 대장을 호위 해야할 입장에 있었는데 오지를 않았으니 당장에 쳐죽이고 싶었지만 상황이 급박해서 그냥 공을 세우게 해준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백병전을 벌인건 대장선이 아닌
안위의 함선이었고 이 안위의 함선이 왜선 3척에 둘러쌓였을때 대장선이 좌침 선회로 가까이 붙어 0거리 포격으로 안위를 구해낸거라고 합니다.
영화 대립군 비교 해주세요....
1. 명량은 지리적 이점을 사용해서 싸웠다고 하나, 울돌목은 우수영 바로 앞 바다이므로, 이순신 장군은 본진에서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주민들이 전투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죠)
2. 명량의 시작은 대장선이 돌격!하므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 한 척을 무려 2시간동안 일본군은 박살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동안 이순신 장군도 단 한척의 일본군도 박살내지 못합니다.) 즉 이순신 장군은 그냥 버티기에 돌입한 것입니다.
3. 형세가 대장선 위주로 일본군이 집중 공격을 하자, 위기를 느낀 이순신 장군이 초요기를 불러 판옥선 전부를 앞으로 불러 드립니다.
4. 이때 앞으로 돌진한 안위의 전선이 바로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순간을 이순신장군이 난중일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5. 안위의 전선을 지키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진을 깨고 포탄으로 일본군을 부셔서 안위를 구출합니다.
6. 물살의 흐름이 바뀌고 조선 수군은 전체 돌격을 하고 울돌목 밖까지 일본군을 몰아냅니다.
7. 전투가 끝난 후 울돌목 물살을 등에 지고 진을 유지할 수가 없기에 이순신 장군도 후퇴합니다.
물위에 떠 있기에 남자셋이 밀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더 모인다면 가능은 합니다. 그리고 어선들이 토잉하는 영상도 물위에 떠 있는 물체이기에 멀리서 멀리서(강조) 줄을 걸어 열심히 노를 젓는다면 가능은 합니다. 다만 영화이고 고증이 안맞다 하더라도 한반도를 지킨 영웅임에는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
영화에서 나온 불타는 거북선은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거북선이 아니라 건조중이었던 거북선이었어요!
영상 잘봤습니다 하지만 약간 의문이 있어요 나만 느끼는것이니 넘어갑니다 다만 이순신장군님이 말씀하셧다라고 해야 맞는것 같습니다 내뱉다 라는건 침을 뱉은것처럼 약간 어색한 문구입니다 옥에티 정도
3:31 거북선 오타남요
기적같았던 명량대첩..
초인 이순신 장군님 정말 존경합니다.
세계 사람들은 고질라 영화를 가상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즐기고 있지만 한국인은 이순신을 진짜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 바보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검증하는 발상이 없다.
다음번엔 안시성 영화하고 실존부탁드려요
🌹😍👍
유튜브로 보면 거북선이 세척 있고 원규는 2척을 쓴 거 아닌가요 그래가지고 거북선이 나온 거 아닌가요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을 비교해보면 누가 더 고증이 우수할까요?
명량하군여!
명량해전을 패배했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의 논리가 해전이 끝나고 조선수군이 고군산도까지 후퇴했다 이거더만. 그 논리대로라면 미드웨이 해전도 일본군의 승리겠네. 미드웨이 해전도 미 해군이 일 해군 항모를 격침시킨 후 전장에서 전함으로 구성된 일 해군 본함의 추격을 피해 후퇴했는데
큰 비밀 하는거 이거를
이때나 지금이나 똑같은게하나있죠 나라지킬려고 목숨바친사람들은 거지처럼살고 나라버리고 도망치고 팔았던인간들은 웃으면서 살고있습니다
명량 영화를 보면 판옥선이든지 거북선이든지 노는 제대로 못 젓는 데, 배의 속도가 엔진 달린 배보다 더 빨리 달리더라. 그 장면 이후로 영화 안 봄. 충무공 역할은 최민식보다는 김명민이 훨씬 나았다고 본다.
근데 명량 위치가 울돌목이 맞을수밖에없는데 그이유는 넓은바다에서 그 많은 대선을 맞아싸우면 100%필패할수밖에 없기에 울돌목일수밖에없죠 거기다 난중일기에 굳히 위치를적지않았다곤해도 울돌목이라는것도맞고
사실 명량때 백병전이 있엇을수있습니다 난중일기에도 안위의배에 왜군이 개미떼같이 둘러싸고 배위에 올라가고있다는 난중일기 구절이있습니다 즉 안위의배에서 백병전이 있었을껍니다
이게 허구가 아니라는게 진짜 판타지다.. 이순신 장군님 만세
이게 허구가 아니라는게 진짜 Fantasy(허구)다..
당신은 허구를 두 번씩이나 이야기 하셨습니다 ㅋㅋㅋㅋ
부디 의미를 알고 사용해주십셔
9:18 의문이 아니라 일본군은 활이 주류입니다 ㅋㅋ 비교자체가 불가하죠 조총은 갓들어온 무기인데다가 가격도 오지게 비쌌죠 활에비해
영상이 정말 좋아요. 정성이 엄청 느껴지는 영상이에요 ㅎㅎ. 거의 역사스페셜급 사료조사.
좋아요 누르고 가겠습니당
명량은 성과나 재미에 비해 고증은 많이 아쉽지요. 저도 영화보고 왜 이순신장군과 휘하 장수들이 두정갑을 입지 않고 찰갑을 입고 있지? 하고 의아했네요.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조선후기 의전용 갑옷인 두석린갑을 입고 있어 뜨악했었는데..... 대신 타 장수들은 제대로 두정갑을 입고 있죠.
불멸은 주인공인 이순신 갑옷으로 두정갑은 너무 화려하지않다고 고증에 맞지않는것을 알면서고 두석린을 썻다네요... 예를들어 징비록 이순신 갑옷을 보면 이해가능하실겁니다. 고증은 좋아도 뭔가 너무 없어보인다 해야하나?
@@Ronaldo7and10Messi-goat 알고도 그랬다면 더 문제죠. 구한말에 현대군복을 입고 나온거나 진배없느니깐요. 실제로 임진왜란 1592등의 충무공의두정갑을 보면 화려함은 못해도 오히려 간지는 더 폭발하는거 같더군요.
@@cube6808 멋지긴한데 너무 군관급 갑옷같아서.. 차라리 투구에 문양이나 털같은거 달아서 차별화 했으면 더 이쁠거같네요
@@Ronaldo7and10Messi-goat 불멸의 경우는 군관급은 첨주형 투구를 장수급은 간주형 투구로 차별화를 한거 같고.. 실제 장수들은 대부분 간주형투구를 착용했는데... 드라마와 달리 상당히 두정갑과 찰떡입니다. 당상관급이상은 말씀대로 무늬나 표기가 있어 위엄도 있어보이구요.
게다가 두정갑은 의전용인 두석린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정도로 방호력에서는 동아시아 갑옷 발달의 끝판왕이라고 할 정도로 월등한 성능을 보여줍니다. 유지나 보수도 이전 찰갑에 비해 훨씬 수훨했고요.
사실저도 명량이라는 영화보고
대실망 했습니다.
특히 울둘목에서 싸우는 전투기법이
완전 엉터리 내용때문이죠.
제가 아는 대충의 내용은 울돌목이
시간에따라 물살이 바뀌기때문에 그시간대에
이점을 이용해서 가장좁은 울돌목에
육지와 진도섬사이에 쇠사슬을 걸어서
왜적선들이 지나갈때 쇠사슬을감아 팽팽해진 쇠사슬로인해 왜선들이 쇠사슬에 걸려 아군쪽으로
진격못하고 선봉장을 뒤따르던 뒤왜선들이 강한 물살에 전진하던 배를 세우지못하고 뒤로 후퇴못하고 앞배들을 들이박고 정신없을때 꼼짝없이 갖힌 왜선들을
향해 아군의 배12척이 포쏘기좋게 옆으로
길게 서로붙어서 함포를 막 쏘아 적선들을 격침시켜서 이긴전술이라고 대충알고 있는데
영화를보니 완전 엉터리내용이었고 이영화를
외국이나 일본인들이 봤다는게 참 대실망이었죠.
지금도 진도대교 아래에는 그당시 쇠사슬을걸었던
고리가 있다고하기도 하고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말도 있는데 진도주민들은 알고
있더군요.이전술때문에 이순신장군을 높게
평가하는건데 진짜 외국사람들 이영화보고
영화 명량내용이 사실로 알까 걱정됩니다.
배13척으로 330척을 이기기 위해선 이전법을 이순신장군이 터득했고 진도가 가장 접합한
장소라고 결론내린거 같습니다.
철쇄설은 거의 가짜라고 나옵니다.
난중일기에는 나오지도 않고 나중에 김억추 관련 기록에 첨가된 부분임
그리고 12~13척이라고 하지만 실제
초반에 대장선 1대, 중반에 안위등 3대가 싸웁니다
많이 봐줘서 12대133이지 초중반까진 3대133임
@@jhoon_ho_kbm
글쎄요.
적은 숫자의 배로 그많은적선을
물리쳤다는것은 제가올린 글내용
되로가 아니면 대적이 힘들지 않을까요.
난중일기에 없다면 안적었을수도 있고요.
사실 진도 주민들은 구전으로 그렇게
알고 있답니다. 진도대교아래에 얼마전만해도
쇠사슬을걸었던 쇠고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진도사람들은 얘기합니다.
@@박재건-x5b 조선은 그 많은 철쇄를 그렇게 많이 생산할 능력도 없는데다가 만들었다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데요. 그 많은 철이 있었으면 총통을 더 만들지.
지난 영상이지만
영화와 사실을 비교하는 영상들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런면에서 좋은 컨텐츠 입니다.
*거북선은 없었으나, 판옥선의 현측을 보강하였다는 설은 있답니다.
*세키부네도 조금의 개량을 거쳤다고 하더군요.
*어민들의 활동은 뒤편의 위장병과 실전에 투입한 마하수 3부자나 동과나 전투 물자를 나르는 등의 향민들의 도움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주력 총통은 지자 총통과 현자 총통이라지요!
*신기전보다는 발화탄이라고 한다더군요.
*왜군의 활은 장궁인데 사정거리나 명중률이 낫다지요!
*조선의 장수나 병졸은 수륙군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임받는 곳이 근무지 입지요.
장군도 수륙을 번갈아 근무하셨지요.
군졸들도 수륙을 가리지 않았던 예가 장군이 쓴 임진장초 중 육군에서 수군을 빼가는 일을 못하도록 청하는 장계로 알 수 있답니다.
아니 목소리도 좋고 영상도 좋았는데 조회수가 왜 이래 ㅠ ㅠ
장난 식으로 말하는 것도 없고
역사는 동화가 아니다 역사를 미화하거나 조롱하고 풍자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비극은 언제고 반드시 반복된다
History is not a fairy tale. Tragedy always repeats at any time unless you stop glorifying, mocking, and satirizing history.
영화는 영화일뿐
9:14 초 조총아닌가요?
듣기로 이순신 장군의 철릭(군복) 영정을 보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복색을 따른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홍색의 철릭으로만 나오죠. 그런데 아직도 공식 그림에서 잘목된 복색을 하신 모습을 봐야 한다는 점이 상당히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랜드 마크가 되어 바꿀래야 바꿀 수도 없는 광화문 앞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참 아린 부분이 있네요.
아 구군복을 말씀하시는거군요
그게 아쉽긴 하네요
고증오류
예전 설민석 선생님 강의에서 당시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를때 대부분 육지전이었고 수상전은 한두차례로 극히 일부였으며 왜구들은 정규군이 아니었고 임진왜란은 16세기 최강의 수군과 16세기 최강의 육군이 붙은 전쟁이라 설명했는데 여기서 일본 수군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다르네요?
설민석 선생님이 그렇게 설명한것은 해전이라고 하면 함대함 결전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영상에도 그렇고 설민석 선생님이 명량 후기로 찍은 영상에도 나오다시피 당시 일본 수군은 대부분 노략질이 기본이여서 상대방 배를 부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다가가 등선육박전술 하는게 보통 이였습니다. 물론 해전이라고 해도 불가피한 경우엔 저런 전투도 벌어질 수 있긴하지만 원거리 무기인 포가 있는데 굳이 그 포를 다 맞아가면서 적의 배에 갖다 붙힐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말하셨다시피 당시 일본은 수전보다 육전에 능했고 배 또한 전투선보다는 수송선 느낌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본 수군은 수군이라고 보기 어렵다는거죠. 애초에 히데요시 계획만 봐도 수전은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근데 선조를 붙잡는다는 첫번째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이미 북상해있는 선두병력에게 보급을 해야하는데 육로는 답이 없어서 수로를 택했는데 그걸 이순신이 다 막은거죠. 이순신하고 싸우자니 함대함 싸움으로는 어차피 답이 없으니 등선육박전술로 싸우려하는데 조선 수군에 배 한번 못 붙여보고 다 깨져버리니깐 지들이 잘하는거 해보지도 못하고 진거구요.
@@홍토리-l4k 영상에서 일본 수군은 해적 출신이라 수군이 대단했다라고 표현하신것 같아서 댓을 달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등전이 아니고 등선육박전이요.. 역사를 뒤늦게 좋아해 역사 유투브 많이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정보, 좋은 영상 부탁드립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홍토리-l4k 구독하고 갈게요.
코로나 조심하시고 홍수피해 없길 바랄게요 제글읽고 답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이순신장군이 두정갑 안입었을거라 생각합니다 갓범스 님이면 습한 남해안에 배위에서 털갑옷을 입을수 있을까요
더욱이 지금같은 여름철에
부산동래성 발굴현장에 나오는 조선군 갑옷은 통풍이 용이한 찰갑입니다
속단할수 없습니다.
기록에보면....
몇일씩 갑옷을 입었더니 몸이 짓무르고 헐어서 쑥을 태워 연기를 쐬었다...
이런 글귀를 읽고 눈물이 울컥하더군요.
살라면 무엇이든
걸쳐야쥬ㅜ
전문가들이 그렇다는데 님이 무슨 근거로? 님이 전문가가 되어서 논문을 쓰세요 응원합니다 ㅎㅎ
전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들었던 부분이..
사격준비! 하면 활을 당기고 있는데.. 활을 한번이라도 쏴본적 있다면.. 활을 당기고있는게 저리힘든데.. 저건 불가능하죠 ㅠ
서양의 영화보면.. 사격준비!하면.. 활을 시위에 걸고 대기하는 장면이있는데.. 서양영화가 더 고증에 맞는것같아요 ㅠ
임진왜란 최고의 구국공신임진왜란의진실과사실임진왜란승리의주역은경장정걸장군민족의영웅호걸활동상황을보라선조대왕재조명해야역사왜곡너무심해국민이모르는한국사세계사에최고의명장경장정걸장군이시다선조대왕재조명해야선조대왕이순신장군도경장정걸장군눈부신활약으로조선을구하고백성을구하고전쟁을승전했다고조선신록호남신록에나오는세계적인영웅호걸이바로경장정걸장군전조선과백성이존경하고숭배했다정영공으로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