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신은 조선초 부터 꽤 까다롭게 선출하는데 정적 조차도 태종이 적임자라 생각할 정도이니 성리학지식은 인정 받았고 실제 명에 두차례가서 홍무제는 독대까진 아니었지만 그 이후에 정도전 소환영장을 발부해 줄 정도로 수완도 있고 , 영락제 독대라 싶을정도로 사담이 오가고 명나라 조정신료들한테 좋은 평을 받고 그후 명과 관계가 매우 좋아졌으니 외교적 수완도 확실한듯.
현실과 실제에 괴리가 있는 왕이 대표적으로 태종. 현대 한국에서는 폭군이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정도의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역사에서 아들 세종과 함께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고 볼 수 있음. / 또 그 반대가 정조. 실제로는 집권하고도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풀고자 끊임없이 무리한 정치를 많이 시행해서 신하들이나 백성들의 민심에 악영향을 많이 줌 .
여러 가지 미화 및 미사여구 들로 포장하지만, 한 마디로 띵가띵가 상왕으로서 놀기 위해서지. 예상 외로 4년만에 금방 갔지만. 역시나 사람이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면 건강이 팍 상하나봐. 게다가 상왕 태종은 30대 초반 미망인(과부 : 남편을 여윈 부인) 2명을 후궁으로 맞아들였지. 조조처럼 유부녀 취향이었나? 이미 왕이었던 시절에 엄청난 후궁들을 맞아들여 자손도 엄청나게 보았는데, 거기에다가 또 과부를? 이쯤되면 2년 먼저 떠난 원경왕후 민씨에 대한 미안함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모두 다 던져버렸다고 봐야 겠지요. 무슨 붐인가 봅니다. 왜 이렇게 자꾸 이방원에 대한 미화가 반복될까요... 한때나마 이방원을 영웅이라고 무조건 생각했던 저 자신을 반성하며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 무서운 신념..... 이방원에 의해서 죽었던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자신 이거나 자신의 가깝거나 먼 가족, 친척이라고 생각한다면...
난 개인적으로 세종대왕님도 타고난 천재이시고 위대하지만 ...세종보다 태종이 더 존경스러움....감정적인 사람들은 외척들을 몰살한 폭군으로 치부하지만 ....난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 행위라 생각한다....그리고 그런 태종이 있기에 외척의 압력없이 세종대왕님께서 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함.....
우승열패, 약육강식, 적을 포착하고 물어뜯고 용서하지 않는 잔인함, 뻔뻔함... 그야말로 이러한 측면에서는 한국 역사에서 단연 톱이지요.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처가를 멸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왕이 있는 이상 왕비가 있고, 왕비가 있는 이상 외척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다는 겁니다. 자신이 남에게 한 뒷통수 치는 짓을, 자신은 당하기 싫었던 것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태종이 권력자들 앞에서는 킬방원인데 일반백성들의 무례는 잘 걍 봐줌. 잘 모르는 아이들이 피휘도 안하고 왕 모욕해서 잡혀 왔는데 백성들에게 그런 처벌법을 들이대면 안된다고 무죄방면시켜주기도 하고 궁궐을 처음봐서 구경하러 들어왔다가 잡힌 백성도 그냥 타일러서 보내라하고. 신진사대부로 문벌귀족도 아닌 집안으로 고려시대 과거 급제한거 보면 행시급으로 공부도 잘해서 사리분별이 밝은 사람이었던 듯. 역시 사람은 공부를...
윗분말이 맞아요. 세종말년 10여년은 문종치세였다고 말해도 무방할정도라고 알고있습니다. 문제는 세자시절 무리를 너무했는지 임금에 자리에 올라 어린 단종이 입지를 굳히지기전에 죽은게 안타깝죠. 본인 나름대로 고명대신들에게 단종을 부탁했으나 세조가 그렇게 찬탈할줄 아마 꿈에도 생각못했을거에요
참 가볍게 떠든다! 애초에 태종은 적장자 승계의 후계를 세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세자인 양녕을 제외한 대군들의 공부를 등한시 합니다. 그러니까 세종이 학자적인 왕이라 하는 것은 그의 성향이지 그의 환경이 그만큼 괜찮았다는 뜻은 아니죠! 세종이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를 모은 구소수간을 수없이 읽은것도 아버지인 태종이 집의 책을 건강을 핑계로 싹 몰수해간 때문입니다. 왕이 되지 못할 왕자에게 공부는 필요 없다는 것이죠! 유교의 세상 주자학의 나라에서는 왕도 공부를 한 학인學人 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태종이 이렇게 막았기에 세종의 공부는 편죽될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합니다. 바로 경연이죠! 세종은 치세 초반에 정말이지 맹렬히 공부합니다. 그의 제위동안의 경연은 거의 이 초반에 이루어지죠! 게다가 어느정도 공부에 탄력이 붙자 이제는 집현전을 만들어 자신으 젊은신하를 맹렬하게 쫍니다. 태종이 급하게 양위한 까닭은 모두 이 세종을 위해서 입니다. 애초에 그리 공들였던 양녕이 싹수가 있어서 무사히 보위를 물려 받았다면 이 사달은 안 났을 테죠! 하지만 공부는 좋아하되 바로 자신의 견제책 때문에 왕자로서의 공부가 부족한 충녕을 위해 어느정도 공부시켜 보위에 올리기보다 보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조종하는 속성책을 쓴 겁니다. 그것도 이미 세종이 공부하면 될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세종치세 초기의 신하들은 거의 세종의 선생이라 봐도 무방 합니다. 하지만 워낙에 세종의 준비가 덜햇기에 세종치세 중반에 자연스레 많이 교체되어야 했지만 황희에서 알듯 참 많이 무리했지요! 조선이란 나라의 인재풀이 그리도 빈약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세종을 왕위에 올린 태종에게는 네가지 임무가 있었습니다. 1.우선 신하를 복종시키는것. 이것은 이미 양녕이라는 후계를 내세우면서 시작된 일입니다. 대표적으로 외척에 대한 숙청이죠. 이들은 바로 자신을 왕으로 올린 공신의 대표자 랄 수 있습니다. 양녕이 거세되고 충녕이 보위에 오른뒤에는 성격이 약간 바뀝니다. 태종이 조종하기는 햇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택현론'을 내세워 임금을 고르게 됩니다. 왕조라면 잇을 수 없는 괴씸한 행위죠. 비록 태종의 종용이엇다고는 하나 목숨걸고 말렷어야 할 태종의 신하들이 '전하의 어심御心이 충녕 대군 마마에게 있다.'라면서 충녕의 손을 번쩍 든것 입니다. 그리고 그중앙엔 세종의 장인 심온이 있지요! 잘라야 합니다. 2.명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제 아무리 한 나라의 와이라도 중국 명의 눈에는 한갓 지방을 가진 세가世家에 불과 합니다. 안그래도 태종 전대와 자기대에 명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자기 아들이 최소한 명으로부터 왕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는, 그래서 자기 목소리 내고 살 수 있는 왕이엇으면 했을 겁니다. 3.군부를 눌러 앉히는 것.자신은 군대의 힘으로 왕이된 사람입니다. 때문에 자기 아들대는 이상적인 문인 통치시대가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군부를 눌러 놔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마도 정벌이나 북진 개척으로 이는 실패 합니다. 4.세종이 자신의 신하를 갖도록 하는 것. 이는 1번과 겹쳐 잇습니다. 신하의 세대교체를 이루려면 옛 신하가 비운자리를 새 신하가 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때문에 태종은 세종을 끊임없이 갈궈 새 신하를 발굴하도록 보채지요! 태종은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과거 급제자 입니다. 누구보다 신하와 관리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죠. 스스로 관리 노릇도 했고요. 이 임무는 모두 세종의 치세 초반에 완결되어야 했습니다. 세종도 이를 알기에 일절 토달지 않았던 것이고요. 그리고 군부를 제외한 나머지것에서 태종은 성공 햇습니다. 바로 그때문에 세종이 친정親政하는 동안 숙청으로 인한 옥사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때문에 아랫대에서 피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괜히 세종을 찍어 내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태종만 좀 더 띄워주시죠.
이 사람이 지금 착각하고 있는것 1과 4 신하의 세대 그게 아니라 유능한 인재 위주로 신하를 세종에게 말했다. 그 대표적인게 황희. 그리고 조말생 둘 다 태종때 기용이 된 사람들이고 비록 논란이 있을지언정 태종 그 다음으로 세종까지 열심히 일하다 생을 마감한 사람인데 이 두사람은 새 신하가 아니라 이미 자기 밑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임 2. 태종 이방원과 명의 황제와는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간 사이가 좋았고 그로 인해 조선이 이득을 봤었다. 조선과 명나라가 사이가 별로 좋지않았던건 이성계때 이야기고 이방원의 손에 정도전이 제거되고 정조를 거쳐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을때는 명의 황제와 이방원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조공 부분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게되는 외교 성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명나라와의 친분은 태종의 업적입니다 3. 군부를 눌러놓는게 아니라 사병을 없애서 국가소속으로 귀속시켜 국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지 군부를 눌러놓는 그런게 아님 왕족과 신하들의 사병을 없애서 왕권강화를 노린거지 무슨 군부를 누름? 그리고 어느 왕이 준비가 다 되면 왕위를 물려받고 이런식으로 계승을 함? 찬탈하거나 왕이 승하하면 물려받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에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종이 왕위에 앉기에 공부가 부족해서 보위에 앉혀놓고 속성책 이딴게 아니라 워낙에 아들이 워낙 능력이 좋기도하고 그 뒤 좀 봐주고자 한거지. 속성책? 공부? 아님 애초에 그게 공부로 해서 될일인가? 인생은 실전이라고 정치도 실전임
@@바니-ti 1.황희는 태종 자신이 봅은 사람이지만 양녕을 두고 내쳐버린 신하가 아닌가? 그런데 세종이 황희와 마냥 좋게 어울리리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조말생 또한 태종이 골라쓴 사람이지만 결국 그도 제어하는데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문제는 태종은 이씨의 조선이길 원했고, 그러기위해서 군주가 군주로서 신하를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지요. 즉, 군주는 신하를 이용해 나라를 치세하지만 결국엔 왕 자신이 결정해야되고 그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그러자면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해도 정도전 같은 신하가 발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게 그의 생각! 그리고 역사는 그대로 흘러갔음을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세종 치세 전체가 결국 신하들과 군주 세종의 줄다리기로 이어 갔으니까! 2.태종이 즉위한 해는? 1400년.연왕주체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해는?1402년. 태종 초까지도 명과 조선은 알력관계 였습니다. 1401년 태종이 명의 황제로 부터 책봉고명을 받는데 그 내용의 일부가 이러하니 "아아! 너 조선(朝鮮) 권지 국사(權知國事) 이(李) 【휘(諱).】 는 부형(父兄)의 전위(傳位)를 이어받아, 그 땅을 진수(鎭守)하여 편안하게 하고, 와서 직공(職貢)을 다하여 예(禮)를 따르기를 정성스럽게 하고, 봉(封)함을 받지 못하여 빌고 청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지극히 하므로, 이에 너를 명하여 조선 국왕(朝鮮國王)을 삼고, 금인(金印)을 주어, 동쪽 땅의 군장(君長)이 되게 한다. " 즉위한지 1년만에 책봉을 받앗지만 그 안에 온갖 고생과 수모가 있었음을 유추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중에 양녕이 세자로서 사신으로 북경에 갈 무렵에나 풀리는 겁니다. 게다가 바로 세종조부터 명이 여진을 자극해 등거리 외교를 펼칩니다. 이이제이 이죠! 이러니 명을 소홀히 대하면 안될 밖에! 3.사병 혁파는 이미 태종자신이 이루어 놓은 상황 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개개인의 사병 신분에서 국가의 군대로 신분이 바뀌면서 장군들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입니다. 특히 북변의 잔군들은 군령권 뿐만 아니라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권까지 거뭐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대 한창 국경을 정비하던 대에는 어쩔수 없지요! 그럼 세종대도 그냥 놔두어야 할까? 태종은 자기 아들이 자기처럼 군부를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태종의 군부는 단순히 자신의 신하일 뿐만 아니라 자기와 긴밀한 친척이엇고 부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수하이자 군권을 진 이들을 숙청하고 다른이들로 군부를 채울때 충성심은 무엇보다 중요 햇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군부가 세종의 군부가 될순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 태종은 세종대신에 군권을 맡으므로서 그 준비를 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왕이 준비가 다 되면 왕위를 물려받고 이런식으로 계승을 함? 찬탈하거나 왕이 승하하면 물려받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에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종이 왕위에 앉기에 공부가 부족해서 보위에 앉혀놓고 속성책 이딴게 아니라 워낙에 아들이 워낙 능력이 좋기도하고 그 뒤 좀 봐주고자 한거지. 속성책? 공부? 아님 애초에 그게 공부로 해서 될일인가?// 댁이 얼마나 역사를 모르는지 알겟습니다. 왕가에 적통의 아들이 나오면 이미 나이 3~5세에 원자로 책봉되고, 10세 전후하여 세자가 됩니다. 이미 궁에는 아기때부터 보양청이 생겨나서 세자의 모든것을 관리하고 5세부터는 이미 시강원을 두어 공부를 시작 합니다. 양녕의 경우는 그 탄생시 자기 아버지가 왕이나 세자가 아닌 일개 대군이었는 지라 이러한 체계있는 교육을 거치질 못했고 이는 충녕도 마찬가지! 물론 아버지 이방원이 왕이되자 그도 어린 나이부터 스승을 두고 공부햇다지만 사실 그것이 아버지인 태종의 눈에 차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훗날 세종이 된 충녕군이 같은 스승 밑에서 두형과 함께 공부하며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결국 왕이 되는 공부가 집중된 대상은 충녕이 아닌 양녕입니다. 결국 양녕도 부족햇지만 충녕은 더 부족한 상태엿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자질이 훨씬 뛰어난 충녕인지라 아버지인 태종이 기대를 걸만한 상태였음이 다행이엇지요! 애초에 정상적인 후계 관계를 생각한다면 늦어도 세자 수업이 10년에서 20년이 쌓여야 왕이 되는 것입니다. 안그래도 개국초라 어수선한게 당연하지만 욕심많고 스스로가 과거에 급제해 문관 생활을 경험한 태종이라면 이러한 수순을 거치게 하고 싶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미 일이 글러져서 자신이 소망하년 양녕이 무너지고 충녕이 새로 선마당에 질질 끌기만 한다면 오히려 신하들의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주상(主上)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할 것이다. 또 나라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여 각각 가부(可否)를 진달(陳達)하게 하여 시행하게 하고, 나도 마땅히 가부(可否)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가(可)하다."-태종18년 8월// 댁은 아직 알아야 할게 많습니다.
당신이 같지 않은 글 쓰는 것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없었으면 이두를 쓰거나 어려운 한자를 써야 했고, 대마도정벌, 6진개척으로 국경 넓히고, 노비출신 장영실 등용해서 측우기, 앙부일귀 제작하게 하고, 관노와 그 남편에게 출산휴가를 제도적으로 마련한 애민군주로 조선 전기의 르네상스를 이끔. 모르면 무식하고 용감하다는데 내 나라 역사라도 제대로 좀 제대로 좀 알고 살자. 캐드할 시간에 역사책도 좀 봐라! 무식하고 덜 떨어진 것아!
태종은 대가 쎄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어서 폭군적 이미지가 있지만... 나름 머리가 좋고 학식이 있던 왕이었다.고려말 과거시험 문과급제 재원이었슴
관료들한텐 폭군급인데 백성은 또 엄청 사랑했음.
심지어 조선과거제보다 고려과거제가 빡셈 ㅋㅋㅋㅋ
명사신은 조선초 부터 꽤 까다롭게 선출하는데 정적 조차도 태종이 적임자라
생각할 정도이니 성리학지식은 인정 받았고
실제 명에 두차례가서 홍무제는 독대까진 아니었지만 그 이후에 정도전 소환영장을 발부해 줄 정도로 수완도 있고 , 영락제 독대라 싶을정도로 사담이 오가고
명나라 조정신료들한테 좋은 평을 받고
그후 명과 관계가 매우 좋아졌으니 외교적 수완도 확실한듯.
현실과 실제에 괴리가 있는 왕이 대표적으로 태종. 현대 한국에서는 폭군이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정도의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역사에서 아들 세종과 함께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고 볼 수 있음. / 또 그 반대가 정조. 실제로는 집권하고도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풀고자 끊임없이 무리한 정치를 많이 시행해서 신하들이나 백성들의 민심에 악영향을 많이 줌 .
'자신들이 아니면 안 된다' 것처럼 오만한 것도 없지요. 정몽주의 예언대로. 조선이 개국되었지만 정치판은 또다시 왕자의 난 등으로 피바람이 되었습니다.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힘이 있었다면, 그 힘으로 더욱 개혁을 위해 썼다면 어땠을까요?
태종은 진짜 알면알수록 천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 명성황후 집안이 나라말아먹은것처럼 외척세력들 처단해서 나라혼란야기하는거 방지한것부터 보통 천재가 아님
이거 세종 김상경으로 사진 있는 거 너무 좋다..ㅋㅋㅋㅋ 하도 햐서 그런 거일수도 있지만.. 하여간 좋다
저렇게 어리바리하던 세종이 나중에는 욕을 입에 달고 4군6진 개척하러간 김종서가 여진의 저항이 심해 퇴각하겠다고 하자 패배할거 같으면 거기서 뒤져라 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본인 아버지를 빼다 닮은 성격의 군자로...ㅋㅋㅋㅋㅋㅋㅋ
흑화한거지
틀딱 신하쉐키들 좋게 대해주니까 인간 물로 보네
ㅋzzzzㅋㅋㅋㅋ
와.... 태종이 진짜 대단한 왕이였구나
괜히 태종이라는 묘호가 아니죠 ㅎㅎ 가장 좋은 묘호
창건왕을 태조라고 하고 그다음 적통자를 태종이라고 함 근데 태종은 3번째 왕임 사실 정종은 조선후기 의해서 추존된거고 조선초기까지 묘호가 없었음
괜히 영락제가 태종이랑 맘맞은게 아님
급이 다른 인간임
1:41 이쑤신 장군? 쳐 웃고 있네 미쳤나 -_-;;;
태종이 진짜 똑똑하네요. 빈틈이 없네.
그러니 그 어려운 고려 말기의 과거시험을
최연소로 뚫어버리죠 ㅋㅋ
여러 가지 미화 및 미사여구 들로 포장하지만, 한 마디로 띵가띵가 상왕으로서 놀기 위해서지. 예상 외로 4년만에 금방 갔지만. 역시나 사람이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면 건강이 팍 상하나봐. 게다가 상왕 태종은 30대 초반 미망인(과부 : 남편을 여윈 부인) 2명을 후궁으로 맞아들였지. 조조처럼 유부녀 취향이었나?
이미 왕이었던 시절에 엄청난 후궁들을 맞아들여 자손도 엄청나게 보았는데, 거기에다가 또 과부를? 이쯤되면 2년 먼저 떠난 원경왕후 민씨에 대한 미안함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모두 다 던져버렸다고 봐야 겠지요.
무슨 붐인가 봅니다. 왜 이렇게 자꾸 이방원에 대한 미화가 반복될까요... 한때나마 이방원을 영웅이라고 무조건 생각했던 저 자신을 반성하며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 무서운 신념.....
이방원에 의해서 죽었던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자신 이거나 자신의 가깝거나 먼 가족, 친척이라고 생각한다면...
태종이 진짜 성군이네
난 개인적으로 세종대왕님도 타고난 천재이시고 위대하지만 ...세종보다 태종이 더 존경스러움....감정적인 사람들은 외척들을 몰살한 폭군으로 치부하지만 ....난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 행위라 생각한다....그리고 그런 태종이 있기에 외척의 압력없이 세종대왕님께서 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함.....
맞아요.
우승열패, 약육강식, 적을 포착하고 물어뜯고 용서하지 않는 잔인함, 뻔뻔함... 그야말로 이러한 측면에서는 한국 역사에서 단연 톱이지요.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처가를 멸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왕이 있는 이상 왕비가 있고, 왕비가 있는 이상 외척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다는 겁니다. 자신이 남에게 한 뒷통수 치는 짓을, 자신은 당하기 싫었던 것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킬방원이 졸라 빠르네
조선 역대 세자중에 최단기기록이네
태종의 이미지를 좀 바꿔야한다고 생각함.
책과는 다르다....대단한 깨달음입니다.
팩트 : 조선 27대 왕 중에 과거시험 급제한 우일한 왕 태종
형제의 난을 미연에 방지한거지 태조가 힘이떨어져서 태종이 왕이 됐듯이 태종이 힘이 떨어지면 양녕이나 충녕등이 딴마음 먹을수 있는거지 세종 왕권이 견고해지니 아무런 일이 안생긴거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구만 세종도 처음에는 어리버리를 탓으니....
단종이 계속 왕이였다면 연산군 선조 인조 이딴 왕들 볼일 없었을텐데
킬 숫자로보면 태종은
조선왕 랭킹5위에도 못들어가 .
바지사장 같이 보이는 고종이 숙청으로 사람은 무지 죽임.
태종이 권력자들 앞에서는 킬방원인데 일반백성들의 무례는 잘 걍 봐줌. 잘 모르는 아이들이 피휘도 안하고 왕 모욕해서 잡혀 왔는데 백성들에게 그런 처벌법을 들이대면 안된다고 무죄방면시켜주기도 하고 궁궐을 처음봐서 구경하러 들어왔다가 잡힌 백성도 그냥 타일러서 보내라하고. 신진사대부로 문벌귀족도 아닌 집안으로 고려시대 과거 급제한거 보면 행시급으로 공부도 잘해서 사리분별이 밝은 사람이었던 듯. 역시 사람은 공부를...
얘들아 기강이 뭐냐 신하도 왕 앞에서 싸우는게 정상 아니냐 이 바보들아
태종 이방원 진짜 성군이다.
태종 세종 문종 정종
역사가 안타깝다.
방과 형님하고 사냥하고 놀려고~
양녕만 직접 죽였다면정말 완벽한 인수인계였는데....
아무리 개차반같은 자식이라도 자기 피붙이인데 직접 못죽이죠
@@세상은넓고병신들은많 영조: 시무룩
@@esakaforever 영조는 사도세자가 미쳐버렸다고 판단해서 왕이 되면 연선군 마냥 미친짓할까바 일부로 손자 왕 시킬려고 아들 뒤주에 넣어서 희생시킨꼴 실제로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을 앓았을꺼라 판단되기도 하고 폭행, 성폭행, 살인등 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으니
@@esakaforever 커피 마시다 뿜었넹ㅋㅋㅋ
세종도 죽기전에 미리 문종에게 양위했다면ㅠㅠ
거의 양위했다고 봐도 무방할만큼 문종은 태자시절, 특히 세종 후반기에는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왕권도 굉장히 강한 왕이였구요.
@@축신황제마 태자가 아니라 세자임
윗분말이 맞아요. 세종말년 10여년은 문종치세였다고 말해도 무방할정도라고 알고있습니다. 문제는 세자시절 무리를 너무했는지 임금에 자리에 올라 어린 단종이 입지를 굳히지기전에 죽은게 안타깝죠. 본인 나름대로 고명대신들에게 단종을 부탁했으나 세조가 그렇게 찬탈할줄 아마 꿈에도 생각못했을거에요
세종초기 4년은 상왕으로써 태종이 다한거고 세종말기 10년은 세자로써 문종이 한거임
@@AAA01235그냥 제생각일 뿐이지만 말이 군사권만이지 실록에만 없을뿐 그 무서운 태종이 간섭을 안했을거 같지않아요
???:아빠 이거해도되요?
???:아니 하지마라
???:네...
다들 태종에 대해서 칭찬만 하는데요, 원경왕후 입장에서 보면 천추의 한이었을 겁니다.
여진족의입장에서보연 세종은 천추의한이엇죠
참 가볍게 떠든다!
애초에 태종은 적장자 승계의 후계를 세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세자인 양녕을 제외한 대군들의 공부를 등한시 합니다.
그러니까 세종이 학자적인 왕이라 하는 것은 그의 성향이지 그의 환경이 그만큼 괜찮았다는 뜻은 아니죠!
세종이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를 모은 구소수간을 수없이 읽은것도 아버지인 태종이 집의 책을 건강을 핑계로
싹 몰수해간 때문입니다. 왕이 되지 못할 왕자에게 공부는 필요 없다는 것이죠!
유교의 세상 주자학의 나라에서는 왕도 공부를 한 학인學人 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태종이 이렇게 막았기에 세종의 공부는 편죽될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합니다. 바로 경연이죠! 세종은 치세 초반에 정말이지 맹렬히 공부합니다. 그의 제위동안의 경연은 거의
이 초반에 이루어지죠! 게다가 어느정도 공부에 탄력이 붙자 이제는 집현전을 만들어 자신으 젊은신하를 맹렬하게 쫍니다.
태종이 급하게 양위한 까닭은 모두 이 세종을 위해서 입니다.
애초에 그리 공들였던 양녕이 싹수가 있어서 무사히 보위를 물려 받았다면 이 사달은 안 났을 테죠! 하지만 공부는 좋아하되
바로 자신의 견제책 때문에 왕자로서의 공부가 부족한 충녕을 위해 어느정도 공부시켜 보위에 올리기보다 보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조종하는 속성책을 쓴 겁니다.
그것도 이미 세종이 공부하면 될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세종치세 초기의 신하들은 거의 세종의 선생이라
봐도 무방 합니다. 하지만 워낙에 세종의 준비가 덜햇기에 세종치세 중반에 자연스레 많이 교체되어야 했지만 황희에서
알듯 참 많이 무리했지요! 조선이란 나라의 인재풀이 그리도 빈약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세종을 왕위에 올린 태종에게는 네가지 임무가 있었습니다.
1.우선 신하를 복종시키는것. 이것은 이미 양녕이라는 후계를 내세우면서 시작된 일입니다. 대표적으로 외척에 대한 숙청이죠.
이들은 바로 자신을 왕으로 올린 공신의 대표자 랄 수 있습니다. 양녕이 거세되고 충녕이 보위에 오른뒤에는 성격이 약간 바뀝니다.
태종이 조종하기는 햇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택현론'을 내세워 임금을 고르게 됩니다. 왕조라면 잇을 수 없는 괴씸한 행위죠. 비록 태종의 종용이엇다고는 하나 목숨걸고 말렷어야 할 태종의 신하들이 '전하의 어심御心이 충녕 대군 마마에게 있다.'라면서 충녕의 손을 번쩍 든것 입니다. 그리고 그중앙엔 세종의 장인 심온이 있지요! 잘라야 합니다.
2.명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제 아무리 한 나라의 와이라도 중국 명의 눈에는 한갓 지방을 가진 세가世家에 불과 합니다. 안그래도 태종 전대와 자기대에 명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자기 아들이 최소한 명으로부터 왕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는, 그래서 자기 목소리 내고 살 수 있는 왕이엇으면 했을 겁니다.
3.군부를 눌러 앉히는 것.자신은 군대의 힘으로 왕이된 사람입니다. 때문에 자기 아들대는 이상적인 문인 통치시대가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군부를 눌러 놔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마도 정벌이나 북진 개척으로 이는 실패 합니다.
4.세종이 자신의 신하를 갖도록 하는 것. 이는 1번과 겹쳐 잇습니다. 신하의 세대교체를 이루려면 옛 신하가 비운자리를 새 신하가 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때문에 태종은 세종을 끊임없이 갈궈 새 신하를 발굴하도록 보채지요! 태종은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과거 급제자 입니다. 누구보다 신하와 관리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죠. 스스로 관리 노릇도 했고요.
이 임무는 모두 세종의 치세 초반에 완결되어야 했습니다. 세종도 이를 알기에 일절 토달지 않았던 것이고요.
그리고 군부를 제외한 나머지것에서 태종은 성공 햇습니다. 바로 그때문에 세종이 친정親政하는 동안 숙청으로 인한
옥사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때문에 아랫대에서 피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괜히 세종을 찍어 내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태종만 좀 더 띄워주시죠.
이 사람이 지금 착각하고 있는것
1과 4
신하의 세대 그게 아니라 유능한 인재 위주로 신하를 세종에게 말했다. 그 대표적인게 황희. 그리고 조말생
둘 다 태종때 기용이 된 사람들이고 비록 논란이 있을지언정 태종 그 다음으로 세종까지 열심히 일하다 생을 마감한 사람인데 이 두사람은 새 신하가 아니라 이미 자기 밑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임
2. 태종 이방원과 명의 황제와는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간 사이가 좋았고 그로 인해 조선이 이득을 봤었다.
조선과 명나라가 사이가 별로 좋지않았던건 이성계때 이야기고 이방원의 손에 정도전이 제거되고 정조를 거쳐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을때는 명의 황제와 이방원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조공 부분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게되는 외교 성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명나라와의 친분은 태종의 업적입니다
3. 군부를 눌러놓는게 아니라 사병을 없애서 국가소속으로 귀속시켜 국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지 군부를 눌러놓는 그런게 아님
왕족과 신하들의 사병을 없애서 왕권강화를 노린거지 무슨 군부를 누름?
그리고 어느 왕이 준비가 다 되면 왕위를 물려받고 이런식으로 계승을 함? 찬탈하거나 왕이 승하하면 물려받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에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종이 왕위에 앉기에 공부가 부족해서 보위에 앉혀놓고 속성책 이딴게 아니라 워낙에 아들이 워낙 능력이 좋기도하고 그 뒤 좀 봐주고자 한거지. 속성책? 공부? 아님 애초에 그게 공부로 해서 될일인가?
인생은 실전이라고 정치도 실전임
@@바니-ti 1.황희는 태종 자신이 봅은 사람이지만 양녕을 두고 내쳐버린 신하가 아닌가? 그런데 세종이 황희와 마냥 좋게 어울리리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조말생 또한 태종이 골라쓴 사람이지만 결국 그도 제어하는데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문제는 태종은 이씨의 조선이길 원했고, 그러기위해서 군주가 군주로서 신하를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지요. 즉, 군주는 신하를 이용해 나라를 치세하지만 결국엔 왕 자신이 결정해야되고 그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그러자면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해도 정도전 같은 신하가 발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게 그의 생각! 그리고 역사는 그대로 흘러갔음을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세종 치세 전체가 결국 신하들과 군주 세종의 줄다리기로 이어 갔으니까!
2.태종이 즉위한 해는? 1400년.연왕주체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해는?1402년. 태종 초까지도 명과 조선은 알력관계 였습니다.
1401년 태종이 명의 황제로 부터 책봉고명을 받는데 그 내용의 일부가 이러하니
"아아! 너 조선(朝鮮) 권지 국사(權知國事) 이(李) 【휘(諱).】 는 부형(父兄)의 전위(傳位)를 이어받아, 그 땅을 진수(鎭守)하여 편안하게 하고, 와서 직공(職貢)을 다하여 예(禮)를 따르기를 정성스럽게 하고, 봉(封)함을 받지 못하여 빌고 청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지극히 하므로, 이에 너를 명하여 조선 국왕(朝鮮國王)을 삼고, 금인(金印)을 주어, 동쪽 땅의 군장(君長)이 되게 한다. " 즉위한지 1년만에 책봉을 받앗지만 그 안에 온갖 고생과 수모가 있었음을 유추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중에 양녕이 세자로서 사신으로 북경에 갈 무렵에나 풀리는 겁니다. 게다가 바로 세종조부터 명이 여진을 자극해 등거리 외교를 펼칩니다. 이이제이 이죠!
이러니 명을 소홀히 대하면 안될 밖에!
3.사병 혁파는 이미 태종자신이 이루어 놓은 상황 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개개인의 사병 신분에서 국가의 군대로 신분이 바뀌면서 장군들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입니다. 특히 북변의 잔군들은 군령권 뿐만 아니라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권까지 거뭐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대 한창 국경을 정비하던 대에는 어쩔수 없지요! 그럼 세종대도 그냥 놔두어야 할까? 태종은 자기 아들이 자기처럼 군부를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태종의 군부는 단순히 자신의 신하일 뿐만 아니라 자기와 긴밀한 친척이엇고 부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수하이자 군권을 진 이들을 숙청하고 다른이들로 군부를 채울때 충성심은 무엇보다 중요 햇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군부가 세종의 군부가 될순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 태종은 세종대신에 군권을 맡으므로서 그 준비를 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왕이 준비가 다 되면 왕위를 물려받고 이런식으로 계승을 함? 찬탈하거나 왕이 승하하면 물려받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에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종이 왕위에 앉기에 공부가 부족해서 보위에 앉혀놓고 속성책 이딴게 아니라 워낙에 아들이 워낙 능력이 좋기도하고 그 뒤 좀 봐주고자 한거지. 속성책? 공부? 아님 애초에 그게 공부로 해서 될일인가?// 댁이 얼마나 역사를 모르는지 알겟습니다. 왕가에 적통의 아들이 나오면 이미 나이 3~5세에 원자로 책봉되고, 10세 전후하여 세자가 됩니다.
이미 궁에는 아기때부터 보양청이 생겨나서 세자의 모든것을 관리하고 5세부터는 이미 시강원을 두어 공부를 시작 합니다.
양녕의 경우는 그 탄생시 자기 아버지가 왕이나 세자가 아닌 일개 대군이었는 지라 이러한 체계있는 교육을 거치질 못했고 이는 충녕도 마찬가지! 물론 아버지 이방원이 왕이되자 그도 어린 나이부터 스승을 두고 공부햇다지만 사실 그것이 아버지인 태종의 눈에 차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훗날 세종이 된 충녕군이 같은 스승 밑에서 두형과 함께 공부하며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결국 왕이 되는 공부가 집중된 대상은 충녕이 아닌 양녕입니다.
결국 양녕도 부족햇지만 충녕은 더 부족한 상태엿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자질이 훨씬 뛰어난 충녕인지라 아버지인 태종이 기대를 걸만한 상태였음이 다행이엇지요!
애초에 정상적인 후계 관계를 생각한다면 늦어도 세자 수업이 10년에서 20년이 쌓여야 왕이 되는 것입니다. 안그래도 개국초라 어수선한게 당연하지만 욕심많고 스스로가 과거에 급제해 문관 생활을 경험한 태종이라면 이러한 수순을 거치게 하고 싶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미 일이 글러져서 자신이 소망하년 양녕이 무너지고 충녕이 새로 선마당에 질질 끌기만 한다면 오히려 신하들의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주상(主上)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할 것이다. 또 나라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여 각각 가부(可否)를 진달(陳達)하게 하여 시행하게 하고, 나도 마땅히 가부(可否)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가(可)하다."-태종18년 8월//
댁은 아직 알아야 할게 많습니다.
주절주절 말만 길지 실속은 없는 헛소리. 그렇게 잘나셨으면 저기 나가시지 왜 여기서?
@@장세영-p8w //잘 나지 않았어도 주둥이와 손가락은 달렸거든? 내 주둥이로 내가 떠든다는데 네가 뭐길래 참견하지????
한자는 구석구석 왜 박아 넣는거야 ㅋㅋㅋ 아 틀딲에 역사 빠돌이 역겨워 디지겠네
생산성 없는 인간ㅋㅋㅋㅋ
맞는 말 하는거 같아도 거부감들어 ㅌㅋㅋㅋㅋ
세종은 한게 별로 없음,, 태종이 전부 해놓은 거,,, 태종이 너무 뛰어남,, 불세출의 왕 태 종이방원
하다하다 세종이 한게 없다는 말이 나올줄이야? 한글 하나만 봐도 이런말은 못하지!
당신이 같지 않은 글 쓰는 것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없었으면 이두를 쓰거나 어려운 한자를 써야 했고, 대마도정벌, 6진개척으로 국경 넓히고, 노비출신 장영실 등용해서 측우기, 앙부일귀 제작하게 하고, 관노와 그 남편에게 출산휴가를 제도적으로 마련한 애민군주로 조선 전기의 르네상스를 이끔. 모르면 무식하고 용감하다는데 내 나라 역사라도 제대로 좀 제대로 좀 알고 살자. 캐드할 시간에 역사책도 좀 봐라! 무식하고 덜 떨어진 것아!
@@nzgoforit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든게아니라고 학계가인정햤습니다 측우기는 새종의 아들 즉 문종이 만들었어요
공무원 한국사만 봐도 단일왕업적중에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게 세종인데 한게 없다니….
태종이 기반을 닦아놓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세종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세종이 위대한 왕이 아닌건 아님.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