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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문화를 바꿔 놓은 마리 앙투아네트_홍하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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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5 май 2020
  • 유럽의 문화를 바꿔 놓은 마리 앙투아네트 & 루이 16세

Комментарии • 18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23:48 나폴레옹 1세가 백일천하를 끝으로 최종적으로 실각한것이 1815년이고 이후에는 왕정복고와 공화정을 거쳐서 1852년에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등극하여 전제정을 합니다. 왕정복고로 볼수는 없습니다. 부르봉 왕가로 돌아간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23:06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같은날에 처형된것이 아닙니다. 부부는 약 9개월 차이를 두고 참수당합니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같은해 10월 16일날 참수를 당합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23:13 나폴레옹 때문에 프랑스의 왕정이 종식된것이 아닙니다. 군주제가 처음으로 폐지된것은 1792년 9월 22일입니다. 이때 입법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합니다. 나폴레옹이 1799년 쿠데타를 하기 7년 전에 군주제는 폐지됩니다. 프랑스 혁명전쟁중이던 1792년 8월 10일날 왕궁이 습격당하며 실질적으로 왕권이 정지당했습니다. 시민들이 왕궁을 습격한 이유는 왕실이 적국과 내통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15:49 루이 16세는 거의 바람을 피우지 않은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착하고 지나칠 정도로 소심했던게 바람을 안피운 이유로 보이네요. 사냥과 철공,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고 여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식기에 이상이 있어서 결혼후에도 제대로된 부부관계를 7년동안이나 가지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네요. 외과적 수술을 받았지요.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아마도 귀두와 포피(외피)가 성성숙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지 않는 현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았을것으로 보이네요. 바람을 너무 많이 피운 왕은 루이 14세와 루이 15세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티 트리아농에 자주 머물렀던것은 도피성입니다. 결혼후에도 아이를 낳지 못해서 욕을 많이 먹었고 파리 귀족들과도 사이가 않좋았고 목걸이 사건으로 구설수에도 휘말렸습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시중에는 악의성 루머들이 많이 떠돌아 다녀 스트레스가 심했읍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랜기간 앙숙이었기에 국민적 감정의 골이 깊었네요. 그런 국민들의 상처 치유를 방기한채 왕실간에 급하게 화해하며 정략결혼을 추진한 부작용이 컸습니다. 적대국에서 온 왕비에 대해 국민들이 대놓고 씹었으니까요. 그래서 루이 16세가 왕비에게 프티 트리아농을 선물한것이고요.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루이 16세가 바람을 안피워서 왕비가 더 힘들었지요. 바람 좀 피워서 '메트레상티트르' 라고 불리우는 공식정부도 두고 했어야 했습니다. '메트레상티트르'는 국왕의 애첩으로 궁궐내 일정한 지위와 역활이 있었습니다. 자선행사, 사교파티 주최, 외교사절 접대, 로비창구등...그리고 '욕받이' 역활도 했습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그런데 '메트레상티트르'가 없다보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역활을 하느라 힘들었고 욕받이도 하느라 힘들어서 프티 트리아농으로 자주 도피를 한겁니다. 왕이 바람을 안피우면 왕답지 않다고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왕에게 먼가 문제가 있다고 보았지요. 왕의 건강에 이상이 있거나 정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8:25 사이펀하고 분수에서 물이 솟구치는것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사이펀이란 업어놓은 'U'자 형태의 관로를 이용하여 수면보다 높은 제방 너머로 물을 이동하게 만드는 장치나 그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용되는것은 수압이 아니라 기압차를 이용해서 하는것입니다. 수압하고는 무관합니다. 한차례 관로에 물이 통과하게 되면 관로안에 기압은 제로, 즉 진공상태가 됩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그래서 저수지의 수면을 짓누르고 있는 대기압보다 상대적으로 U자 관로안에 기압이 낮아지기 때문에 그 기압차로 인해 물이 꺼꾸로 밀려 올라가는 것을 사이펀이라고 합니다. 화장실 변기에도 이 사이펀 현상을 이용해서 대변등을 정화조로 이동하도록 유도하고 있고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 사이펀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사이펀 방식의 커피포트도 있고 유명한 '계양배'도 사이펀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술잔입니다. 그리고 사이펀을 이용했다고 해서 수압이 변화하는것은 아닙니다. 사이펀은 수압 변화에는 무관하고 단지 물등 유체를 이동하는데만 관여를 합니다. 수압 변화를 발생시키고 이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드는 것은 베르누이 원리, 벤추리 효과, 노즐효과등을 이용한것 입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이런 원리를 유체역학에서 과학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이펀은 도로위를 건너가도로 만든 육교와 같습니다. 역사이펀은 도로 밑으로 이동하도록 만든 지하통로와 같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관로상 장해물을 만났을대 장해물의 상부로 넘어가도록 할때는 사이펀 기술을 사용하고 장해물의 하부로 물을 이동시키고 싶을때는 역사이펀 기술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사이펀이나 역-사이펀이나 수압변화와는 무관합니다. 기압변화를 이용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물의 이동하고만 관여를 합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1:23 마리 앙투아네트는 셋째딸이 아닙니다. 11번째 딸이자 총 16명의 자녀중에 15번째 자녀입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총 16번 출산을 했읍니다. 그중에 몇명은 영유아기때 요절했읍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대표적인 다산의 여왕입니다. 11명의 딸중에서만볼때 11번째 막내딸입니다. 1770년에 프랑스로 시집올때 기준으로 5명의 언니가 생존해 있었습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5:29 루이 15세는 루이 16세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 입니다. 루이 16세의 아버지인 '루이 페르디앙'은 1765년에 사망합니다. 루이 16세의 모친도 1767년에 사망했읍니다. 조손간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준겁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5:48 5:48 퐁파두르 부인은 귀족부인 출신이 아닙니다. 평민출신입니다. 아버지가 평민(부르조아)이었고 본 남편도 평민이었읍니다. 루이 15세가 퐁파두르에게 귀족작위를 내려준겁니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메트레상티트르'라 불리우는 공식정부였습니다. 조선시대로 보면 중전 다음 서열의 후궁(빈)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궁궐내 거의 공식적인 위치가 있어 자선사업, 사교계 파티 주관, 외교사절 접대등의 업무가 주어지는 자리이고 로비창구로 비선실세로 등극하기 쉬운 자리였습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8:42 사이펀은 획기적인 기술이 아닙니다. 지금으로 부터 약 4천년전에 이집트에서도 이용했을 정도로 오래된 기술입니다. 로마시대에도 수도교를 이용하여 물을 많이 도시 로마로 끌어왔는데 이때도 사이펀과 역-사이편 기술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전기모터없이 분수를 만든것은 별로 특별할게 없는 기술입니다. 결코 획기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랍에서는 많이 사용해왔던 기술입니다.

    • @user-iu6pg3ps7p
      @user-iu6pg3ps7p 3 года назад

      르네상스 이전부터 아랍의 과학기술은 이미 유럽을 앞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확인이 가능합니다. 스페인을 이슬람이 지배하던 15세기 이전 시대에 이미 궁전을 만들때 분수를 설치했습니다.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에 보면 분수가 이미 많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코 획기적인 기술이 아닙니다. 토목공사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수량을 많이 확보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안했으면 않했지 기술적으로 부족해서 분수를 안만든것은 아닙니다. 않한것이지 몰라서 못한게 아닙니다.